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송도(松島)
(1) 위치 및 지세
군내리로부터 약 1,200m 떨어진 섬마을로서 지리적으로 군내리를 태풍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으며 남면과 접하고 있다.
(2) 마을 유래
본 마을은 읍 소재지인 군내리 바로 앞에 위치한 섬마을로써 1890년대 이전에는 해적들의 잦은 출몰로 인하여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었으나, 군내리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수시로 이곳을 내왕하여 보리와 수수 등을 재배하였다고 하며 당시에는 이곳을 식도라고도 하였다 한다. 그후 1896년에 돌산군이 생기면서 주민들은 군수의 허락을 받아 송도 해변에 석발을 쌓고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처음 군수의 허락을 받고 석발을 설치했던 사람은 진주 강씨이며 그 다음에 김․박․고씨 순으로 입주하여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다.
(3) 지명 유래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목이름으로, 솔섬은 소나무가 많은 곳의 명칭이다. 송은 소나무라는 뜻 이외에 “살만한 곳”이라는 뜻도 있다. 송도는 예전에 소나무가 무성한 섬이었으나 지금은 개간한 밭이 되어 무성한 소나무는 찾아볼 수 없다.
(4) 송도 조개더미 유적
송도 조개더미유적은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밭 823번지, 824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송도는 면적 0.91㎢의 작은 섬으로 너비 250m 가량되는 안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돌산도에 딸린 섬이다.
본 유적에 이르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여수에서 돌산대교를 건너 읍 소재지인 군내리에 닿는 육로와 여수항에서 군내리에 연결되는 뱃길이 그것이다. 유적은 군내리에서 건너다 보이는 송도나루에서 마을로 넘어가는 길가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지금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현재 마을은 본 유적이 위치한 지역과는 달리 섬의 서남향에 있는 포구에 형성되어 있고 유적 부근에는 재해대피용 건물 하나가 있을 뿐이다.
또한 유적에서 약 100m 정도의 거리에 수질이 양호한 자연수(돌샘)가 솟아나고 있어 지금도 좋은 식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유적지가 위치한 곳은 섬의 북안 구릉지대로 표고 2~10m 내외의 비교적 낮은 언덕이며 유적의 동북쪽으로는 경사가 급한 바위절벽이 바다에 면하고 있다.
유적의 주변에는 표고 89.1m인 산이 있으며 송도는 이 산을 축으로 하여 마치 굽은옥(曲玉)처럼 휘어져 있다. 유적은 신석기시대 조개더미로 그 범위는 남북 약 35m, 동서 약 30m 정도이나 유적의 중심부가 계단식 경작에 의해 깎이면서 심하게 교란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의 패각이 저지대인 해안으로 이동․매립됨으로써 실제로는 당시에 이루어진 조개더미보다 넓은 면적이 패각으로 덮여 있다. 또한 유적의 상당부분이 태풍 등 자연재해에 의해 잘려나가고 다시 채워진 상태여서 파괴 및 교란이 매우 심하였으며 비교적 양호한 퇴적층은 계단의 아래쪽에 남북으로 좁고 길게 남아 있을 뿐이다.
유적 주변의 지질은 화성암인 불국사화강암 기반암으로 토양은 배수성이 강한 암쇄토 또는 적황색토로서 비옥한 편은 아니다. 온난 다우한 기후 지역으로 흑송, 사철나무, 동백, 유자 등 온대성이나 난대성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청정해역인 인근의 바다는 굴, 소라, 조개 등 어패류의 좋은 서식지로서 지금도 양식업이 잘 발달되어 있다.
(5) 출토된 유물․유적
송도 조개더미 유적은 처음 발견에서 2차에 걸친 조사과정에 이르기까지 교란과 파괴를 겪은 유적으로 출토된 유물이나 유구의 잔존상태는 매우 열악한 상황에 있었으나 이러한 상황에 처한 유적의 규모나 조사면적에 비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본 유적의 최하층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속하는 유적이다. 유적은 4개의 퇴적층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층위에서는 토기류, 석기류, 뼈연모, 꾸미개 및 여러 종류의 패각류와 짐승의 뼈, 이빨 등이 출토되었는데 대체로 신석기시대 조개더미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다. 특히 토기류는 본 유적의 성격과 관련된 특징적인 유물이며 그 가운데서도 제일 아래층에서 출토되는 덧무늬토기는 신암리, 동삼동, 대마도 초월유적의 덧무늬 토기와 형식학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석기류는 돌날이나 찍개류 등 뗀 석기가 대부분인데 그 가운데에는 날의 일부를 갈아 날카롭게 만든 것도 있지만 늦은 시기에는 날쪽 전부를 갈아 조개날을 만든 것도 출토되었다.
오산리, 동삼동, 상노대도, 욕지도 등 동․남해안 지역과 일본 열도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출토된 흑요석의 산지추정과 함께 당시의 해상을 통한 문화교류와 전파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한편, 본 조개더미에서는 중앙에 화덕이 있는 2기의 집자리가 겹쳐진 상태로 발견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납작한 판돌로 된 2개의 기둥받침이 있어 오산리유적(4호)의 예와 유사하다. 송도 조개더미유적은 유구의 구조 및 유물의 형식학적 측면에서 보면, 오산리, 동삼동, 신암리 등과 함께 신석기시대의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2. 방답진성(防踏鎭城)
(1) 방답진의 설진
방답진은 전라좌수영 관하에서 사도진과 같이 첨사의 진이며 좌수영에서 남쪽에 위치한 전라좌수영 전초기지였다. 왜구 방어의 요충지라 하여 이곳에 설진 축성이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 년 월은 알 수 없다.
방답진을 설치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의 왜구에 대한 방어 대책은 고려말과 조선초에 왜구가 노략질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이었던 만큼 개경이나 한양의 길목인 서해안과 남해 서부해안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집중 시켰던 것을 조선왕조의 기틀이 정비되는 세종에서 성종때의 기점으로 수군의 기지가 전진 배치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왜구의 침략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대상을 바뀌게 되자 남해안 중심의 방어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한다. 그 예가 상암동에 있었던 진례만호가 국동으로 전진배치되어 내례만호가 설치되고 내례만호는 다시 전라좌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라좌수영을 설치하여 전라우수영을 중심으로 했던 방어 체제에서 전라 좌수영 중심체제로 이동 되었으며, 화양면 용주리에 있던 돌산만호진을 혁파하고 돌산에 방답첨사진을 설치하여 만호진에서 첨사진으로 한 단계 격상 시켜 수군기지를 전진 배치 시키게 된다.
(2) 방답진과 거북선
거북선이 어디에서 만들어 졌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설들이 있어 왔는데 그 장소가 좌수영 본영인 여수와 순천부 선소 였던 시전동 소위 쌍봉 선소에 대해서만 언급이 있었지 돌산의 방답선소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3척으로 본영 거북선, 방답 거북선, 순천거북선이 그것이다. 거북선의 건조 장소는 본영에서 3척을 모두 만들었는가 아니면 본영과 방답진, 순천부에서 각각 한 척씩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세 곳에서 각각 만들었다면 여수 본영 선소와 시전동 순천 선소, 돌산의 방답 선소에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돌산의 방답진에서도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며, 군내리에 있는 조선터와 조선터샘 그리고 도금터와 돌산 중앙초등학교 앞에 있는 야철지(冶鐵址) 등의 유적들이 그 가능성을 충분히 제시해 주고 있다. 또한 가장 좋은 선재목(船材木)이 있는 금오도가 지척에 있다는 것은 어느 곳보다 배를 만들기에 유리하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3)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임진왜란(1592~1598) 당시에도 5포 가운데 하나인 방답진은, 첨사가 지키는 수군전진기지였다. 왜란 중 당시 첨사 이순신(李純信)을 중심으로 편성된 방답함대의 요원이었던 이 지방의 공로는 이순신(李舜臣)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그 빛을 발한다. 임진 5월, 제1차 출동시엔 이 고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을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을 직접 호위하고 모시는 중위장으로서 방답함대를 이끌고 경상도 거제도쪽으로 나아가 옥포해전에서 왜대선 1척을 격파 소각, 서전을 장식하여 아군의 사기를 북돋았고, 이어 합포해전에서도 왜대선 1척을 격파 소각했고, 적진포해전에서도 왜대선 1척을 격파 소각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임진 6월 제2차 출동시엔 첨사 이순신은 전부장이 되어 사천해전에서 왜선 1척을 소각하고 당항포해전에서는 녹도의 정운함대와 합력하여 왜대선 1철을 격파 소각하여 왜군 약 100명을 사살 익사케 했다. 임진 7월 제3차 충돌시엔 제 2차 때와 같이 전부장이 된 첨사 이순신을 방답함대는 저 유명한 한산해전에서 왜대선 1척을 나포하고 왜선 2척을 격파 소각함과 아울러 적병 4명을 사살했다. 임진 8월말 9월초에 걸친 제4차 출동시엔 첨사 이순신은 이때도 역시 전부장이 되어 부산해전에서 부산항으로 돌격하여 들어가 다대한 전과를 올리었는데 개별적인 전과의 기록이 없어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음이 아쉽다.
※ 1998년 5월 21일 우리나라 일곱 번째 국산 잠수함이 진수되었는데 그 이름을 “李純信"艦으로 명명했는데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고장 방답진 첨절제사로 있으면서 충무공 李舜臣 막하 중위장으로 큰 전공을 세운 때문인 것이다.
대우중공업(주) 옥포조선소에서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들어진 이순신함은 1200t급 디젤잠수함으로 수중 최대 속력은 시록 22KTS(44Km/H)로 어뢰와 기뢰 등을 장착하고 2개월간의 단독 작전이 가능하다. 이 함의 승선 인원은 40명이 탑승 할 수 있다.
한편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인명은 차후 한국형 구축함(KDX-Ⅲ)에 명명될 예정이다.
(4) 전라좌수영과 방답진(防踏鎭) 폐영
임진(任辰)왜란을 일으킨 지 302년만에 일본은 조선을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침범하였다.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절호의 기회로 이용한 것이 동학운동의 진압을 위한 청국군(淸國軍)의 아산만 상륙에 따른 일본군(日本軍)의 인천상륙이었다.
청․일(淸․日)양국 군대의 조선 출병은 급기야 청일전쟁을 불러 일으키고 그로인해 소위 갑오경장(甲午更張)의 실시를 보았다. 전세가 유리해진 일본군은 우리 궁궐과 서울 사대문(四大門)을 강점하여 조선 중인군 6,000명을 무장해제시켰다. 원래 일본은 한국강탈에 장애가 되는 군대를 감축시키거나 해산시키려는 음모가 있었기에 일본의 반강제로 이룩된 갑오경장 과정에서 노골화되었다.
일본은 제1차, 제2차에 걸쳐서 갑오경장(개혁)을 서두르면서 자주독립에 절대 필요한 군대의 양성에는 의식적으로 등한시하여 종래의 각 군영(軍塋)의 폐합을 구실로 육군을 감축시키고 수군(水軍)을 완전히 폐지해 버렸다.
이에 따라 417년간 조선수군의 주진(主鎭)으로 남해안뿐만 아니라 조선을 지켜왔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과 좌수영 산하의 방답진(防踏鎭)도 1895년 7월 15일(고종 32년) 일본의 간계에 의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방답진은 1522년 (중종 17)에 왜구의 길목이며 왜구방비의 요충지라 하여 돌산현 방답진에 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아 방답진이라 하고 첨사(僉使)르르 두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5포(五捕) 가운데 하나인 수군 전초(前哨)기지였으며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은 방답 함대를 이끌고 이충무공을 직접 직접 호위하고 모시는 중위장(中衛將)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큰 전공을 남긴 전라좌수영의 주진(主鎭)이였었는데 설진(設鎭) 373년만에 폐영되고 말았다.
(5) 방답진 유적
① 방답진 선소(船所)
선소는 서문(西門) 밖 서남쪽 (돌산읍 군내리 980번지와 987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답진 첨사가 임금님께 그려 바친 수군 전략지도에는 현자(玄字), 천자(天字), 지자(地字), 황자(黃字)의 총통인 대포와 도구(淘口)등 각종 철포, 신기전(神機箭), 화전(火箭) 같은 궁전(弓箭)을 전선(戰船)에 적재(積載)하기 위한 각종 무기를 보관하는 수군 무기고 (水軍 武器庫), 쪄서 말린 쌀, 건어물, 물, 기름, 군복, 밧줄, 연장 등 병참물을 저장하는 즙물고(汁物庫), 전선(戰船)을 진수하고 수리하며, 병기를 제작하는 세검정(洗劍亭)이 있고, 굴강(掘江)에는 전선(戰船) 2척, 병선(兵船) 2척, 사후선(射侯船) 4척이 메어져 있다.
② 방답진성(防踏鎭城)
방답진은 전라좌수영의 전초기지로서 왜구의 길목이며 바다방비의 요충지이다.
1523년(중종18년)에 설진 축성되었다. 성(城)은 석성(石城)으로서 길이가 694보(1587.525m), 높이19척(6.27m), 성의 마디인 여장(女墻)205개소, 성문(城門)은 남문(南門:영남루), 서문(西門), 동문(東門)등 3개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알 수 있고, 성터는 현재 돌산읍(突山邑)소재지 동내(東內)마을에서 돌산초등학교 쪽 신복리(新福俚) 방면에 위치한 동령곡(東嶺谷)에서 북쪽으로 서당산 중턱을 따라 돌산읍사무소 뒷산 중턱에 이르고,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은 ①동문 기단석 일부, ②군내 교회 뒷산중턱 기단석 일부, ③동문 북쪽 기단석 일부, ④군내리 277번지 정태현씩 댁의 서문북쪽 기단석 일부, ⑤군내리 562번지 윤계배씨 댁 남문 왼쪽 성곽일부, ⑥군내리 475번지 우명주씨 댁 남문 왼쪽 성곽 일부, ⑦군내리 554번지 김태웅씨 댁 남문 오른쪽 성곽 일부, ⑧박종문씨 댁에서 길로 쓰고 있는 남문 오른쪽 성곽 일부, ⑨군내리 422번지 고종빈씨 댁 서문남쪽 성곽 일부, ⑩군내리 939번지 박성식씨댁 서문 남쪽 성곽 일부가 높이가 6m이상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고, ⑪ 군내리 476번지 나계순씨 댁에는 남문(영남루)주춧돌이 남아 있다.
성(城) 내외의 공해(公解)로는 딴 곳에서 온 관원들을 대접하여 묶게 하였던 객사(客舍), 방군들이 기거하는 위사(衛舍), 성안에서 적과 싸우기에 알맞게 만들어 놓은 어변정(禦邊亭), 흉년에 군궁한 백성을 구하여 주기 위한 곡식을 저장한 창고인 진휼창(賑恤倉), 방군들의 식당인 군사고(軍飼庫), 포탄이나 화약을 보관하는 화약고(), 무기를 보관하는 병고(兵庫), 유사시 물품을 보관하였던 유군기고(留軍器庫), 수군병 참물을 보관하였던 수군기고(水軍器庫)등이 있었고, 첨사가 공사를 처리하던 동헌(東軒)터는 현재 돌산읍사무소(군내리353-1) 뒤에 있는 옛건물(돌산읍사무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음)이고, 그 뒤편에 관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10칸짜리 객사(客舍)는 돌산 우체국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72년 2월 22일 화재로 소실되고 그 자리에 현 우체국이 들어서 있다. 첨사의 음식을 장만하던 군관청(軍官廳)이 1989년 복원되었고, 1999년 보수되었다. 군내리 476-1 나충현씨댁 당구장 자리에 성안에 물을 공급하고 말을 먹였던 연못이 있었다.
3. 돌산향교(突山鄕校) - 도지정문화재 자료 제41호(1975년 2월)
조선시대 고종 32년 서기 1895년(乙未年) 방답진이 폐진되고 난 이듬해인 1896년(兵甲年) 1월에 돌산군(突山郡)이 설군(設郡)되었다. 조선시대 동안 여수와 돌산은 부(府)․군(郡)․현(縣)과 같은 독자적인 행정 조직을 갖지 못하고 인근 순천부(順天府)에 소속되어 통치를 받았으므로 향교를 설립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순천의 관할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수와 돌산 지역주민들의 줄기찬 노력으로 돌산군이 설군되자 이듬해인 서기 1897년 고종 황제로부터 향교 신설의 인가를 득(得)하여 돌산향교가 창건되게 되었다. 특히, 지역내의 주씨(朱氏)․김씨(金氏)․강씨(姜氏)․박씨(朴氏) 문중에서 각각 1천냥씩의 성금을 기부한 것은 향교 창건에 커다란 기반이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돌산 향교의 관할 지역은 당시 돌산면, 남면, 화정면, 삼산면이었으며 서기 1897년 7월 직원(直員) 김재륜(金在倫) 때 대성전(大成殿)을 신건(新建)하였는데 신건상량문(新建上樑文)은 법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찬(撰)하였다. 1898년 5월 직원(直員) 김재륜(金在倫)때 명륜당(明倫堂)을 신건하였는데 상량문은 학부대신 이도제(李道帝)가 찬(撰)하였다. 1899년 1월 풍화루(風化樓)를 신건(新建)하고 신건문(新建文)에는 돌산군수였던 서병수(徐丙壽)가 찬(撰)하였다. 그후 1930년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1931년 풍화루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향교를 출입하는 향원(鄕員)은 약 100명 가량이며, 향교를 대표하여 향무일체(鄕務一切)를 통할관장(統轄管掌)하는 전교(典敎)는 2년마다 새로 선출된다. 전교 입후보자가 단일 후보일 경우는 임원회에서 상의하여 가부를 결정하고 2인이상 후보자가 경쟁시는 총선거로서 다수결로 결정하고 동수일 때는 년상자(年上者)가 된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경일(祥慶日)이 석존제일(釋尊祭日)이며 공자(孔子) 외(外) 26위(位) 선사(先師)들에게 제사를 올린다. 이 제사에 소요되는 비용은 여수시로부터 보조를 받고 있다. 돌산 향교는 설립된 후 100년 동안 유풍(儒風)이 뿌리 내리고, 돌산과 인근 지역을 교화하는데 지대(至大)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원효의 행적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했지만, 특히 그는 전국 대찰(大刹)과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다니며 좌선(坐禪)을 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송(宋)의 고승전(高僧傳)에 원효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유행(遊行)하는 승려이며 어디에 일정한 거쳐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경관이 뛰어난 향일암에 원효가 잠깐 머무르며 향일암 창건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향일암은 고려 광종 9년(958)에 윤필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원통암을 금오암(金鰲庵)이라 개칭하였고,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25년(1592) 승군(勝軍)의 근거지로 이충무공을 도와 싸운 전적지(戰迹地)로도 유명한 곳이다. 조선 숙종 39년 에는 돌산읍 죽포리 불교신도들이 전답 52두락을 분향하였고, 숙종 41년(1715)에는 인묵대사가 현 위치로 이전 향일암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주지는 종삼(宗三)이다.
4. 은적암(隱寂庵) - 1975년에 전남도지정 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됨
은적암은 중봉산 중턱에 있으며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지금의 남면 금오도에 송광사를 짓고, 순천 선암사를 오가면서 중간 휴식처로 세웠다고 하는데, 암자 뒤편에 있는 바위가 병풍을 두른 것 같으며 부변에 소나무가 많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이 밤이면 큰 물소리고 들릴 정도로 조용하여 은적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비록 작은 암자이기는 하나 절 안에는 주불전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명루, 칠성각,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은 3칸 건물로 지붕은 팔작집인데 오른쪽은 맞배 지붕으로 처리하였다.
은적암에 소장된 유물로는 아미타 동불(1791), 지장보살 옥돌상(1984), 법고(1898), 석용(石俑, 1918), 지장보살 탱화(1918), 후불 탱화(1918), 칠성 탱화(1918), 산신 탱화(1918), 범종(1960) 등이 있다.
또 은적암은 관명루(觀明樓)에 대한 상량문 3건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① 「萬曆戌午年十月初七日己時上樑」
② 「乾隆五五年庚戌二月二十日長時上樑」
③ 「咸豊七年丁巳三月二十日年時上樑」
위의 상량문에 의하면 관명루가 ① 1618, ② 1790, ③ 1857년 등 3회에 걸쳐 개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돌산 지역의 불교 유적에 대하여 확실하게 연대를 알 수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어 값진 것이라 하겠다.
한편 상량문 ①에 의하면 관명루 건축 연대가 1686년 이전이 되므로 이것 역시 돌산읍내에 현존하는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에 해당하여 의의가 크다. 현재 주지스님은 보월(步月)이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성각은 수명 장수의 신인 칠성신을 봉안한 전각으로 우리나라의 전통 신앙과 관계가 깊은 건물이다. 칠성신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으로, 아이의 수명을 연장시켜 준다고 해서 민간에서 널리 숭배되었다. 칠성신은 본래 도교에서 모시던 신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사찰의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졌다가 훗날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면서 칠성각이란 건물까지 만들어져 숭배되기에 이르렀다.
민간에서 칠성신을 숭배해 온 것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것은 물론 비를 내리는 신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칠성신은 재물과 재능을 주는 신으로도 믿어졌다. 따라서 농사가 잘 되기를 빌거나 입신 출세슬 원할 때 칠성신께 빌곤 하였다. 하지만 단순히 북두칠성만을 모신 것이 아니라 불교와 결합되어 삼존불과 함께 7여래, 도교의 칠성신을 함께 모시는 것이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