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내마을에서 살다간 누렁이 생각
올해는
병술(丙戌)년
개띠 해라 개에 대한 예찬이 많다. 사람은 너나없이 만물의 영장이지만 개에게서 본받고 배울 봐가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개만큼만 정직하게 은혜를 알고 맡은 일에 충실하게 생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통령과 정부도 믿을 수가 있어서 사회가 안정되고 희망이 보여,
좋은 나라가 될 터인데 라는 생각을 아쉽게 해본다. 그래서 예로부터 은혜와 분수를 모르고 오만하고 부정하게 사는 사람을 보고 일언지간에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거침없이 치부해버리지 않나 생각된다.
민속촌과
같은 우리 동네 앞에는 광교산에서 시작한 개울물이 작은 냇물이 되어 흐르고, 뒤쪽으로 경부선 철로를 끼고 들판 가운데 있는 낮은 동산아래
50여
가구가 고구마처럼 생겨 길게 모여 사는 섬 같은 마을이다. 수원시에 속해 있지만 구멍가게와 공중전화는 물론 수도 물이 들어오지 않아서 집집마다
우물을 파서 쓰는 곳이라, 샘물이 많고 냇물이 흐른다고 하여 문자 그대로 천천동(泉川洞)<샘내마을>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어쩌다
수원시내에 나들이 나갔다가 사정이 있어 택시를 탈라치면 파장동까지만 오고 별도로 요금을 더 내야 들어오는 외딴 곳이라 집집마다 몇 가지 용도로
개를 몇 마리씩 길렀다. 샘내마을 개들은 밤낮으로 집을 지키고 여름철에 보신탕용으로 수입원이 되어지는 덩치 큰 놈들이다. 나도 애완용이나 작은
개보다 마당에 살면서 집을 지키고 주인을 따라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며 사냥도 할 수 있는 몸집이 웬만큼 큰개를 좋아하는 편이다.
나는
1986년
봄, 복음을 전하려고 샘내마을로 이사를 와 동네 형편에 맞게 개를 기르면서 농촌목회를 시작하였다. 동네사람들이 하는 대로 인분과 개똥을 걸음으로
호박을 심고 콩과 여러 가지 채소를 심어먹으면서 88년
가을까지 동네가운데서
살다가 뒷동산 북쪽 모서리에 있는 외딴 넓은 곳으로 옮기면서 경비와 호신용으로 진돗개 누렁이와 베스라는 외래종 점둥이를 기르게 되었다. 그리고
고양이와 차츰 닭 오골계 오리 칠면조 거위를 기르기 시작하였는데 거위와 칠면조도 집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어 집 뒤쪽에 두고, 누렁이와 점둥이는
현관 쪽에 있으면서 내가 밖으로 나들이 할 때는 점둥이는 집을 지키고 누렁이가 경호원처럼 따라 다녔다.
누렁이은
1989년
봄 어느 날, 서울에 사시는 누나가 천안 동생네 집에서 가져온 진돗개라면서 암 강아지 한 마리를 가져다주었다. 엷은 회색에 노란색을 섞어 칠을
해 논 것 같이 모양새가 별로였는데, 자라면서 차츰 귀가 서고 꼬리 끝을 둥글게 치켜 올리면서 진돗개 특유의 영리하고 민첩한 기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둥이는 같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된 양능민 집사가 기르다가 주고 갔는데, 하얀 바탕에 검은 점이 크게
그려져 있는 외래종으로 집을 잘 지키고 누렁이와 사이좋게 지냈다.
날이
갈수록 누렁이는 키도 크고 모양새가 당차고 의젓해져서 어찌하든지 주인에게 잘하려고,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내 옆에 와 동정을 살피면서 시비를 걸
자세거나 말이 거칠어지면 이내 알아차리고 으르렁대면서 물어뜯을 자세로 경고를 한다. 당시 우리교회에 주변에는 한 낮에도 개를 잡아가고 부엌이나
처마 밑에 걸어 논 마늘이며 자질구레한 것도 훔쳐가는 좀도둑이 설쳐댔다. 괜히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로 교회를 힘들게
하고 밤늦게 찾아와 시비를 거는 등 이상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동네가
허술한데다 파출소가 먼데 있어 교회 안에 있는 것도 들고 가는 판이라, 낮에도 늘 경계하고 있지만 밤에는 개와 거위가 집을 잘 지켜주었다. 나는
누렁이와 점둥이 그리고 고양이 칠면조 거위들을 돌보면서 그들과 지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잔디가 깔린 마당한쪽 연못에는 맑은 지하수를 퍼 올려
향어와 잉어를 기르고, 봄부터 가을까지 살구 앵두 여름사과 포도 대추 밤 호두가 차례로 풍성하게 열매를 매어주었다. 그리고 키가 큰 살구나무와
담장 밑으로 십 여 그루의 향나무가 조화를 이루어 아늑한 분위기의 전원 을 만끽할 수 곳 있었다.
이렇게
자연이 아름다운 샘내교회를 아는 외지교회들이 20-30명씩
학생들과 신학생들을 데리고 2-3일간씩 수양회를 하고 가기도했는데, 원래 이곳은 전 윤보선 대통령 조카의 아들이 별장 겸 주택으로 지은 집이다.
동네에서 좀 떨어져 자연 그대로의 산마루에 밭을 일구고 대지 200여
평을 반듯하게 닦아 50평정도
주거용
2층집을
지었다. 그리고 잔디마당과 여러 가지 유실수와 향나무 장미를 심어 작은 녹색의 장원처럼 가꾸며 생활하던 곳이다.
1988년
겨울 샘내교회 교인이었던 이분들이 직장과 자녀교육관계로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내가 매입하여 전원교회를 하게 되었는데, 주변에서는 교회로
개방이 되어 좋다고 많이들 구경을 와서 손님 끊어질 날이 없었다. 어느 때는 교회로서 출입이 자유롭도록 개방이 된 것을 다른 용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개와 거위가 항상 경계를 서주고 칠면조도 거들어 주면서 자연과 동물과 사람이 어울리는 좋은 장소가
되었다.
해가
거듭 바뀌면서 누렁이가 다 자라 벌써 성견(成犬)이
된 점둥이보다
반배나 큰 개가 되었는데 누렁이는 역시 진돗개라 영리함과 사냥하는 솜씨가 비상했다. 어느 때 누렁이는 담 넘어 콩밭 고랑에 엎드려 있다가 낮게
나르는 참새를 번개처럼 튀어 올라 잡아가지고 오고, 고양이도 못 잡는 들쥐를 콩밭과 고구마 밭에서 앞발로 흙을 파 헤집고 잡아 오기도 했다.
누렁이가 참새와 들쥐를 잡아가지고 내 앞으로 올 때면 점둥이는 개면 적게 옆으로 달려와 같이 거들면서 노는 모습이 정겹고 화목해보여 진한감동을
받았다.
1995년
동네에서 떨러져 있는 샘내교회와 전철 성대역 앞까지의 야산과 들판이 개발 지역이 되어, 아쉽게 집을 비워주고 전에 살던 동네 가운데 집으로 다시
이사를 하게 되어 눈물을 머금고 짐승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거위 한 쌍은 대만 성도들이 왔을 때 요리해 주고, 칠면조 한 쌍을 아는
유치원에 기증을 하면서 이리저리 정리해버리고 누렁이만 데리고 내려갔다.
누렁이는
여전히 집을 잘 지키고 충실하게 나를 경호하면서
1996년
봄 새끼 한 마리를 낳아 한 달째가 되어, 새끼를 키우느라 밖에 나가지 못해 답답하여 킁킁대는 것을 보고 잠간 나갔다 오라고 목줄을 풀어
주었다. 큰 키에 야윈 몸을 휘청하면서 밖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와 여전히 새끼를 품고 집을 지켰다. 다음날도 풀어주었는데 밖에 나갔던 누렁이가
어떻게 된 것인지 비틀거리며 겨우 들어와 새끼를 끌어안고, 한참 숨을 몰아쉬고 전신을 떨면서 킁킁거리다가 눈을 감고 숨을 거두어버렸다.
비통한
마음으로 김만호 집사를 불어 누렁이를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어주었다. 개는 생후 40일
이상 어미젖을 잘 먹어야 튼튼하게 자라는데 겨우 30일
밖에 되지 않은 누렁이 새끼를 살리는 길이 막연했다. 방안으로 내려와 우유를 먹이면서 수소문하여 친하게 지내는 화성 향남 동오교회 이상운 목사님
댁 개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을 알고 그 곳으로 보내어
40일
차도록 충분히 젖을 얻어 먹여 살려냈다.
어느덧
십년 세월이 흐르고 병술 년 개띠의 해를 맞이하면서 누렁이와 점등이 생각이 나 펜을 들었다.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주인이 보는 앞에서 새끼를
끌어안고 숨을 거두던 누렁이 모습이 아직도 순에 선하여 가슴이 저민다. 이제는 마을 전체가 아파트촌으로 바뀌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지금도 나는 누렁이와 뒷동산에서 토끼와 꿩을 잡으려 다니다 산자락으로 내려와 들판 길을 거닐면서 포스터의 <금발의 제니>를
부르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2006년 1월 6일 (금) 수원 샘내마을에서 (순담) 최 건 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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