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반보고(4374m)원정대 -푸른하늘. 끝없는 초원. 몽골
『국명은 1992. 1. 13. “용감하다”라는 뜻을 지닌 부족어로 몽골리아(Mongolia)로 공식명칭하게된 몽골은 러시아와 중국사이에 끼어 있는 중앙아시아의 고원지대로 세계에서 17번째로 큰 국가(한반도의 8배)이며 석탄, 금, 캐시미어, 우라늄 등이 주요 생산품인 세계8위의 자원국이다. 북쪽에는 산림이 많고 남쪽에는 사막. 그 나머지는 평지가 공존하는 나라(국토의 90%가 목초지, 사막, 산, 10%가 산림)이다.
몽골은 1921년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1990년 구 소련의 멸망으로 자본주의(자유시장 경제)로 전환되었고 1996년 3월 대한민국과 수교하여 교역규모는 5천 7백만 달러로서 한국은 몽골의 4번째 큰 교역국이다.
전 국민은 약 280만명이고 수도인 울란바타르시에는 80만명이 살고 있다. 70%는 아파트에 거주, 나머지는 몽골의 전통가옥인 게르(겔)에 살고 있다.
넓은 면적에 비해 인구수가 적은 이유는 여름이면 영상 40℃이상, 겨울이면 영하 40℃를 오르내리는 온도의 큰 차이와 가도가도 끝없는 대지 탓이다.
할하몽골족이 대부분이며 할하몽골어를 사용하고 티벳불교인 라마교와 미신을 믿는다. 화폐단위는 투그릭(tg)이며 5,000, 10,000 투그릭은 고액에 속한다.
한국과의 시차는 몽골이 1시간 늦으며, 전기는 220v, 50Hz를 사용하고, 현대자동차의 엑셀과 소나타Ⅱ는 최고의 인기상품이다.』
8월 15일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2,500㎞를 날아서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시 보양트 오하공항에 비를 맞으며 내렸다. 반바지차림의 나는 찬바람과 동반한 비에 코감기가 걸리고 만다. 연간 강우량이 250㎜인 몽골에서 “비가오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라는 속담 때문인지 사돈의 나라에서 한국원정대가 왔으니 타반보그 등반에 좋은 결과가 있을꺼라는 현지가이드 오드바이라의 말이다.
숙소를 들어가면서 본 시가지는 사회주의가 되면서 그 이후 관광개발을 하지 않아서인지 옛소련의 주택과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70년대 수준 같아 보이며 어수선한 분위기로 보인다. 놀라운 것은 복드국립공원이었는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1호이며 역사는 300년이 된다고 한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와 하얀색의 게르가 인상적이다. 숙소는 30년이 지난 3성급 호텔이었는데 시설은 아직도 훌륭했다. 22:30분이 되어야 어두워졌는데 밖의 기온은 영상 7℃였다.
16일 7시에 기상하여 비행기에 실을 짐무게를 15㎏으로 조정하냐고 분주했다. 대원들 대다수가 원정경험이 있어선지 쉽게 정리하고 서로 짐을 나르는 협동심에 분위기는 고조됐다. 짐을 공항으로 보내고 오전에 몽골의 마직막 왕인 보그트왕의 사원을 방문도중 이태준 메모리얼 공원을 보게 됐다.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 모르지만 이곳 몽골인이 만든 공원에 한국인 이름이 공원명으로 되어 있어서 뿌듯했다.
12시에 이륙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많은 가스로 인해 대기해야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내에서 마냥 기다림은 매우 지루했으나 이곳 사람들은 매우 활기가 넘쳐보였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어제 내린 비 때문이라는데 5년 가뭄을 씻어준 단비라 모두들 즐거워한다고 했다. 50인승 비행기를 2시간 운항하여 내린 비포장 활주로는 토성징글 공항이었는데 기름을 넣기 위해서란다. 주유하는 동안 또다시 대기. 또 가스가 있다나. 갑자기 내린 비와 싸락눈을 피하기 위해 2시간을 비행기 날개 밑에 있었는데 이곳 도시는 서부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울란바타르에서 1,700㎞를 비행 한 후 비얀울기공항(1,725m)에 6시에 도착하여 짐대기하고 25㎞이동, 숙소인 게르에 도착한 시간은 8시. 영상10℃의 기온이었는데 캠프 게르 뒤쪽의 호수는 들어오는 물줄기는 있지만 나가는 곳이 없는 만년호수라 그런지 쌀쌀했다.
저녁 9시. 해는 아직도 따가운데 저녁을 먹었다. 감자볶음, 토마토와 오이믹스, 소레스테이크와 쌀밥, 와인 몇잔에 지겨운 14시간의 이동이 끝났다. 10:30분이 되어서 어두워진다. 말로만 듣던 “백야”다.(위도상 높은 지역이기 때문)
17일. 비얀보그의 첫아침. 오늘은 “푸르공”이라는 5인승 짚차를 타고 7시간 이동해야 한다. 시내에서 등반허가서를 받기위해 또다시 대기. 이곳 사람들은 2-3시간 기다림을 잠깐으로 생각한다. 날씨는 너무 좋았다. 시내를 빠져나와 공항 근처의 냇가에 앉아 기다리니 졸음이 쏟아진다. 오랜시간 기다리니 그제사 이곳 대행사 직원이 미안하다는 말없이 이동하잔다. 늦은 이유를 물으니 일요일이면 무조건 쉬는 담당공무원을 집에 가서 데려다가 심사 받느라고 늦었단다. 자기였으니 그나마 빨리 처리해 준거라나. 어이가 없다.
짚차로 이동하면서 단 1분도 눈을 붙일 수가 없다. 말이 평지이지 닦아논 길이 아닌 비포장길을 시속 60㎞로 달리니 충격은 고사하고 먼지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타반보고 국립공원 입구(1,740m)에 도착하여 익크아시아에 6동의 텐트를 치고 원정대 쿡인 요르카와 딸 인디라가 차려준 식사를 하며 내일부터 있을 고소적응에 만반을 기하라고 주문한다.
다음날 아침 기상하니 바람없고 짙은 구름이 넓게 퍼져있다. 그다지 상쾌하지 않다. 짐을 꾸리고 텐트를 정리하여 말과 낙타를 이용하여 4시간을 이동했다. 이동 중에는 일본인과 브라질인 여성 두명을 만났는데 타반보고산 트레킹하고 온다고 했다. 대화도 통하지 않을 이곳에서 남자도 아닌 여자 둘이서 트레킹 한다는데 놀라웠다. 베이스캠프 도착 전에 웅장한 다섯 개 봉우리 타반보그를 볼 수 있었다. 활주로보다 짧지 않을 빙하지대와 모레인지대. 그리고 설능을 보면서 고소적응은 되었지만 과연 등정할 수 있을까하는 위압감이 다가왔다. 캠프에 짐정리가 끝나고 대원 대부분이 내일 등반을 위해 고소적응겸 정찰을 다녀왔다. 먼저 도착한 3명의 프랑스대는 어제 12시간 등반하였고 스위스대는 빙하쪽에 캠프를 설치한 탓에 5시간 소요되었다고 한다. 정말 놀라운 기록이다. 등반방식의 차이도 있지만 기죽는 등반시간이다.
19일 새벽 3시 기상. 행동식과 따뜻한 차를 배낭에 넣고 베이스캠프를 나섰다. 12명중 3명의 대원이 고소적응이 되지 않아 베이스캠프에 남기로 했다. 멀리보이는 정상은 짙은 가스로 덮여 있었지만 별은 떠있어서 마음은 부담되지 않았다. 해드랜턴을 켜고 2시간을 넘어온 모레인지대가 상쾌했지만 눈발이 날리기에 자켓을 꺼내 입으니 안에서 땀이 흐른다. 모레인지대를 넘어오자 빙하지대가 시작되는 곳에서 장비를 착용했다. 모두들 땀으로 범벅이다. 빙하지대 초입은 빙하지대 아래쪽이라 폭격맞은 듯이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안자일렌 할 수도 없기에 한명씩 건너기로 했다. 이곳에서부터는 빙하를 가로지르려했던 어제 정찰계획을 세로로 등반하기로 했다. 모두가 앞사람의 발자국만 밟고 건너야 한다. 하계등반이라 눈이 녹으면서 언제 빠질지 모를 크레바스 때문에 앞사람의 발자국만 밟고 걸어야 하는데 여간 신경쓰이지 않는다. 세명 정도가 다행히 작은 크레바스에 무릎과 가슴이 빠진적이 있는데 이들 얼굴표정엔 공포가 대단하다. 나도 빠질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쭈삣쭈삣하다. 안자일렌을 하고 이 지겨운 빙하지대를 2개조로 나뉘어 6시간 걸어서야 비로소 타반보그산 후이통봉의 등반라인 밑자락에 도착했다.
3,375m 지점에서 간식을 먹고 수통의 살어름을 단내가 나는 입안에 넣으니 팥빙수 생각이 절로 난다. 북동쪽 (러시아)방향에서 가스가 밀려오고 있지만 그다지 큰 위력은 아닌 것 같다. A조에 속한 나는 네 번째로 등반을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스키스톡으로 등반이 가능하다. 카메라와 캠코더를 자주 사용하느라 손가락이 얼얼했지만 참을 만 하다.
3,745m, 벌써 12시가 넘었다. 얼굴은 흰눈에 반사되는 자외선에 익을대로 익는다. 숨이차다. 고작 4,000m 고지도 못올라 왔는데. 모레인지대와 빙하지대에서 너무 신경쓴 워킹탓일까. 다리가 후들거린다. 빛나는 눈에 얼어죽은 참새가 보인다. 능선상에서 불안한 커니스윗봉에 도착했다. 좌측으로는 아파트 1개동만한 세락이 있어서 선두는 우측(노스페이스) 설벽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돌들이 많은 좌측이 쉬워 보였지만 선두자리에 와보니 이건 “버티칼리미트”다. 목구멍이 바늘로 찌르듯이 통증이 온다.
선두 2명과 60m 차이가 났다. 그사이로 북쪽에서 강한 바람과 가스가 몰려와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선두 발자국이 안보여 소리치지만 대답이 없다. 불길하고 나 또한 이 설벽이 불안한 자리다. 밑에서 올라오는 B조는 보이는데 선두가 보이질 않으니 답답하다. 30분을 기다리니 바람과 가스가 멈췄다. 아뿔사 선두인 A조 2명은 강한 바람과 가스를 피하느라 오히려 더 위쪽으로 등반을 한 상태였다. 저런 가파른 설벽에서 추락이라도 하면, 상상도 안간다. 그들과의 차이가 너무 벌어졌기에 더 이상 등반할 수가 없다. 한스텝 한스텝 오르는 2명의 선두를 B조와 합류 할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번 원정도 등정하지 못한다는 현실에 스스로 매우 분노했지만 등정 욕심으로 솔로등반을 생각 할 수는 없다. 정상에 목숨을 거느니 차라리 여기까지가 어떤 면에서 등정일수도 있겠다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과감히 포기했다. 이번 원정대의 등정 성공소식을 가져다준 2명의 대원을 축하하고 기다리면서 4,040m에서 카메라에 찍힌 나의 모습은 서글프지도 속상하지도 않은 오히려 담담한 모습이었다.
박흥식
홍천클라이머스 산악회장. 코오롱등산학교 정규 27기. 동계 17기. 태양반점운영. 홍천군 경계종주 등반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