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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Degas
재력 있는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드가는 법률공부를 하다가 이내 중단하고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데생을 중시하며 정확한 소묘 능력으로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감각으로 도시적 삶을 묘사하였다. 도회적 인물의 동세들을 순간적으로 정확하게 포착하여 대상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부분적 강조로 수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경마의 기수들과 함께 발레의 무희, 카페의 여가수, 세탁소 여직공, 욕실의 여인들을 특히 즐겨 그렸다. 젊었을 때의 그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파리의 경마장을 열심히 드나들고, 매일 밤 오페라 극장에 나타나 분장실을 얼쩡거리는 누가 보기에도 천박한 난봉꾼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즐기기 위해 경마장이나 오페라 극장을 다닌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선 무용수나 달리는 말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들의 순간적인 동작에 흥미를 갖고 모티프를 얻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드가는 물체를 둘러싼 광선의 흐름에 커다란 관심을 보인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앵그르식의 사실주의에 입각해 야외 풍경보다는 인간 동작의 한 순간을 사진 스냅처럼 잡아내었다. 이렇게 정확함을 추구하는 그의 예술적 감각은 파스텔화에서 더욱 드러난다. 특히 인간의 동작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발레리나를 파스텔로 즐겨 다루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이 강한 성격 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보내다 만년에 시력을 잃고 그림보다 조각 제작에 더 높은 예술혼을 보이다 1917년 파리에서 83세의 생애를 마쳤다.
Henri de Toulouse Lautrec
그는 명문가 출신 부모의 근친결혼 때문에 다리가 짧고 굽어진 선천적인 기형으로 태어났다. 그의 키는 성장이 멈춘 후에도 153cm 불과 했고 앞이마가 튀어나오고 어깨가 좁은 체형은 마치 서커스단의 어릿광대와 같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술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인 로트렉은 다리가 불편해 돌아다닐 수 없게 되면서 더욱 미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카페와 대중무도회, 카바레 등 속세의 퇴폐적인 모습을 즐겨 표현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그린 물랑루즈의 선전 포스터와 간판 그림들 이였다. 술과 춤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지는 쾌락의 공간 물랑루즈의 밤에 빠져든 그는 카바레와 유흥가를 맴돌았다. 그리하여 로트렉은 거의 매일 밤 몽마르트 언덕을 헤집고 다니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한 일화로 로트렉은 와인을 마시기 위해 주머니에 항상 땅콩을 넣어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밤에 생활하는 그녀들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비애에서 진정한 인간적 아름다움을 보았던 까닭이다.
로트렉은 자신이 가장 좋아한 거리 몽마르트에 자리를 잡고 회화와 일러스트에 몰두하였고 카바레 물랑루즈 포스터를 통해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그는 중국의 그림자 극 및 일본 판화(우키유에: 인물중심의 풍속화)에서 영향을 받아 간결한 실루엣에 중점을 두었고 뚜렷한 색면의 대비를 통한 힘을 강조했다. 때로는 신체적 특징을 자주 과장하거나 왜곡했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동작을 표현하려고 했으며 자유로운 선과 색을 통해 움직임을 나타냈다. 대상을 묘사하는 선은 정확한 표현에 얽매이지 않았고, 서로 대비되는 강렬한 색채로 장식성이 강조되었다. 또한 작품 속 여성들이 지니는 화려함은 작가의 육체적 불행과 정신적 갈등이 승화된 것이기에 묘한 감동을 자아낸다. 거리낌 없는 사실주의적 그림을 그리던 로트렉은 그림에서는 모델의 몸가짐과 특성을 포착하는 데생이 중요한 것이며 색채는 그 데생에 의해 정리된 전체의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만을 담당하면 된다고 생각해 그의 색은 순수한지만 풍자적인 대담성을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부터 성병과 알코올 중독으로 1898년부터 아프기 시작하여 그는 1901년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Émergence : L’impressionnisme et son époque/ 인상주의의 출현 및 시대적 배경
인상주의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유파의 하나로써 1874년에서 1886년에 걸쳐 개최된 8번의 전시회를 통해 19세기 이전의 미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미술이 등장하게 된다.이 인상주의는 아카데미즘에 획을 긋고, 현대 미술의 근본이 되면서 미술사에서도 중요한 대표적인 거장의 화가들을 탄생시킨다.
인상주의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 구분되는데. 첫 의미는 인상파 화가들의 주된 공통점이 기존의 아카데미적인 미술 경향에서의 탈피와 형식적인 전시회에 대해 반대하고, 어떤 관계에도 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관찰과 기법으로 밝고 미묘한 대기의 인상을 묘사하는데 전념 했다는 점이다.그 당시 공식적으로 정부와 사회를 통해 인정된 미술은 오직 아카데미즘 뿐 이였다.이 아카데미즘란 고전적 규범에 충실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의미한다. 나폴레옹 3세는 예술은 나라와 왕을 위해 만들어 지기를 원했으며,나라와 관련 된 주제나 고대 문명에 관련된 주제여야 했다.이렇듯 아카데미즘이 아니면 화가로써 인정 받기 어려웠으며,그 당시 ‘파리 전시회’는 화가로써 유일하게 인정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전시회로 화가의 미래의 작품 활동을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물론 이 아카데미즘을 반대하기 시작한 운동은 당시 낭만주의(들라쿠와,제리코),사실주의(코르베,밀레),바르비죵파(룻소,토로)에서도 서서히 풍경화를 중시 하기 시작했으며 앞으로 젊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좋은 예가 된다.두번째 의미로는 드가를 제외 하고는 야외의 햇빛 아래서 직접 제작을 했다는점이다.자연을 앞에 두고 선입관 없이 그들의 눈에 비치는 것을 그대로 어떻게 표현할 것 인지 고민하고, 표현하기 시작해서 시작되며,시간에 따라 색이 변하는 것은 주로 자연이기 때문에 주제도 주로 자연을 담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하여 사실주의에 동조 된 외광파 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리겠다”는 사실주의 코르베의 사고는 혁명적이나 마네는 새로운 그림은 사고뿐 아니라 그리는 방식도 틀려야 한다고 생각 했다.인상주의의 시초를 제시한 마네는 야외의 햇빛 아래 물체의 색채가 더욱 다채롭다는 점에서 고전적 명암법을 버리는데 이점은 인상파와 추구하는 바가 동일했으나, 전혀 풍경화에는 관심이 없었고,시각 혼합의 기법도 쓰지 않았으며,어두운 톤과 검정색을 쓰므로 인상파 화가들과 차이점을 두었다.그러나 젊은 화가들은 그 당시 스켄달 작품으로 비난의 대상이었던 마네를 중심으로 카페 게르부와에 모여 새로운 회화에 대한 토론과 연구를 하게 되면서 품은 인상주의의 출현을 예고 하는 것 이었다.드가 역시도 인상파이지만 그의 그림도 조금은 다른 성향이 있었으며 ,그후 고흐.고갱.폴 세잔느.뚤루즈 로트렉 또한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로 출발하지만 보다 풍부한 표현을 위해 제한 된 목표(예..7가지의 색깔 한정등)를 거부하여 후기 인상파를 등장시킨다.
인상파 화가들의 친구이자 사진 작가인 나다(Nadar)의 집에서 첫 전시회가 열리고 이때 출품한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는 미술 평론가 르루와(Reroy)에 의해 미완성 작이라는 비난과 함께 ‘인상파 전시회’라는 조롱썩인 기사를 실었는데 여기서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비판과 야유에도 인상파 화가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1897년 귀스따브 까이보트는 화가이자 엄청난 재산가로 사망 당시 그가 수집 했던 67여점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들을 기증하려 했고 르느와르의 노력으로 2년 뒤 한 30여점의 작품들이 룩셈부르그 박물관에 소장되는 과정에서 아카데미 화가들의 커다란 반발과 비판을 받기도 한다.이는 19세기 말 까지도 인상주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점을 엿 볼수 있다.
Origine et Méthode/ 시초 와 기법
1.사진의 발명
화가들의 가장 큰 목적은 현실적으로 실감나는 표현이였는데 사진의 대량 생산으로 일반인들에겐 그림보다 사진이 더 사실적으로 인식 되었고 기존의 사실적인 회화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이제 화가들은 더욱 창조력을 발휘하여 사진 영역 너머에 있는 진리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것은 화가들을 점 점 더 시각적 사실로 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또 구도법에 있어서 화가들은 사진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는데 사진처럼 틀로 시야의 영역을 잘라내는 식의 대담한 구도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과 주제를 순간적으로 포착 하는 점 등 일순간적인 장면을 묘사하게 되었다.
2.M.E 슈브럴(Chevereul) 의 색체와 빛의 원리에 대한 연구 이론
이론에 의하면 노란색 옆에 파란색을 놓고 멀리서 보면 시각상 또 다른색상(초록색)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또 노랑색을 오래 보고 있으면 우리는 거기서 보색인 보라색을 보게 된다는 이론이다.인상파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시각 혁신은 당연히 회화 기법상의 혁신을 수반하게 되며,기법적 원리를 개발하게 되는데 기법을 정리하면, 색이란 3원색 중의 2가지를 섞으면 새로운 색이 되는데,색은 섞으면 섞을수록 명도를 잃게 되므로 이 새로운 색보다 밝은 색을 만들려면 캔버스위에 잔 필촉으로 2색을 나란히 찍고 조금 떨어져서 보면 이것이 혼합되어 보이는 기법이로 ‘시각 혼합 또는 색조 분할’이라도도 한다.그러므로 필요한 색보다 밝은 색을 얻게 된다.이처럼 밝은 바탕을 얻기위해 집요한 노력은 그들의 야외제작의 한 결과로써.즉 빛 속에는 검정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야외에서는 모두가 더 밝게 보이고 빛이 물질에 반사되어 그것이 눈에 들어올때 색이 보인다는것을 체험적으로 이해 하게 되었다.오늘날 거리나 역 안의 큰 광고 포스터도 이 이론을 적용하여 제작된다.
3.휴대의 튜브 물감 발명
인상파 화가들의 주된 주제는 야외에서 그린 풍경화다.휴대하기 좋은 물감의 등장으로 그 전에는 아뜰리에 안에서 보조자들에 의해 물감을 준비 하나 오래 보관 할수 없었고,19세기 초에는 돼지의 방광을 이용해 만든 통에 보관 했으나 실용적이지 못해 많은 불편함을 주었다.이제 이 튜브 물감의 등장으로 아뜰리에를 벗어나서 야외에서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Sa place dans L’histoire d’art /인상주의의 미술사에서의 위치
인상주의가 미술사에 있어서 근대적인 감각의 해방시기 이며 서유럽 사실주의 미술의 최종 단계이자 극치인 동시에 20세기 현대미술을 향한 출발점이다.
인상파는 야수파로 퍼지게 되며 고흐는 표현주의로 고갱은 나비주의로 세잔느는 입체파를 낳게 되며 그외에도 많은 현대 미술 유파에 간접적 직접적 영향을 미친게 된다.
산업화되고 도시화되던 사회속에서 태어난 인상파 화가들로 인해 미술 시장 역시 개방되기 시작 하여 주문식 작품을 구입하던 고정적 수요층인 정부와 교회,혹은 귀족들로 부터 갤러리와 개인 소장가라는 근대적 개념인 미술 제도권이 형성 되므로 화가들이 직접 작품을 거래 할 수 있게 된다.이렇듯 인상파 화가들은 화가의 사회적 역할을 완전히 바뀌어 놓았고 앞으로 미래 화가들에게도 작품 세계의 완전한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또 최근 스페인에서 시작되어 영어권 사회로 급속히 확산되는 화제거리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 사진을 그래도 묘사 했다는 사진들이 해외 인터넷에서 큰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카메라 만큼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준 발명품이 없다는 것은 미술사가들의 공통된 설명이지만 ,설사 그런다 한들 세계속의 명화는 영원한 명화가 아닐까…!이렇듯 인상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연구 관심대상이다.
Des Impressionnistes/ 인상파 화가들
Edouard Manet / 에드와드 마네
스페인적인 미술의 영향을 받은 마네의 기법은 인상파 화가들과 차이점을 두는데
커다란 납작붓으로 연속되는 힘찬 붓터치와 어두운 색깔의 사용이다.작품을 빠른 시간안에 단번에 그리는 것도 그의 특징으로 ‘피리부는 소년’는 한번에 끝내고 석유로 다시 지우기를 12번이나 해서 얻은 작품이다.눈에 보이는 현실을 그리면서 평면적인 화면구성,생략적인 묘사법을 살려 신선한 색채로 화면을 통일하는 것이 그의 기법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올랭피아(Olympia)인데 가장 큰 스켄달을 불러 일으키 작품이다.
여자의 나체화는 하렘의 여자를 연상 시키며 검은 고양이는 당시 매춘부를 의미한다.
당시 나체화가 문제화 된것이 아니라 이 나체화의 기법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는데 그 이전 시대 나체화와는 달리 살아 있는 듯한 생생한 피부 표현과 어두운 뒷배경과의 강렬한 대비이다.그러나 그 당시 가장 공식적으로 큰 충격은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에 관람자가 마치 손님이 된 듯한 느낌으로 부도덕적인 자극을 선동한다고 보았다.그러나 그림을 다시 자세히 보면 여인이 관람자를 왠지 거절하는 듯 왼손으로 sex를 가리고있다.이그림에서 나타내고자 한것은 지금 그림을 보고 있는
관람자 야말로 부도덕적이며 ,외설스럽고,남의 것을 훔쳐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 그림은 기법상으로도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너무나 강렬한 대비의 어색함과 원근법으로 봤을때 왼쪽 팔의 구도와 비례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또 미술 평론가들 중에서는 이그림을 야유해 ‘하렘 여자의 노란 배’라고도 불렸다.모네의 끊임없는 노력 끝에 1890년 프랑스 정부로 부터 구입하게 된다.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왔으나 그는 위대한 고전 미술과 현대성 사이에서 천재적인 중개 역할을 맡고 있은 화가 였고,발표하는 많은 작품마다 비난과 야유를 받았지만 드가,모네,들라쿠르와등 거장화가들로 부터 지지를 받는 화가였다.
Caude Monet/ 끌로드 모네
인상파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이자 가장 전형적인 인상파 화가이다. 그는 86년에 걸친 긴 생애동안 오직 시각에 충실해야 한다는 인상주의 원칙에 충실했고 꾸준히 전개해 나가 마침 프랑스의 대표적인 풍경화가가 된다.그가 본격적으로 인상주의적 순수한 외광연구에 전념한 시기는 약 1868년경으로 색조 분할 수법을 처음으로 시도 하면서부터이다. 이처럼 자연의 변화 무쌍한 모습을 담은 모네의 시각은 연작을 그리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루왕 성당’, ‘수련’을 들 수 있다.
La Cathédrale de Rouen, plein soleil /루앙 성당의 한낮
빛의 미묘하고 섬세한 효과에 씨름한 모네는 40여점이상의 연작을 그리는데 각자 주어진 환경변화의 속에서 최고의 인상을 붙잡았다고 인정 할수 밖에 없다.그것은 ‘차이놀이’속에 조금 달라진 끝없이 이어지는 연작에서 비로서 알 수있다.모네가 그린 성당은 석재의 견고함을 잃어버리고 마치 호수에 비친 물 그림자 처럼 어른거리는 듯하다.성당 자체는 어디론가 살아지고 화가의 눈에 비친 인상뿐이다.
Le Bassin aux Nymphéas bleus / 수련
수련는 모네의 특허와도 같은 작품으로 아이콘이 되어 어린학생들도 수련하면 모네를 연상할 정도다. 자기 집 연못의 ‘수면상의 변화’에 대해 관찰 했고 수면과 지면 또는 수면과 하늘 사이에서 생기는 경계선을 제거하므로써 이러한 구도는 완전히 정사각형을 구성하여 마치 거꾸로 서 있는 듯한 이미지를 보고 있는 듯한 현상과 All-OVER의 회화 양식을 볼 수 있다.모네는 그의 수련 연작들 가운데서 8작품을 튈레리 공원에 있는 오랑쥬리 박물관에 기증한다.모네의 연작은 세잔느의 카드 하는 사람의 연작을, 후일 팝 아트 앤디 워 홀 등에게 창작 동기를 제공하면서, 같은 사물의 미묘한 차이가 자아내는 효과가 하나의 모티브가 될 수 있름을 보여 줬다.
Vincent Van Gogh / 빈센트 반 고흐
인상파화가들중 유일 하게 외국인인 고흐는 몽마르트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던 동생 테오와 함께 2년동안 같이 산다. 동생을 통해 그 당시 젊은 화가들 모네,르느와르,드가 등을 만나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그의 색감은 밝아졌고,붓 터치는 작고 섬세해 앞으로 작품세계를 예고 했다.그 당시 뚤루즈 로트렉,고갱과 함께 코로와 드가의 옛 전속 모델이 경영하는 카페에 전시회를 갖게 되는데 명칭이 ‘거리의 작은 화가들’로 그 당시 인상파 화가들을 ‘거리의 거장 화가들’이라 호칭하였는데 여기에 차이를 두기 위해서라 한다.
우린 그의 그림에서 길고 독특한 붓 터치로 끊임없는 움직임을 느낄수 있다.
Portrait de l’Artiste /자화상은 고흐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독특한 그의 기법과 상징적인 그의 뒷 배경 처리,얼굴의 심리 묘사 표현은 표현주의로 이어준다.그의 파란색 사용도도 대표적인 그만의 스타일로 켄버스 전체를 푸른색 바탕으로 깔고 여기에 다른 색을 추가하여 얼굴과 옷과 바탕에 경계를 두었다.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관람자로 하여금 어떠한 공간적인 느낌을 유발하는데, 아주 간단한 하지만 여태껏 고흐 이외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기법이다.이론적으로 순색속에서 우리는 공간을 느낄 수 있다는 뜻으로 따뜻한 색은 관람자로 하여금 가깝게 다가오고 차가운 색은 멀어진다는 이론이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의 열정 혹은 우울함,복잡함을 들쳐내는 듯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건 그의 훌륭한 표현력과 생동감이 넘치는 독특한 텃치 때문에 지금도 모두에게 커다란 존경을 받는 것 같다.
Paul Cézanne / 폴 세잔느
세잔느가 인상파 화가들을 처음 만났을때 그들은 그의 주제가 죽음과 관련되어 있고 무겁고 어둡다는 점을 비판 했다.그 중 유일한게 피사로는 그를 옹호하면 많은 도움을 준다.1872년 피사로는 세잔느를 오베르 쉬르 와즈로 초대하고 여기서 그는 인상파의 화가로써 접어든다.
그는 풍경을 주제로 삼게되고 밝은 색감을 빠렛트에 담았으며 작은 붓 터치로 변해 같다.그러나 그만의 독특한 화풍은 그가 인상파 화가로써 가는 길은 외롭게 했다.제 3회 인상파 전시회를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 화면의 평면화를 막기위해 인위적으로 덩어리를 넣게 된다.즉 자연은 구형. 원통형. 원추형에서 비롯 된다는 견해로 자연을 단순화된 형체로 보았다.이것이 미래의 입체파의 큰 영향을 준다.
La Maison perdue / 목을 맨 사람의 집 그의 화풍의 전환기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피사로로 부터 받은 인상주의 화풍을 보여주나,인상파 화가들이 추구 했던 일시적인 현상과 순간적인 장면의 묘사는 찾아 볼 수 없다.이미 화면에는 기본적인 구도들이(2개의커다란 삼각형 구도)커다란 대칭을 이루고 있고 견고한 선과면은 안정된 분위기를 자아낸다.이 그림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사로의 적극적인 추천아래 제 1인상파전시회에 출품되며 악평에도 불구하고 도리아 백작이 구입.그 후 빅토르 쇼케가 구입하여 1889년 만국 박람회에 출품된다.
Les Joueurs de cartes /카드 놀이 하는 사람 세잔느는 카드놀이를 주제로 1890년 부터 1896년까지 5점의 작품을 그리는데 모네의 연작에서 영향을 받았다.
5점의작품들은 카드놀이 중인 사람들이 수도 작품마다 다르며, 작품의 크기도 각 각 달라 세잔느가 같은 주제로 일련의 조형 실험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완성도가 가장 높은 이 작품은 구도에 대한 그의 집착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유달리 두 인물만 부각되는
이 그림은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는 와인병을 기준으로 완전한 대칭을 이루어진다.왼쪽 인물이 좀 더 어둡게 칠해 진 듯하나 두장의 흰색 카드와 파이프,셔츠의 흰 깃으로 명암까지도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그건 그가 일부러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화면의 구성과 균형을 위해 대상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Paul Gauguin / 폴 고갱
고갱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타이티 섬과 그의 인생을 담은 ‘달과 6펜스’이다.
그는 인상주의가 주장했던 시각적 효과보다 꿈과 사상,그리고 상상력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분할 되거나 점묘에 의한 필촉 대신 넓직하게 분할 된 원색의 색면과 평면적인 구성을 사용 했고 ,굴직하게 둘러 쳐진 윤곽으로 회화의 평면화와 장식성을 추구 하였다.
Autoportrait au Christ jaune 자화상.
고갱은 다른 자화상처럼 3/4정면에서 그렸으며 이 작품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배경으로 넣었는데 자상화 뒤로 보이는 ‘황색 그리스도’라는 작품이다.경건하게 그려져야할 그리스도가 마치 시골의 농부처럼 그려졌다는 이유로 물의를 일으켰다.그 이후 자신의 자화상에 ‘황색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그려 넣었는데 좌우가 바뀐것으로 보아 거울에 비친 ‘황색 그리스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또 오른쪽 위에 있는 항아리 같은 토기는 고갱이 화난 자신의 얼굴의 형상을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Arearea. Joyeusetés아레아레아 .기쁨
아 작품은 고갱이 처음 타이티에서 체류하는 동안 그린 세점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중앙에 그려진 땅은 따뜻한 색상으로 채우면서 서정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고,이는 실제의 모양과 색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그려 진것이다 .왼쪽 상단 부분의 부드럽고 연한 색의 신상은 달의 여신 히나를 그린 것이고, 중앙에 위치한 인물이 연주 하고 있는 피리는
고갱이 타이티섬에서 머물면서 느꼈던 밤의 고요함을 나타낸다.또 의도적으로 묘사한 듯한 붉은 개는 다른 그의 많은 작품에서도 등장하는데 불분명한 의미인 이개에 대해 악의 요정이라 해석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Auguste Renoir / 르느와르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이 풍경을 위한 풍경을 그렸다면, 그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배경으로써 풍경을 그렸다는 점에 차이를 둘 수 있다.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몽마르트르는 그의 예술세계의 고향 같은 곳으로 동료 인상파 화가들과 미술과 삶을 얘기 했고,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이라는 모델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며 훗날 그녀도 당시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또 이태리 긴 여행을 하는 동안 그가 가장 그리워 했던 것은 몽마르트르 였다고 할 정도로 그 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중요한 곳이다.또 하나의 재밌는 웃음 거리로 파리 혁명 정부 당시 그는 혁명 단체와 장벽들을 주로 그리게 되는데 이를 의심한 몇 몇인들은 그를 첩보원이라 생각하고 세느강에 던져 죽일 계획을 하고 있다가 그들의 대장인 라울 리고(Raoul Rigault)가 그를 알아보고 동료들에게 «그는 아뜰리에를 떠나 밖에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단지 화가일 뿐이다’고 말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Le Bal du Moulin de la Galette
당시 몽마르트르는 아직도 정원들 사이에 몇개의 물레방아가 남아 있던 파리의 한 동네로 이곳의 ‘갈레트 풍차’라는 한 야외 카페가 배경을 이루고 있다.1887년 제 3회 인상주의 전에 출품했던 이 작품은 120호나 되는 큰 사이즈였다.그는 아뜰리에에서 몽마르뜨르 무도장 까지 매일 켄버스를 운반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그때 친구 조오지 리비에르가 매일 같이 도와주었다고 한다.이러한 정열은 그가 나뭇잎을 헤치고 들어오는 빛의 순간적인 변화와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노력이 였다.많은 아마츄어 화가들이 그 당시 파란색을 많이 썼지만 이 그림은 사실 감청색(bleu de Prusse)의 남용으로 그 당시 분홍색 톤에서 지금의 푸른색 톤으로 바뀌게 된다.이 감청색은 켄버스에 착색되지 않는 색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번지는 특징을 가졌으며 독물도 들어있는 물감이다.이 같은 현상은 배안에서의 점심(Déjeuner des Canotiers)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인물의 앞쪽이 비교적 정성껏 그려진 모습에 비해 뒷쪽 인물 묘사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데 그 당시 미술 평론가들에게 이 점을 비난 받지만,작가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아름답고 즐거워 하는 분위기를 관람자로 하여금 느끼게 하도록 의도 하기 위함이다.
Edgar Degas/ 에드가 드가
드가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확연히 다른 그만의 특징이 있다.광선에 대한 관심과 우연한 순간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제외하면 드가는 인상주의 보다 사실주의에 더 가까 웠다.
그의 그림에선 우연히 셔터가 눌러서 찍힌 스냅 사진 처럼 주제가 화면의 중심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그의 철저한 구도 계산에 의한 것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신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구도 이기 때문이다.인상주의에서 구도는 드가와 세잔느를 빼놀수 없다.자연광이 창문을 통해 실내로 비쳤을때 색의 변화에 관심이 많았던 드가는 실내풍경을 많이 그리게 되는데 마치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 본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렸다.남을 의식하지 않는 개인적인 한 순간을 사진사가 셔터를 눌러 영원히 기록한 것처럼 묘사하였고, 모델들의 인위적인 포즈를 거부하며 순간의 율동감을 재현하려 했다.율동성이 강한 발레리나 주제가 유달리 압도적인 드가는 당시 미술평론가들은 이렇게 별로 아름답지 않은 무희를 그리는 것은 그가 여성을 협오하고 있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는 파스텔 그림을 통해 유화 제작을 위한 많은 습작을 남기며,그리는 대상에 따라 작품의 스타일이 약간씩 다르다.초기 초상화는 절제의 색으로 전통 기법에 충실하며,폴로 경기나 경마,사냥에서는 거칠고 대담한 붓터치와 화사한 색상이, 발레리나에서는 가볍다 싶을 정도로 밝은 색과 따스한 색이 강조 되고,누드 그림은 피부색의 변화에 중심을 두어 뭐라 꼭 꼬집어 말 할 수는 없다
Répétition d’un Ballet sur la Scène/무대위의 무용 연습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시각과 화면의 중앙를 비워두는 구도는 당시 유행이었던 일본 에도 시대의 ‘유키요에 목판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전체적으로 제한 된 인공 조명 빛이 밤색톤 색조를 배경으로 하는 인물들의 독특한 동작으로, 우리는 단색톤의 그림에서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데 이건 유달리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드가의 특징을 읽을 수 있다.
Henri de Toulouse-Lautrec / 헨리 뚤루즈 로트렉
본질적으로 로트렉의 그림은 뛰어난 선 소묘라고 할 수 있다.그는 훌륭한 소묘 화가로써 쉽게 스케치 한 듯 보이려고 애썼다.어느 이른 아침 몽마르트르에서 긴 밤을 술과 파티로 보낸 로트렉은 친구들을 그 당시 드가 그림을 많이 소지하고 있던 수집가 디안(Dihan)집에 데리고가 ‘스승님의 작품’이라하여 무릎을 꿇고 인사하게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드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화면을 분할하여 주제를 중심으로 이동 시키는 그의 구도법에 특히 관심을 가지며,회화와 일러스트에 몰두 하게 된다.또 세잔느의 수채화의 흰 여백처럼 바탕을 거의 칠하지 않고 마분지에다 그렸는데 이 마분지를 사용한것은 그가 처음으로 미술사상 그가 차지한 위치는 유일하다.그를 유명하게 만든건 당시 파리 시민들의 수집가가 생겨날 정도로 유명한 ‘물랭루즈’포스터 였다.물랭루즈는 당시 ‘프랑스식 캉캉춤’으로 유명한 카바레 였고 그는 단골로써 많은 무희들이 그의 작품에 주제로 그리는데 이는 어렸을때 사고로 인한 신체적 조건의 대리 만족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또 지극히 저속한 일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의 작품에서 항상 아름다울 수 만은 없는 현실의 모습을 그리고 그 화려함 뒤에 숨겨진 비애를 느끼게 하여 그 당시 프랑스 사회문화를 엿 볼 수 있다.그는 많은 카바레를 드나드는데 미르리똥(Mirliton)이라는 카바레에서 그의 첫 개인 전시회를 갖는다.
La Toilette ou Rousse/ 화장하는 여인은 마분지 위에 그려진 유화로써 한 여자의 단장하는 모습을 그렸다.이렇게 사적인 개인 생활의 모습의 주제는 당시 파스텔로 이런한 많은 습작을 남긴 인상파 화가 드가 였다.그가 가장 존경하는 드가의 누드전시회를 보고 온 뒤 그렸다고 추측되는 이 그림은 그의 습작화 중 가장 완결한 것 중의 하나이다.또 마분지 위에 많은 그림을 그리게 되는 그는 이 바탕 재료와 그의 기법이 만나 그만의 독특한 화법을 창조 했다.
또 이 그림은 흔히 인물화에서 보기 드문 얼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 인상 주의’ 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미술사조 임과 동시에 서양미술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그 시작은 지금의 명성처럼 화려한 것인 아닌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 즉.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화가들의 등용문이었던 [살롱전]에서 낙선한 몇몇화가들이 낙선에 분개하여 당시 낙선된 그림들을 중심으로 ‘낙선전’ 을 열게 되었는데, 이 전시회에서 ‘끌로드 모네’ 의 [인상, 해돋이] 라는 제목의 작품에대해 비평가 ‘루이 드로이가 《Le Charivari》지에 기고한 비판에서 처음엔 조롱의 뜻으로 비꼬아진 것으로 그‘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 즉, 자연의 본질을 그리지 못하고 오로지 본질의 ‘인상’ 만을 그린다는 비판의 뜻을 담고 ‘모네’ 작품의 제목에 빗대어 거론하였으나, 이후 이때 몇몇 화가들이 이를 다른 뜻으로 재 해석하여 스스로를 ‘인상파’ 라 부르게 되면서 유래되었다. 즉, 이 조소의 의미인 ‘인상주의’ 란 말을 스스로 받아들인 이유는 과거의 화가들이 대상을 사실적으로만 묘사하려는 노력에 반대하여 ‘스스로 순수하게 눈에 보이는것’ 만을 그리고자했던 즉, 그리려는 대상이 더이상 ‘대상 자체의 본질’ 이 아닌 그대상이 빛과 반응하여 만들어내는 ‘인상’이었다는것을 그들 스스로가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인상파가 빛을 그리고자 했던 이유는 세상 만물은 빛에 의해 그 형태가 드러나고 빛의 강약에 따라 형태와 느낌이 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양 미술사의 ‘혁명’ 으로도 간주되는 이 ‘인상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이 ‘빛’ 에 주목하는 것이다. 과거의 화가들이 눈앞의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기 위해 이 ‘빛’을 부수 적인 존재로 생각했다면, ‘인상파’ 화가들은 이 ‘빛’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저 물체를 그리기 위해 빛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빛’이 대상과 부딪칠때 생기는 ‘반응’ 을 주관적인 눈으로 보고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이며 , 이는 바로 ‘근대미술’ 로 이어지는 중요한 버팀목 역활을 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 시시각각 변하는 ‘빛’ 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연의 다양한 색채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그리려는 대상은 다양해 졌으며, 그로 인해 그림은 더 이상 특정계급을 위한 것이 아닌 ‘일반적’인 것이 되어 대중화되었고, 그러면서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뀌게 되었으며, 그를 표현하는 방식에도 수많은 실험을 통한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그로 인해 미술은 상상속의 모방의 미술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롭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미술혁명의 하나인 ‘인상주의’의 시작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닌 시대적인 배경에도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겠다.
즉, 18세기말과 19세기초는 인류역사상 유래가 없는 혁명의 시기였다. 이러한 혁명을 거치면서 기존의 사회구조는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즉 농노, 지주, 수공업자로 대변되던 장원제도의 붕괴로 전통적인 귀족이라는 계급이 해체되었으며, 급격한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도시가 탄생되면서, 시민계급이라는 새로운 중산층 계급을 형성하게되었고,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바로, 그들이 보는 세상은 이제 그전시대에 비하여 상상할수 없을 만큼 밝은 것!이었다. 기차나 기선이 빠르게 이동하고, 도시와 사람들은 활기에 넘쳤다. 그런이유로, 어두침침한 당시의 아카데믹한 그림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당시의 밝은 세상과 비교해 볼 때 더이상 진실이 아닌것처럼 보이기 시작했고,.사실상, 많은 시민계급들은 무의식을 통해 미술이 밝아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바로 지금의 현실에만 관심이 있었다. 미래의 세계나 죽음 뒤에 오는 영적인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시간은 오로지 현재에만 의미를 부여했고, 과거와 현재 와 미래에 동일하게 지속적인 느낌을 갖는 고유색이란 더 이상 진실이 아닌것을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눈앞에 지금보이는 순간과 그 변화만이 진실로 느껴지면서 그렇게 인상주의 많은 이들을통해 이해되기 시작했다. 과거의 회화들, 평범한 회화들은 사물의 외관을 모방했고,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로 하는 다른 회화들은 사물의 본질/실재를 모방하려 했다. 그러나 인상파는 현상의 생성 자체를 모방하려 했다 드라크로와를 비롯한 낭만주의자나, 쿠르베 등 사실주의자를 통해서도 조금씩 비약적으로 밝아 졌지만 , 예술이 시대의 거울이듯, 사회가 밝아지면서 예술또한 새로운 ‘밝음’을 기대하게 된것으로. 이 밝음의 혁명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화가가 이젤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이며 이는 바로 혁명이었다. 그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젤을 들고 밖에 나가서 실물을 그리지않았었고,간단한 스케치를 제외하고는 밖에서 사물을 직접보며 그리는 일은 행해지지 않았던것도 사실이다.그렇게 직접 자연을 보자 자연은 생각보다 더 밝았고. 햇빛에 빛나는 자연은 너무나 많은 빛을 가지고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던것이다. . 또 이젤을 들고 밖으로 나가그림을 그리게 된것은 , 화가라는 지위가 새롭게 설정되는 시기라는 것을 암시하는데,이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 더이상 , 특정계급을 위한것이 아닌, 누구든 누리며 즐길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 중요한 시기가 된다. 산업혁명을 통한 옷감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염료와 안료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인상파당시에는 광물질에서 색소를 뽑아내는 새로운 안료들 뿐 아니라, 화학의 발달로 인하여 화학적인 안료들이 쏟아져 나온이유로,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모두 시각적으로 풍성한 현란한 색체들에 관심이 쏠렸다. 색은 섞을 수록 채도가 떨어지지만, 많은 안료가 없던 시대에는 필요한 색을 만들기 위해서는 섞을 수 밖에 없었으나, 그렇게 새로운 값싼 안료의출현과 이를 운반하기위한 방법중인하나인 튜브 물감의 발생은 당시 화가들에게 다른 세계를 열어준것이다.
그렇게 인상파의 그림은 빛이 온화면을 지배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 ‘빛’은 빠른 필치와 붓놀림을 요구하고 팔레트에서 색을 섞기 보다는 직접 화폭에서 붓의터치를 이용해 화면을 구성하여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노리며 그로인해 붓터치는 대범해지고 색은검은 색과 흰색의사용을 억제하며 밝은 원색을 이용하여 그림속의빛을 잡아내려했는데 ,그로인하여 풍부한 색으로 빛을 잡아냈으며, 그 대상은 어느것이라도 좋았다. 그것은 후에 ‘카메라’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치게된다. 인상파들에게서 사물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 망막에 자극되는 하나의 색이며 광선이었다. 때문에 그 빛의 유희는 사물의 윤곽선을 지워 버렸고, 그로 인해 입체성이 상실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문제를 세잔에게 기하학적 자연관을 가져오게 하였고 나아가 입체파에 영향을 주었다.또 구도면에서는 대상을 영원불변의 것이 아닌 순간적, 인상의 느낌으로 파악하고 마치 의도된 구성속에서 카메라에 우연히 잡힌 한 컷의 사진처럼 순간적 영상효과를 전달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극단적인 부감(위에서 내려다봄)이나 사진의 틀처럼 한 부분을 잘라낸 듯한 과감한 구성 등의 참신한 구도가 도입되었다.
이 ‘인상주의’ 화가들이 보려했던 ‘빛’ 이라는 것이 어떤것이었는지, 이해하기위해선 아주 간단히 말해 ‘카메라 셔더를 누르는 순간’ 을 생각하면 된다. 즉, 자신의 눈으로 포착한 대상의 어느 순간을 재빨리 화폭에 담는것이다. 그 빛은 시시각각 변하며, 보는 이에따라 달라질수 있으므로 다양한 대상을 찾아연구하게 되고 이로인해,‘인상주의’ 를 또 다른해석으로 볼때 ‘광학’ 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15세기 르네상스 미술도, 17세기 바로크 미술도 빛에 주목하였으나 19세기의 인상주의 미술은 빛을 과학적으로 연구한것이 다르며, 과학적인 빛의 연구는 미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인상파(Impressionism)라는 근대미술(Modern Art)을 탄생시키게 된것에 다시한번 주목한다.즉, 지금까지의 미술은 물체 = 독립변수, 빛 = 종속변수라고 생각했었는데, 인상파는 이러한 생각을 180도로 뒤집어버린 것이며. 그래서 인상파에게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빛이 된 것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단숨에 포착하여 그리기위해 후에 일부 인상주의 화가들은 직접보고그림과 동시에 사진을 찍어 사진이 포착한 순간을 보고 그리는 방법릏 취하기도 하였고, 즉 과학적인 빛의분석에 의해 그림을 그리려는 시도가 상상에 의한 역사적 사실이나, 있는 대상 그대로 똑같이 모방하는 것이 최고의 아름이 다움이 되었던 인상파 전 시대의 예술의 미적기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 이것은 후에 이 빛의연구가 좀더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연구되어 ‘점묘법’을이용했던 신인상주의로 이어지고 여기에단지 시각효과만을 누린것이아닌 작가의 주관적 색채가 더욱짙게된 후기인상파로 이어지는 계기가된다.
이로인해 자신이 바라보는 주관적인 빛에 대해 당시 예술가 들은 서로 토론하기위해 많은 만남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과 파리의 ‘몽마르뜨언덕’과는 인연의 시작이되기 했다. 당시 1889년 세계 만국 박람회가 열리고 에펠탑이 세워진 파리는 미술 분아니라 경제적인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고. 카페와 카바레 같은 유흥 사업은 급격한 산업화의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몽마르뜨에도 이런 카페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귀족과 부르조아들이 섞여지며 천한 계급의 가수와 무희 어릿광대가 펼치는 쇼가 펼펴지기도 했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린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빈번히 그곳의 풍경이 예술의소재가 되기도 하며 또 당시 예술가들의 모임장소로도 쓰이면서 어느덧 예술의 중심지로 인식되기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어떤 평론가들은 " 도대체 인상파 그림들은 꼭 가스등 같다., 우리가 보고싶지 않은 부분까지 밝혀주고 있으니 .. 라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진실앞에서 두려워하던 그 이전 시대의 예술의 관념에서 벗어나, "나는 사물을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내가 그 사물에서 느낀 것, 즉 인상을 그린다". 라고 말한 르느와르나 , 다른 빛을 그려내기위해 똑같은 성당을 40번이나 그렸던 모네,도시를 떠나 원시림에서 고귀한 야만인이 되어다른 세상을 그리고자 했던 고갱,자신의 귀를 자르면서까지 예술의자존심을 지키려했던고호, 화면 구성의 내적 논리를 위해 외적 현상의 논리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20세기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르느와르, 인상주의를 미술관의 미술처럼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 것'을 결심했던 세잔느, 마치 기억속의 아련한 사진처럼 다양한주제들의 한순간을솔직하고 대담한 표현으로 화첩에 담았던 드가, 카바레에서 흔들리는 무희들의 움직임을 그려내며 자신의 신체적결함을 그림으로 극복하며 훗날 포스터작가로 거듭난, 영혼이 자유로왔던 로트렉 , 기존의 통념을 깨고 혁신적인 주제와표현기법으로 온 미술계를 뒤흔들었던 마네까지 이모든 이들이 추구했던 진정한 세계는 바로 이 ‘인상주의’를 통해 거듭났고, 그들이 끝없이 연구했던 ‘빛’은 오늘날 우리 미술사조에 그 이전과는 전혀다른 밝은 미래의 세상으로 향할수있는 또 하나의 미술역사의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다.
Tip………………………………………………………………………
1] 사진이 인상파를 불렀다.
인상파의 탄생은 표현양식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이 컸지만 산업적으로 볼 때는 인상파보다 앞서 등장한 ‘사진’의 영향이 또다른 요인이었다. 사진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회화는 유일한 기록 수단이었다. 그러나 사물을 모습 그대로 포착해내는 사진이 등장하면서 회화는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기록성에서 그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대신 새로운 표현방식과 시도를 통해 회화는 다른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바로 인상파다.
재미있는 점은 사진이 지금은 가장 대표적인 빠른 속도의 예술로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 인상파가 사진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속도에서 앞섰기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사진은 빛에 가장 민감한 물질인 은을 이용한 ‘은화 사진’이었다. 얇은 종이에 은박을 입혀 인화했기 때문에 지금의 필름과는 달리 사진 한장 찍는 데 보통 한두 시간 이상 걸릴 만큼 느렸다. 그러나 이에 비해 인상파는 노출된 빛 속의 사물을 빨리 그리는 속사에 능했기 때문에 사진보다도 빨랐다. 인상파는 초상화처럼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기능은 사진에 넘겨주는 대신 새로운 표현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기존 고전회화와는 다른 근대 미술의 첫 번째 흐름으로 등장했다.
즉 들 앞에 펼쳐진 빛과 그 빛에 의해 느껴지는 아름다움(美)을 쫓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빛과 색에 대한 관심은 신 인상파, 후기 인상파로 이어지고, 야수파 등의 현대 회화의 출발에 원동력이 된다.
2] 우리나라와 인상주의의관계
1930년대 동양화단은 전통적 관념산수가 최조하고 사경산수와 일본화의 신감각주의가 대립하는 양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물과 화조를 중심 모티프로 하는 색채화의 신감각주의 계열로 김은호, 정찬영, 최우석, 한유동 등이 있다. 당대에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였던 김은호는 여러 방면의 소재에 뛰어난 기량을 가진 화가로 인물,화조,산수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다.
인상주의의 도입은 고희동 이후 본격적인 서양화의 도입을 시작으로 일본의 인상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1900년대 이후 일본은 도쿄[東京] 미술학교를 중심으로 아카데미즘이 형성되었는데 주로 프랑스의 아카데미즘과 인상파적 요소가 혼합된 양식을 추구했다.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등이 주축이 된 이들은 자파(紫派) 또는 회색파(灰色派)로 불리며 외광파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으나 회화의 주제와 내용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본 아카데미즘의 인상파적 요소는 도쿄 미술학교 출신의 고희동·김진호·김찬영·나혜석 등에 의해 한국에 도입된 이후 화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통해 회화의 한 양식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1930년대 서양화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면서 이러한 인상주의적인 요소가 뒤섞인 관학적인 화풍에서 좀더 본격적인 인상주의적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인성은 〈초하의 빛〉(1933)·〈어느 가을날〉(1934) 등으로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면서 이후 선전의 주류를 이루었던 관학파적인 흐름에서 벗어난 인상주의적 양식을 구축했으며 오지호와 주경은 인상주의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작품을 보여주었다. 특히 오지호는 〈순수회화론〉에서 색채를 중심으로 한 회화론을 펼쳐 인상주의의 정착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고 〈사과나무〉(1937)·〈남향집〉(1939) 등에서처럼 본격적인 인상주의라 할 만한 작품을 제작했다. 그밖에 인상주의 화풍이 두드러지는 작가로는 서진달·김용조 등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인상파가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회화 유파로서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그 대부분은 재현적 회화를 표현하는 기법적 요소로 나타났던 하나의 경향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나라 또한 인상주의 시대에 다른 관점으로 예술을 이해하려던 움직임이 많은 작가들에의해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3] 가설- 인상주의는 원래 일본의’ 우키요에’ 에 영향을 받았다 ?
우키요에浮世繪는 '우키요憂世', '근심어린 세상'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불교의 서방정토를 낙원으로 여기던 일본인들이 그곳에 비하면 "현세는 꺼리고 멀리해야 할근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세상"이라는 말을 자주했는데, 이렇게 말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잠시동안만 머물 현세라면 조금 들뜬 기분으로 마음 편히 살자"는 뜬세상浮世 마인드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기본으로 "현재의 세태와 풍속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현재 양식 또는 당세풍當世風이라는 의미도 겸하게 되었다ㅡ." 뭐 잘한 건 아닌 듯하다.’라는뜻.
기본 태도가 그러하니 우키요에는 당대의 세상을 담는다. 즉 시사성과 폭넓은 주제를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는 "무색투명한 현재"만이 아니라 "향락주의적인 인생관을 배경으로 음란한 호색의 분위기가 농후하게 감도는 현실"까지도 포함된다. 그리고 뜬세상을 표현하는 그림답게 새로운 표현방법을 추구한다. 그런 까닭에 일반 대중의 미적 관심을 폭넓고 지속적으로 반영하게 되었다. 바로 현실 속에서 대중 -- 즉 "전통의 중압감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번창하게 되었음을 짐작하게한다.또한 대도시의 회화라는 것에 반필연적인 요인인 상업성이 어울어져 우키요에는 "대중적인 회화수요층을 전제로 한 회화였으며, 따라서 한 장의 원화에서 똑같은 복제화를 대량 생산하여 염가에 제공할 수 있는 목판화"가 중심이 되었다. 이 목판화들을 개인적으로는 마네가 수집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있다. Essay of Art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 사라짐의 미학 I 파리 근교 지베르니. 거기에 유명한 ‘모네의 정원’이 있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는 여기서 만년을 보냈다. 별장 안은 그가 수집한 일본 판화로 뒤덮여 이를 증명해 주기도한다. 상업적 요구가 앞서 있었다는 것은 이 그림들의 제작방식, 즉 대량복제를 낳아놓으며 규정한다.대량복제이기 때문에 이 그림들은 "화가의 의지가 관철되어 있는식사는 순수한 미술작품이 아니라 [서적 도매상의] 간섭을 받으며 조각사와 인쇄사의 기술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이른바 상품으로서의 판화 내지는 공예적 회화"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서구로 수출한 도자기를 쌌던 종이에 우키요에가 그려져 있었고, 그것에 반한 빈센트 반 고흐가 베껴 그리기까지 했다는 것으로도 유명한 우키요에의 예술성을 짐작해 보건데, 혹, 서양의 인상주의 가 바로 일본의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시대적으로 인상주의와 일본의 유키요에 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Edouard Manet [1832-1883]
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인식되는 1863년의 낙선전에서 [풀밭위의식사]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중에 한사람으로 파리에서 태어나 한때는 선원의 견습생이되었으나 화가를 지망하고 ‘쿠튀르’의문하생이 되어 그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스승에게 배우기 보다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고전작품을 끊임없이 묘사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고야’ 특히 ‘ 벨라스케스’에게서 강향 영향을 받았다 처음으로 살롱에 작품을 출품한 해인 1859년에 이미 낙선을 경험했고, 1863년 나폴레옹 3세의 승인을 받아 열린 「낙선자 전시회」에서 영웅이 되기도 했던 그는, 살롱에서 그의 작품이 받아들여지며 ‘현대’ 예술이 그 모습을 그 모습을 드러낼때까지 쉬지않고 열심히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또 대중과 비평가들에게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시대의 위대한 지성가인 졸라, 보들레드, 말라르메 같은 그의옹호자들과 정신적인 세계를 나누며 그의꿈을 접지 않았다. 그는 19세기 중반에 있어 처음으로 야외에서 반사광을 표현하는 새로운 회화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고 . 후에 마티스는 “그는 빛의 반사를 따라 그림을 그린 최초의 인물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화가의 작업을 쉽게 만든 최초의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낙선전에 출품했던 이 [풀밭위의 식사]는 파리스의 심판 구도 를 이용하여 그린것으로 시선을 똑바로 두고 앞을보는 당돌한 나체여인[빅토린 이란 여인으로 추정] 이 모습이 담긴 이 그림은 당시 살롱전에서는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되는 계기 가되었다. 살롱전에 여러번 출품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셨던 마네는 실질적으로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가진 화가로 후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파사로 모네 시슬레 등과함께 청년작가들과함께 후에 인상주의 의길을 여는데 정신적 지주가되기도 했었으나 그는 아카데미즘의공인을 꿈꾸며 적극 참여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과 똑같이 분류되는 것을 꺼린나머지 인상파그룹의 전시회에는 참가를 거부했으나 실제로는 인상파들만의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또 1865년의 살롱 입선작《올랭피아 lympia》로 일약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출품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으로 그 당시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 속에 휘말렸던 이그림으로 많은 구설수에 오르게 되기도 한다. 다소 짧은 다리와, 둥글게 솟은 배, 배꼽과 가슴사이로 이어지는 회색의 라인,각진 여인의턱, 극부를 가리고 있는 도전적이면서 선정적인 여인의손, 노르스름한 실제여인의 피부색을 표현한 너무나 현실적인 여인의 나신을 그림속에 표현한 마네에게 늘 그림속의 완벽한 여인상에 익숙해져 있던 많은 대중들과 비평가들은 충격에 휩싸여 혹평하며 조소했고, 그 그림 올랭피아가 미술관에 걸려 있을 때 사람들은 그 그림을 찢고 돌을 던지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어 결국 경찰이 나서서 그런 사람들의 행동을 저지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그러나, 아름다움의가치의 기준을 확연히 바꾸어놓은 마네는 후에 인상주의 에서 가장중요한 주관적인 관점으로 대중의눈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작가로 재 인식되며 이 두 작품에 대한 비난은 당시대에는 혹독했으나 도리어 그의 표현기법의 참신성과 색채의 독창성을 안정받아 인상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그림들로 후에 근대미술에 중요한 한 휙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고 재평가되었다.
또 후에는 류마티즘 으로 고생하여 비교적 쉽게 그릴수 있는 파스텔화에 전념하기도 했다.
수많은 고난을 견디어야 했던 마네, 살롱에서 낙선을 경험한 1859년으로부터 사십 년 후,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칠 년 후에도 마네는 <올랭피아>가 미국으로 가는 것을 막고 또 그것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기 위해 기부금을 내야만 했던 웃지못할 일화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마네는 무엇보다 전통과 혁신의 중개자 역활을 한 중요인물로 평가되며 그 이름을 미술역사의 사조속에 남기고 있다.
Claude Monet [1840-1926]
파리에서 출생했으며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로 르 아브르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며 그곳에서 18 세때 그곳에서 화가 로댕을 만나 외광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그후 19세 파리에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파사로와 사귀었고, 초기에는 크르베나 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후 1870년 프랑스 전쟁시 런던으러 피신화여 영국 풍경화파작품들을 접하며 영향을 받기도 했고.. 그후 1874년부터 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총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며 인상파 화가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않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을 병치하는 방법으로 비교적 밝은 외광을 받은 자연을 묘사하며 인상파기밥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모네만의 인상주의는, 눈에 비쳐지는 순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로 평가되고,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에 심취하였다.
이는 같은 성당을 40번이상 빛에 따라 다르게 그려나간 루앵 대성당] 이나 [수련] 등에서 보듯이 시간에 따른 빛에 의한 연작그림들에 의해서 그의 작가세계를 엿볼수 있다. 또 르느와르와 우정을 나누었던 모네는 한때 일본 판화에 심취하였는데.. 지금도 유명한 ‘모네의 정원’이.있는 파리 근교 지베르니의 별장안에는 그가 수집한 일본 판화로 뒤덮혀있어 , 그가 이것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추측해 볼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대표작 ‘수련연작’을 그릴무렵 시력을 완전히 잃어 장님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그는 실제로 눈으로 본 수련의모습을 머릿속에서 재 구성하여 자신만의 화풍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 믿지못할 일화를 가진 화가중의한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또 우리는 모네를 가장 전형적이고 개성적인 인상주의 화가중의 한사람으로 평하고 있다.
Vincent van Gogh[1853-1890]
화가로써.. 가장 드라마틱한 예술가의 고독한 삶을 살았던 그는 인상파의 혁명이 한참 맹위를 떨치던 1886년 파리에 도착하여 피사로, 세잔느, 로트렉 등과만나며 점묘법과 분할법등 새로운 화법을 개척한다. 그러나.. 고갱에게 매료당한 그는 자신만의 천재성을 믿으며 그림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바로 고갱과의 인연은 후에 고갱이 고흐 자신이 그린 자화상을 보고 귀부분이 닮지 않았다고 조롱한것을 계기로 자신의 귀를 자라는 ‘광기’어린 집착으로 이어진 일화를 남기며,최후를 정신병원에서 쓸쓸하게 보내다가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흐의 예술활동기간은 1880-90 년의 10년뿐이었고, 처음 4년동안은 기법을 익히며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나, 독학의 어려움을 느끼고 네덜란드풍경화 작가 안톤 모베와 일을 하기도 한다.
부친은 목사였으며 16세때 백부의소개로 화구상점원이되어 그일을 계기로 그림과 인연을 맺은 그는 젊은 시절 종교적 정열에 불타 단기 목사 양성소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한때는벨기에의 한 탄광촌을 무대로 정열적인 전도에 몰두하나 전도사직을 해고당한뒤 1880년화가로의 출발을 결심한다.
그후 습작에 전념하던 그에게 나타난 로트렉과 고갱의 영향으로 ‘색채의 완전한 효과’에 열중하게 되고 그의 그림을 그리는 관점은 상징주의적이나, 치밀한 계산을 통해서가 아닌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무르익어 가며 어떤 효과나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는 고갱과 로트렉과 같은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바로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갱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2개월동안 함께 일도 하며 어느정도 영향을 주고 받지만.. 결국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격도 전혀 맞지않아 급속도로 사이가 나빠지게 되고 그이유로 고갱과의 여러 일화를 남기게 된다.
고흐는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 신경과민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시초로 자신의 귀를 자르고 , 고갱은 그 사건으로 고흐를 떠났으며 고흐는 병원으로 옮겨진다.
정신병에 시달리며 그 이후에도 간간히 그림을 그렸는데, 그당시의그림을 보면, 의사들의 초상화나, ‘정신병원의 정원 ‘등의그림에서 볼수 있듯이 일종의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정신병원독방에있는 이유로 마음대로 그림의 주제를 선택하지 못했던 그는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했기에 전에 사용하던 강렬한 색채대신 부드럽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 애썼으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더욱 상상력이 솓구쳐 결국 구성요소들의 극단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고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선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하게 된다. 그래서 이때의 작품들은 훨씬대담하며 환상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후에 그는 병원을 나와 의사이자 화가인 피사로와 세잔의 친구인 가셰와 함께지내기 위해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나 결국…이름모를 시골마을로 돌아가 서정적인 풍경을 보고 마음을 위안을 얻으며 따듯한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달래보려 하지만. 이후 동생 테오 에게 생계를 의지하는 죄의식과 성공하지 못한 열등감때문에 병이 나을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채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그렇게 이틀뒤엔 세상을 떠난다.
외롭고 고독했던 고흐는 자신과싸우며 예술의 열정을 불태웠고, 그의 종말은 비참했으나, 많은 유작들을 남기며 아직도 우리에게 잊지못할 천재화가중의 한사람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