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설에는 비엣(Viet)족이 중국 전국시대 월국의 유민이라고 주장하나, 베트남인들은 BC 3000년 경 동산 문화를 이루었던 락비엣(Lac Viet)족을 자신들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의 역사는 약 4천년 정도로 추정되며 설화에 의하면 랑롱꿘과 어우꺼가 시조이다. BC 3세기말 통킹만과 북부 안남에 널리 퍼진 "월"의 일부 부족인 어우락은 BC 214년 진시 황제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진이 멸망하고 광동지방의 호족 찌에우다(조타)가 독립했고, BC 208년 어우락도 합병하여 "남월국"을 창건하였으나 중국 한족은 락비엣족의 영토를 침범하여 군(郡)을 설치하고, BC 207년에는 한(漢)제국의 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시킨다.
ㄴ. 중국북속
BC 111년 한무제에 의해 "남월국"이 정복된 이후, 약 11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베트남의 중남부 지방은 인도문화 영향권에 놓이게 되어 힌두교 참(Cham)족의 참파왕국이 출현하였다. 베트남인들은 중국의 지배 시절 민족 의식을 싹 틔우기 시작했으며 중국으로부터 불교, 유교, 도교 사상을 전파 받게 되었다. 베트남인들은 중국화 정책과 중앙 집권적 정치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봉기와 반란을 일으켰다. 40∼43년에 있었던 쭝(Trung)자매의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3년간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 냈다. 그 후 리남데(Ly Nam De)장군의 활약으로 544∼602년간 자치정치가 이루어졌다. 중국의 침략은 계속되었고 베트남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베트남을 안남(安南)으로 명명했다. 938년 응오퀴엔(Ngo Quyen)장군의 박당(Bach Dang)강 전투 승리로 천년 중국 지배가 무너지기에 이르렀다.939년 남한군을 격파하고 응우옌이 "응오"왕조를 수립, 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게 되나, 이내 다시 중국 송나라의 지배에 들어간다. 하지만 마침내 972년 중국은 베트남의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ㄷ. 전통왕조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까지 약 950년간 베트남은 독립을 유지하는데 이 기간 동안 서쪽의 라오스와 중부의 챰파(챰족)를 공격하여, 남방으로 세력을 확대한다. 응오퀴엔 장군이 중국 당나라를 물리치고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왕조인 응오(Ngo)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968년 丁部領이 북부를 통일하여 대구월(大瞿越)이란 국호로 응오를 뒤이은 딘(Dinh)왕조를 일으켰으나 주권을 중국에 양도하고 속국을 자처하게 된다. 이후 레(Le)왕조의 집권이 있게 되고 1010년에 리(Ly: 李)왕조가 출현한다. 리타이또(Ly Thai To)가 세운 리왕조[李王朝]는 국호를 다이비엣(Dai Viet: 大越)으로 정하고 북으로는 송나라, 남으로는 크메르, 참족과 맞서 싸우며 독립을 유지시켜 나갔다. 자주통치를 확고히 한 200여간 행정, 조세 체제가 정비되고 농업이 육성되는 등 문인정치가 자리잡게 되었다.
하노이에는 베트남 최초의 대학 반미에우(Van Mieu)가 생겨 유교교육제도로 관리를 뽑게 되었다. 이후 리왕조 내정 혼란으로 인해 쩐(Tran)왕조가 새롭게 정권을 잡게 되었다. 쩐왕조[陳王朝]는 남부 참파왕국과 연합 당시 천하를 휩쓸던 원(元)나라 징지스칸의 침략을 막아냈다. 중국의 명(明)나라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1368년) 통일을 이룬 뒤 1407년 베트남을 침략해 20년간 직접통치를 하게 되었다. 이에 레러이(Le Loi)와 응우엔짜이(Nguyen Trai)가 나타나 명과 10년간 전투를 벌인 끝에 명군을 물리치고 1428년 "대월국"이란 국호의 베트남의 황금시대 레(여)왕조[黎王朝]를 세운다. 레왕조 치하에서 중국식 관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가적 기반이 확립되었다. 국경은 점차 남쪽으로 밀려났는데 15세기에는 중부 이남지역에 참족이 세운 참파왕국을 격파하고 남방으로 지배영역을 확대하였다.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베트남 문화를 창조하며 발굴하는 황금의 시대였다. 16세기 "레"왕조가 쇠퇴하여 북의 찐(정)씨와 남의 응우엔(원)씨의 군주세력으로 분열되었고 17세기에는 약50년에 걸쳐 남북조간의 항쟁이 계속 되었다. 남의 응우엔 왕조는 챰파를 정복하고 남하하여 크메르(캄보디아)인의 영역인 코치시나에 진출, 크메르의 내분을 이용해 17세기 중반 동지역을 점령했다. 17, 8세기 베트남 역사에 중대한 사실은 북쪽의 찐(정)씨와 남쪽의 응우옌(Nguyen)씨에 의해 베트남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남북조의 대립은 중부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으로 쌍방 모두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18세기 중엽 베트남 중부 떠이선(Tay Son)家 출신의 응우엔락, 응우엔후에, 응우엔후 등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를 떠이선의 반란이라 말하며 억압받고 굶주리고 가난한 농민들이 대거 합세하게 되었다. 이들은 남부지방을 계속 공격해 사이공에 근거를 둔 응우엔 군주를 무너뜨리게 되었다. 그 후 응우엔후에(Nguyen Hue)는 북부지방 찐家을 쳐 제압하고 자신을 광쭝(Quang Trung)황제라 불렀다. 이후 18세기 말엽 살아남은 응우엔(원)씨 일족인 응우엔푹안[阮福映]이 농민난인 떠이선[西山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프랑스의 힘에 의존함으로써 점차적으로 프랑스의 힘이 강화되었다. 응우엔[阮]씨는 영역을 메콩강 방면에까지 확대시켰고 19세기에 거의 현재의 영역을 확립하였다. 이후 프랑스의 지원아래 반대 세력을 없애고 1802년 통일된 "남월국"을 수립하여 중부 후에(Hue)시를 수도로 정하고 쟈롱(가릉)帝로 명명한다. 이 과정에서 떠이선의 진압에 도움을 준 프랑스 상인들에게 상업 이권을 양도하게 되었다. 아들 민망(Minh Mang)황제는 더욱더 유교를 숭상하여 베트남은 중국사상과 전통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버지가 외국인에게 양도한 이권을 도로 빼앗고 외국인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탄압은 티에우찌(Thieu Tri)황제 때 극에 달해 많은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고 추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프랑스 선교사 처형사건을 계기로 프랑스는 1858년 베트남을 무력침공하여, 1859년에 사이공, 62년에 프로콘도르섬을 점령하고, 1873년 남부 베트남(코친차이나) 전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1883년 수도 후에(HUE)가 공략되고 중부베트남(安南), 통킹(북부베트남)이 보호령이 된 뒤 1887년에는 아르망 조약체결로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ㄹ. 프랑스식민
1858년 프랑스 해군의 다낭(Da Nang) 공격으로 베트남 영토로는 최초로 남부의 코친차이나가 프랑스의 지배하게 들어갔다. 베트남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프랑스는 3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였고, 이로 인해 베트남 영토는 안남, 통킹, 코친차이나 3부분으로 분할하여 프랑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는 1867년 코친차이나를 식민지화했고, 1883년 안남과 통킹지역이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선포되었다. 내부분열로 무력화된 응우엔(Nguyen)왕조의 제왕들은 프랑스의 조종대로 움직이며 명목상의 왕위를 지키고 있었고, 마침내 1887년 안남과 통킹,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보호령과 코친차이나를 한데 묶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성립되었다. 하노이에 총독부를 두고 다시 1899년 라오스도 합병하여 2차대전 말까지 통치한다. 식민통치기간 중 프랑스는 중국상인을 앞세워 쌀과 고무 등 베트남의 주산물을 수탈해갔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메콩 델타지역을 개간토록 하여 옥토로 만든 프랑스인들은 베트남 국내의 절박한 식량부족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쌀의 대부분을 유럽으로 수출하였다. 또한 주류, 소금 등을 제조, 분배하는 전매회사를 세워 베트남인들에게 강매하여 원성을 유발시켰다. 노동자들은 가중되는 세금부담과 악화된 노동조건에 저항하여 점차 반란군이나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통치기간 동안 왕조 권위회복을 목표로 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양그룹에 의해 항불운동이 전개되어 공산주의자 그룹이 주도권 확보한다.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은 1차대전 직전 파리에서 정치수업을 쌓고 있던 민족주의자 호치민이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던 1920년 파리에서 태동하기 시작했다. 1924년 모스코바에서 일정기간 공산주의 학습을 받은 호치민은 중국 민족주의 운동의 산실이었던 광동에서 그 곳에 거주하고 있던 베트남 망명객들을 규합했다. 1925년 혁명청년동맹을 결성했고, 이어 1930년 이를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재편했다.
ㅁ. 2차대전
1940년 9월 일본이 베트남 점령을 개시하자 호치민은 1941년 30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베트남 독립 동맹회-비엣민(Viet Minh)을 창설, 독립연맹을 강화시켜 나갔다. 비엣민은 유격대를 조직하여 프랑스인과 일본인들을 동시에 공격하였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미국정보기관(OSS)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45년 3월 일본군은 북베트남에 진주하여 프랑스를 무력으로 격퇴하고 80여년의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를 종식시킨다.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연합국 정상들은 포츠담회담에서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할, 북쪽은 중국군이 그리고 남쪽은 영국군이 주둔하도록 합의했다. 중국군이 진주하기 전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즉각 하노이를 장악하고 남부의 사이공까지 통제해 간다. 이것이 "8월 혁명(cach mang thang tam)"이다. 이후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빌미로 16도선의 북에는 중국의 국민당 군대가, 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하고 프랑스는 영국 관리하의 남부에 군대를 파견하여 군사적으로 재개입한다. 7년 동안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을 반대하였고 호치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인다 1946년 3월 호치민정권은 프랑스와 잠정협정을 체결, 한때 "프랑스연합내 인도지나연방을 구성한 국가"로 인정되었으나 실질적 독립을 추구한 베트남과 연방내 자치국으로 한정한 프랑스측이 대립하여, 1946년 11월 하이퐁만 관세에 관한 법적권리를 둘러싸고 베트남과 프랑스인 사이의 협상 결렬이 계기가 되어 두 나라는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개시하였다. 하노이에서 무력충돌(동년 12월)에 이어 전면전으로 발전, 호치민정권은 지방으로 철수한다. 이후 호치민 지휘하의 비엣민이 중국의 군사지원을 받아 우세해지자 프랑스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는데, 당시 서방 세계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공산주의의 팽창정책과 중국공산당의 확장에 대한 견제책의 일환으로 규정하였다. 1949년 프랑스는 제2차 대전후 퇴위 망명한 응우엔조 최후황제 바오다이와 교섭하여, 그를 수뇌로 한 "베트남국"을 수립했으나 호치민의 월맹군은 북부 산지에서 중국 지원아래 프랑스군에 대한 공세를 펴 결국 1954년 5월 "디엔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이겨 프랑스를 인도지나 에서 철수시켰다.
ㅂ. 베트남전쟁
한편 49년 7월 인도지나에서 전쟁을 몰아내기 위한 국제회의가 제네바에서 개최되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휴전협정 등을 54년 7월 21일에 체결하여 제네바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경계로 하여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며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임시분할되었고 잠정 군사경계선 설정과, 국제감시위원회 설치 등이 정해져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56년에 실시키로 한다. 북부 월맹은 2년후 총선에 대비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화 개혁을 착수하여 정권확보 기반을 마련했고 남부 월남에는 1955년 바오다이제 퇴위후 캐톨릭주의자이며 반공민족주의자인 고딘 디엠을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어 강력한 반공정책 및 정권강화에 열을 올려 독재적 성향을 보인다. 1955년 10월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지엠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공산주의자 제거작업에 착수하였다. 무차별적인 체포와 정권의 잔혹성으로 남쪽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1958년 남부 공산지도자들은 북부 중앙당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 마침내 1959년 5월 당중앙위원회는 남부에서의 무장투쟁을 요구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정권의 부패와 독재, 앙의시위에 대한 정부군의 발포로 국민적 반감이 증폭되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의 전쟁기반이 약화되자, 미국은 지엠의 제거를 고려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불교도 및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反디엠-反美" 운동이 격화되고 월맹 지원의 게릴라활동도 활발하여, 60년에는 월맹지도아래 공산주의자 및 반정부 지식인으로 구성된 "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이 결성되어 정부전복 활동을 강화한다. 1963년 11월 1일 마침내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쿠테타가 일어나 지엠은 총살되고 이때부터 군부지도층 사이에 정부 전복음모, 쿠테타 시도등의 권력투쟁이 빈발하게 되었다. 남베트남의 계속되는 정치 불안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틈을 타서 북베트남은 '호치민 루트'라고 불리는 라오스와의 국경선의 통행로를 보수, 확장하여 남부에 대한 공세준비를 강화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통킹만에서 작전중이던 미구축함 매독스호와 너조이호가 북베트남 해군의 함포공격을 받아 미국이 해안지역 북베트남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고 이어 미의회는 군사력 사용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사건)을 계기로 65년 본격적인 북베트남 공격과 월남에 전투부대 투입을 개시하였으며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해방전선"과 전투도 격화되었다. 1964년 8월 2일 통킹만에서 작전중이던 미구축함 매독스호와 너조이호가 북베트남 해군의 함포공격을 받은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미국은 해안지역 북베트남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고 이어 미의회는 군사력 사용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한편, 사이공의 정치적 혼란은 1965년 응우엔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가 주도하는 군사혁명위원회의 권력장악으로 어느정도 일단락 되었으나, 미군의 거듭되는 증파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의 게릴라전 앞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민간인 피해만 심화되었다. 북폭은 65년부터 68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의 구정대공습을 기점으로 미국의 베트남개입 정책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같은 해 3월 31일 미국의 존슨대통령은 처음으로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위해 폭격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수개월에 걸친 미국과 북베트남간의 협상 끝에 마침내 1969년 파리평화회담을 앞두고 1968년 10월 31일 폭격이 중단되고, 티우 대통령의 반대로 연기되었던 휴전협상도 닉슨대통령의 취임 직전 개시되었다. 그러나, 72년 12월 18일부터 29일까지 2차 북폭이 12일간 주야로 계속되어, 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5배 분량의 폭탄 10만톤이 투하되었다. 이후 1973년 1월 27일 파리에 서 휴전협상이 정식 체결되었고, 그 다음날 오전 8시 전쟁이 공식 중단되었다. "협정후 60일내 철수" 합의에 따라 미국은 철수하였으나 전투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북베트남은 월남을 무력으로 통일키로 하고 총공세를 벌여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정권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30년간의 긴 전쟁은 종식되었다. 통일이후 남부에서는 구체제 해체와 사회주의화가 추진되었다. 이와 함께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가 남베트남의 정권을 장악하자, 75년 11월 남북통일에 관한 정치협의회가 이룩되었다. 이 협의회의 결정에 의해서 1976년 4월 남북 베트남의 통일 선거가 실시되어 6월에는 통일국회가 열렸고, 7월에는 남북이 통일되어 현재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은 200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미국은 650만톤의 폭탄을 투하, 헬기 5000대 손실, 5만8천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한국은 64년 9월부터 10년간 연인원 31만2,853 명을 파병시켰다.
ㅅ. 통일베트남
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미국은 통일 베트남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제재조치 단행한다(1975.4.30). 한편 1978년 베트남군과 캄보디아군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화교들이 정부의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는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탈출하면서 캄보디아,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부를 무너뜨리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하자 중국이 이에 대응해 중월(中越)전쟁이 일어나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1980년대초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며 인도차이나반도 대부분을 장악하여 몇몇 국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한편 폴 포트의 추종자들은 캄보디아 내 베트남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려, 마침내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해 1989년 철군을 완료했다. 1986.12월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도이모이정책을 채택하여, 시장 경제체제 도입을 선언하였고, 1991. 6월 제7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당 서기장 및 다수의 보수 강경파 인물들이 개혁파 인물들로 교체되는 한편 정치부문 개혁은 통제하되 경제부문의 개혁은 과감히 추진키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92.4월 국민기본권 보장, 사유재산 인정, 국회 및 정부조직 개편, 외국투자 자본 비국유화 등을 담은 헌법을 개정하고 1992년말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여 무역협정,투자보장협정, 항공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이후 미국은 1994년 2월 대베트남 엠바고(북부 베트남 30년, 통일 베트남19년)를 해제하고 1995년 1월 양국 수도에 연락 사무소를 설치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 베트남 교회 90년 약사(L선교사) ▒▒▒
ㄱ. 초기 접촉 - 첫 발걸음들
기독교가 베트남에 전해진 것은 10세기경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무역상, 선원, 외국군인들 가운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베트남에 들어왔으나 아직 공식 복음 전파의 단계라 말하긴 어렵다.
1984년, 프랑스선교회가 첫 목사를 하이퐁에 보냈는데 아쉽게도 단지 프랑스인을 위한 목회자로 보냈다. 그 당시 성서공회의 부분적인 활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구미 각 교회의 대 부흥운동 이후 선교운동이 극에 다다르고 많은 선교회가 조직되었을 때, 심프슨 목사에 의해 복음선교연합회(CMA)가 설립되었다. CMA 선교단체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관심을 갖고 베트남에 복음을 전할 방법을 모색했다.
- 1887년: 심프슨(A.B.Simpson) 목사가 베트남 복음전파를 위한 동기 부여 시작하다.
- 1893년: 데이비드 렐라쳐(D.Lelacheur) 목사 사이공에 방문하다.
- 1897년: C.H.Reeves 목사가 중국 라이쪄우 지방에서 베트남 북부 랑선(Lang Son)지방으로 들어오다.
- 1899년: R.A.Jaffray 선교사 하노이 방문하다.
- 1901년: Dayan 목사 하이퐁이 오다.
- 1911년: R.A.Jaffray, P.M.Hosler, Hughes 선교사 다낭에 도착하다.
선교사무실 세우기 위한 부동산을 사다.
ㄴ. 1911-1918 단계
언어공부 기간이 지난 후, 선교사들은 베트남 말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다. 몇 명의 선교사가 추방되었다는 이유로 인해 프랑스 사람들의 불신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권능은 많은 최초의 성도들의 믿음을 강력하게 그 어려움들을 통과하게 역사했으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많은 민중성원을 얻게 되었다.
- 1975년 이후: 각 교회의 전도활동이 교회 내 모임 안에서만 이루어지다. 신자의 수는 증가하다.
- 1976년: 제 42차 총회가 호치민시에서 열림. 옹반후엔 목사가 총회장이 되다.
- 1980년대: 교회가 빠르게 부흥함. 신자들이 모인 곳마다 주의 말씀을 배우려는 정신이 변함없이 강하게 역사했다.
- 1990년대: 많은 교회가 증축되거나 새로 세워짐
- 1992년-1994년: 베트남 성경 출판계획이 정부의 허가를 얻어 33,000권의 성경과 20,000권의 찬송가를 외국에서 들여옴
- 1994년-2000년: 정부가 성경 인쇄를 허가함. 신구약 65,000권, 신약85,000권, 찬송가 25,000권, 복음서적 80,000권, 성경 120,000권을 인쇄하다.
- 2000년: 교회의 새로운 전진을 위해 총회준비위원회가 헌장(교회헌법)을 준비함.
- 2001년 2월 7-9일: 제1차 총회(교회사로는 43차 총회)가 호치민시 쩐흥다오 155번지 소재 사이공교회에서 개최되다. 헌장이 통과되고 2001년-2004년도 임기를 위한 신 임원이 선거로 선출되다.
- 2001년 3월 16일: 정부 종교성 규정 15-QD/TGCP에 의해서 베트남 복음성회(남부)가 종교 법인체로서의 자격을 얻음으로써 제1회 베트남 복음성회(남부) 총회에서 통과된 헌장에 의하여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총회에 서 선출된 총회 임원들과 위원 23명의 인사에 대해서도 인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