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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뚫고 하이킥!> 마지막회는 왜 해피엔딩인가?
사실, 김병욱 PD는 이미 악명이 높다. 전작 <순풍 산부인과2000>, <거침없이 하이킥2007> 등에서 확인된 바, 많은 재미를 주었지만 그 독특한 결말 처리 방식을 좋아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내내 웃고 떠들고 즐겁게 시청하게 해놓고 마지막에 형상화되는 삶의 우연적인 비극성(주인공 죽이기)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네티즌들은 우려를 표시하였다. 더군다나 그 관심의 주인공은 여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게 한 황정음과 최다니엘, 신세경과 윤시윤이 아닌가!
“제발 이번에는 행복하게 끝내 달라.”
“이번에도 비극적 결말이 나오면 네 작품은 앞으로 거들떠 보지도 않겠다.”
작품의 대단원이 가까워오면서 세간의 관심은 더욱 집중되었고 ‘이번에도 새드 엔딩이냐, 이번엔 누굴 죽일 거냐’로 인터넷은 과열되었다. 분위기가 예상보다 험해지자 김병욱 PD는 모 신문과 인터뷰를 하게 된다. 인터뷰에서,
“사실 나는 비극을 좋아한다. 인생이란 희극보다 비극이 많기 때문이다. 이건 나의 성향이고 고집이라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간절히 원하신다면 이번만은 내 의지를 접고 해피엔딩을 해 내 보이겠다. 기대해 달라.”라고 합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으나 대충 이와 같은 뉘앙스)
그래서 많은 이에게 장밋빛 결말을 기대하게 해 놓고, 결론은?
세경이와 최다니엘의 사고사.
이미 인터넷은 마비 상태였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지 버릇 개 주나?”
“내가 다시 네 작품을 보면 손에 장을 지진다.”
“이 XX XX 놈아!”
그렇게 여론의 뭇매를 아무런 변명도 없이 김PD가 견디고 있을 때, 나는 생각한다.
혹시 이건 해피엔딩이 아닌가?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
사실 누구나가 원하는 해피엔딩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흔한 막장 드라마가 그러하듯 364일 내내 며느리를 괴롭혀 오던 못된 시어머니가 마지막 하루, 천사가 되어 며느리를 이해하고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가 잘못했다.” 라고 말하며 부둥켜 안는 1일을 오려 붙이면 된다. 그러면 많은 시청자들이 바라마지 않는 해피엔딩이 나온다. 하지만 거기에 예술은, 문학은, 리얼리티는 실종되고 없다. TV 드라마 같은 상업예술에서 작가의 고집을 지키기란 쉽지 않지만, 결말 처리는 이슈화와는 무관하게(독자의 머릿속에 얼마나 여운을 남기느냐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불치병에 걸린 불쌍한 남주인공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수술실로 들어가는 장면을 엔딩으로 했던 <네 멋대로 해라2002>라는 드라마는 내내 아쉽다. 마땅히 죽어야만 하는 상황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놓고 해피엔딩을 바라는 여론에 밀려 어정쩡한 열린 결말을 내 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김병욱 PD가 이 작품에 대해 평한다면 결말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한편 예상을 뛰어넘는 과감한 결말로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버린 작품도 있다.
<발리에서 생긴 일2004>.
하지원은 소지섭을 버리고 조인성에게 돌아갈 것을 결심했으나 그 사실을 모르는 조인성은 하지원을 권총으로 쏴 죽이고 뒤늦게 사실을 안 뒤 절규한다. 힘없는 발걸음으로 걸어나와 석양이 깔린 바닷가에서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자살한다. 두 쌍의 남녀의 감정선이 어찌 이리도 얽힐 수 있을까? 그리고 조인성이 버텨내고 있던 삶의 무게, 그 속에서의 하지원의 가치, 너무나도 약한 조인성의 내면. 이 작품의 결말은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었기 때문에 가히 카타르시스의 정수라 할만 했다.
‘주인공’과 ‘해피엔딩’의 상관관계
다시 하이킥으로 돌아와 보자. 사실 하이킥 결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시트콤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이 시트콤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빵꾸똥꾸를 외치는 진지희도, 찌질한 꽃중년 정보석도, 전작의 야동 할아버지 이순재도 아니다. 황정음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황정음 역시 처음부터 주인공급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황정음의 경우에는 캐릭터가 매력이 있고 인기가 있어서 분량이 늘어난 결과라고 보는 게 합당할 듯 싶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냐. 바로 신세경이다.
시트콤 1회와 2회를 보면 빚쟁이를 피해 강원도 산골에 살던 세경이네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시트콤은 시작이 된다. 서울로 올라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 ‘아저씨’였던 것은 상징적이다. 마지막을 함께 한 것도 그 ‘아저씨’지 않은가!
흔히 현대사회가 각박해지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더욱 살기 힘들어진다고들 하는데 세경이의 신세를 보면 정말 막막할 뿐이다. 요즘에는 찾아보기조차 힘든 애(신애) 딸린 식모 아닌가. 고등학교를 졸업도 못한 식모가 주인집 아들을 좋아한다. 그는 서울대 의대를 나온 대형병원 의사이다. 이 어울리지 않는 사랑을 어찌하란 말인가!
이쯤에서 우리는 ‘해피엔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다 해피엔딩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천국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기말고사에서 내가 1등을 하면 그것은 나에게 해피엔딩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처절하고 비극적인 결말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즉 누구에게 해피엔딩이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이왕이면 해피엔딩의 주체가 우리편, 착한 사람, 주인공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어렸을 적 누구나 한번쯤 읽어보았을 <헨델과 그레델>이라는 동화의 결말은 헨델과 그레델이 마녀의 집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마녀가 헨델과 그레델을 잡아먹을 목적으로 아이들에게 맛난 음식을 제공해주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다 받아먹으면서도 잡아먹히기 싫어서 팔 좀 보자는 마녀의 요구에 나뭇가지를 내민다. 아무리 먹여도 살이 찌지 않는 녀석들을 기다리다 못한 마녀는 뼈만 있더라도 먹어버려야겠다며 감옥의 문을 여는데, 순간 오빠인 헨델이 마녀를 끓는 가마솥에 밀어버리고 여동생 그레델의 손을 잡고 도망을 친다. 마녀라고는 하지만 한 여성이 끓는 가마솥에 빠져 삶겨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말한다. 왜냐? 주인공의 행복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회에서야 이루어진 둘 만의 데이트
앞서의 과정에서 해피엔딩이란 주인공이 행복한 상태에서 끝나는 것이고, <지붕 뚫고 하이킥>의 주인공은 신세경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 두 가지로 인해 사실상 결론은 난 것 같지만 지붕킥 마지막회를 좀 더 들여다 보자. 이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거니까.
아버지가 재기를 할 기회를 잡은 덕에 미국으로 떠나게 된 세경과 신애.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한 사람만 만나지 못하고 계속 엇갈린다. 바로 ‘아저씨’, 최다니엘이다. 밤늦게야 들어온 최다니엘도 신세경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결국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선다. 봉투에 넣어둔 달러를 발견한 세경은 ‘아저씨’를 떠올리고 시간을 내어 병원으로 간다. 시간은 더 지체되고, 신애를 먼저 보낸 세경은 좀 더 최다니엘을 기다린다. 더는 안되겠어서 쪽지를 남기고 돌아서는 세경이.
봉투 아저씨가 놓으신 거죠?
감사하지만 책만 받을게요.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늘 건강하세요.
- 세경이가.
황정음에게 내려갈 거라고 문자를 보내고 사무실에 들어온 최다니엘은 세경의 쪽지를 보고 내려가서, 쏟아지는 장대비 앞의 세경을 본다. 뭐가 필요할지 몰라서 돈을 넣었다는 최다니엘의 말에 세경은 필요한 거 없다고 대답을 한다. 사실 필요한 건 최다니엘 너지!
어쨌든 의도치 않게 세경이는 최다니엘과의 마지막 시간을 갖게 된다. 그 시간은 126회 내내 세경이가 간절히 바라고 있던 시간이며, 마지막에야 비로소 주어진 짧기만한 시간이다. 그 시간에, 장대비가 쏟아지는 고속도로에서 세경의 고백은 시작된다.
세경이가 행복해지려면?
“이민 갈 이유와 안 갈 이유가 반반이었다고 했지?”
자기처럼 쪼그라드는 신애를 보기 싫은 게 이민을 가는 이유인데, 가지 않을 이유는 뭐냐. 검정고시를 보고 싶어서. 검정고시도 보고 대학도 들어가서 아저씨가 말한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고 싶어서.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죽기살기로 신분의 사다리를 올라가면 나면 그 밑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겠구나.
이것은 일종의 깨달음인데, 사회의 하층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패배주의에만 매몰되어 있다가 뒤늦게 전체 시스템을 발견하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물론 힘없는 개인 한 명의 깨달음만으로 세상이 뒤바뀌거나 할 수는 없다. 세경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가기 싫었던 이유는, 아저씨였어요. 아저씨를 좋아했거든요. 너무 많이. 처음이었어요, 그런 감정.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설레는. 밥을 해두, 빨래를 해두, 걸레질을 해두. 그러다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 부끄럽고 비참했어요.”
사실 세경과 최다니엘이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꽤 있었다. 서로 간의 에피소드들도 많다. 그럼에도 마지막회의 자동차 안은 조금 다른 공간이다. 장대비가 후두둑 쏟아지는 상황은 창밖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즉 안으로만, 서로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고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세경이의 처지다.
여태까지 세경을 휘감고 있었던 식모라는 족쇄가 풀린 이후에 첫만남인 것이다. 정음처럼 대학생도 아니고, 아저씨처럼 돈을 잘 벌지도 않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아저씨 앞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왔다. 그렇게 때문에, 고백이 의미를 갖는다.
이 고백 장면은 하이킥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의 맨 맽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구성원이 나와는 다른 별세계에 사는 한 인간을 좋아했었다는 고백을 한다. 하지만 그 감정이 받아들여질 리 없고 나는 좌절했노라. 이어지는 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그녀가 자신의 성장을 이야기한다.
“그 동안 제가 좀 컸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의 끝이 꼭 그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다는 걸 이젠 깨달았거든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최다니엘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을 예리한 시청자 분들은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두 마지막에 이런 순간이 오네요. 아저씨한테 그동안 마음에 담아놓은 말들, 꼭 한번 마음껏 하고 싶었는데. 이루어져서 행복해요.”
“앞으로 어떤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늘, 지금 이 순간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신분의 굴레를 처음으로 벗은 인물이, 오래 담아온 사랑을 고백하는 이 아름다운 장면은 ‘식모’였던 세경을 내 앞에 당당히 선 ‘여성’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으리라. 최다니엘이 더욱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휩싸이고, 비는 계속 내린다. 레이첼 야마가타의 ‘듀엣’이 흘러나온다. 음악 소리가 커진다. 거세게 내리는 비와 더욱 커진 부드러운 음악의 볼륨은, 이들이 타고 있는 자동차가 주변 세상과는 달리 외따로 떨어진 공간인 것처럼 묘사하는 데 일조한다. 이들은 그렇게 자신들만의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
지붕을 뚫어야 하는 사람
“다 와가나요?”
“어.”
말을 잇는 최다니엘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있고 떨리고 있다. 목이 살짝 메인 듯도 하다. 이런 디테일한 연기 좋다.
“아쉽네요.”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어?”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그리고는 고개를 세경 쪽으로 돌리는 최다니엘. 눈에는 눈물까지 촉촉이 맺혀있다. 그대로 눈을 떼지 못한다. 화면이 흑백으로 처리된다. <F.O.>
<지붕 뚫고 하이킥!2010>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는 지독하고 잔인한 해피엔딩임에 분명하다. 철저하게 세경만의 행복을 지켜준 결과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올라온 세경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최다니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좋아하는 감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한 좌절이 커지게 된다. 회가 진행되는 내내 세경은 줄곧 정음을 부러워한다. 정음 역시 넉넉하고 비전있는 삶이 아니며 ‘서울대가 아닌 서운대’를 다니는 불투명하고 막막한 인생(생활비가 없어서 아끼던 구두와 지갑 등을 내다 팔아야 하는 처지)일 따름이지만 세경에게는 그러한 찌질함과 구차함조차 부러움의 대상일 뿐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더 확실한 사실 하나가 드러난다. 제목의 의미. ‘도대체 누가 지붕을 뚫고 하이킥을 날려야 하는가’이다.
황정음도 그 대상이 될 수는 있다. 드라마 전반부에 형성된 된장녀 이미지는 최다니엘과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렸다. 자주는 아니어도 한두 번쯤은 데이트비용도 내는 당당한 여성이기를 바라는 정음은 그렇지 못한 현실 앞에서 번번이 좌절한다. 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졸업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유보되었던 나만의 독립을 해내야 하지만 아직 준비는 턱없이 모자라다. 더군다나 학벌이나 토익점수, 학점관리, 어학연수 등 기본적이라 할 스펙들도 전무한 상태. 계속 안으로만 쪼그라들게 되는 예비백수 캐릭터에 많은 젊은이들이 가슴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정음이가 뚫어야 할 대상은 지붕이 아닌 사회이고, 사회라는 지붕을 뚫어내는 과정을 수행할 가능성은 충분히 보인다. 무엇보다 정음은 예쁘고, 매력있고, ‘바라만 보고 있어도 그 호수같이 커다란 눈에 폭 빠져버릴 것만 같은 치명적인 매력의 팜므파탈’이 아니었던가!
이에 비해 세경은 분명히 뚫어야할 지붕이 있다. 지붕을 뚫지 못하고 계속 식모살이를 해야한다면 언제까지 그 생활을 해야할까? 바랄 수 있는 것은 신애의 성장 뿐이다. 신애가 별다른 사교육의 투입 없이도 공부를 잘해서 유수의 대학을 가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갈 때까지 족히 20년 정도를 지붕 밑에서 죽어 살아야 한다. 그렇게 결말을 낸다면 이것이 리얼리즘이다. 아니 세경이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도 신애가 성공한다는 보장조차 없다. 사춘기가 되어 노는 아이가 되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더 처절한 결말도 얼마든지 있다.
자신이 지붕 밑에 있다는 인식. 그리고, 그 지붕을 뚫고 나가고 싶다는 의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당당하게 고백을 하는 행위는 이 인식과 의지가 결합된 것이다.
상상 더해 보기
마지막으로 상상력을 더해 한 가지 덧붙여 살펴보고 싶은 것은 최다니엘의 표정이다.
유난히 말이 없어진 상태로 세경의 고백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최다니엘은, 점점 표정이 굳어진다. 눈에는 눈물도 그렁그렁 고이고 목소리는 떨리며 목마저 메어오는 듯하다. 이건 도대체 왜 그럴까? 단순히 세경의 신세가 안타깝고 나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오버할 필요가 있을까?
이쯤에서 작가의 머릿속을 상상해본다. 작가의 목적은 주인공 세경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거다. 그렇다고 마지막회에서 최다니엘이 황정음과 이별을 고하고 세경이와 함께 미국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건 막장이다. 작가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작고 유일한 틈은, 최다니엘의 내면이다.
세경의 고백을 들은 최다니엘은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황정음과 같이 있을 때처럼 장난꾸러기 ‘개자식 이지훈’이 아니다. 진지하게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 목이 메어 목소리는 갈라지고 가늘게 떨린다. 눈에는 눈물도 맺혀 있다. 이 지점에 작가의 장난이 시작된다. 너는 왜 우니? 왜 그리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니? 혹시... 너도 세경이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니?
그렇다. 이 의심까지 하고나면 모든 실마리가 풀린다. 사실은 최다니엘도 세경이를 좋아했던 것이다. 물론 억측이며 상상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최다니엘의 표정과 눈물은 그 억지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가 된다. 그도 세경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다시 125개를 돌려보면 시작도 나오고 발전도 나오고 위기와 극복도 다 나올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최다니엘 역시 신세경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마음이 마음만으로 사랑이 되지는 않는다. ‘그 아이를 보는 나의 마음은 뭘까?’ 하는 질문이 최다니엘의 마음 속에 오래 머물렀으리라. 결론은 사랑은 아닐 거야, 로 났을 테지만 아련한 느낌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이도 많이 어리고 아직 미성년인데다가 우리집 식모로 있는 아이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감성적으로 아무리 끌려도 단단한 이성이 나를 말릴 것이다. 하물며 최다니엘은 매일매일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하는 외과의사다.
갈팡질팡 하는 감정을 자신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황정음이 먼저 나에게 다가왔고 이런저런 사건들에 얽혀들면서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와 사귀게 된 거다. 하지만 세경을 향한 아릿한 감정은 남아 있었고 그 때마다 ‘이건 아니야’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였겠지. 그런데 그런 그녀가 이제는 자유로운 신분이 되어 내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이 순간 ‘이건 아닌’ 상황은 ‘사랑’으로 발전한다.
세경의 고백에 최다니엘이 흔들리고 있다. 이것은 차 안의 공기로 전해지는 것이며 세경도 그걸 느낀다. 여태 꾹꾹 눌러오기만 했던 감정. 그것을 터트린 것만으로도 시원한데 더 나아가 그 남자가 내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그 행복한 순간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날리는 대사가,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생각에 빠져 무슨 이야기인줄 모르겠다며 되묻는 최다니엘을 향해 한 번 더 말한다.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그 시간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는 세경의 간절한 바람,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 그가 바로 작가다.
소원을 들어주는 방식
인정한다. 소원을 들어주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과연 죽음이 행복의 지속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김PD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감정도 지속되진 않는다. 행복한 순간은 있되, 행복한 인생은 없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몇몇 순간들의 행복을 밑천삼아 많은 불행의 나날들을 견디는 게 삶 아닌가 말이다. 김병욱 PD가 인터뷰를 많이도 했더라. 대충만 읽어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염세주의’다. 비극을 좋아하는 염세주의자. 이런 염세주의자가 매일매일 웃겨야하는 시트콤을 만드는 아이러니도 우습지만, 이 사람 정말 노력하고 있다. 마지막에 교통사고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실 수 있으리라. 허나 도시에서의 삶은 언제나 교통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 잊지 마시라. 우리나라의 교통사고 부상자는 매일 1,000명에 이르고 교통사고 사망자는 하루에 20명씩이다. 이런 통계적 사실이 들어가면 개연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마지막 순간에 세경은 행복했으리라.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찌되었든 세경이 느끼는 행복의 양은 줄어들었을 테니까.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그야말로 절정으로, 꼭짓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점을 지나고 나면 내리막길이 있는 건 당연한 일. 미국으로 가도 만만치 않은 생활을 해야할 것이다. 아버지가 얼마 안되는 시간에 많은 자본을 마련했다는 것이 오히려 더 리얼리티가 없다.
어린 시절, 책장에 틀어박혀 헤르만 헤세를 읽었다는 조숙한 아이였던 김병욱은 그 시절의 사고를 그대로 간직한 늙은 아이가 되어 ‘데미안’을 재생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세경은 그 날 다시 태어났을까?
<끝>
김병욱 PD 인터뷰 중...
언제부터인가 나는 소심한 사람들의 괴력을 눈치채게 되었다. 대범한 사람들이 세계를 들썩들썩 움직이는 동안 소심한 사람들은 주섬주섬 세상을 해석한다. 살아남기 위해 예민해질 도리밖에 없는 초식동물처럼 그들은 누가 힘을 가졌는지 계절이 언제쯤 변하는지 민첩하고 정확하게 읽어낸다. 미미한 자극에 큰 충격을 받고 사소한 현상에 노심초사하는 그들의 인생은 남보다 느리게 흐른다. 타고난 관찰자이며 기록자인 그들의 소극적 복수는 ‘이야기’다. 그들은 더디게 살기 때문에 삶을 사는 동시에 재구성한다. 목소리 큰 당신이 휘어잡았다고 생각하는 어젯밤 술자리에서 벽지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듣기만 하던 동료가 있었던가. 그가 잠들기 전 떠올린 스토리 속에서 당신은 놀림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세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메커니즘 중 하나라고 판명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