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및 환경>
면사무소에서 동남쪽으로 1.5Km 해발83m 지점에 동산을 등지고 동남쪽에 우뚝 솟은 선방산의 줄기가 마을 뒤를 감돌아 북으로 갈뫼봉(탑산)을 끝으로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군위 오곡리, 서쪽에는 앞산이 나지막하게 있고 그 뒤로는 구안도로가 지나가고 도원1리와 신평리가 있다. 성씨로는 분성배씨 40여호, 아주신씨 9호 경주손씨 6호 기타 성씨로 옹기종기 평화롭게 살고 있다. 1960년대 만해도 약100호에 인구 600여 명에 이르렀다. 농사에는 미맥과 삼 목화 양잠이다. 수리시설이 빈약하여 적기에 모내기를 못하고 대파(기장,조,콩,기타)를 하게 된 곤궁한 마을이었다. 1960년 후반 산을 개간하여 뽕나무를 심어 군내에서 양잠 우수마을로 지정되어 전동민이 양잠사육으로 소득을 보았다. 1967년 봉듬 양수장 설치로 300여두락 이 전환 답이 되어 생활이 넉넉해지자, 대학생이 없는 동리였는데 대학생이 면내에서도 가장 많을 때도 있었다. 양잠도 인력이 많이 들고 사양길에 이르므로 80년 중반에 사육농가가 없어졌다. 1990년도 중앙고속도로 개설로 전답 약 200여두락(40,000평)이 편입되어 대금 15억여원으로 객지에 있는 자녀들의 집 마련과 농가부채도 정리했으니 좋은 일인지 아닌지 다음 세대들이 알 것이다. 지금은 한우 비육과 고추 마늘 양파를 경작하여 농가소득을 높이고 있다. 1996년에 군 보조금 2,000만원을 지원받고 호당 155,000원으로 면 소재지 광역상수도를 이용하여 식수로 사용케 되어 매우 편리하다. 봉덤 양수장과 두룸못을 이용하여 농사짓는데도 어려움을 못느끼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잘 살아가는 순박한 농촌 마을이다,.
<마을이름유래>
마을 형성은 1592년 선조25년 임진왜란 후 전라도 강진에서 분선배씨 배경운이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었고, 그후 1907년 의성 용연에서 아주 신씨 신홍식도 세거하고 있다. 따라서 손씨 이씨 김씨 박씨 등 67호가 정답게 살아가고 있다. 마을 앞산모양이 두루미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두름테라고 불렀다고 하며, 현재는 두루미곡(鵠)자와 고개현(峴)자를 써서 곡현이라 부른다. 행정구역 개편시 도원2동이라고 하며 대구 춘천간 중앙고속도로가 마을농토 중앙을 관통하고 있고, 각종 산업체가 들어와 공장을 짓게 되어, 앞산은 과거의 두루미 모양이 차츰 사라지고 있다. 두룸못을 중심으로 위쪽(동쪽)을 상월동이라 하고 아래쪽을 하월동이라는 전설이 있으나, 현재는 마을 흔적이 없고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중앙고속도로 IC가 있으며, 오늘도 차들이 질주하고 있다.
○ 전설-임금등(임금바위) 선방산 상봉에서 동쪽으로 6부 능선 쯤에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음지쪽에 임금등 혹은 임금바위라고 부르고 있는 바위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 일본인이 바위를 깨기 위해 쇠망치를 내리치니 맑은 하늘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며 소나기가 쏟아져서 겁을 먹은 일군들이 달아났다고 한다. 다른 한설은 조문국때 임금이 난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피신했다는 설도 있다.
<주요지명>
○ 절샘 장포동산 27번지에 위치한 절샘은 옛날부터 절 또는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그 흔적으로 아직까지 방아호박, 고분, 그릇조각 등이 흩어져 있으며, 장포동 산 끝 자락에서 솟아나는 샘은 현재도 시원한 물이 넘쳐 흐르고 있다.
○ 묵밭 땔감나무를 하러 다닐 때 힘이 들면 쉬어가던 곳이다. 갈골산 중턱에 위치하며 샘물도 있어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던 곳이다. 지금도 약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서낭당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1.2km 지점에 위치한 서낭당은 옛 면소재지에서 탑리로 가는 지방도가 생기기 전에 구 비안에서 구장터(도원1리)를 지나 서낭당과 덕은동을 거쳐 탑리로 통하던 면(面) 통로였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면소재지 5일장을 보러 사부래이,덕은동,탑리 부근 주민들이 이곳을 지나 다녔으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돌을 주워서 던지거나 침을 세 번 뱉으면서 하루의 일이 잘 풀리기를 서낭님께 기원하였다. 서낭당에는 오래 묵은 고목이 몇 구루 있었는데, 6.25 사변후 연료난이 극심한 때 미신을 믿지 않은 종교인이 들어 와서 베어갔다는 애기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돌더미와 잡목이 우거져 있다. 1980년 후부터는 인적이 아주 드물다. 지금은 오는 이 없이 쓸쓸히 옛 추억만을 간직한 채 고개를 지키고 있다.
○ 장포동산: 갓골산27번지에 절 또는 동리가 있었다고 하며 배씨 문중 소유다.
○ 갓골산: 마을 북쪽 끝골
○ 갓양지산 : 남쪽으로 향하여 양지바른 산
○ 서당갓산 : 서당학동들이 연료 해결을 위해 산을 매입 운영한 산
○ 팥밭골산 : 옛날에 산자락에 팥을 많이 심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 큰솔밭(대송전) : 지금도 큰 소나무가 있으며 예부터 소나무가 많아서 큰솔밭이라 한다.
○ 건너골산 : 견능골 도랑을 건너서 간다고 붙인 이름이다.
○ 갈곡산 : 갈곡산에서 칡이 많아서 갈곡산이라 칭함.
○ 진동산 : 갈곡산 끝자락이 길게 펼쳐져 있는 산이다.
○ 밤갓산 : 샛터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
○ 앞산 : 두루미 형태를 하고 있는 산으로 두룸태마을의 상징적인 산이다. 1990년 이후 중앙 고속도로 개설,공장부지로 일부 편입되어 면모가 사라지고 있다.
○ 불당골 : 갈골산 뒷산이다.
○ 양. 음지 : 마을 가운데 도량을 중심으로 남은 음지,북은 양지 마을이다.
○ 샛터 : 6가구가 살고 있다. 손씨들이 이주해서 살고 있다.
○ 논샘골 : 논에 샘이 있고 10가구 신씨들이 살고 있다.
○ 돌곡 : 마을에서 남쪽으로 300m 밭의 돌이다. 약 10톤 가량의 바위 한 개가 있다.
○ 말렝이 : 현재 회관 정자나무 위쪽을 가르켜서 말래이라고 한다.
○ 모산골 : 두룸못 위쪽부터 시작하여 서낭당 못 밑까지를 말한다.
○ 건능골 : 윗 건능골과 아랫 건능골이 있다.
○ 방매돌 : 앞산과 오곡들 사이를 가리킨다.
○ 밑봉들 : 산끝이라는 뜻이다.(현 중앙고속 ic 부근)
○ 고치걸 : 상여 보관집 부근이며 마을에서 방매정미소 가는 서쪽으로 동네 끝 위치이 다.(상여집은 1991년 중앙고속도로 편입되었음.)
○ 맡잔등 : 배씨재실 뒤쪽으로 위치, 말허리 같다고 붙힌 이름이다.
○ 귀축 : 논샘골 뒤쪽으로 장대신씨 묘소부근이다.
○ 뒤끝들 : 마을 뒤에서 위치하고 현재는 중앙고속도로에 편입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 ( 현 중앙고속도로 IC 부근)
○ 샘, 샛터샘 마을이 형성되고 가장 먼저 생긴 샘이다. 1966년 전 만해도 옹달샘 앉 아서 바가지로 물을 펐다. 샘 뒤에는 수백년의 향나무가 있다. 그 외 샘으로는 골안샘 -중앙샘-음지샘-집앞샘-논샘이 있다
○ 쒸말뱅이 : 선방산 꼭대기에서 서북 방향으로의 능선으로 일제때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쇠말뚝을 박은 것으로 추정된다
● 선방산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6km 지점에 위치한 선방산은 도리원 초등학교 교가의 가사에 '푸르른 선방산'으로 시작된다. 꼭대기는 아주 평평하고 넓으며 조문국 시대에 임금이 피신한 임금바위가 있고 봉화대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저수지>
○ 두름못 곡현지 마을이 형성되고 최초로 생겼으리라 추정되며, 몽리면적이 약 180두락이였으며 1940년 일제 말엽에 상답82-1,83번지의 800여평을 못부지로 확장하였다. 1951년 에는 수리계장을 지내던 신형섭이가 못 준설공사를 하였으며 1960년에는 수리계장 배학근이 보조사업으로 장비를 투입하여 못 준설과 못종에 나무를 콘크리트로 교체하였다. 중앙고속도로 준공과 도원1리 문화마을 건립공사로 많은 토지가 편입되어서 몽림면적도 많이 줄어 들게 되었다. 옛 문소지도에 두음지로 기록되어 있다.
○ 서낭지 1943년 일제말 구장직을 맡고 있던 배영관씨가 주관하고 오성범의 감독하에 서낭지를 축조하게 되었다. 당시 일손이 모자라서 초등학생(10~13세)의 어린 학생들도 부역에 참가하여 흙을 나르기도 했다. 또 청장년들은 흙 한짐을 나르게 되면 콩이나 팥알을 1개씩 주고 작업이 끝나고 난 후 그것을 계산하여 노임을 주었다.
○ 도오지 도원리와 군위 오곡 사이에 1983년경에 의성 군비로 조성했다. 지역은 의성군이나 대다수 군위 오곡사람들이 경작하고 있다.
○ 모산지 약 500평 정도의 못을 축조하기 위하여 몽리자 40여명의 자력으로 매일같이 지게로 흙을 운반하여 준공을 보게 되었다.
○ 갈골지 1966년 정부의 밀가루 사업으로 구못밑에 약 800평 정도의 부지에 현 갈골지를 완공하게 되었다
○ 소갈골지 1973년 새마을 소득자금 100만원 지원금으로 준설하게 되었으며, 면적은 약 300평 정도로 산자락 끝에 위치하고 있다.
○ 못골못 1910년 신홍식이 혼자서 완공을 했으며 몽리 면적은 10여두락이고 상하못 2개가 조그마한 골짜기에 있다고 못골못이라고 부른다.
♠♠ 선방산의 애화 면사무소에서 동쪽 봉이 갈뫼(탑산). 남쪽에 우뚝선 봉이 선방산이다. 도리원초등학교 교가에 "푸르른 선방산"으로 시작된다. 곡현리에서 선방산 가는길은 못골못을 지나 능선을 올라서면 갈곡산 중턱 문바위 골이다. 그 밑에 따듯하고 지갯짐 쉬기가 안성맞춤이다. 골 양지쪽 길을 오르면 묵밭이다. 샘도 있다. 양지쪽 경사 30Ҋ, 깊이 10m 정도의 잔디밭이다. 여기서 지게 짝지타기를 즐겼다. (스키타기 같다) 갈곡산 샘물은 엎드려서 입을 대고 마셨다. 약 100m 오르면 대추 남뱅이다.(대추가 많다) 동쪽을 내다보면 일산 지역이 한눈에 보이고 오동산 그 뒤로 금성산과 오토산이 보인다. 숨을 돌리고 동남쪽 길따라 오르면 손골(좁은골), 100여m 가면 나무꾼들의 유일한 놀이터로 약 100~400평 넓은 마당이 금의네 마당이다.(옛날 금의네 마당이 넓다는 뜻) 여기서 놀며 짱치기(아이스하키) 놀이에시간 가는 줄 몰랐다. 후렴에 "얼룩-어룩버"했다. 남쪽 능선을 따라 무덤(고총)을 지나가면 뒷 바람 맞이다. 저 멀리 서쪽바람이 한 몸에 닥친다. 많은 나무꾼들이 나무짐 진채로 바람에 날려 나무짐은 파산되니 다시 겨우 모아 짐을 챙기니 반 정도 였다. 엄동설한이라 눈코 뜨지 못하고 울면서 하산하기가 일쑤였다. 급경사를 올라가면 "쒸말뱅이"다. 일제때 한국의 혈을 끊기 위하여 철주를 박은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앞에 웅장한 산이 "선방산"이다. 상봉에 측량 삼각점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여 봉화대도 있었다 한다. 사방을 둘러보면 산들이 눈밑으로 보인다. 이산은 위쪽이 아주 넓다는 것이 특징이다. 산 중에 샘이 있다. 남쪽 중간에 지보사가 있으며 동쪽 음지에는 임금등이 (임금바위) 있고,l 옛날 임금이 피신했다 한다. (조문국시대로 추정된다) 나무꾼들이 흩어져 온종일 낙엽과 싹다리를 한짐 해가지고 샘물 한모금 마셔 배고픔을 달래면서 하산한다. 겨우 집에 도착할 때면 갱죽 한사발로 허기를 달래고 나무짐을 다시 가다듬어 새벽 일찍 도리원 시장에 팔로 간다. 음식집에 팔면 외상이다. 조금 있다 오라. 얼마나 시장한지...겨우 기다렸다가 반은 돈으로 받고 나머지는 술값으로 대체한다. 때는 1947년경이다. 나무 한짐에 40전 정도다. 쌀 한말에 3원정도였다. 8~9km 거리 선방산을 아니 오를 수 없다. 매일 같이 반복해야 식구들이 연명을 할 수 있다. 그후 1967년에 정부에서 개간을 권유할 때다. 동리 청년들의 뜻에 따라 동장 배덕식은 개간 신청을 하게 되었다. 이 산이 곡현동산이다. 소재는 군위군으로 되어 있기에 군위 군청에 가서 허가를 받아 개간 희망자를 받아 밀가루 사업으로 개간하게 되었다. 너무나 높은 곳이라 밀과 뽕나무를 심었으나 잘 되지 않았고, 거리관계로 상주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리하여도 여의치 않아 1년 후에는 하산하고 말았다. 잘 살아 보자던 젊은 꿈은 사라지고 고생만하고 애닯은 사연만 남긴 채 객지로 떠나갔다. 그 후 군위 사람에게 매각하고 말았다. 이 산의 고마움과 사연 많은 애환을 곡현 노인들과 선방산만이 간직한 채, 쌍계천만 끼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 노거수 : 정자나무(느티나무)--마을회관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의 수호목으로 모시고 있다. 여름에는 동민들의 휴식처로 1960년 이전에는 단오절에 그네를 매고 흥겹게 놀던 장소이다.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그곳에 가서 쾌유를 빌기도 하였지만 수령이 약 400년 쯤 되어 원줄기는 죽고 일부만 살아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 첨모재 소재지 : 봉양면 도원2리 곡현산록
분성배씨 입향시조 배경운을 추모하는 재실로 문중에서 협력하여 1987년에 건립하였다. 한집에 벼 한말(당시 약3000원 상당)을 거출하였다. 목재는 춘양목으로 3칸 팔작지붕으로 좌우로 방을 두고 가운데 마루를 깔아 문중 회의 장소로도 활용된다. 사방 돌담으로 성을 쌓듯 두르고 솟을 대문과 양쪽 작은 건물로 이어 재실 면모를 갖추었다. 대청의 청모재기는 봉양면에서는 찾기 힘들 정도로 크고 글씨 또한 뚜렷한 글체로 뛰어났다. 방예 후손인 배문준이 첨모재 현판과 첨모재기, 네 기둥의 주련글씨를 짓고 직접썼다. 첨모재기는 곡현 분성배씨의 정신적 표상이며 단합과 협동심을 불어넣는 공동체 역할을 하며 건전한 모임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 탑골사지 도리원에서 안계방향 안실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1.3Km 된느 곳에 탑골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한때 암자와 탁이 있었다하여 탑골이란 지명으로 불러졌으며, 신작로가 열리지 않았을 때 서울가는 길이 탑골마을 앞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거주한 곳으로서 지금까지 불상의 좌대가 일부분 남아 전한다.
● 모선암 도리원에서 동부지역 물길과 군위오곡리 물길이 마주치는 낙동강 길목에는 냇물과 산세가 마치 신선을 연상케 하여, 경관이 뛰어난 이곳을 모실배이 라고 이름하였다. 신선이 있음직한 산중턱 허리에 백월당 스님은 당집을 만들어 상당은 정월보름을 기하여 마을 주민들이 금기하는 뜻으로 15일간 출입을 금하고 하당은 상여집으로 토속신앙을 기초로 하였다가 토굴을 만들어 부처를 모신 것이 모선암의 시작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냇물을 건너는 돌다리는 누구나 모선암 못지 않게 추억이 남아 있다 안정감 있는 긴 돌을 일곱장이나 이어 놓아, 아무리 큰물에도 떠내려 가지 않고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면서 굳굳히 모선암 가는 길을 자신있게 내어 주고 있다. 절의 사적기는 없어도 돌다리만은 모선암 역사를 알고 대신하고 있을 것이다. 구전으로 1750년대 즉 250년 전의 사찰이라는 설과 1880년 경이라는 두가지 설을 갖고 있으니, 150년 내지 200년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자료제공 : 도원1리 서강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