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해와 거란 관계사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 거란이란 사실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거란이 어떤 과정을 통해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발해는 왜 쉽게 멸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구려의 경우는 거란을 지배하에 두면서 동북아시아 정치무대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발해는 거란을 구체적으로 지배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거란을 장악하여 서쪽의 위구르나 당과의 교섭관계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랐던 적도 없다. 발해가 고구려에 비해 군사력이 1/3 수준이었다고 하더라도, 거란의 성장을 그냥 놔두었다는 것 자체가 발해가 장기적으로 성장하는데 큰 지장을 초래함을 물론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1) 발해와 거란의 초기 관계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의 반란으로 야기된 당의 동북방에 대한 통제력의 약화를 틈타, 발해 건국의 기치를 올렸다. 대조영은 결국 성공하여 독립국가 발해를 건설하였지만, 이진충과 손만영은 당과 가까운 곳에 세력을 형성하는 바람에 당의 견제를 받아 독립국가 건설에 실패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만난 발해와 거란이 이후 어떤 관계를 맺었던 것일까.
당시 발해와 거란 관계의 중요한 외적 변수는 당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강력한 변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곧 돌궐이다.
돌궐은 당태종 시기인 642년 당에 굴복하였다가, 682년 동돌궐의 반란을 시작으로 국가를 재건하였다. 사실 당의 세계지배가 무너진 것은 돌궐의 재흥이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돌궐의 부흥에 영향을 받아 696년 거란 이진충의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森安老夫는 이진충의 봉기 배후에 당과 거란을 서로 싸우게 하여 정세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끌려고 한 돌궐 묵철가한의 강력한 선동이 있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돌궐의 지배자 묵철가한(黙啜可汗 693-716)은 당이 측천무후, 위후가 정권을 잡아 내부 통치체제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크게 세력을 확장하여 당을 압도할 정도였다.
구당서 발해말갈전에는 발해 건국과 거란, 돌궐, 당의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가 있다.
ꡒ측천무후가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머지 무리를 토벌케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참하고 또 천문령을 넘어 대조영에게 압박하였다. 대조영은 고려와 말갈의 무리를 규합하여 이해고에게 저항하니, 당의 군대가 대패하여, 이해고만 겨우 돌아왔다.
때마침 거란과 해가 모두 돌궐에 항복하니 도로가 험하고 막혀 측천무후가 토벌할 수 없었다. 대조영이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계루의 옛땅을 차지하고서 동모산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ꡓ
이 기사를 보면, 대조영이 건국할 수 있게된 요인이 크게 셋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대조영이 당군을 물리친 것이다. 둘째는 대조영이 멀리 동쪽으로 가서 당이 추격을 하기 어렵게 한 점이다. 셋째는 돌궐이 강성하여 거란과 해가 모두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가 당이 동쪽으로 세력을 벋히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돌궐은 이 당시 거란을 선동하는 한편, 당과 밀약하여 거란의 배후를 공격하여 거란의 대부분을 돌궐의 지배하에 두는 노련한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따라서 발해는 건국 직후부터 돌궐에 사신을 보내 교류한다. 물론 당시는 돌궐이 훨등하게 강력한 세력이어서 발해가 고맙다는 공물을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발해가 돌궐의 간섭을 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돌궐로서는 당과의 대립관계가 중요했고, 발해는 돌궐과 당을 원거리에서 균형있는 외교를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졌다. 반면 거란은 돌궐과 당 사이에 끼어 어느 한쪽에 복속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발해가 옛 고구려가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분할하였던 것처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발해 내부의 지배력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즉, 발해가 위치한 만주 일대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발해는 신라에 대해 압도적 힘의 우위는 커녕 초기에는 신라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받고도 우선은 만족할 상황이었다. 또한 동부만주의 흑수말갈에 대한 지배력을 보다 확실히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것이 해결된 이후에야 고구려와 같이 거란지배에 나설 수 있었는데, 이 점에서 발해는 실패했다. 따라서 8세기 발해와 거란관계는 발해의 우위가 성립되지 않았고, 거란은 돌궐, 당의 종속변수로만 남았다.
발해는 건국 직후, 돌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선 건국에 대한 주변국의 인정을 받는데 초점을 맞춘 외교를 펼쳤고, 그 결과 건국 7년만인 705년 당에서도 발해의 존재를 인정케 했다. 발해는 낮은 문화와 경제력을 가진 돌궐보다는 동아시아 최고의 문화와 경제력을 가진 당과의 교류가 필요했다. 그러기 때문에 당이 발해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가로 대조영은 차남인 대문예를 당에 보내 宿衛를 하게 했다. 그 결과 당은 713년 정식으로 발해와 국교를 맺었고 교역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과 발해가 정식 교역을 할 때 상황에서 눈여겨 볼 것은 돌궐과 거란의 움직임이다. 710년 이전 거란은 돌궐의 종속집단으로 당을 공격했으나, 710년 당의 예종이 즉위한 후, 돌궐의 묵철가한이 당과 화친함으로써 동북지역에 평화가 왔다. 따라서 당과 발해의 교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사라진 셈이다.
2) 발해, 돌궐, 거란의 3각 협조와 대당 공격
구당서 거란전에 의하면, 715년 거란의 수령 이실활은 발해의 내분 조짐을 먼저 알고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당에 귀속하였다. 다음해 돌궐의 묵철가한이 피살되어 돌궐 세력이 일시 약화되어 거란이 정세판단에 매우 민감했음을 볼 수 있다.
718년 이실활이 죽고 사고(娑固)가 거란의 수령이 되었다. 그때 거란의 대신 가돌우가 세력을 장악하면서 사고는 가돌우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당나라로 달아났다. 당은 설태를 보내 사고의 무리와 함께 가돌우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대패하고 설태마저 생포된다.
한편 돌궐도 비가가한(毗伽可汗 716-733)이 즉위하면서 다시 강성해져 당을 공격하고, 거란의 가돌우는 돌궐에 복속한다.
이런 상황에서 『책부원귀』 외신부 정토편에 보면 720년 9월 당은 발해에 사신 장월을 파견하여 신의를 저버린 거란과 해를 함께 토벌하자고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 당이 발해에 도움을 청한 것은 발해가 돌궐과 별개의 하나의 독립된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발해는 거란과는 달리 강국 돌궐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습을 알 게 한다. 그러나, 발해는 이때 당의 요구를 거부한다. 그것은 돌궐이 강대했고, 돌궐이 발해 주변까지 세력을 뻗혔기 때문이었다.
당시 발해와 돌궐 사이에는 흑수말갈이 있었다. 흑수말갈은 한때 돌궐의 지배를 받아 토둔이라는 돌궐의 지방관이 흑수말갈에 파견되기도 했다. 그런데, 흑수말갈은 그 사실을 발해에 알렸고, 발해 역시 이 사실을 승인했다. 한편 흑수말갈은 당과 교역함에 있어서 발해의 승인을 얻어 교류하는 등 발해와 돌궐 양국 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흑수말갈이 당에게 발해 몰래 사신을 보낸 일이 생긴 것이다. 흑수말갈은 나름대로 당의 힘을 빌어 돌궐과 발해 양국 사이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을 보인 것이다. 이때 발해의 무왕은 대일하를 보내 흑수말갈을 적극 공격합니다.
그런데, 당은 거란을 공격하자는 제의를 거절한 당을 돌궐-발해-거란의 연합 세력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이를 붕괴하기 위해 흑수말갈을 이용하려다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당시 발해의 세력권 안에 있던 월희, 철리, 흑수, 불열부 등이 각자 당과 돌궐에도 조공을 보낸 상태였습니다. 발해의 건국이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생긴 이런 내부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문왕은 흑수말갈에 대한 강경토벌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반면, 흑수말갈 선봉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당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흑수말갈을 공격하지 말자고 했던 무왕의 동생 대문예는 무왕과의 의견 충돌로 당으로 도망치고 맙니다.
이때 무왕은 대문예를 돌려보내라고 당에 요구했으나, 당이 거짓으로 대문예를 귀양갔다고 하는 등, 발해의 요청을 묵살했습니다. 도리어 흑수말갈에 당의 羈縻州를 설치하였기에 발해는 상당한 위기감을 갖고서 흑수말갈을 토벌했고, 732년 등주를 공격합니다. 당시 발해는 불열, 월희, 철리 등 당에게 조공을 보냈던 말갈제부를 훨씬 강경하게 지배한 상태였지만, 아직 이들이 완전히 발해에 굴복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장문휴의 등주공격에 비해 우리에게 덜 알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마도산 전투입니다. 馬都山은 지금의 산해관 부근입니다. 韓愈의 『烏氏廟碑銘』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ꡒ개원(713-741)에 상서 오승체가 평노선봉군을 관장하여 연이어 해와 거란을 격파하고 날록산에서 싸워 가돌간을 패주시켰다. 발해가 바닷가에서 소요을 일으켜 마도산에 이르니, 관리와 백성들이 달아나 본업을 상실했다. 오승체가 휘하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 길을 막아 참호를 파고 돌을 쌓으니 4백리나 이어졌고, 높이가 30이나 되엇다. 발해가 전진하지 못하니 백성들이 거처로 돌아왔다.ꡓ
또 다른 기록인 번형(樊衡)의 『幽州長史薛楚玉 破契丹露布』에는 거란의 가돌간이 일시 당에 항복하였다가, 서쪽으로 돌궐과 연결하고, 동쪽으로 발해와 합하면서 나머리 무리를 수습하여 당에게 항복한 해를 엿보았다고 했다. 당이 이에 10만 병사로 공격하니, 거란을 달아나기 빠빳고, 돌궐은 재빨리 달아났고, 발해는 두려워 떨며 세력이 감히 나오지 못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이런 기록들은 발해가 733년 사이에 등주와 마도산을 함께 공격했을 때에 거란과 돌궐과 일정하게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돌궐은 발해의 당 공격을 배후지원했으며, 돌궐의 비가가한이 죽음에 따라, 발해도 당과 화의를 한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
이는 마치 위만조선이 흉노의 左臂로 불리며 한나라와 싸웠던 시기와 비슷한 형세다.
당시 발해는 거란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인정했고, 거란과 합동으로 당과 싸웠음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강력한 돌궐이 있었기에 발해의 거란 지배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했었다고 할 수 있다. 발해는 당과 화의를 한 후, 흑수말갈을 비롯한 내부의 불만세력을 장악하는데 많은 공을 기울였다.
3) 발해 말기의 거란관계
8세기 3대 대흠무(737-793)의 시대가 지나고 4대왕부터 9대왕까지 발해는 왕족간의 치열한 권력 쟁탈의 시기로 접어든다. 10대 선왕(818~830), 11대 대이진왕(830-857) 시기의 성세함으로 40~50년간 번영을 누리던 발해는 14대 대위해(893-906) 15대 대인선(906-926)의 시기에 이르러 쇠퇴한 모습을 보여준다. 발해의 주요한 문제는 정치적 불안정이었다.
반면, 안록산의 난과 돌궐이 744년 위구르에게 멸망하면서, 거란은 서서히 세력을 키우게 된다. 840년 위구르가 내란과 북방 키르키즈족에 침입에 의해 붕괴되고, 당이 크게 혼란에 빠지면서 거란은 그 힘을 키울 기회를 갖게 된다.
발해 10대 선왕은 주변의 말갈족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여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듣게 되나, 당시 거란과의 관계는 분명하지가 않다.
거란이 강성해진 것은 발해마저 나약해졌던 시기인 900년대초이다. 아보기가 군사권을 쥐고 권력의 정면에 나선 901년, 거란은 실위, 해족 등 주변종족을 정벌하여 그 힘을 급속히 키웠으며, 902년에는 벌써 40만 대군이 되었다.
요사 권 28, 천조제기 2, 천경 6년 기록에는 10세기초부터 20년간 발해와 요동을 부대로 전쟁을 치뤘다는 기록이 있으며, 903년과 906년(요사 태조 본기상), 야울아보기가 동쪽과 동북쪽의 여진을 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거란과 발해와의 전쟁으로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915년 야울아보기는 자신의 삼촌벌되는 질라부 이리근이며, 총명하기로 이름난 할저와 그 두 아들 질리특과 삭괄을 발해로 거짓 망명케 하였다는 사실이다. 고구려가 도림스님을 파견하여 백제를 위기에 몰아넣었듯이, 이들은 발해에서 거란의 망명왕족으로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각종 정보를 수집해서 거란으로 되돌아가 발해 멸망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918년 발해는 거란에게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919년 거란은 요양옛성을 점령하여 그곳에 동평군을 두며, 발해에 대한 압박을 거듭한다.
발해는 921년 고려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고, 925년에는 신라와 친선관계를 갖는 노력을 하지였다. 『거란국지』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ꡒ옛날에 발해국왕 대인선은 본래 해 및 거란과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데 야울아보기가 처음에 일어나 8부를 병탄하고 계속하여 군사로써 해국을 병탄하자, 대인선은 이를 크게 두려워하여 은밀히 신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돕기를 약속하였다. 태조가 이를 알고 의논을 모았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ꡓ
발해는 신라와도 연합을 모색할 정도로 거란에 대한 위협에 근심했으나, 구체적인 힘을 기르는데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924년 6월에서 9월까지 야울아보기는 서방종족들에 대한 정복활동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리고는 발해를 멸망시킬 원정을 준비한다. 그리하여 925년 12월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하여 3일만에 항복시킨다. 그리고 그 6일만에 거란군의 선봉대인 기병 1만이 발해수도 가까이에 온다. 이때 발해의 수도방위사령관인 로상은 너무도 쉽게 패전한다. 로상은 이후 거란에서 출세한 것으로 볼 때 내부의 반란세력이었기에 거란과 타협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마침내 발해는 상경욜천부가 포위된지 3일만에 군사들이 항복하고, 다시 3일만에 대인선은 정식으로 항복을 한다.
발해와 거란과의 관계는 거란의 승리로 결정나며, 이후 발해 유민의 지속적인 부흥운동이 생기게 된다.
**참고자료 1.
유목국가의 부족연합체의 일반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군주씨족과 인척씨족이 핵심집단을 형성
2. 지배집단과 연합하여 문화적, 혈연적으로 그들과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 연맹집단
3. 이들 두 집단에 의한 정복전쟁의 결과 복속하게 되어 비록 일체감을 느끼지는 못핮만, 제국의 일원이 된 종속집단
4. 정주지역에 대한 약탈전쟁으로 강제사민된 농경민, 수공업자들의 부용집단
돌궐의 경우, 유연, 거란, 해, 말갈, 타타르 등의 비투르크계 부족들이 종속집단을 이루었다.
(김호동, 「고대유목국가의 구조」, 『강좌 중국사』Ⅱ, 1989년, 270~271)
**참고자료 2
발해 15대 왕의 계보
1. 고왕 (698-719) 대祚榮
2. 무왕 (719-737) 대武藝
3. 문왕 (747-793) 대欽武
4. 폐왕 (793-794) 대元義 - 무왕의 아들
5. 성왕 (794-795) 대華璵 - 문왕의 손자, 굉임의 아들
6. 강왕 (795-809) 대嵩璘 - 문왕의 아들
7. 정왕 (809-812) 대元瑜 - 강왕의 아들
8. 희왕 (812-817) 대言義 - 강왕의 아들
9. 간왕 (817-818) 대明忠 - 강왕의 아들
10. 선왕 (818-830) 대仁秀 - 고왕의 동생 대야발의 4대손
11. 彛震왕 (830-857) - 선왕의 손자. 신덕의 아들
12. 虔晃왕 (858-871) - 선왕의 손자. 신덕의 아들
13. 경왕 (871-893) 대玄錫
14. 瑋瑎왕 (893-906)
15. 인譔왕 (906-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