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풍대군은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 완남군(完南君) · 완녕군(完寧君) 등 네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세 딸은 이인우(李仁雨) · 노신(盧愼) · 변중량(卞仲良)과 혼인하였다. 대군의 장남인 완원부원군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선평군(善平君)은 또 세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경명군(慶明君)은 두 아들은 두었는데 장남 권생(勸生)은 대사헌을 지냈다. 13세 시태(時泰)가 완산부원군파에서 양자로 왔고, 18세는 효령대군파에서 철재(轍在)가 입양되었다. 완원부원군의 후손은 공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양평 부근과 서울, 그리고 대군의 묘소가 있는 함흥 북청 부근에 많이 살고 있다. 한말의 용익(容翊) 대감과 준(儁) 열사가 공의 후손이다. 대종가(大宗家)는 서울 안국동 옛 경기고교 자리에서 여러 대를 내려왔으며 지금의 미국대사관 자리에는 별장도 있었다. 18세 철재 종손은 공주부(公州府) 경무관을 거쳐 탁지부 재임 때 한일병탄이 되자 시흥으로 낙향하였다. 완원부원군의 부조위 사우(祠宇)는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21세 대종손 주원(柱元)은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 둘째 아들인 완산부원군은 세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여양군(驪陽君)이 돌아가니 정부인(貞夫人) 김씨가 네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전남 담양에 있는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집으로 낙향하였다. 여양군의 장남인 월성군(月城君)의 아들 효상(孝常)은 다시 전남 영광으로 성종 때 이주하였고 5세 세원(世元)이 완산부원군의 부조위 사우를 다시 짓고, 사림(士林)이 묘장서원(畝長書院)을 창건하였다. 23세 종손 규헌(奎憲)에 이르기까지 5백여 년 간 종손이 한 집터, 한 지붕 아래서 면면히 이어가며 번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