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무석에 왔다는 말을 듣고 지호길 선생이 찾아왔다. 나는 지금도 그의 신앙과 인격을 존경한다.
지 선생은 이전에 경기도 하남교회에서 사역을 하였는데, 그 교회 집사님이 무석에 살고 있다 는 소식을 들었지만 시간이 여의치 못해 찾아뵙지 못하다가 내가 무석에 왔다는 말을 듣고 겸사 겸사 나를 찾아 오게 된 것이다.
전화 통화 후 어렵게 그 집사님 댁을 찾아 갔다. 남편은 무역업을 하시고, 당시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유치원 다니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 었다. 놀란 것은 집 옆에 산 만한 도시가스 저장통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것이 터지면 무석 절반이 날라간다고 하셨다. 산 만한 도시가스를 옆에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대단한 한국 사람을 넘어 무서운 한국 사람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그 집사님은 너무도 반가워 그동안 이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시는데 말이 얼마나 빠르고 길게 하던지 내가 중국어 알아듣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자 모두 박장대소하였 다. 이국 땅에 와서 그 동안 이야기 할 상대가 없어 얼마나 외롭고 한이 많았겠는가?
한국 사람들이 적은 외국에서 살 때 자칫 아내들은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남자들은 사업 하느라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지만, 아내들의 경우는 만나서 이야기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힘들어 하는 분들을 많이 보았다. 특히 선교사 아내들은 자주 한국에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 많은 준비를 많이 하여야 한다. 한국에서 파송을 받을 때는 남편과 동역자로 생각하여 나름대로 선교에 대한 꿈을 가지고 오지만 막상 선교현장에 오면 아이를 교육시키는것만으로도 벅차다. 주재원들은 방학 때마다 한국에 들어갔다가 방학이 끝나면 오지만 선교사의 경우는 안식년 때에 한 번씩 밖에 한국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향수병이 걸리기도 한다. 특히 부모님이나 가족이 편찮은데 한국에 가지 못하면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 집사님으로부터 이곳에 두 가정이 더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려고 이곳에 왔는데 막상 이곳에 와서 한국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한국 사람을 찾아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인가 보다. 이를 두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가? 참고로 나는 그 말이 우리 속담인줄 알았는데 중국에 와서 이 말이 중국 속담(血比水濃)인 것을 알았다.
중국어를 배우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 고유어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중국말이라는 것을 많이 발견하고 놀란다. 심지어 심지어(甚至于)도 중국말이다.
전화 연결이 되어 드디어 두 가정을 찾아 뵙기로 하였다. 그 분들은 외국인 거주 지역인 무석 외곽 쪽 웨니스 화원(威尼斯 花园)이라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 다. 웨니스 화원은 태호 근처에 있는 아파트로서 건물이 서양식으로 지어져 있고, 푸른호수위로 흰 비둘기가 평화롭게 날아다니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이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주로 외국인들이 살다 보니 바리케이트가 놓여진 검문소 두 곳을 지나고, 아파트 입구 경비실을 지나 겨우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슨 보안 사령부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실 은 우리가 온다는 전화를 받고 두 분이 성경책과 찬 송가를 펴 놓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냥 한국 사람이 살고 있다 하기에 인사하는 정도로 찾아 갔는데, 그분들은 예배드릴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로 인해 즉석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 제목을 나누었다. 그 가운데 한 집사님께서 이곳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기도 제목을 내 놓으셨다.
나는 본래 한국인 사역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중국인 사역을 위해 왔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한인 사역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1995년에 중국 천진에 왔을 때,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이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교회를 세우기만 하면 교인들이 몇 백명 늘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면서도 교회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때 지호길 선생이 이런 말을 하였다. "이 분들에게 교회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열망이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교회를 세우도록 마음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주님께서 다스리고 주관하시기 때문에 비록 세 가정이라도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느냐?" 고 하였다.
주님께 대한 그분들의 순수한 믿음과 열정을 볼 때 내가 이 일을 맡는 것이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을 대하면서 마치 목자없는 양과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한 모습과 같이 보여서 점점 마음에 확신이 들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3년 후가 걱정이 되었다. 두 가정은 대우통신에서 나오신 주재원들이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4년 계획을 하고 이곳에 오신 분들이다. 세 가정 모두 믿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교회가 무슨 잠시 열었다가 안되면 닫는 구멍가게도 아니고... 현재 세가정이 뿐이고 앞으로 한국 사람들이 들어올 가능성이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주님께서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는 지금 3년 후의 일을 염려하는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위기는 3년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1년도 채 되지 못하여 큰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IMF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