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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민과 함께 꿈꾸는 복지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복지교육원
제2일(7/13) 호치민시에서 일상생활의 시작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하이엔호텔이 인도차이나하이웨이 바로 옆에 있어서 각종 차량과 오토바이소리 때문에 일찍 잠이 깼다. 아내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빵가게를 찾다가 길 건너에 있는 전통시장을 발견했다.
시장을 걷다가 망고스텍과 포도를 파는 가게에서 각각 한봉지씩 주문하고 수첩을 주면서 가격을 써달라고 했다. 과일가게 주인은 허허 웃기만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옆 가게 주인에게 했다. 그랬더니 옆가게 주인이 수첩에 70,000이라는 숫자를 적어 주었다. 필자는 7만동을 지불하면서 호치민시에서 “일상생활”을 시작했다.
다음에는 두리안의 가격을 물었는데, 20,000동이라고 한다. 조금 비싼 듯하여 사지 않고, 바로 옆에서 바나나 한 손의 가격을 물었다. 12,000동이라고 해서 한 손을 사고, 바로 옆에서 바게트 4개를 물었다니 8,000동이라고 해서 합계 20,000동을 지급하였다. 바게트 하나에 2,000동이니 한화로 150원꼴도 되지 않는다. 한국의 빵가게에서 본 바케트의 1/2크기인데, 식품 값은 매우 저렴한 편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호치민시 산업대학교 안에 있는 한베문화센터를 방문하였다. 이번 행사를 적극 지원하고 계신 오덕 교수가 소장으로 일하시는 곳이다. 교실 하나를 나누어서 사용하는데, 중앙에 큰 테이블을 두고 한쪽 벽에는 책상에 7~8대의 컴퓨터가 있었다. 이곳에서 한글교육 등을 한다고 한다. 이곳은 한베문화센터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별도로 강의실이 있다고 한다.
사진 설명: 호치민시 산업대학교 한베문화센터에서 오덕 소장님과 Young Bridge 일행(사진 주정연)
오덕 교수님이 산업대학교의 부총장님과 전화 통화를 한 후에 바로 지도교수진만 방문하였다. 부총장님과 대화를 나누다 총장님도 계신다고 하여 자리를 옮기고, 일행이 모두 참석하자 바로 옆에 있는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즉석에서 따 순 떼 총장님은 호치민시 산업대학교에 대해서 소개하여 주셨다. 산업대학교는 공과대학이 중심이고 5개 캠퍼스에 7만명의 대학생이 다니고, 교직원이 2천명 가량된다고 했다.
베트남정부의 상공부 소속 국립대학교인데, 상공부 소속의 100여개 대학중에서 랭킹이 좋다고 한다. 이 대학에는 15개 학과, 2개의 연구원(아마도 대학원을 말한 듯)이 있고, 13개소의 센터가 있다고 했다. 각 학과별로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교 재정의 약 5%는 정부가 지원하고, 나머지 95%를 학생의 등록금과 외부의 지원으로 충당하기에 총장은 외부의 지원을 끌어오는데 역점을 둔다고 했다. 대학생의 한 학기 등록금이 미화 100불 가량된다고 하니, 외부에서 지원금의 유치가 매우 중요할 듯하다. 명칭은 국립이지만 국가가 가난하기에 정부의 지원은 명목적인 수준에 불과한 듯하다.(베트남에서 10여년째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 교민의 증언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은 초등학교도 마찬가지인데, 사회주의국가이지만 초등학교도 사립이 많이 있다고 한다(물론 초등학교는 대부분 국공립이다).
사진 설명: 베트남 호치민시 산업대학교 따 순 떼 총장(중앙)과 광주대학교 이용교 교수, 대구가톨릭대학교 천정웅 교수, 호치민시 산업대학교 한베문화센터 소장 오덕 교수(왼쪽부터).
총장님은 학교 현황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을 마친 후에 직접 기계학과 실습실을 소개하였다. 기계학과 석사와 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이 사용하는 실습장비를 소개하였다. 별로 크지 않는 실습실에 몇 개의 첨단기계라고 소개하였지만, 문외한이라서 얼마나 첨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진 설명: 따 순 떼 총장님이 직접 실습실을 안내하면 설명해주었다.(사진 주정연)
다음으로 대학도서관을 소개했는데, 10층 건물에 3,500여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1층 서점을 지나서 전자도서관을 구경했는데, 도서관 시설은 비교적 잘 갖추고 있었고 방학중인데도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30만권 장서와, 전자도서 10만권 이상이 있으며, 도서관 직원만 30여명이라고 하니 적지 않은 규모이다.
도서관 1층에는 구인구직센터에 학생들이 20여명 이상 몰려 있었는데, 구직자의 거의 100%가 취업된다고 했다. 공과 대학생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높고, 산업대학교의 졸업생에 대한 인식이 좋아서 거의 대부분 취업된다는 것이다.
따 순 떼총장님의 직접 설명과 시설안내를 받은 것은 최근 총장님이 한국과 교류협력을 증진하기 위해서 한국의 9개 대학교와 국회, 부산광역시, 포스코, 현대자동차, KDM(주) 등 각종 산업체 등을 방문하여 한국 발전상을 보셨는데, 귀국후 첫 번째 한국인 단체손님이라서 우리 일행이 대접을 받은 것인 듯했다.
산업대학교 부설로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참고로 베트남의 학제는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4학년,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는 2학년/3학년/4학년제 학교가 공존한다. 대학원 석사과정 2년, 박사과정 4년이다.
호치민시 산업대학교 구내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한 후에 호치민시의 “강남”으로 불리는 신시가지를 구경했다. 야베PC방, 이가(李家)면옥 등 한글 간판이 쉽게 눈에 띄었다. 이 곳은 당초 늪지대를 대만 부동산업자가 평당 1불에 사서 개발하였는데, 개발과정에 정부의 방침이 바뀌면서 어려움을 겪자 사장이 본사 건물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현재는 평당 수천 불에 거래될 정도로 가격이 올랐지만, 개발수익에 대한 기대가 높아서 가격은 더욱 오를 것에 대한 기대가 높아 전체적인 분위기는 서울의 강남이나 경기도 분당 같이 도로가 넓고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즐비했다.
현재 호치민시에는 약 8만명 가량의 한국인이 사는데, 그중 약 3만명은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땅값이 비싸지만 한국인을 위한 국제학교 등 각 나라의 국제학교가 있어서 교육환경이 좋고, 유명한 프랑스병원 등이 있어서 주거환경이 좋다고 했다.
사진 설명: 호치민시의 신시가지에는 한글 간판이 쉽게 눈에 띈다. 현재 호치민시에는 한인이 8만 가량 사는데 그중 3만 가량이 이 지역에서 산다고 한다.
이어서 대한민국호치민총영사관 별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인 ‘호치민한국문화원’을 방문했다. ACEF(국제문화교류재단)에서 10년전에 투자하여 세운 건물로 4층 건물에 1층은 도서관, 서예교실이 있고, 2층은 한글교실, 3층은 호치민한인회, 호치민상공인연합회, 4층은 한국문화원이 입주해 있다.
1층 도서관과 서예교실은 상근직원이 없고 자원봉사자 1명이 도서목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2층 한글교실은 학습중이라서 지나쳤고, 3층에 있는 호치민시한인회 http://www.haninvn.org (양호연 실장)와 호치민시한인상공인연합회를 방문했다.
여러 입주 단체 중에서 한인상공인연합회 http://www.kocham.kr 가 가장 활발히 움직인 듯했다. 김순옥 실장의 설명에 의하면 베트남에는 한국인 회사가 1,500여개소가 있고 그중 1,200여개소가 다낭(중부지역 중심지) 이남에 있으며(베트남한인상공인연합회는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와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으로 협회가 나뉘어져 있는 듯하다), 그중 500여개소가 한인상공인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상공인연합회는 회원간의 정보교류와 상조활동을 하는데 자선을 위해서는 1년에 한 번씩 자선골프대회를 갖는다고 했다.
책장에는 “베트남에서 사업하는 법”, “베트남의 법률” 등 상공인에게 꼭 필요한 책자와 자료집들이 꽂혀있고, 각종 복사물 자료집을 판매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한인회에는 2명이 상주하는데 비하여 상공인연합회에는 여러 명이 근무하는 책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돈이 모이는 곳에 사람도 모인 듯했다.
4층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은 오덕 교수님이 원장대리로 일하신다고 했다. 오덕 교수에 따르면, 이 건물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재단인 ACEF(국제문화교류재단)가 투자해서 지었는데 10여년간 방치되다 시피하다가 최근 1~2년 사이에 다소 활성화되고 있다고 한다. 총영사관별관이기도 하여 정부의 보호도 받으면서 민간이 자유롭게 문화교류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서울에 있는 재단이 크게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향후 활성화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덕 교수님의 포부는 한국문화원을 한국인 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에 관심있는 외국인에게도 사랑받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국제사랑나눔재단과 같은 법인을 만들어서 활성화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오덕 교수는 국제사랑나눔재단이 유력인사와 단체의 영향력이 아니라 소액을 기부하는 다수의 회원으로 이루어지길 희망했다.
한국문화원이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문화를 가르치며, 한국문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길 희망했다. 이러한 일을 하고자 해도 적절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일할 공간은 많지만, 전담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일을 하기 어렵다고 했다.
사진 설명: 대한민국총영사관 별관인 이 건물에는 한국문화원, 호치민한인회, 호치민한인상공인연합회, 코쿤(일일베트남신부수업) 등이 입주해 있다. 왼쪽부터 천정웅 교수 부부, 오덕 교수, 이용교 교수 부부이다.
오덕 교수는 자신의 역할을 ‘우산’과 ‘다리’에 비유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국가이기에 국가의 통제가 심한데, 공산당, 조국전선, 행정부 등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오덕 교수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고,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호치민문화원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오덕 교수님이 베트남과 인연을 맺은 경위와 지난 16년간 베트남에서의 활동을 들을 수 있었다.
오덕 교수가 베트남과 인연을 맺은 것은 3명의 형제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해서 고엽제 후유증을 겪고 있고, 형수 중에 한분은 베트남인이라고 했다. 본인은 베트남에 평화를 심기 위해서 참전한 “네 번째 용사”라고 했다.
오덕 교수는 1979년 4월 23일 전투경찰로 일할 때 고압선에 감전되어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봉사를 꿈꾸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인은 5,500여명이 죽고, 베트남인 144,000여명을 살상하였기에 “한국인은 베트남에 갚아야 할 빚이 많다”고 했다. 오덕 교수는 의료봉사, 장학사업, 지역개발 등 다양한 사업의 다리 역할을 했는데, 최근에는 노인복지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조기 은퇴한 한국인들이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하지 말고, 가진 기술로 베트남에 봉사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싶다고 했다. 제3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일하는 실버타운”을 꿈꾼다고 했다.
오덕 교수는 동남아과학연구협회의 한국지회장을 맡고 있고, 현지에서 통역을 맡고 있는 마이 학생의 은사인 흥 생 교수(한국학과장)이 남부지회장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오덕 교수는 대한민국 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등 직함이 매우 많은데, 많은 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는데 일을 도와줄 일꾼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화중에 한 참가자가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대학생의 진출 상황”을 물었다. 이에 대해서 오덕 교수는 한국 대학생들이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해서 공부하길 희망하듯이 베트남 학생들도 한국으로 유학하길 희망하고 이왕이면 유명 대학으로 유학가길 희망한다고 했다. 베트남인들은 한국인의 불같은 성격을 겁내거나 우쭐거리는 태도를 싫어하는데, 한국인도 태도를 바꾸어서 외국인을 “친한파”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덕 교수는 베트남에서 다양한 일을 하면서 힘이 들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힘을 얻었다고 한다. 소진되어 있을 때인 2004년에는 KBS연말 특집에 해외에서 훌륭한 활동을 한 한인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다음에는 미국에서 열린 큰 대회에서 주강사로 참여하면서 용기를 얻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베트남에서 공부한 딸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합격하여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호치민한국문화원장, 평통자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무엇입니까?”라는 의미를 가진 “까이지”라는 뜻을 담은 http://www.caigi.com 를 만들어서 IT사역을 시작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는 이용자가 한때 음악파일을 내려받기 위해서 하루에도 120만명이 넘었지만 최근에는 저작권 보호로 곡을 줄인 관계로 줄었다고 한다.
오덕 교수는 그동안 의료봉사활동만도 150 차례 가까이 실시해 오면서 많은 단체들의 봉사활동도 주선해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의료봉사단이 단순히 “의료봉사만 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많은 의료봉사단이 보다 넓은 세상을 보아야 하는데 의료봉사 그 자체만 역점을 둔다는 것이다. 봉사단이 오면 의례히 통역과 가이드를 하기도 하는데, 가이드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이 일을 누군가 전문적으로 수행해 줘야 좀 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데, 몸이 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한 참가자가 오덕 교수의 한국어학과 제자 대학생이면서 통역과 현지 안내를 맡은 ‘마이’님에게 소감을 물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관광과 체험활동 등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대학입학 후에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오덕 교수님의 경험을 통해서 더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베트남을 바로 잘 이해하고, 베트남을 아름다운 나라로 알려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베트남은 한류 영향으로 한국 영화, 노래 등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덧붙여서 오덕 교수는 한국인이 인기가 떴는데, “인격적으로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문화원이 한국어교실을 넘어서서 한국 노래도 가르쳐주고, 한국음식도 가르쳐주며, 한국문화의 축제 공간으로 바뀌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번 여행 참가자들이 한국을 널리 알리는 홍보대사, 개미군단이 되길 희망한다고 했다.
다음 일정은 가톨릭성당에 가서 신부님을 뵙는 일이다. 도로공사 때문에 버스가 진행할 수 없어서 300여 미터 정도를 후진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한국에서라면 전혀 상상이 안 되는 일이 수백대의 오토바이가 달리는 도로에서 이루어졌다. 베트남의 버스는 조수를 데리고 다니는데, 이럴 때 조수의 역할이 요긴했다.
사진 설명: 베트남장애아동협회 부회장이신 판 깍 뜨 신부님이 공직하는 성당
판 깍 뜨 신부님은 베트남장애아동협회 부회장이시고, 국회의원을 3선이나 하신 유명한 분이라고 했다. 참고로 베트남인의 종교는 불교가 주류이고, 가톨릭이 소수 종교이지만 프랑스 식민지하에서 가톨릭이 주로 상류계층에게 전파되어 가톨릭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크다고 한다. 또한 할당제 등이 있어서 가톨릭신부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신부님은 한국에도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고, 필자가 광주출신이라고 하자 20여년전에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당초 오후 4시에 만나뵙기로 했는데 한 시간 가량 늦게 오셨다. 그 이유는 4일 전에 신부님이 한 분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늦으셨다고 했다.
10여년 전에 한국 수도회의 지원을 받아서 장애인복지센터를 설립했다고 했다. 장애인복지센터는 구찌지역에 있는데, 이곳은 전쟁의 후유증이 큰 곳이기에 75명 정도의 장애인을 돌보고 있다고 했다. 2004년에는 장애인특수학교를 지었는데, 현재 50여명의 장애인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내일 구찌에 있는 장애인복지센터를 방문할 예정인데, 이에 대해서 감사를 표했습니다.
현재 제3의 장애인복지센터(The Thien Phuoc Centre for Children with Disability)를 설립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조감도 등이 들어있는 소책자를 주셨다. 4천제곱키로의 땅을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건축허가도 받았지만 건축비가 문제라고 했다. 200만불정도 필요한데, 현재 100만불은 헌금을 약속받았고, 나머지가 조성되길 희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지원하여 장애인복지센터를 꼭 짓고 싶다고 했다.
천정웅 교수가 “신부님께서 장애인복지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이유”를 묻자, 신부님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소외계층이고 전쟁으로 장애인과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장애인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년 8월 15일에는 장애인 관련 행사를 이 성당에서 한다고 했다. 정부지원이 있지만 미약하여 장애인을 모두 돌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장애인 중에는 가족이 숨겨서 외부 활동을 못하는 장애인이 적지 않고, 학교에 다니고 싶어도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장애인이 많다고 했다. 지금은 사회가 발전되어 손가락 하나만 있어도 컴퓨터를 쳐서 장애인이 사회참여를 할 수도 있는데, 배우지 못하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장애인을 모아서 장애인학교를 만들고, 신문에 홍보하여 많은 사람이 장애인복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혼자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복지에 적극 참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제3의 장애인학교를 만드는 이유도 좀 더 많은 장애인에게 지원을 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오덕 교수도 “베트남을 위해서 한국인의 참여를 이끌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베트남인도 장애인복지에 적극 참여하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부님의 희망대로 장애인복지센터가 꼭 설립되길 기원하여 본다.
우리 일행이 준비한 수삼을 선물로 드리자, “한국인들이 준 인삼을 먹어서 현재 72세인 나이보다도 젊게 산다”고 하였다. 신부님의 접견실 옆에 ‘한인천주교회’란 표기가 있어서 그곳에서 함께 사진을 찍자로 제안하자, 성당 앞쪽을가르키며 그곳에서 사진을 찍자로 했다. 신부님은 상당히 위트가 좋고 사교적인 분이셨다.
성당과 신부님 면담을 마친 후에는 큰 마트에 있는 식당가로 가서 자유롭게 식사를 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당이 많았는데 우리 가족은 천 교수 가족과 함께 KFC로 가서 치킨 등을 시켜서 먹었다. 마트에 들려서 아침에 먹을 바케트에 발라먹을 잼과 벌꿀을 샀다. 과일가게에서 망고스텍과 두리안을 구입해서 호텔에 와서 먹었다. 베트남에서 이틀째는 매우 분주하게 지났다.
[이용교 lyg29@hanmail.net 2009년 7월 13일 작성, 7월 22일 재정리]
** 이 보고서는 초안이고, 향후 더욱 수정보완 될 것이다. 따라서 참고는 하되 인용을 삼가하기 바란다. 부득이 인용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시민과 함께 꿈꾸는 복지공동체- 한국복지교육원 이용교 원장이 쓴 ‘제1회 베트남 봉사/문화활동 - 2009 Vision Trip 보고서(안)’ ”이라고 쓴 후에 인용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