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후에와 호이안
2008.08.07-11
이렇게 무더운 여름, 더 무더운 아열대 기후의 지역으로 여름휴가를 계획한 것은 올해 이곳으로가는 패키지 상품이 개발되었다는 광고 때문이다. 처름 개발되는 상품을 가서보면 대부분 풋풋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년 여름 푸켓에 갔더니 휴양지 답게 선선해서 베트남의 휴양지도 선선하려니 하고 가게 되었다. 날씨는 보태주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무너진 성이 있는 ’ 에 걸맞아서 좋았다. 더군다나 세계 생산 2위인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더운 날씨에도 또 가서 앉아있고 싶은 곳이 되었다.
다낭은 우리가 베트남 전 영화에서 자주 듣던, 미군이 주둔해 있던 도시로 기다란 땅덩어리인 베트남의 중간쯤에 위치한 도시였다. 우리가 탄 대한 항공은 정말 작아서 큰 비행기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7,8월 두달 간 전세기를 운행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아마 국내선여객기 보다는 컸는지 심하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다낭에서 호이안까지는 30분 정도 거리여서 오후11시 경에 작고 아담한 호텔에 도착했다. 작은 수영장과 아기자기한 중정이 예쁘고, 강 옆에 자리잡고 있어서 강가의 풍경이 좋았다. 해변도 3분 걸어가면 있었는데 꾸어따이라는 그 해변은 한참을 헤엄쳐나가도 허리까지 밖에 물이 오지 않는 아이들이 놀면 좋은 그런 해변이었다. 호텔 전용 공간이외의 해변은 베트남 현지인들이 많이 모여서 먹고 마시고 놀고 있었다.
여행 첫날은 후에에서 시작하였다. 후에는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약 150여년간 베트남의 수도였던 곳으로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었다. 관광객들은 유럽인들이 아주 많았다. 후에로 가는 길은 하이번 패스 드라이브를 거쳐서 가는데, 미국 트레블지가 선정한 완벽한 여행자가 일생에 꼭 가봐야 할 50곳 중 하나란다. 글쎄, 이 도로에서 내려다본 해변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완벽한..’인지 어쩐지는 다른 49곳을 본 다음에 말하리라. 이 정도는 우리나라 동해안의 정동진에서 심곡리 가는 길도 60곳에 들 수 있을 것도 같고... 가는 길에 단선 철로와 마주쳤는데 기차가 온다고 10분쯤 길을 막고 있었는데, 베트남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구경하고 있었다.
후에에서 응후엔 왕조의 왕궁을 구경했는데 우리 나라 궁궐보다 크고 화려해서 또 한번 우리나라의 절대적 가난에 대한 생각을 했다. 허긴 베트남전 참전 당시 우리의 국민소득이 베트남의 국민소득보다 적었다지.
참, 이번 가이드는 우리가 ‘라이따이한이 분명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현지인같이 생긴 청년이었는데, 베트남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전 당시 우리 나라는 군인 뿐 아니라 노동인력들도 나가 있었는데 이들과 월남 여인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났고 미군의 갑작스러운 철군으로 여인들과 아이들이 버려지고 한곳에 수용되었는데, 미국은 이 아이들을 일단 본국으로 실어갔는데 우리나라는 그 아이들은 데리고 올 여력이 없어서 외면하게 되었단다. 미국은 데리고 간 후 외면해서 그들이 마피아가 되어서 사회문제라고 하고 우리의 아이들은 구박받으면서 힘들게 살았는데 이제 그 2세들은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금씩 도움을 주어 기술을 가르치고, 기업인들은 2세라고 하면 취직을 시켜주고 하여서 좀 나아지고 있단다. 이들 라이따이한들은 이제까지는 연좌제에 걸려 취직도 못하고 살았더란다. 베트남은 조상을 섬기고, 노인을 공경하며, 가족을 중히여기는 정서가 우리와 같아서 외국인 신부를 얻으려면 베트남 여인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까지. 이 친구는 베트남에서 뭔가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하고, 성실하고 야박하지 않아서 이번 여행이 편안하였다.
후에 성은 많이 훼손되어서 지금 복원 중이었는데 외성밖에도 연꽃이 그득피어있는 해자가 있고 내성 밖으로도 해자가 있었다. 정원 조경이 잘되어있었고, 시간을 두고 여기저기 앉아있으면 좋겠더라.
티엔무 사원은 프랑스에 편승한 왕조에 의한 불교탄압의 저항 선봉장이었던 스님에 의해 유명해진 사원이었는데 앞에 커다랗고 둔중한 탑(중국 탑처럼 매력이라고는 없는)이 있는, 강가에 있는 사원이었다.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정원 조경도 훌륭하였는데 바닥에 크고작은 턱이 여기 저기 복병처럼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사진을 찍을까 보다가 그 턱에 슬리퍼가 걸려 오지게 넘어졌다. 어찌나 꽈당 넘어졌는지 한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제 순발력이 떨어져 슬리퍼신고 다니면 안되나보다. 그래도 뼈가 안 나간 것을 보니 골다공증은 아닌가 보다.
뿌득왕릉은 응후엔 왕조 13명의 왕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하였던 왕의 왕릉이었는데 이 나라의 국화인 연꽃이 피어있는 호수를 지나 아름다운 건물이 장식되어있어서 우리의 릉보다 구경거리가 많았다. 곳곳에 용 조각과 카라, 나가가 많이 장식되어있었는데 내 실력으로는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이곳의 모자이크는 청화백자 조각과 유리 조각으로 장식을 했는데, 예쁘고 재미있었다.
카이딘 왕릉은 제일 마지막 왕의 무덤인데 뿌득왕릉이 좀더 동양 양식에 충실했다면 이 왕릉은 서양과 동양의 양식이 공존해있는 화려함이 있었다. 카이딘은 20세기에 만든 왕릉이니 프랑스의 실질적인 지배하에서 만들어졌을 텐데 고유한 베트남 양식을 가지고 있어서 좋아보였다. 카이딘 왕의 동상과 좌상이 있는 방은 모자이크 장식이 정말 화사했는데 베르사이유궁의 화려한 방에 못지 않았다. 그 곳에서 내려다 보는 정경도 정말 아름답고, 바람이 잘 불어 시원하여서 하염없이 앉아있어도 좋았다. 영화 인도차이나가 생각났다. 카뜨리느드뇌브가 오만한 몸짓으로 난간에 기대어서있던 포스터로 대변한 그 영화는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귀족들이 민중들의 삶에 어떻게 감동을 받고 공산화되어 그들을 위해 사는지,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그들을 어떻게 노예취급을 했고, 그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지 분노하면서 보았던 생각이 났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베트남사람들이 호치민을 맞아 프랑스노예에서 해방되어 중국과 미국과 긴 시간 싸우고, 이제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열심히 노력하며 부지런히 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이 나라 정치인들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청렴하게 살고 있으며, 젊은 인구가 많고, 문맹률이 낮아서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많은 나라라고 한다. 이들의 전쟁으로 부의 발판을 마련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나라가 정말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날 점심인 궁중요리는, 화려함과 훌륭한 맛, 베트남의 전통 악기연주와 노래가 어우러져 귀족 흉내를 다 낼 수 있어서 흡족하였더라. 드래곤파크라는 음식점이었는데, 조경이 아기자기하니 아름다웠다. 아주 작은 공간도 정성껏 베트남식으로 가꾸어 놓아서 볼 것이 많아서 더 좋더라.
저녁은 호텔에 돌아와 그 작은 풀의 따뜻한 물에서 수영을 하였다. 아까 넘어진 것을 사우나 가서 풀지 못하니 풀에라도 들어가서 풀어야하겠기에....
다음날은 하루 종일 자유일정인 날이었다. 나는 미손 유적지를 가고 싶어했다. 미손은 2세기- 15세기까지 중남부 해안의 평야지대에 있던 참파왕국의 성지로 참족은 앙코르왕국과 인도네시아 자바섬까지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부족이었는데 베트남족에 의해 멸망당한 후 지금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있다고 한다. 호이안에서 미손유적지까지는 카페 신이라는 베트남 내에 있는 여행사의 셔틀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가이더가 예약을 해주어서 호텔로 와서 태워가지고 가서 미손 유적지를 보고 다시 호텔까지 데려다 주는데 6불을 내면 되었다. 물론 유적지 입장료 60000동은 별도로 지불하기로 하고. 암튼 허술한 영어 실력으로 유럽인들과 함께 섞여서 (한국인은 한명도 없는) 내리라면 내리고 갈아타라면 갈아타고- 무조건 ‘미손’ 만을 외치며 차를 3번 갈아타고 미손 유적지에 도착하여 유창한 영어로 유적지에 대한 안내를 받고 70명 쯤되는 유럽인들 사이에 섞여 무너진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정말 남아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전쟁에 의해 파괴되었더라. 두 개의 방에 남아있던 조각을 정리해 두었는데 그다지 정교하거나 울림이 있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의 3국시대, 통일신라 시대 작품들이 주는 아름다움에 비해... 오는 길은 호텔에 내려주지 않고 호이안 시내에 내려주어서 할 수 없이 5불이라는 거금을 주고 호텔까지 택시를 타고 왔다. 영어를 좀 해야 싸우지... 점심을 먹으러 가족들과 함께 다시 4불의 거금을 들여 호이안 시내에 갔다. 시가지 내의 레스토랑에 갔는데 이 나라는 39도의 날씨에도 에어컨이 있는 식당이 없나보다. 그리고 맥주도 아이스 박스에서 꺼내다 주니 시원할 리가 없고, 암튼 영어로 메뉴가 써 있는 곳에서 월남 국수요리와 쇠고기 요리를 먹었는데 국수보다는 쇠고기요리가 더 쌌다. 너무 더워서 시내 구경을 접고 해변에 가서 수영을 하기로 하고 돌아오는데, 상점 중에 그림을 파는 곳이 아주 많은 것이 신기하다. 이 곳의 그림은 압축나무 판에 우리나라의 전통 칠 같은 질감을 주는 그런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었는데, 하도 강렬하여 사고 싶은 마음이 적더라.
마지막 날은 호이안 시내와 다낭시내를 구경하는 날이다. 호이안의 구시가지에서 퓨첸화교회관(복건성에서 온 중국인들의 회관), 짠가 사당(물건을 팔고있어서 베트남 전통 가옥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음, 덥기도 하고), 전통 음악 콘서트, 내원교(베트남 화페에 있는 다리로 1593년 일본인 거주지와 중국인 거주지 사이에 놓은 다리)를 시클로를 타고 돌았는데, 덥다는 생각 밖에.... 구 시가지는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예쁘긴 하였는데, 날씨가 흐려서 빛이 적으니 사진을 찍어도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다낭에는 참 조각 박물관이 있었다. 참 조각이 전시되어있는데, 시바상과 부인인 우마의 상, 난디(소), 용, 하우만(원숭이) 조각 등 힌두교의 유적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이다.
오후에는 오행산이라 불리는 대리석산 중 수산(水山)에 해당하는 산에 올랐다. 아름다운 절과 동굴이 있었는데 그 동굴은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그 방마다 방의 크기에 알맞은 불상들이 있었다. 그 중 가운데 있는 감실의 불상은 여성적인 아름다운 상호를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동굴의 감실을 다니니 박쥐가 우리를 맞았다. 동굴에 들어가니 시원하여서 나갈 생각이 안나더라. 그 동굴 안 의자에 한참이나 앉아있었더니 좋더라. 항주이던소주이던가에 있던 영은사 생각이 났다. 그곳의 조각들이 아름답기는 하나 어찌나 더운지 볼 생각이 안나더니, 이곳은 그래도 동굴에 들어오니 시원하기는 하더라.
오후에 내려준 다낭 시장에서 과일도 좀 사고, 베트남 커피도 좀 사고, 정제를 잘 못해서 흰설탕과 중백의 반 쯤되는 듯한 설탕도 샀다. 전 번 베트남여행에서 카페에서 마신 커피가 어찌나 맛있던지 사가지고 와서 먹었더니 그 맛이 나지 않아서 설탕 때문이 아닌가 싶어서 이번 여행에서는 설탕을 사가지고 왔다. (영화를 너무 본 탓에 혹시 이 설탕뭉치를 마약으로 오인받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봉지가 영화속의 마약 자루와 똑 같아서). 집에 와서 그 설탕에 커피를 타 먹어보니, 이번에는 성공이다. ㅋㅋㅋ
다낭 시장에서 특이한 점은 꽃집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남자들은 부인들에게 꽃을 잘 사다 준단다. 국민소득이 820불 정도라는데, 행복지수가 높다더니 그 말이 맞나보다.
이번 여행은 내 취향에 맞는 유적지가 많아서 좋았는데 같이 간 조카가 배병이 난 상태로 가서 더운 곳에 다니다 돌아오니 완전히 얼굴이 흑빛이다. 내일부터 다시 출근해야하는데.... 내년부터는 더운 여름은 그냥 가만히 앉아있고, 겨울에나 따뜻한 남쪽나라 다녀오리라 다짐해본다. 공항 면세점에서 선물용으로 원두커피와 커피믹스를 사서 가지고 왔는데, 선물을 할 수가 없다. 너무 맛이 있어서. 음식에 욕심이 이리 나니 나날이 풍성해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