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자료는 양동마을 현지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友香茶屋 가옥주 李址烋 님이 직접 작성하여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양동의 역사
良洞마을은 記錄된 것은 없으나 양동 안 心水亭 뒤에 있는 성주산 後 斜面에 기원전 4世紀 경에 만들어 진 것 같은 積石墓가 약 100여기 도굴된 상태로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며 부락을 형성 한 것 같다. 또 삼국사기에 박혁거세 6년에 음집벌국(現在 慶州市 安康邑 대동 갑산으로 추정) 征服 倂合하였다고 기록된바 그 시대에 양동마을도 함께 신라에 부속된 것으로 짐작이 간다. 성주산 후 사면에는 지금도 新羅土器가 가끔 盜掘되고 있고 도굴된 土器 조각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新羅時代에는 서라벌의 변두리 한촌을 이루고 있었든 것으로 짐작이 간다, 또한 양동마을에서 3Km 안쪽 마을인 사골 (安溪理)에는 미륵불이 있는데 99년 11월경 위덕대학교에서 安溪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를 발굴하였는데 신라시대에는 안계사라는 사찰이 있었든 것으로 짐작이 되며 안계라는 지명도 안계사라는 사찰 이름에서 연유 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마을은 신라시대에는 비화현에 속하였고 고려 이래는 慶州府의 屬縣인 安康縣에 속하였다. 이 마을의 원래 명칭은 양좌골 (良佐谷)이였으나 일재시대에 경주군 강동면 良子洞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行政區域상 慶州市 江東面 良洞理로 되었음,
고려중엽 이후 성씨제도가 있게된 후로는 양동에 가장 먼저 入鄕한 성씨는 오(吳)씨로 전해오고 있고 그후 아산 장(蔣)씨가 6-7가구 장태골에 터를 잡고 있었든 것으로 전하여 지고 있다. 그 후 고려말에 豊德 유(柳)씨인 柳 復河라는 萬戶가 地方豪族으로 양좌골에 거주 하였다, 萬戶 유복하는 여주 이씨인 李光浩의 孫女와 婚姻하여 외동딸(무남독녀)을 1458년 청송에 살든 손소(孫昭 1433-1484.月城 孫氏) 에게 출가 시켜 손소가 25새에 처를 따라 양동에 입향하여 書百堂 일명 松 을 짔고 살았으며 월성 손씨들이 양동마을에 世居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손 소는 5남 1녀를 두었고 장남은 처가의 대를 있기 위해 처가로 가 버렸고 둘째 아들인 愚齋 손중돈(愚齋 孫 仲暾1464-1529)이 실재 양동 마을의 상속자가 되어 손씨 가문을 이끌개 되었다.양민공 손소는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관직에 나갔고, 세조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2등공신"이되어 적개공신 개천군이 되었고 조정으로부터 노비 및 전답을 하사받았고 공조참의,안동부사,진주부사등 벼슬을 역임하였다. 또한 당시 (본조초기)의 상속제도인 남녀균분상속재가 일반적 이였기 때문에 萬戶 柳復河의 모든 재산을 相續 받아 경제적인 기틀과 지방 촌락에서 굴찍한 벼슬을 역임함이 특별하여 손씨 가문은 그 명성에 따라 양동에 세거할 수 있었다. 우재 손중돈은 김종직에게서 사사하였고 영남 성리학계의 태두로 추앙 받으며, 이조판서등 3조의 판서등 조정 내직 중 고위직을 두루 역임한 인물로 부자 2대에 걸친 명문가로 상경종사 하면서도 향촌의 기반을 개으름 없이 확고하게 관리하여 씨족마을로 정착 시켰다.
손 소의 외동딸에게 영일 장기 옥동에 살고있든 이번(李蕃 驪州李氏)이 혼인하여 처가를 따라 양동에 입향하였고 2남1녀를 둔 후 일찍 사망하여 그 아들들은 편모 슬하에서 양동의 외가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의 맏아들이 조선 18현과 동방 5현인 유명한 회재 이 언적( 晦齋李彦迪 1491-1553)이며 吏曹判書와 정승과 같은 반열인 좌찬성을 역임하였고 퇴계 이황에게 학문적 영향을 지대하게 준 대사상가로 추앙을 받고 있다. 조선 18현은 우리 나라의 온 역사를 통하여 학문이 깊은 유학자 18명을 가려 문묘배향한 학자중의 학자로 성현중의 성현으로 설총, 안향,김한림당등 학문과 사상이 뛰어난 인물들로 역사에 기리 남을 것이다.
손씨와 이씨 두 문중의 갈등과 협조 그리고 대립
愚齋孫仲暾(晦齋 李彦迪의 外三寸)과 회재 이언적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것은 마을 최고의 영광이기는 하지만 이로 인하여 양동마을의 양 씨족의 定着史는 복잡하게 된다.
외손들이 발흥하여 마을의 주인이 되었든 이 마을의 전통은 손소와 손중돈대로서 단절 될 듯 하다 이언적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외손으로 태어나 정착함으로서 다시 외손 정착의 전통이 부활되었다. 손소의 자손인 월성 손씨 가문과 이 번의 두 아들 회재 이언적과 농재공 이언괄의 자손인 여주이씨 (소본은 여강이씨라함)가문이 한 마을에 동거하는 양성 씨족마을이 되었다. 두 가문은 각 가문 나름대로 명예와 긍지와 경제력을 가짐으로서 대외적으로는 서로 협력을 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葛藤과 對立關係를 400여 년간 유지하며 서로 경쟁을 하여왔다. 어릴 적 부친을 읽은 이언적을 돌보아온 외삼촌 손중돈은 총명한 외족하를 장성 할 때까지 부임지마다 대리고 다니면서 자상하게 지도하였고 후일 회재 이언적이 정계에 있을 때는 음으로 양으로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당시의 상속재도인 男女均分相續裁度에 따라 손소의 유산을 공평하게 분배하여 이 언적에게 상속케 함으로 경제적 기반을 잡도록 하였다. 孫氏 門中에서는 晦齋 學文은 愚齋孫仲暾으로부터 전수하였다고 하나 李氏 門中에서는 기초학문은 모르지만 深奧한 性理學의 思想은 傳受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역시 두 문중의 自尊心과 肯志로 인하여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초기에 두 가문은 혈족 관계로 비교적 협력관계가 무리 없이 잘 이루어 졌으나 그 후 이씨 문중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이씨가 자손들이 손씨를 압도하는 역전현상이 되었다. 선 입향 씨족인 손씨들이 이로 인하여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고 . 이씨들은 그들 나름대로 외가 곳이라는 관념과 후 입향 씨족이라 손씨들의 텃세에 대한 소외감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두 씨족간의 경쟁은 어느 가문이 과거 급제를 많이 하였나, 어느 가문의 후손이 고위 관직을 많이 하였나 하는 것부터 마을에 건축물을 건축하는 것까지 경쟁함으로 두 가문 서로의 발전 및 마을 전채의 발전에도 상당히 기여 한 것으로 드러난다. 특히 양동에 건축되어진 건물들을 보면 두 가문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건물 자체의 방향과 구조 개성이 뚜렷이 구별되며 30년 주기로 경쟁적으로 건축을 하였다 그 결과 아직도 이 마을에는 200년이 넘는 고가들이 30여 호 남아 있으며 다른 마을에 있는 일반 주택보다 규모가 크게 지워진 것들이다, 6.25 전쟁 전 이 마을이 한창 번성하였을 때는 약4-5백호가 살았다고 한다 대가족제도인 당시를 유추하면 그 규모가 가히 놀랍다. 6,25전쟁 때 포항, 안강전투의 격전지 중심에 이 마을이 위치하여 많은 건물들이 破損되었고 또 시대의 변천에 따라 과거의 쓰라린 위치에 있든 하층민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많은 주택들이 허물어 졌고
또 민속 마을이 지정되기 전에 이 마을에 있는 몇 가구의 큰 주택이 팔려 뜯겨 나가기도 하
였다. 그런대도 이 마을에는 아직 150여 호의 고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양동의 지리적 위치
양동 마을은 兄山江 변에 위치한 넓고 비옥한 安康平野 동쪽 구릉지에 위치한다, 동쪽에 성주산(109m;혹은 앞산 또는 안산이라고도 함) 뒤쪽은 주봉인 雪蒼山(163m: 혹은 종지봉 "간장종지를 엎어놓은 형상"이라 함) 사이의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서 흐르는 형산강의 지류인 機械川(이 마을에서는 安樂江 혹은 논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쪽 경주에서 이 마을로 물이 逆水 하듯 흘러오는 경주 南川이 마을 初入에서 合流하여 형산강의 主流가 되이어 迎日灣으로 흘러간다. (風水에서 역수형국은 지기의 흐름을 극대화하여 부와 번영의 원천으로 해석한다) 마을을 이루는 구릉들은 설창봉에서 부터 뻗어 내려 4개의 主脈을 형성하고 그사이에 3개의 큰 골 및 작은 골짜기를 만들고 있다, 이 형상은 물(勿)자를 뒤집어 놓은 형상이라 하고, 一說로는 이 마을의 지형이 태극형이라고도 한다. 이 형상을 가진 지형은 마을을 이루기에 명당 중 명당이라고 전하여 지고 있다. 또한 이 마을 입구 관가정 아래
기계천에는 해방 전까지 영일만에서 고깃배들이 수산물을 싣고 왔고 , 비옥한 안강 들에서는 풍부한 농산물이 있어 이 마을에는 다른 마을과 달리 내륙에 위치하면서도 농, 수산물이 풍부하였고 일반 공산품 기타는 해방 전까지 강동면 소재지인 쇧두들장과 안강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생활에 대한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이 마을에는 대소 골짜기가 7-9개로 형성 되었고 큰 골짜기는 물봉골, 안골, 장태골, 작은 골짜기는 본터골,갈곡,두동골,진사골,거림등이고 주로 골짜기를 기대어 몇 개의 영역을 형성하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씨와 손씨 두 가문은 조선조에 유수한 명문가로 상당한 세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주 및 지배층으로, 마을을 운영하기 위해서 많은 소작인과 노비 및 머슴들이 필요하였다. 이 마을의 이-손 양가문의 살림집은 대부분 구릉 위에 자리 잡았고 하층민인 소작 및 노비들은 큰 기와집 즉 언덕에 위치한 집 아래에 위치한다, 양동의 집들은 예외도 가끔 있지만 위계질서를 확실히 지킨 것 같다. 말하자면 마을의 살림집들은 작은 규모의 초가 및 흙담집과 중규모 이상의 기와집으로 구별되고 기와집도 규모가 큰 것일수록 높은 곳에 위치하고, 초가집과 흙담집은 기와집 바로 아래나 낮은 곳에 위치하여있다, 옛날에는 초가집이나 흙담집은 이 마을 양반들의 전답을 소작하는 타성받이(이 곳에는 하배들 이라 한다)나 노비들이 주로 살았다, 예외는 있었지만 대부분 이러한 형태로 상하 계층간의 위계와 신분을 구별하였다. 양반들은 고지대에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하배들을 거느리는 만족감과 지배층으로 긍지를 가졌지만 생활공간의 기능적인 면에서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지대에 위치함으로 안사람들의 출입이 어려웠고 물이 부족한 이 마을에 가뜩이나 고지대에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물 소비량이 많은 양반계층의 물 공급이 어려웠다. 그러나 물은 저지대에 위치한 우물에서 노비들이 저다 날랐고 아녀자들의 출입은 노비들이 가마로 실어다 주니 불편한 점이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이 마을의 양반들은 노비를 많이 두었다. 옛날 이 마을이 한창 번성 하였을 때는 초가집이 8-90%를 형성했다고 하니 알만한 일이다.
양동의 주 골짜기는 양좌골이다 이 계곡 좌우로 하여 대소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 안강들과
경주에서 흘러오는 강을 거처 불어오는 바람은 양좌골의 골바람이 되어 드세다, 특히 겨울에는 칼바람이 되어 매섭게 불어온다, 그러나 주 골짜기에 좌우로 있는 능선들이 병풍 역할을 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곳에는 바람이 여과되어 큰바람이 없다. 언덕 위에 있는 양반집들에는 거의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따뜻한 햇빛만 조용히 비췬다. 체감온도는 많은 차이가 난다. 양동만의 특이한 기후라 할만하다, 이것 역시 지형을 이용한 것이리라,. 반면 여름에는 골바람이 불어 저지대는 무덥지만 언덕에 위치한 집들은 시원하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풍수해가 없다고 한다, 실재로는 저지대 하층민이 살든 곳은 풍수해가 있었다. 풍수해가 없다는 것은 양반들을 기준으로 말한 것 같다. 이 마을 안쪽으로는 안계리 라는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포항 철강공단 공업용수를 위한 안계땜이 건설되어 전에 없든 안개가 자주 있는 것이 전과 좀 달라졌다..
양동의 고 가옥
이 마을의 건물들은 이씨 손씨 두 문중간 건물 입지선정 및 건물건축에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마을을 발전 시켰다. 가장 먼저 양민공 손소가 25세에 지은 손씨 대종가 書百堂이 안골 깊숙한 언덕에 자리 잡았고 그 후에 건축한 이씨 대종가 無 堂은 한 능선 건너 물봉골 중간쯤 자리 잡았다. 두 성씨가 각각 한 골짜기씩 차지하고 宗宅을 건축하였다, 다음은 분가하는 두 성씨의 기차들의 주택들이 위계 질서에 따라 건축하였다. 손씨 문중에서 이 마을 남쪽 마을 어귀에 觀稼亭을 지었고 ,바로 이씨들이 경쟁적으로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香壇을 건축하였다. 골짜기 분점이 끝나고 다음은 언덕의 분점을 경쟁적으로 하였다.
이씨 손씨 문중의 중요한 건물들은 대부분 이렇게 경쟁적으로 건물을 지었다. 예를 들면 한 문중이 어느 위치에 정자를 건축하면 경쟁적으로 대응하는 위치에 다른 문중이 정자를 세웠고, 한 문중이 서당을 세우면 서당을 가옥이면 가옥으로 경쟁하였다. 이씨가 옥산에 있는 옥산서원이면 손씨는 유금리 형산강변의 동강서원 이씨가 강학당을 서당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면 손씨는 안락정에서 자손들을 교육시켰다. 두 가문의 건축 경쟁의 극치는 양동 어귀에서 바로 보이고 위치한 관가정과 향단이다. 관가정은 우재 손중돈이 분가하면서 손수 지은 집이라고 전하여 지고. 마주 위치한 향단은 회재 이언적이 상경종사 하다 고향에 있는 편모를 모시기 위하여 은퇴를 고려 할 때 조정에서 외직으로 경상감사로 명함으로 그때 경상감영에서 직무를 보아야 하나 편모를 위하여 대구와 고향을 오가며 직무를 수행키 위하여 향단을 지었다고 전하여 지고 있고 경상감사직을 마치고 전주감사로 전직 할 때 동생 농재공 인 이 언괄에게 준 주택이지만 회재 이언적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 되었고 복잡한 구조와 사랑과 안채가 연결되면서 독립된 것은 직무를 고향에서 보기 위한 배려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두 집은 지리적 위치와 사회적 위치는 비슷하지만 건축 내용은 판이하다. 두 집은 좁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위치하고 있지만 방향은 135도 정도 비틀어저 있다. 먼저 세워진 관가정은 마를 전채의 조산인 호명산을 안대로 삼았고, 반면 향단은 그 동쪽 안산인 성주산과 그 산의 맥을 안대로 삼아 위치는 비슷하지만 외삼촌 우재의 안대를 피해서 회재는 다른 안대를 잡았다. 향단은 회재의 특수한 목적(경상감사의 별도 직무집행소로서의 용도)이 있지만 관가정과 경쟁을 의식하면서 세워진 증거는 여러 면에서 추정 할 수 있다. 규모와 시선을 가리지 않게 웅장하게 전면에 드러나게 지은 것은 특수한 용도로 인한다 하드라도 관가정은 더 높은 언덕에 위치하지만 언덕을 평지로 터를 다져 깊이 들어 않았고, 높이를 낮추고 형태를 단순하고 간결하게 하여 다른 집들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특히 여름이면 그 앞에 있는 나무들로 인하여 더욱 숨어 있다. 반면 향단은 돌출한 언덕에 위치하여 시선을 가리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이 눈에 바로 웅장하게 들어온다, 특히 3 개의 박공면을 강하게 노출시킨 형태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특히 대조가 되는 것은 두 집을 이룬 근본적인 건축 개념들이다. 관가정의 건축계획은 논리적이며 합리적 인대 반해 향단은 개성적이며 파격적이다. 이 두 집을 지은 두 건축자 손중돈과 이언적의 개인 성격 차 일 수도 있다. 손중돈은 도승지를 3번, 대사간을 4번이나 역임할 정도로 관직생활에 파란이 없었다. 반면 회재 이언적은 낙향과 등극 그리고 유배로 파란만장한 인물이다. 손중돈의 오랜 관료 생활을 통해 몸에 밴 규범과 인습, 합리성이 표출 된 것이 관가정이라고 보면 , 이언적은 독락당 건축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생활은 매우 개인적이었고 자유로웠다, 향단이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것은 건축주의 개성을 무시 할 수 없는 것이다.
절재와 규범 속의 다양함-觀稼亭 (김봉렬저: 시대를 담는 그릇)
일명 우재 손중돈 선생고택/보물 442호/1480년대 건립
자연과 맺고 있는 고전적 관계
우재 손중돈은 원래 종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 관가정을 창건했다. 따라서 관가정은 서백당이 세워진 1458년 보다 한 세대 뒤인 148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전국에 현존하는 살림집 가운데 임진왜란 전에 세워진 집은 10개 내외인대 , 양동마을 에는 서백당과 관가정 향단 무첨당등 임진왜란 전의 집이 4채나 있다. 관가정을 포함한 양동의 이 집들은 그 시대적 희소성만으로도 가치가 대단하다.
우재 손중돈은 차남이었지만 맏형이 장가를 들어 마을을 떠남으로써 손씨 가문의 장손이 되었기 때문에, 분가 직후 관가정이 대종가로 역할하기 시작했다. 그 후 4세기가 훨씬 지난 후인 20세기 초에 원래의 書百堂으로 대종가가 옮겨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관가정은 손씨 일가의 별장으로 쓰였다가 현재는 빈 채로 관리되고 있다. 그래서 관람하기에는 편하지만, 생활이 떠나 버렸기 때문에 원래의 용도나 당시의 풍취를 느낄 수 없어 아쉽다. 그러나 관가정은 남아 있는 구조체와 빈 공간, 이유를 알기 어려운 형태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이다.
관가정은 양동마을 초입 勿峰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아 멀리 오똑한 호명산을 바라보고 있다, 경사지를 넓게 깎아 단을 만들고 건물을 깁숙히 앉힌 까닭에 , 관가정의 모습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진입로는 갈지(지)자로 나있어서 경사는 그다지 급하지 않다. 서쪽으로 오르는 경사로는 다시 북쪽으로 꺾이게 되는데, 꺾이는 지점에 큰 고목이 서 있어 결절 점을 이룬다, 이 지점에 서면 서쪽으로 펼쳐진 安樂川과 安康平野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와 전망대로도 역할을 한다. 관가정에 이르는 길에 있는 4채의 작은 초가집들은 외거노비들이 기거하던 "가랍집"이었다. 길은 외길이고 가랍집들이 3-4중으로 통행을 감시했기 때문에 관가정은 별도의 담장이나 대문간을 둘 필요가 없었다. 지금 있는 담장과 대문은 1980년대 후반 관리를 위해 덧붙인 것이다. 특히 정면 중심 축에 세운 대문은 이 집의 개념을 완전히 해치고 있는 장애물이다, 관가정은 살림집인 동시에 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정자"다. 이 집은 勿封과 앞의 虎鳴山을 있는 자연 축을 중심축으로 삼아 건축 됐다. 따라서 안마당에서 중문을 열면 앞의 잘생긴 산의 전채 모습이 정확히 중문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재는 새로 세운 대문채에 가려서 산의 모습이 해체된다.
이 집의 이름은 "농사짓는 풍경을 보는 정자"란 뜻이다. 양동 주택들의 이름은 다분히 전원적인 냄새가 강하며 다른 지역의 양반 집들과 같이 관념적인 이름은 드물다. 큰 향나무가 있으면 "향단". 소나무가 있으면 "松 "이다. 관가정 사랑채에 오르면 이름에 걸맞은 경관이 펼쳐진다. 안채에서는 중문을 통해 앞산만이 선택된 경관으로 들어오지만, 사랑채에서는 앞산의 경관이 한 요소일 뿐. 아래로 전개된 들과 강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안채나 사랑채의 坐向은 같지만 景觀을 끌어 드리는 방법을 달리한 것이다. 자연 뿐 아니라 농사짓는 인간들의 행위까지도 경관의 요소로 삼은 人本的 생각도 이채롭다.
마을 진입로에서 관가정을 바라볼 때는 약간 중요한, 그러나 평범한 기와집으로 보이지만, 올라와 보면 이 마을 집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경관을 담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평범한 외관 속에 담겨있는 자연과의 적극적인 관계는 한국건축이 이룩한 고전적인 성과 일 것이다.
규범적인 "비어있음"의 안마당
명문집안의 대종가치고는 소규모이며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ㅁ자형 몸체에 전면 좌우로 날개를 뻗어 사랑채와 행랑채로 삼았다. 그 동쪽 뒤에 사당을 둔 것이 전부다.
다른 대가와 같이 담장도 없고, 명확히 구분되는 외부공간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공간적인 변화가 무상하다거나 중첩된 형태적 아름다움이 있는 집은 아니다. 평면도만 본다면. 한국의 집으로는 드물게도 좌우가 거이 대칭인 형상이며, 마루면 이 차지하는 비율이 연면적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기능적이다.
평면 구성만 보아도 이 집은 논리적 규범을 따라 계획됐음을 알 수 있다. 규칙적인 격자체계를 따라 기둥을 세웠고, 좌우 두 칸씩 날개를 달았다. 전면 날개 부와 뒤의 안채부가 만나는 부분의 한 칸씩을 각각 부엌과 마루로 비워서, 비록 구조체는 한 몸이지만 공간적으로는 ㄷ자 안채와 ㅡ자 날개채로 구분하고 있다. 안 마당에 면한 몸체는 모퉁이 부분만 온돌방을 놓고, 마당의 3면 방향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북쪽 마루는 넓게 개방하여 안 대청으로,
동쪽 마루는 안방에 딸린 작은 대청으로 , 서쪽 마루는 판 벽을 막아 광으로 사용했다.
네모난 마당의 코너를 채우고 모서리를 비우는 방법으로 안채를 완성하였다, 안마당의 모서리를 비움으로서 작은 안마당의 공간감은 건물 내부로 확장되어 "비워있음"의 공간감이 극치를 이룬다, 약간 과장되게 해석한다면 비어있는 띠가 이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아무래도 마루가 절반을 차지하는 이 집에서 과연 일상 생활이 가능하였을까 의문스럽다. 복원적 연구에 의하면, 안방 아래 작은 대청은 안방을 위한 부엌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건넌방 아래 마루는 1칸 도장(창고)과 1칸 여막방 이었다고 한다. "여막방"은 상을 당했을 때 사용하던 방으로, 보통 3년 동안 위패를 모시고 사랑에서 기거하든 후손들이 배례하던 곳이다, 따라서 여막방은 비록 안채에 속해 있지만 출입은 사랑채 쪽마루를 통해서 가능했다, 그러나 추정된 복원구성이 사실이었다 하드라도 안마당을 둘러싼 공간적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이 집은 일상적인 살림집이 아니라 400년간 대종가로서 역할 했다는 점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이 정도의 명문가 대종가는 1년에 수십 차례의 크고 작은 제사를 치러야 했고, 제사의례는 종가 집의 가장 큰 일상생활이었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기능도 제사에 필요한 공간의 확보와 배열이었다. 집에 비해 지나치게 큰 6칸 안 대청은 적어도 수십 명이 제사를 위해 확보된 제청으로 보아야 한다, 또 전면 행랑채 부분의 온돌방들은 제사 시에 일가붙이들이 숙박하던 방일 것이다. 하인들의 숙소는 관가정 아래에 포진한 가랍집들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종손들이 서백당으로 옭기고 난 후에도 관가정은 여전히 손씨 일가의 제사용 건물로 남았을 것이고, 마루가 확대된 지금의 변화도 이 당시 일 이였을 것이다, 관가정 전채를 흐르는 규범성은 대종가라는 기능을 떠나서는 생각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규범은 고도로 절재되고 추상화 돼 있다.
단순한 전체 속의 다양한 부분들
안 마당의 규범적 공간과는 대조적으로, 관가정의 바깥 형태는 다양한 보습을 보인다, 이 집을 대표하는 형태는 사랑채의 누마루다, 손중돈이 마을 깊숙한 서백당을 떠나 이 곳에 종가를 옭긴 이유는 바로 더 넓은 자연을 감상하기 위함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누마루가 필수적이었다, 두 칸 방과 두 칸 사랑 대청의 바닥 면은 동일하지만, 대청 아래 기단을 안으로 접어 넣어서 대청 아래로 기둥이 내려온다. 또 한 사랑채 전면에 계자난간을 두름으로서, 사람이 들어 갈 수 없을 정도로 낮은 파로티지만, 또 단지 두 개의 기둥만을 노출시켰지만, 누각의 형태를 얻는대 성공했다. 이 집의 핵심은 바로 이 누마루, 즉 "관가정을 만드는데 있었고, 단순해 보이는 조작으로 의도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했다, 일상의 살림집과 일상에서 일탈된 정자라는 상반되는 건축유형을 절묘하게 결합한 복합 건축이다. 단순한 기법으로 복합적 효과를 거두는 일, 그 것이 바로 설계의 기술이다. 사랑채의 형태가 유희적이고 변화무쌍 하다면, 바로 옆의 행랑채는 극히 기능적이고 획일적이다, 부엌을 중심으로 3개의 온돌방으로 구성된 4칸이지만, 각 칸에 두짝 살창을 달아 그 입면은 모두 동일하다. 부엌까지도 방같이 보인다. 이 획일적인 4칸이 대문을 사이에 두고 전개되는 사랑채의 변화를 더욱 강조한다. 평면적으로 대칭이되, 형태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채의 건물을 붙여 놓은 듯하다.
행랑부분의 동쪽으로 돌아서면 담을 둘러 독립된 사당영역을 접한다. 몸체와 날개채 사이로 자연스레 형성된 마당이 곧 사당 앞마당으로 바뀌어 많은 인원들이 제례에 참석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이 집의 전체적인 구성원리를 훤히 꿰뚫은 이만이 설정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종가로써는 물론, 일반적인 사대부 집의 규모에도 못 미치는 몇 칸 안 되는 단순한 구성이지만, 사랑채,안채,행랑채,사당,별당, 제실 등 필요한 모든 기능을 수행 할 수 있는 극도의 경제성, 사랑을 사랑답게, 부분의 형태와 공간에 독립성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은 손중돈 정도의 대지성만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도 단순한 전체 구조 속에서. 관가정 전체를 흐르고 있는 절제의 정신은 구조 틀까지 일관된다, 이 집은 기둥도 높지 않지만, 지붕 틀의 경사도가 완만해 더욱 층고를 낮추고 있다, 20도가 채 안 되는 서까래의 물매는 보통 집의 절반 정도다, 서까래의 경사도를 낮춘 결과, 정면 지붕에 생기는 박공면을 최소로 줄일 수 있었다, 밖으로 드러나는 형태를 최소로 절제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대들보와 서까래 사이에 구조적인 문제가 생긴다. 서까래 아래와 대들보 위 사이의 간격이 가까워서 일반적인 대공을 설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집에서는 휘어진 대들보를 사용했다. 위로 휘어진 대들보는 대공 없이도 종도리를 걸어서 서까래의 하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휜 대들보는 원래부터 휜 나무를 사용했다. 그래야 대들보의 인장력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극히 구조적인 이유로 사용된 이 부재는 형태적으로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져온다. 이른바 "한국건축의 자연미"라 부르는 아름다움은 이렇게 얻어진다, "자연미"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우연미가 아니다. 극히 계산되고 인공적인 기법의 결과로 얻어지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아름다움"일 뿐이다.
(옛 마을의 어른들이 전하는 것으로는 관가정의 건물이 우재 손중돈 선생의 청백리사상이 많이 표현된 검소하고 절제된 그의 근검절약 정신의 표출이라고 했다.)
1뚜렷한 個性과 意圖 향단(香壇) (김봉렬저 시대를 담는 그릇)
보물 412호 /1540년대 건축
표현적인 형태와 터잡기
옥산 獨樂堂에서 5년간 隱遁生活을 淸算하고 다시 官職에 복귀한 李彦 은 慶尙監司 의정부좌찬성 등의 高位職을 역임하면서 행복한 중년을 보내게 된다, 경상감사라는 자리는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특별시장 정도의 지위였다. 경상감사로 재직하면서 그는 고향가족들에 대해 대단한 선물을 안겨 주었다. 자신의 본거지인 이씨 종가에는無 堂이라는 아름다운 별당을 지워 주었고, 유일한 동생 이언괄을 위해서 향단이라는 대저택을 지워 주었다. 독락당 낙향시절의 부끄러움과 심리적 빚을 보상하기 위해서였을까?
앞서 말한 향단은 그 터잡기, 좌향 정하기, 규모와 건축적 개념의 설정에 이르기까지 관가정과 대립적이다. 물봉 서쪽의 관가정에 대해 산등성이의 동쪽을 차지했으며, 관가정의 안대와는 135도를 틀어서 다른 안대를 택했고, 규모는 관가정의 두 배를 넘는다, 향단이 서기 이전 적어도 50년 전부터 있었던 "손씨 대종가" 관가정에 대응하여, 이씨 파종가를 이처럼 돌출적으로 부각시킨 것은 이언적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건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미 독락당의 조영 예를 통하여 회재는 대단한 안목을 가진 건축가였음을 입증된바 있다. 비록 자신의 후원자였든 외삼촌 우재 선생에개는 미안한 일이지만, 손씨들이 주도하는 고향마을에 자신과 가문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선택한 건축적 과시였을 것이다.
또 그에게는 향단의 건축을 통해서 손씨 가문의 다른 집들을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할만한 건축적 실력이 있었다.
향단의 외관은 대단하다, 위치도 위치지만 일체의 장애물 없이 건물 외관 전채를 노출시킴으로서 마을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건물이 되었다. 특히 전면 지붕위로 노출된 세 개의 박공면은 사대부 가로는 유례없이 표현적인 형태다. 거의 보이지 않는 관가정의 박공면과는 대조적인 의도다. 사랑채 형태도 같은 의도로 파악된다, ㅡ자형 몸체지만, 지붕을 工자형으로 만들어 사랑채 정면의 지붕에 두 개의 박공면이 강하게 노출된다, 의도가 없었다면 필요 없는 형태요소다, 관가정 사랑채가 파로티라는 공간 요소를 도입해 구성됐다면, 향단 사랑채는 박공이라는 형태조작을 통해 만들어졌다.
향단은 경사지를 두 개의 단으로 나누어 터를 닦았다, 윗단에 주요 몸체를 배치하고 아랫단에는 긴 행랑채를 배열했다, 두 건물 사이는 거이 한 층에 가깝게 높이 차이가 난다, 또한 몸체와 행랑채 사이를 바짝 좁혀 세웠기 때문에 몸체의 입면은 노출되지 않는다. 무표정한 형태의 행랑채 위로 긴 몸체의 지붕 면과 그 위 3개의 박공면들이 더욱 부각된다, 어찌 보면,
이러한 형태적 표현성을 위해서 대지의 레벨을 정하고 건물의 위치를 잡은 것 같아서, 한국건축의 일반적 계획순서와는 반대의 프로세스를 밝지 않았는가 의심이 될 정도다. 세부적인 구조기법등에서 이 집의 표현적 의도가 절정에 달한다, 집의 기둥은 행랑채까지 모두 원기둥을 사용했다. 관가정은 사랑 누마루에 사용된 4개의 원기둥을 빼고는 모두 사각기둥을 썼다. 기둥 위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익공을 달았고, 대들보 위에는 공공건물에나 어울릴 화려한 복화반과 포대공을 올렸다, 사랑채의 지붕은 부연을 단 겹처마다, 모두 민간 살림집에는 금기시됐던 최고의 장식들이다, 관가정에서 보았던 절제와 규범 대신 과시와 개성이 번뜩이는 형태들이다.
신비스러운 미소, 그러나 한숨소리.
향단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지만, 모든 건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몸체는 日자형이고 그 앞에 긴 행랑을 연결함으로써 전체적으로 巴자형의 평면을 이룬다, 몸체에는 두 개의 중정이 있다, 하나는 안채 부에 딸린 안마당이고, 서쪽의 것은 안 행랑부에 딸린 노천 부엌용 중정이다, 이 역시 일반적인 살림집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희귀한 예이다, 두 개의 중정은 자연스럽게 이 집의 기능을 구분한다,, 안마당은 사랑채와 안채를 , 부엌마당은 안채와 안 행랑을 구획한다, 두 중정 사이, 이 집의 중심에는 시어머니가 사용하는 안방이 자리잡아 모든 부분의 움직임을 감시 할 수 있다. 복합적인 평면구조 보다 동선체계는 더욱 복잡하며 단절적이다, 행랑에 난 대문을 열면 안채의 높은 축대에 맞닥뜨린다, 안마당으로 향하는 중문이 바로 앞에 있지만, 한 층이나 높아서 도저히 접근 할 수가 없다, 중문으로 들어가려면 동쪽의 사랑마당으로 올라가서 사랑방 옆의 좁고 위태로운 샛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가급적이면 출입을 하지 말라는 길이다, 반면 부엌마당으로 통하는 하인들의 통로는 훨씬 수월하다, 행랑채와 축대사이의 서쪽 길을 따라가면 지면을 경사진 램프로 처리하여 다락 밑의 파로티로 연결되고 바로 부엌마당이다. 안주인의 출입동선은 지극히 불편하고 하인들의 출입은 매우 편안하다. 평면으로 보아도 복잡한 동선들은 입체적인 레벨차이와 부엌 부의 2층 다락 출입으로 더욱 복잡한 미로를 형성한다.
이 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많다.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은 어떻게 되는가, 조직적으로 구성된 하인들의 공간, 부엌마당에 비해 무언가 불완전한 안주인의 안마당, 특히 안방과 건넌방을 엇갈리게 배열한 안채부분의 구성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높게 자리잡은 안 대청 바로 앞에 행랑채가 가로막아 안 대청에서 보이는 것은 행랑채의 지붕과 빈 하늘뿐이다. 또 며느리가 기거하는 건넌방은 부엌마당으로만 통하게 돼있고, 안방 시어머니의 따가운 감시를 늘 감수하도록 설계 돼있다. 남편이 있는 사랑방으로 접근하려면 이중 삼중의 감시망을 피해서만 가능하다, 이 집 며느리는 자유로운 출입은 불가능하고, 쥐 죽은 듯이 건넌방에만 파묻혀 부엌의 하인들이나 지휘하고, 틈나면 안 대청에 않아 하늘이나 처다 볼 뿐이다, 이 집에 시집온 새댁들은 세 번 놀랐을 것이다, 처음에는 웅장한 이 저택의 안주인이 됐다는 사실에 가슴 벅찼을 것이고, 어렵게 들어선 안마당의 아늑한 분위기에 뿌듯했을 것이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폐쇄되고, 불편한 내부공간과 그 속에 묻혀 꼼짝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가슴 아팠을 것이다, 그녀들에겐 향단이란 겉보기에 화려한 감옥에 불과 했다. 회재 선생이 어떤 연유로 이런 집을 구상했는지 알 수 없다. 소실 댁이었던 독락당과 자신의 은거지 인 계정에는 그처럼 정감 있는 공간을 창조했으면서, 하나 뿐인 동생 집을 이처럼 폐쇄적으로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안 주인인 제수씨, 또는 초가며느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집의 건축가가 관가정과는 전혀 상반되는 주택을 만드는데는 확실하게 성공했다, 관가정은 외부적으로 폐쇄적이고 소박하지만, 내적으로는 개방적이며 대단한 경관을 끌어들인다,
반대로 향단은 외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내적으로 갑갑하고 폐쇄적이다, 향단은 현재 비워있고 잠겨있다, 어렵게 들어간 소수의 방문객들은 향단의 아늑한 공간과 신비스러운 미로에 감탄을 금치 못 할 것이다, 처음 몇 번 향단을 방문했을 때는 나도 그랬다, 그러나 방문 회수가 늘수록 이 집에 살았던 안주인들의 한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건축가의 자유로운 의지
향단의 건축주는 이언적임이 확실하지만 건축가는 누구인지 정확치 않다, 독락당의 건축가가 이원적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이 집의 건축가 역시 그가 아니었나 추정할 뿐이다, 건축주와 건축가가 동일인이라 할지라도, 집의 목적을 주문 받아 작업에 임하는 일반적 설계과정은 다르지 않다, 건축주가 아니라 건축가 이언적으로서는 "외적 과장과 내적 폐쇄"라는 추상적 주문을 구체적인 공간과 형태로 실현할 의무를 갖게된다, 이 집의 건축가는 그 구체화 과정을 천재적으로 수행했다. 2개로 나누어진 중정은 "중정"이라는 공간단위가 가능한 최소한을 보여준다, 2칸 곱하기 2칸의 규모는 한옥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크기다, 물론 한 칸짜리 중정도 있을 수 있지만 , 단순히 빛을 끌어드리기 위한 우물일 뿐, 행위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이 작은 중정이 충분한 공간감을 갖기 위해서는 중전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개방성이 요구된다. 향단의 안마당은 3면의 툇마루와 1면의 대문간으로 둘러 쌓여있다. 부엌마당은 벽이 없는 파로티에 의해 충분한 공간감을 얻을 수 있었다. 2개로 분리된 "주인의 마당과 하인의 마당"은 공간적 성격까지도 달라진다, 안 마당이 "비어있음" 자체의 관념성을 담고 있다면, 부엌마당은 일조와 통풍 가사 노동 등 물리적 요구를 수용하는 기능성에 충실하다, 최소의 두 중정은 어느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의 존재의의가 사라지는 불안전한 요소들이다. 안마당만 있다면 생활의 기능이 해결 안되고, 부엌마당만 있다면 하층민의 주거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중정에 나타나는 "이중성"은 이 집 전체를 흐르는 건축적 개념이다, 과시적인 사랑채와 은폐된 안채의 형태적 이중성, 온 마을의 풍경을 바라 볼 수 잇는 사랑채와 지붕만 바라보는 안채의 경관적 이중성, 더 나아가 같은 건축가의 두 작품, 옥산의 독락당과 양동의 향단이 갖는 상반되는 이중적 개념들. 이중적 구조를 구체화하기 위해 선택된 건축요소들은 다른 한옥에서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다, 巴자형 집모양은 거이 유일한 구성 법이며, T자형으로 계획한 안채의 배치도 독창적인 생각이다, 분리된 2개의 중정을 연결하기 위하여 반칸짜리 통로를 고안했다. 한국건축의 모듈은 철저하게 구조적인 모듈, 즉 "칸"을 기본으로 한다, 향단에서는 구조적인 모듈을 반칸, 도는 1/3칸으로 구획하면서 자유로운 변화를 시도하였다, 관가정의 규범적 모듈과 대조를 이룬다.
이 집에 사용된 몇 개의 요소들은 전혀 엉뚱한 건축유형에 인용한 것들이다. 부엌마당의 기능과 공간적 관계를 동시에 얻기 위해 고안된 2층 창고는 사찰의 요사 채에서나 볼 수 있는 요소를 도입해 적절한 스케일로 변형 시켰다. 사랑채 정면에 부각된 박공면 역시 서원이나 향교건축에서 사용하던 형태요소이다, 건축적 의도와 실현을 위해서는, 그 것이 사찰에 쓰였든 것이건 서원에 쓰였던 것이건 간에 자유자재로 선택하고 변형 할 수 있었다, 규범을 무시하고 인습을 거부한 이런 건축적 대담함이 없었다면, 향단의 개성과 낭만성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이 집에 살았던 여인들의 사정만 모른 척 한다면, 향단은 정말 대단한 건축이다.
觀稼亭의 合理性과 香壇의 浪漫性
양식의 개념과 반양식적 이해
건축을 이해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여러 건물 사이의 기본적인 성질들을 추출하고 그 것들을 분류하여 몇 개의 개념적인 캐터고리를 묶어서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 유형학적 개념의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양식"이란 개념이다. 유럽건축사의 시대구분으로 익숙한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양식 따위의 시대적인 양식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적 양식, 일본적 양식 등의 민족적 양식, 북종화 남종화 등의 예술학파적 양식, 심지어는 꼬르뷔제풍, 미이스풍 등의 개인적인 유형의 차원까지 양식적 개념이 적용된다, 양식론적 방법은 수많은 건축물들의 특성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시대적 양식의 개념이 없다면 무수한 역사적 건축물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대다수의 건축사 교과서들은 시대적 양식의 개념을 근거로 서술된다. 그러나 "양식"이란 어디까지나 개념일 뿐 실제가 아니다, 르네상스 양식은 건축사가의 머리 속에는 존재하지만, 르네상스의 양식적 특성과 개념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건물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근세 이탈리아에는 몇 만 채의 건물들이 세워졌을 것이다, 그 수많은 건물들이 양식의 규범을 만족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하나 하나가 독특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계획되고 시공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 건축"이라고 집단적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 사이에 공통적인 특징만을 지칭 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반유형학적인 이해만이 하나의 구체적인 건물을 정확히 바라 볼 수 있다는 이이러니에 직면하게된다, 이 개별적 이해의 조건은 건축물들 사이의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을 발견해 내는 것이고, 하나의 건축에 내재하는 창작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다. 물론 두 가지 인식론은 이해의 대상과 목적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될 수다. 양동의 주택들을 양식적 방법으로 분석하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들을 찾아 낼 수 있다, 우선적으로 경주지방의 살림집의 일반적인 형식. 즉 지역형이 찾아 질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중기와 후기주택들 사이의 시대적 형식들, 그리고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계층적 형식, 더 나아가 손씨 가문과 이씨 가문 주택의 사소한 형식들까지 발견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시대양식 또는 계층양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관가정과 향단은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분류 될 것이고, 두 집의 상반된 건축 내용보다는 유사한 형식만이 강조돼서 나타난다. 그러나 15세기라는 공통된 시대, 대지주, 사대부 층이라는 같은 계층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두 집은 여전히 다른 집이며, 건축적 개념으로는 오히려 극단에 서있는 작품들이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관가정과 향단?
시대적 양식 가운데 가장 대조적으로 평가되는 것이 르네상스와 바로크다, 르네상스 건축은 조화와 통일을 이상으로 삼아 매우 규범적인 건축의 원리들을 만들어 냈다, 자연이야말로 그 조화와 통일의 모범이라 믿었고, 자연의 법칙은 수학적 질서에 기초했다고 믿었다, 반면 바로크 건축과 예술은 수학적 원리에서 벗어난 변형과 과장 왜곡된 형태를 만들어 냈다.
건축양식론의 태두라 할 수 있는 뵐프린은 "5개의 개념대립"을 추출하여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양식적 차이를 설명한다, 예컨대 르네상스의 예술은 명료하고 선적이지만, 바로크는 불명료하고 회화적이다. 제자인 프랭클은 더욱 건축 적인 분석에 몰두하여, 르네상스 공간은 가산 적인데 비해 바로크 공간은 분할 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들의 공헌이라면 시대나 사회적 배경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과 건축작품에 내재한 기초적인 개념들을 추출하여 양식구분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같은 시대에도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이 공존할 수 있고, 현대에도 심지어는 서구적 전통과 관계없는 한국의 고전건축에도 그들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흔히 관가정을 르네상스적, 향단을 바로크이라 비유한다, 관가정의 논리적 모듈 계획, 유교적인 절제와 금욕주의를 르네상스 적으로 보았고, 향단의 격식파괴와 개인적인 개성과 변형을 바로크 적인 범주로 인식했다, 뵐프린이나 프랭클의 양식적 개념과는 다르지만, 두 집의 대립적인 성격을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한 결과다, 그러나 정확히 르네상스나 바로크 모두 '양식'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전개된 변화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모든 양식은 '근대적 합리주의'에 기초한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변화무쌍하고 자유로와 보이는 바로크 양식에도 일정한 법칙과 원리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단의 건축적 개별성과 돌연변이를 바로크 적이라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관가정과 향단에 근저에 흐르는 상반된 건축적 정신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관가정이 유교적 절제와 엄격함을 근거로 한다면, 향단은 건축가 개인의 발산된 개성을 근거로 한다. 이런 점에서 관가정이 합리주의라 한다면, 향단은 낭만주의적이다, 합리적 건축이란 훈련된 지성에 의해 계획되고 유토피아적 목표를 가지며, 환경을 존중하며 순응한다, 반면 낭만적 건축은 '양식'을 부정하는 개별성을 가지고 표현주의 적이며, 주변환경에 대해 고립적이다. 이성적인 판단만으로는 합리적 건축이 낭만적 건축보다 우위에 놓이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건축적 완결성과 감흥은 이성만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직관과 우연이 건축 창작과정의 마무리를 짓기도 한다, 관가정과 향단의 우열비교는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건축가들과 이 두 집을 함께 돌아보면, 대게 뚜렷한 취향을 드러내 두 패로 나뉜다, 관가정을 좋아하는 이들의 작품과 생각들은 대체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다, 반면 향단 쪽의 건축가들은 개성들이 강하고 직관적이다, 그러나 대가 급의 건축가라면 두 집의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간파하고, 두 집의 생각과 실현된 모두를 좋아 할 것이다. 두 집이 어떤 양식적 성격을 갖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 두 집의 개별성을 정확히 읽어내고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을 어른들의 향단에 대한 이야기)
회재 이언적 선생이 상경종사(내직)하다 고향에 있는 편모를 생각하여 은퇴 낙향을 결심하고 사직을 원하나 조정에서 허락지 않아 여러 번 청하였으나 수리되지 않고 외직인 경상감사직을 명함으로 대구감영에서 근무함이 마땅하나 편모를 가까이 모시기 위하여 양좌골 고향에서도 경상감사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향단을 건립하였고 대구와 고향을 오가며 순회근무를 하였다함, 고로 향단 건물은 다른 건물과는 상식적으로 같을 수 없고 관청의 위엄과 직무의 편리성, 외지인이 향단의 위치를 바로 발견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안채와 사랑채의 분리와 단절도, 내부공간의 복잡합과 미로 같은 통로는 사무실과 주택의 기능을 분리하면서 생활의 편리성을 구상 한 것으로 전하여 지고 있다, 원래 향단에는 사당이 없었으나 회재 이언적 선생이 경상감사를 마치고 전직할 때에 그의 동생 농재공에게 이 집을 증여하였다, 그 후 이씨 가문의 지파인 향단 파의 파종가가 되었고 농재공 이언괄의 손자 이이수의 호를 따 이 집의 이름이 향단이 되었다, 한 동안은 사랑채 옆 언덕에 사당이 있었고 건물 전채의 칸수는 99칸이었으나 6,25전쟁 및 기타 여러 사유로 허물어진 건물이 만아. 지금은 총 56칸이 남아 있고 향단에 딸린 가랍집이 13채 있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은 공부할 때에 산사를 좋아하시고 자주 절에서 유하였다, 그러므로 향단의 부엌마당의 2층 다락방 및 창고는 절의 요사 채에서 그 형태의 편리성을 향단에 적응시킨 것으로 짐작된다.
양동마을의 주택들.
양동마을에는 6.25전쟁전 한창 번성하였을 때는 약 5-6백여 가구가 생활하였다, 대가족 시대의 가족 구성을 짐작하면 매우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시절과 갑오경장이후 노비해방으로 인하여 이곳에 있던 노비들이 다수 떠나고 6,25전쟁동안 안강,포항전투의 가장 치열한 지역에 위치하여 가옥들이 수없이 파괴되었으니 아직 150여호의 고 가옥들이 있다. 지금 양동에는 보물로 지정된 건축물이 3점, 중요민속자료 13점,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7점, 향토문화재 7점등 총 31점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한 마을 단위에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샘이다,
무첨당 (無 堂)
보물 411호/1500년대 건립
이 집은 驪州 李氏의 大宗家다. 동쪽에는 사랑채와 안채, 서쪽에 別堂인 無 堂 , 그리고 그 사이 높은 언덕에 祠堂領域으로 이루어 졌다. 晦齋 李彦迪의 父親인 李蕃이 良洞에 장가들어 기반을 잡은 후인 1508년에 살림집을 건립했고, 회재 이언적이 경상감사 시절에 別堂인 무첨당을 세웠다. 이언적의 본가이며 여주 이씨의 대종가로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맏손자 李宜潤의 호를 딴 것으로 '조상을 욕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종가로서 무첨당의 의도는 매우 강열하고 直線的이다, 물봉골 중간 언덕자락에 위치하여 마을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사랑채와 별당사이 가파른 언덕에 직선으로 돌계단을 설치하여 사당을 설치해 이 집의 중심임과 대종가임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별당과 사당은 살림집과 방향을 달리해 다른 안대를 취했다. 사당 앞에서 보면 이씨들의 서당인 강학당과 이씨 가문의 정자인 심수정(심수정)이 환하게 보인다. 심수정과 강학당은 자신들의 대종가인 무첨당 사당 채를 안대로 삼아 터를 잡았다, 그 만큼 이씨 가문이 갖는 이 집의 위상은 대단한 것이다, 반면 무첨당 3건물 사이의 공간 관계는 어정쩡하게 독립적이다, 건물들 사이에 적절한 외부공간이 만들어지지 못했고, 단지 살림집의 사랑부분이 별당 쪽의 마당 부분을 향하고 있어 대종가의 의례적 공간만 형성한다, 살림 채와 사당간 , 또는 건물들 주변에는 공간이라 부를 것이 없다, 그러나 별당의 형태와 공간은 아주 강렬하다, ㄱ자형 건물로 누마루가 돌출하여 마을을 내려보고 있다, 모퉁이에 방을 배치하고 모서리 부분을 모두 마루로 처리한 것도 고전적인 수법이다, 적절한 비례를 가진 형태와 날렵한 처마선, 섬세하게 조각된 초익공과 화반대공을 갖는 등 , 최고로 장식적인 건물이다, 그러나 살림 채와 안채는 대조적으로 매우 소박하고 간결하다,
향나무가 아름다운 서백당(書百堂)- 일명 松
중요민속자료23호/1458년 건립
이 집은 손소 양민공이 25세에 건립한 집이다, 집의 이름인 당호는 서백당 또는 송첨이다, 송첨이란 소나무처마란 뜻이고 사랑마당의 아름답고 큰 향나무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향나무의 수령은 대충 500년이 넘은 것으로 간주되며 경상북도 기념물이다. 우재 손중돈이 분가하면서 400여 년 간 대종가의 역할을 관가정에 있었다가 20세기 초엽에 종손이 다시 이 집으로 이주하면서 대종가의 위치를 다시 찾았다, 양동마을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마을 안골(내곡) 깊숙한 곳, 높은 산등성이에 자리잡아 입지부터 대종가다운 위엄이 가득하다, 그러나 마을 아래에서는 담장만 살짝 보일 뿐 건물은 숨어 있다, 대문 앞에 있는 큰 고목들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 집에 오르는 길에 가랍집이 3-4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지은 지가 오래된 것 뿐 아니라, 단정하고 절제된 형태와 간결한 구성, 일절 장식이 배제된 겸허함 등으로 양반 살림집의 진수를 보여주는 집이다, 이 곳의 터는 풍수 적으로 3현지지(삼현지지)라 한다, 즉 임금을 어질게 하는 현자가 3인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 이 마을의 이름은 양좌골(양좌곡)이다, 이 집에서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이 태어나 2현은 벌써 태어났고 1현이 남아서 손씨 가문이 이씨 가문에게 수적 열세에도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든 이유다, 마지막 1인의 현자는 반드시 손씨의 핏줄을 타고나야만 한다는 기대감과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ㅁ자형 살림 채와 그 앞의 긴 행랑채, 동쪽의 사당 채가 전부로. 평면은 간략하다, 살림 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복합돼 있다. 대문 앞에 흙담으로 쌓은 아담한 변소와 안채 서쪽에 있는 방아집도 삼 칸도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특히 삼 칸 초가지붕의 방아실채는 벽과 기둥을 분리하고 지붕과 벽 사이를 띄움으로써 매우 실용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사랑대청은 묘하게도 ㅁ자형 살림 채의 남서쪽 모퉁이에 자리잡고, 두 개의 사랑방이 대각선으로 배치되었다,
방들의 위치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종가가 갖추어야할 위엄이 약화된다, 그러나 사랑 대청에 앉아 보면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다, 마을의 안산(성주산) 남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남서 모퉁이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의 상징적인 건물은 사당이다, 한가문의 종가는 제례 및 기타행사를 주관한다, 그 중에도 조상을 기리고 추억하고 배우는 제례 행사는 그 가문의 긍지고 명예며 자존심이기 때문에 종가의 주된 건물은 사당으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대종가는 의례용 주택이기 때문이다. 이 집의 사당은 위치, 통로의 공간적 형태 다른 건물과의 연관관계의 배치는 이 마을에서 따라 올 집이 없다. 대문간에서 이 집의 사당은 보이지 않는다, 사당은 뒤쪽에 높은 석축 위에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당으로 유입되는 공간적 흡인력은 은근하면서 강렬하다. 대문에 들어서면 누구든 오른쪽 마당에 있는 노향나무에 무의식적으로 유인되어 사랑마당으로 향하게 되고 그 뒤 정원 위에 사당의 문을 볼 수 있다 묘한 흡인력이다, 그러나 사당의 전체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씨 가문의 직설적이고 대담한 무첨당의 사당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은둔의 집 그러나 화기가 있는 곳 수졸당(守拙唐)
중요민속자료78호/1616년부터 건립
여주 이씨 수졸 당파의 주손 집이다, 회재 이언적의 4번째 손자의 호를 따라 이 집의 이름이 수졸 당이다. 처음 건립했을 때는 안채만 건립하였다, 그 후 100여 년 후 사랑채를 건립하였다, 안골 서백당 맞은편 능선 위에 아늑하게 터를 잡았다, 사랑채 앞마당의 좁은 공간을 완만한 산자락이 감싸고 있다, 사당으로 향하는 완만한 경사로가 있고 경사로에는 잔디 경사로 옆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어 더욱 안온한 감이 있다, 경사로를 오르면 이 집의 안채 뒤편이 되고 곧 이어 사당에 다다른다, 집터의 생김새로 사당을 뒤편에 두었지만 완만하고 정성스럽게 가꾼 정원과 유도로가 자연스럽게 사당으로 발길을 인도하여 사당참배를 편하게 한다, 안채는 낮고 길고 안마당은 직사각형으로 길쭉하다, 사랑채를 증축함으로 터를 늘린 결과로 짐작된다, 두꺼운 사각기둥을 사용해 집의 수평적 인상을 더욱 강하게 한다, 산 속에 숨어 있는 안정감이 있는 집이다,
마을 속에 독립된 또 하나의 마을 두곡고택 (杜谷古宅)
중요민속자료 77호/1733년 건립
두곡 이의잠의 후손들이 건립한 주택으로 집 옆에는 두곡 이의잠의 영정을 모신 두곡영당과
그를 위하여 건립된 재실이 있다, 두곡영당 뒤 언덕에는 동호정이 건립되어 전망 처로서 역할을 한다, 이 4건물은 두동골이라는 작은 골짜기에 위치하여 한 무리를 이루어 이 마을 안의 또 다른 마을 같이 보인다, 마을 중심을 가로지르는 중심 길 쪽은 담을 쌓아 격리시켰고 두동골 사잇길로 들어가면 남쪽방향을 한 대문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 조금 못미처 반대편 산자락에는 이 마을의 전형적인 노비의 집인 2칸 짜리 흙담 초가집이 자리잡고 있다, 방 하나에 부엌으로 구성된 집이다, 대문채 옆 동쪽 골 안에 영당과 재실이 있다. 두곡 고택과 재실 사이 언덕길을 갈지 자로 조금 올라가면 마을이 훤하게 보이는 동호정이 위치하고 있다, ㅁ자형 살림 채를 중심으로 남쪽에 대문채, 북쪽으로는 곡간 채들이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이 집은 이 마을에서도 큰 주택에 속한다, 8채의 건물들은 사랑마당과 안마당은 물론 고방마당과 후원의 여러 외부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매우 분화된 외부공간을 갖고 있다. 사랑채는 골짜기 깊은 곳에 위치하여 약간 답답한 느낌이 든다, 안대는 마을 입구의 물봉 동산을 안대로 삼아 시원한 경관을 가진다, 경관을 얻기 위하여 안채 대청을 높게 처리하고 행랑채를 낮게 배치하였다. 안채 동쪽 높은 동산을 과실수와 집안의 정원으로 삼아 지세를 자연 그대로 잘 이용한 점이 돋보인다,
낙선당(樂善堂)
중요민속자료 73호/1780년 재건
안골의 북쪽 산등성이에 높게 자리한 집으로 손씨 가의 파종가 중 하나다, 사랑마당과 안마당 두 마당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정식의 대문채를 가짐으로서 사랑마당이 영역화 되지만 안채 쪽으로 한 채의 건물이 철거되어 사랑과 안채의 관계가 조화롭지 못한 것이 흠이다, 이 집은 출입문이 유난히 많아 공간체험에 변화가 많고, 특히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협문과 연결부분은 극적으로 처리했다, 협문을 열면 함실 아궁이의 어둡고 입체적인 공간이 연출되며 그 사이 골목을 통해 안마당의 밝은 빛이 들어온다, 일반 살림집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공간적 체험이다, 사랑채는 초익공 구조를 사용한 고급스러운 집이다. 사랑 뒷벽에 달려있는 감실은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지금은 안채 남쪽에 사당을 크게 짓고 위패를 사당으로 옮겨 버렸다,
상춘고택(常春古宅)
중요민속자료 75호/1730년 건립
서백당이 있는 능선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4채의 이씨 가의 집들이 줄지어 자리 잡았다, 서백당 가까운 쪽부터 이형동가옥 ,사호당, 상춘고택,근암고택들이 터를 잡았다, 이 집 4채는 능선 위에 자리잡아 멀리서 보면 마치 굳건한 성채와 같다, 그러나 집의 구성방법은 서로 상이하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의 집합방법은 평행형(이형동가옥), 병렬형 ,직교형, 독립형등 모두 다른 방법을 택하고 있다. 상춘고택과 근암고택은 나란히 붙어 있지만 , 진입로는 서로 다르다, 한 집이 한 진입로만 인정하는 관습을 따랐다, 상춘고택 언덕 위에 있는 사당은 이 집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옆집인 근암고택에서만 출입 할 수 있다, 같은 일가의 집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집의 형태나 구조는 안동지방의 '뜰집'과 같은 ㅁ자형이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평행으로 놓이는 뜰집과는 달리 한쪽 날개부를 사랑으로 배치해서 안채와 사랑채가 직각방향으로 만난다, 사랑마당 한 쪽 경사지는 계단식 정원을 조성하고 상춘대라 이름 붙여 운치를 더했다, 작은 규모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배열한 짜임세가 돋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결한 여유가 배여 있는 집이다,
근암고택(謹庵古宅)
중요민속자료 76호 /1780년 건립
ㄱ자 안채를 담장으로 둘러싸 안마당을 만들고 사랑채는 남쪽에 독립돼 있지만 원래는 상춘고택과 같이 사랑채가 안채에 직각으로 놓여 안마당을 감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초 원래의 사랑채가 없어진 뒤에 현재와 같이 어색한 팔작지붕의 사랑채를 신축하였다, 결과적으로 안채, 사랑채 곡간채, 대문채 등이 모두 분리되고, 이들을 담장으로 연결한 변형된 형태가 되었다. 사랑채 뒤로 매우 넓은 후원이 조성돼 잇다, 자연 경사지를 그대로 이용해서 계획적으로 나무를 심은 흔적들이 잘 남아 있다, 이 후원은 마을의 전경과 자연의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로 동요에나 나올 명실상부한 뒷동산이다, 이 동산의 완만한 산책로 끝에는 사당이 위치하여 산책과 의례를 일체화하고 있다, 양도의 저택들은 지형의 구조 때문에 언덕이나 구릉에 위치 할 수밖에 없었고 건축가들은 건물이 앉혀질 최소한의 땅만 제외하고 대부분 경사지형을 살려 동산이나 정원을 만드는 솜씨를 보였다. 근암고택의 뒷동산은 그 가운데서도 백미로 꼽힌다.
사호당 고택(沙湖堂古宅)
중요민속자료 74호/1840년 건립
이 마을의 중기 주택 가운데 가장 개념이 뚜렷하고 입체적인 변화를 보이는 집이다, ㅁ자 안채에 사랑채가 병렬로 부가된 모습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ㄱ자 건물 두 개를 중첩해서 만든 집이다, ㄱ자 사랑채는 기단을 높게 쌓아 돌출부를 누마루로 삼았다, 안채 역시 ㄱ자로 아랫방 쪽의 기단을 생략하여 누마루 방이 되었다, 규모는 다르지만 안채나 사랑채 모두 구조적 원리는 동일하다. 동일한 디자인 요소를 반복하면서도, 규모와 기능을 달리하여 통일과 변화를 동시에 추구했다. 두 건물군의 바닥 레벨은 변함없지만 그 아래 기단의 높낮이를 조작하여 어떤 부분은 1층, 다른 부분은 1.5층이 되는 입체적 변화 감이 풍부하다. 안채나 사랑채가 모두 높은 기단 위에 놓였고, 그 앞의 행랑채 천고를 최소로 낮췄기 때문에 앞산의 경관이 항상 대청으로 들어온다, 행랑의 대문은 사랑채 쪽 가장 끝에 두어서, 대문을 진입하면 곧 사랑 누마루의 하부에 면하게 되고, 여기서 다시 90도 틀어야 안마당으로 진입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내외 벽을 만든 결과가 됐다. 사호당과 서백당 사이는 이형동 가옥이 위치한다, 인근의 이씨 가옥들보다는 그 규모나 품격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후기 주택들 가운데서는 격식을 갖춘 예에 속한다,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 3동으로 구성되지만, 최소의 규모로 양반 가의 공간과 품격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사랑채와 대문채는 나란히 놓여서 평면적으로는 한 건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랑채는 기와집 대문채는 초가집이다. 경제력이 못 미쳐서 초가집을 만들었다가 보다는 검소함과 큰집에 대한 예의를 위한 상징적인 구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마을에는 큰댁보다 기차가 부유하여 세 건물을 건축 하드라도 큰집에 대한 예의로 사랑채나 대문채를 초가나 큰집보다 규모를 작게 지웠다.
이향정(二香亭)
중요민속자료 79호/1695년 건립
마을 초입 동쪽에 잇는 진사골에 위치하면서 산길을 따라 원형으로 쌓여진 담장이 인상적이다, 사랑채는 남향, 안채는 서향으로 서로 직각으로 놓였다, 온양군수를 지낸 이범중이 건립한 고택이다, 안마당은 넓고 안채 바로 앞에 방아 채가 놓이는 등 전체적으로 부농 층을 위한 기능들이 고려됐다, 사랑채는 앞산과 너무 가까워서 답답한 느낌을 준다, 사랑전면에 툇마루를 개방한 것은 사랑마당의 공간감을 조금이라도 넓히려는 의도이며, 남서쪽의 머리 방의 툇마루만 더 돌출 시킨 것은 서쪽으로 터진 전망을 유인하기 위한 배려다,
대성헌(대성헌)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34호
이 건물은 18세기 중엽에 세운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짜여 있다, 안채는 ㄱ자 형이고 사랑채와 행랑채는 ㅡ자 형인데 세 동이 모여서 전체적으로 ㅁ자 형의 주택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안쪽 꺾이는 곳에 긴 부엌을 두고, 오른쪽에 안방과 대청을 배열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2칸이 '대성헌"이라는 현판이 붙은 대청이고, 두 칸이 사랑방이며, 전면에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달았다, 행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대문과 방 축사 등을 두었다, 각 동의 구조는 모두 소박간결하여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고, 소로받침 없이 납도리를 받치었다, 사랑채 대청 앞에는 2칸의 팔짝문을 샛기둥 없이 달아, 4짝씩 접어 들어올리게 하였는데 이것은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구성으로 눈길을 끈다.
양동마을의 정자와 서당
양동마을에는 정자가10여개가 있다, 손씨 가문의 정자 3개와 이씨 가문의 정자 7개가 있다 더러는 독립되어 있고 더러는 살림집과 복합적인 구성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것 역시 두 가문의 경쟁적인 건축 때문일 것이다. 손씨 가문의 정자는 수운정(水雲亭), 관가정 (觀稼亭) ,안락정 (安樂亭) 이고 이씨 가문의 정자는 심수정(心水亭), 내곡정(內谷亭), 동호정(東湖亭), 설천정사(雪川亭舍), 양졸정(養拙亭), 영귀정(泳歸亭). 육위정(六爲亭) 등이다. 이마을의 정자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을 갖는다, 하나는 자연 경관을 즐기는 휴양처로써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가문의 인사들이 모일 수 있는 회의장소로서의 기능이다, 두 기능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 안에 융합된다, 경관을 위해서는 전망이 좋은 산 위나 깊은 골짜기에 지리 잡아야 했고, 모임을 위해서 온돌방들이 정자 안에 마련되고 하인들이 기거하며 필요한
서비스를 위해 행랑채(고자집)가 인근에 마련해야 했다', 특히 부속 행랑채를 갖는 것은 양동마을 정자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의 두 가문은 주택자리 못지 않게 정자의 위치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두 성씨들 사이뿐 아니라, 같은 성씨들 사이에 분파들 사이에도 경쟁적으로 정자를 세웠기 때문에
지금도 10개 이상의 정자를 이 마을에 남아 한 마을 단위로서는 지나치게 많다, 이씨 성의 가문에서 무첨당파가 영귀정이면 향단파는 심수정 따라서 양졸당파가 양졸정이면, 설천정파가 설천정사, 수졸당파는 동호정으로 서로 경쟁을 한 때문이다. 정자는 일반 사가와 달리 특별한 입지조건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 조건에 적당한 인적이 별로 없고 전면에 전개되는 경치가 아름다워야 하는데 입지적으로 마땅한 터가 제약되고 흔치 않았다, 따라서 수운정이나 내곡정 처럼 인적이 거의 없는 곶에도 위치하고, 양졸정, 심수정처름 마을 안에서 마을 풍경 자체를 경관으로 삼기도 하였다.
수운정(水雲亭)
주요민속자료80호/1582년 건립
우재 손중돈 선생의 손자 청허 손엽이 건립한 정자로 양동 물봉골 넘어 설창봉에서 한줄기 갈곡을 사이에 두고 있는 능선 중턱에 홀로 있는 경관이 아름다운 정자다, 정자의 전면은 모두 계자난간을 두르고 마루면 을 띄었기 때문에, 출입은 뒷면으로 돌아야 정자에 오를 수 있다, 이른 형식은 경주지역의 전형적인 정자 형태다, 뒷마당은 자연 경사를 이용하여 후원을 만들고, 한쪽 편에는 2칸 행랑채가 부속되어 후원의 공간을 형성한다, 운치와 경관은 대단하여 안강들과 기계천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대청에는 팔각기둥이나, 정교하게 조각된 초익공 부재, 대들보 위에 놓인 화반대공 등 최고의 장식적인 정자 건물이다.
심수정(心水亭)
중요민속자료 81호/1560년 창건,1917년 중건
역동적인 내부공간과 상징적인 경관을 가진 정자다, ㄱ자형으로 구성되어, 돌출부는 누마루로 처리했다, 기존에 있던 3 그루의 나무를 손상하지 않고 세워져, 세 그루의 회화나무와 건물이 조화롭게 일치한다. ㄱ자 정자의 보통적인 형태를 떠나 심수정은 꺽이는 모퉁이 전채를 대청으로 처리하여 빈 공간을 이룬다, 다시 말해서 대청의 넓은 빈 공간은 확실하게 구획되지 않은 채 '비워 있음' 그 자체가 내부공간의 주축을 형성한다, 그래서 이 누마루의 이름이 '함허루(함허루: 허함이 가득 차고 잠긴다는 의미)다, 이 정자는 중건할 때 붉은 적송(춘양목)으로 건축했고, 건축한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도 적송 고유의 붉은 기가 생생하다, 일몰 때 열려진 문틀을 통해 스며드는 햇볕이 홍송의 주재들을 비추면 , ㄱ자 대청은 붉은 기운으로 가득 찬다, 이 큰 대청의 이름은 삼관헌(삼관헌)이다, 즉 3개의 물체를 보고 느낀다는 뜻이다, 유형물일 수도 있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형의 사고일 수도 있다, 우선 대청 후면에 심어진 3그로의 고목일 수도, 아니면 향단, 물봉 정상의 금잔디, 무첨당 이 3가지의 유형물일 수도 있다, 대청에 있는 3짝의 나무문을 열면 세 그루의 고목들 사이로 이씨 종가 무첨당 사당이 정점으로 보인다, 대청을 굳이 ㄱ자로 번형된 형태로 만들어 정면에 3칸을 확보한 의도 중에 하나일 것이다, 또한 함허루에서는 향단이 바로 보인다, 이씨 문중의 가장 중요한 두 집을 안대로 삼아 건축한 절묘한 안배다, 왜 두 건물을 안대로 삼았을까?
심수정은 향단파에 속한 정자다, 즉 회재 이언적의 동생 농재공 이언괄의 갈래다, 그래서 향단을 안대로 삼았을 것이다, 또 한 이씨 문중의 대종가 무첨당을 심수정이 마을 중앙에 위치하여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첨당의 사당을 복수의 안대로 삼았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필요에 의해 묘한 ㄱ자형의 형태를 취 할 수 밖에 없었다. 부속 행랑은 정자와 반대로 ㄴ자로 대각선 방향에 놓였다, 따라서 어느 각도에서 보면 마치 튼 ㅁ자형의 집을 이루려다 미완된 구조물로 보인다.
내곡정(內谷亭)
향토문화재 1914년 건립,
안골(내곡) 깊숙한 곳 설창봉 정상 바로 밑의 계곡에 위치하여 외부인 이 찾기 힘들다, 이 정자는 안골 끋집 창은정사의 소유로 창은 정사를 통하여서만 올라 갈 수 있다, 이외의 장소에 이외롭게 건축된 정자다, 형식은 수운정과 비슷한 T자형으로 경주지방의 전형적인 정자 건물이다, 건물의 3면 전체에 계자난간을 둘렀고, 난간 청판에 꽃무늬를 조각했다, 또 기둥 위에도 꽃살이 조각된 보아지를 달았다, 정자의 형식도 이색적이지만 이렇게 정자건물 전체에 화려하게 조각한 예는 극히 드물다,
설천정사(雪川亭舍)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3호/1602년 창건, 1997년 제건
이 정사는 회재선생의 셋째 손자인 흥해군수 이의활(이의활)이 건립하여 강학하든 건물로 정자채 담하나사이를 두고 살림채외 행랑채가 독립적으로 건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잰가 정자와 행랑채 사이에 있던 살림집은 멸실 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왼쪽 4칸을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2칸을 온돌방으로 배치했다, 막돌 흐튼층 쌓기한 기단 위에 주좌가 있고 주좌에 쇠시리를 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끝이 날카로운 쇠서를 갖춘 익공을 꾸몄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는 세짝의 정자살 붙발기를 넣은 분합을 달았고, 후면은 4분합 골판문을 달았는데, 이 문은 전체를 들어 올려 열 수 있도록 하였다, 간결 소박하면서도 다양한 공간을 이용할 수 있도록 꾸민 것이 돋보인다. 설천정의 행랑채 초가집은 초가집으로는 드물게 입체적으로 구성된 형태다, 특히 이 행랑채의 전면에 캔틸레버 발코니를 설치하는 등, 매우 특이한 구조와 형식을 가졌다.
원래의 정자건물은 1995년 겨울에 화재로 소실하여 1997년 재건하였으나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없어졌다.
영귀정(泳歸亭)
이 정자는 이씨 문중의 무첨당에 딸린 정자로 형태와 구성은 수운정과 비슷하면서 다른 점이 많다, 정자전면에 계자난간을 둘러 정자에 오르려면 뒤에 있는 툇마루를 통하여 오를 수 있다, 이 정자의 행랑채는 정자를 둘러싸고 있는 담 뒤쪽에 있고 특이하게 대문채에 하인이 항상 대기할 수 있는 하인 방과 창고를 사이에 두고 대문을 배치하였다 이 정자는 매우 해학적인 이름을 가졌다, 영귀정이란 정자 아래에 흐르는 기계천을 수영하여 이 정자로 돌아온다는 뜻이고 , 대문의 이름이 이호문(이호문)이라 방문객이 한번 불러서는 대문을 열지 않고 두 번 불러야 대문을 연다는 옛 선비들의 해학이 담겨 있다.
안락정(安樂亭)
중요민속자료 82호/1780년 건립.
이름과 형식은 정자지만 손씨 일가 자재들의 서당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마을 앞 호명산 맞은편 인좌골 진입로를 사이에 둔 성주산 남쪽 산등성이에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잡았다, 5칸의 전형적인 강당 건물이지만 경관은 매우 뛰어났다, 앞마당에는 바위들로 연못 모양과 석가산을 꾸몄다, 서당으로서는 흔치 않은 조경시설이다,
강학당(講學堂)
중요민속자료 83호/1867년 건립
손씨 일가의 서당인 안락정에 대응하여 이씨 일가의 자재들의 기초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었다, 심수정 뒤 언덕에 위치하여 이씨 종가 무첨당의 사당을 안대로 잡아 건축하여 마를 전면이 보인다, ㄱ자 건물 꺾이는 모퉁이에 방을 배치하여 2개의 마루를 구획했고, 각 칸살이는 용도에 따라 길이를 배려했다, 특징은 작은 마루에 1/3칸 크기의 마루방을 만들어 서고(장판고)로 사용한 점이다, 서당 건물다운 기능과 규모다. 건물은 간결하고 층고도 낮고 구조는 검소하다, 강학당 입구에 3칸의 부속 행랑채를 두어 서당의 필요한 일을 하도록 안배하였다, 또 하나의 이씨 일가의 서당인 경산서당은 1970년대 포항공업용수 땜을 건설할 때 안계리에 위치한 것을 그대로 이전한 것으로 서당 건물로서는 규모가 매우 크다.
서백당의 향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
이 향나무는 서백당 사랑마당에 있다, 향나무는 키가 23M까지도 자라는 상록수로 큰키나무지만 이 나무는 키가 7m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옆으로 긴 가지를 우아하게 뻗어 수관폭은 약 12m에 이른다, 수세(수세)도 좋다, 향나무는 바늘모양의 입과 비늘모양의 입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보통 7-8년생 이상인 가지에는 주로 비늘모양의 입이 달리지만 맹아에서 나오는 어린 가지에는 바늘모양(침엽)의 입이 달리기 때문에 보통 한 나무에 두 가지 입이 달린다, 수령은 약5-6백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양동마을의 2 성씨 손씨, 이씨의 연원
두 성씨의 양동마을 정착사
양동마을은 고려이래 경주부의 속현(屬縣)인 安康縣에 속하였다, 이 마을의 주성인 驪州 李氏와 慶州 孫氏는 각각 다음과 같은 歷史的 過程을 밟아서 成長 繁榮하였다. 손씨는 본래 경주부의 토성이속(土姓吏屬)으로서 사족화(士族化)의 길을 걸으면서 他邑으로 移住하였고, 다시 상경종사(上京從仕)하다가 入鄕祖인 양민공 손소가 처가를 따라 이 양동마을에 입주한 후 곧 그 父子 代에 功臣과 高官의 班列에 오르게 됨으로써 그 후손들이 경상도 지방의 한 대표적인 도반(道班)으로 성장하였다, 이씨는 원래 경기도 驪州의 土姓吏屬으로서 上京從仕 하다가 高麗末 역성혁명으로 王朝가 교채될 때 처향 또는 외향을 따라서 영일지방으로 낙남한 것 같으며, 15세기에 처가를 따라 이 양동마을에 입주하게 되고, 손씨의 외손인 이언적(李彦迪)이 학문과 사환(使喚)을 겸비하여 사후에 종묘배형(宗廟配亨)과 문묘종사(文廟從祀)라는 최고의 영예를 향유한 대서 그 후예들은 일국의 한 대표적인 양반인 국반(國班)으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두 가문은 처음에는 내 외손간으로 서로 공존공영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경쟁반목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이씨 내부에서도 나중에는 양동과 옥산을 중심으로 적, 서 양계로 나누어져 때로는 서로 협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갈등과 반목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손 양 가문은 조선왕조 양반사회의 진전에 따라 양동을 근거로 그들의 세력은 4방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가세, 족세의 번창과 그들의 활발한 지역개발로 인하여 그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은 더욱 다져져 나갔으며, 그들의 세력권은 안강현 일대를 중심으로 경주부의 임내(任內)인 기계, 신광현과 죽장, 성법 북안곡부곡, 및 경주부 관할인 흥해, 연일현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특히 그들은 옥산, 서악서원을 중심으로 경주권의 유림을 대표하여 영남의 열읍향교(列邑鄕校), 서원세력(書院勢力)과 연합하기도 하였으며, 한편 그들은 조선후기의 서인 내지 노론정권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야당인 남인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활발한 정치,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경제적 기반은 거이 전천후 수리시설을 갖춘 안강, 기계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형산강 하류에서 올라오는 풍부한 해산물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 위에 손소, 손중돈, 이언적을 비롯한 이, 손 양 가문에서 명공(明公)과 석학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양동은 경주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을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영남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양좌동연구)
씨족의 연원
여주 이씨 (驪州 李氏)
여주이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받드는 교위공(校尉公)파가 있고, 이은백(李殷佰)을 시조로 하고 이규보(李奎報)를 중조(中祖)로 모시는 문순공(文順公)파가 있으며,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받드는 경주(慶州)파가 있다. 이 3파의 여주 이씨 선조들은 다 같이 고려 중기에 경기도 여주 고을에 자리 잡아 대대로 호장중윤(戶長中尹), 향공진사(鄕貢進士)등 향직(鄕職)을 세습하면서 세력을 떨치던 호족(豪族)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상계(上系)의 연원(淵源)을 명백하게 가리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예전부터 서로 뿌리가 같은 동족으로 알아 조선조 때는 대동보를 함께 간행하기도 하였다, 3파의 여주이씨는 관향(貫鄕)의 이름을 각기 조금씩 달리 서오고 있는데 교위공파에서는 문중에 전래하는 (개성호적)에 따라 고려 때는 <황여>라 하였고, 조선조 때는 주로<여흥> 또는 <여주>라 하였으며 간혹<영의>라는 관향을 쓴 지파도 있었다. 문순공파는 고려 이래로 대체로 <여주>라는 단일 관향을 섰으나 이규보의 후손가운데 그 습봉(襲封)의 지명에 따라 하음(지금의 강화)으로 관향을 삼은 종파가 있었고, 경주파는 '을축대동보'부터 <여강>이란 관향을 정하였다. 그러다가 근년에 이르러 '여흥' '영의' '하음'등의 관향 이름을 여주로 단일화 했으며 경주파에서 독자적으로 사요안 '여강'이란 관향도 갑자보로 부터는 여주라는 관향과 함께 쓰기로 하였다.
본관지 연역
여주는 경기도 동남부에 위치한다,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內斤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호현으로 고쳐 기천군의 영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에는 황려현(黃驪懸)으로 개칭, 원주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고종 때에는 영의현으로 개칭하였고, 충렬왕 31년에 경순왕후의 친향이라 하여 여흥군으로 승격하였으며, 우왕 14년에 다시 흥여부로 승격되었다가 공양왕 때 군이 되었다,조손조 태종은 원경왕후의 친향이라 하여 부로 승격,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그 후 도호부가 되었고 세종대왕의 영능을 이 곳으로 옮기면서 여주로 개칭하였다. 1895년에 충주부의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군으로 복구하였고 지금은 시로 되었다. 주요 읍성으로는 李, 閔, 安, 尹, 金, 韓, 陰씨등이 있었다.
주요 세거지의 변천
교위공파는 시조 이인덕에서 3세 이효온까지는 여주에서 향직에 종사했으나 4세 이교에 이르러 중앙관인으로 진출하여 개성 북부 흥국리에 정착하였다. 그 아들 3형제 가운데 장자 이수산은 유배지인 평북 선천에 눌러 살았고, 6세 이상은 중화군 상원에 살았다. 13세 이호신에 이르러 다시 중화 풍동에 자리 잡은 후 일부 자손은 수산에 이주했으며 정주, 축안, 평양과 전남 광양에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8세 이고는 고려가 망하자 수원 팔달산에 은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 곳을 세거지로 삼았는데 그의 5세손 이란은 함안 여항으로, 이응은 남원으로 각각 남하하여 자손들이 번창하였다. 11세 이계손의 자손들도 한양에서 수원으로 낙향하여 살았으니 조선조 중기 이후 16세 이상홍의 자손은 공주, 홍주, 장호원 등지에서
이상의의 자손들은 양주, 김포, 안산, 덕산, 횡성,부평 등지에서, 이상준의 자손은 충주, 포천, 홍성, 청양에서 각각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3자인 이수용은 개성 오관리로 분가하여 자손들이 수대동안 살았으나 8세 이천배는 함북 북청으로 옮겼고, 고려가 망한 후 9세 이행이 강음(지금의 김천시)에 주거를 정하였다. 그 이들 이적은 한양 남촌에 살았고, 이몽가는 평산, 봉산, 백천 등지에서 자손들이 세거했으며, 12세 이증약의 후손은 홍성, 영광, 춘천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적의 중손 이사필은 한양에서 멀리 밀양 용성으로 낙남(낙남)하여 자손들은 그 곳 활천, 장선, 평리, 무능, 퇴노, 단정, 사연 등지에 산거 각각 종촌을 이루고 살았다, 또 15세 이지충은 경북 예천 용궁에 세거지를 정하였다. 문현공파는 3세 이태수가 관인으로 일찍이 중앙에 진출하여 개성 서교에 주거를 정한 후 그 아들 문순공 이규보가 다시 개성 동부 봉향리로 옮겨 오랫동안 거주했으며, 만년에는 몽고의 침략으로 피란 정부를 따라 하음(지금의 강화)객사의 서랑에서 여생을 마쳤다.그러므로 그 자손들은 문순공의 유택을 지키며 오랫동안 강화에 살았으나 고려가 망하자 각각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전국 각지에 산거 하였다. 9세 이증의 후손들은 고양시 송포를 비롯, 파주, 논산, 영동, 옥천 등지에 세거의 뿌리를 내렸으며, 이번의 자손들은 군위군 우보를 중심으로 상주, 영천, 청송 등지에 큰 문중을 이루었다. 13세 이능백의 후손들은 아직도 강화를 지키고 있으며 이정의 후손은 김포, 파주, 음성 등지에 살고 있다, 8세 이미숭의 증손인 이계문의 자손은 고령에서 이신문의 자손은 고성에서 각각 큰 문중을 이루고 있으며 6세 이환검의 후손은 조선조 초기이래 금산, 영동, 옥천, 무주에서 세거하였다. 경주파는 시조 이세정이 향공진사로 입신한 점을 미루어 당시에 이미 개경에 진출하여 일문을 이루었다. 고려가 망할 때까지 개성에 살았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다 여말선초(여말선초)의 변혁기를 맞아 자손들은 경상도 동남해안으로 낙향한 듯 한데 8세 이근의 자손은 울주 언양에서, 이상도, 이극랑의 자손은 흥해에서, 이숭예의 자손은 경주와 영일 등지에서 각각 정착하였다. 10세 이상중의 자손은 개성에서 해주로 이주했으며, 이숭예의 손자 이번은 아들 이언적과 이언괄과 같은 명현을 낳아 그 자손들은 약 500년간 양좌동을 중심으로 인근인 옥산, 천서, 안계, 하곡, 원동, 우각, 보문 등지에 산거하여 명가의 전통을 빛낸다, 특히 양동과 옥산마을은 이 가문이 남긴 양반마을로서의 전통과 유습이 보존되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민속마을로 지정 됐으며 옥산서원의 사적을 비롯하여 많은 지정문화재와 민속자료가 보존되어 있다.(중앙일보 성씨의 고향에서)
여주(여강) 이씨 경주파 족보에서
세상에서 말하기를 천하의 이씨는 모두 농서( 西; 중국의 甘肅城에 잇는 고을)에서 나왔고, 조선의 이씨는 瓢巖(瓢巖:박바위. 경주 탈해왕능 옆의 언덕 바위)에서 나왔다 하는데 어떤 말이 옳은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 여주 이씨의 선세의 계통은 오래되어 상고하기 어렵다. 그러나 영조(영조) 을축 서기 1745년에 발간된 대동보의 범례를 살펴보면 고려 고종 때 문장으로 유명한 이규보(李奎報)의 절구(絶句) 몇 수가 실려있는데 그 시에 이르되 '우리집은 본래 고귀한 자손이라' 또 이르되 "백양(伯陽)은 천년 후라도 같으리니 선리(仙李)의 그늘을 더우잡으리라. 또 이르되 '선리(仙李)의 숲 속에 가지가 무성하다,' 또 어떤 이씨에게 증시(贈詩)하여 이르되 '우리 이씨는 천하에 늘리 살고 임금과 제후 농서( 西)를 말하누나' 라고 했다.. 상국( 相國: 재상이나 정승의 별칭) 이규보는 우리와 한 성씨인데 혹 어떤 증거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였는가 그런데 이 시외에는 공께서 지은 다른 글에는 그러한 내용이 조금도 보이지 않고 다만 시 귀에만 나타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세대가 오래된 지금에 와서 이 시 귀만을 인용하여 사실로 믿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선현(先賢)께서 남기신 글이니 책머리에 기록하여 후인들의 상고를 기다린다. 이로 본다면 우리 이씨가 모두 농서에서 나온 것 같지만 이를 사실로 믿음은 미안하다는 말이 이미 있었으니 이제 어떻게 꼭 믿겠는가, 그러나 구보에 의하여 범례의 첫머리에 옮겨 섰으니 후손들은 참고하여 보기 바란다,
임진년에 발간된 파보 첫머리에 이르되 신사보에 실려있는 상계에 1세는 원조(遠祖) 이직재(李直才)인데 고려 때 호장(戶長)이요 2세는 세정(世貞)으로 향공진사(鄕貢進士)라 되어있다.
또 을축보에 이르기를 이 책은 경주파보인데 회재(晦齎)선생의 현손이신 휘 채(埰)께서 선생이 손수 쓰신 보첩을 咸安에 사는 宗氏 경무(景茂)의 집에서 얻었는데 그 보첩에 여주고을의 부호장 직재(直才)를 시조(始祖)로 하였으나 휘 세정(世貞)의 위에 자(子)자가 씌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사보에서는 세정의 위에 "자"자가 씌어 있으니 이는 전해 오면서 기록을 잘못한 것이다. 또한 생각건대 함안에서 발견된 보첩은 본래 집에 전해 온 것이 아니고 회재선생께서 명종 을사사화에 연좌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기 바로 전에 그의 조부 판서공의 묘문(墓文)을 지었는데 그 글에 향공진사 세정의 후손이라 하시었다. 이는 선생께서 만년에 쓰신 것이다. 그리고 또 선생의 행장(行狀)과 墓文에도 모두 세정을 시조로 하였기 때문에 이제 삼가 이 어른을 시조로 모신다, 이상 사실의 전말을 간략히 기록하여 이같이 이르노라. 이제 또 삼가 휘 직재를 원조라 하고 휘 세정을 시조라 하였으니 이는 임진보에 두 분을 그대로 두고 계술(繼述)하여 편수하신 뜻을 쫓음이라. 우리 이씨가 경주로 낙향하여 살다가 또 연일로 옮겼는데 어느 때 인지 알지 못하며 배위(配位)와 墳墓와 生 卒 日字 및 行蹟이며 官職 등이 모두 記錄되어 전함이 없으니 자손의 한이 됨을 어찌 다 말로 하겠는가. 대동보에 소위 별보(別譜)라 함은 대대로 계통을 고증하지 못한 소치이다. 지난 임술년에 함경남도 흥원군 희현면 어은리에 거주하는 일가분인 윤익(允益)과 함께 동도(同道)의
이원군 동면 효우리에 거주하는 강성우(姜聖遇)의 집에 가서 만성보(萬姓譜)를 얻어 살펴보니 휘 세정 위에 휘 원호(元豪)가 휘 작( )의 양세(兩世, 兩代)가 있는데 휘 인덕(仁德)의 아래로 계대(繼代)되어 있고 인덕의 위에 또 4세(4世:4代)의 휘자가 씌어 있고 원호(元豪)와 그 아우 원걸(元傑)이 각기 분파의 시조(始祖)가 되어 있었다. 그 대수와 연대를 상고하여 보면 의심할 것이 없을 것 같다. 다만 우리 조상의 휘 배(培)가 옥생(玉生)이 되고 휘 崇禮(崇禮)를 일휘(一諱:다른 한 이름) 숭정(崇禎)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혹 초휘(初諱;初名)과 개휘(改諱:改名)가 있어서 그러한 것인지. 도 강씨(姜氏)집의 만성보는 즉 강성우의 12대조 농산공(農山公)이 3대를 연하여 수집한 것으로서 햇수로 치면 300년이요, 서로 살던 지역은 거리로 천여리가 되니 어느 곳에서 고찰한 줄은 알지 못하겠으나 반드시 상고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안( 眞僞. 진짜와 가짜)의 의심이 없지 않기 때문에 책머리에 따로 써서 먼 조상의 사실을 상고할 수 있는 자료로 삼는다.
慶州의 연혁(東京誌에 의함)
新羅의 옛 都邑이다.
漢나라 五鳳 元年 (기원전 517년} 朴赫居世가 나라를 세우고 辰韓 땅에 都邑을 정하고 國號를 徐羅伐이라 하였으니 혹은 斯羅라 칭하고 혹은 斯盧라 칭하였으며 후에 新羅라 일컬었다, 脫解王 9년에 始林에 鷄怪(鷄怪; 김알지 탄생전설)가 있어 이 곳을 鷄林이라 고치는 한편 國號도 따라서 鷄林이라 했다. 기림왕(基臨王)10년에 다시 新羅로 고쳐 불렀다, 新羅 敬順王 9년에 高麗 태조(太祖: 王建)에게 항복하니 태조 왕건이 신라를 병합한 다음 옛 新羅 王都 鷄林을 慶州라 이름하고 신라 마지막 왕 김부(金傅:敬順王의 이름)는 경주사심관(慶州事審官)을 삼았다. 이것이 경주라는 名稱의 始初이다. 고려 태조 23년(서기 940년)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켰고 성종(成宗)6년에 동경(東京)으로 개칭하여 유수(留守)를 두었고 성종 14년에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키었고 현종(顯宗)3년(서기 1012년)에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강등 시켰다가, 현종 5년에 안동 대도호부(安東 大都護府)로 고쳤다가 현종 22년에 동경으로 고쳐 유수를 두었고 신종(神宗)7년 (서기 1204년)에 고을을 분할하여 안동(安東)과 상주(尙州)에 예속 시키고 고종(高宗)6년에 다시 還元하여 유수를 두었고 충렬왕(忠烈王)14년(서기1288년)에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별호에 낙랑(樂浪)이 있으니 고려 목종(穆宗, 서기 1000년대)때에 樂浪郡이라 했다가 현종 때 다시 경주로 고쳤다. 조선왕조 태종(太宗)15년 (서기1415년)에 다시 경주부로 개칭하였다.
관원(官員); 府尹, 判官, 營將, 訓導, 이상 官員을 각 18씩 두었다.
읍성(邑姓): 朴, 昔, 金, 李, 崔, 孫, 鄭, 裵, 薛, 이상의 성씨가 있다,
慶州 孫氏
신라초 득성조(得姓祖)인 구례마(구례마)의 後孫으로 孝行이 알려진 흥덕왕 10년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月城은 慶州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은 貫鄕을 겨루 혹은 月城이라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뒤 세계가 失傳 되어 후손인 손경원(손경원)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를 있고 양민공 손소를 시조로 하고 있다. 주요 집성촌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경주 손씨 대종가가 500년 동안 종통을 있는 유서 깊은 민속마을로 고색 창연한 고옥마다 역사의 향기가 배어있다, 대향조는 손소이다, 원래 양동에는 풍덕 류씨가 살던 곳이다, 손소가 25세 때 유씨 집안의 만호 복하리는 분의 무남독녀와 결혼 했는대 이 것이 인연이 되어 양동마을에 터를 잡게 되었다, 큰 아들은 백돈, 그는 처가를 따라 같기 때문에 후사가 없어 둘째 아들 중돈이 종통을 이었다. 그가 바로 조선 명현의 한 사람인 청백리에 오른 우재 손중돈 선생이다, 이로서 경주 손씨는 양동에 토착기반을 견고히 다질 수 있었다. 여기에 愚齋선생의 여동생 손씨 부인이 여주 이씨 이번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장남이 이언적이다, 이래서 양동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의 전통적인 토성마을이 되었다. 대 종가는 마을 안골 깊숙한 곳 언덕에 지붕을 드리우고 있다. 조선조 500년의 영화를 말해주듯 우뚝선 고택이다,(중앙일보 성씨의 고향에서)
慶州 孫氏世譜 己亥舊譜序에서
족보는 옛부터 전해 오는 것이다, 歐文忠公과 蘇明允公이 각기 族譜를 製作하였으나, 文忠公은 漢나라를 基準하여 年代表를 만들었고 明允公은 禮記를 基準하여 大宗家와 小宗家를 나누었으니 그 예가 같지 않다, 우리 나라 풍속에 士大夫의 家庭은 그가 같은 祖上의 後孫이면 멀고 가까운 寸數를 가리지 않고 비록 貫鄕이 달라도 一族이라 여기고 함께 族譜를 하니 이는 일족을 폭넓게 상종하기 위해서다. 우리 先祖는 大樹部로부터 發足하여 新羅 始祖의 佐命 功臣이 되시고 儒理王 9년에 姓을 하사받아 孫氏가 되었다. 이것이 得姓의 始初다,
그러나 文獻이 不足하여 족보의 세게를 찾을 길이 없다. 興德王 때 孝子公 諱 順을 始祖로 삼았는데 그후 月城(慶州), 密陽, 平海로 派閥이 나누어 졌다. 우리 집안은 新羅 首都인 月城을 本貫으로 삼았으니 嫡孫임이 分明하다,
세월이 유구하여 여러 번 세상이 바뀌고 보니 문헌이 證明할 길이 없어 전하지 못하는 失代가 많게 되었다. 그리하여 高麗 末年에 判密直司事 諱字 경원(敬源)을 中始祖로 삼고 자손이 수를 해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전국에 繁盛하였다. 숙종(肅宗) 갑술년에 상주계신 族先祖 野村 선생이 慶州府尹이 되신 뒤 우리 집안의 族譜가 없음을 아쉽게 여기시고 魯岑, 梅湖 두 선생과 相議하여 각 파의 파벌로 系譜를 작성토록 하였다. 그 것을 統合하여 족보를 간행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落鄕하셨다. 그 후 그의 둘째아들 南岩公이 재차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英祖 계해년에 그의 손자 諱 雲燁이 大宗孫 忠義衛 諱 孟杰과 議論하고 主管하여 드디어 족보를 完成하였다. 비록 잘못되고 빠진 내용이 없지 않으나 뜻하던 일은 비로소 成就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80년 동안 王國이 무너지고 사람의 紀綱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대변혁이 일어났다. 宗孫 明鎬와 여러 어른들은 현 世態로 보아 머지않아 後孫들이 先祖의 出身을 모를 뿐만 아니라, 寸數도 어두워 一家를 분간하지 염려하고 지난 갑자년에 족보를 제작하여 널리 배포하였다. 이것이 바로 갑자 대보이다. 그후 또 세상변동이 변하여 천하가 크게 어지럽고 더구나 경인년에 병란까지 겪은 지가 이미 10년이 지났다. 그 동안 死亡者와 出生者가 몇 명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시대가 不安定하니 도 變革이 일어나면 結局은 祖上의 系譜가 거의 消滅될까 염려스럽다. 元城의 玉인지 宜春의 玉인지 區分 할 줄 모르고 周衛의 돌이니 後趙의 돌이니 할지도 모를 일이다라고한 呂伯恭의 말처럼 같은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기의 일가를 분간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잇겠는가? 歐陽氏는 자기성의 出處를 모르면 짐승보다 못하다고 멸시조롱 하였고 眉蘇氏는 一族이면서 慶事에 祝賀하지 않고 喪事에 弔喪하지 않는 無關心한 世代를 보고 歎息했다. 이런 가르침은 家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현재에서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은 먼 훗날 오늘을 되돌아보는 것과 같다. 族譜製作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먼 훗날 후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심원하기 때문이다. 대개 족보란 것은 세대를 나타내어 위를 이어서 아래를 나타내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비록 백 대로 벌어져도 선대의 氣運을 받게되고 반대로 백 대로 내려가도 뻐꾸기나 비들기를 보는 것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우러나는 것이다. 父母에게 孝道하고 兄弟間에 恭敬하며 親族間에 和睦하게 지내는 風俗은 이렇게 생기게 된다 하물며 이 족보는 세대와 파벌뿐만 아니라 先代의 道德, 文狀, 勳業, 忠節, 孝友등의 卓越한 行蹟이 一目瞭然하게 실려져 있음에랴, 또한 우리의 시조는 대수부로부터 내러오게 되니 忠孝로써 發足되었다. 우리의 동족은 이 족보를 본다면 어찌 孝悌 않겠는가. 이 것이 후손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범례는 대략 구보에 의존했고 더하고 감한 것은 시기에 적절하게 따랐을 뿐이다. 일이 거의 완성될 무렵 여러 종친들의 부탁으로 이 서문을 쓰노라.
갑자후 36년 만인 기해 정월 7일에 後孫 濟翼 謹序.
始祖 諱 俱禮馬
( 辰韓古地 有六部 各有長而治地方 時 天降聖人 故六村長擁立 以爲君車卽 新羅始祖朴赫居世也 俱禮馬則當時 大樹部之村長而至三代儒理王九年 賜姓孫)
진한 옛 땅에 육부가 있어 각각 그 장(장)을 선임하여 지방을 맡아 다스렸다, 이 때에 하늘에서 성인(聖人)이 내려오니 육부의 촌장이 옹립하여 임금으로 삼았는데 이 분이 곧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왕이시다, 구례마는 당시 대수부의 촌장이었다, 신라 3대 유리왕 9년에 (孫)이라는 사성을 밭았다.
諱 順
신라 42대 흥덕왕때 사람이다, 어머니를 봉양함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있어 매번 그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자, 公이 아내 白氏에게 이르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봉양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아이를 업고 취향산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든 중 뜻밖에 石鐘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워서 부부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이 때 부인이 이른 기이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이니 아이를 묻는 게 옮지 않다고 말하자. 공도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아이를 업고 석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종을 대들보에 매달고 치니 소리가 왕궁에까지 들렸다. 왕이 사람을 시켜서 묻자 전말을 자세히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옛날에 곽거(郭巨)가 아이를 묻으려 하자 하늘이 금가마를 주더니 이번엔 孫順이 아이를 묻으려하자 땅에서 石鐘이 나오니 전후의 예가 같구나하시고 집 한 채를 하사하시고 해마다 쌀 50석씩 주었다. 이일은 여지승람과 효행록에 실려있다.
晦齋 李彦迪의 생활을 느끼는 곳 옥산서원, 독락당, 계정,
옥산서원은 양동마을에서 영천,대구쪽 간선도로를 따라 8km가면 옥산서원의 이정표가 보인다,옥산서원은 옥산리 7번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154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는 서원이다.조선시대 성리학자인 晦齋 李彦迪 선생을 제향(祭香)하는 곳으로, 조선 선조 5년에 경주부윤 이재민이 선비들과 더불어 사당을 세웠고 서악 향현사(鄕賢詞)로부터 이언적 선생의 위패를 옮기고 선조 임금으로부터 "옥산서원"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다. 수 십 년 전에 소실되었다 다시 세웠고, 한 때 사립 옥산학교로 사용된 일이 있었다. 시전(詩傳), 춘추(春秋), 禮記(예기), 주자어록(朱子語錄)을 비롯한 서적 약 230종에 2197책이 전해진다. 옥산서원 앞 세심대(洗心臺)는 넓다란 바위로, 퇴계 선생이 쓴 세심대(마음을 씻는 누각라는 큰 글씨가 한문으로 巖刻 되어있다. 또 세심대 아래 龍湫란 沼 역시, 양 쪽 옆의 岩壁에 퇴계 선생의 글씨 '용추'가 새겨져있다. 위, 아래 쌍으로 되어 있어 쌍용추라고도 한다. 옥산서원 경내 어서각(御書閣)은 옥산서원에 하사된 문서를 보관하는 건물로 어필각(御筆閣)이라고도 한다. 회재 선생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방(榜) 정덕게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과 三國史記 50권, 속 대학혹문(續大學或問)1권이 보관되어 있다, 이 옥산리는 회재 선생이 낙향 은둔생활을 할 때 선생의 생활이 가득한 곳으로 양동마을과는 깊은 관계가 있는 곳으로 연관하여 생각하여야 한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고려 인종 23년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것이다. 김부식은 1075-1151년 사람으로 고려 인종 때의 문신, 학자이다. 호는 뇌천이고, 시호는 문열이다.1145년에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 50권을 완성하였다. 그 후 고려에서 12세기 중엽과 13세기 말엽에 각각 간행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태조 3년과 중종 7년에 개각됐고, 또 숙종 때 현종실록 자료로 인출 됐다. 이 책은 자체(字體)와 판식(板式)이 완연히 다른 3종의 판이 혼합 되어있다. 고려시대부터 삼국유사와 함께 경주부에 전해 오던 것을 조선 태조 3년에 그 중에서 몹시 훼손된 것을 골라 고판(古版)에 의하여 복각(復刻)하였다. 권 수 바깥쪽에 만력원년월일(萬曆元年月日) 옥산서원상 이라는 묵서가 있듯이 선조 6년 무렵에 경주부가 인출하여 옥산서원에 보내 준 것이다. 현제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삼국사기는 현존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현제는 이 삼국사기가 유교적 사관에 의해 씌어진 이유로, 시대적 성격이 짙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옥산서원은 자옥산 골짝이에 들어 앉아 주변이 자연 경관은 이 골짜기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紫溪川)에는 너럭바위들이 층을 이루며 시원하게 깔렸고, 쉼없이 흐르는 계곡물은 곳곳에 沼와 瀑布를 만든다. 계곡물가 양편에는 여러 수종의 오래되고 큰 나무들이 울창하여 그늘을 드리운다. 그늘 짙은 너럭바위 위에 드러누워 한나절쯤 쉬노라면 온갖 시름이 개울물 흘러가듯 절로 씻길 것 같다. 옥산서원은 회재 사후 20년에 회재의 죽음을 애도하던 영남 선비들이 그 학덕을 기려 묘우를 세운 것이다.그리고 2년후 1574년에 선조가 <옥산서원>이라는 현액(懸額)을 하사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 됐다. 그 뒤로 크고 작은 화재로 몇몇 건물이 중건되기도 했지만, 전화를 입지 않아 옛 모습 그대로다. 이 서원은 출입구 대문채, 강당, 사당등이 일직선상에 놓인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다. 정문인 역락문(亦樂問)을 들어서면 먼저 강당 영역에 이른다, 無邊樓(무변루)라는 2층 누각과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이 마주하고 두 건물 사이에 중정(中庭)좌우에 東齋와 西齋가 있다. 그 뒤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사당영역이다. 건물배치나 면적이 안동 병산서원과 비슷해 보이는데도 병산서원 같은 상쾌함이나 호방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건물 다 기단(基壇)이 낮은 탓도 있지만, 무변루의 폐쇄성 때문이다, 무변루는 마루 양쪽에 방이 있는 데다 계곡쪽의 벽체를 막아버려 시야가 막혀있다, 또 구인당 양쪽의 온돌방도 전면 벽체를 마감함으로 더욱 갑갑하다. 밖의 일에는 눈길도 주지 말고 학문에만 전념할 것응 강요하는 구조의 형태다. 그러나 옥산서원은 조선의 선비와 같은 규범과 권위를 갖추고있어 방문하는 이의 수고로움을 보상받을 수 있는 유적이다. 더욱이 芬閣에 보관된 회재 친필의 저술 (보물 제 586호)을 비롯하여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보물 제524호), 삼국사기(三國史記; 보물 제525호) 해동면적(海東名蹟; 보물 제 526호)등의 귀중한 전적(典籍)들이 이 서원의 문화적 가치를 더 높인다.
회재선생의 낭만, 개성, 그리고 자연을 보는 눈, 獨樂堂과 溪亭
옥산서원에서 자계천을 따라 500M 쯤 더 올라가면 독락당 (보물제413호)과 ㅁ자형의 안채, 노비들의 거처인 행랑채와 음식을 장만하던 공수간(供需間), 임금의 하사품 서책을 보관하던 어서각(御書閣)과 사당 , 그리고 별당인 계정(溪亭)등이 합쳐 큰 살림집을 이룬 고택이 있다, 회재가 낙향한 이듬해인 1532년에 지어진 독락당은 여느 사대부집의 사랑채와는 달리 집의 규모에 비해 기단과 마루, 건물의 높이와 지붕이 매우 낮은 편이다. 도한 널찍한 대청의 오른쪽 벽면에는 여닫이문을 달고, 그 문 밖의 담에는 네모난 살창을 만들어 대청에서도 계곡의 풍경을 했다, 회재의 낭만적인 개성과 자연을 보는 안목을 짐작 할 수 있는 구조의 형태다, 이 곳은 회재 이언적이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의 사랑채이다, 처음에는 초려삼간(초려삼간)을 지어 이곳 산수와 자연을 사랑하며 감상하고, 공부하며 철학적 사색에 잠긴 곳이다. 정면에는 옥산정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고, '독락당'현판의 글씨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선생의 글씨다.
계정은 독락당 뒤편에 위치했다.중종때 회재선생이 42세 되던해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지은 집으로 양진암(養眞庵)이라고도 한다,"계정"이란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며, 양진암이란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정자 마루에서 바로 계곡의 흐르는 물과 계곡의 풍경을 볼 수 있는 낭만적이고 검소한 규범의 집이다.
양동마을의 인물(東京續誌에서)
儒學者(유학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시호는 문원공(文元公), 호는 회재 또는 자계옹(紫溪翁), 자는 復古라 한다, 本貫은 驪州이고 10세에 부 찬성공(贊成公) 蕃이 別世하고 23세에 進士, 24세에 별시급제(別試及第), 31세에 弘文館 博士,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41세에 성균관사예 (成均館司藝)직에 있을 때, 김안노(金安老) 채무택(蔡無擇), 심언광(沈彦光)등의 간악(奸惡)한 讒訴로 조정(朝廷)이 문란하여 방천(放遷)하여 양동 본댁을 두고 옥산 계정과 독락당을 지어서 한가롭게 자연을 즐기며 도덕(道德)을 수양(修養)하면서 7년을 지냈다, 그후 김안노가 득죄패사(得罪敗死)하고 중종이 회재의 忠直함을 思慕하여 그 즉시 弘文館 敎理로 명하였다, 그 후 관직이 차차 고현(高顯)하여져서, 52세에 吏曹判書, 53세에 慶尙監司, 54세에 漢城府尹이 되었다, 중종이 별세한 후 인종이 즉위한 후 1년이 채 되지 못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니 조정이 또 분란(紛亂)하여 尹元衡, 李 , 林百齡 등이 賢人과 士林을 모해(謀害)하여 회재와 권중재이 직도(直道)를 행하므로 참소를 더욱 입었다. 56세 되는 병오년 9월에 윤원형, 이기등의 험악한 참소로 삭탈관직(削奪官職)됐다, 정미 9월 57세 되는 해에 강계로 流配安置됨,
63세 되는 계축 11월 23일 유배안치 된지 7년만에 유배지 강계에서 사망했다, 회재가 사망시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지가 어두웠는데 그 때에 鎭海縣監 金世良에게 作詩 現夢했다.
그 14년 후에 明宗이 크게 後悔하여 관직을 회복시켜 복권했다. 선조 는 회재가 남긴 글을 보고 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로 贈職하고 家廟에 賜祭하고, 謚
을 文元公이라 내리고 明宗廟에 配亨케 하고, 復爵 후 6년 임신년에 옥산서원이 지워져서 그 이듬해 옥산서원이라 賜額하였다. 退溪 先生 時代에 中國勅使가 우리 나라에 와서 朝鮮古今間 重大한 文字를 청하여 보기를 원하므로 퇴계가 회재 선생의 태극문변(太極問辯; 망기당 조한보와 의 문변서)를 가지고 對談하였다, 회재와 퇴계는 東方第一名賢이며 道學之宗으로 儒林에서는 稱한다.
농재공 이언괄(聾齋公 李彦适)
회재 선생의 동생으로 孝友出天하여 어머니를 봉양함에 잠시도 모친 옆을 떠나기를 어렵게 생각하여 官爵을 싫어했다, 후에 그 孝行으로 國朝에서 大司憲贈職을 賜하고 戶役을 감면하였다,
손화(孫 )
자는 文伯이고 손중돈의 曾孫이다, 재주가 뛰어 났고 문장에 능하였다. 명종이 경주지방에 인재가 많아 경성의 관료를 보내어 과거를 볼 때에 그 시험의 제목이 玉笛 이었다, 그 때에 손화의 나이는 15세였으나 성적이 제일이었다. 선조조에 進士하고, 임진란에 봉집경전(奉集慶殿)에 있는 太祖의 影幀을 안전하게 양동 수운정과 예안 이영도 서당으로 옮겼다. 尹仁
이 의병을 이르켜 討賊할 때 傾資助軍餉했다. 그때 명나라 장군이 병사를 풀어 양좌동 수목을 벌목하므로 손화가 서신을 보내 금지케 했다, 郭再祐 와 金太虛와 함께 火旺城에서 會盟을 가졌다 文集이 있다.
이채(李埰)
자는 錫吾며 언적의 玄孫이다, 아직 성장이하기전 어린아이일 때 經史를 達通하고 漢詩를 능히 지었다, 이 때 경주부윤 전식(全湜)이 설과취사(設科取士)하고는 錫吾의 재주를 사랑하여 그의 孫女와 婚姻하게 했다. 肅宗 丙辰年에 뛰어난 재주로 推薦을 받아 氷庫別檢에 뽑혔다. 학문을 계속하며 추천되는 일이 많았다. 顯宗 己酉年에 慶州府尹 閔周冕의 東京雜記 편찬시 참여하여 東京雜記 3권을 만들었다, 그의 文集이 있다.
이종상(李種祥)
이종상의 자는 숙여(淑汝)다, 이언괄의 후손이고, 총오(聰悟)가 초륜(超倫)하고 풍채 (風采)가 동인(動人)이라, 10세에 天地銘孔子贊을 지었다, 純祖 辛卯에 中司馬, 憲宗丙申에 莊陵參奉, 哲宗戊午에 어사(御使)가 계문(啓聞: 관찰사 어사등이 임금에게 상주함)하여 출재용궁(出宰龍宮)하다. 이때에 현인(縣人:그 현의 사람들)이 입비송정(立碑頌政: 비석을 세우고 그 의 정사를 칭찬하다)했다, 임술년에 개령지방에 민요(民擾)가 심하여 조정이 의론하여 종상을 開寧縣監으로 추천하였고 임관 할 때에 문서를 내려 邪學을 금지시키고 관내의 民擾를 진정 시켰다, 또 규칙을 정하여 설명하고 每月朔에 선비를 모아 곳간을 손름(損 :곡간을 줄여)하여 7가지 문서규약을 날인케 하여 학자금으로 준비했다. 그 때에 上軍還結三政策하여 사책자(賜冊子)하고 미과(未瓜)에 사퇴하고 歸鄕하니 이민(吏民)이 차로(遮路; 길을 막다)하고 유임을 원하며 울면서 따랐다. 高宗乙丑에 道臣이 義理經綸之學으로 啓薦하고 경인 江華之役에 種祥爲召 幕사하고 尋에 拜江原都事를 했다. 死後에 大臣이 종상으로 爲學이 專用工朱子書 하다. 癸未에 贈祭酒하다. 文集이 있고 易學이 뛰어났다.
명신하(名臣下)
손소 (孫昭)
자는 日章이니 鷄城君 士晟의 子요, 良佐洞에 거주하다 개유년에 中司馬兩試하고 세조 기묘에 賢良科에 뽑혀서 選八南床하고 또 魁文藝試하여 陞藝文館應敎를 했다, 정해에 李施愛가 反亂을 하여 兄 旭이 御使로 함흥에서 節死함으로 朝廷이 討伐할 때 命選文武全才하니 平虜將軍 朴仲善이 擧爲從事한대 昭가 贊 濟事하고 返葬兄屍하고 凱還에 策精忠出氣敵愾功臣이 돼다, 封鷄川君하고 命圖畵其像하여 藏于勳府하고 賜副本하여 有世襲世宥之敎하고 賜土田臧獲하다, 또 珊瑚纓(산호로 된 갓끈),玉硯滴,象牙刀를 下賜 받았다, 官職이 吏曹參判이 댔다. 與金宗直으로 爲道義交하고 所著에 金烏山賦가 登傳於樂府하다, 成宗甲午에 卒하니 上이 哀悼하고 命太常하야 賜謚襄敏하고 그 아들 중돈이 귀하여져서 贈吏曹判書하다.
우재 손중돈(孫仲暾)
중돈의 자는 泰發이니 小遊金宗直門하여 勤於學問에 窮理盡性하다, 성종 癸卯에 中進士하고 己酉에 文科하야 薦授翰林에 淸操가 嚼然하다, 燕山이 設淫刑하여 誅戮 先朝諫臣 할새 人無有免者하니 亦被逮備拷掠하다. 中廟 撥亂에 起拜 尙州牧使하니 撫四載에 滿野하고 亡이 乃復이라, 賜璽書表裏者再요 特加 通政階하여,尋이 陞都承旨하다, 후에 尙人이 慕其德하여 立生詞하야 像以祀之하고 選靑白吏하다, 再長銓曹에 銓注無偏하고 四拜都憲에 多有疏啓하니 一朝가 稱平直하다, 承 命定冠婚鄕射禮하고 또 秦請復 昭陵하고 屢啓斤柳子光의 奸凶誤國之罪 하다, 그 때에 新經己卯士禍에 以學으로 爲諱而仲暾이 獨疏陳五條하여 倡明格致誠正之學하고 官職이 吏曹參判과 左右參贊世子左右賓客하고 襲封月城君하고 己丑에 卒하니 轍朝二日하고 弔賻如式하고 謚을 景節이라하다, 慶州 東江書院 配享하다,
충의 (忠義)
손노(孫魯)
孫昭의 玄孫이니 早遊張顯光門하다 壬辰亂에 倡義하여 火旺城戰鬪에 參與하다,
손향(孫香)
손소의 현손이니 임진란에 창의하여 赴火旺城하고 後從朴穀長하니 防禦使 高彦伯이 啓聞于朝하야 除軍器寺主簿하다.
효우(孝友)
이응인(李應仁)
문원공 언적의 양자라 8세에 생모 이씨의 부고를 듣고 매우 심하게 곡을 하며 울었다, 일일에 환리파고(患痢頗苦:이질이심하여괴로워함)하나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여도 따르지 않고 다음날 아침에 녹용을 다려 응인앞으로 가져가니 소고기에 채소가 많이 썩인 것을 알고 먹지 않았다, 다음달 초에 생모 이씨가 입든 옷이 도착하니 매일 울며 옷을 어루만지며 나의 어머니의 옷이라 하니, 양모(養母) 박 부인이 등을 어루만지며 매일 슬피 우는 것을 중지하라 내가 어머니요 죽은 자는 바로 叔母라 하니 응인이 마주보며 말하기를 양모 역시 나의
어머니고 돌아 가신이 역시 나의 어머니라 하드라, 후에 筮仕로 屢典縣邑하여 所至에 有聲績하다.
이의윤(李宜潤)
의윤은 천자(天資)가 수미(粹美; 준수하고 이름답다)하고 어린 나이에 학문에 뜻을 가지고 鄭述 門下에서 受業하다, 독학역행( 篤學力行: 학문을 두텁게 열심히 행하다)하여 공추선업(恐墜先業)하고 扁以無 堂하야 事親孝하고 與弟友篤하다. 父病에 嘗糞甛苦하고 沐浴禱天하야 請以身代하고 癸巳亂에 丁夫憂하니 雖在兵火流離中이나 喪祭를 盡禮하고 泣血哀毁하다. 父臨終時 浴嘗石榴하니 而時當夏月에 不得進故로 平生不食하고 見輒流涕하고 家廟晨謁을 風雨不廢하다,
양동의 庭園 과 住民의 性向
양동의 정원은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집을 둘러싸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정원을 이루고 있다 인위적으로 가꾼 정원은 별로 없다, 언덕이면 언덕, 비탈이면 비탈 계곡이면 계곡 그 하나 하나가 정원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집 주위(사대부)에는 보통(대부분) 향나무, 백일홍. 괴나무(회화나무)가 있다, 원인은 모르지만 전통적으로 양동의 사대부 집에는 꼭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주민의 성향은 양동마을의 지형 및 집의 위치가 보일 듯 말 듯 하듯이 남에게 나서기 싦어하며 남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고 조용히 정서적인 생활을 원한다 그래서 아직 이 마을이 상업화 된 관광지가 되지 않고 고풍을 지키는 조용하고 고전적으로 유지되어 온 것 같다.
양동의 음식점,
양동에는 3집의 음식점이 있다, 우향다옥, 거림, 초원등이 있다, 그 중에서 흥선대원군이 한량생활을 할 때 잠시 머물러 있었다는 옛 고옥을 수리 없이 傳統茶와 이 마을의 家傳酒인 松菊酒 , 사대부의 음식을 조금 개량한 한정식 과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요리하는 반찬류 등이 좋고, 미리 예약을 하면 옛날의 한국전통한정식도 맛 볼 수 있는 友香茶屋이 그런 대로 멋스러운 집이다, 이 집은 황토방 민박도 가능하다, 이 집주인에게 마을 안내를 부탁하면 안내를 해 주기도 한다.
연락처 054-762-8096
054-762-6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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