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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출발 6~7일이 지나면서 부터 멀미도 참을수 있을 많큼 적응되었고 그렇게 저녘식사와 검열을 마치고 나면 할 일들이 없던 참전자들은 무료함과 전쟁이라는 두려움에 벗어나렴인지 선실 구석 구석에선 "섯다"에 "땡이다" 소리들이 수령한 군표가 오가며 요란해진다,
그 와중에도 일부 참전자에 접근하여 안전한 부대 안전한 보직을 내 세워 돈을 요구하는 공판사자?가 내게도 은근 슬적 다가와 제의를 받았으나 지참한 금반지나 돈도 없었거니와 받은 군표로는 택도 없는 금액이라 부글거리는 가슴을 안고 씁씁한 가슴을 달래며 다낭항에 도착했다.
우리 26제대는 심한 파도로 인해 10여일만에 밤에 도착한 다낭항 외곽에 정박해 있었는데 멀리보이는 산에 팬텀기가 내려 꽂으며 폭격하는 장면과 폭음소리는 전쟁터에 왔음을 실감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전쟁이 어떤 것인가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이기도 하여 그 광경들을 나는 잊지 않으려 눈에 담아 두었었다.
이튿날 날이 밝아 선창으로 내다보니 멀리 커다란 병원선이 보이고 팬텀기는 계속 내려 꽂고 있었으며 포성은 잔잔히 들리고 있었다.
다낭에서 해병들의 교대가 이루어지고 퀴논항에 들려서 맹호들이 교대하고 다시 출항하여 출발 13일만에 나트랑에 도착했다.
나트랑에서 내려 땅을 밟으니 그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배에서 분류된데로 길게 늘어선 GMC차량으로 이동 지정된 차량에 올라타니 장갑차가 캄보이하며 백마부대로 향하는데 월남의 공기속에서 울컥하는 비릿하고 비위상하는 냄세가 진동하며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그 냄새가 나를 자극 하기 시작했다.
그 냄새는 "능막"이라는 월남사람들의 전통음식 냄세라는 것이란다. 항아리 두개를 겹쳐 올리고 윗 항아리 밑 부분 가운데를 구명내서 올려 놓고 그 안에 생선들을 차곡차곡 앉혀놓고 그 생선들 위에 돌을 올려 눌러놓으면 생선이 썩고 삵혀져 아랫항아리로 떨어진 국물이 능막이란다. 어찌보면 우리나라 젓갈이랑 비슷한것 같은데 냄세와 색갈은 영 아니다였다.
나는 6.25때 미군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딜때 처음맡았다던 인분냄세가 한국의 첫 인상이였다는 어느 글을 본적이 있어 나는 이 "능막"냄세가 월남냄세라 생각했고 또 그렇게 불러왔었다.
나중 중대로 배속되어 도로정찰시 어느 가정집을 들여다 보는데 반갑다며 주는 음식을 받아 들었으나 이 냄세때문에 도저히 먹지 못하고 옆사람에게 넘겨준 일도 기억이 난다.
나트랑에서 사단으로 향하던 분위기는 위엄있는 장갑차와 한적한 정글길을 달릴때 주변을 위협사격하던 일을 빼면 평화스러움 그자체였다.
듣던대로 어느 논은 씨를 뿌리고 어느 논은 푸르게 다 자라있었고 어느 논은 다 베어 거둬들이고 있어 전쟁만 없으면 참으로 살기좋은 나라겠구나 생각하였다.
그렇게 긴 여정의 파도를 헤치고 백마 사단에 도착하여 보충대 막사에 들어서니 꼭 한국에선 임시 막사모양 벽도 바르지 않고 판대기를 공기가 통하도록 가로로 바람이 통하도록 비슷하게 올려 지은 막사같지도 않은 판자집 같은 너무 허술한 임시 막사같은 건물에 의아했었고 높은 천장엔 천천히 돌아가는 선풍기가 달려있었다.
사진은 작전 철수 후 갈가리 찢긴 전투복을 갈아입기 전 특유의 연대 막사옆에서 목을 추기고 있는 말뚝첨병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우리 한국에선 산속에 가서나 볼 수 있는 손가락 만한 도마뱀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천정이고 벽으로 돌아다니는데 뱀을 제일 싫어하는 나로서는 잠자리에 내게 떨어지지나 않을까 소스라치기도 잠을 설치기도했다.
월남 교육 받을때 월남인들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은 일부는 월남군속이고 일부는 베트콩으로 구성되어 있다했다. 전쟁중에 살아남으려는 방편일수 있겠으나 안보의식으로 철저했던 우리들로서는 이해가 가지않는 대목이며 월남인들을 이중적 잣대로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었다.
그렇게 점차 모든 환경에 적응을하며 월남 신병?교욱을 받는 동안에도 인사카드를 뒤져 대상자(군 입영 신체검사시 IQ 152를 받아 기록카드에 특A라는 굵고 큰 뻘건 도장이 찍혀있었다. 나는 초등학생 수준의 이 검사를 대수롭지도 않게 생각했었으며 전부 맞었으리라 생각해 20분도 안된 시간에 제일 먼저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왔었다. 그러나 5점짜리 마지막 문제와 2점?인가 3점짜리 이 두 문제가 틀린것을 알았다.)를 가려낸 공판사자는 학벌도 좀 되는 이 서울놈에게 어김없이 찾아왔었으나 가진 것이 없었던 나에게 실망을 안고 돌아섰었으리라.
나는 이 전쟁에서 전사를 한다해도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는 형제와 조카들에 도움이 되어 주리라는 참전 결정을 했던 당시의 마음을 다잡으며 1대대 4중대로 배치를 받아 도착하였다.
중대는 반닌 마을 북쪽 1~2km쯤 지난 1번도로 바로 우측에 자리하였으며 입구 우측엔 공영토건이 각종 건설장비와 몇채의 건물들과 함께 넓게 자리했고 조금 더 들어가니 좌측엔 포대가 있었고 작은 동산을 3중 철조망으로 감싸 않고 봉우리엔 태국기와 월남기가 펄럭이며 중대 OP가 자리잡고 있었다.
반닌지역 4중대 전술기지 위치
2소대는 동남쪽 바다를 향해 위치해 있었다.
보는 사진과 달리 고요한 바다만 보였을 뿐 섬이나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밤에는 수평선으로 불빛이 수평선을 이우었으나 고깃배 불빛으로만 알고 있었다.
반닌지역
반닌지역
4중대 전술기지 위치
1번 도로상에서 바라본 4중대 자리. 정상 우측 숲이있는곳이 포대자리. 2008년 1월 현재모습. 최진현 전우 촬영.
4중대 자리에서 바라본 1번도로 건너편의 풍경. 2010년 2월 현재모습. 최진현 전우 촬영.
입구같은데 세월이 흘러선가 나무가 없었는데... 2010년 2월 4중대 자리의 현재모습.
4중대 정상 OP자리. 2010년 2월 현재모습.
4중대 헬기장 터? 당시에는 연못을 본 기억이 없는데... 2010년 2월
2소대 우리분대 벙커가 위치하던 곳 같은 낯익은 경관. 2010년 2월
우리분대 막사는 중대기지에서 동남쪽에 위치해 있어 멀리 바다가 보이는데 육안으론 잘 안 보이지만 밤이되면 앞 바다 멀리 큰 도시가 있는 것 같이 수평선위에 길게 떠있는 불빛들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물었더니 고기잡이배들이라 하여 그렇게만 알고 지냈었다.
그렇게 4중대 2소대 분대장 보직을 받고 몇일 지나지 않아 우리 중대 또는 일부 병력이 캄보디아로 들어갈 것이라며 그쪽은 정말 위험하다는 정보와 함깨 분대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나 나로서는 확인되지 않는 정보라서 다음소식을 기다리며 중대 분위기 파악에 노력했다,
그런던 중 내가 중대본부 선임하사로 갈 것이라는 소문과 중대 본부 내 고참 행정병들의 반발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별스런 소문들이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중대내를 흘러다녔는데 26사단 75연대시절 00중대 교육, 작전계를 보던 내 경우처럼 한국에서건 월남에서건 중대 행정반에 일반하사 TO는 없다. 하지만 중대장의 판단과 구성원(중대 내 장교)들의 요청에 따라 일반하사가 간혹 있기는 했다.
중대 행정반 병사들은 자신들 보다 윗 계급인 하사가 온다면 달가와 하지 않는다는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고 더우기 나는 어느 누구에게 부탁할 사람도 없었고 부탁한 적도 없어 남의 일인양 넘겨 버렸는데 본부 행정병들의 반발 노력이었는지 시간이 갈 수록 그 이야기는 묻혀버렸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인해 4중대에 있던 월남 생활에, 내 인생에 치명적인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짐작도 못하였고 오늘날 이 나이에 이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될 줄도...
당시 작전 나가기 전 중대장이하 중대원들이 OP근처에서 캔맥주와 과일 등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武運長久를 비는 고사? 비슷하게 의식을 치룬다. 이때 돼지고기를 먹어보게 되는데 맛이 잊혀지지않을 정도로 일미여서 돼지고기맛이 그보다 좋을수 없었다. 월남에서 소고기는 왜 그리 맛이 없는지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돼지고기 맛은 세상에서 제일 맛이 있었다.
아마도 기후탓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월남 물소고기가 맛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월남에서 소고기와 돼지고기값은 우리나라와 반대로 소고기는 쳐다보지도 않지만 돼지고기값이 몇배는 더 비쌌다.
작전병력은 기지방어병력과 작전병력으로 나뉘는데 말년 귀국대기자, 환자 등 열외받을 병력을 제외한 일개소대 20/1 즉 절반만 작전인원이고 나머지 병력은 기지에 남아 기지방어 및 귀환대비 음식장만을 하기도 한다.
*참고 : 전투병 군장
개인화기 M16 1정,
실탄 300발,
탄창 20개,
탄창집,
탄띠,
대검,
철모,
화이바,
수류탄 4발,
크레모어(격발기,전선) 2발,
수통 5개(기지 주변에선 1~2개),
정글도(첨병),
나침반,
작전지도,
연막탄,
조명탄,
방독면,
야전삽,
베낭,
모포,
판초우의,
모기약 2개,
정글화,
유탄발사기(사수),
로켓포 무반동총 신형(사수), 베트콩들은 B-40(적탄통, RPG)을 휴대
무전기(무전병),
방탄조끼(장거리 또는 장기작전에는 미착용),
A급 작업복 1벌(장기작전시),
전투식량(C-RATION) 3일분(3일마다 헬기를 통해 재공급 받음, 식량 또는 소요한 양 많큼의 장비들과 더불어 고향소식과 애인소식, 위문편지들과 함께..).
등등.. 무게 약 40Kg 정도.
나는 4중대로 배속받고 바로 큰 작전에 첫 투입되었는데 연대 연병장인지에 집결하여 더위때문인지 아니면 작전상 빠른 수송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양쪽 문을 다 떼어낸 대기중인 헬기는 조종사 부종종사 양쪽 기관총 사수 총 4명과 완전 전투군장를 한 우리대원들 6명이 타는데 탑승요령은 고국에서 이미 군자산 헬기작전에서 익혔으나 UH1기는 뒷 꼬리날개를 피해 앞 측면으로 탑승을 하고 시누크는 반대로 앞 프로펠러를 피해 뒷쪽 문으로 탑승하는것이 헬기탑승 안전요령이다.
탑승을 하고서는 헬기의 구조상 윗부분은 전선 및 헬기의 주요 부분들이 배치되어 있어 오발 사고 등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총구를 밑으로 향하게 세워총을 하고 얕게 날아가는 양쪽문이 없는 헬기에서 발아래 펼쳐진 마을과 산들을 지날때의 상쾌함과 원심력때문인지 헬기가 45도 이상으로 급선회를 해도 땅으로 쓸려내려가지 않는것이 신기하고 스릴이 있었다.
랜딩지점은 작전 전날 팬텀기가 와서 랜딩지점에 집중 포격을 가해 나무나 수풀 등을 제거하며 주위의 적들을 이미 겁을 주고 산뜻하게 지점을 정리하였다는데 랜딩지점에 도착하니 투입병력들의 안전한 랜딩을 위해 2~300m 거리를 두고 날렵한 건쉽 2대가 마주돌며 랜딩지점 주위를 무차별 사격을 해대고 있었다.
먼저 도착하여 사주경계를 위해 각기 자신들의 위치로 산개하기 위해 뛰어가는 전우들이 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모습이 든든해 보였다. 우리조도 무사히 랜딩하여 내리자 마자 헬기는 기겁을 하듯 떠올라 사라지고 다른 뒷조들의 헬기들이 도착하고 우리의 위치를 찾아 뛰어가며 사주경계를 하는데 아무생각 없었고 눈을 반짝거리며 오로지 적을 찾아 필살의 의지밖에 없고 전장에 온 것을 몸으로 정신으로 전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사주경계를 하며 마주돌며 연신 사격을 해대는 건쉽을 바다보니 로켓을 발사했는지 헬기가 멈칫 제자리에 서더니 포탄이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있었다.
산속 정글에 들어서니 영화 "정글의 왕자"에서 보듯한 풍경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두려움 속에서도 신기스러움이었고 더운 나라에서 물문제가 큰 문제였는데 산에서 흘러내리는 골짜기 계곡물은 우리나라와 같이 맑고 깨끗한 물이 아니라 쌀 뜬물처럼 희뿌연 아주 탁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물을 보면서 머리에 스치는 생각은 작전지에서 물을 함부로 먹지말라던 교육내용이 생각이 났고 베트콩들이 약을 풀어 놓은 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고참 분대원중 누군가가 물을 가리키며 산삼 등 각종 나무 뿌리, 낙엽들이 썪은 물이 씻겨 내려오는 아주 좋은 물이라 일러주어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목이 타도 웅덩이 물이나 정글 속 마을의 물들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물들로 마시는 것은 금물이었다.
작전지역에선 음성이던 발소리던 모든 소리는 금기다 모든게 첨병부터 끝까지 약속된 수화로 지시나 대화를 한다.
가끔 도로경계를 나설때 일부 분대원이 한국군 상급부대원들이 팔아먹은 C레이션을 사먹는 현실이 그들에게 창피스럽게 여겨졌지만 C레이션을 사먹는 분대원들을 나무랄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월남인들에게 우리들이 굼주려서가 아니라 당신들을 도우려는 의도란걸 보여주려 빡빡콩(완두콩과 햄으로 만든 캔), 등 우리들이 목이메어 잘 먹지않는 C레이션들을 그들에게 선물 하곤 했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고맙다며 인사하며 받아서는 바로 진열대에 올려 놓는 것을 보곤 당혹감에 젖기도 했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런 괴리들을 보고 느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희들을 지켜주러 온 우리에게 가끔 손짓 발짓으로 분단된 너희나라나 지키라며 따이한 고홈을 이야기 하는 월남인들을 볼때 예의도 없고 안보의식이 낮은 민족이라 생각했었다.
당시 월남의 대중교통수단 총아였던 람부레타,
뒤에 보이는 가옥들은 외벽만 있을뿐 내부 벽이 없고 침낭이나 나무로 깐 방들을 둘러싼 천들이 칸을 나누고 있다.
다일란지역으로 기억되는데 중대병력이 철도와 찻길이 교차하는 마을 외곽에서 도로경계에 임하고 있을때 C레이션 박스로 지은 허름한 집에서 한 여성이 나와 우리들을 쳐다보며 두리번 거리고 있어 우리들은 긴장을 하며 그 여성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마을 밖 산쪽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혹시 베트콩에게 연락을 취하러 가는것인지도 몰라 숨죽이며 그녀를 주시하는데 그녀는 10여m쯤 가서 1m정도의 싸리가지 같은 나무 뒤로 가서 다시 우리들을 둘러보더니 아랫도리를 겉어올리고 볼일을 보는데 가는 나뭇가지 사이로 보일것이 다보이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수치심도 못느끼는지 그렇게 보여줄거 다 보여주고 일어나 나오는데 우리들은 그녀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돌아서서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못해 서로 진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녀를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제집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지나서 나는 분대원 몇명과 함께 C레이션 박스로 지은 그녀의 집으로 가서 집을 살펴보는데 그들의 가족들은 15평 정도되는 가옥 안은 칸막이가 하나도 없이 횡하고 해먹(달아매는 그물 침대)이 2층으로 몇개 걸려있었고 한쪽에는 2층으로 널판지가 깔려있었다.
문 바로 옆에는 불이 짚혀져 있는 주위에 돌 서너개 위에 솥이 올려있고 널려있는 주방기구들로 보아 표현하자면 열린 주방인 듯 식사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집안은 연기로 가득하고 나이 많아보이는 중년여성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을 다 보여준 여성과 함께 안고 있는 갖난아이 둘을 비롯해 년년 층층으로 아이들 10여명이 바글바글하며 장정 또는 어른 남성이라곤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예측건데 시어머니와 며느리 아님 딸과 어머니가 분명한 듯 한데 두 여성이 같이 아이들을 생산하여 같이 돌보고 있는것으로 추측했다. 월남 가옥들을 들여다 보면 청년들이나 장년들은 보이질 않고 남성이라야 노인들 뿐이었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집안도 민병대 아님 월남군 또는 베트콩으로 활약을 하기에 남성들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젊은 여인은 우리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신의 할 일만 열심히 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고 중년 여인은 반갑다며 좋아하며 맞이하며 찻잔에 차를 끓여 거네 주는데 그 찻잔은 예쁜 도자기 잣잔인데 겉이나 속은 더 이상 금갈 곳이 없어보이도록 금이 나 있었고 금간 틈사이로 새까맣게 때가 끼어있어 찻잔을 받고 비위가 약한 나는 처리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분대원 한 명은 거부감 없이 마시고는 입맛에 맞는 듯 눈짓으로 나도 마실것을 권했으나 거부하기도 미안해서 웃는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혀로 살짝 맛만 보니 홍차맛이었다. 나는 배낭에 있던 C레이션 설탕을 꺼내 타서 중년 여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넘겨주었더니 아이들은 좋아라하며 넙죽 받아 마셔서 위기를 모면하였고 껌 등 과자 몇개와 통조림을 선물로 주면서 그들에게 슬며시 화장실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들은 집안에 화장실이 없으며 집 주위 모두가 화장실이란다.
그들은 화장실은 집안에 냄새가 나지만 자기들은 그런 냄새가 없다고 항변한다. 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우리위치로 와서 그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들의 밥먹는 모습은 거무죽죽한 비릿하고 내겐 역겨운 냄새지만 그들에겐 없어서는 안될 그들의 조미료이며 우리의 젖갈과 같은 전통 음식인 능막에 말은 조그만 사발을 들고 긴 젖가락으로 표정없이 둥둥 떠다니는 풀기없는 월남쌀을 하나씩 세어가며 먹고 또 먹는 듯한 모습이 안스럽기까지했다.
나는 한국군에 대한 월남인들의 생각은 어떠한지가 궁금하였다. 당시 한국이나 월남이나 경제수준이 우리가 조금 앞섰거나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생활상을 접했을땐 C레이션 박스로 집을 지은 50년대 6.25당시 우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수준의 월남사람들의 생활상을 보며 우리보단 조금 떨어진 그들을 느낄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의 식사시간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그들 여성들은 또다시 불을 짚혀 음식장만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곤 어느 분대원이 재들은 하루종일 먹는일만 한다고 흉을 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기억을 더듬어 당시 경계지점을 구글에서 찾아 추정해 보았다.
당시는 사진처럼 큰마을이 아니었고 사진보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차량을 타고 이동하고 지정된 지점에서 임무를 마치면 다시 차량으로 돌아오기때문에
이렇게 멋진 해변이 있었는지 조차 몰랐었다.
당시 다일란 지역이 이렇게 아름다운 해변에 쌓여있는 지역인지 조차 몰랐었다.
당시 도로경계지역은 도로 좌측 산쪽을 경계임무를 맡았으며 이 사진처럼 호화로운 집들도
많은 집들도 없었으며 길가에 수십여채의 집들만 있었던 작은 촌에 불과했었다.
다일란 지역 전경 구글에서...
또 기억에 남는 것이 대정글 소정글 초원지대를 가리지 않고 헤메다가 큰 물이 흐르고 시야가 트인 경치좋은 대정글을 만나 전투 중이란 사실도 깜밖하고 잠시 이런 곳에 살면 좋겠다 하는 마음의 휴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치좋은 곳 초입에는 어김없이 부비츄렙들이 나타나고 움막이 있고 몬타냐족이라던지 베트콩들이 출현하니 물과 아름다움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느낄수 있기도 했다.
작전 중 정글에서 만나면 힘들게 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월남 붉개미떼들이다, TV속의 동물의 왕국에서와 같이 땅에 무리로 집을 짖고사는 아프리카의 붉개미와는 다르게 정글속 1M정도의 작은 초목 큰 잎사귀를 밑으로 돌돌 말아 그 안에 수천마리씩 때를 지어사는 월남 붉개미떼들을 M16에 착검을 하고 또는 정글도로 넝쿨들을 가지치기하며 정글을 헤쳐가며 길을 내어 전진해야 하는 우리 첨병조들에겐 무지막지한 복병이었다.
그 붉개미집을 건드리면 첨병은 물론 3번째로 다니는 나에게까지 온 몸에 달라붙어 물어뜯는 바람에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와 수건등으로 털어내면 온몸이 울긋불긋 물어뜯긴자국이 따겁고 쑤시기까지하는 고생을 당하기 일쑤였으나 그것도 요령이 생겨나 재빨리 알아차리고 붉개미집을 발견할 수 있는 요령까지 습득할 수 있었다.
정글속 나무잎사귀에 붙어사는 거머리도 있는데 우리나라 연못에 사는 거머리보다 굵고 큰 시커먼 거머리도 뚝뚝 떨어져 기겁을 하기도 했다.
월남의 전투 작전은 우리 한국 지형과 달리 정글의 특성상 횡대 작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지역이라 첨병, 부첨병, 첨병 분대장, 무전병, 소대장, 소대장 당번 등의 순서로 중대 전원이 한 걸음 내지 두 걸음의 차이로 일렬 종대로 따라 다니는 뱀꼬리 작전이였다.
말이 한 두 걸음이지 아주 빽빽한 소정글에서는 앞사람에 바짝 붙어가지 않으면 앞사람을 잃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첨병조는 위험 노출이 1순위여서 죽음의 순서 또한 1순위임은 다 아는바이지만 모든 참전자들은 죽음의 길을 피하고 싶은 것 또한 모두 마찬가지였다. 작전 전체의 효율성과 구성원들의 생과 사를 좌우하는 제일 중요한 보직이 첨병조이며 목숨을 내건 중대 길잡이며 총알받이인 것이기에 당시 우리 중대는 첨병 정하는 방법을 1소대 1분대가 첫 날 첫 번째로 시작하여 다음 날은 2분대 식으로 어찌보면 합리적이고 말성의 소지 없는 방법이였던 것 같았고 그렇게 작전에 임했었다.
그러다 2월인가의 나의 첫번째 대규모 작전 참전이었는데 첫날 오후 2~4시경인것 같았다. 정글을 수색하며 전진을 계속하며 따라가다 지도와 지형을 살펴보니 엉뚱한 곳으로 자꾸 가는 것이었다.
잠시 쉬어 가는 시간에 소대장인가 어느 지휘관에게 지도를 들이대며 섹터를 벗어나 옆 중대 섹터에 한참이나 들어와 있는 상황을 설명하며 내가 첨병조장을 자청하여 뒤로 다시 빠져 우리 섹터를 찾아 어느 지역에서 쉬고 있는데 바로 우리가 다녀왔던 지역에서 옆 중대들이 VC에 당한다는 무전을 접하며 마음속으로 나 자신과 우리 중대의 안전함에 감사하며 그 작전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으며 그 후 4중대는 내가 뛰는 작전은 도맡아 첨병분대장을 맡는 계기가 되었었다.
나는 산에 오르면 등고선이 보이고 지도를 보면 3차원 입체영상으로 지형이 투시되는 요즘 말로 걸어다니는 타고 난 네비게이션이었다. 절대음감같은 절대지형감각을 타고난듯 하다. 지도와 나침판만 있으면 우리산이건 정글이건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어느 순위에 있어도 죽을사람은 죽을 것이고 살사람은 살 것이란 죽기를 작정한 나의 생각 때문이었지 영웅심이나 또는 진급이나 영웅심이 아닌 순수한 마음에서 첨병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무도 별로 없는 우리 한국의 지형과는 너무 다른 하늘도 안 보이고 지형지물을 살필 수 없이 빽빽한 정글속에서 미숙한 독도법으론 어림도 없는 월남 정글속에서 엉뚱한 곳을 헤메는 첨병조가 불안하고 두렵기도 했고 내가 아는 일은 내 자신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이기도했다.
사진은 세계전사에 모습을 드러낸 한국군 고유의 중대전술기지로서
한국군전투력을 확보한 신개념의 중대기지이다. 해병에선 방석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쉽게도 4중대전술기지가 촬영된 사진이 없으나 개념이 같아 이 사진으로도 추억을 살리기에 충분하다.
나의 그러한 돌출 행동으로 하여금 우리 분대원들의 훈장타려 저런다는 볼멘 소리도 들었지만 분대장을 다른 분대원들에게 맡기는 것이 자존심들이 상했던지 나와 같이 첨병으로 동참하겠다고 분대원들도 나서 준 것이 얼마나 고맙고 자랑스러웠던지...
나의 고등학교 후배 동생의 친구라던 화랑 무공훈장의 월남 고참 정종수를 비롯하여 고영덕, 강유원, 무전병 등등.....
아마도 중대장(김장근 대위)은 이러한 나에 대한 고마운 속마음을 남들이 눈치 챘을 수도, 어쩌면 누군가에게 표출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일들로 인해 행정병들과 더불어 일부 하사관들에게 눈에 더 나는 행동이 되었던 것 같다.
월남의 대대급 또는 연대급 사단급 등 큰작전마다 첨병을 담당을 하였던 나는 우리중대 작전섹터(sector)를 검토하며 중대장의 지시를 받고 직선상의 도상 진로대로 다음 보급지점까지 전진하는데 한번은 첨병이 오라는 손짖을하기에 가보니 가시대나무 덩쿨위에서 출렁거리며 나갈길이 없다기에 지도를 펴보니 그곳은 낭떨어지였다.
하늘을 향해 곧게 벋은 우리나라 대나무와 달리 처음보는 덩쿨인데 이 풀은 대나무같이 속이 비고 겉은 딱딱한 대나무였다. 마디마다 억센 가시가 나있고 약지보다 가늘고 서로 꽤고 엉키여 있는 대나무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 대나무 덩쿨 때문에 추락하는 위기를 모면했으나 첨병들과 나는 덩쿨 사이로 보이는 까마득한 공중에서 대나무덩쿨에 발을 구르고 장난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회하여 다시 진로를 찾았으나 그렇게 첨병들은 베트콩의 총탄과 부비츄렙만이 무서운것이 아니었다. 부비츄렙은 마을 입구나 움막주변 또는 그들의 진입로에 설치를 하여 되도록이면 정글에서 발견되는 길은 피해야 하며 부득이 그 길을 택하게 될때는 베트콩의 저격병과 부비츄렙에 모든 신경을 써야했다.
우리중대는 아니었으나 어느 병사가 자신의 경험담을 소재로 정글에서 홀로 살아 돌아오는 방법을 듣게 되었는데 그 전우는 작전 중 아마도 소정글에서 휴식 중 잠시 졸았던지 깨어보니 주위에 전우들이 보이지를 않고 지도나 나침판 등 아무런 자료도 없이 낙오가 되었단다.
우리 한국군은 1번 도로를 끼고 배치되어 있다는 점과 도로가 해안가 가까이 있고 동쪽이라는 것을 생각해낸 그는 부대로 복귀하려 베트콩을 피해 홀로 갖은 고생을 하며 해를 쳐다 보며 방향을 정하고 무작정 산봉우리만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며 바다의 수펑선을 찾아 두리번 거리며 3일만에 기적같이 한국군 부대를 발견하고 부대로 복귀하게 되었단다.
그 후 그 전우는 작전은 뛰지 않고 각 부대를 돌며 안전교육을 하는 직책을 맡아 월남생활을 한 아주 뛰어난 전우도 있었다. 그 경험담을 우리중대까지 와서 전해주었을때 그 병사의 영리함에 감동했고 작전에서도 내겐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또 어는 병사는 진군중 잠시 휴식중 소변을 보러 정글숲을 향해 일을 보는데 정글속에서 부스럭 소리와 함께 삿갓쓴 베트콩이 정면에서 불쑥 나타나 기겁을 하며 M16을 움켜쥐며 안정장치를 풀면서 싱끗 웃었더니 베트콩도 따라웃더란다. 그는 침착하게 그를 마주보며 연발로 옮김과 동시에 그를 향해 사격하여 베트콩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소정글에선 한 발짝 앞에가는 전우를 놓치는 실수가 수없이 일어나기때문에 그런 장소에선 다음전우에게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뒷전우를 확인하며 앞으로 진군한다.
부비추렙들 중 사각 구덩이를 길이 약 50cm 깊이 55~70cm 정도 파서 뾰족한 대나무끝에 독을 묻혀 날카롭게 세밀하게 세워놓고 가는 풀, 대나무 등으로 얼기설기 엮고 흙으로 풀로 위장을 해 놓아 그위를 밣으면 대나무에 찔려 독이 온몸으로 퍼지게 만들어 놓았으나 그것들 대부분이 노련한 첨병들이라면 감지할수 있을 정도로 길보다 높다던가 길가운데 마른 풀이 덮혀있다던가 하는 티가 나기때문에 첨병들은 그 덮게를 치우고 까맣게 독이 묻은 뾰족한 대나무를 다들 볼수 있게 개방을 하여 다음전우에게 수화로 인지를 시키면서 앞으로 전진을 한다.
또한 길과 길사이에 인계줄을 양쪽 나무에 걸쳐 그 인계줄을 건드리면 터지는 수류탄이나 폭팔물을 설치한것도 전에는 건드린 사람이나 그 주위사람들이 살상을 당하였으나 우리때는 한국군의 전술을 익힌 그들이기에 건드린 사람보다는 5~6미터 후방 첨병분대장 부터 소대장 즉 지휘관이나 무전병 등 주요 인물들이 살상하게 설치를 하였으나 그것도 자신들도 다치지 않게 하기위해 나무가지가 부러져 있다던가 천조각이 붙어있다던가 하는 표지가 있어 충분히 발견할수 있어 피해를 막을수 있었고 대부분 대정글 즉 경치좋은 곳에 들어갈땐 꼭 감이 잡히는 그들의 주거하는 곳에는 꼭 설치가 되어있었다.
또한 정글에서 한국군이나 미군등이 사용한 C레이션 빈깡통을 발견하면 그것도 피해 우회하여야 한다. 한국사람들은 깡통을보면 걷어차는 습관을 인지한 베트콩들의 부비츄렙 설치구상이기 때문이라했다. 그러나 나는 깡통 부비츄렙은 보지를 못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월남작전에 대해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었으나 최근 참전전우들의 이야기나 수기를 볼때 나와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첨병과 뒤를 따르던 사람들과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참 잊었던 기억은 그들은 고량주라는 아주 독한 술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처럼 야간에 고성방가하는 사람, 술취해 헤메는 사람들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의아했고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보이지 않아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또 한 기억에 남는 것은 작전이 끝나고 집결제에 가까운 안전한 지점까지 다달했을 즈음 맑고 제법 넓은 개울이 나타나 잠시 쉬고있는데 어는 중사인가하는 전우가 수류탄으로 고기를 잡자는 제안을 하였고 그렁저렁 중대장 묵인하에 수류탄을 물속으로 투척을 했는데 물속이라선지 생각보다 터지는 소리가 약했으며 물이 약 5~6m는 솟구치는 것이었다. 물고기 몇마리 떧는데 한두발을 더 던지니 물고기가 하얗게 떠올랐었는데 그것을 건져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한번은 중대기지 근방 1번도로상에서 도로정찰을 나갔다가 한 300여m 쯤 높은 나무가지에 백로 2마리가 앉아있었는데 한 분대원이 맟춰보라는 충동질에 앉아쏴 자세로 M16을 조준하여 한발을 쏘았는데 두마리가 다 날아가더니 한 마리가 갑자기 땅으로 추락을 하는데 분대원들은 맟췄다며 박수를 쳐대며 그 황새를 두명이 가서 찿아와 보니 머리 뒤통수에 맞아 주둥이만 너덜거리고 있었다. 중대내에서도 사격솜씨가 좋기로 소문나 사격선수로 선발되어 사격연습을 하던 내게 분대원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나를 치켜세워주고 나중에 그들은 그 황새고기를 먹었다는 기억도 난다.
고국에선 분대장은 명중률도 좋지않은 무거운 M1소총이 지급되어 질질 끌고 다니다싶이 했는데 M16은 가볍고 명중률도 좋아 분대원들 앞에서 체면한번 세웠었다.
당시 1971년 1월부터 12월 귀국할때까지 우리 4중대 지역 반닌에는 베트콩들의 활동이 없다시피 조용하게 지냈고 혼바산, 호네오산, 쑤이까이계곡, 망망계곡, 등 작전을 다니면서도 우리 중대는 큰 접전이 없어 인명피해도 전혀 없었다. 인명피해라면 본인이 바위에 낀 이끼를 발견 못해 무거운 장비를 지닌체 미끌어져 내려 꼬리뼈를 다친 것이 피해라면 피해라 할 정도니까...
중대기지 앞 1번도로 건너 동남쪽 3Km 쯤 큰산들 앞 빤히 보이는 자그마한 능선(우리 분대에선 고구마 능선이라 부름) 자락에서 3소대장 손00중위의 미숙하고 경솔한 매복작전함으로 인해 배트콩이 후방으로 침투한 것을 잡지도 못하고 월남 신참인 3소대원 1명이 불미스럽게도 전사하는 아픔을 당해야 했다.
반닌지역 4중대 전술기지 위치와 고구마 능선.
해변가의 양어장은 이 사진처럼 대량으로 생성되어 있지 않았다.
해변가에 조금 형성되어 있었다.
그 날의 매복작전은 정확하다는 정보에 의해 3소대 1개 소대조(약 24명?)와 2소대 1개분대조(9명)로 나뉘어 3소대는 마을에서 연결 된 고구마능선 좌측 하단부를 경계해야 했고 나의 분대는 고구마능선이 끝나고 큰 산으로 이어지는 낮은 산과 큰 산이 이어지는 계곡 정글 속 아주 기분 나쁜 지역이었다.
매복 출동시 중대장(김장근 대위)께서 금일 베트콩들이 마을에서 식량을 마련하여 산속으로 이동한다는 믿을만한 고급정보이니 각별히 주의하라며 훈시하는 모습이 여느때와는 달리 얼굴이 굳어있었고 근심어린 눈빛이 완연하였으며 모든 중대원들도 그날따라 긴장감이 감돌아있었다.
위험성으로 보면 우리 분대는 양 옆이 산으로 에워쌓인 계곡이라 더 위험성이 많아 분대원들의 심기가 좋지 않았는데 매복지점을 향하는 행렬에서 손중위는 우리에게 다가와 다른 곳으로 세지말라며 장교답지 않게 체신머리 없이 히히덕 거리며 약을 올리기도 해 면상을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매복지점을 향하였다.
솔직히 분대 병력이 위험지역으로 매복지점이 정해지면 다른 분대나 소대 대부분 그 곳까지 가지 않고 안전한 곳에서 1박하고 귀대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우리 분대도 정해진 매복지로 가지 않고 중대 부근에서 매복을 하고 새벽에 철수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탕~" 하는 총성이 울려 모두 업드려 사방을 주시하는데 바닷가 쪽으로 한 200여m 쯤에 밤에는 발견치 못한 조그만한 허름한 건물이 한채 보이고 그 안에서 군복차림의 병사들 두세명이 나타나 우리쪽을 향해 총을 들고 뭐라 하는데 들리지는 않지만 적이 아닌것은 확실해 보였다.
우리소총수들은 분대장의 사격명령이 없으면 먼저 사격하는 법이 없다. 그러던 중 분대원 중 덩치가 제일 컷던 무전병이 "저 시발넘들 핫바지(월남 민병대를 일컬음)들이다." 하면서 일어나 흥분하기 시작했다.
"저새끼들이 우리들을 향해 총을 쏘면 어쩌자는거야?"하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누구 맞은 사람있어?"했더니
"우리 위로 총알이 지나갔잖아요"
이 바람에 나도 흥분을 했고 우리들 모두는 흥분을 하여 그들을 불렀더니 처음엔 3~4명 밖에 안보이더니 어느새 7~8명이 되어 우리에게로 다가오며 반갑다는 것인지 미안하다는 것인지 웃으며 손발짓을 하며 다가오는 한명을 그 큰 덩치의 무전병이 우리나라 중학생 수준의 작은 몸매의 핫바지 멱살을 잡고 훅으로 배를 강타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이건 아니다 싶어서 분대원들을 말리고 내가 나섰다.
나도 손발짓을 하며 짧은 영어와 월남어 한국어를 섞어가며 그들의 팀장을 찾았다.
"헤이 유아얼 캡틴? 켑틴 캄온."
하니 내 앞에 서있던 나보다 크고 월남인으론 키가 큰녀석이 제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기에 내 딴엔 그들의 기를 꺾고 분대원들의 사기도 올려줄겸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렸으나 그가 피하는 바람에 빗나갔지만 그의 앞니가 내 주먹에 상처를 냇고 그는 3미터쯤 나가 떨어졌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상처가 남아있다.
싸움도 좀 해 봤지만 여자는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이 강해 여자와 싸워 본적도 여자를 때려 본적 없지만 우리나라 어린 여자아이도 저렇게 나가떨어지지 않을듯 싶은데 스친 주먹에 3미터쯤 나가 떨아지는 꼴을 보니 오음리 교육장에서...
"여기서 제일 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도 월남사람들 5명은 무난히 처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입증된 셈이 되었다.
우리는 계속 중대와 교신중에 있었는데 그들을 중대로 대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더니 3~40명이 넘어보이게 모여들었고 그들중 권총을 찬 장교인듯한 사람이 내 앞으로 오길래...
"헤이 유! 비엣남 아미 넘버 텐! 따이한 깨골락 방슝방슝! 유 마이 베이스 고."
ㅎㅎㅎㅎ번역이 되는가 모르겠으나 내 뜻을 옮기자면...
'야! 베트군 너희들이 우리 한국군을 죽이려고 총을 쏘았어? 우리 기지로 가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을 인정받아 놓을 요량으로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 잡아당기니 파리 앞다리 비비듯 손에 불이날듯 어찌나 빨리 비벼대는지(내가 만난 월남인들의 사과방법은 동일하였다.) 미안하다는 표현과 시계를 가리키며 부대로 들어가야한다는 듯을 전하는것 같았다. 그들은 인원이 더 불어 1개 중대병력정도가 되여있었다.
사진은 도로경계중 사진병이 한컽!
저놈의 철모, 수류탄과 탄창, 방탄복은 왜 그리 무거운지...
더움에 지쳐도 상의 소매도 해충이나 햇볕때문에 걷어올리지도 못한다.
숫자에 밀리기도 하고 그렇게 그냥 머물어 다툼만 하기도 그렇고 해서 중대에 보고하고 그들과 헤여져 중대로 향하며 1번 도로상으로 나왔는데 상항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1번도로상을 분대행렬로 걸어가는데 2~300명으로 불어 난 그들이 9명의 우리와 100미터쯤 거리를 두고 그들은 논뚝길로 같은 방향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부대로 돌아가갰다던 그들이 부대로 향하지 않고 병력을 대거 불러 우리와 대치상태로 이동하는 모양세가 우리에게 이롭게 펼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분대원들과 고민고민 하다 중대에 보고하고 물차지원을 요청하여 물차를 타고 귀대하여 보고를 마치니 중대 박격포나 포대에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포 조준까지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피식 웃고 말았는데...
점심때쯤 되어서인가 매복 후 취침을 하고 있는 나를 중대장 호출이라며 깨우기에 달려갔더니 나와 무전병에게 맞은 두사람을 앞장세우고 월남군 중령과 한국군 대위?(반닌 지역 민사담당관?)가 앉아 월남군 중령이 나에게 당신들이 월남을 도우려 왔지 우리들을 때리려 왔냐며 내게 화를 내며 따지는 것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먼저 총을 쏘았고 우리가 잘못 판단해서 맞받아 총격전이 벌어졌으면 어찌할뻔 했냐며 나는 내 분대원들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취를 취했을 뿐인데 무었이 잘못 되었는가라며 더 큰소리로 맞받아쳤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국군 장교가 나서더니 한 사람은 갈비뼈가 3대나 뿌러졌고 한 사람은 앞니가 3개나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네가 잘잘못을 떠나서 사과를 하던지 아니면 사단장까지 보고를 하겠다는게 그들의 요구이며 주장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도 해안가에 포대가 있는데 그들도 우리위치를 조준하고 있었단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잘못한것도 없었지만 그들에게 폭행한 것 또한 그리 잘한 일이라 생각되지 않았고 사단까지 갈 경우 여러사람들이 당할 문책을 생각하니 내가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마음먹고 정중히 사과를 했다.
그런데 나의 사과로 끝날줄 알았던 일이 무전병의 사과까지 받아야겠다며 무전병까지 부르게 되었다.
중대장실로 들어 온 무전병은 나의 설명을 듣고 펄펄 뛰는 것이다. 상욕을 막 해대며 우리나 저희들이 서로 싸우다 죽지 않길 다행인데 어디다가 사과를 하냐며 사과를 받을 사람들은 우리들이라며 내게도 막 들이대며 자기는 사과를 못하겠고 오히려 사과를 받아야 겠다는 것이다.
듣고 있던 월남 장교가 화가 치민듯 뻘떡 일어나 피해자들을 데리고 나가려 하자 중대장과 한국군 통역장교가 가로 막고 설득하여 앉혀 놓고 우리 무전병을 크게 나무라는 것이다.
옆에있던 나도 무전병에게 일이 사단까지 올라갈 경우 우리에게도 불이익이 올 수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며 그를 달래여 그도 사과를 함으로서 그 사건은 끝이 났는데 중대장실을 나서는 나를 중대 위생병이 "아니 얼마나 때렸기에 이빨이 몽땅 흔들려요? 내가 세계가 나갔다고 했지만 뽑으면 다 빠질 지경이었어요."하는 것이다.
위생병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그렇게 마무리가 된것이 다행이다 싶었고 그 친구들에겐 대단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 사건 초기에 분대원 중 누군가가 섣부른 판단으로 같이 맏받아 사격을 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면 생각하기 조차 싫은 기억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정해진 매복지점까지 안들어가서 생겼다기 보다 가매복 지점에서도 언제고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일을 밝히는 것은 이렇게 위험지역을 벗어나려해도 특히 월남이라는 특이한 전쟁터에선 어떤 곳이 안전하다 장담을 하지 못한다는 뜻도 있어서다.
또 한 번의 지정 정찰지 이탈은, 흔히 있었던 일인것 같았으나 나로서는 처음으로 이탈하는 일이므로 상당한 부담과 모험심이 교차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중대 주변 1번 도로변을 중심으로 한 정찰이였는데 정찰 중 누군가가 해변으로 가보자는 유혹의 제의를 해온것이다.
융통성 없이 규칙대로 움직였던 나를 시험해 보려는 분대원들의 노림수도 깔려있었지만 나도 해변을 가 보았으면 하던 차에 의논끝에 해변으로 가기로 하였다.
중대에서 해변까지 직선 거리는 약 2km 정도 쯤 되는 것으로 기억이되는데 논밭과 잔 수풀(초원지대)들을 지나 해변으로 나가니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서 그리 위험성은 높아 보이지 않았으나 만일에 대비하여 4명은 경계 4명은 물속에서 즐기고있었다.
물속으로 들어가니 그 시원함이란 이루 형용할수 없을지경이었다. 더우기 아무리 나가도 연초록의 맑은 물과 무릅 위 까지 밖에 안차는 해변은 그곳 말고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듯 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흠은 주먹만한 해파리들이 부지기수이다. 그것만 없앨 수 있다면 세계적인 해수욕장이 되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불러서 가보니 얕은 뚝을 쌓은 해변가 주변은 온통 양어장이 바둑판처럼 널려 있었고 주위에 사람 하나 보이지도 않는 폐양어장같이 느껴졌다. 양어장 하나의 크기는 30~40미터쯤 되는 사각형이었고 그 맑은 물 양어장엔 물반 고기반이었다. 고기들은 팔뚝만한게 고등어 같기도 하고 하여간 무언지는 모르지만 등푸른 생선이었다.
성질급한 분대원 둘이 들어가 손으로 고기를 잡으려는데 떠 올렸다가 빠지고 또 빠지고 잡지를 못하는 것을 보고 나도 들어가 보니 물은 무릅밖에 차지 않았다. 꽤를 내여 분대원과 웃통을 벗어 양쪽에서 잡고 건져보지만 모조리 튀어나간다.
고기들은 떼를지어 한쪽으로 몰렸다 또 한쪽으로 도망가고 그것도 실패로 끝나고 나뭇가지를 잘라 오라해서 나뭇가지를 들고 고기때를 향하여 돌격앞으로다.
고기들은 내 다리를 치며 반대편으로 감과 동시에 양손으로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후려치니 나도 물속으로 머리를 쳐박히며 몇 마리가 떳다. 성공을 한 것이다. 분대원들의 환호성이 들리고 물에 뜬 고기를 집어들고 기뻐하던 보습들이 선하다.
그렇게 해서 10여 마리를 잡아 그 자리에서 구워먹으니 맛이 꿀맛이였다. 반닌 해변에서 나뭇가지로 물고기를 때려 잡은 사람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우리 분대원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해변에선 모래구덩이가 많았는데 누군가가 "도마뱀이다."라고 소릴질러 쳐다보니 연대 사단보충대 막사에서 보던 손가락만한 도마뱀이 아니고 내 팔보다 더 큰 누런색 도마뱀이 고개를 바짝 쳐들고 우리들을 감사하다 구덩이로 도망가는데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그 해변엔 그런 도마뱀의 서식처인지 무지 많았는데 월남사람들은 그 도마뱀을 구덩이 앞에다 불을 짚혀 연기에 질식해 밖으로 나오는 도마뱀을 잡아먹는다 들었으나 우리들은 도마뱀까지 먹을 식성들이 못되어 구경만하였다.
이렇게 나는 두번 정위치를 벋어난 적이 있었고 그 해변 구경으로 위안삼으며 반닌 읍내 구경은 커녕 후양지도 한번 가보지 못하고 귀국한 사람중에 한사람이다. 3소대 손중위는 그런 이야기들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런 짓거리는 꿈도 꾸지말라는 충고였겠지만 분대원들 다 들리도록 약을 올리는 행위는 채신머리 없이보였다.
하여간 손중위의 채신업고 기분 나쁜 행위로 우리 분대원들은 잔뜩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아가며 음침하고 께름직한 매복지점에서 3개조로 나누어 정글속에 숨어 길을 목표로 삼아 조명지뢰 크레모아들을 설치하는 화망을 구성하여 一字 매복으로 들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