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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면(下道面446))
200. 문산동(文山洞447))
摩尼東北是文山마니산 동북쪽이 문산리 마을인데,
某某家門在此間이런 저런 가문들이 이곳에 살고 있지.
士者先知農業重선비된 자 농사의 중요함을 먼저 알아,
時從野外勸耕還때를 맞춰 밭에 나가 경작 권하고 돌아오네.
○ 하도면(下道面)은 강화부 관아 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 문산동(文山洞)은 예전의 박산(博山)이다.
○ 파평윤씨(坡平尹氏), 의령남씨(宜寧南氏), 청주한씨(淸州韓氏), 안
정나씨(安定羅氏)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201. 상방동(上坊洞448))
東風吹到上坊村동풍이 일어나서 상방촌에 불어오니,
李柳春光闢兩門이씨와 유씨가 문을 열고 봄빛 맞네.
耕讀漁樵勤儉業밭 갈고 책 읽고 고기잡고 나무하며 부지런히
일하니,
446) 원본에는 ʻ하도면ʼ이 빠져있으나, 구창서발문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하도면
은 현재의 화도면이다.
447) 화도면 문산리이다.
448) 화도면 상방리이다.
하도면(下道面) 223
還449)從物外起田園욕심 없이 한가하게 전원에서 살고 있네.
○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이풍천(李豊川)의 후손이다.
○ 유씨(柳氏)
202. 내동(內洞450))
內洞水石最云奇내동은 수석이 기이하다 말들하고,
柿棗千株列作籬수많은 감나무와 대추나무로 울타리를 둘렀네.
宦客騷人多寓此관료들과 문인들이 이곳에 많이 있어,
鶯花富貴又兼之영화와 부귀를 겸하고 살았네.
○ 이곳은 물과 돌이 많고 기이하며 감과 대추가 이곳에서 잘 자
란다. 근래에는 서울의 벼슬아치와 본향의 선비들이 이곳에 많이 살
고 있다.
203. 마리산(摩尼山)
來坐摩尼最上頭마니산 최상봉에 올라가 앉아 보니,
江州一片泛如舟강화섬 한 조각이 배를 띄운 듯하구나.
檀君石迹撑天地단군의 돌 단은 천지를 떠받들고,
萬億年間與水留억만년 긴 세월을 물과 함께 남아있네.
449) 구창서발문본에는 ʻ還ʼ이 ʻ閑ʼ으로 되어 있다.
450) 화도면 내리이다.
224 譯註 沁都紀行
○ 참성단(塹城壇)은 정상에 있으며 돌을 포개어 쌓았다. 일명 참
성단(參星壇)이라고도 한다. 전해지기를, 단군이 태어난 것을 감사하
게 생각하여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지내 근본에 보답하였다 한다. 동
방의 특교(特郊)의 예(禮)로 지내는 바라고 한다. 또 단군이 쌓은 이
단에서 하늘에 제사지냈다고도 한다.
○ 북쪽 기슭에는 천재암(天齋庵)이 있는데 고려 때 태종께서 잠
저에 계실 때 대언으로써 이곳에서 주무시고 산제(山祭)를 지내셨다
고 한다.
○ 고려 고종 46년(1259)에 교서랑(校書郞) 경유(景瑜)의 말을 따
라서 이 산 남쪽에 이궁(離宮)을 지었다고 한다. 또 산천제단(山川祭
壇)이 있었다.
○ 우리 조정에서는 특교의 예로 매년 2월과 8월에 날짜를 정하여
행하였으며, 축문이 서울(京師)에서부터 이르렀다.
○ 목은(牧隱) 이색(李穡)451)의 시는 다음과 같다. “분향하고 앉았
는데 곁에서 시를 읊네(樊香淸坐側吟頭) 텅 빈 실내는 배(舟)처럼 작
구나!(一望虛明小似舟) 기분 좋은 가을 햇빛 문을 열면 들어오고(最
愛秋光開戶入) 산 그림자는 뜰에 가득 머무누나.(更邀山影滿庭留) 몸
에는 먼지 없으니 봉황(鳳)을 탄 느낌이고(身輕無垢思騎鳳) 세상 일
잊은 마음 갈매기(鷗)와 친하려네.(心靜忘機欲近鷗) 연단(煉丹)을 먹
지 않아도 신선이 되는 길은(不用煉丹永羽花) 육정(六情)을 청소하면
저절로 자연의 도를 깨치네(掃除六鑿更天遊)”
○ “무슨 일로 무릉(茂陵)에서 신선 되길 원할까(茂陵何事苦求仙)
봉래산이 어쩌면 여기인 것을.(祗是蓬萊亦或然) 산인지 구름인지 한
계조차 없는데(山與浮雲自無際) 바람불자 배도 가니 어느 것이 먼저
451) 이색(1328∼1396) 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
叔), 호는 목은(牧隱). 찬성사 곡(穀)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하도면(下道面) 225
일꼬.(風吹船去莫能前) 금인(金人)452)의 이슬방울 그릇에 고여 있고
(金人一滴盤中露) 청오(靑烏)453)도 한 마리 바다 위에 날고 있네.(靑
鳥孤飛海上天) 어떤 것이 참성단에 치성을 드림과 같으리요(何似塹城
修望秩) 앉아서 태평 세상 누리게 될 것을.(坐令人享太平年)”
○ “산하가 이처럼 험준하니(山河險如此) 웅장하다 우리 국토여!
(壯哉吾有國) 절정(絶頂)엔 구름의 기운이 흐르고(絶頂雲氣流) 벼랑엔
교목(喬木)이 걸쳐 있네(傾崖俯喬木) 바람이 불면 장소(長嘯)가 일어
(臨風發長嘯) 여운이 바위골을 진동하누나(餘音振巖谷) 소문산(蘇門
山)454)에 들어가 숨어 버릴까(欲繼羨門遊) 석수(石髓)455)도 이제 청
색일 텐데.(石髓今正綠)”
○ “해와 달은 수레의 쌍수레바퀴요(日月兩轂輪) 우주는 한 칸의
집이로세.(宇宙一門屋) 이 단(壇)이 천작(天作)은 아닌데(此壇非天成)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없어라.(不知定修築) 향연(香煙) 오르니 별조차
낮은 듯(香昇星爲低) 악곡이 연주되어 분위기 엄숙하네.(章入氣初肅)
공경히 신의 섭리에 응답할 뿐(祗以答神祝) 어떻게 스스로 복을 구할
452) 쇠붙이를 주조하여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서 세워둔 것인데 진시황이 천하
의 병기를 함양(咸陽)에 모두 집합, 그것을 녹여서 금인 12개를 만들어 궁
중에 세웠는데 이것은 진(秦)나라 이외의 중국 천하를 약하게 만들려는 의
도에서 나온 계획이었으며, 금인의 손바닥에 고이는 이슬을 받아서 먹으면
장생불사의 신선이 된다는 등의 전설들은 후세 사람들의 시에서 많이 쓰
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53) 청색의 까마귀. <分信道士步虛詞>에는 ʻ적봉(赤鳳)은 구슬을 물고 날아오
고 청오는 책을 바친다ʼ는 글이 보이는데 적봉과 함께 신선이나 도사의
생활을 읊는 시부(詩賦) 등에 등장하는 가상적인 상물(祥物)인 듯 하다.
454) 중국 하남성에 있는 산 이름으로 일명 蘇嶺·百門山 이라고도 하는데 그
것은 산 꼭대기에 百門泉이 있어서 붙혀진 이름이다. 晉의 孫登과 宋의
邵雍 등이 이곳에 올라가서 선도를 익히며 은거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
다.
455) 石鐘乳의 별명이며 玉髓라고도 부른다. <仙經>에는 5백년에 한번 열리는
석수를 따서 먹으면 장생불사한다고 쓰여 있는데, 옛 사람들이 仙遊·隱
居 등의 시를 지을 때 자주 쓰여지는 문귀이다.
226 譯註 沁都紀行
수 있으랴.(何以自求福)”
○ “바람을 타고 요대에 오르니(長風吹我上徭臺) 넓은 바다 높은
하늘 만리까지 트였도다.(海闊天遙萬里開) 벼슬 버리고 먼지 털며 발
을 씻지 않아도(不用振衣仍濯足) 학을 탄 신선의 피리소리 들리는 듯
하네.(似聞笙鶴駕空來)”
○ “만길 높은 단엔 밤 기운도 맑은데(萬丈玄壇夜氣淸) 녹장(綠
章)456)이 울려오니 세상 인정 잊혀지네.(綠章才奏澹忘情) 돌아가는
말안장에 장생복(長生福) 가득 실어(歸鞍滿載長生祿) 우리 임금께 올
리면 태평성세 이루리.(拜獻吾君作太平)”
○ 이강(李岡)457)의 시는 다음과 같다. “심신이 한가하니 신선처럼
느껴져서(心精身閒骨欲仙) 아득한 인생살이 망연도 하네.(遙思人事正
茫然) 제물을 바쳐 제사함은 중흥된 오늘이요(薦蘋秘席中興後) 돌을
모아 영단(靈壇)을 만든 때는 태고였어라.(疊石靈壇太古前)”
○ 이미 눈은 천리 밖 땅을 보게 되었고(已得眼看千里上) 이 몸은
구중 하늘에 떠있는 듯 하여라.(怳疑身在九重天) 혼자뿐인 이번 행차
아무도 모르겠지(此行無偶如相說) 누가 환도(還都)의 첫해를 맞이 하
려나.(誰値還都第一年)
○ 저촌(樗村) 이정섭(李廷爕)의 시는 다음과 같다. “수많은 봉우
리에 석대가 높으니(亂峯中斷石臺峩) 구름 바다 비껴가니 굽어서 문
지르네.(雲海橫前可俯摩) 구름 물결 말려들어 기이한 산 무너지고(雲
浪卷疑頹玉嶂) 아스라이 배돛대는 은하를 범하려하네.(風檣渺欲犯銀
河) 먼하늘 운무는 남쪽 섬에 자욱하고(遙天霧吐三南島) 포구의 조수
는 천리 모래 뒤덮네.(支浦潮呑千里沙) 힘이란건 다하지만 마음은 끝
456) 道士가 천신에게 올리는 녹색의 편지를 말하는데 즉 봄의 찬미같은 것이다.
457) 이강(1333∼1368)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수문하시중을 지낸 암
(嵒)의 아들이다.
하도면(下道面) 227
이 없어(目力有窮心不極) 기이한 절경에서 한번 높게 노래하네.(玆遊
奇絶一高歌)”
204. 천재암(天齋庵)
天齋庵後一壇嵬천재암 뒤에는 높은 단이 우뚝하니,
上帝監臨下八垓상제가 강림하여 팔방을 내려 보네.
昔我太宗昭事地옛적에 태종이 제사 모시러 온 곳이니,
至今御祝自京來서울서 온 임금님축문 오늘까지 전하네.
○ 자세한 것은 위의 주(註)에 보인다.
205. 성단청조(星壇淸眺)
星壇淸眺遠無迷참성단 밝게 보여 멀지만 흐릿하지 않고,
東峽南湖又海西동쪽은 산 남쪽은 호수, 서쪽은 바다라네.
五百里如雙眼入오백 리 먼 거리가 두 눈에 들어올 듯하고,
冥鴻歸處影高低저멀리 기러기 돌아가는 곳 그림자는 높았다 낮
아지네.
○ 참성단의 맑은 조망 역시 강화부의 10경(景) 중의 하나이다.
이 단에 오르면 동서남 5백리의 땅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며 환히 알
수 있다.
228 譯註 沁都紀行
206. 망도서(望島嶼)
回首西南海色長고개 돌려 서남쪽 보니 바다 넓게 펼쳐있고,
浮浮島嶼摠環疆떠 있는 섬들도 모두다 우리 강토.
列星半落靑天外열 지은 별들이 하늘 밖으로 기우니,
點點如碁一局張점점이 늘어선 모습 한판의 바둑판 같구나.
○ 정상에 올라 서남쪽을 바라보면 강화부의 14개의 섬이 바둑처
럼 펼쳐져 있다.
○ 14도는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매음도(媒音島), 사
도(蛇島ㆍ거주민은 없고 산에는 대나무가 있다), 석모도(席毛島), 미
법도(彌法島), 서검도(西黔島), 동검도(東黔島), 말도(唜島), 볼음도(乶
音島 ; 혹은 望島라고도 한다. 강화부의 향교는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터와 위전만이 남아있다.), 아차도(阿此島) 등이 있다.
○ 유수 이민서(李敏叙)458)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가벼운 바람
불어 돌아온 배 보내고(輕颷拂拂送歸帆) 안석에 기대어서 초연하게
취한다네.(隱几超然倚半酣) 물 건너 산을 보니 원근이 어지럽고(隔水
看山迷遠近) 돛대 돌려 기를 굴려 방향을 잃었다네.(回檣轉柁失東南)
서쪽으로 나는 새 그 수는 셀 수 없지만(日西翔鳥且千百) 안개에 고
깃배는 몇 척이 아니 되네.(烟際漁舟時兩三) 믿을 만한 강도부는 서
로가 도와서(賴有府中携手客) 사람을 흥을 돋아 끝까지 살피네.(令人
發興得窮探)” 이 시의 제목은 ʻ주문도(注文島)ʼ이다.
○ 유수 이민서의 시는 다음과 같다. “배 버리고 작은 섬을 찾으
니(捨舟尋小島) 숲속에서 오르기도 내리기도(榛逕歷高低) 황량한 산
458) 이민서(1633∼168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이중(彛仲), 호는 서하(西河).
1683년 강화부유수가 되고, 예조·호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하도면(下道面) 229
아래엔 옛우물 있고(古井荒山下) 교목의 서쪽에는 초가가 있네(茅茨
喬木西) 깊은 이랑 좋은 토질 자랑하고(畝深誇土美) 궁벽한 곳 바위
에서 사는 듯(地僻類巖棲) 예전에는 뗏목타고 다녔지만(宿昔乘桴地)
바람 따라 처량한 이 마음(臨風意更凄)” 이 시의 제목은 ʻ장봉도(長峯
島)ʼ이다.
○ 유수 이민서의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 물결 치고 치니 앞의
섬이 어둡고(輕颷拂拂送歸帆) 쉬지 않고 밤새 돌아 배를 옮기네.(隱
几超然倚半酣) 뜬 구름 없어지고 온누리가 맑아지니(隔水看山迷遠近)
밝은 달이 떠올라 배앞에 걸리네.(回檣轉柁失東南) 허공에 의지해 부
요459)의 힘 아니 빌려(日西翔鳥且千百) 뜻을 얻어 진실로 실컷 노니
네.(烟際漁舟時兩三) 취하여 누워서는 날새는 줄 모르고(賴有府中携
手客) 새벽되어 흰갈매기 나는 꿈을 꾼다네.(令人發興得窮探)” 이 시
의 제목은 ʻ상월(賞月)ʼ이다.
207. 장곶동(長串洞460))
尼嶽西停長串村마니산 서쪽의 장곶촌에 머무니,
鎭墩無迹海雲飜진과 돈대 흔적 없고, 바다 구름만 피어나네.
樞官庠士朱兄弟중추원 의관 지낸 주씨 집안 형제는,
楊柳樓臺始闢門양류 누대에서 가문을 열었네.
○ 장곶(長串)은 예전에 진과 돈이 있어 별장을 두었다. 병진년
459) 부요(扶搖)는 부상(扶桑)을 말한다. 즉 해 뜨는 곳에 있다고 전하는 신목
(神木)이다.
460) 화도면 장화리이다.
230 譯註 沁都紀行
(1676)에 유수 허질(許秩)이 설치한 바로서 지금은 폐하였다. 신안
주씨인 주윤창(朱潤昌)이 의관(議官)을 지냈고 아우 주윤호(朱潤
鎬)461)는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208. 여차동(如此洞462))
如此洞開海一濱여차동은 바닷가에 펼쳐져 있는데,
李高窓下各逢春이씨 고씨네 창문에는 봄기운이 가득하네.
白鷗何事疑漁網백구는 무슨 일로 고기 그물 의심하나,
與爾年年共許親오래 세월 함께 살며 허락한 친구 사이인데.
○ 경주 이씨와 제주 고씨가 여기서 많이 살고 있다. 이곳은 바닷
가라서 고기잡이와 소금으로 생업을 삼고 있다.
209. 흥왕동(興王洞463))
興王村裡列韓基흥왕촌 마을에는 한씨 집안이 자리 잡아,
山石撑墻水拍籬산돌로 담 두르고 개울물로 울타리 쳤네.
書士指言麗代事고려시대 일들을 서생이 말하는데,
文宗昔日祝神釐그 옛적 문종이 복을 빌던 곳이라네.
461) 주윤호(1877년 출생) 본관은 능성(綾城). 1894년 식년시 진사(進士) 3등
254위로 합격했다.
462) 화도면 여차리이다.
463) 화도면 흥왕리이다.
하도면(下道面) 231
○ 흥왕촌(興王村)이 곧 흥왕동(興王洞)이며, 일명 희황촌(羲皇村)
이라도고 한다. 청주 한씨는 삼괴정 한경린의 후손 한씨들의 세족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 예전 흥왕사(興王寺) 평전(平田)에 주촛돌이 남아있어서 지금도
징험할 수 있다. 대개 고려 문종의 축리소(祝釐所)였다. 어떤 이는
“고려 고종 46년(1259)에 교서(校書) 경유(景瑜)의 말을 따라 이곳
에다가 이궁(離宮)을 지었다.”고 하였다.
210. 화포선생집터(花浦址464))
花浦舊基問在何화포선생 옛 집터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居人尙指一雲坡구름 낀 언덕을 그곳 주민이 가리키네.
大江流去碑猶立큰 강물은 흘러가도 아직 비석 서있으니,
到此踟躕不忍過여기 오면 머뭇거리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465) 학사(學士)의 집터는 흥왕동(興旺
464) 화포 홍익한의 집터는 흥왕리 큰말 서북쪽 골말(고른말)에 있다.
465) 홍익한(1586∼1637)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霫). 자는 백승(伯
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이정구(李廷龜)의 문인다. 1624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635년 장령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
어나자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론(和議論)을 극구 반대하였다. 이 난
으로 두 아들과 사위가 적의 칼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자결하였
으며,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 살아남았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
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
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서 갖은 협박과 유
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른바 ʻ삼학사ʼ의 한 사
람이다. 강화의 충렬사,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
(褒義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포집(花浦集)≫이 있고, 영의정
232 譯註 沁都紀行
洞)에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충렬사 주(註)에 보인다. 김종후(金
鍾厚)가 돌에 새겨 세워 놓았다.
211. 동막동(東幕洞466))
東幕村前水拍堤동막촌 앞쪽에는 물막이 뚝이 있고,
碁巖隨勢自高低바둑바위 물때 따라 높아지고 낮아지네.
年年三月南遊客해마다 3월이면 놀러오는 나그네가,
小店斜陽問絡蹄석양 무렵 가게에서 낙지를 찾는다네.
○ 이곳은 바닷가에 있는데 산을 등지고 있으면서 바둑돌같은 암
석이 갯벌에 여기저기 박혀있다. 바닷가의 낙지는 ʻ소팔초어(小八梢
魚)ʼ라고도 하는데, 늦은 봄에 술안주로 매우 좋다고 한다.
212. 해산정(海山亭467)*)
遲遲來坐海山亭천천히 해산정에 올라와 앉으니,
亭古人歸水不停정자는 낡고 사람은 가고 없어도 파도는 멈추질
않네.
唯有東堤槐一樹오직 동쪽 제방 위에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는,
數百年來獨自靑수백 년 살았지만 혼자 절로 푸르네.
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466) 화도면 동막리이다.
467) 화도면 동막리 정전(긴밭말)에 있었다.
하도면(下道面) 233
○ 마니산 남쪽 바닷가 산의 정자는 참봉 신광일(申光一)이 세워
놓은 것이다. 정자 동쪽에는 한 그루의 큰 괴목이 있는데 대체로 수
백 년은 되었다. 단청이 칠해져 있어 평범한 정자와는 다르다. 지금
폐지되었다.
213. 정수사(淨水寺468))
淨水幽深地不凡정수사 그윽하고 그 터도 비범하니,
法華金字匣中緘법화경 금자 사경 서갑 속에 봉해 있네.
浮屠前殿涵虛蹟부도 앞쪽 전각은 함허대사 유적인데,
今日猶傳閣氏巖각시바위 전설이 오늘까지 전해오네.
○ 정수사(淨水寺)는 마니산 동남쪽 계곡 가운데에 있다. 절 아래
에 부도전(浮屠殿)이 있었는데 명나라 영락 년간(1403~1424)에 이름
이 득통(得通)이고 호가 함허자(涵虛子)인 스님이 중국에서 배를 타
고 동쪽으로 와서469) 이곳에 절을 짓고 살았다. 이곳에 각씨암(閣氏
巖 또는 角氏巖)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전하기를 함허자가 이
암자에 머물면서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자 그 아내가 찾아와서 돌아
가자고 했지만 거절당하자 죽어서 바위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
468) 화도면 사기리 마니산 남쪽에 있으며, 정수사법당은 보물 제161호로 지정
되어 있다.
469) 함허기화(1376∼1433) 조선 초기의 유불조화론을 주장한 고승. 성은 유
(劉)씨이고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호는 득통 (得通), 당호는 함허(涵虛).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에서 승려가 되었고, 회암사·대승사·현등사 등에
서 수행하였고, 봉암사에서 열반하였다. 그가 중국에서 왔다는 전설을 입
증할 만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234 譯註 沁都紀行
름이 되었다고도 한다.
○ ≪법화경(法華經)≫의 십여구를 금으로 쓴 것이 있는데, 어떤
이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것이라고 한다.
○ 동악(東岳) 이안눌의 시는 다음과 같다. “천년의 세월에 부도
전은(千古浮屠殿) 마니산 기슭의 동쪽이라네.(摩尼嶽麓東) 인적 드문
휘감는 산속에(山回人境隔) 하늘 넓어 해문으로 통하네.(天闊海門通)
지는 달에 소쩍새는 지저귀고(蜀魄啼斜月) 밤바람에 배꽃이 떨어지
네.(梨花墮暗風) 범의 대에 누가될까 두려워(慚爲虎竹累) 하루 자고
신선과 이별하였네.(一宿別仙翁)”
○ 병술년 유수 이은(李溵)470)이 동생 이미(李瀰)471)와 함께 이
절에 와서 시를 짓고 선조 동악 이안눌의 시판(詩板)를 우러러 보았
다. 시는 다음과 같다. “도읍에 머물다 한가한 날에(留都能暇日) 밤
새도록 산 속을 헤맸다네.(冥搜岳東西) 국화길은 가을의 늦은 때이고
(菊磴三秋晩) 절에 있으니 사방이 통하네.(禪棲四望通) 모여서 훌륭
한 일 전하자니(聯裾傳勝事) 벽에 붙여 유풍을 이어가네.(題壁挹遺
風) 참성단을 향해서 떠나니(更向星壇去) 단목옹의 발자취를 묻는구
나.(問踵檀木翁)”
○ 동생 참의 이미의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바다 저 먼 곳을
건널 때(涉遠滄溟際) 읊조리며 산 동쪽을 오르네.(吟蹤上峀東) 단풍
나무 삼나무 가을 해가 비추고(楓杉秋日暎) 누각에선 저녁 조수와 통
하네.(樓殿夕潮通) 옛날의 정숙하고 고운 시는(古貞娃跡詩) 우리 조
상의 유풍을 전하네.(傳我祖風迎) 앞의 서너 납……(前三四衲□472))
470) 이은(1722∼1781)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1766년 강화유수를 지냈으며, 그 후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471) 이미(1725년 출생) 본관 덕수(德水), 자는 중호(仲浩)
472) 원문에 빠진 글자가 있어 해석이 어렵다.
하도면(下道面) 235
옛날의 영옹(玲翁)을 알 수 있다네.(能識舊玲翁)”
○ 절 앞에 정녀석(貞女石)이 있다. 선집(先集)에도 정수사의 영상
인(玲上人) 준 시(詩)가 있어서 아울러 스스로 주를 낸 것이다.
214. 사기동(沙器洞473))
沙器洞前水向東사기동 마을 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李公節義弟兄同이공의 절개심은 형제가 한 가지네.
家園喬木葱籠氣집 앞 정원 키 큰 나무 무성하게 자랐는데,
雨露光中海日紅이슬방울 빛이 나고 저녁노을 붉게 탄다.
○ 사기동(沙器洞)에는 이시원(李是遠)474)의 집이 있는데 병인년
(1866) 난리에 공이 동생 군수공(郡守公) 이지원(李止遠)475)과 함께
연명상소를 올리고 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상공을 추
증 받고 충정공(忠貞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아들 이상학(李象學)476)
473) 화도면 사기리로 큰사골과 작은사골이 있다.
474) 이시원(1790(정조 14)∼1866(고종 3). 조선 후기의 문신·의사(義士). 본관
은 전주(全州).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 정종의 별자(別子) 덕천
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진사 면백(勉伯)의 아들이며, 건창(建昌)의 할아버
지이다. 개성부유수, 형조판서, 함경도관찰사,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
냈다. 병인양요가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아우 지원(止遠)과 함께 유
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貞)의 시호
가 내려졌다.
475) 이지원(?∼1866) 본관은 전주(全州). 군수를 지냈으며,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부를 점령하자, 형 시원(是遠)과 함께 유소(遺疏)를 올리고
자결하였다.
476) 이상학(1829년 출생)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권(士勸), 이조판서 이시
원의 아들, 이건창의 아버지이다.
236 譯註 沁都紀行
은 음사(蔭仕)하여 군수를 여러 번 역임하였다. 그 손자 이건창(李建
昌)477)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으나 조정에
서는 관찰사의 직책을 주어 3번이나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마
침내 집에서 별세하였다.
215. 덕포동(德浦洞478))
貂皮山下聽黃鸝초피산 아래에서 꾀꼬리 소리 듣노라니,
列柳家門479)一色齊유씨네 집들이 가지런히 자리했네.
白髮靑衫司馬老백발에 푸른 장삼 입고 진사로 늙었지만,
曾年詞賦動江西그의 시문 일찍이 강화 고을 감동시켰네.
○ 전주 세족 유씨들이 초피산 아래 즉 덕포(德浦)에 많이 살았다.
유응(柳應)480)은 일찍이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만년에 사
마시에 합격해서 돈녕부 도정으로 승차되었다.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東到船坪聽野謳동쪽의 선두평엔 들노래가 들리나니,
年年晩稼早登秋해마다 늦게 심지만 일찍이 추수하네.
477) 이건창(1852∼1898) 조선 말기의 문신·대문장가. 본관은 전주(全州). 소
명(小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
478) 화도면 덕포리이다.
479) 구창서발문본에는 ʻ門ʼ이 ʻ家ʼ로 되어 있다.
480) 유응(1859년 출생)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심(敬心). 1879년 식년시 생
원(生員) 2등에 합격했다.
하도면(下道面) 237
閔堤洪匣皆恩澤민유수의 제방과 홍유수의 갑문이 모두 은택 끼
쳤으니,
永與長江水共流영원토록 저 긴 강물과 함께 흐르리.
○ 선평(船坪)은 곧 선두포(船頭浦)이다. 늦은 벼 역시 본부 십경
중의 하나이다. 숙종 병술년(1706)481)에 유수 민진원(閔鎭遠)482)이
포구의 제방을 쌓아 들판을 만들었고, 철종 임술년(1862)에 유수 홍
원섭(洪遠爕)483)이 또 제방 내에 큰 수문을 만들자 포구의 백성들이
신뢰하여 비를 세우고는 ʻ민공의 옛제방이고 홍공의 새로운 갑문이다ʼ
라고 하였다.484)
481) 원문에는 숙종 병인년(1686)으로 되어 있으나, 병술년(1706)의 오류로 생
각된다. 선두포에 제방을 쌓은 공사의 시말은 적어 1707년에 세운 '선두포
축언시말비(船頭浦築堰始末碑)'가 화도면 사기리 비석군에 있다.
482) 민진원(1664∼173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
巖)·세심(洗心). 1705년과 1710년 두 차례 강화유수를 지냈다.
483) 홍원섭(1798∼?)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이강(而剛). 1862년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484) 수문 설치공사의 시말을 적은 1863년에 세운 '중수문비(中水門碑)'가 화도
면 사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