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1구간 산행을 마치고 2주를 쉬는 동안 체력단련에 신경을 썼지만 수요일과 목요일에 비가 내린 관계로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하였다. 그런데다 금요일 군대간 제자가 휴가를 나와서 곡차를 한잔하러 갔지만 목도 아프고 몸살기가 있어서 곡차도 한잔 제대로 못하고 돌아와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열이나고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였지만 몸상태가 너무나 엉망이다. 아직까지 근무하면서 몸이 불편하여 결근이나 조퇴를 한 적은 없었지만 오늘은 참고 견디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몇번이나 조퇴를 할까도 망설였지만 힘들게 참고 견뎠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갈 때 손운락 사무국장이 전화를 해서 저녁에 갈 준비는 다 되었냐고 물었다. 지금 몸이 아파서 산행에 참여 할 수 없을것 같다고 하니 냉정하게도 빨리 병원가서 치료를 하고 따라가라 한다.
백두대간 종주에 모든 것을 책임지고 맡아하기로 해 놓고 안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가서 도저히 올라갈 수 없으면 차량이라도 지켜야 된다고 한다. 이 노릇을 어이할꺼나. 이제 2구간인데 벌써 낙오하면 결국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난다 생각하니 가슴이 아찔했다.
백두대간 완주 목표!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계획이요, 목표인 것 같다. 그러나 해야 된다. 진부령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기필코...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이제와서 연기할 수도 없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도 안될 것이다.
퇴근을 해서 집으로 오는데 걷기조차 힘들다. 몇년 만의 아픔인 것 같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병원에 갈려고 하지만 밥이 제대로 넘어가질 않는다. 힘들게 병원에 도착하여 먼저 몸살 주사를 맞은 후, 다시 포도당 주사를 맞고 있는데 회원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 누워 있다고 하니 모두들 걱정을 하는것 같다. 동료애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으로 주위의 모든 분들이 고마울 뿐이다.
다행이 여러분들의 염려덕분으로 주사를 맞고 나니 몸은 한결 좋아진 것 같다. 집에서 잠을 자는데 엄청난 땀을 흘렸으며, 20시경 일어나니 몸은 많이 가벼워졌지만 아직도 머리가 많이 아프다.
백두대간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해서라도 가야한단 말인가? 많이 망설여진다. 집사람과 아이들도 걱정이 되는지 가지 말았으면 한다. 그러나 가야 한다. 백두대간은 나의 꿈이었고, 희망이었으며, 아직 젊음이 있는 한 내가 한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대간하는 놈들은 독종이라 상종을 하지 말라고 하듯이, 나도 이제 독종이 되어야 할 순간이다. 아니!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니까...
짐을 챙겨 황성 숯불에 도착한 후, 슈퍼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고 회장집으로 가니, 벌써 여러 회원들이 배웅을 하러 나와 있다. 모두가 갈 수 있느냐고 걱정을 한다. 하지만 나 한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심려와 걱정을 끼쳐드려서 미안할 따름이다.
23시 10분경 회원들로부터 환송을 받으며 목적지로 출발하기 위해 차에 몸을 의지한다. 대구를 거쳐 논공 휴게소에 도착하니 0시 30분, 시간이 늦은 관계로 휴게소는 불이 꺼져 있어, 화장실을 다녀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하여 인월을 거쳐 하늘 아래 첫동네인 심원 마을을 지나, 우리가 탄 차는 서서히 목적지인 성삼재에 다가간다.
3시 10분경 드디어 목적지인 성삼재(1,060m)에 도착하니 등산객들이라고는 우리 일행 6명 밖에 보이질 않는다. 배낭을 꾸리고 산행 준비를 완료한 후, 3시 30분 2구간 산행의 첫발을 내디딘다.
어둠을 뚫고 4시에 작은 고리봉을 통과, 곧이어 4시 02분에 헬기장에 도착하니 주위는 침묵속에 잠겨있다. 아직도 어두운 새벽 날씨는 산행하기에 좋았지만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여 있어서 달이 구름사이로 수시로 숨바꼭질을 한다. 구름에 달 가듯이 달을 벗하여 걷다보니, 성삼재와 만복대 중간지점인 묘봉치(1,130m)에 4시 30분 도착한다.
2분을 더 가니 헬기장이 나온다. 여기서의 조망은 노고단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종석대와 성삼재, 좌측에는 반야봉과 여러 능선 봉우리가 어둠속에서 어렴풋이 보일 뿐이며, 심원계곡의 달궁마을에는 적막한 어둠만이 깃들어 있었고, 서쪽의 산동면 쪽에는 민가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과 가로등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잠시 조망을 하면서 휴식을 취한다.
산세는 우측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지만, 좌측면은 급경사 지대였다. 성삼재를 출발하여 5km 지점을 5시 5분에 도착하니 곧 일출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이며 주위가 온통 붉게 물들며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만복대 오름길은 경사가 심했지만 일출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거의 뛰다시피 올라가니 5시 11분이다. 일행 모두가 일출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힘겹게 정상을 향해 올라오지만 애석하게도 일출은 볼 수가 없다. 구름이 너무 많이 끼여 있기 때문이다.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다. 이때 모두가 얼마나 빨리 걸어 올라왔던지 우리의 자랑스러운 초보산꾼 손승락 회원은 뒤따라 오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고 술회를 하면서, 이후 그렇게 좋아하던 담배를 끊어버리는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비록 멋진 일출은 보질 못했지만 만복대(1,433.4m)에서 바라보는 주위 조망은 무척 뛰어났으며, 억새풀로 뒤덮여 있는 정상은 오늘 산행구간 중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전라남도 구례군과 전라북도 남원시의 도계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 남원은 한국 문학 작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춘향전의 무대인데, 그 중에서도 연못과 어우러진 오작교와 광한루의 풍치가 아름다움을 더하며 춘향과 이도령이 만난 곳으로, 매월당 김시습의 한문 단편 소설 만복사 저포기도 남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만복사 저포기는 살아있는 남자인 양생과 죽은 처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도쿄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그의 단편 소설집 금오신화에 실려 있다. 국내에는 김집의 한문 소설집에 필사된 것이 실려 있으며,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남원에 양생이라는 늙은 총각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만복사에서 방 한칸을 얻어 외로이 살고 있었다. 양생은 젊은 아낙네와 처녀들이 모여 탑돌이 하기 전날 불당의 부처님에게 배필을 구해 달라고 빌다가 부처님과 저포(백제 때 있었던 윷과 비슷한 놀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기에서 진 부처님은 그에게 탑돌이를 하러 온 처녀와 사랑을 하도록 주선하였는데, 그 처녀는 난리 중에 원통하게 죽은 처녀로 이때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며칠간의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귀신 처녀는 저 세상으로 돌아가고 양생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장가들지 않고 처녀의 명복을 빌면서 여생을 마쳤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알다시피 춘향전이 여자인 춘향이가 남자인 이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사랑 이야기로 만복사 저포기와 함께 남원을 그 무대로 삼고 있지만 춘향전 만큼 알려지지는 않았다.
일출을 포기하고 기념촬영을 끝낸 뒤 가져간 간식을 간단히 먹고, 5시 24분 출발하여 다음 봉우리에 도착하니 멀리 구름사이로 해가 솟아 올라왔다. 이때가 5시 35분, 조금만 일찍 날씨가 맑았다면 멋진 일출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텐데...
만복대에서 1km 지난 지점을 5시 41분에 통과 하였으며, 5시 49분경에 단체 산행팀 30여명이 정령치에서 만복대로 올라오고 있었다.(오늘 산행에서는 이 팀을 제외하고는 3명 밖에 보지 못했음) 5시 53분에 산불감시초소에 도착한 후, 정령치(1,172m)에는 5시 56분에 도착하니 이곳 정령치 이정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그러면 이곳 정령치에 얽힌 내용을 살펴보면, 지리산 역사의 첫 장은 달궁의 마한 왕조가 펼쳤다. 즉 마한의 한 부족이 심원계곡으로 들어와 달궁마을에 궁전을 짓고 살았는데, 정령치는 기원전 84년(서산 대사의 '황령암기'에는 기원전 78년 이곳에 도성을 쌓았다고 기록됨)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정장군을 이곳에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또 하나 이와 비슷한 유래를 가진 것으로 황령재가 있으며, 또한 노고단 입구의 성삼재와 바래봉 남쪽의 팔랑재도 각각 각성받이 3명 장군과 8명의 병사들이 지키던 수비성터라는 얘기가 있다.
그렇지만 마한에 관한 구체적 역사기록은 그리 많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공식적 역사기록으로 보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 26년(서기 8년) 10월에 백제군에 의해서 마한의 국읍이 함락되고 이듬해 4월 원산성과 금현성 등 나머지 두 성마저 정복당해 결국 마한이 멸망한 것으로 나온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편) 그러나 이 기록과는 달리 부족국가 마한이 그 후에도 계속 존속된 듯하다.
온조왕 34년(서기 16년) 10월말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에 웅거하며 백제에 반역하다가 토벌당한 기록과 신라 탈해왕 5년(서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에서 항복했다는 기록(모두 '삼국사기'에 나오는 걸로 보아 또 3세기 후반 중국과 교류한 점이라든가 4세기경 마한의 일부 세력이 전라도 해안에 진출하였다는 기록)일본서기 등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마한의 잔여 세력이 멸망 후에도 계속 항거 유랑하며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심원 계곡 달궁 마을에 일종의 망명 국가로 쫓겨 들어와 궁전을 짓고 살았다는 마한의 한 부족 국가도 혹시 이들 유랑의 무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지리산 달궁의 마한동성은 백제 온조왕의 마한 정복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추정하고 지리산의 마한왕조는 후에 지리산이 김해 가락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걸로 보아 가야세력에 의해서 정복된 것이 유력한 것 같으며, 아무튼 확실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이 부분은 더욱 밝혀져야 할 것 같다.
정령치 휴게소 샘터에서 시원한 냉수를 한잔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은 후 다시 산행을 하여 계단을 올라가니 길 양쪽에 철쭉이 자라고 있으며 경사가 심한 길을 올라 고리봉(1,304.5m)정상에는 6시 17분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으며 정령치 0.8km, 바래봉 8.8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며 길 주의 지점이다. 여기서 길을 잘못 들어 오른쪽으로 가면 계속 능선이 되면서 세걸산과 바래봉으로 가기 때문에 대간은 반드시 좌측 능선을 따라 하산을 하여야 한다.
성삼재에서 고리봉까지는 거의가 잡목과 산죽 등이었지만 고리봉을 지나면서부터는 거의 소나무 숲에다 둥글레와 철쭉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고리봉에서 고촌까지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다. 고리봉을 내려와 60번 지방도로에 도착하니 수당 이종우 선생 송덕비가 길옆에 세워져 있으며 여기서 좌측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다시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 오름길은 737번 정령치 연결 도로이고, 우측길은 남원가는 60번 지방도로가 있다. 이때 시간은 어느덧 7시 13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 지리산 자락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다.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리산의 높은 산군인 신선의 천상세계에서 벗어나 속세의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60번 지방도로를 따라 고촌, 주촌 마을로 이어진 지방 도로가 대간의 주릉인데 이곳 들판에는 안개꽃을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다시 산으로 오르는 길목격인 가재마을이 나온다.
가재 마을 직전 덕치리 주차장에서 좌회전하여 길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측길로 접어들면 된다. 가재 마을에는 옛날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길손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식수로 마시기에는 곤란한 것 같으며. 우물 옆길로마을을 돌아가자 뒷산에는 노송 4그루가 있고,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비석에는 당산제전이란 글과 희사명록과 노치라는 글씨가 씌여 있으며 희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옆에는 천룡 토지신위라는 글이 새겨진 무덤 비슷한 것도 있으며 7시49분에 도착하여 여기서 아침을 먹기로 한다. 8시 20분 출발하여 계속되는 오르막을 올라서니 8시 55분 삼각점이 있는 수정봉(804.7m)이다. 정상에는 철사줄로 당겨 세워 놓은 정상을 알리는 기둥과 표지기가 매달려 비바람의 긴세월을 힘겹게 버티고 있다.
그리고 정상은 잡목으로 우거져 주위 조망은 불가능하지만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잡목들이 발길에 걸리는 등산로를 20여분 진행하니 입망치에 도착한다. 입망치를 지난 다음 봉우리에 올라가니 안양서 왔다는 백두대간 단독 종주자 한분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배낭이 무척 무거워 보여 물어보니 열흘간 연속 종주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가 먼저 출발하여 여원재로 간다.
10시 12분 도착한 여원재는 남원과 운봉을 연결하는 고개로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여서 숱한 전쟁을 치른 곳이다.
그러다보니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도 많은데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이곳을 지날 때 백발여인이 나타나 승리를 예견해 주었다하여 여원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는 이 고개에 한 주모가 살고 있었는데 왜구가 들어와 주모를 희롱하니 주모가 부엌칼로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 자결하여 여원치라 부른다고 한다.
여원치 정상 동남쪽 도로 아래에 있는 마애여래불은 이런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더나아가 여원치는 영남과 호남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고개로서 전쟁이나 민란, 반란등이 있을 때마다 항상 쟁탈의 대상이 되곤했다. 그건 1894년 1월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일어선 동학 농민운동 세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동학군의 주요 전투지는 백두대간 서쪽의 호남지방과 충청일부 지역이었다. 이들 동학군이 백두대간 동쪽의 영남지방으로 진격을 시도하기 위해 노렸던 곳이 바로 이곳 여원재, 특히 이 고개 너머 운봉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지방인 삼남을 호령할 수 있는 요지라고 생각한 남원 동학 접주 김개남은 일찍부터 이곳을 손에 넣으려고 고심했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에 들어가 군세를 크게 떨치고 있었다. 이때 운봉군수 이의경은 불안을 느껴 세력있는 지방의 호족들과 단결해 장정들을 모집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이의경에게는 운봉 출신의 박문달이라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 일목장군이라 불리는 자가 있었다.
김개남은 사기 충천한 동학군 1만명을 이끌고 여원재로 진격했지만 동학군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던 박문달은 5천여 명의 병사들을 산마루에 숨겨 놓았다가 동학군을 기습 공격하자 동학군은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남원으로 물러섰다.
결국 동학군은 이 여원재 전투에서 패하는 바람에 영남지방으로는 한발짝도 들여 놓지 못했으며, 여원재는 남원시 이백면과 운봉읍을 좌우에 두고 마을 뒷산 주릉을 따라 대간길이 이어지는데 특히 운봉은 동편제의 탯자리로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은 판소리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홍록과 형의 고수를 하다가 형에 버금가는 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은 송광록이 바로 이 마을 태생이며, 판소리의 여류 명창이었던 박초월이 태어나고 소리를 가다듬은 곳이다.
그리고 판소리 200년사에서 가장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판소리계의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송만갑도 구례에서 태어났지만, 송광록의 손자로 이곳과도 무관하지 않으니 비전마을은 명실공히 우리나라 판소리 동편제의 탯자리로 불리고 있다.
해학과 풍자와 특유의 음조로 가장 한국적인 음악이라고도 하는 판소리가 언제 형성되었는지 분명하게 알기는 어려우나 판소리의 발전은 19세기에 급격히 이루어졌으며, 특히 대원군은 판소리 광대의 지위를 명창으로 높여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판소리는 원래 열두마당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신재효가 정리한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등 여섯 마당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부르는 명창의 출신지역, 창법, 조의 구성에 따라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고 있다.
흔히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인 남원, 순창, 구례에 전승된 제를 동편제, 서쪽 지역인 광주, 나주, 담양, 보성 등지에 내려온 소리를 서편제라 하지만 교통이 발달해 소리꾼들이 두 지역을 오가며 공부하면서 지역으로 나누는 것은 유명무실해져 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제의 구분은 부르는 이의 개성, 곧 소릿결을 따라 나누는 것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송홍록 가문의 송만갑으로 이어져 내린 남성적인 소리를 동편제, 박유전, 정정렬, 박동실로 이어지는 여성적인 소리를 서편제라 부르는 것이다.
여원재에는 해발 470m라는 표지판과 함께 제법 큰 돌장승이 세워져 있고 길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길 옆의 사찰에 들어가 물을 한잔씩 마시고 물통에도 식수를 보충한 후 표지판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후 10시 27분 출발한다.
잠시 후 장치 마을의 장등재에서는 길 찾기에 유의를 해야 될 지점이며, 논둑에 큰 뽕나무가 한 그루 있으며 그 옆으로 지나 가는 길이 바로 백두대간 길이며, 소나무 및 묘지 있는 곳을 지나 계속 산등성이를 타면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마침 뽕나무 오디가 검게 익은 것을 보고 한동안 맛있게 따 먹고 놀다가 갔다.
고남산으로 가다보면 산을 개간하여 감나무를 심어놓은 곳이 있으며 앞에 산은 산불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이며 철탑이 두 개 세워져 있는데 오른쪽 길로 하여 오른쪽 철탑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12시 16분에 고남산 암릉 시작지점에 도착하였으며 날씨는 무덥고 바람은 불지 않고 오르막은 계속되어 피로는 쌓여갔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12시 24분에 출발하여 846.4m의 고남산은 12시 30분에 도착하였다.
정상에는 국방부 지리 연구소에서 설치한 대삼각점이 있었으며 이 표설을 파괴하는 자는 의법처단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통신시설과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북쪽으로는 88고속도로가 바라다 보인다.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점심을 먹고 12시 59분 사치재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길은 통신시설 관계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 있었으며, 세번정도 포장길과 지름길을 거친 후 지루한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매요리 마을이 나온다.
매요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매요 목기공장이 있으며, 여기서 물을 보충하고 나서 다시 매요마을 상점을 거쳐(특히 상점 앞에는 줄을 쳐서 지나가는 산악회 마다 리본을 걸 수 있도록 상점주인이 배려를 해 두었음) 매요경로당과 매요 교회를 지나 운성초등학교(폐교)에 도착하니 마침 순천과 부산에서 각각 혼자서 백두대간을 타시는 분이 쉬고 있길래 우리도 합석하여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두분은 고촌마을에서 운성초등학교까지가 오늘 일정이라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차를 가지러 간다고 했다.
여기서 큰도로를 따라 10여분후에 도착한 곳은 장수군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 삼거리에서 삼거리 목기공장 옆으로 절개된 언덕을 오르면 능선을 따다가는 길이 있으며, 여기서 몇 개의 낮은 산을 오르내리고 나면 88올림픽 고속도로가 나오고 사치재에 도달하였다.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계속 흐르는 땀과 차오르는 숨을 참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행들도 어느 정도 지친것 같고 해서 어떻게 할까 물어보니 여기에서 끝내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세상은 어차피 더불어 사는 것, 편한 자가 있으면 힘든 자가 있듯이, 내가 좀더 갈 수 있다고 상대방의 어려움을 잊는다든지 무시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오늘 산행은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쏟아났다고 할까. 그것은 우리회원님들의 따뜻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해 주시고 전화를 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산행을 마친것 같습니다. 그리고 특히 산행대장님께서는 직접 집으로 전화를 해서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위로를 해주신데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겨내며 얻은 것은 모든것은 오르면 다시 내리막이 올 것이고 내려가면 다시 오르막이 있을것이라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아마도 사람의 만남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남원시 아영면 88올림픽 고속도로, 해발 499m인 사치재에 3시 25분에 도착하여 고속도로를 지나 다음 구간 입구를 확인하는데 입구에는 또다시 뽕나무 오디가 많이 있어서 오디를 따 먹고 지리산 휴게소에 대기하고 계시는 사업이사님과 만났다.
하산 후 간단히 한잔 한 후 4시 48분에 출발하여 7시 30분경 경주에 도착하였다. 1박 2일 동안 운전을 하시느라 고생하신 고성안 사업이사님께 진심으로 노고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2구간을 종주하신 종주자 여러분에게도 무사히 산행을 하신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배웅과 환송에 참여해 주신 회원님들에게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