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의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에 우리 고장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는 고증할만한 근거를 가지지 못하나 근자 하동국민학교(河東國民學校) 뒷산에서 발견된 돌칼, 돌화살 등이 청동기(靑銅器)시대의 유물로 밝혀졌으며, 또한 적량면 동산리(赤良面 東山里) 앞 논에서 발견된 지석묘(支石墓) 4기 등의 유물로 미루어 보아 우리 고장은 청동기시대에 이미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정착생활은 곧 집합생활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니 이때부터 취락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고장의 원명(原名)인 다사촌(多沙村)은 진국(辰國)시대에 접어들어 각지에 마을을 이룩하고 촌장을 두어 다스렸으나 고대 도시국가적 차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변한(弁韓)때 우리 고장엔 변한 12국의 하나인 낙노국(樂奴國)이 있어 비로소 고대 도시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때 신지(臣智)가 나라를 다스렸으며, 다사촌엔 읍(邑)을 두어 다사읍이라 하고 읍차(邑借)가 다스렸으며, 제사를 관리하는 천군이 있었다고 한다.
대가야(大伽倻)시대인 AD42∼250년 사이엔 우리 고장은 상당히 발전된 고장으로 변모를 보였으며 가야의 세력권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삼한시대(三韓時代)의 하동(河東)
삼한시대에 대한 기록은 한서의 진국 삼국지의 삼한으로 발전하여 다시 삼한시대에는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 가야(伽倻)로 세워져 7세기 후반에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가 고려왕조가 계승되고 조선(朝鮮)왕조로 계승되어 치욕의 일제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결국 한족(韓族)은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한족사회가 우리 민족의 원형사회라면 한족문화는 우리 민족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동은 진국(晋國)시대의 삼한시대에서 그 사회발전으로 보면 부락연맹(部落聯盟)국가 시대이며, 부족연맹은 부족국가가 연맹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 고장은 변한부족연맹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변진 24국중 낙노국(樂奴國)이 하동군 악양면(岳陽面)으로 진단학회(震檀學會)에서 밝히고 있다.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어 각각 거수(渠帥)가 있었고 큰 자는 이름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則)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가 있으며, 다음에는 살해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라고 하여 진한(辰韓)의 사회조직을 말하고 철기문명(鐵器文明)을 수용한 이래로 생산력이 급증하게 되어 빈부의 차와 권력의 분화가 뚜렷하여졌다. 또한 철(鐵)이 생산되어 수운(水運)을 이용한 무역이 일본과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대외교역은 선진문명을 섭취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그것이 일본에 전파하게된 것이다. 풍속엔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는 예속에 남, 녀의 분별이 존재했으며 큰 새 나래로 장례(葬禮)를 치루었는데 그 뜻은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도록 함이다. 가무(歌舞)와 음주(飮酒)로 즐겼으며 악기를 다루었고, 아이를 낳으면 돌로 머리를 눌러 편편하게 했다.
또한 길을 가다 남·녀가 만나면 서로 길을 비켜서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고장의 생활모습으로 짐작되어 진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하동(河東)
북방에는 고구려(高句麗)가, 마한(馬韓)지역에 백제(百濟)가 진한(辰韓) 지역에 신라(新羅)가 일어났으며, 변한(弁韓)지역에 가야(伽倻)가 존속한 6세기경부터 668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각축하던 시기를 삼국시대라 부른다.
부족국가를 통합하고 삼국으로 성립된 것은 근본적인 삼국통일의 전 단계적인 과도기의 시기이며, 이때 변한의 전통을 계승한 가야가 스스로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하지 못한채 신라가 백제의 완충지대로 잔존한 200여년 간의 가야사가 우리 고장의 역사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가야기에 다사진(多沙津)을 신공후(神功后)가 일본왕 환로(宦路)로 백제에 주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그 연대나 백제사에 맞지 않고 보이지 않는 가공적인 것이므로 참작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러나 6세기 백제가 신라를 침공한 것은 거의 가야지방으로부터라 할 수 있으며, 가야를 차지하려는 백제의 집요한 노력은 마침내 성왕(聖王)의 비참한 죽음을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백제는 가야지역을 바랬으며 그 방비벽이었던 하동은 수 많은 수난과 전쟁속에서 살아가는 역사를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가야지역을 병합(倂合) 하므로 중앙집권제 율령국가(律令國家)로 성장과 내실을 닦을 수 있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가야는 우리 고장의 불교문화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칠불사(七佛寺)의 유서속에 지금도 가야의 숨결이 고동친다고 여겨진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하동(河東)
삼국의 통일은 민족 통일의자가 결집(結集)된 획기적인 사실이었다. 또한 민족사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역사발전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이 우리 고장은 경덕왕(景德王) 16년때 9주 5경 중 강주(康州=晋州)에 속하여 한 다사군을 하동군으로 개칭, 성량현(省良懸)과 악양현(岳陽懸), 하읍현(河邑懸)을 거느렸다.
당시의 사회생활은 신라 본래의 촌락공동체가 존재하면서 당나라의 균전제(均田制)가 실시되었고 토지, 호구, 우마, 삼마전이 모두 계정(計定)되었으며 분배되고 3년에 1회씩 조사, 정리되었다. 이러한 조사를 토대로 농민들의 병역과 조(租)·용(傭)·조(調)를 촌단위로 계정하고 촌주(村主)는 현령에게, 현령은 군태수(郡太守)에게, 군태수는 주도독에게, 주도독은 중앙정부에 연결시켰던 것이다. 당시의 국민정신을 지배한 것은 불교로 왕도 경주에 왕실과 직결된 사찰(寺刹一雙溪寺)이 있어 왕실의 귀의처가 되고 지방엔 국립사찰이 요소의 명산에 건립되었을 뿐 아니라 중앙정부에 승통직(僧統職)이 있고 지방엔 주통(州統), 군통(郡統)이 있어서 교화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현실생활을 지배하는 불교가 왕법일여(王法一如)의 정법왕국(正法王國)을 구현하려 하였으며, 부처의 가호로 국가와 백성이 태평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지나친 국가의 보호하에 그 건전한 본래의 뜻을 잃고 귀족들의 사치생활에 영합되어서 도리어 국민생활의 궁핍을 촉진하게 되었고 국운의 쇠퇴를 초래하게 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신라 쇠퇴기에 접어들자 우리 고장 하동은 신라가 안고 있던 정치·경제·군사상의 제모순으로 집권적인 군현체제가 점차로 허물어져 가게 되었으니 각지에서 내란이 일어났고, 여기에 휩쓸린 하동은 전쟁의 소용돌이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더구나 김헌창(金憲昌)의 난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김헌창의 부(父)는 선덕왕(宣德王)의 족자(簇子)로 선덕왕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었으나 김경신에게 자리를 빼앗겨 불만, 불평속에 자랐고, 여기에 김헌창이 청주도독이 되어 선덕왕 13년 웅천(熊川)도독으로 전출, 14년에 난을 일으킨 것이다.
무진(茂津), 완주(完州), 청주(靑州), 사벌주(沙伐州)의 도독이 그의 위협하에 놓여 그의 조직이 북으로는 명주(溟州)와 남으로는 양주(楊州)에 이르게 되매 하동은 그이 수중에서 중요한 여울목이 되었다. 더구나 청천(靑川一晋州) 도독 항영은 밀양으로 탈출하기에 이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김헌창의 징병과 가렴(苛斂)을 당하여 전쟁에 시달린 하동은 이후 내란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수난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리하여 진성여왕대(眞聖女王代)부터 신라는 본격적으로 정권의 해체기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부경남과 전라도의 도적청길과 신원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후백제의 견훤은 대가야성(=합천)에서 궁예와 접전하여 하동은 전쟁지역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던 길목이었던 우리 고장은 후삼국(後三國)의 정립에서 쟁탈전이 벌어졌고 편리한수운을 이용하려는 각국의 격전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와 후백제의 틈에 끼여 난처해진 서부경남은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일어나 효공왕(孝恭王) 5년(901)에 대가야를 공격 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으므로 선덕왕 5년(916)에 재침공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가야를 침범하여 이를 함락시킴은 경주 쪽으로의 침공이 유리하고 서부경남을 자연히 지배할 수 있게 되기에 견훤은 한사코 이곳에서 싸움을 갖게 되었다고 본다.
신라 경덕왕은 견훤을 막기위해 고려 왕건(王建)에게 수호사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대가야는 견훤이 점령하게 되었고 강주의 위치는 자못 그 거취가 곤란하게 되었다. 신라의 주현으로 남아 있자니 견훤이 두렵고, 견훤에 의지하자니 호랑이 밥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신라가 고려 태조(太祖)에게 사신을 보낸 소식을 듣고 강주 장군은 고려 태조에게 항서를 보냈다. 후백제 견훤은 고려를 피하였고 또 이를 무마하기 위해 화해를 청했으며, 공작부채와 지리산 대〔竹〕를 선물한 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의 청에 의하여 고려군사가 당도한 것을 보고 그는 신라 침공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견훤의 이러한 화친책도 고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고려는 후백제와 이해(利害)관계를 달리하기 때문이었다. 고려 태조 10년, 태조는 남해를 경략하여 독자적 외교노선으로 중국의 후당과 관계를 맺은 강주지사 왕봉규를 핍박하였고 남해 등 4개 고을을 종속하게 된 것이다. 동년 7월 견훤이 점령하고 있던 대량성을 빼앗고, 8월엔 강주 고사갈이성에 고려 태조가 친히 정복하여 백제의 여러 성이 항복하여 왔다. 고려 태조 11년 고려장군 김상은 초계에서 후백제에게 패배, 하동을 비롯한 서부경남은 다시 견훤의 지배밑에 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백제 멸망시까지 하동은 견훤의 지배밑에 있었고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로 인하여 나라 아닌 독립권을 형성, 중국과 외교관계까지 맺었으나 고려와 후백제의 지배와 충돌로 심한 피폐와 곤경을 겪었다. 뒤에 고려의 주현(州縣)으로 재편되었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하동(河東)
고려시대는 신라의 골품제(骨品制)의 질서가 무너지고 조선의 지주적 관인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 태조는 신라시대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정치 목표였고 이로 인하여 가급적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국가조직 및 체제도 정치, 사회, 문화, 경제에 대한 행정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소수의 귀족관리층에 의해 고대적 정치체제의 확립이 정치의 특질로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정치적 방법에 따라 채택된 것이 당제(唐制)로 모든 권력은 국왕의 거점인 개성에 집중되었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완비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의 지배계층은 수도에 집중되고 중앙집권 정치체제는 곧 정치, 사회, 문화, 경제를 불균형으로 이끌어가게 된 것이다.
왕조의 성격과 지방 향촌은 고려 일대를 통하여 특별한 질적변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정세의 변화에 따라 싹튼 역사적 움직임은 고려의 집권관리 지배체제가 문종(文宗)시대를 절정으로 성격을 달리하기 시작하여 의종(의毅宗)의 폐위를 깃점으로 중기 이후에는 무인의 전권정치가 시작되었다. 무인정치로 인하여 지배층 세력인 무인의 천하가 되었으며, 과거의 지배계층은 몰락하고 만다. 그러나 고려는 아직 모든 역사적 조건이 미숙하였으므로 지방은 여전히 경제가 침체상태로 놓였다.
고려시대에 있어 지방제도의 재편성은 제6대 성종대에 이르러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중앙정부에 의한 지배파악이 어느정도 완성된 것이다. 성종 2년에 지방관제(地方官制)가 반포되어 전국에 12목(牧)이 설치되었고 우리 하동은 진주목(晋州牧)에 속하게 되었다.
성종(成宗) 14년(995)에 12목을 고쳐 전국을 10도, 12목을 12주(州) 절도사(節度使)로 개편하고 각 도 밑에 주(州). 부(府), 군(郡), 현(懸)을 두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엔 동경(東京), 개성엔 개경, 평양엔 서경을 두어 3경제(三京制)를 형성하였고 교통의 요로에 역, 관을 설치하였으며 중요한 수로변엔 조창(漕倉)을 두었다.
그런데 경상남도는 수차의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인하여 그 소속과 구성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현종 이후 전국의 지방편성이 경기와 5도 양계로 나누어지면서 경상도 중에서 경주소속의 대부분의 지역과 진주목 소속의 전지역이 현재의 경남을 대표하게 되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하동(河東)
고려의 구세력은 토지를 장원으로 형성하고 사병을 소유하여 문벌 세족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력을 쏟았으며, 고려의 정신지주인 불교 역시 국가권력을 업고 종교 본래의 사명을 벗어나 타락된 모습으로 그 의의를 상실케 되었다. 또한 고려의 구세력을 배경으로 한 원(元) 나라가 물러가고 새로운 대륙의 세력으로 등장한 명(明) 나라가 등장하자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고려에서는 새로운 계층의 세력이 일어나 시대의 담당자로 부각하게 되었고 그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신흥 사대부(新興 士大夫)라고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이 지방 향리(鄕吏)층의 출신이며 중국의 새로운 세력인 명나라를 배경으로 삼았다. 그러나 신흥 사대부는 그들의 힘으로 막강했던 구세력을 쉽게 제압할 수 없었으며, 여기에 이성계(李成桂)는 이들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다. 이성계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혁명은 쉽게 추진되었고 마침내 1392년 조선왕조의 시작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사대부의 세상이 된 것이다.
조선 건국이념은 고려말의 폐정(廢政)을 혁파(革破)하고 생민의 휴척(休戚)을 꾀하여 척불(斥佛), 숭유(崇儒), 전제개혁(田制改革), 사병혁파(私兵革破),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그러므로 사대부 양반관료가 윤리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조선은 양반 관료사회라고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오늘의 하동(河東)
1943년 6월 이탈리아가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측에 유리하게 되었고 한국독립에도 새로운 서광이 비쳤다. 그것은 한국의 자주독립을 규정한 "카이로선언"이 그해 12월에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5월엔 독일이 항복하고 7월엔 "포츠담"에서 3거두회담(三巨頭會談)이 열려 '카이로선언'을 재확인 하였다. 8월에 발표된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한국의 독립은 국제적으로 공약을 받은 셈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줄기찬 독립운동의 성과에서 얻어진 당연한 귀추라고 하겠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드디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36년간의 압정에서 우리 민족은 해방되었다. 물결치는 태극기 속에서 해방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고 민족의 해방이 곧 민족의 자주독립임을 굳게 믿었기에 더욱 큰 감격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압정속에서 준비없이 해방을 맞이하였으니 해방된 민족을 조직하고 영도할만한 핵심체가 없었기 때문에 각색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난립되어 혼란만을 가져왔다. 이 때 민족주의자들의 일부가 송진우(宋鎭禹)를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일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여운형(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조직에서 민족주의파가 이탈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재빨리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이라는 정부조직을 만들어 임시정부와 대립하려 하였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으로 혼란을 빚어내고 있을 때 미·소(美·蘇) 양군이 남북으로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은 북위 38선을 경계로 하고 한반도를 양분하여 점령하였다. 이것이 한국민족의 분열과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이며 이 결과 북한에는 소련의 군정 밑에 공산주의자가 주도권을 잡고 조만식(曺晩植) 등 민족주의자들을 축출하여 공산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에 대해 남한에서는 미군정 밑에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기에 우(右)로부터 좌(左)에 이르는 정당이 난립하여 정치적 통일을 기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 미군정이 한국에 대한 예비지식도 없이 행정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이 바라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더욱 정치적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혼란은 김구(金九)를 위시한 임시정부 요인과 미국으로부터 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한 뒤에도 여전하였고 여기에 경제적 혼란이 겹쳐 민족의 앞날은 심히 걱정스러웠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3相會議)는 미(美)·중(中)·영(英)·소(蘇)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안을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반탁운동이 전개되어 전국적 일대 민족적인 시위운동으로 확대되어갔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배신으로 민족의 통일행동은 무너지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들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았고 이 찬탁운동과 대결하기 위하여 임시정권을 세워 반탁의 태도를 더욱 굳게 다짐했다. 여기에서 선출된 최고 정무위원은 뒤에 미 군정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을 구성하였다.
1946년 3월에 '모스크바'의 3상회의의 결정을 실천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고 개최 벽두부터 협상·배상문제를 놓고 미·소의 대립은 날카롭게 되었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반대한 정당과 사회단체를 제외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에 대해 미국은 자유의사를 존중할 것을 주장하여 맞서게 되었다. 즉 공산주의자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자 한 소련의 속셈을 그대로 묵인할 수 없었던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아 정계는 더욱 미로에 섰다.
이러한 혼돈속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우직임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족통일총본부의 독립과도정부 수립운동이 있고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계의 한독당(韓獨黨)은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반탁을 원칙으로 하되 좌우합작(左右合作)과 남북통일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김규식(金奎植)을 중심으로 한 중간우파는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한 중간좌파와 합세하여 좌우합작을 시도하고자 한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미 군정의 지지를 받아 입법위원(立法議員)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에 반해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찬탁의 입장에서 행동을 통일하고 3상회의의 결정을 적극 지지하여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통하여 강력히 주장하였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은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경제질서를 교란하는 등 갖가지 수단으로 정권 탈취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공산당이 불법화된 뒤에는 지하에서 파괴행위를 자행했다.
이러한 사회불안 속에서 미 군정은 입법의원을 창설하고 한국인의 대법원장과 민정장관을 임명하여 형식적인 행정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였다. 이것을 과도정부라고 말한다.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어 각 정당에서는 정부 수립에 대한 자문답신서를 공동위원회에 제출하였으나 그 내용은 정당의 노선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한편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소련의 종전 주장인 반탁단체를 협의대상에서 제외하자는 주장이 되풀이 됨으로써 정돈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정돈상태에 빠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4개국 외상회의에 회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한국의 독립문제를 유엔에 제출하여 해결하고자 했다.
즉, 유엔(UN)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미·소양군이 철수하고 이러한 정치를 유엔이 감시하며 협의하기 위한 유엔 한국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 미국의 안은 소련의 반대에도 유엔 총회에서 가결되고 이 결의에 따라 1948년 1월부터 유엔 한국위원단의 활동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 있어서의 유엔 한국위원단의 활동은 불가능하게 되자 이 사실을 보고받은 유엔 소총회의에서는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의결하고 이 결정에 따라 북한을 제외한 남한에서만이라도 정부수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민족역사상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되고 198명의 국민대표가 선출되어 5월 31일 최초의 국회가 열려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제정된 헌법에 의해 7월 20일에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이어서 행정부가 조직되어 해방후 3년만인 8월 15일에 대한민국의 수립이 국내외에 엄숙히 선포되었다. 그 해 12월 대한민국은 유엔총회에서 승인되어 한국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되었고 미국을 비롯한 50여개국의 개별적인 승인을 받게 되었다.
이 기간에 있어 우리고장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의 방송을 듣고 16일 하동병원(현 군청앞 세심천자리)에서 치안유지회 발기 준비위원회가 개최되고 각 부서의 책임자가 결정되었다. 또한 군내 각 면 연락원으로 김진두, 전해, 윤영균, 김삼홍, 김두영, 김태순, 김이홍, 송재홍, 권대형, 김병성 등이 파견되었다. 하동읍 어업조합 2층에서 사무를 보게 되었다.
상기 회의 주최로 하동국민학교에서 하동군 민중대회가 개최되고 이 자리에서 치안유지회 중앙위원 70명을 선출, 위원장에 박치화, 부위원장에 권대형, 치안부장에 김태수, 총무부장에 최상옥, 운동부장에 여경엽, 경제부장에 정재동, 문화부장에 고대작이 선출되었고, 치안차장 신양규와 청년 12명으로 하동경찰서를 접수하도록 하였으나 일본 경찰은 수십명이 읍내를 순회하며 위협사격을 가하고 하동국민학교에서 한국청년 3명을 사살하였다. 해방이 된 지 10일만인 25일 일본인 700여명이 부산 방면으로 떠나고 27일 건국준비위원회 하동군지부가 결성되어 위원장에 정진기가 선출되어 치안대가 하동 경찰서를 인수하여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내 일원은 극도로 치안이 문란하였고 좌익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군청을 강점(强占)하고 사무를 개시하여 각 면의 조직을 완료하였으며, 부녀동맹, 청년동맹 등 방계 단체를 형성하였다.
인민위원회는 막강한 조직력을 이용하여 세무서와 우편소, 전매서를 강점하였다. 그러나 9월 27일 일인 경남지사가 해임되고 미 군정의 하리스 준장이 취임하게 되자 정세는 일변하기 시작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하동 국민학교에서 농민대회를 개최하고 우익에 대한 인민재판을 계획하여 실천하려 하였으나 우익의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으며, 하동의 치안상태가 불안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미 군정의 '미라'대위가 하동에 들어와 인민위원회로부터 군청을 인계받고 곧 중대병력의 미군이 주둔하여 치안을 담당하였다.
불안했던 치안이 정상으로 회복되어 갔고 하동군 대표 5명이 부산에서 열린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대회에 참석하였으나 건국준비위원회가 분열되어 뒤에 해산을 보게 된다. 인민위원회가 미 군정에 의해 해산되고 손영수 군수가 취임하고 행정이 정상화하였으며 치안담당의 김영진 하동경찰서장이 부임하여 문란에서 안정에로의 치안 확보에 중점을 쏟았다.
반탁 하동위원회가 조직되어 거군적인 반탁운동이 시작되었으며, 반탁에서 찬탁으로 탈바꿈한 좌익과 맹렬한 대결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우익 단체에서는 독립촉진 하동군 청년연맹을 조직하였으며 고전면 주교 시장에서 좌우익의 충돌이 일어나 그 대립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여기에 우익단체는 독립촉진 하동군 지부를 결성하게 되며 하동군 부인회 지부도 결성되었다.
해방 이후 처음 맞이하는 3·1절에 우익은 하동국민학교 교정에서 축하식을 갖게 되고 좌익은 하동읍 시장에서 축하식을 갖는 등 그 대립은 점차 더해갔다. 1946년 민주위원 의장인 이승만의 환영대회가 군민 1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하동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반탁과 광복을 위한 다짐을 외치기도 했다. 1947년 5월 30일엔 양보, 고전, 북천, 옥종, 금남의 좌익 청년동맹원 2천여명이 읍을 습격하려 하자 경찰과 한청은 이들을 막고자 적량면 경계(꽃단이)에서 경찰이 공포를 발사, 이들을 해산시켰다. 1948년 총선거에 의해 강달수가 제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 정부수립 축하대회가 열려 그 오랜 진통 끝에 대한민국의 수립을 보게 되고 희망찬 하동의 새로운 역사가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