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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20세기에 태어난 인물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중 한명이다
필자의 대학시절 인도대사관의 직원과 친분이 있었는데
이사람에게서 여러가지 인도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 가장 흥미 진진한것이 마하트마의 성생활이었다
간디는 분명 생명존중의 사상과 비폭력사상이 그만큼 더 필요해진 불안한 시대에 특히, 지구 생태계의 파괴를 염려하는 환경주의자들과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종교나 다름없다.
그러나 간디는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지만 위대한 바람둥이 이기도 했다.
60의 나이에도 몽정에 시달리던 정력가인 그의 지극히 인간적이었던 삶을 편견 없이 조명해 보기로 하자.
1869년 10월 2일 인도 구자라트 주의 카티야와르 반도에 있는 해안 도시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난 모한다스 카라크찬드 간디.
그는 네 번 결혼한 아버지의 네 번째 처인 파틀리바이와의 사이에서 난 3남 1녀 중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그 당시 카티야와르 번 왕국은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인구 십만명 내외의 작은 나라들은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인도는 철저한 계급제도(카스트제도)의 나라로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다라의 네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브라마노가 수다라의 생활상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 만큼 계급간의 차별이 심한 나라다.
간디의 집안은 그중 바이샤의 바니아에 속해있었다.
'간디'라는 성은 '곡물창고'라는 뜻으로 '간디 가(家)'는 상업적인 기반을 가지고 여러 대를 풍족하게 살았던 상인계급의 집안이었다.
부친과 조부, 숙부 등은 포르반다르 번 왕국의 수상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한 환경속에서 간디는 다른 인도인들에 비해 부유하고 윤택한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인도는 사상의 나라이다.
철학가나 종교인들이 가장 많이 탄생되는 나라 인도에서 '간디 가(家)'역시 늘상 종교적인 분위기에 젖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친은 호탕하고 정력적이었으며, 치부(治富)에는 거의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나마 대대로 축적된 재산은 자선사업에 다 써버릴 정도로 겸허한 사람이었다.
그의 모친은 남편보다 더한 힌두교의 경건한 신자로 항상 중법에 따라 단식을 철저히 하였으며 모든 것을 바쳐 환자를 돌보는 희생정신이 강한 여인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 자란 간디에게 있어 식민지 하에서 억눌리고 있는 민중들과 굶주림 속에서 절망과 공포만이 자리 잡혀 있는 민중들의 참상에 눈뜨게 된 것, 사회변혁 운동을 경건한 신앙심에서 찾으려 했던 면면들은 그의 가정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토대로 봐도 좋을 것이다. 조부로부터는 부드러운 성품을, 부친으로부터 무욕을, 모친으로부터는 신앙심을, 간디가로부터는 부단히 움직이며 활동하는 실천적인 성격을 이어받고 태어난 것이다.
그의 어린시절 회고담을 들어보자.
"형한테 빌린 돈을 갚으려고 형의 팔찌에서 금을 조금 떼어 팔았지만 양심의 가책을 이길 길이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께 그 얘기를 고백하고 벌을 줄 것을 요청하는 쪽지를 써서 드렸다. 아버지는 그 글을 읽고 나서 진주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 종이를 찢었다. 그때 나는 소리 내어 울었고, 그 광경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아버지의 사랑의 눈물은 내 마음을 정화하고 내 죄를 씻어주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아힘사(비폭력 무저항)에 대한 사실상의 교훈이었다.
당시 나는 이것을 부친의 사랑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순수한 아힘사였음을 알고 있다.
그런 아힘사정신이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되면, 그것을 접하는 일체의 것을 변화시킨다.
그 힘에는 한계가 없다."
이와 같이 진리는 우리 가까운 데에 있으며 어떻게 느끼고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자, 그런 사람만이 진정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디가 몸소 실천해준 것이다.
사실 간디의 어린시절 모습을 더듬어보면 혁명가의 기질은 나오지 않는다.
내성적이고 매사에 수줍어하며 다른 소년들과 섞여 있어도 튀지 않았던 소년이었다.
간디의 회고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마음의 가책을 잘 느끼는 마음씨 착한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그가 인도를 독립하게 할 수 있었던 큰 힘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상상했을까?
그의 사생활을 좀더 살펴보도록 하자. 간디는 열두 살 때 고등학교에 진학 했 으며, 열일곱 살 때 바브나가르에 있는 사말다스 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인 도의 조혼 풍습에 의해 일곱 살 때 약혼한 카스투르바이와 열세 살 때 결혼했다.
어린 그는 결혼생활의 묘미를 느끼기도 전에 그의 아내를 두고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열여덟 살 때 일이다. 영국은 간디에게 별천지 같은 나라였다. 인도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 무수하게 즐비한 휘황찬란한 나라였다.
간디는 영국의 풍습과 문물에 적응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과 돈을 소비하기도 했다.
영국인들처럼 신사복도 입고 어색해 하면서도 그것을 무릅쓰고 댄스를 배우기도 하고 웅변과 악기를 배우기도 했다. 실상 간디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있어 청장년기를 보낸 영국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식민지를 장악해가며 세계 최강의 나라로 군림하고 있었던 영국에서 세계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간디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 인도에서 탄생되어 인도의 전통으로 뿌리깊게 자리잡아온 종교 이외에 영국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간디는 구약에서는 거부감을 많이 받았지만 신약 산상수훈에 이르러서는 깊은 감명을 받기에 이른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며…'라는 성경구절은 심성고운 간디의 마음에 사로잡혔다.
또한 간디는 샤말바트가 말한 '한사발의 물에는 좋은 식사로 갚아라'라는 구절을 늘 상기하며 실천코자 애쓰는 인격자였다.
간디의 생애를 살펴보면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인 구석을 찾을 수 없다.
대부분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특히 기독교적 전통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종교적 독선이 강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기독교이 십계명 첫머리'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을 기초로 한 유일신 사상의 영향이 큰 바이다.
그러나 간디는 독실한 힌두교도이면서도 모든 종교를 초월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정신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기독교에서도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마호메트의 다신교적 성향과 근엄한 생활에서도 많은 것을 깨달아갔다.
어디 그뿐인가.
변호사 개업을 한 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카트가 추천한 <관상학>계통의 책을 독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간디는 부단히 인격을 도야해가는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변호사로 개업하고 봄베이의 첫 소송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을 한마디도 못하고 앉았던 그는 변호사 사무실을 6개월 만에 개점폐업하고 대서일로 돈을 벌던 때 마침 친지의 주선으로 남아프리카 인도인 상사의 송사를 의뢰받았다.
남아프리카 행은 그의 인생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샤티하 그라하(진리파악 또는 진리파지), 브라마차라(금욕, 동정주의) 아힘사(불살생, 비폭력), 모크샤(해탈), 아파리그라하(무소유) 이런 단어의 등대들이 그의 항로를 향해 분명한 빛줄기를 뿜기 시작한 것은 인도인 노동 이민의 땅 남아프리카였기 때문이다.
간디는 나탈에 배가 닿는 순간 많은 충격을 받았다.
선거권과 토지소유권이 없고 저녁에는 외출조차 금지되어 있는 인도인의 실상, 나탈에서 인도인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계약노동자나 자유노동자로서 영국인들 밑에서 일하는 가운데 수없는 인간적 모욕을 당하고 있었으며 자신도 변호사 이전에 인도인이기 때문에 많은 모욕감을 견뎌내야 했다.
그는 그런 모욕을 통해 깨달았다. 그것은 힘이 약한 인도인의 모욕이요, 나아가 나태하고 나약한 전 인류의 모욕이라는 것을.
간디는 그때부터 싸우기 시작한다. 학대받는 저소득층의 인간적 권리를 위해 더 이상 모욕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변론하고 싸우지만 식민지의 시민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 쓸쓸함과 허무감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의를 설정하게 된다.
쿠울리(서양인들이 유색인종에 대해 멸시하는 뜻으로 쓰는 말)의 신세, 백인들이 탄 마차에 함께 탈수 없으며 일등 기차표를 가지고도 짐칸으로 쫓겨나고, 거부하자 기차에서 내던져지는 사태까지 겪게 된다.
이러한 충격 속에서 불평등, 차별이란 단어에 눈 뜬 그는 난폭한 국가와 군중의 힘에 대항하는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맹세했다.
'스스로 어떤 고통을 당할지라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그 깊은 병의 뿌리를 뽑기 위해 힘 쓸 것이다'라고.. 그는 이곳에서 3번의 투옥을 이겨내고 미움, 분노, 폭력 등 모든 감성을 초월하는<샤타그라하>란 이름의 대중적인 비폭력 저항 투쟁을 벌여 22년 만에 마침내 차별 철폐라는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투쟁으로 간디는<남아프리카의 간디>에서 일약<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아힘사>와 <샤타그라하>가 간디의 신앙이자 정신적 지주였다면 <스하라치-자치>는 사회적 이상이었다.
농촌경제부흥과 민족 자본 축적을 통한 자급자족사회 실현을 위해 그는 손수 물레를 돌려 실을 짜 옷을 해 입었고 농민들에게 퇴비를 권장했다.
그는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 자신을 더욱 성장시켰다.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 들을 접하고, 베다나 힌두경전, 불경, 성경, 코란을 읽었다.
그리고 각 종교 에서 저마다 어떤 일정한 영감(靈感)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하나의 종교가 최고의 종교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종교적 독선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갖고 오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 22년 만에 고국 땅을 다시 밟은 간디를 정치 쪽으로 이끈 것은 식민지 현실과 영국이었다.
인도인에 대한 탄압 강도를 높인 룰렛법 제정으로 국민회의파(국민회의당의 전신)를 조직, 전국적인 항의 운동을 벌여 나갔다.
그의 항의 운동은 결의문과 테러 활동 대신 비폭력 불복종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일부에서는 비폭력 항거는 사실상 무저항이며 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비겁자의 넋두리>라는 비판도 쏟아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비폭력과 인내를 발하는 간디와 함께 기꺼이 감옥에 들어갔다. 출옥과 투옥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된 상황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무저항을 되뇌었고 경제자립을 위한 수방(手紡)운동과 교육개혁 그리고 계급제도(카스트 제도)철폐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지역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인도 민중만을 위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의 시각은 국제적이었고 지구적이었고 우주적이었다.
그러한 시공을 초월한 감각 역시 종교에서 비롯되었으며 생명을 존중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적을 결코 미워하지 않았다.
그의 이상은 적의 희생까지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폭력, 어느 시대 어느 정치에서도 이용하고 또 이용했던 그 전통적이고 강력한 수단을 나약하디 나약해 보이던 비폭력이 결국 굴복시켰다. 그곳에 간디의 위대함이 있었다.
진리를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는 비폭력을 현실화시킨 용기, 폭력에 맞서 불안에 떨고 있는 인도인들에게 비폭력의 진리성을 일깨워준 데서도 간디의 성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폭력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서 인도 민중들은 순한 양처럼 되어 버 렸다.
설상가상으로 인도에는 전생의 업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숙명론적인 종교적 전통이 피 내림으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비폭력주의와 결합되면서 인도민중들은 전생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보다 행복한 내세(來世)를 그리워하다 불평불만 없이 그렇게 살아가게 된 것이다.
문제는 순박한 인도 민중들을 여전히 핍박하며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있었다는 것이다. 간디는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그들의 저열한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며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나는 민중에게 비폭력주의를 가르치고 실행시켰다.
그 때문에 인도는 자유를 쟁취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이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이라 느끼고 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나의 신념도 승리도 아무것도 아니다." 간디의 비폭력 정신이 그 민족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인도의 상황, 흰두교도와 회교도간의 화해에 의한 인도 통일을 호소하던 간디의 주장은 분리 독립을 생각하던 국민회의파 지도부와 갈등을 겪는다. 47년<힌두교 인도>와 <회교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되던 날 78세의 고령 간디는 흰두 · 이슬람교의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융화를 위한 설득에 나선다.
그러나 이듬해 48년1월30일 5일간의 단식을 치른 뒤 집 뒤뜰에서 기도하던 간디는 세발의 총성과 함께 쓰러지고 만다. 범인은 회교도에 너무 관대하다고 불만을 품은 광신적인 힌두교도였다.
간디가 인도에 가져다준 것은 정치적 독립만이 아니었다. 간디보다 스무 살 연하이며 그에게 감화 받아 민족해방운동을 시작한, 자화할랄네루에 따르면 "깡마른 몸피에 비상한 힘으로 가득한"간디가 인도에 준 더 큰 것은 "수억 인도인의 생활방식을 바꿔놓은 새로운 표준과 가치였다"라고 한다.
자서전에 간디는 이렇게 적었다.
"정치 분야에서 나의 실험은 큰 가치가 없다. 이 때문에 주어진 마하트마의 칭호는 더구나 가치가 없다. 내가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만이 알 수 있는 정신적 실험이다" "올바른 것의 힘, 넋의 힘이 바로[사탸그라하]다.
이것은 정당한 것을 수호하는 힘이다.
나는 이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쓰지 않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나를 괴롭힌다" 몽둥이도 돌맹이도 화염병도 들지 않은 채 그는 빈주먹과 때로는 맹물로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낸 것이다.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을 지닌'마하트마'의 호칭을 선사받은 간디.
<위대한 성자-마하트마>라는 칭호는 그를 신격화시키기 위해 인도인들이 그에게 준 선물이며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렇다면 상기에 구구절절이 기술한 바대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성자라고 해서 이성적인 여자문제가 깨끗했을까? 아마도 지구상에 여성문제가 없었던 성자들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안다.
이제부터 마하트마 간디가 아닌 자연법칙상의 남자 간디의 여성문제를 들춰 보기로 하자. 동서양을 막론하고 통계적으로 호리호리한 키에 코 큰 남성치 고 여자 문제가 없는 남성은 없다. 코를 남근으로 비유하는 예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다.
간디는 코 크고 눈 크고 턱이 큰 삼분법의 관상을 가진 남자다.
인도에선 눈이 크다든가 코가 크다든가 턱 중에 하나만 커도 난봉꾼으로 보는 대신에 귀가 크면 성자로 본다.
부처나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나, 희랍, 흰두교의 대성자들은 귀가 큰 것으로 조각되어있다.
간디의 귀는 크지 않았다.
그러니 전형적인 호걸(여자를 좋아한다는 뜻의 요즘 애들이 쓰는 말) 조건을 갖춘 남자가 아니겠는가.
성생활은 식생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마련인데 그는 종교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정력에 좋다는 산양고기라든가 그 외의 육식을 즐겨 들었다.
그러자니 아랫도리에 꽉 차 오르는 기(氣)의 열병을 참아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힌두교도로서 금욕생활을 참아내기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따금 술에 취해 있는 간디를 보고 주민들이'그대는 왜 금욕의 서장인 기본마저 무시하는가?'라고 물으면 간디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사라져 버리곤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간디의 생가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그 당시의 브라마차라 라는 힌두교도로서의 서약은 철저했다.
서약을 어길시 뭇매로 맞아 죽든가 고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곤 했었다.
그 당시 간디 가는 앞서 밝혔듯이 대단한 가문이었다.
방약 무도한 간디의 청소년 시절 성격은 청년이후의 바람둥이로 봇물 터지듯이 터져버리고 만다.
간디는 철저한 금욕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여자에 대해서만은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그는 여자를 이용할 줄 아는 바람둥이였고, 훗날 정치, 문화, 종교적 운동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을 적절히 이용했다.
그는 여자를 끌어 모으는데 탁월한 수단을 발휘했다.
그 첫째가 항상 나즈막한 소리로 쉬엄쉬엄 산들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철저한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다.
그가 여성들에게 했던 이야기 가운데 유명한 이야기가 있는데 '여성은 대지요 또한 바다요 별이요 달이노라'라고 했다고 한다.
17살 난 소녀 소니아 수레딘이 묻기를 "태양은 그럼 무엇이죠?"하자, 짐짓 뒷짐을 지고 정원을 왔다 갔다 하며 하는 말, "태양은 곧 간디지" 그 말을 들은 소니아 슈레딘은 전 인생을 그에게 바치게 된다.
아마 그녀는 큰 스님들과의 선문답 정도로, 흔히들 이야기하는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가하면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슈무나르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 당시 영국 대장의 딸로 인도인을 어머니로 둔 혼혈아다.
여행을 하던 도중 간디가 강연하는 모습을 보고 매료 된다.
그 여성이 후에 기록하기를 '간디는 뭇 여성들을 홀리다 못해 영혼을 사로잡아 가둬버리는 마력을 지닌 남자다'라고 적고 있다.
필자가 보기엔 그의 언어 가운데서는 모성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말만 하고 전혀 거부감이 없는 대자연의 언어들을 여성적인 입장에서 가장 부드러운 몸짓과 눈짓으로 구사할 줄 아는 남자였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에 호기심이 발동한 슈무나르는 강의가 끝난 후 그의 집으로 동행한다.
슈무나르가 오자 그는 옷 벗기를 권유한다. 그녀는 서슴없이 옷을 벗고 즉석에서 해괴한 짓(?)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간디에게 뺨을 갈긴다.
간디는'태어나서 처음으로 아프게 맞아 본 뺨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이후로 그녀가 몇 번인가 다시 찾아갔지만 그는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한 단면을 읽게 해주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기록되어진 문헌과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모아 보기로 하자.
기록된 문헌에 의하면 남아프리카에서 이민 온 17살 난 소녀 소니나 슈레이딘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를 본 순간 간디는 얼어붙듯이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를 끌어안고 온 얼굴을 맛사지 하듯이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때 간디는 싱싱한 몸을 가진 한창 좋은 나이였다.
그리고 그의 명성과 부 앞에 계급을 가진 아프리카의 17살 난 소녀는 넋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소녀뿐만이 아니라 해를 거듭 할수록 여자들이 불어났는데 이 여인들은 비서 업무 이외에 간디에게 마사지나 목욕을 시켜주고 올리브유와 향을 뿌리곤 애무뿐만 아닌 잠자리도 같이 했다.
독자들이여 상상을 한번 해보자.
얼마나 행복한 간디였을까?
스무 살 미만의 한창 자라나는 싱그러운 기(氣)를 가진 여성들이 혀로 온몸을 맛사지 해줘가며 잠자리를 했으니 얼마나 짜릿 짜릿했을까!
자신이 데리고 자고 싶은 여자들을 아낌없이 잠자리로 끌어들인 남자.
필자가 생각하기엔 완전한 변태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런 소문이 나있는 와중에도 수없는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여자들과 잠자리를 하면 그래도 얼마의 돈은 집어주었을 테니 그때 인도의 참담한 생활 속에선 한줄기 생명줄이요, 게다가 간디는 인도의 선각자요,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영웅이니 그와 잠자리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여성들에겐 영광의 심정이었으리라.
실제 그런 회고담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그 여인들 중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이들도 있었으니 '인도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우는 사로디니 나이두이고를 비롯해서 영국인으로 해군대장의 딸인 마들린 슬레이드가 있었다.
사로디니는 간디가 가장 사랑한 귀의자(歸依者)의 한사람이었다.
그녀는 인도 최상류 층인 바라문 계급 출신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류시인이기도 했다.
간디는 그녀를 가리켜 '미키마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미라벤'으로 개명한 후 간디에게 연모의 감정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한다. 이정도의 여성들이 왜 간디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맨바닥을 걸어 다니는 간디의 발바닥을 핥아가며 찬미했을까?
인도라는 땅은 기운이 있는 모양이다.
중 늙은이 보다 더 못생긴 간디의 얼굴에 미녀들의 행렬이 웬 말이란 말인가.
우리시대에 보기 드문 주목할 만한 바람둥이 인생을 살다간 간디!
사실 여기에서 그친다면 그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없다. 위대한 사상가요, 위 대한 영혼이라는 칭호의 마하트마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칭호이다.
그런 그가 몸에 약간의 이상이 있어도 여인들을 알몸으로 침실로 끌어들였고 그러한 엽색행각은 나이 70이 넘어서도 여전히 행해졌다.
심지어는 밤, 낮의 일기차가 심한 인도에서는 오한이 들기 쉬운데 그러면 간디는 여인들 몇 명을 지목하여 나신으로 그의 몸을 감싸게 하여 자신의 체온을 회복시켰다 한다.
이때 대표적인 여인이 아슈람에서 온 열다섯 살의 처녀 스시라 나얄이다.
그녀는 간디와 동침한 일에 대해 "간디와 함께 있으면 어머니와 함께 자는 것처럼 평온함을 느꼈다"고 전한다.
간디의 이러한 행각을 정신질환으로 친다면 어느 쪽에 해당할까?
이것을 단지 남성의 원초적 본능이라고 치부해도 좋을까?
독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자.
어찌되었거나 간디는 여성을 가장 편안하게 해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섭렵해서 체험한 남자임엔 틀림없다. 왜냐하면 어느 여성도 성적인 문제에 대해선 불평불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디가 과연 변강쇠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손가락의 기공운동으로 여성을 뇌살 시켰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눈 크고 코 크고 턱이 큰 사람은 혀도 크다더니 혓심이 좋았을까?
이것도 역시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자.
수십 년을 관계해온 여성들이 단 한마디의 불평불만이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스시라 나야리에 의해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간디에게서 느낀 성의 희열은 한마디로 꿈속에서 헤매이는 기분이며 향기 좋은 향료의 욕탕에서 둥둥 떠 있는 기분으로 잠자리를 하면 할수록 더욱 더 편해졌다고 한다.
또 한 여인은 간디의 생질부로 열여섯 살 난 아바 간디였다.
간디의 습성은 전자에도 밝혔듯이 똑같았다.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에 접고 네 손가락을 여성의 음부를 가리키며 "여자여 그대는 벗으라. 그 벗음이 곧 자연이니 나는 곧 그대의 태양이로다"그 말을 엿들은 남편이 침실 안으로 쫓아 들어가 자신이 대신 간디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간디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걸작중의 걸작이었다.
"성적인 희열로 내 체온을 보온해주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브라마치드(금욕)'를 시험하기 위해 아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여인을 데리고 침실로 인도했다.
독자들이여 특히 남성들이여, 당신의 아내가 그런 식으로 당했다면 어찌했겠는가.
그 후로 그 여자의 남편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사이비 종교같이 혹시 암매장? 그럴 리는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일 것이다.) 더한 것을 파헤쳐보자.
간디의 연인 중에는 다른 여자들에 대한 질투 때문에 그리고 간디의 사랑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동침한 여자들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여자가 증손녀 뻘 되는 마누간디이다.
그녀는 간디가 외출하면 지팡이 역할을, 단식하는 동안에는 침실에 누워있는 간디의 심장고동을 확인하는 간병인 노릇을 했다.
그리고 대부분 노인들이 그러하지만 나이가 들면 노인성 지로한으로 온몸에 각질이 생기고 식욕이 급격히 떨어져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변비로 고생하게 되는데 간디 역시 변비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의 항문을 혀로 핥아가며 관장을 해주었다고 하니·….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차이겠지만 간디야 말로 역사에 기록되어지지 않은 변태라 해도 필자를 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세계의 위인이라 해서 이런 사생활이 없지 말라는 법은 또 없지 않은가,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만 독자들이 참고사항으로 알아두자. 필자가 심술궂은 마음으로 적나라하게 파헤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간디의 여성문제에 대해 결론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간디의 여자들이 남긴 기록 문헌에 의하면 그의 웃음도 언어도 표정도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와 같고 아버지와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고 하니 남성들이여, 이제 간디의 자연을 배우자. 그럼 세계 여성을 다 그대들의 것이니.
간디의 제자 라이하나 디야부디에 따르면, 간디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인들에 대해 "성충동을 억제하고 억누를수록 오히려 강한 성욕을 자극 받는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또 성적으로 순결을 지키려는 자신의 각오가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 고백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언젠가 육십을 넘겼지만 끊임없이 몽정에 시달리고 있다고 대중 앞에서 털어놓기도 했다.
어쩌면 간디의 고백은 자신의 정신적 범죄에 대한 속죄의 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간디는 여자 없이 밤을 지샐 수가 없었다.
정치 경제 문화의 복잡한 사안 속에서 깜박 잠이 들면 몽정을 해버리는 남자, 그것이 바로 간디의 실체였다.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스쳐보기만 해도 발기가 된다고 하는 남자였다. 그래서 그는 앉아서 단식과 금식하기를 원했을까?
결과적으로 알수가 없다
그러나 위인의 역사는 위인의 역사대로 평가 받을 것이고
사생활의 영역은 각자의 판단에 맡기면 될것이다
오쇼라지니쉬는 평생 마하트마가 위선자라고 욕을 했다
위선자인지 아님 우리가 모를 정신세계를 소유하셨는지는 각자 판단의 몫으로 맡긴다
-연금술사
http://cafe.daum.net/alchemyer
[출처] 마하트마 간디의 성생활이야기 |작성자 연금술사
첫댓글 여기서만 글을 쓸수 있군요.
댓글 5개도 정성스럽게...
후아~^^;;찾았다...ㅋㅋ;;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