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허비되는 돈은 전 사회적으로도 손실이지만 더 큰 손실은 그 돈을 지출하는 가정에서 입을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은 효를 중시하는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진 국가라 부모를 연명시키는 데에 돈을 아끼는 것은 불효로 간주되어 이때에 더 많은 돈을 투여한다.
부모의 위중한 병을 당했을 때 한국인들을 가장 약하게 만드는 것은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라는 논리이다. 부모가 마지막 가는 데에 돈을 어찌 아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가져다 부모를 하루라도 더 살리기 위해 마구 쏟아 붓는다. 이 경우 돈이 넉넉한 집안도 치료비는 말할 것도 없고 장례까지 치루고 나면 빚더미에 올라앉기가 십상인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집안은 전세금까지 빼다 치료하느라 부모의 상까지 치르고 나면 살 집마저 없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기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이것과 꼭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최근 한국에서 연명 치료 중단과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매우 충격을 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의료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통 보라매 병원 사건이라 불린다. 이 사건은 1997년에 일어난 것으로 자세한 병명이나 경과에 대한 설명은 다 생략하기로 하자. 갑작스러운 질환으로 어떤 환자가 의식 혼미의 상태(뇌출혈)로 병원으로 실려 왔다. 응급수술이 곧 실시되었으나 증세로 보아 이 환자의 사망률은 90%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처하자 환자의 보호자(부인)는 도저히 더 이상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으니 퇴원시켜 달라고 했다. 의사는 이 부탁에 만일 이 환자가 지금 퇴원하면 바로 죽게 된다고 하면서 보호자를 극구 만류했다. 그러자 보호자는 후에 환자가 사망하더라도 법적인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겠다고 해 그렇게 일을 처리해서 환자를 퇴원 조치시켰다. 보호자가 환자를 데리고 집으로 온 다음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자 환자는 곧 숨을 거두었다.
여기서 일이 끝났으면 사회적으로 아무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였을 터인데 환자의 가족 중 한 사람(누이)이 살인 혐의로 의사를 고발하면서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재판은 대법원까지 가서 이 사건에 연루된 의사 두 사람이 ‘작위(作爲)에 의한 살인방조’(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로 선고 받고 막을 내렸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2003년에도 있었다. 이것은 한 아버지가 의식불명이 되어서 약 7년 동안 병상에 있던 딸의 인공호흡기에 달린 전원을 꺼서 죽게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발생한 이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서울의대의 허대석 교수에 의하면 이 두 사건에는 i) 가족들이 의사 결정하는 데에 ‘경제적 요인’이 깊게 개입되어 있고 더 나아가서 ii) 환자 자신의 ‘자의적 의사 표현’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유의 사건은 미국에도 있었다. 미국에는 보고 된 사례가 워낙 많아 다 인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대표적인 사건 중에 하나로 1976년에 뉴저지에 있었던 퀸란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이 사건은 소생불능 상태에 빠진 퀸란이라는 22세의 여자 환자를 둘러싸고 있었던 일로 딸의 상태가 가망 없음을 감지한 부모가 뉴저지 지방법원에 딸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는 권리를 청원하면서 생긴 사건이다. 병원은 이 청원이 환자의 의사(意思)가 아니었기 때문에 거절했는데 이에 다시 부모들은 환자의 ‘법적 후견인’이 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법원에 청원했다.
이 청원은 지방법원에서는 기각되었으나 대법원에서 인정받아 퀸란의 인공호흡기는 제거된다. 그런데 이 환자는 신기하게도 곧 죽지 않고 7년간을 더 살다가 자연사를 하게 된다. 이 사례가 중요한 것은 의료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환자나 보호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정의한 첫 번째 판결의 예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1990년에 미조리 주의 크루잔이라는 미국 여인의 경우도 있었고 2005년에 플로리다 주의 쉬아보 사건도 있었는데 이들 경우에는 호흡기 제거가 아니라 영양 튜브 제거를 허락해 달라고 청원한 것이 다를 뿐 내용은 꼭 같은 사건이었다.
아울러 2004년 미국에서 만들어져 2005년도 아카데미 상 시상식을 독점하는 등 매우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밀리온 달러 베이비”에서도 회생 불능인 자기 제자를 안락사 시키는 것이 나와 당시에 다시 한번 인간의 존엄사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런 사건들은 환자의 존엄한 죽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었는데 특히 퀸란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환자 자신의 (죽을) 권리’와 ‘환자의 사전 의사(事前 意思)’를 중시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앞에서 본 한국의 경우와 다른 점인데 이 점에서 한국은 아직 이런 환자가 가질 수 있는 권리에 대해 보편적인 인식이 잘 안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든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에서는 1990년 새로이 환자의 자기결정법(patient self-determination act)을 만들어 환자가 적법하게 유언장이나 의료 위임장을 만들 수 있는 권리를 병원 등 환자들을 취급하는 의료기관에서는 명시해 놓아야 한다고 법률적으로 정하게 된다. 이 법률에 의거해서 이제 미국의 모든 의료기관에서는 환자의 권리로서 ‘사망 선택유언(living will)'이나 ’항구성(恒久性) 대리 위임권(자)(durable power of attorney)과 같은 형태로 사전 의료 지시서(advance directive)를 쓸 수 있는 모든 정보나 기회를 환자들에게 제공하도록 되어 있다.
이 법령이 소기하는 바는 위에서 본 대로이다.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거부해서 환자가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며 죽을 수 있는 권한을 행사(이행)하려 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환자의 자율성 확보와 담당의사와 깊이 있는 소통을 위해서 이런 조치들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시서는 환자가 아직 의식이 있을 때 작성해서 가족 증인의 서명과 공증인의 서명까지 받게 되어 있다.
이 지시서에 대한 예가 앞에서 인용한 김건열 박사의 책에 수록되어 있어 관심 있는 사람은 참고할 수 있다. 김 박사는 여기서 사전 의료 지시서 뿐만 아니라 대리인 위임장(health care proxy, 항구성 대리 위임권과 같은 것)에 대한 예를 직접 게재해 놓았다. 그 예문을 보면, 만일 자신이 의식 불명 상태가 된다면 자신에게는 ‘기도삽관’이나 ‘기관지 절개술’ 및 ‘인공기계 호흡치료법’, ‘항암화학요법’, ‘인공영양법’, ‘혈액투석’ 등을 시행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 있다.
이때 재미있는 것은 치료의 요구나 거부에 관한 사항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항암화학요법을 거부할 경우 그것은 그 치료의 효과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환자 자신의 연령과 체력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문구가 있는 따위가 그런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인체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기본적인 치료에 대해서는 계속 시술을 바라지만 임종 시 혈압 상승제나 심폐소생술은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고 있다. 보다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이 예문은 미국에서 나온 것을 모델로 해서 만들었는데 미국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재클린 오나시스 같은 유명인들이 생전에 이런 사전 유언장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이 유언장은 미국에서만 통용되는 게 아니라 이미 한국에서도 실시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사전 유언장을 써도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 주의를 요한다.
환자가 치료 불능의 상태에 들어갔을 때 의사가 환자 본인이 미리 써놓은 사전 의료 지시서를 제시하려 하면 약 10% 정도의 경우 그 환자의 보호자들이 의사가 환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가서 이 문서를 제시하는 경우에는 이번에는 약 25% 정도의 환자들이 마음을 바꾸어 그 지시서에 씌어진 대로 진행시키는 것을 거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약 25%--35% 정도의 경우에 이 문서가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현세에 대해 갖는 강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이미 밝혔지만 한국인들이 내세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살아있는 것에만 탐착하는 것은 많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했으면 하는 것은 과거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는 안락사 문제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안락사를 존엄사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보려는 것이다.
존엄사(尊嚴死)란 일본에서 만든 용어인데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켜가면서 죽는 가장 이상적인 죽음을 지칭한다고 하겠다. 존엄사에 대한 이해를 더 쉽게 하기 위해 우선 안락사에 대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안락사에는 여러 등급의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그 각각의 안락사 개념을 보기에 앞서 안락사를 일반적으로 정의해보자.
안락사란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경우 견디기 힘든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일정한 물질(약)을 투여하는 등의 인위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자연적인 사망 과정 시기보다 환자를 사망에 일찍 이르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안락사는 현행의 실정법 하에서는 극히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모든 나라에서 불법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미국은 오레곤 주에서만 합법적이다!).
이 안락사의 등급을 보면, 적극적 안락사와 간접적 안락사, 소극적 안락사, 의사 도움 하의 자살(PAS, Physician-Assisted Suicide) 등과 같은 다양한 개념의 등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로 나오는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바람과 관계없이 환자의 사망 과정에 의사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반면 ‘간접적 안락사’는 의사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처치하는 도중 예상된 부작용으로 인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 마지막에 나온 ‘의사 도움 하의 자살’은 환자가 자신의 생명을 끊는 데 필요한 수단이나 정보를 의사가 제공함으로써 환자 스스로 죽음을 자연사보다 앞당기는 경우를 말한다.
항상 문제가 되고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세 번째에 있는 소극적 안락사이다. 이 안락사는 일단 죽음에 직면한 환자에게 치료를 중단하거나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환자가 죽게 내버려 두는 경우를 말한다. 이 죽음의 경우는 존엄사와 흡사하기 때문에 다소 혼선이 생기는데 ‘존엄사’란 말기의 불치병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유보 혹은 중단함으로써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는 두 가지 전제가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우선 의학적으로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중증질환의 말기라는 의사의 진단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앞에서 본 사전 의료 지시서나 법적 대리인 위임장으로 표현되는 환자 본인의 의사(意思)가 반드시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존엄사에서는 죽음을 존엄하게 맞이하려는 환자의 뜻이 존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존엄사가 소극적 안락사에서처럼 단순한 ‘연명 치료 중단’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혹자들은 존엄사를 소극적인 안락사로 받아들여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들을 의사들이 포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존엄사에서는 비록 연명치료는 중지하더라도 통증 관리나 생리 기능 등을 도와주는 ‘완화의료(palliative medicine)'의 시술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존엄사는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고통을 덜 느낄 수 있게 해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고 죽게 도와주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 존엄사법 혹은 자연사법이 합법화되어 이미 시행 중에 있는데 한국은 아직 그런 단계까지는 가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존엄하게 죽는 것과 관련해 한국은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요소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병원에서 맞이하는 죽음이다. 한국인들은 여러 사정 상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그곳서 장례까지 치르고 있는데 이 관습은 다분히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이 자리는 그것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 그냥 지나가기로 하자. 그 대신 여기서는 한국의 병원에서 중환자로 죽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에 대해서만 보기로 하자.
우리가 좋은 죽음(well-ending)을 말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병원에 그런 장소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한국에는 그런 방, 즉 영면실(永眠室) 혹은 임종실로 부를 수 있는 방을 갖춘 병원이 거의 없다. 보통 한국의 중환자들은,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여러 명이 같이 쓰는 방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대한 문제가 있다.
우선적으로 보면, 환자가 위급 상황이 되면 생명을 연장시키는 기계들이 엄청나게 동원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인공호흡기, 심폐소생기 등등 환자는 그야말로 기계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면 정작 당사자는 의식이 없어 본인은 느낄 수 없을지 몰라도 다른 침상에 있는 환자나 그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나도 위급 상황에 빠지면 저런 취급을 받겠구나’ 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매우 불안한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다 이 환자가 죽으면 주위의 사람들은 더 큰 충격에 빠진다. 환자의 시신이 바로 보관소로 가지 못하고 몇 시간이고 그 침대에 있는 경우도 있다. 바로 옆에 시신이 있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없다. 나도 곧 저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동시에 죽음에 대해 엄청난 공포감을 갖게 된다. 죽음을 피해 달아나고 싶은데 병원에서는 보이는 게 인간의 죽음이다. 죽음이 코앞에 있으니 그 불안감을 어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게 영면실이다. 환자가 죽음이 임박해지면 그 환자와 가족들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방을 옮겨야 한다. 그곳에서 환자는 자신이 일생 사랑했던 가족들과 차근차근하게 이승에서의 작별을 준비한다. 혹 응급처치를 하느라 많은 기계가 동원되어도 다른 환자들이 없으니 피해줄 일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긴요한 방을 갖고 있는 병원이 성모병원이나 연대 병원 등 극소수밖에는 없다.
대신에 우리는 영면실에 비해 그 중요도가 상당히 떨어진다고 볼 수밖에 없는 영안실에 대해서는 엄청난 관심을 가진다. 영안실은 갈수록 화려하게 꾸미고 더 고급화된다. 정말 필요한 영면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주의가 환기되지 않은 차에 영안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더 높아간다. 이것은 일의 선후가 바뀐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아직 죽음을 정면으로 대하고 더 깊게 생각해 볼 그런 단계에는 다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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