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벽초의 생애와 작품 {임꺽정}에 대해서
홍명희는 작가로서보다는 주로 저명한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로서 활동하였으며, 자신 또한 본격적인 문학인으로 활동했다고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그는 동경 유학 시절부터 육당, 춘원과 더불어 조선 삼재(三才)로서, "우리문학을 창조하신 세분" 중의 한사람으로 손꼽혀온 인물이다. 홍명희가 남긴 유일한 작품인 {임꺽정}은 작품의 방대함과 아울러 그 의미로 인하여 당대에도 많은 화제를 뿌렸으며 지금도 역사소설의 논의에 있어서 반드시 검토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 생애 홍명희(홍命憙, 호는 假人, 可人, 碧初)는 1888년 충북 괴산에서 명문 사대부인 풍산 홍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홍범식은 1910년 금산군수로서 한일합방이 되자 자결한 인물로 유명하다. 홍명희는 유년시절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고 문재가 뛰어나 8세에 한시를 지었고 11세 때부터 {삼국지} 등의 중국소설을 읽었다고 한다. 15세때 서울 중교의숙에서 공부하고 19세때 일본으로가 동경 대성중학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독서를 하였으며, 춘원, 육당 등과 교우관계를 맺었다. 1910년 귀국하였다가 1913년 중국 일대를 방랑하였다. 그 후 1918년 귀국하여 3. 1운동에 관여하여 투옥되었다. 그후 192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1926년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23년에는 좌익 사상단체인 신사상 연구회, 화요회의 간부로 있었으며, 이어서 1927년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조직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그후 1929년 다시 투옥되어 4년(만 2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해방직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47년에는 중도 좌파에 속하는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1948년 민주독립당을 이끌고 남븍연석회의 참석차 월북하여 그곳에 남아 부수상, 과학원장 등을 역임하다가 1968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삶(월북이전)은 "봉건적인 것과 반봉건적인 것과의 긴장관계" 혹은 "반항정신과 귀족취미의 상호 모순 갈등"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탁월한 평형감각을 유지했다. 또한 문학에 있어서도 문학은 필연적 시대의 산물이며 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지만 주의나 개념에 앞서서 좋은 작품을 쓰는 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 문학의 중요한 요인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록 그가 중도적 입장에 서서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하면서도 혁명가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을 강조하고 문학이 반항정신을 놓치지 말아야 한 다고 이야기한 것은 그의 행로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2) {임꺽정}의 연재와 출간 {임꺽정}은 {林巨正傳}으로 1928년 11월 21일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해서 1929년 12월 26일까지 302회분이 [봉단편](鳳丹篇), [피장편](皮匠篇), [양반편](兩班篇)으로 연재되었고, 수감생활로 3년간 중단되었다가 2차로 1932 12월 1일부터 1934년 9월 4일,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연재를 중단하기까지 541회 연재되어 [의형제편](義兄弟篇)과 [화적편](火賊篇)의 초두가 쓰여졌다. 3차 연재는 1937년 12월 12일 {林巨正傳}을 {林巨正}으로 고쳐서 재개되었다가 {조선일보}의 폐간으로 1939년 3월 11일 까지 228회분에서 중단되었다. 단행본으로는 그해 조선일보사에서 전 8권으로 계획하고 {林巨正} 제1, 2, 3권(의형제편 상,하, 화적편 상)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제4권(화적편 중)이 출간되고 10월 잡지 {조광}에 단 일회분이 연재되고 다시 중단된다. 해방후 을유문화사에서 [의형제편] 1, 2, 3권과 [화적편] 1, 2, 3권을 간행하였으나 조선일보사와 마찬가지로 전반부([봉단편] [피장편] [양반편])는 출간하지 않았다. 이는 홍명희 자신이 전반부를 다시 개작하려 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그해 그의 월북으로 작품은 완결되지 못하고 전반부도 출간되지 못한 채 소설 {임꺽정}은 지하로 묻히게 되었다. 이 작업은 북한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후 {林巨正}이 1985년 사계절 출판사에 의해서 전9권으로 출판되면서 우리 문학사에 다시금 등장하게 되었다. 비록 1987년 월북, 납북 작가의 해금에 끼이지 못하고 여전히 묶여 있지만 많은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임꺽정}은 1991년에 사계절에서 재판하여 전10권([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의형제편]1, 2, 3, [화적편]1, 2, 3, 4)으로 되어 있다.
2. 작품의 줄거리 연산조 때 유배당한 홍문관 교리 이장곤은 배소를 탈출한 후 신분을 숨긴 채 함흥 고리백정의 사위가 되어 아내 봉단과 금실 좋은 부부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조정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그는 상경하여 동부승지로 복직된다. 또한 봉단의 숙부 양주팔도 이장곤의 청으로 서울로 오지만 서울을 갑갑히 여기고 명산대천 구경을 다닌다. 그는 묘향산에서 도인을 만나 음양술수를 전수받아 서울에 돌아오자, 이승지의 주선으로 재취하여 살면서 소일삼아 갖바치 일을 한다. 뒤이어 상경한 봉단의 외사촌 임돌이도 양주팔의 주선으로 양주 소 백정의 데릴사위가 된다.(봉단편)
갖바치 양주팔은 미천하나 문식이 높아 조광조 등 당대의 양반들이 드나들면서 그와 교우관계를 맺는다. 임돌이의 딸이 갖바치의 아들과 혼인하자 장사소년 임꺽정도 누이를 따라 상경한다. 그래서 그는 한 동네에 사는 이봉학, 박유복과 함께 의형제를 맺고, 갖바치가 꺽정이 대장감임을 알고 그의 밑에 두고 공부를 가르치게 된다. 꺽정은 한 늙은이를 만나 검술을 배우고 뛰어난 검객이 되어 1년 반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갖바치는 20년 전의 작정대로 전국을 유람한다. 그를 따라 꺽정이도 전국을 떠돌아 다니다가 백두산에서 운총과 천왕동이 남매를 만나 운총을 아내로 맞아 들인다. 한편 갖바치는 입산하여 병해대사가 되어 칠장사에서 생불로 추앙받는다.(피장편)
중종 이후 양반사회는 전쟁으로 혼미를 거듭하였다. 명종이 즉위해 대왕대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외척인 윤원형이 우의정이 되어 실권을 장악한다. 중 보우는 그 틈에 대왕대비의 신임을 받아 궐내에 거처하면서 무엄한 행동을 계속한다. 그런 보우를 혼내주기 위해 병해대사는 예년보다 더 큰 불사를 하는 양주 회암사로 찾아가 대중 앞에서 그의 위신을 실추시킨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라 재물을 먹으며 교활한 행동을 계속한다. 이런 가운데 왜변이 일어났다. 이봉학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꺽정은 그와 함께 출전하려 하지만 백정 신분 때문에 군에 뽑히지 못하고 혼자 전장에 갔다가 위기에 처한 이봉학을 구출해준다.(양반편)
농민의 유복자로 태어나, 행랑어멈이 된 편모 밑에서 자란 박유복이는 도인을 만나 병을 고치고 표창 던지는 재주를 익혀 친을 죽게 한 노첨지를 죽여 원수를 갚는다. 관가에 쫓기자 도주하다가 도둑 오가의 수양딸을 얻어 청석골에 살게 다. 인근에 사는 머슴 곽오주는 장꾼들을 털던 오가를 때려 눕혀, 보복을 하러 온 유복이와 의형제가 된다. 젊은 과부를 엎어와 부부의 의를 맺고 살다가 그의 아내가 주인집 아들에게 겁탈당할 뻔하였고, 그러다가 해산 후유증으로 죽자 젖동냥으로 아이를 키운다. 밤새 배고파 보채는 아이를 태질해 죽이고 아이 울음 소리만 들으면 미쳐서 아이를 죽이려한다. 그러면서 그는 청석골로 들어가 우는 아이는 무조건 죽이는 화적이 된다. 소금장수 길막봉이는 힘이 장사로 자형을 불구로 만든 곽우주를 잡아 관가에 넘기려 하나, 꺽정이가 화해 시킨다. 소금장사 길에 그는 데릴사위가 된다. 그 후 신분 탓에 멸시하는 처삼촌 박선달을 혼내주고, 장모의 구박 탓에 데릴사위 노릇을 그만두고 청석골로 들어가 화적이 된다. 황천왕동이는 백두산에서 자라서 걸음이 남들보다 훨씬 빨랐다. 그는 매부 꺽정의 집에서 지내다가 장기의 명수 백이방을 찾아 나선다, 천하일색의 딸을 둔 이방의 사위취재에 그가 통과해 장가를 들고 봉산의 장교가 된다. 배돌석은 역졸의 아들로 돌팔매질을 잘 하여 호랑이를 잡고 역졸이 되고 또 호환으로 과부가 된 여자를 재취로 맞는다. 그는 왜변 때 전쟁에 나가 이봉학과 교우를 맺었던 사람으로 유복과 천왕동이와 친하게 지낸다. 그런데 아내가 부정하여 살해하고 도망치다 체포된다. 그러자 유복이가 그를 구해 청석골로 도피하지만, 그 일로 인해 천왕동이는 제주도로 귀향간다. 왜변 때 뛰어난 활재주로 공로를 세운 이봉학은 전라감사 이윤경의 휘하에서 비장이된다. 그후, 출몰한 왜선을 퇴치한 공로로 현감으로 승진되어 제주에 간다. 제주에서 선정을 배풀고 봉학은 서울로 관직을 옮겨 천왕동이의 귀향을 푸는데 일조를 한다. 그러나 권문세가의 위력으로 임진별장으로 좌천되었다가 나중 꺽정이를 도왔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리자 청석골로 들어간다. 평양 감영의 진상품을 관장하던 아전 서림은 진상품을 빼돌리다가 들키자, 도주하던 중 청석골 화적패를 만나 그들과 함께 화적패에 가담, 모사꾼이 된다. 양주 임꺽정 집에 탈취한 봉물이 있다는 것이 탄로나 가족들이 투옥된다. 꺽정이는 청석골 화적패와 함께 가족을 구하고 고발한 이웃에게 복수를 하고 청석골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이들은 칠장사에 들러 세상을 떠난 병해대사의 불상 앞에서 의형제를 맺고 청석골 화적패를 조직하게 된다.(의형제편)
청석골 화적패의 대장으로 추대된 꺽정은 서울로 들어가 세 여자를 첩으로 삼고 기생 소홍과도 정을 맺는다. 이렇게 차례로 축첩하다가 처자와 다른 두령들의 성화로 귀가한다. 송악산에 단오굿 구경을 간 청석골 두령들을 그곳에서 납치당한 천왕동이의 아내를 구해내다가 살인을 저질러 관군의 쫓김을 받는다. 서림의 계책으로 치성들이러 온 상궁을 인질로 삼아 시간을 끌다가 부하를 거느리고 구원온 꺽정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청석골 화적패는 가짜 금부도사 행세를 한다. 그들은 군수를 체포하려 하고 신임군수 도임행차를 습격해 양반 관리들과 대적한다. 서울로 가서 기생 소홍의 집에서 지내던 꺽정이는 습격해온 포교들을 물리치고 서울을 탈출한다. 그러나 그의 첩들은 잡혀가 관비가 되고 소홍은 꺽정의 첩이 되어 청석골로 온다. 청석골 두령들은 신임 봉산군수를 살해하려고 평산 이춘동의 집에 머물면서 기회를 엿본다. 그런데 서울에서 체포된 서림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그 계획을 자백하는 바람에 5백명의 관원의 습격을 받는다. 그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청석골로 돌아온다. 그러나 청석?? 화적패를 소탕하기 위해 조정에서 관군을 파견한다는 소문과 서림이 그들의 행로를 다알고 있기에 오가와 졸개들을 남겨두고 자모산성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청석골에서는 대장으로부터 고립된 졸개들이 관군의 습격 소식을 듣고 동요하여 하나 둘 청석골을 버리고 떠나고 만다. - 이하 미완(화적편)
3. {한국문학통사} 5권과 {한국근대민족문학사}의 비교
1) {한국문학통사} 5권
{임꺽정}에서 다룬 사건은 어느 정도 역사의 사실에 근거를 두었고 그런 범위 안에 드는 소재를 모아 작품을 쓰면서, 기록에 남은 야사·야담·전설은 물론 구전된 이야기도 다채롭세 활용했다. 전통사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고 실상에 맞는 어법과 어휘를 정확하게 구사해 풍부한 내용을 지녔다. 비슷한 말을 이것저것 열거해 묘사를 다채롭고 생동하게 하고 흥미를 돋우는, 엮음의 수법을 판소리나 사설시조에서 물려받아 적극 활용했다. 소리패나 이야기꾼의 능란한 솜씨를 있는 대로 다 모아놓은 것 같은 도도한 흐름으로 대장편을 이루었다.
[봉단편]에서는 이장곤이 백정 사위로 겪는 집 안팎에서의 모멸을 아주 자세하게 다루어 하층민 생활을 이해하게 하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피장편]의 갖바치는 이인전설의 정수를 이었다. 그러면서도 도승의 가르침을 받은 영웅이 세상에 나가 천하를 호령하고 나라를 얻는다는 환상은 가지지 않게해서 지난 시기 영웅소설과 결별했다. [의형제편]에서는 도둑이 된 내력을 하나씩 다루어, 연대기 구성과 일대기 구성이 서로 호응되게 했다. 의형제를 맺은 일곱 장사들이 힘이 세고, 병장기를 하나씩 잘 다루는 재주가 있어 관군이 범접하지 못하는 도적이 되었다는 것은 근대소설다운 설정이 아니다. 국내의 원천과 풍부하게 연결되어 흥미를 자아낼 뿐만 아니라, {수호전} 의 영향도 쉽사리 확인된다. 그러나 용력을 자랑하는 군담의 과장된 수법을 버리고, 출신성분이 다양한 하층민이 각기 어떻게 살아가는가 자세한 형편을 서술하고 어떤 곤경 때문에 도적이 되었던가 납득할 수 있게 밝히는 데 힘썼다.그러나 인물들이 극단에 이르지 않고 여유 있게 펼쳐지는 세태묘사가 더 많으며 전형성을 무시한 열거와 중첩으로 작품이 길어졌다.
임꺽정이 의로운 일을 하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움직인 것은 아니다. [화적편]의 내용이 혁명거사로 치닫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관군의 토벌을 몇 차례 격퇴하고 생긴 한가한 시간에는 하는 일이별로 없어 작품구성이 긴장을 잃게 했다. 임꺽정이 서울서 첩을 얻고 살림을 차리는 삽화를 길게 넣어 세태묘사를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영웅소설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다. 영웅을 위인이나 범인으로 바꾸지 않았으며, 도적을 영웅이라 한 점에서는 윤백남의 소설과 상통한다. 그러나 도적이 큰 뜻을 품고 반역을 꾀했다고 비약하지 않았고, 여러 인물이 벌이는 많은 사건을 통해서 생활의 다양한 국면을 보여주는 데 치중해서 당시에 유행하던 세태소설의 특색을 역사소설에 옮겼다고 할 수 있다. 세태의 여러 국면에 대한 부분적인 인식을 합쳐서 사회 전체, 역사의 총체를 제시하는 안목은 작품에 갖추어져 있지 않다. 또 역사소설로 바꾸는 과업을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해 어떤 난관도 해결하는 영웅소설 원래의 특성을 잃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도 갖추지 못했다
2) {한국근대민족문학사}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은 어지러웠던 당시의 정치적 혼란상을 폭넓게 그리고 있다. 상,하층을 망라한 사회 각 계층의 투쟁을 광범위하게 묘사함으로써 작가는 장차 임꺽정이 이러한 사회적 갈등의 대표자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기 위한 신중한 사전준비를 갖추었다. 일반적으로 군도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 하층 생활의 묘사에 국한되기 쉬운 데 반해 {임꺽정}의 이 부분은 상, 하층의 생활을 아울러 그리고 있기 때문에 작품 전체 안에서 그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다. 특히 궁중과 사대부 사회의 풍속과 언어를 탁월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두 계층의 생활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지는 못하고, 겨우 그 관계를 연결하는 갖바치의 성격 형상화에 있어서도 상당한 무리를 초래 했다. 또 어지럽게 사건이 전개되어 전체적으로 구성이 산만해졌고 야사의 기록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부분적으로 궁중비화의 성격을 띠는 미숙함을 드러냈다.
[의형제편]은 짜임새 있게 구성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신분의 하층민들이 화적이 되어 청석골패에 가담하게 되기까지의 인생 역정을 일상적 장면 속에서 면밀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신분이 다양한 만큼이나 거기에 걸맞게 성격도 다양하고 개성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들이 청석골의 화적이 되기까지의 내력과 그들이 겪은 사건을 서술하면서 자연스럽게 당시 민중들의 일상생활과 세태풍속이 풍부하게 묘사된다. 민간의 풍속의 묘사와 전래 설화 및 고유의 인명이나 지명, 토속적인 고어와 민간 속담들을 풍부하게 활용하여 '조선적 정서'를 살리고 있다. [의형제편]의 인물들의 인생 역정은 봉건적인 신분제도 속에서 짖눌리면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결국 화적패로 귀결되는 과정을 통해 당대 현실의 본질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역사소설이 대부분 영웅주의적인 주인공의 생애 위주로 전개되는 전기적 형식을 취하는 것과 달리 다양한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을 탐구함으로써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화적편]은 사건의 골격이 대부분 사료에 의존해 있는데 몇 줄의 기록에 불과한 것을 풍부한 디테일을 구사하여 생생하고 빈틈없이 짜인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또한 주요 등장인물은 모든 사건과 장면에서 제각기 자기 성격에 맞는 언행을 하면서 성격이 훨씬 구체화된다. 그리고 화적패의 일상생활과 그들과 관련된 여러 계층의 생활고 당시의 풍속들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한 설명없이 임꺽정의 성격이 달라져 오입쟁이가 되고 약탈로 풍족하게 살게 된 생활의 묘사와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일으키는 사건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게 되면서 민중의 일상생활과 직접 관련된 의적활동을 벌이지 않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것은 처음 작가가 피력한 구도와 어긋나게 되어서 반봉건적 의적 활동이 풀롯을 구성하지 못함으로써 당시의 사회현실을 폭넓게 묘사하면서도 그 핵심적 갈등을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이다. 화적패들이 부유한 봉건적 지배 계층과 이해관계로 대립하는 장면이 거의 없고 화적패와 민중들의 관계도 그리 다루지지 않았다. 이는 화적패의 존재 기반과 그들의 집단적 활동이 성공과 실패의 필연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전체적으로 구성의 산만함이라는 결함을 낳게 된다. 특히 서울 뒷골목 기생과 왈패들의 세태와 송악산 단오굿 같은 풍속 묘사에 더욱 치중하면서 당대 논자들에게 세태소설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종합해 볼 때 처음 {임꺽정}의 구상은 최하층민의 백정을 통해 계급의식과 그들의 단결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려고 한 것이고 소설에서는 하층민의 현실을 그리는 것으로 출발해 하층에서 선택된 인물들을 통해 민중 주체의 역사를 그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소설이 전개되었다. 이는 [의형제편]에서 완숙한 필치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성과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의 고양된 사회 분위기 아래서 작가 자신도 현실에 대한 뚜렷한 시각을 지닌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무렵의 상황의 영향으로 [화적편]은 세태와 풍속 묘사로 기울어지면서 정사의 기록과 같은 사료에 의존하여 성공적인 것이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든 반봉건적 의적활동의 형상화로 나아가지 못했다.
4. 역사소설에 대한 이해
1) 역사소설의 개념 통념에 따라 역사소설을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 정의 한다면, 이는 과거의 단순한 사실의 전달이나 인물의 활동상을 알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역사소설은 루카치가 명쾌하게 제시한 것처럼 "현대사의 전사(前史)"라는 의미의 과거에 대한 역사 의식에서 출발하여 "현재 역사의 구체적 전신으로 과거를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소설은 과거의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되기 때문에 먼저 사실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확한 고증에서 비롯된 역사적인 과거를 어떻게 오늘날의 상황과 유기적으로 결합해내느냐의 문제를 안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으로 인하여 현재의 전신으로 과거를 제시하는 면에 소홀해서도,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왜곡하여서도 아니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역사소설이라 함은, 작가가 정확한 고증과 냉철한 역사 의식을 통하여 현재 역사의 구체적 전신으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여 당대의 상황과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그로인해 독자들이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현재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2) 당대의 역사소설
1920년대 후반부터 역사소설이 이광수, 김동인, 박종화, 현진건, 윤백남 등에 의해 대거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광수와 김동인의 경우 왕조사 중심의 낭만주의적 역사소설의 선구적 존제로서, 근대 역사소설이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나 현실 도피적이며 흥미 위주의 통속적 오락물로 전락하게 하였다. 박종화의 경우 이광수나 김동인이 부분적으로 보여주었던 사회적, 역사적 의미의 배제, 부정적 한국사상의 제시가 작품의 핵심으로까지 극대화 시킴으로써, 이후의 많은 역사소설이 궁중 비화적 성향을 띠게 된 데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현진건의 역사소설은 민족주의 의식을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평민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삶을 통해 그 시대상을 폭넓게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실제로 역사를 배경으로 낭만주주의적 예술관을 표출에 치중하거나 영웅사관에 의거한 작품이라고 볼수 있다. 윤백남의 경우는 도적이나 반역자를 주인공으로 하되 그들의 행위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해명은 없이 복수심에 따르는 무협담을 다룬 통속소설을 저술하였다.
이처럼 식민지 시대의 역사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대부분의 소설들은 낭만주의적 성향을 짙게 깔고 주로 왕조사나 궁중사를 중심에 놓고 서술하거나, 역사전기소설류의 영웅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통속적 오락물로 나아가고 말았다. 따라서 이들의 소설은 위에서 언급한 역사소설의 개념과 맞추어 볼 때 진정한 역사소설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5. {임꺽정}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 {임꺽정}을 쓰면서 홍명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임꺽정이란 옛날 봉건사회에서가장 학대받던 백정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가슴에 차넘치는 계급적 해방의 불길을 품고 그때 사회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만 하여도 얼마나 장한 쾌거였습니까? 더구나 그는 (…) 백정의 단합을 먼저 꾀하였던 것입니다. (…) 백정의 단합을 꾀한 뒤 자기가 앞장서서 통쾌하게 의적 모양으로 활약한 것이 임꺽정이었습니다. 그러이러한 인물은 현대에 재현시켜도 능히 용납할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삼천리} 1호. 1929년 6월
조선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지나(支那)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사건이나 담겨진 정조들이 우리와 유리된 점이 많았고, 최근의 문학은 또 구미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양취(洋臭)가 있는 터인데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벌 빌어 입지 않고 순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정조(朝鮮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삼천리} 9호 1933년 9월
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앞의 것은 작가의 의식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작가는 봉건시대의 하층인물인 임꺽정을 통하여 "계급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보여주고 "작가가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당대와의 유사성을 암시"하려고 했던것이 분명하다. 반면 뒤의 이야기는 조선적 정조의 복구를 위해 그가 사용한 창작방법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두가지 관점은 {임꺽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1) 계급해방의 불길 홍명희의 전기적 사실(1번 참조)과 그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아래의 글을 살펴본다면 {임꺽정}이 계급투쟁 의식을 염두해 두지 않았나 생각한다.
금일의 시대사조는 사회변혁, 계급타파, 대항, 해방 등의 사상이니 이 시대의 문예가 이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서 새로히 출발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신흥문예의 운동]. [문예운동}. 1926. 1)
이러한 홍명희의 의식이 {임꺽정}의 집필 동기에 어느정도 스며들어 있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실제로 작품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 작품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에서 50여년 간의 시대상을 광범위하게 묘사하면서 당시의 지배층의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민중들의 삶이 어떻게 유린되고 황폐해지는지를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임꺽정 일당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상황들을 제시하고 이들이 사회적 갈등의 진정한 대표자의 존재로 부각될 수 밖에 없는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의형제편]에서는 임꺽정의 인물 형상화에 있어서 철저히 전기적, 영웅적 성격을 벗어났고 청석골의 두령들을 모두 하층민으로 설정하여 개성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위대한 개인(영웅)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순된 역사적, 사회적 제반 여건을 인식한 다수의 민중에 의해 사회 개선과 역사의 진보가 이루어 진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민중성을 중심에 놓음으로써 {임꺽정}은 당대의 역사소설들이 왕조사와 궁중비사, 혹은 영웅 중심의 낭만주의적으로 흘러 가버린 문제점들을 훌륭히 극복하면서 민중사 중심의 역사소설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당대의 제 모습이 얼마나 총체적으로 들어나고 임꺽정 일당이 당대의 역사적 상황하에서 어떻게 대응했는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전반부에서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을 많이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에 놓인 필연적 원인이나,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 놓여 있는 민중(농민)들의 삶을 명확하게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임꺽정에게 있어서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사회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울분이나 분풀이에 의해서 행동을 결정함으로써 역사속의 전형으로 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다른 청석골 두령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등장인물의 묘사에 있어서도 그들의 능력이 다분히 신비하게 묘사되어 {임꺽정}의 민중적 관점을 약화 시키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임꺽정 일당에게서 뚜렷한 목표의식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의적활동이나 반봉건적 활동을 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당대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를 감싸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를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이 {임꺽정}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니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홍명희가 보여주었던 뛰어난 역사와 시대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품 {임꺽정}속에서 이 모든것을 담아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홍명희가 다음에서 언급할 조선의 정조를 재현하는데 주력함으로써 생긴 필연적 결과인지도 모른다.
2) 조선정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명희는 조선 정조를 재현하는데 주력하면서 {임꺽정}을 집필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의 입을 통하여 여러번 언급 되었다. 이렇게 홍명희가 조선정조에 일관되게 작품을 쓴 결과 그로인한 많은 성과를 거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전반부에서 상, 하층에 두루 걸쳐 다양한 삶을 충분하게 보여줌으로써 일반적으로 군도를 다룬 소설이 하층생활에 편중되는 약점을 잘 보완하였다. 그러면서 상, 하층 모두의 풍속이나 언어를 탁월하게 재현하고 있다. 또한 후반부에서도 각양각층의 인물들을 형상화하면서 당시의 하층민의생활이나 그들 사이에 전해지는 전설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다양한 민중들의 생활 모습을 잘 표현하고, 몇 줄에 불과한 기록을 풍부하고 짜임새 있게 만들어 내고 있다. 이것이 {임꺽정}을 민중적 특성이 잘 구현된 사실주의적 역사소설로 나아가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홍명희가 조선정조의 탁월한 구현에 지나지체 의식함으로써 생긴 많은 문제점도 있다.
먼저 전반부에 나오는 상, 하층의 연결이 상당히 인위적인 인상을 준다. 이는 두 계층을 연결하는 인물(갖바치)을 형상화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또 다양한 생활의 제시를 위해 너무 많은 인물과 장소가 별 의미없이 어지럽게 등장하여 작품의 구성을 산만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작품의 대부분에 걸쳐서 지나치게 야사에 의존하고 그 시대의 세태묘사에 치중하면서 {임꺽정}이 궁중비록이나 흥미위주의 세태소설과 같은 면들을 지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양한 계층의 모습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핵심이 될 수 있는 농민 계층이나 백정의 생활상이나 그들이 겪고 있는 현실은 재대고 형상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는 홍명희가 조선의 정조를 재현하는 방편으로 그 시대의 풍속, 상층의 대립과 암투, 세태, 그들의 언어 구사 등 부차적인 요소들을 중심에 둠으로써 실제로 작품의 중심에 놓여야 할 대상들을 형상화하고 이들이 겪게 되는 현실을 통해 필?Ю岵막? 싹트게 되는 사회의식을 비껴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홍명희 자신이 놓여진 당대의 현실과도 유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6. 미완의 작품 {임꺽정}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작품 자체의 미완성을 떠나 {임꺽정}을 진정한 역사소설이라고 확실히 이름 붙이기에는 미흡한 점들을 안고 있다. 이는 홍명희가 조선정조의 재현에 주력하면서 그 시대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함으로써 식민지 시대와 조응되어야 한다는 핵심적인 문제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드러내는 데에는 홍명희가 {임꺽정}의 연재를 몇 번이고 쉬었다는 점도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1차 연재는 투옥으로 중단 되었고, 2차 연재는 비록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되었다고 하나 그 때(1934년)가 문단적,사회적 상황이 상당히 불리한 시절이었기에 그의 활동을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작품에서도 1차 연재에서 보여주려는 의식(소설기법의 성공 여부는 접어두자)들이 2차, 3차로 넘어 가면서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임꺽정}은 역사의 발전을 민중의 동향을 통해 파악하려고 한 민중사 중심의 역사소설이며 "지나간 시대를 현대의 전사로서 진실되게 묘사하려는 사실주의적 역사소설"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시대의 여타 역사소설과는 확연히 구별되게 진정한 역사소설의 개념에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임꺽정(林巨正)과 그 시대상
1. 15·6 세기의 시대적 고찰
15세기 전반에는 14세기 이래의 꾸준한 생산력 향상과 왜구의 근절, 새로운 왕조의 농민안정책에 대한 기대 등으로 인해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농민저항은 없었다. 그러나 한재, 수재로 인한 자연재해나 전통적인 신분차별, 국가의 강제적인 사민(徙民)정책, 국가수취의 무거운 부담에 따른 농민들의 유랑과 피역, 도망 등 소극적인 저항은 많았다, 살 길을 잃은 농민들은 먹을 것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유랑하였으며 과중한 역을 피해 도망하였다. 그 과정에서 농촌에 안착하지 못한 사람들은 도적이 되어 사회를 혼란케 함으로써 지배층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였으며, 향촌의 농민들도 소규모이나마 집단을 형성하여 지배층에 대해 산발적으로 저항하였다.
도적들의 저항은 많은 물산이 모여드는 서울과 그 주변에서 활발하였다. 또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등 국가의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험준한 산악지역에서 많았다. 정부군의 힘이 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약점을 이용하여 몰락농민들은 무리를 지어 도적행위를 하며 국가와 지배층에 저항하였고, 이들의 도적행위는 사회경제적 처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新白丁들은 일정한 경제형태에 안정되지 못한 조건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약탈, 도적행위를 일삼았던 것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농민저항으로는 1446년(세종 28년)의 대성산 농민저항을 들 수 있다. 국가에 의해 진행된 사민책은 농민들의 이동을 전제로 일정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고 농민의 자발성을 유도한 부분도 없지 않았으나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사민책은 국토의 빠른 개발을 위한 것이었으나 옮겨진 백성의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사민들 가운데 다수가 어려운 처지를 견디다 못해 도망하였으며 추쇄 등으로 되돌려진 후에도 다시 도망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부역의무를 져야 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 위에 해마다 드는 흉년으로 살기가 어려워진 평안도 지방의 사민들이 1446년 10월 활이나 칼 등으로 무장을 하고 대성산에 모였다.
또 이시애의 난에 동원되거나 참가하여 지배층에 저항하였다. 이시애가 정치적인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이에 강제적으로 동원되거나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주동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농민들의 저항을 표현하였다. 싸움에 나선 농민들은 토호들이 추구하는 정권야욕과는 달리 지배층들의 억압과 수탈을 없애고 사회적 예속에서 벗어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15세기 전반에는 빈번한 자연재해와 국가의 강제적인 사민책에 따른 고통, 지역적인 특수성에 의한 과중한 부담, 신분적인 차별 등으로 인해 농민들이 유민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도적이 되어 국가와 지배층에 저항하였다. 또한 토호들이 정치적인 불만으로 작변을 일으키자 이에 동원, 참여하여 자신들의 불만도 적극적으로 나타내었다. 그리고 소극적이나마 지주층이나 지방관에 대해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행동을 통해 불만을 토로하였다.
15세기 후반으로 들면서 토지소유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모순이 확대되고 생산력의 발전을 근간으로 하는 유통경제가 발달하자 국가와 지배층에 대한 도적들의 저항과 농민들의 저항은 지역적인 특수성을 벗어나 더욱 확대되었다. 전국에 걸쳐 피역이나 투탁, 도망 등이 늘어갔으며 더욱 적극적인 저항을 표시하였다.
도적의 활동은 점차 상업유통망과 연결되어 조직적 활동으로 발전해갔다. 관가와 지주, 토호 및 공물유통로가 공격 약탈의 주요대상이 되었다.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수적의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왜구의 노략질이 어느 정도 근절된 것을 배경으로 해안지방의 유통이 활발해지자 수적들의 활동이 확대된 것이다. 황해도 지역에서는 산적들의 집단활동이 중국과 평안도, 서울 사이의 교통로를 중심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1483년경에 다시 황해도 재령지방에서 金一同(일명 金莫同)의 지휘 아래 산적집단이 크게 활약하였다. 도적들의 집단적인 활동과 저항은 16세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산되어 갔다.
중앙집권력이 약화되면서 날이 갈수록 토지소유의 불평등과 지배층의 합법적, 비합법적인 착취가 심해가고 여기에 흉년과 전염병까지 겹쳐 농민의 부담이 더욱 무거워지자 도적들의 활동이 심해져갔으며 농촌에 남아 있는 농민들의 경우도 지배층에 대한 저항의식이 높아갔다.
특히 연산군대에 지배층의 사치생활이 만연하고 통치기강이 문란해지기 시작한 이래 중종·명종대는 소위 '적란(賊亂)의 시대' 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전국에 걸쳐 크고 작은 규모의 많은 도적집단의 활동과 농민저항이 전개되었다. 16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도적활동과 농민저항의 사례를 살펴보면, ① 1500년에는 홍길동이 서울 근처에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도 무리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청에 드나들었으나 이를 막지 못하였으며, ② 역시 집단적인 도적활동도 빈번하여 평안도에서는 홍자관(洪子寬) 등이 무리를 지어 부자들을 습격하였다.
조선 전기에 가장 대표적이고 집약적인 농민저항은 임꺽정(이하 '林')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농민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林의 저항은 1559년부터 1562년에 걸쳐서 일어난 것으로, 조선 전기 농민들의 저항중 규모가 가장 컸고 오래 계속되었다. 林의 저항이 일어 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사회경제적 모순에 있었다.
일찍부터 북방지역에 대한 사민과 개간책에 의해 황해도 지역에도 해택지(海澤地)를 비롯하여 많은 땅이 개간되었는데, 왕실과 지배층은 농민들을 부려 개간한 뒤 땅들을 모두 차지하고 이를 개간한 농민들을 그 땅의 전호로 편입하였다. 봉산·재령 등지에는 갈대밭이 많아 갈대를 채취하여 삿갓과 그릇을 만들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자가 많았다. 1553년 지배층들이 황해도 황주·안악 ·봉산·재령 등지의 갈대밭을 진전(陣田)이라는 이름으로 탈취하자 갈대로 삿갓·고리짝 등을 엮어 생계를 유지하던 농민들과 소상인들의 불만은 매우 높아졌다. 더욱이 1556년에 갈대밭이 내수사 소속지로 된 뒤부터 농민들은 내수사에서 갈대를 구입하게 되어 어려움이 더욱 심화되었다. 공동체적인 공익권이 확립되어 있다고 생각한 갈대밭을 내수사에 빼앗김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던 소상품생산자들은 생존에 커다란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내수사에 의한 갈대밭의 탈점 및 부담의 과중이 林과 황해도 농민저항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林은 원래 경기도 양주에서 버들고리를 만들던 백정으로, 갈대상품을 만들어 팔려고 갈대밭이 많은 황해도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林의 저항은 16세기 중엽에 들어 오면서 격화된 사회경제적인 모순을 농민에게 전가시키는 지배층에 대한 농민의 저항인 동시에 훈구파 정권말기의 권문세가나 내수사의 농장과 사유지 확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당시의 기록도 "도적이 생기는 것은 도적질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기한이 절박해서 부득이 도적이 되어 하루라도 연명하려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명종실록} 권27 명종 16년 10월 계유)고 한 바와 같이 표면적으로는 지배층에 의해도적으로 파악되었지만 사회경제적인 모순으로 인해 농촌으로부터 유리된 몰락농민들과 같은 처지의 소상인들이 모여 국가와 지배층에 대항한 것이다.
2. 임 꺽 정
?∼1562년(명종 17). 조선 중기의 의적( 義賊? ). 일명 林巨正 또는 林巨叱正이라고도 한다. 양주의 백정출신이다. 당시 척족 윤원형, 이량 등이 발호하고, 여러 해 연이어 흉년이 계속된 데다가 관리들의 수탈이 횡행하는 틈을 타 도둑의 괴수가 되었다. 날쌔고 용맹스러웠는데 자기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어지러운 민가를 횡행하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하여 구월산 등지를 소굴로 하여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의 행각을 벌이자, 이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결탁하여 내통하였다. 그리하여 관에서 잡으려 하면 미리 정보를 알고 달아났다.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들 무리는 미투리를 눈 위에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행방을 감추었다. 선전관이 구월산에 들어가 그들의 행방을 찾다가 돌아올 적에 도둑들은 선전관을 잡아 죽였다. 1559년(명종 14) 집을 개성에 두고 그 근방에서 출몰하자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이 군인 20명을 데리고 그들의 소굴을 습격하였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개성부 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잡으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 한 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이에 임금은 수령들이 도둑잡기를 게을리 하면 엄벌을 가하고 공을 세우면 후한 상을 내리라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작은 도둑무리만 잡았을 뿐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60년 8월에 들어서는 서울에까지 임꺽정과 그 일당이 출몰하였다. 장통방(長通坊)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아 部將을 맞히고 달아났다. 이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을 잡았다. 그리고 임꺽정의 아내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해 10월에 들어서는 금교역(金郊驛)을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봉산에 중심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 양덕, 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겁탈을 일삼았다. 이리하여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혔다. 이들은 이때 벼슬아치의 이름을 사칭하고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 정보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이해 12월에는 엄가이(嚴加伊)라는 도둑 두목이 숭례문 밖에서 잡혔는데, 바로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徐林)이었다. 서림의 입을 통하여,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典獄署)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났다. 또, 이들은 평산 남면에 모여 그들의 도당을 여러 차례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李欽禮)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도 서림의 입을 통하여 알아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여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하였다. 그때 도둑무리는 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관군을 무찔러 부장 연천령(延千齡)을 죽이고 많은 말까지 빼앗아 달아났다. 이에 임금은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하여 책임지고 도둑을 잡게 하였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가 도둑 무리의 처자 몇명을 잡아 서흥감옥에 가두어 두었는데, 백주에 도둑 무리 1대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한 사건도 있었다.
이해 12월에 황해도에 순경사로 파견된 이사증(李思曾)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추고(推考)를 해보니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加都致)였다. 그리하여 그 책임을 물어 순경사 이사증은 파직, 추관(推官) 강려를 하옥하게 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와같이, 5도의 군졸들이 도둑을 잡으려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하였고, 또 관군의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고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다. 1561년 9월에 평안도 관찰사 이량은, 의주목사 이수철이 임꺽정과 한온(韓溫)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들을 의금부에 데려와 조사를 하니 해주출신의 군사인 윤희정과 윤세공이었다. 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복하였는데 서림이 이들을 보고 가짜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이수철에게 그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이해 10월에 임꺽정 일당이 해주에서 평산으로 들어와 대낮에 민가 30여 호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림을 통하여 임꺽정을 꾀어낸다는 방침을 바꾸고 새로운 조처를 모색하였다. 이에 황해도 토포사(討捕使)로 남치근(南致勤), 강원도 토포사로 김세한(金世澣)을 임명하여 정병을 딸려 보냈다. 이어 개성과 평양의 성내를 샅샅이 뒤지게 하였고 서울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등에 수문장의 수를 늘리고 날짜를 정하여 새벽부터 일시에 수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 중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는 자는 달아났다. 이에 포졸들은 달아나는 자들을 잡아들였고 조금이라도 수상쩍으면 감옥에 넣어 온종일 서울은 호곡소리로 들끓었다. 한편, 정시(停市)하게 하기도 하고 모든 관청일을 중단하게 하였는데, 대신이 죽는 일 외에는 이런 조처가 없었던 일이었다. 또,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도둑으로 끼어드는 일을 막기 위하여 수색을 금하게 하였고, 황해도에는 전세 전부를 , 평안도에는 전세 절반을 탕감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 의정부에서는 "토포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래 유둔하고 있어서 군민(軍民)이 곤궁, 피로하고 일도가 탕연하여 원망의 소리를 귀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고 일단 많은 도둑의 졸개가 잡혔으니 임꺽정을 잡는 일은 평안도, 황해도의 감사, 병사에게 맡기고 토포사를 올라오게 하였다.
이러한 속에 1562년 정월, 남치근은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郭舜壽)와 홍언성(洪彦誠)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올렸다.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임꺽정이 잡힐 적의 정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남치근이 재령땅에서 진을 설치하니 임꺽정은 날쌔고 건장한 者만을 데리고 구월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그 나머지 무리는 요소요소를 지키게 하였다. 산을 올라가며 계속 수색하며 남은 무리를 죽이자 임꺽정은 골짜기를 넘어 도망하였는데, 계속 민가를 수색하자 林이 민가에 뛰어 들어왔다. 임꺽정이 주인 노파를 위협하여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며 나가게 하였다. 이에 임꺽정이 칼을 빼고 뛰어나오며 "도둑놈은 달아났다."고 소리쳤다. 군졸들이 술렁거리자, 혼란한 틈을 타 군졸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다가 서림이 "저 놈이 임꺽정이다."라고 소리쳐 끝내 상한 몸으로 잡혔다는 것이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혔고, 잡힌 지 15일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실록의 史臣은 이렇게 평하였다. "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여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飢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서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王政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 임꺽정은 이러한 정상을 이용하여 자기의 신분차별에 대한 한을 풀어보려고 하였고,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두령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5도를 횡행하며 관군을 괴롭혔고 온 나라를 소란에 빠뜨렸다. 그가 죽고 난 뒤 명화적(明火賊)은 그를 의적으로 떠받들었으며 무수한 설화를 낳게 하였고, 소설로 그의 행적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그의 앞시대의 홍길동(洪吉童), 그의 뒷시대의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대도둑으로 들었다. 그리?臼? 일부는 살육을 자행하는 포악한 도둑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일부는 백성을 위하여 위하여 관곡을 털어 나누어주는 의적으로 평하기도 하였다.
이 난은 조선조 최초의 조직적인 농민저항으로, 국가의 농민 수탈에 대한 간접적인 공격을 통해 봉건지배질서에 저항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특히 교통로, 국가수취 운반로, 상업의 유통망 등을 집중적으로 노린 것이 특징이었다. 아전들과 농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다같이 지배층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전기의 농민저항은 하나의 통일된 역량으로 묶이지 못하고 산발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도적집단들의 활동을 배경으로 확대되어 갔다. 저항대상도 일정하지 않고 투쟁공간이나 형태도 일시적인 습격에 그쳤지만 사회경제적인 모순에 대한 저항이 지속적이고 치열해짐으로써 국가나 지배층에 위기의식을 주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봉건적 질서의 변화를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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