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내음나는 서산 '어리굴젓'
●서산 ‘굴맛집’ 가이드
동치미 국물에 생굴…시원한 굴탕도 별미
## 15∼20일간 염장 발효시킨 생굴…##
## 밥에 굴 놓고 김에 싸먹는 맛 ‘으뜸’ ##
서산(瑞山) 밥상에서는 어리굴젓이 김치 격이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반찬으로 꼭 어리굴젓이 올라온다. 하얀 쌀밥과 빠알간 어리굴젓의
색깔이 곱게 어울린다. 어리굴젓은 굴 맛이 워낙 좋은 동네 서산에서
수백년 전 부터 지역 사람들이 먹어 온 토속 반찬이다.
서산에서는 김치 담그듯, 집집마다 자연스럽게 어리굴젓을 담근다. 매일
생굴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었으니 굴을
보관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굴을 깨끗이 씻어서, 소금도
넣고, 춧가루도 넣고 해서 어리굴젓을 담갔다. 단지에 넣어 부뚜막 위에
올려놓으면 굴이 금세새 익어서 신 김치처럼 복합적인 맛을 내곤 했다.
“어리굴젓 양념 비법이 뭐냐”고 꼬치꼬치 깨묻는 외지인에게 주민들은
“그저 옛날 하던 방식으로 하는게 전부”라고 말한다.
서산 남정네들은 고기 잡으러 나가고 아낙들은 썰물 때가 되면 개펄로 굴
따러 나섰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쌔액쌕 잠이
들었을 것이다. 굴을 딴다는 현실은 얼마나 고달픈가. 굴과 바다만
바라보는 지루한 노동이다. 개펄에 서서 어리굴젓 맛은 고춧가루
양념만으로는 절대 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그
아릿함이야말로 굴 따는 아낙들의 한숨과 눈물이 밴 맛 아닐까. 차가운
바닷 바람 맞으며 허리 필 새 없이 묵묵히 굴을 따고, 굴을 까는
여성들의 희노애락이 녹아 들며 어리굴젓이 익어간다.
서해 굴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아 맛이 좋다. 조수간만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며 천천히 큰다. 잘지만 알찬 ‘강굴’이다. 남해에서
올라오는 굴은 크다. 그러나 크고 통통한 놈은 오히려 맹하고 허하다.
모양새는 그럴싸해도 맛의 밀도나 집중도는 떨어진다. 사람의 힘으로
굴을 물 속에만 담가두면 굴이 빨리 크지만 맛은 없다.
서해 굴은 밀물과
썰물에 휩쓸리며 하루의 절반은 바다 속에 살고, 나머지 절반은 바다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래서 생장이 더디다. 3년 정도 자란 굴이
어리굴젓 담그기에는 최고라고 한다. 육질이 단단하고, 빛깔은
거뭇거뭇하며, 맛도 쫄깃쫄깃하기 때문이다. 서산 굴로 어리굴젓을
담그면 더 맛있는 또다른 이유는 바로 굴 몸뚱이에 있는 돌기. 마치
털처럼 난 돌기 사이사이로 양념이 잘 박히고 배어든다.
서산 사는 심종훈(52)씨는 2대째 어리굴젓을 만들고 있다. 아버지
심성기(82)옹이 ‘부석표’ 상표를 붙여서 어리굴젓을 만든 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의 일. 일명 ‘거지밥통’으로 불리던
미군부대 ‘빠다 깡통’에 상표를 인쇄한 종이를 둘러서 내다 팔았다.
이후 50년이 흘렀지만 어리굴젓 담그기는 여전히 사람 손이 하는 일이다.
굴은 10월부터 이듬해 2, 3월까지 딴다. 그 이후엔 알이 배서 맛이 없고,
독성이 있어서 못 먹는다. 굴 철에 아낙들이 바닷가 굴밭에 나가 따온 굴
알맹이를 바닷물로 씻어서 섭씨 20도 정도에서 15~20일 가량 염장 발효
시킨다. 큰 독에 넣어두면 굴 속에서 물이 빠져 나온다. 며칠 후 굴
알맹이가 국물 위로 둥둥 떠오른다. 굴만 건져내서 고춧가루 양념을
한다. 태양초 고춧가루를 밀가루 보다 더 곱게 빻고 물에 갠다. 굴을 이
고춧물 한 바가지에 버무리면 어리굴젓이 완성된다. 갓 담근 어리굴젓은
맵고 짜기가 투박한데, 조금만 지나면 짠맛과 매운맛은 하나로
어우러진다.
밥 없이 어리굴젓 하나만 덜렁 놓고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어리굴젓을
맛있게 먹으려면 밥맛이 좋아야 한다. 고슬고슬 지은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에 빨간 양념이 배어든 굴 한 점을 올려놓는다. 밥과 굴을
동시에 떠서 입에 집어넣으면, 밥의 따스한 온기에 살짝 익은 굴도
따사로움을 전한다. 삭은 냄새도 약간 사그라들면서 밥맛을 달콤하게
만든다. 굴젓 한 점이 입안에서 톡 터지며 갯내음을 퍼뜨리고, 매운 고추
양념이 아릿하게 입안에서 뱅뱅 돈다. 발효된 맛이니까 생굴의 싱싱한
맛과는 다르다. 가볍게 톡 쏘는 자극. ‘골딱골딱한 맛’이라고나 할까.
밥과 계란 노른자를 비벼먹듯이 밥 위에 굴 한 쪽, 김 한 장 올려놓고
싸먹는 맛도 일미다.
서산 일대에서도 간월도야말로 어리굴젓의 본향이다. 서해 바다 위에
동동 뜬 간월암에서 달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무학대사가 간월도
굴젓을 맛 본 뒤 태조 이성계에게 올려보냈다고 한다. 그때부터 간월도
굴젓은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는 진상품이 되었다나. 지금 간월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방조제로 연결된 뭍의 일부다. 간척사업 이후로
예전만큼 굴이 많이 잡히지는 않는다고 한다.
‘굴의 전설’ 간월도에는 어리굴젓 기념탑이 있다. 밤이나 낮이나
망부석 마냥 말 없이 굴을 따는 모습이다. 오늘(정월 대보름),
간월도에서는 아낙들만 모여 제를 지낼 것이다. “석화야! 물결 타고
달빛 따라 간월도로 모여라”고 주문을 욀 것이다. 올 한 해 굴이 더
풍성하도록 용왕님께 간절히 기원 드릴 것이다.
( 고형욱 / 음식 평론가 )
심종훈 씨네는 충청남도에서 ‘전통문화가정’으로 인증 받은 곳이다. 이
집 ‘부석표 어리굴젓’(041-665-2353)은 서울에서도 받아 먹을 수 있다.
간월도 초입에 있다. 수협(041-662-4622)에서는 간월도 어리굴젓을 살 수
있다. 간월도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횟집 촌이 형성되어 있다. 주변
방파제에서는 언제나 어리굴젓과 생선을 파는 간월도 아줌마들을 만날 수
있다. 직접 어리굴젓 맛을 보고 살 수 있다.
찬바람이 불면 간월도 오뚜기 횟집 (041-662-2708)이 손님으로 붐빈다.
새조개 샤브샤브를 주 메뉴로 내놓는 집이다. 어리굴젓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안 나오면 주인께 달라고 청하시길). 서산 시내 삼기식당
(041-665-5392)은 서산의 명물 꽃게와 어리굴젓을 동시에 맛 볼 수 있는
집이다. 쫍쪼름한 게장백반, 얼큰한 꽃게 매운탕 등 전문. 밥상 위에
어리굴젓이 올라오는 건 당연지사다. 봄이 오기 전 소복식당
(041-331-2401)에도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동치미 국물에 생굴을 담근
시원한 굴탕 맛이 일품이다. 갈비가 전문이라 한끼 식사로 갈비탕도
좋다. 빨간 어리굴젓 역시 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