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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진의 문화 읽기·5
有美無罪, 無美有罪
루키즘(lookism)에 대한 소고
글 | 사진·이화진 (mysleepwalk@naver.com))
독살미인 김정필
지금으로부터 81년 전에 한 젊고 예쁜 여성이 마음에 없는 결혼으로 고통 받다가 결국 조혼한 남편을 독살했다고 하여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었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스무 살의 김정필은 “원래 품행이 단정치 못하여 시집오기 전에 자기와 열두촌 되는 그 동리 김옥선이와 수차례 정을 통했었다. 김정필은 자기 남편이 얼굴이 곱지 못하고 무식하며 성질이 우둔한 것을 크게 비관하여 남편을 독살하고 이상적 남편과 살아보리라 결심하였다. 하여 23일 주먹밥과 엿에다가 쥐잡는 약을 섞어 남편에게 위병과 임병에 좋다 하고 먹여 27일 기어이 사망케 했다.”고 한다.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남편을 독살한 김정필은 그녀의 혼전 성관계가 불리하게 작용해,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피고 김정필은 이에 대해 항소하고 이 사건은 중앙법원에 회부되었다. 그런데 쉽게 묻혀지고 말 일로 보였던 이 사건은 피고가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세상의 관심을 끌게 된다.
“본부독살미인” 김정필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는 보도 기사. 김정필 사건은 기생 강명화 의 자살, 윤심덕·김우진의 현해탄 동반자살과 함께 1920년대 가장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사진 오른쪽: 영화 “친절한 금자씨” (출처 : ‘친절한 금자씨’ 홈페이지)
영화에서 이영애가 분한 금자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다. 스무 살에 죄를 짓고 감옥에 가게 된 금자는 어린 나이, 너무나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검거되는 순간에도 언론에 유명세를 치른다.
김정필은 완강하게 독살혐의를 부인했다. 독약을 영약으로 여긴 시어머니가 남편의 병을 고치려다 죽음을 초래한 것 같다고 진술했고, 결혼 전의 성관계는 강제 추행이었다고 주장했다. 남편의 병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불만이 있었다면 이혼을 청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기에다 경찰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는 김정필의 읍소가 알려지면서 여론은 그녀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로 의견이 분분했다. 설령 유죄라고 하더라도 이는 조혼에 의한 참극으로서, 김정필이라는 한 개인이 살인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살인한 것이라는 절충론도 제기되었다. 김정필은 이후 독살 혐의 자체가 인정되었어도 조혼이 불러온 참극의 희생자로서 사람들의 동정을 받았다. 동아일보에는 그녀를 사형시키지 말라는 투서가 산 같이 쌓였고, 문사들 가운데도 김정필을 옹호하는 글을 실은 이가 있었다.
1925년 10월 무기징역을 언도받기까지 일간지에 김정필 특집이 마련될 만큼 김정필은 당시 최고의 화제인물이었고,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그녀의 근황을 궁금히 여겼다. 1933년 ‘삼천리’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김정필과 같이 복역한 이가 그녀의 옥중 근황을 전한 기사가 실렸는데, “열아홉에 옥에 들어와 누른 옥의 속에서 일생에 가장 아름다워야 할 10년이란 긴-청춘을 보내는” 김정필에 대한 동정어린 시선은 여전했으며, “버들잎 같이 길게 생긴 얼굴의 윤곽에다가 상긋하고 어여쁘게 솟은 코, 어이어 낸 듯한 입” 등 그녀의 빼어난 외모에 대한 묘사도 빠지지 않았다. 출옥 후에도 매스컴은 그녀를 조용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12년 만에 출옥한 그녀가 고향에 내려가 여관 하녀 일을 하고 있다는 제보를 들은 한 기자는 멀리 그곳까지 찾아가 그녀의 근황을 취재할 정도였다. 이렇듯 사람들이 십년이 지나도 그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저지른 가공할 만한 죄나 조혼이라는 폐습의 피해자라는 문제성 때문이기보다는 보기 드물게 빼어난 미모 때문이었다.
미녀는 선녀다 ?!
80년이 더 된 이야기이지만, 죄보다도 외모가 더 화제가 되는 풍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찰청 홈페이지에 공개수배자로 사진이 게재된 한 강도용의자가 “강도 얼짱”이라 불리며 누리꾼들에게 큰 인기를 끈 일이 있었다. 당시 용의자의 사진이 게재된 사이트에는 “얼굴이 예쁜 ○○ 씨가 범죄를 저질렀을 리 없다”와 같이 ‘미녀는 선녀다’ 식의 답글이 줄을 이었고, 심지어 “강도 얼짱”이 포털 사이트의 인기검색어가 될 정도였다.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는 게 그저 농담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루키즘(lookism)은 그치는 곳을 모른다. “얼짱”, “몸짱”이라는 신조어는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새 말이 아니다. 80여 년 전에 “독살미인”이 등장했을 때, 젊은 여성이 사회적 사건에 휘말릴 때마다 “미인”이라는 딱지를 붙였던 것과도 상통하는 현상일 것이다. 각종 매스컴이 현상을 부추기는 것도 80년 전과 닮은꼴이다. 예쁘다는 것 때문에 그녀들이 저지른 죄상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 예쁜 그녀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동정 속에서 우대되는 것은 사실이다. 뜻하지 않은 바겠지만, 미모는 무기다.
외모는 자산이다.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는 뉴욕타임즈에 연재하는 칼럼 ‘온 랭귀지(On Language)’에서 인종, 성별, 종교, 이념에 이어 인류 역사에 불평등을 만든 원인 중 하나로 외모를 지목했다. 이제 외모가 개인간의 우열은 물론이고 부와 명예, 인생의 성패까지도 좌우한다는 것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날씬한 여성이 뚱뚱한 여성보다 10% 이상 연봉을 더 많이 받는다. 외모는 다른 모든 무능과 추악함을 상쇄하고, 또 인종, 성, 연령, 종교 못지않은 차별의 기준이 되고 있다.
외모는 연애와 결혼과 같은 사생활뿐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개입된다. 서로 간의 친밀도가 중요한 특정 분야에서는 호감을 주는 외모가 업무의 효율을 높이기도 하며, 신분상승의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외모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분야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들과 어울려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은연중 외모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아무리 학벌이 좋아도 외모가 받쳐주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고, 아무리 학점이 좋아도 외모 때문에 번번이 면접에서 탈락한다. 사태가 이 정도면,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히 외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생존의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돈을 얼마나 들여 성형수술을 하든 고쳐서 나은 상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고치겠다는 말쯤이야 이제 어색할 것도 없다. 남 보기에 좋은 외모를 갖추는 것은 학위를 취득하거나 고시에 합격해서 “-사” 붙은 직업을 갖는 것보다 훨씬 쉬워 보이는 일이며, 신체는 언제나 그 자신에게 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학벌이나 직업 같은 것보다 오히려 “관리”가 필요한 “품목”인 것이다. 외모는 자산이다. 결혼정보회사의 고객인적카드처럼 학벌, 직업, 재산, 외모, 부모의 직업과 재산 정도가 수치화된다고 할 때, 지금이라도 빠른 시간 내에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은 외모밖에 없다. 더 나은 외모를 갖추기 위해서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자할 줄 모른다면 자기 관리에 게으른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이 당연시 된다. 마치 입시 전쟁을 치르는 고3 수험생처럼 신체의 각 영역에서 자신이 “모자란” 부분을 집중 관리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표준 이상의 사람이 되어야만 생존 경쟁에서 불리하지 않을 것 같다. “미(美)”는 권력화 되고 있다.
영화 “여고괴담3-여우계단” (출처 : 네이버 영화)
여고괴담의 세 번째 이야기인 ‘여우계단’에 출연한 박한별은 인터넷 얼짱 출신 중 한 사람이다. 누리꾼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얼짱들이면, 연예기획사의 손을 거쳐 연예인으로서 “등용”될 날을 준비한다.
얼마 전, 서울대 얼짱으로 유명한 한 탤런트가 친구들과 찍은 졸업 사진이 인기검색어가 된 적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너무 예쁜” 그녀의 친구들 역시 그녀 못지않은 외모의 소유자들이라는 게 관심을 끌었다. 학벌이 좋고 외모가 빼어나니, 그들은 졸업을 한 순간 이미 남들보다 서너 발자국은 앞서서 출발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집안, 부모의 재산 정도 역시 남부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가난한 엘리트 남성과 부유한 집안의 미모의 여성의 결합을 사회적인 성공의 출발점으로 여기던 출세지향적인 1970년대 결혼 풍속이 낳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사람들은 마냥 부러워하지만, 돌아서서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외모가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관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외모라는 자산도 결국은 계급적인 것으로 환원되며, 그렇게 재생산되는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런 식의 루키즘 비판이 결국, 한 개그맨의 말을 빌면 “얼굴도 못 생긴 게 잘난 척 하기” 이상이 아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지금 외모라는 것이 하나의 차별의 기제라고는 하지만, 성별이나 학력이나 연령이나 지역 차별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키즘의 함정은 우리가 루키즘에 침윤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루키즘이라는 차별주의에 동조하고 있으며, “美는 곧 善이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인정하고 표피 아래의 진실을 간과해 버린다. 예쁘면 보는 사람 기분도 좋으니, 그냥 좋은 것이라고 하자. 그러면 못 생기면 나쁜 것인가. 못 생기면 죄송해야 하는가.
못 생겨서 죄송합니까?
사실,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마땅한 해결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살갗의 아름다움을 보지 말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라”고 한들, 그 말을 들어보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누구나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블로그나 미니홈피 같은 웹미디어를 통해서 그 이미지를 게시하고 유통할 수 있는,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의 인프라가 잘 구축된 사회에 살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돈만 있다면(!) 온갖 수단을 이용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변신이 가능한 시대이지 않은가. 내면의 아름다움을 누누이 강조한다고 한들, 다 시절 모르고 하는 말인 것이다.
비판해야 할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사람들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몇 점짜리인지를 수치화해서 평가하기를 좋아하고, 그 평가의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가치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양한 가치를 인정할 시간이 없다. 외모는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니, 학력이나 이력처럼 허위로 조작할 가능성도 없고, 인성만큼 판단에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아유핫? (Are you hot?)>과 같은 TV 프로그램은 그 극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스튜디오에 있는 관객들은 야유나 함성으로, 심사위원들은 수치화된 점수로, 출연자들이 섹시한지 아닌지를 평가한다. 그들이 받게 되는 적나라한 평가는 HOT 혹은 NOT이다. HOT이라면 다음 방송을 기다릴 것이고, NOT이라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다. 기이하게도,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신체 부위가 심사위원들의 눈에 의해 고깃덩어리처럼 절단되어도 자기 전시(self-display)의 쾌감을 즐기며, 진정으로 자신의 몸이 몇 점짜리인가를 평가받고 싶어 한다. 루키즘에서 우려되는 바는 자기 스스로를 사물화에 내맡겨버림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다움의 가치를 상실하는 일이다. 이는 루키즘이 새로운 차별의 기 제로서 부상하고 있는 것 못지않게 위험한 일이다.
못생겨서 죄송한가. “有美”든 “無美”든 아무도 죄는 없다. 미녀든 추남이든, 이 새로운 차별과 인간의 사물화에 맞설 저항의 전략이 필요하다. ●
이화진
연세대 국문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한국방송통신대에 출강한다. 전공은 식민지 시기 한국의 대중문화이며, <식민지 영화의 내셔널리티와 ‘향토색’>, <소리의 복제와 구연공간의 재편성> 등을 발표했다.
윗 글은 월간 사진예술의 협찬으로 제작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