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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2006년 교과서 |
2007년 교과서 |
고조선건국 |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 |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
청동기시대 |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주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기원전 13세기경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 |
신석기시대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문화가 앞선 빗살무늬토기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들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 |
아직 학계에서는 이론이 있지만 한국 청동기시대의 상한은 종래 기원전 10세기에서 20~15세기까지 올라 갈 수 있다. |
한국 청동기시대의 상한은 종래 기원전 10세기에서 20~15세기까지 올라 갈 수 있다. |
비파형동검
거친 무늬거울
반달돌칼
북방식 고인돌
남방식 고인돌
개석식 고인돌
묘역식고인돌(墓域式支石墓) 경남 산청군 매촌리, 경남 진주시 초전동
바퀴날도끼(달도끼, 환상석부, 環狀石斧)
자름면을 보면 중심부 양면이 모두 볼록한 것, 한쪽 면만 볼록하고 반대면은 판판한 것, 가운데 구멍 둘레에만 볼록 튀어 나오게 만든 것 등이 있다. 가운데 구멍을 뚫은 것은 나무자루 같은 것에 꿸 수 있도록 한 것인데 크기는 지름 10~15cm의 것이 대부분으로, 도끼로 쓰였다기보다는 지휘봉 같은 권위의 상징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나뭇가지에 끼워 불씨를 일으킬 때 회전력을 크게 하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톱니날도끼[多頭石斧:별도끼]와 함께 청동기시대에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의 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BC 2000년대 후반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뤼다[旅大] 쌍타자 유적을 비롯해 용천 신암리, 송림 석탄리, 강계 공귀리, 시중 심귀리 유적 등 북쪽 지방의 BC 1000년대 유적에서 주로 보이고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물이다.
민무늬토기
미송리식토기
붉은간토기(홍도(紅陶),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
생활용: 무산 범의 구석 집자리 가장 아래 문화층(신석기시대 최말기)(굽접시, 구멍무늬토기들과 함께 출토),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유적
무덤의 껴묻거리용 : 고인돌 안에서 민무늬토기 및 간석기들과 함께 출토되며 주로 주머니 모양의 짧은 목단지가 대표적인 모습이나 최근에는 춘천 중도의 고인돌에서 보이듯 납작밑의 대접 모양도 출토
가지무늬토기
Ⅱ. 청동기인의 생활
Ⅲ. 성읍국가의 성립
제2절 고조선(古朝鮮)의 성립과 발전
Ⅰ. 고조선사회의 성장
1. 단군신화 (檀君神話)
<위서(魏書)에 실린 단군신화>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하늘아래에 내려가 다스리기를 원해 환인은 천부인(天符印-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3개를 주며 하늘아래에 내려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함)하라고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신시(神市)를 열었다.
그곳에는 범과 곰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사람이 되기를 원해 三. 七기도(21일동안)를하니 환웅은 곰과 범에게 100일동안 굴속에서 햇빛을 보지말고 마늘과 쑥만 먹고 지내라 했는데 성질이 급한 범은 뛰쳐나오고 무사히 견딘 곰은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환웅과 결혼한 웅녀(熊女)였다.
환웅과 웅녀사이에 태어난 단군(檀君)은 즉위하여 평양성(왕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조선이라 하고 1500년간 다스리다가 기자(箕子)가 와서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아사달(阿斯達)로 돌아가서 숨어 살다가 산신(山神)이 되어 1980세가 되었다.
<2000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아사달에 도읍하여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고(高-중국의 요나라)때 일이였다>
가. 단국신화(檀君神話)의 고조선(古朝鮮) 건국 기록
⑴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 충렬왕 7년 1281년 일연(一然, 普覺國師).불교사관, 신라중심. 자율형식. 王曆, 紀異, 興法, 塔과 佛像, 義解, 神呪, 感通, 避隱, 孝道와 善行
'단군이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리다 기자가 조선으로 오자 장당경으로 옮긴 뒤 1908세에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됐다'
⑵ 제왕운기(帝王韻紀) : 고려 충렬왕 13년 1287년 이승휴(李承休). 단군강조. 발해 서술. 서사시 형태로 상권은 중국역사,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
⑶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 : 조선 단종 2년 1454년. 세종장헌대왕실록의 지리지. 도에 관한 총체적 개괄을 앞에 싣고 계수관(界首官) 별로 소속 군현의 지지를 기록했다. 각 군현의 지지는 관원(官員), 연혁(沿革), 진산(鎭山), 별호(別號), 속현(屬縣), 향(鄕)·소(所)·부곡(部曲), 명산(名山), 대천(大川), 사경(四境), 호구(戶口), 군정(軍丁), 성씨(姓氏), 인물(人物), 궐토비척(厥土肥瘠), 풍기(風氣), 간전(墾田), 토의(土宜), 토공(土貢), 약재(藥材), 자기소(磁器所), 도기소(陶器所), 성곽(城郭), 역(驛), 대제(大堤), 소령군현(所領郡縣) 등의 항목으로 구성.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을 쌓고 태자 부루를 파견해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에 참석시켰다.
⑷ 응제시주(應製詩駐) : 세조 8년 1462년 권람((權擥)이 조부 . 권근(權近)의 응제시 24수와 명(明) 영종 영통제(英宗 正統帝)가 권근에게 내린 응제시 3수에 주석을 붙인 책
'요 원년 단군이 단목 아래 내려와 조선의 왕이 되었고 후손들이 천년 이상 왕위를 이어갔다'
▴응제(應製) 1. 임금의 명에 따라 임시로 치르던 과거. 2. 임금의 명에 따라 시문을 짓던 일
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성종 7년 1476년에 신숙주, 노사신등이 ·삼국사기에 빠진 고조선사(단군)부터 삼국시대까지를 편년체로 정리한 사서로 ·성리학적 사관으로 불교사는 배제
단군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와 조선을 개국했으며 기자 도래 전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됐다다.
⑹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성종 12년 1481년 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ㆍ서거정(徐居正) 등이 엮은 지리서. 누정(樓亭)・학교(學校)・불우(佛宇)・사묘(祠廟)・고분(古墳)・명환(名宦)・인물(人物)・제영(題詠) 등 사항을 늘리고 시문들을 첨가 → 신동국여지승람 중종 26년 1531년 중종의 명에 의해 이행(李荇)・윤은보(尹殷輔)・신공제(申公濟) 등이 펴낸 관찬 지리서
⑺ 동국통감(東國通鑑) : 성종 16년 1485년. 서거정(徐居正) 등. 단군조선에서 고려말까지 편년체로 된 우리나라 최초의 통사(본기 아닌 외기에 기록).
단군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와 조선을 개국했으며 기자 도래 전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됐다
⑻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광해군 7년 1615년에 한백겸(韓百謙)이 지은 역사지리서. ·북쪽에 고조선, 남쪽에 삼한(한국)이 위치했음을 밝혀냄·고구려의 발상지가 만주지방임을 고증. 민족의 근원을 단군으로 보는 데 의문을 제기
⑼ 동사(東事)¹
현종 8년 1667 허목(許穆. 남인)의 저서. 고조선을 원시시대가 아닌 진일보한 문명을 지닌 국가체로 강조하고 단군부터 삼국시대까지 편찬. 북벌운동과 붕당정치를 비판. ·단군, 기자, 신라를 중국의 삼대(三代)에 비유
⑽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현종 13년 1672년 홍여하((洪汝河, 남인)의 저서, 왕권강화, 붕당정치의 폐지를 주장. ·휘찬여사와 함께 영남 남인들이 가장 추앙한 사서. 민족의 근원을 단군으로 보는 데 의문을 제기
⑾ 동사강목(東史綱目)
정조 2년 1778년 안정복(安鼎福)이 단군조선에서 고려말까지를 처절한 고증에 의한 통사로 서술
⑿ 동사(東史)²
순조 3년 1803년 이종휘((李種徽 소론)의 저서. 고조선을 원시시대가 아닌 진일보한 문명을 지닌 국가체로 강조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강조하면서 만주 수복을 주장. ·부여와 발해를 우리 영토와 역사로 인식
⒀ 아시조선(兒時朝鮮) : 1927년 최남선(崔南善)이 조선정신의 표현으로서 단군신화를 연구하여 동북아시아문화권의 중심으로서의 한국사의 줄기 수립
⒁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 신채호가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하였고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출판한 것으로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담고 있다.
나. 단군신화의 의미
⑴ 천강신화(天降神話) : 선민사상(選民思想), 우월성 과시
⑵ 농업사회와 국가(형벌)의 성립 :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 구름→번개, 벼락)
⑶ 토착부족(곰)과 이주부족(환웅)의 결합
⑷ 단군왕검(檀君王儉) : 제정일치(祭政一致, theocracy) 단군(檀君, 祭司長), 왕검(王儉, 政治的 首長)
⑸ 삼성사(三聖祠)
환인(桓因) : 태양신(太陽神, sun god)
환웅(桓雄) : 천왕(天王)
환검(桓儉) : 천군제사장(天君祭司長)
2. 고조선의 발전
가. 고조선의 성립
⑴ 아사달(阿斯達)<왕검성(王儉城,)>을 중심으로 발달
⑵ 청동기를 배경으로 성장
나. 고조선의 성장
⑴ BC 3세기경 부왕, 준왕 등이 왕위 세습
⑵ 상, 대부, 장군과 같은 관직이 분화
⑶ 전국7웅 연(燕)과 대적
⑷ 연나라 진개(秦開) 침입하여 요동군 설치 및 철기 유입(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⑸ 한반도 남부에 고조선 유이민 유입되어 세형동검(細形銅劍) 등장
역사서술방법
1. 기전체(紀傳體)
本紀(황제 중심 연대기)와 列傳(개인 전기)을 중심으로 表(연표), 志(또는 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의 각 주제), 世家(제후 중심 연대기)등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체제
사마천의 史記. 반고의 漢書. 김부식 三國史記, 정인지 高麗史, 한치윤 海東繹史
2. 편년체(編年體) 수많은 사건과 사실을 발생한 연대순으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공자의 春秋. 중국의 자치통감, 자치통감강목, 왕조실록, 김종서 등의 高麗史節要
3.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
한 사건이나 주제를 중심으로 그 발생, 경과, 결과 등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방식. 남송 때 원추의 통감기사본말과 조선 후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4. 강목체
큰 줄기(강)와 작은 내용(목)으로 나누어 정통성을 강조하는 방식.
주희의 자치통감강목. 영조 35년 1759년에 편찬한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Ⅱ. 철기의 사용
세형동검
잔무늬거울 전남 화순 대곡리 출토 잔무늬거울(국보 제143호)
중국 랴오닝성 능원시(凌源市) 삼관전자(三官甸子) 출토 청동도끼를 만들던 석제 용범. 길이 11.4㎝, 폭 6.1㎝, 두께 6㎝. 전국시대.
충남 부여 송국리출토 도끼 거푸집
덧띠토기(粘土帶土器)
토기의 입술 바깥에 단면원형·타원형·삼각형 등의 덧띠(粘土帶)를 말아붙여 입술부분을 보강한 토기로서 점토대토기라고도 한다. 덧띠를 따로 만들어 붙였기 때문에 덧띠부분만 떨어지는 경우도 많으며 덧띠 부근에는 손으로 누른 자국이 자주 관찰된다. 그릇 모양은 대전 괴정동에서 출토된 것처럼 밑바닥이 좁고 위로 퍼져올라가거나, 서울 응봉, 청원 비하리에서 출토된 것에서 보듯이 납작밑에 원통형의 몸체를 이루는데 모두 깊은 바리(深鉢)형에 포함된다. 한강 유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대구 연암산, 부산 조도, 삼천포 늑도, 전라남도 해남 군곡리, 춘천 칠전동, 대전시 괴정동 등지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며 경기 이북지역에서 출토된 예는 없다. 일본 규슈[九州]의 판부(板付)유적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그당시 주민들의 이동과 문화교류 상황을 알 수 있다. 경기지방의 덧띠토기는 BC 5세기에 나타나 BC 4세기경에 성행했다고 여겨지며, 단면원형의 것으로부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면삼각형의 덧띠토기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최근에 발굴된 경기도 일산의 새도시 개발지역에서는 BC 8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는 덧띠토기가 나온 바 있다. 남부지방의 경우 단면원형의 덧띠토기는 BC 3세기경에, 단면삼각형의 덧띠토기는 BC 2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에는 그릇의 최대 지름이 몸통 아래쪽에서부터 점차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어 화분 모양과 비슷해지며 바탕흙은 종래의 민무늬토기보다 훨씬 단단해졌다. 덧띠토기는 쇠뿔모양손잡이토기·굽다리접시·검은간토기 등과 함께 나오는 예가 많다.
덧띠토기(粘土帶土器)
아가리의 바깥쪽에 둥근 점토띠를 두툼하게 붙인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민무늬토기이다. 덧띠의 단면은 초기에는 원형이다가 점차 삼각형으로 변하게 된다. 대전 괴정동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되었다.
검은 간토기(黑陶長頸壺)
표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을 바르고 문질러서 광택을 낸 토기이다. 검은 목 단지는 요령지방에 그 기원을 두며 덧띠토기(粘土帶土器)와 함께 중부 이남지역의 대표적인 초기철기시대 토기이다. 대전 괴정동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되었다.
회색토기(灰色土器, 瓦質土器)
선사 시대나 삼국 시대에 환원염(還元焰)으로 소성(燒成)되어 잿빛 계통의 색을 띤 토기
Ⅲ. 위만조선
1. 위만의 집권
가. 위만이 1000여명을 이끌고 망명하여 국경수비 임무를 맡다가 준왕을 내좆고 왕이 되었다(BC 194~180)
나. 위만조선이 진번, 임둔 등 복속
2. 한나라와의 충동
가. 위만조선이 남방의 진국과 한나라의 중계무역 이익 독점
나. 한무제의 침공으로 1년만에 왕검성 함락(BC 108) : 우거왕(右渠王) 살해. 성기(成己) 저항 실패
한나라 칩입 |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 5만, 좌장군 순체(荀彘) 왕검성 공격 |
공손수 전권부여 |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 누선장군 체포, 군대병합하여 좌장군과 조석 공격 |
우거(右渠王) 항복 거부 |
조선상 노인(路人), 상 한도(韓陶), 이계 상 참(參), 장군 왕협(王협) 항복 권유, 우거 거부, 노인(路人. 도중 사망), 한도(韓陶), 왕협 도주 항복 |
우거왕 살해 |
이계 상 참(參)이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항복했으니 왕검성에서 대신 성기(成己) 항거 |
성기 살해와 멸망 |
좌장군 순체가 우거 아들 장(長)과 노인 아들 최(最)을 시켜 성기 모살 교사. 조선 항복.한사군 설치 |
Ⅳ. 한의 군현
1. 한사군 :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BC 108년) 현도군(BC 107년)
2. 진번군, 임둔군을 폐하고 낙랑군(진번 15현중 7현), 현도군(+임둔군) 관할에 둠(BC 82년)
3. 현도군 만주 흥경 방면으로 이동(BC 75년)
4. 공손씨 옛 진번땅에 대방군 설치(AD 204년경)
5. AD 313년 고구려 15대왕 미천왕 낙랑 축출, 백제 13대왕 근초고왕 대방군 314년 축출
6. 낙랑 토호 왕조(王調) 반기를 낙랑태수 궁준(弓遵)이 평정((BC 36년)
진번군의 군치였던 잡현(霅縣)과 소명(昭明)·대방(帶方)·함자(含資)·열구(列口)·장잠(長岑)·제해(提奚)·해명(海冥) 등 남부도위 소속 7현
Ⅴ. 고조선사회
1. 8조금법에 나타난 고조선 사회
한서 지리지 연조(漢書 地理志 燕條)에 3조가 나와 있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 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讐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僻 其田民飮食以 豆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은도쇠 기자거지조선 교기민이의례 전잠직작 낙랑조선민 범금팔조 상살이당시상살 상상이곡상 상도자남몰입위기가노 여자위비 욕자속자 인오십만 수면위민 속유수지 가취무소수
시이기민종불상도 무문호지폐 부인정신불음벽 기전민음식이변두 도읍파방효리급내부고인 왕왕이배기식
은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예의에 힘쓰고, 농사짓고 누에쳐서 길쌈하도록 가르쳤다. 또 낙랑의 조선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8조목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그것이 남자일 경우에는 그 집 남자종을 만들고, 여자일 경우에는 역시 여자종을 만든다. 자기가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50만 전을 내게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되어도 풍속에 역시 그들은 부끄러움을 씻지는 못하며 결혼을 하고자해도 짝을 구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그 백성들은 종시 도둑질을 하지 않아서 대문을 닫고 사는 법이 없었다. 여자들은 모두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그 지방의 농사 짓는 백성들은 대나무 그릇에 음식을 먹고, 도시에서는 관리나 장사꾼들을 본받아서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다.
팔조문이 유일하게 전부 적혀있는 책은 환단고기인데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있는 8조문은 아래와 같다.
1,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재산을 몰수하여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
(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게으른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邪淫者笞刑)
8, 남을 속인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行詐欺者訓放)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이리하여 백성이 마침내 도둑질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으며 부인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전야와 도읍을 개간하고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어질고 겸양하는 교화가 이루어졌다.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가. 사람의 생명과 사유재산보호
나. 노비제 옹호
다. 범죄를 수치로 여김
라. 여성의 정절 중요시
마. 화폐사용
2. 고조선사회의 변화
한사군 설치이후 법조항이 60여개로 증가하여 풍속이 각박(刻薄)해졌다.
제3절 여러 연맹왕국의 형성
Ⅰ. 부여(扶餘)
1. 지형과 경제
가. 위치: 만주 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農安)에 위치하여 농경에 유리했다.
나. 농경목축 : 관리들의 명칭을 가축에서 따온 것도 목축이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다. 경제 : 말, 주옥, 모피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2. 전개
가. 이미 1세기 초에 왕호 사용, 중국과 외교 관계
나.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으로 쇠퇴하고 결국 고구려 문자왕때 편입(494)
3. 정치
가. 왕 아래 馬加, 牛加, 狗加, 豬加의 사출도가 있었고 그 외 使者 등의 관리 존재
나. 가(加)들은 四出道를 다스림
다.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족 연맹 형성
라. 오곡이 익지 않으면 왕에게 책임을 물었다.
4. 사회
가. 법률이 매우 엄하였다.
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⑵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를 배상하게 했다(一責十二法).
⑶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⑷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한다(가부장적 가족제도 성립)
나.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었다.
지배층 |
가(加) |
호민(豪民) | |
피지배층 |
하호(下戶) |
노비(奴婢) |
다. 제천행사 : 원시시대 수렵사회의 전통인 영고(迎鼓, 12월)(농경사회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
라. 점복유행 :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牛蹄占法)
마. 장례풍습 : 순장(旬葬)
5. 의의 :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고구려, 백제의 원형이 됨
Ⅱ. 고구려(高句麗)
1. 지형과 경제
가. 위치
동가강 유역의 卒本(桓因)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나. 지형
산악지대이므로 토지가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서 식량이 모자랐다. 활발한 정복과 약탈(掠奪)을 전개했다(전투가 생산활동).
다. 경제
토지가 척박하여 초기부터 평야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고(掠奪經濟) 부경(桴京)이 있었다.
2. 건국
BC 37년 주몽(朱蒙)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서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3. 정치
가. 5부족 연맹 : 桂婁部, 消奴部(涓奴部), 順奴部, 灌奴部, 絶奴部
나. 활발한 정복전쟁 : 요동 진출, 옥저 정복
다.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어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독립된 세력 유지하였다.
라. 諸加會議 :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고,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4. 사회
가. 부여와 비슷한 사회계급 구성
나. 제천행사 : 국동행사로서 동맹(東盟, 10월)이 있었다.
다. 조상신숭배 : 朱蒙, 柳花婦人
라. 데릴사위제(婿屋制)
마.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levirate)
바. 혼수품에 수의(壽衣, 繸衣) 포함
사. 점복의 풍습
Ⅲ. 옥저(沃沮)
1. 지형
함경도 지역의 동해안에 위치했다.
2. 경제
가.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
나.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했다.
다. 고구려에 포목, 어물, 염을 공납하였다.
3. 정치
가. 선진문화의 수용이 늦었고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박과 수탈로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나. 읍군(邑君)이나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다스렸다.
4. 사회
가. 부여족의 한 갈래이다.
나. 민며느리제(豫婦制)
다. 사후세계를 인정했으며 사람이 죽으면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무덤인 목곽에 안치했다
(骨葬制, 家族共同墓制).
Ⅳ. 동예(東濊)
1. 지형
강원도 북부, 동해안 지방(원산지역)에 위치했다.
2. 경제
가.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했다.
나. 단궁(檀弓),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를 생산했으며 명주, 삼베 등의 방직기술이 발달했다.
한 대(漢代) |
옹어(鰅魚) |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 |
반어(班魚) |
수당이후(隋唐以後) |
해표(海豹) |
3. 정치
읍군(邑君)이나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다스렸다고 고구려 태조왕 무렵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4. 사회
가. 제처행사 : 무천(舞天)
나. 족외혼(族外婚, exogamy)
다. 책화(責禍) : 다른 부족의 경계를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 등으로 배상해야 했다.
Ⅴ. 삼한
1. 지형 및 경제
가. 한강 이남에 위치하여 농업이 발달했다.
나. 수리시설이나 벼농사를 위한 저수지를 축조했다.
김제 碧骨堤, 밀양 水山堤, 제천 義林池, 상주 恭儉池, 의성 大堤池
다. 변한지역에는 철 생산이 활발했고 철을 낙랑과 왜에 수출했고 철을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했다.
2. 정치
가. 융합문화
고조선 유이민의 남하로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하면서 마한, 진한, 변한의 연맹체 형성했다(BC 194년 準王 진국에 와서 진왕이 되었으며 위만조선말기 조선상 歷谿卿이 20000명을 거느리고 진국이주).
나. 진왕(辰王)
목지국(目支國)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辰王)으로 추대되어 삼한을 통치했다.
다. 제정분리사회(祭政分離社會).
⑴ 정치적 지배자로 거수(渠帥, 渠率),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穢), 살해(殺奚), 불예(不例), 견지(遣支), 읍차(邑借) 등의 군장이 있었다.
⑵ 제사장(祭司長)으로서 천군이 신성지역인 소도(蘇塗)를 다스렸다.
3. 사회
가. 5월 수릿날의 기풍제(祈豊祭), 10월 계절제(十月祭)를 통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나. 무덤양식으로 주구묘(周溝墓), 움무덤(土壙墓), 돌널무덤(石棺墓) 등이 있었다.
[학습 자료]
◈ 책화제도(責禍制度)
동예에 있었던 일종의 사유 재산 보호를 위한 벌칙이었다. 동예에는 씨족 간의 경계이거나 지역간의 정치 구획인 읍락 사이의 경계를 중시하였다. 만일 이 같은 경계를 침범하여 수렵, 어로, 경작을 하면 침범자측에서 소, 말, 노예로 배상하게 하였다. 이 같은 풍속은 지역 주민의 생활 안정과 재산 보호를 위해서 존재한 벌칙이었다. 요컨대, 이러한 풍속은 사유 재산, 지역의 분화, 법률의 발달 등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알려 주고 있다.
◈ 삼한의 제정 분리
삼한의 여러 군장 국가들은 원래 한강 이남의 진(辰)이라고 부르던 지역에 고조선의 유이민이 내려오면서 성립되었다. 그 시기는 대략 한의 침략으로 고조선의 왕검성이 함락되었을 때이다. 이 때 남하한 고조선의 유이민이 발달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강 이남 지역의 토착민을 정복하면서 삼한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토착세력과의 마찰이 당연히 생기게 되었고, 그에 따른 마찰을 피하고 융합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완충 지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군장은 유이민 세력이 차지하되, 토착 세력의 지배자에게는 제사장(천군)의 지위를 남겨 주고, 그에게 완충 지대로 설정한 소도를 주관하도록 했다.
◈ 계급의 발생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석기 시대까지는 평등사회였다. 그런데 왜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 계급이 생기고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그것은 농경의 발달로 부터 설명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의 본격적인 농업 발달은 이른바 ‘잉여 생산물’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일부 집단이 이 잉여 생산물을 독점하면서 내것과 네 것을 구별하는 사유 재산 개념이 나타나게 되고, 빈부의 차이와 힘의 우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남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갖춘 집단은 그만큼의 권력을 소유하게 되면서 계급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농업의 발달 이외에도 이 시기에 시작된 정복 전쟁은 계급 분화를 더욱 촉진하였다. 왜냐하면 정복 전쟁을 통해 승리자는 노예나 토지 등 막대한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부여의 법률과 풍속을 통해 알 수 있는 부여 사회의 특징
[부여의 법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갚게 한다.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한다.
[분석]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조항에서는 인간의 생명과 노동력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살인자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은 연좌법의 적용이다.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한다.’는 조항은 ‘1책 12법’이라 하는데, 사유 재산제가 발달했음을 의미한다.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조항은 주로 여자에게만 적용되던 것으로, 가부장적 가족 제도가 발달했음을 의미한다.
◈ 고구려 부족장 세력의 지위
고구려의 경우 초기에는 연맹 왕국의 단계를 거쳤다. 그래서 부족장 세력인 대가들은 왕과 대등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를 말해주는 사실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의 대가들도 부여의 제가들과 마찬가지로 왕이 거느린 관리를 거느렸다. 사자, 조의, 선인 등이 그것이다. 둘째, 중요한 범죄자는 왕이 아니라 제가회의(부족장들의 회의)에서 처벌하였다.
◈ 민며느리제와 데릴사위제
민며느리제는 동옥저 지방에서 유행하던 고대인의 혼인 풍속으로 일종의 매매혼이다. 생활이 빈곤하여 딸을 양육할 수 없을 때 장차 아내가 될 것을 전제로 남자의 집에 가서 자라 성인이 되면 친가에 돌아와 있다가 남자측에서 대가를 지불한 후 시집을 가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를 재산으로 치고, 딸을 줄 때에는 양육비를 지불하도록 하는 것이다.
데릴사위제는 남자가 혼인을 한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남자 집으로 돌아와 사는 혼인 풍습이다. 여자 집에서는 서옥이라는 집을 짓고 사위가 돈과 패물을 가지고 와 여자와 동숙을 요청하면 부모가 이를 허락하여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남자는 자녀가 성장한 후에야 처자를 본가로 데리고 갔다. 이러한 풍속은 사위가 처가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노동력을 봉사했다는 점에서 봉사혼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 변한의 산업과 풍속
토지가 비옥하여 5곡과 벼를 심기에 알맞다. 누에치기를 알고 비단을 짠다.우 마를 직접 타거나 수레를 이용하며, 혼인에 예속이 있고 남녀가 유별하다. 장사지내는데에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데, 죽은 이를 날아오르게 하고자 하는 뜻이다.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가져 간다. 시장에서 물건을 거래할 때에는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철을 사용하듯 한다. 또 이 철을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해준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제4절 연맹왕국의 사회와 정치
Ⅰ. 촌락과 농민
Ⅱ. 성읍국가의 구조
Ⅲ. 왕권의 신장
제5절 연맹왕국시대의 문화
Ⅰ. 법률
Ⅱ. 종교
Ⅲ.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