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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르 샤갈의 그림과 시
강 경 호
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마치 마술을 부린 듯한 몽환적인 이미지들이 신화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였다. 설사 그림 속의 대상들이 현실세계의 일이어도 지상의 풍경들이 아니었다. 아니 그림 속의 대상들이 동화적이어도 인간의 일이었다.
그가 즐겨 쓰는 청색과 녹색, 그리고 붉은색이 만나면서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의 느낌은 내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샤갈은 확실히 붓으로 마술 부리는 연금술사였다. 이를테면 애인들, 약혼자, 신랑 신부의 뜨거운 포옹을 침실 공간에 두지 않고 집 밖에 그린 것, 축배를 들게 하고, 새하얀 신부의 치맛자락을 끌게 한 채 사랑하는 연인을 대기 속으로 끌어낸 것 등은 지금껏 보아온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색채와 공간감각은 현실을 초현실로 바꿔놓는 변용력이 귀신 같았다. 이 변용력이야말로 샤갈의 예술적 창조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나의 그림 세계를 꿈이 아니라 삶 자체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세계와 무관한 그림이 아니다. 러시아 유태인 마을에서 살았던 유년의 기억들과 1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으로 성(聖)과 속(俗)의 두 영역을 결합시키려 했고, 스페인의 내란과 각지에서의 유태인 학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서정적이고 시적인 회화의 문법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샤갈 <자화상>, 1909년
마르크 샤갈은 1887년 러시아 리투아니아의 국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벨로러시아 비테브스크의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인구 4만 명의 시민은 대부분 유태인이었는데 아버지는 청어창고의 고용원으로 아홉 명의 자녀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샤갈은 아버지를 가엾게 생각하면서도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무능한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했다. 덕분에 유태인이 입학할 수 없는 제립 고등중학을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시절 아버지를 따라 시나고그에 간 것은 큰 행운이었다. 거기에서 구약시대의 많은 기적과 예언자 에스겔이 본 공중의 원광과 엘리야를 하늘로 실어간 수레의 형태를 마음 속에 새길 수 있었다. 시나고그에서의 문화적 충격은 훗날 우리가 기억하는 화가 샤갈을 탄생하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즉 그의 그림이 초현실주의가 아닌 비현실주의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파리에 들어가 그때 새로운 조형언어를 구사하던 큐비스트들과 시인 아폴리네에르를 만난 이후 부터이다. 그는 큐비즘적 시각을 어느 정도 도입하면서도 큐비즘과 자신의 회화와는 완전한 분리를 추구했다. 그 결과 나타난 그의 그림은 집과 사람의 몸이 뒤집히고, 병사의 모자가 튀어 오르고, 수레가 비상하려고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후 샤갈의 그림은 모두 거꾸로 보아도 감상을 해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참된 조형언어를 듣기 위해서는 거꾸로 보여지기를 바라는 이른바 `전면(全面)회화'로 발전한다. 정상적인 위치에서는 오히려 은밀하던 신비의 색채들이 도치됨으로써 강력한 다른 세계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샤갈은 붓으로 풍부한 시정의 색채를 표현하는 마술사였을 뿐만 아니라 글로도 서정적인 색채를 잘 표현하였다. 시인이기도 했던 샤갈은 『시집』을 남겼다. 다음은 샤갈의 시 「홀로인 것은 나의 것」 전문이다
홀로인 것은 나의 것
내 영혼에 존재하는 나라,
나는 나의 모국에서처럼
여권 없이 그 나라에 입국한다.
그 나라는 나의 슬픔과 고독을 바라본다.
그 나라는 나를 재워주고
향기로운 돌로 나를 덮어준다.
나의 내부에는 꽃이 만발한 꽃밭이 있다.
내 꽃들은 내가 만든 것들이다.
거리는 모두 나와 관련이 있지만,
그곳에는 집이 하나도 없다.
그곳은 나의 유년시절 이후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살 집을 찾아
공중에서 떠돌아다닌다.
그들은 내 영혼 속에서 산다.
내가 미소를 짓는 것은
나의 태양이 빛날 때이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밤에 보슬비가 오는 것과 같다.
한때 나는 머리가 두 개였다.
한때 그 두 얼굴들이
사랑이 장밋빛으로 물들었고,
장미의 향기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지금 나는 뒤로 물러설 때조차도
높다란 대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그 문 뒤에는 벽이 죽 이어져 있는데
그곳에는 소리를 죽인 천둥과
빛이 꺾인 번개가 잠들어 있다.
홀로인 것은 나의 것
내 영혼에 존재하는 나라.
-마르크 샤갈, 「홀로인 것은 나의 것」 전문
샤갈 <나와 마을>, 1911년
예술가로서의 샤갈의 고독은 그를 늘 사색적인 삶을 살게 했다. 특히 홀로 깊은 생각에 사로잡힌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샤갈은 생명을 부여한다. 그렇게 해서 샤갈은 영혼이 존재하는 나라를 마음껏 꿈을 꾸며 “여권없이 그 나라에 입국한다.” 샤갈의 영혼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샤갈은 그 상상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슬픔과 고독을 바라본다.” 예술가로서의 슬픔과 고독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영혼이 존재하는 “그 나라는 나를 재워주고/향기로운 돌로 나를 덮어준다”고 샤갈은 말한다. 영혼에 대해, 존재에 대해 사색하는 즐거움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상 세계에서 “나의 내부에는 꽃이 만발한 꽃밭이 있”는데 “내 꽃들은 내가 만든 것들”이라고 말하는데 아름다운 것을 향한 샤갈의 예술이 지향하는 중심을 보여준다. 샤갈의 그림을 흔히 `무중력 회화'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그림 속에 존재하는 것들은 공간 개념을 초월해 거꾸로 있거나 목과 몸통이 따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존의 관념을 벗어나 충격적이고 참신하다. 그러므로 거리의 “그곳은 집이 하나도 없다” “그곳은” “유년시절 이후 파괴되었고,/주민들은 살집을 찾아/공중에서 떠돌아 다”니기 때문이다. 즉 샤갈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러시아 비테브스크에 대한 추억을 그의 그림 속에 수없이 이미지화시킨다. 그의 머리 속에서 존재하는 고향은 유년의 고향일 뿐이다. 그것은 그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굴곡을 겪는 동안 아름답고 순수했던 기억을 간직한 고향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살 집을 찾아” “떠돌아 다”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유태인의 슬픔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샤갈 <러시아와 나귀들과 기타 등등에게>, 1911년
샤갈의 그림 속의 이미지들이 시 속에서도 나타나기도 하는데 “한때 나는 머리가 두 개였다.”가 바로 그 대목이다. 그의 그림 속에 머리가 둘인 사람이 자주 등장하는데 물론 그것이 때에 따라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샤갈의 시 속에서는 `영혼이 분리된' 존재,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그런데 샤갈의 시 속에서는 `연인을 향한 순정한 사랑' 쯤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다.
한편 “높다란 대문을 향해/앞으로 나아가는” 샤갈의 의식 속에는 “그 문 뒤에는 벽이 죽 이어져 있”다. 주지하다시피 `문'은 `출구', 또는 `소통'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벽'은 `막힘'과 `불통'을 뜻한다. 즉 샤갈은 “뒤로 물러설 때조차도” 나아가고자 하나, 무엇인가가 그를 가로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소리를 죽인 천둥과/빛이 꺾인 번개가 잠들어 있”다. 다시말해 유토피아를 향한 샤갈의 노력은 현실에서 좌절을 맛보곤 하는 것이다. 슬프고 고독한 샤갈의 심상을 짐작하게 하는 이 시편은 확실하게 그 의미를 모두 풀어내기는 힘들어도 그의 그림과 함께 마주했을 때 존재의 슬픔과 고독함을 느끼게 한다.
샤갈 <비테프스크의 마을의 풍경>, 1917년
저기 저곳에 낮은 집들이 바짝 붙어 있다
저기 저곳에 묘지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저기 저곳에 폭이 넓어진 강이 흐른다
저기 저곳에서 나는 나의 삶을 꿈꾼다
밤이면 천사들이 하늘을 날고
흰 광선이 지붕 위를 비춘다
그것은 나에게 기나긴 길을 예언해 준다
그것은 집 위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민중이여, 내 노래는 그대를 위해서이다
그대는 이 노래를 듣고 기뻐하리
나의 힘찬 목소리에 모든 슬픔과 고단함이 사라진다
나는 당신을 보고 꽃과 숲, 사람과 집을 그린다
야만인처럼 나는 당신의 얼굴을 색칠한다
밤이나 낮이나 나는 당신을 찬양한다
-마르크 샤갈, 「야만인처럼」 전문
샤갈 <천사의 타락>, 1923~33~47년
이 짧은 시 역시 샤갈 그림의 이미지들을 합성한 작품이다. 특정한 작품을 노래한 것이 아닌 것이다. 정확히 말해 샤갈의 심상을 표현한 시이다. 이를테면 “저기 저곳에 낮은 집들이 바짝 붙어 있다”에서 “바짝 붙어 있”는 “낮은 집”들은 그의 고향 비테브스크에서 보았던 집들이다. 파리 같이 자본문명이 덧칠된 도시의 높은 집이 아니다. 그의 그림 속에서는 「나와 마을」 「마을 위」 「비테브스크 마을의 풍경」 등 비테브스크를 연상시키는 샤갈의 시처럼 “바짝 붙은 낮은 집”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저기 저곳에 묘지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에서의 “묘지” 역시 고향 비테브스크 부근의 유태인 묘지이다. 이 부분을 연상시키는 1917년에 그린 「묘지」는 마을의 집들과 함께 엉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에 광채가 빛나고 있는 모습이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샤갈 <묘지>, 1917년
“밤이면 천사들이 하늘을 날고/흰 광선이 지붕 위를 비춘다”에서 천사는 그의 그림에서 꼭 “밤”에만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 속의 배경이 밤인지 낮인지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천사는 「야곱의 꿈」 「아브라함과 세 천사」 「노아와 무지개」 등 기독교를 배경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서 “천사”의 출현현은 꼭 기독교를 배경으로 해서 나타난다고 보기 어렵다. `하시디즘 유대교'가 샤갈의 상상력을 자극한 영적인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하시디즘 유대교는 신과 인간이 서로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으며 유럽 유대교의 정신적, 지적 지주 역할을 했는데 하시디즘 이야기에는 도로 위에 나는 존재나 천사들이 등장한다. 이 이야기들은 그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샤갈이 이 콩트에서 천사의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흰 광선이 지붕 위를 비”추고 “그것은 나에게 기나긴 길을 예언해 준다”고 했는데 이는 천사들이 “흰 광선”과 함께 출현한다고 믿음으로써 신성함과 거룩함을 지닌 종교적 엄숙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하늘을 날고/흰 광선이 지붕 위를 비추”는 현상에서 샤갈은 “길을 예언”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천사들”의 출현과 “흰 광선이 지붕 위를 비”추는 것만으로도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인 것이다.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천사는 인간에게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천사의 등장은 당연히 하느님의 출현이며 여기에서 샤갈은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베를린에서의 샤갈과 벨라, 이다>, 1923년
여기까지 살펴본 샤갈의 시 「야만인처럼」에서는 낮은 집들이 바짝 붙어 있고, 그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고, 강이 있는 곳에서 사는 화자, 즉 샤갈의 평범한 기억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들은 그의 고향 비테브스크에서의 삶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그가 신실한 신앙을 마치 어둠 속의 등불처럼 바라보며 생을 건너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극히 평범한 민중의 한 사람인 샤갈은 그가 쓰는 시이든 그림이든지 간에 민중들에게 “내 노래는 그대를 위해서이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마치 이른바 `평범한, 낮은 자'처럼 살면서 `하느님이 인도해주는 길을 믿으며 살듯' 자신도 민중들을 위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민중들을 위해 “꽃과 숲, 사람과 집을 그”렸다. 때로는 인간의 추악함을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내기도 했지만 모두가 민중을 향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형상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샤갈은 그의 “힘찬 목소리에 모든 슬픔과 고단함이 사라”지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샤갈의 「야만인처럼」은 그의 예술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샤갈 <아크로바트>, 1930년
-계간<시와사람> 2010년 여름호 57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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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제 카페로 담아갑니다.
샤갈의 그림소재와 좋은글
너무 좋아서
제 까페로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