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조기가 살던 바다, 연평도 평화기행"
[알림] 섬학교 10월 답사 참가 안내 기사입력 2012-09-03 오후 1:41:31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의 제8강, 10월 답사는 <황금조기가 살던 바다, 연평도 평화기행>입니다. 10월 6일(토)과 7일(일)의 1박2일로, "황금어장으로 역사의 한 시절을 풍미했으나 지금은 분단을 온몸으로 안고 사는 섬" 연평도를 찾아갑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연평도 포격사건이 나기 전, 인천문화재단 후원으로 이 섬에 머물며 연평도 조기 파시의 역사를 취재하여 1년 동안 경인일보에 연재한 후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란 책을 펴내기도 했으니 연평도와 인연이 각별합니다.
지난 3월 개교한 <섬학교>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들을 걸으며 사유하고, 소통하며 배우는 학교입니다. 섬학교의 섬 여행은 다리나 제방 등으로 육지와 연결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 위에 있는 섬들만을 답사합니다. 크든 작든 섬에서의 이동 수단은 가급적 두 발에 의존합니다. 섬 여행은 가급적 월 1회 떠나며, 작은 섬은 걸어서 일주, 큰 섬의 경우 섬의 가장 걷기 좋은 길 걷기를 기본으로 합니다.
섬에 남아있는 문화유적, 유배지, 당산, 어부림, 마을 숲, 당집, 사찰, 설화의 무대 등도 답사합니다. 해상 경관이 좋은 섬은 어선을 이용해 해상 일주도 하며, 마을 안길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또 답사 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섬과 소통합니다. 섬의 토속 음식 맛보기, 섬 노인들로부터 특산물 구매하기 등으로 섬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오도록 합니다.
▲ 연평도 가는 길목에서 반겨주는 얼굴바위. 여객선을 타고 소연평도에 이르면 볼 수 있다. Ⓒ옹진군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연평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눈물의 연평도
오늘 연평도행 여객선은 두 개의 바다를 건넙니다. 물의 바다와 안개의 바다. 물의 바다를 건너 왔으나 연평도는 여전히 안개속입니다. 연평도의 사람도, 삶도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폭격 이후 섬을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왔지만 섬은 여전히 긴장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 그 경계에서 연평도는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연평도 사람들의 삶 또한 그렇게 흔들리며 부유합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는 모순, 그것은 삶의 모순이자 생애의 모순이고, 감히 형용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북한의 폭격으로 무고한 생명이 살상당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된 그날 이후 연평도 주민들은 한동안 피란민이 되어 떠돌아야 했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민간인을 폭격한 북한의 행태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고 천인공노할 만행입니다. 주민들 중에는 한국전쟁 때 연평도로 피란 와서 정착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살아생전 다시 피란민이 될 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평화롭던 시절 나그네는 몇 번인가 연평도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섬을 걸어서 일주하기도 했었습니다. 또 연평도 조기 파시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한동안 연평도에 머물기도 했었습니다. 낯선 나그네에게 술과 밥을 내주시던 주민들을 기억합니다. 그때 연평도는 더할 데 없이 평화롭고 고요한 섬이었습니다. 그 따뜻한 환대와 평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때의 기억이 꿈처럼 아득합니다.
나그네가 처음 연평도란 이름을 들은 것은 '눈물의 연평도'란 노래를 통해서였습니다. '눈물의 연평도'를 만든 것은 1959년의 태풍 '사라'였습니다. 그때 연평도 어장으로 조기잡이를 갔던 많은 어부들은 끝내 바다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퇴락했지만 연평도는 역사의 한 시절을 풍미했던 섬입니다. 오랜 세월 연평도는 조기의 섬이었습니다. 영광의 칠산 바다와 함께 연평도 근해는 황해 최대의 조기 어장이었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습니다. 수백억 조기 군단이 몰려오면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일 정도로 황금어장이었습니다. 조기 철이면 연평도에는 파시(波市)가 섰습니다. 파시 때 연평도에는 수천 척의 어선과 상선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한 배를 타면 천배를 건너다녔다"고 했습니다. 연평도는 주민과 선원, 상인들 수만 명이 북적거리는 하나의 해상 도시였습니다.
남북으로 갈린 연평도
오랜 세월 동안 연평도는 해주 문화권이었습니다. 연평도에서 해주는 30km 거리에 불과합니다.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후 해주가 북한 땅이 되면서 연평도는 인천 문화권으로 편입됐습니다. 그때 연평도와 같은 면을 이루고 있던 대수압도, 소수압도 등은 이제 북한의 영토입니다. 연평도에서 1.6km 거리에 북방한계선(NLL)이 지납니다. 보이지 않는 선 하나로 인해 손 내밀면 잡힐 듯 가깝던 이웃 섬마을이 갈 수 없는 먼 나라가 돼버렸습니다. 연평도는 옛날부터 군사적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왜구와 해적들을 감시했습니다.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인천에서 뱃길 122km의 먼 거리지만 연평도는 이제 생활권도 행정구역도 인천입니다.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두 개의 유인도를 함께 이르는 명칭입니다. 크다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연평면의 본섬인 대연평도 또한 가로 3.7km, 세로 2.7km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입니다. 섬은 동북쪽의 낭까리봉뿌리, 남서쪽의 가래칠기뿌리, 서북쪽의 개모가지낭뿌리, 세 개의 뿌리를 축으로 삼각형 모양의 해안선을 이룹니다.
▲ 한겨울 눈 쌓인 모습이 마치 아이스크림 같다하여 아이스크림바위가 되었다. 송곳처럼 생겼다하여 송곳바위라고도 한다. ⓒ옹진군
연평바다에 돈 실러 가세
조기의 섬, 연평도의 조기잡이가 역사에 처음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의 <세종실록> 지리지입니다. "토산(土産)은 조기[石首魚]가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난다." (<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해마다 봄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합니다. 1960년대 후반까지 연평 바다는 수천 척의 배들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어선들이 몰려오면 연평도에는 파시가 섰습니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임시로 형성되는 바다의 시장, 파시. 파시 때면 선구와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서고 어선을 쫓아온 '물새떼'가 어부들을 유혹했습니다. 한창 때는 색주가만 100여 곳이 생겼고 '물새'라 부르는 작부들이 500명도 넘었다 합니다. 파시 동안 작은 섬 연평도는 수만 명의 사람들로 밤낮없이 흥청거렸습니다. 10톤 남짓 되는 중선(안강망 어선) 한 척이 한 번 조업에 참조기를 100동(10만 마리)씩 잡는 것도 예사였습니다. 1800년대 중반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조기잡이 선단이 연평도로 몰려든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연평도 조기파시의 역사는 조선 중기부터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910년에는 황해, 경기, 평안도 등지에서 300여척 이상의 중선 배들이 몰렸습니다. 1934년에는 어선이 600~1,000여척, 1936년에는 조기 안강망 어선 1,000척과 운반선 300척, 봉선 700척 등 2,000여척의 선박이 몰려들었습니다. <매일신보>는 파시가 절정에 달한 1943년 4월 말, 연평도에 무려 5,000여척의 배들이 몰려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44년에도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97억 마리였습니다. 1947년 파시 때 연평도 어장에 동원된 어부들은 연인원 9만 명에 달했습니다.
사흘 벌어 일 년 먹는 작사판
당시 연평도에서는 파시보다 작사(作詐)란 말을 주로 썼습니다. 연평파시가 아니라 연평작사(作詐)라 했습니다. 지금도 연평도 노인들은 "작사 때..."로 칭합니다. 작사(作詐)란 '거짓을 만든다'는 뜻이니 없던 일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그런 용어가 쓰였을 것입니다.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무대', 이전투구, 연평 작사에서는 물건을 거래하며 속고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사흘 벌어 일 년 먹는" 장사판이었느니 오죽했겠습니까.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깊습니다. 1634년 5월,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출하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잠시 연평도에 정박합니다. 간조 때 임 장군이 가시나무를 찍어 안목바다에 꽂게 하였는데 물이 빠지자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수많은 조기가 걸렸다고 전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후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바다의 어업의 신으로 등극했고 연평도를 비롯한 섬과 어촌지역에는 임경업 장군의 신당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의 연평도 방문 이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연평도 특산물로 조기가 기록되어 있고 <중종실록>에도 이미 연평도의 어전을 둘러싼 다툼이 등장합니다.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전설은 전설 나름의 생명력을 지닙니다. 그래서 전설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파시 철이면 술집 100개 작부만 500명, 일본 게이샤까지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연평도의 여자들도 바빠졌습니다. 연평도에 정박한 배들은 물과 식량, 장작 등을 보급 받았습니다. 여자들은 이때를 틈타 물을 팔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갯가에 늘어섰습니다. 파시 때 연평도에는 요정이나 요릿집 같은 색주가만 100여 집 이상이 생겼다고 합니다. 한집에 작부가 5명씩은 됐으니 줄잡아 500명이었습니다. 이때가 되면 마을의 가장 앞줄, '갱변' 쪽 집들은 장사꾼들에게 한철 세를 놓고 자신들은 마을 안쪽 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이사를 갔습니다. 그때부터 가정집이 색주가로 바뀌었습니다. 해변인 '갱변'에는 판자로 지은 가건물도 생기고 그곳에도 색주가가 들어섰습니다. 색주가는 주인의 고향에 따라 인천옥, 목포옥, 해주옥, 군산옥, 비금옥, 위도집, 흑산집 등의 간판을 달았습니다. 일제 때는 일본 유곽도 있었고 일본 기생들도 많았습니다.
1930년대 연평파시에는 상점 중에서 요릿집과 음식점이 가장 많았습니다. 어느 해에는 요릿집에 일본 기생만도 50명이 넘었다 합니다. 카페도 있었으며 여관, 대서소를 비롯해 이발관이 9개 목욕탕도 3개나 있었습니다. 파시 때면 술 담글 줄 아는 주민들은 막걸리와 청주를 담가서 내다 팔거나 색주가에 댔습니다. 쌀밥은 못 먹어도 술은 쌀로 빚어다 팔았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피항해 온 배들이 많을 때가 색주가들에게는 큰 대목이었습니다. 색주가를 비롯한 장사치들은 봄철 조기잡이가 끝나면 미련 없이 섬을 떠났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연평도의 황금시대는 갑자기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순간 그 많던 조기떼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연평도를 찾는 어선도 상인도 더 이상 없어졌습니다. 파시는 끝이 났습니다. 연평 바다에서 조기떼가 사라진 것은 1970년 무렵입니다. 비슷한 시기 칠산 어장에도 조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대규모 선단이 어린 새끼들까지 잡아들인 남획의 결과였습니다. 무차별 포획이 계속되자 멸종의 위험을 감지한 조기떼는 더 이상 사지를 찾아 들지 않고 바다 깊숙이 숨어버렸습니다.
▲ 미군이 촬영한 1950년대 연평도 조기 파시 사진. 연평도 앞바다가 어선들로 꽉 들어찼다. ⓒ섬학교
"다들 똑같은 꿈을 꿔요. 전쟁이 나고 포가 떨어지고 도망가는 꿈."
조기가 떠나면서 연평도의 황금기도 끝이 났습니다. 이제 연평도는 군사적 긴장이 흐르는 작은 섬입니다. 북한의 폭격을 받은 뒤에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섬이 돼버렸습니다. 폭격을 당한 집들 대부분은 철거됐으나 몇 채는 '안보관광'용으로 허물지 않고 '전시중'입니다. 부서진 집들은 처참합니다. 군인과 군부대 공사를 하던 인부 몇 명이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집이 허물어졌는데 주민들의 인명사고는 없었습니다.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 아닌가요. 폭격당한 집 앞에서 궁금해 하고 있는데 근처를 지나던 주민 한분이 그 의문을 풀어줍니다. 그는 식당을 운영한다 합니다.
"마침 여객선이 들어오는 시간이라 동네에 사람들이 없었어요. 천운이었지요."
여객선 시간에 맞춰 주민들은 대부분 선창가로 나갔습니다. 인천에 다녀오는 가족들을 마중하거나 인천에서 보내오는 물건들을 찾으러 갔던 것입니다. 여객선 시간이 아닌 때 폭탄이 떨어졌다면 수십,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끔찍한 재앙이 피해갔습니다. 혹시 북쪽에서는 배가 들고나는 시간을 알고 그때 폭격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도 물건을 받으러 선창가에 나가 있었습니다. 처음 폭탄 소리를 들었을 때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부대에서 늘 하는 사격훈련이려니 했습니다. 하지만 5분 쯤 후 싸이렌이 울리고 방송이 나오면서 실제 상황이란 걸 알았습니다. 불안이 밀려 왔습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싶었습니다." 주민들은 해경 배를 타고 밤새 인천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피난을 나갔을 때는 찜질방에 잠을 자면서도 다시 연평도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천금을 준다 해도 들어가기 싫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평도가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자 주민들 대부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생활 터전이 여기니 해먹고 살게 없는데 어쩌겠어요." 도리가 없었겠지요. 어디 가서 무얼 해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 먹고사는 일 또한 전쟁이 아니던가요. 전쟁을 치를 바에야 살던 터전에서 치러야지요. 다행히 그의 집은 폭격을 피했습니다. 그는 다시 식당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포 소리만 나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폭격 전에는 50년 넘게 포 소리를 듣고 살아왔지만 불안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포 소리 들릴 때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연평도 주민들은 대부분 악몽에 시달린다 합니다. "다들 똑같은 꿈을 꿔요. 전쟁이 나고 포가 떨어지고 도망가는 꿈." 그러면서도 주민들은 설마 하는 기대감으로 살아갑니다. "한 번 쐈는데 설마 또 쏘겠는가 하는 생각이지요."
▲연평도 수호신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서해안 풍어굿 ⓒ섬학교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평화
지금 연평도 주민들은 별로 큰 욕심이 없습니다. 폭격을 계기로 무슨 큰 지원 같은 거 바라지도 않습니다. "큰 욕심 없어요. 옛날처럼 평화롭게 살 수만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그래서 주민들은 보복하자고 들어와 목청 높이는 사람들이 안 반갑습니다.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평화입니다. "여기가 없는 사람들 살기 좋아요. 자기만 노력하면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어요. 남북이 서로 대화도 많이 하고 포 떨어지기 전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하지만 여전히 평화는 안개 속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하니 의욕이 안 생긴다 합니다. 그도 집수리를 하려고 자재를 사다 놨지만 일손을 놓고 있다합니다. 평생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어떻게 집을 고칠 엄두가 나겠습니까. 주민들이 예전에는 뉴스 같은 거 잘 안 봤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늘 뉴스에 귀를 기울입니다. 요즈음은 자꾸 연평도에 더 큰 무기를 들여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때마다 불안합니다. "무기 많이 들어오면 들어온 만큼 더 위험해 질 수 있어요. 여기서 대응 사격 많이 하면 저쪽에서도 포를 더 많이 쏠 거 아네요. 그럼 죽어나는 것은 주민들이지." 주민들은 정부에서 공짜 돈 주는 거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먹고 살 수 있는데 뭘 바래. 그저 평화롭게 살게만 해주면 돼지."
식당 주인은 또 하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연평도에 폭탄이 떨어지고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고 주민들이 피난을 떠날 때 섬에 갑자기 유인물이 뿌려졌습니다. 북에서 날아온 삐라였을까. 아닙니다. 육지에서 들어온 부동산 투기꾼이 뿌린 전단지였습니다. 섬에 남은 주민들은 집이나 부동산 팔 사람 연락 달라는 전단지를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심지어 주민들을 통해 땅을 팔 생각이 없는지 직접 의사를 타진해 오기도 했다합니다. 그 와중에도 부동산을 사들이려는 투기꾼들. 남의 불행을 내 이익의 기회로 삼으려는 자들이 전쟁터라고 왜 없겠는가마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 인간계가 참으로 그악스런 세상이구나 싶습니다.
선착장에는 인천으로 떠날 여객선이 벌써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립니다. 선착장 주변에는 호전적인 플래카드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습니다. 다들 주민들과는 무관한 '외부세력'이 걸어놓은 현수막들입니다. "무자비한 응징..." 따위.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인 것을. 참으로 안타까운 풍경입니다. 분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연평도 주민이라고 어찌 분노가 없겠습니까. 어찌 응징의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주민들은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분노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섬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니 참는 것입니다. 이 섬에 살기 위해서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 소금 간을 한 조기를 엮어서 해풍에 말리면 굴비가 탄생한다. ⓒ섬학교
분노는 장작불 같아 남을 태우기 전에 나를 먼저 태운다!
우리가 이 불안한 시대를 끝내지 않는 한 연평도에 떨어진 폭탄이 내일은 내 머리 위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보복과 응징만 주장할 셈인가요. 우리는 늘 늦게 깨닫습니다. 평화가 깨진 다음에야 새삼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평화는 공기와 같아서 그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까닭입니다.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다보니 우리는 그 소중함을 잊고 살았습니다. 평화가 없다면 우리의 생명, 가족, 재산, 무엇 하나 온전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남과 북 모두가 공멸하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연평도와 이 땅과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보다 이성적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 분노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차가운 철이 달군 철을 자른다 했습니다. 분노는 장작불 같아 남을 태우기 전에 자신을 먼저 태우고 맙니다. 그러므로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평화가 돼야 합니다. 평화는 평화로운 방법으로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이 땅의 가장 절실한 종교는 평화입니다.
섬학교 제8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0월 6일 토요일, 음력 8월 21일>
(출항 시각이 변경되어 일부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06:10 서울 출발 (6시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08:00 인천항 출항
10:00 대연평도 당섬 선착장 도착
10:30 당섬→연평도 남부리 마을 숙소까지 걷기(둘리민박)
12:00-13:00 점심식사(<옹진회수산>에서 주인이 연평바다에서 직접 잡은 연평도산 조기매운탕요리)
[연평도]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에 속한 섬. 연평면에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두 유인도가 있는데 통칭해서 연평도라 부른다. 대소 연평도 합해서 2011년 기준 1,051세대 1,878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유치원부터 초중고, 각 1개씩의 학교가 있다.
[망향비] 연평도 동북쪽 언덕 위의 망향공원에 있으며, 떠나온 고향땅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을 모아 북녘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에 세운 것이다. 북한이 지척인 이곳은 옹진반도가 바로 눈앞에 있어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북한의 해주 시멘트공장의 연기까지 보인다고 한다.
[조기역사관] 연평도 역사와 함께하는 조기잡이 풍물을 재조명하기 위해 만든 전시관이다. 조기잡이배 모형들과 조기 파시 때의 연평도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조기역사관 관광전망대에서는 병풍바위를 비롯해 옹돌 갱변의 기암괴석 절경을 볼 수 있다. 1999년 6월 15일 있었던 서해 교전지가 코앞이다.
[등대공원] 각 지역의 어선들이 연평도 앞바다를 메우던 시절 연평도 등대는 어선의 길잡이였다. 1960년 3월 첫 점등을 시작해 불을 밝혔으나 1974년 7월 국가안보를 이유로 일시소등 되었다가 1987년 4월에는 등대로서 용도가 영영 폐기되었으며 현재는 공원의 기념물로 남았다.
▲ 마치 병풍을 쳐놓은 것 같아 보여 병풍바위라 한다. 연평도의 서쪽에 있다. ⓒ옹진군
[빠삐용 절벽] 영화 주인공 빠삐용이 탈출한 절벽과 비슷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낙조사진대회가 열릴 만큼 일몰이 장관이다.
[아이스크림바위] 추운 겨울 눈과 바닷물이 얼어붙으면 마치 아이스크림 모양과 같다 하여 '아이스크림바위'라 한다. 또 송곳과 같이 뾰족하게 생겼다하여 '송곳바위' 라 부르기도 한다. 아이스크림바위 바로 뒤로는 연평도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거북 모양의 '거북바위'가 있다.
[얼굴바위] 소연평 동남쪽에 위치한 바위. 사람의 옆얼굴과 같이 생겨 '얼굴바위'라 한다. 여객선을 타고가다 소연평도 부근에서 볼 수 있다.
교장 | 강제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일부 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스틱, 물통,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배가 섬에 들어가지 않음)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학교 제8강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23만원입니다(옹진군으로부터 배운임 할인 받을 예정이나 혹 차질이 생길 경우 참가비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 연평도 안목어장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