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 樂
한승모
음악은 나의 삶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평소에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더 확연하게 드는 생각은 음악은 나에게 ‘감사’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겪어보았던 어른들 앞의 재롱에서부터 시작한 나의 음악은 꾸준히 삶에 영향을 주었고, 항상 감사할 일들을 만들어 주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트로트 몇 곡을 어깨 너머로 배워서, 어른들 모이는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귀여움을 받았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씨의 ‘님과 함께’라는 노래와 조용필 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는데, 내가 어떻게 노래를 했는가는 지금도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꽤 인기가 좋았고, 어디를 가나 주변에서 노래를 시키고, 내가 노래를 하는 것이 참 편한 자리였다.
초등학교 다니면서 3학년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그 당시 어머님의 사교육 열의가 없지는 않아서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싶냐고 물어보셨고, 그러겠다 대답을 하였다. 피아노 학원의 기억은 좋지 않았다. 10개 넘는 작은 방들에 학생들이 한명씩 들어가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고, 선생님은 몇 번씩 쳐보라고, 표시할 수 있는 동그라미까지 친절하게(?) 그려주고 나가셨다. 한명 당 하루에 만나는 시간은 10분이 채 못 되었다. 학원에 대한 불친절함에 마음에 안들었을 무렵 피아노를 연습하다 갑자기 코피가 터졌다. 피아노 건반위에 떨어지는 피에 매우 놀랐고, 그날은 일단 집에 돌아왔다. 다음날부터 어머니에게 학원을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몸이 안좋아서 그런가 하셨다. 지금 기억이 나는 것은 아마도 피를 건반에 쏟았던 것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스스로 노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무언가 애정을 더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다. 우리 초등학교에는 동요 부르기 대회가 있었는데, 학급에서 1명씩 뽑혀서 학년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학년에서 뽑히면 학교 대회에 다시 참가할 수 있었는데 전교생이 3천명이 넘는 학교에서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학급대회에서는 어렵게 1등으로 뽑혔고, 다행이 학년 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 학년대회는 정말 노래를 잘 했던 아이들이 모였던 기억이 난다. 굉장히 부끄러워했고, 조금 더 맑고 매끄러운 소리가 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매우 부러워했다. 결국 장려상으로 끝났고, 그때 노래에 대해 진지하고 집중도 있게 접근했었다.
중학교에서도 합창반을 하였다. 무대 위에서의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함께 음악실에서 연습하고, 어느 큰 합창대회에 참가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교육청 주관 큰 행사였던 것 같다. 중학교 음악실은 별동 1층 구석진 곳에 있었다. 그곳에는 다른 특별실 교실이 몇 개 더 있었다. 음악실 옆 쪽문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그쪽은 옆 산의 경사를 깎아 벽을 만든 부분과 건물과의 경계가 있었고, 비둘기들의 시체가 잔뜩 쌓여있었다. ‘비둘기들이 이곳에 와서 죽을 때를 알고 알아서 죽는 곳인가?’ 라는 생각을 하였다. 베토벤의 교향곡들이나 하이든의 소품들을 그때 조금씩 배웠고, 짧지만 깊은 고민도 했던 시기였다.
고등학교는 나의 음악에 가장 큰 만남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천주교 미션 스쿨이었던 학교는 음악선생님이 수녀님이셨는데. 마음이 너무 아름다운 분이셨다. 첫날 명상으로 수업을 시작하였고, 중간중간 들려주시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와 노래는 음악에 대한 좋은 생각들을 더 키워가게 하셨다. 수녀님은 알고 보니 중대 음대를 졸업하시고 수녀의 길로 들어간 분이셨다. 고등학교 남성 복사 중창단에 들어가 매일 노래를 열심히 부르던 나는 학교 합창반 반장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고, 수녀님을 도와서 합창부 일에서부터 잔심부름까지 도맡아 하였다.
중창단 활동은 8명의 피끓는 고등학생들이 함께 노래하기에 어려움이 많은 시절이었지만, 정말 행복한 추억이었다. 방학때는 하루 종일 노래하다 책 읽고, 학교 밖에서 당구도 치고 오고, 분식도 사먹고 그렇게 청소년을 즐겼다. 겨울에는 눈위에서 노래도 하고 뒹굴고 장난도 쳤고, 오후에는 농구며 축구까지 함께 나눈 선배, 친구, 후배들이었다.(그래서 지금도 고등학교때의 다른 친구들은 없다^^) 노래를 열심히 안한다고, 예의가 없다고 선배들에게 엉덩이를 쎄게 맞거나 얼차려를 한적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무서운 행동이었던것 같다. 여기저기 다른 여자 학교나 행사에 가서 노래를 한적도 많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카펠라를 시작하였다.
대학을 가면서 노래뿐만 아니라 음악 자체에 대한 욕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 교육대학교 음악교육과는 싼 레슨비로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돈도 별로 없었지만, 하숙집 나와서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그 돈으로 성악도 배우러 다니고, 바이올린도 배우러 다녔다. 2년을 레슨도 받고, 학교 중창단, 합주부 생활까지 열심히 하러 다니면서 음악의 즐거움을 더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다른 악기를 배우면 배울 수록 아카펠라로 욕심이 모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군대에 다녀와서 복학을 하기 전 1년 동안 학비를 벌면서 아카펠라 동호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2000년...숫자도 참 기억하기에 좋은 날이다. 갈비탕 집에서 일하다가 화상을 입고, 외부로 나가는 것이 시뻘겋게 익은 붉은 얼굴 때문에 쉽지는 않았지만, 큰 욕심내고 인터넷 동호회를 찾아가 보았다. 따뜻한 사람들, 노래 좋아하는 분위기...이 모든 것에 빠져서 열심히 활동을 하였고, 가을부터는 본격적인 지하철 공연과 초청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에 복학하고 본격적으로 음악공부와 함께 아카펠라를 시작하였다. 학교에서는 노래잘하는 후배들 엮어서 아카펠라 그룹을 만들었고, 주말에는 서울에 가서 아카펠라 동호회 활동을 하였다. 사람들이 어울려 만드는 화음이 너무 좋았고, 내가 솔로를 맡아서 노래를 하지는 못하지만, 나의 역할이 노래에 정말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에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노래 실력보다 모두를 배려하는 마음과 정확한 자기의 역할을 해야 하는 아카펠라의 매력에 점점 많이 빠져들고 있었다.
대학가요제에도 도 대회까지 참여했다가 주욱 미끄러져 내렸고, 춘천, 서울, 경기도 여러곳으로 공연도 다니기 시작하였다. 2001년에는 임용고시를 준비해야하는 4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아카펠라 동호회 음악감독을 하고, 대학로 소극장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콘서트도 기획하기 시작하였다. 아카펠라 싱어에서 공연 기회까지 배우게 된 계기였다. 이렇게 미친 듯이 교사가 되기 전까지 달렸다.
2003년 강원도 횡성의 작은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아카펠라와 공연기획에 빠져있던 나에게 시골학교 교사의 생활은 적응하기에 쉽지만은 않았다. 점점 학교에 더 적응해 가고 아이들과의 활동을 매력을 느껴가게 될 때쯤에 음악교육 대학원을 결심하고, 이듬해에 음악교육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 이후로는 새벽형 인간이 되고, 시간을 쪼깨 쓰면서 나를 위해 끊임없는 음악, 아카펠라, 문화에 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지금은 음악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 아카펠라 협회 부회장으로 이런저런 조언과 일을 하고 있다. 또, 춘천의 10년 지기 인맥들과 어르신들의 도움을 받아 춘천아카펠라 페스티발을 4년째 이어오고 있으며, 복학하면서 시작한 콘서트도 6년째 이어오고 있다. 무엇보다 아카펠라 교육에 대한 욕심으로 목표를 바꾸어 음반과 공연기획, 연수를 하는 아카펠라 교육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선생님들에게 아카펠라를 매우 열성적으로 전파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만족이 제일 크다.
공연기획에 대한 관심으로 엔터테인먼트 경영학부에 들어왔고, 졸업을 앞두고 시간을 조절하여 음악치료수업까지 듣게 되었다. 숙명여대 음악치료과정에 대해서는 익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번이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음악치료가 단순한 약을 처방하는 것이 아닌 심리적, 인지적, 교육적 복합적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마음에 와 닿는다. 교육자로서, 단체를 이끄는 리더로서 음악치료는 내 평생 좋은 동반자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