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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7일 오후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 여기 예수 성심 대성당에서 있었던 미사 중의 특별한 성체 현상에 대해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예상하고 있었더라면, 저는 성합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며, 율리아씨의 입으로부터 살과 피로 변한 성체를 꺼내어서 실험실에 보내어 분석을 하게끔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체 안의 예수님의 현존에 대한 저의 신앙이 과학적인 증명에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과학과 논리에 의지하는 이지적인 신앙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한 신앙입니다. 이렇게 논리를 따지는 일부 신자들과 심지어는 일부 사제들까지도 성체 안의 예수님의 현존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오주(吾主)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율법 학자들과, 성서 학자들, 대사제들을 불러서 예수님을 평가해보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평가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또 예수님께서 대마귀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 낸다고 비난했습니다. 끝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저는 발현이라든가 기적 등에 대하여, 환상이라든가, 기만, 불건전한 요소 등에 의한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교회가 대단히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또 철저한 조사를 거치지 않고서는 인정을 하지 않는데 대해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반면, 공회 석상에서의 다음과 같은 가믈리엘의 충고를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들의 계획이나 행동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지도 모릅니다."(사도행전 5:38- 39)
9월 17일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매스콤에서는 전혀 보도가 없었습니다. 그 날 미사에 참석했던 이들만이 알고 있습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의 현존을 믿는 이들은 과학적인 증명이 필요없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무리 과학적인 증명이 있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단순하고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던 많은 이들이 그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성부와 동등하심을 말씀하시면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이를 살리시고, 빵 몇 조각과 물고기 몇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등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목격했던 일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래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특별한 성체 현상에 대해서 제가 홍보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순진한 사람들은 어린애와 같은 믿음으로 믿고 있으며,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교황청에서는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별한 성체 현상들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광주 교구의 주교님께서 조사하시도록 의지하고 계십니다. 광주 교구에서는 이미 위원회를 통하여 조사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6년 9월 17일 이 곳 시부에서 일어났던 일은 광주 대교구 관할이 아니고 시부 교구의 관할입니다. 본 주교는 성체 안의 예수님의 현존을 항상 믿어왔습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기 위해서 과학적인 증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또 여기 교구의 신자들에게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라고 자주 권고하고 있습니다.
저의 겸허한 의견과 판단으로는 이 곳에서 있었던 특별한 성체 현상이 "성체 기적"이었다고 간주합니다.
주 예수님의 성명(聖明) 이 영원토록 찬미받으시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1996년 11월 8일
시부 교구의 수도미니꼬 주교 드림
P.O.BOX 495
96007 Sibu, Sarawak, Malaysia
T.NO.084-317373
1994년 10월 21일 목요일, 나는 교황 대사관에 갈 일이 있었다.
교황 대사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나는 11월 24일에 나주에 가기로 정했다는 말씀을 드렸다. 교황 대사님은 나주의 성모님을 찾아뵐 의향을 벌써부터 가지고 계셨으므로 그날 함께 가기로 결정되었다. 내가 나주 순례 날짜를 1994년 11월 24일로 정했을 때 나는 기름이 그 날까지 흐르는 경우에는 향기 나는 기름이 흐르기 시작한지 2주년이 되는 날을 위해 성모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 뵙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 머리에는 같은 생각이 여러 번 떠올랐다. "성모님이 11월 24일에 다른 표를 주시려는가?"하는 것이었다.
1994년 11월 24일 목요일이 되었다. 교황 대사님과 교황 대사비서와 나 자신이 성모상을 모셔둔 경당 출입문 가까이 갔을 때 우리는 주위의 공기에 매우 기분 좋은 향기가 스며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성모상 앞에 기도를 드리러 갔다.
차차 한국인 사제와 평신도인 순례자들과 율리아와 그의 남편이 우리와 합류했다.
첫 번째로 온 사제는 춘천교구의 강릉 옥천동(남한의 동북쪽 국경 근처 바닷가에 있는) 본당신부인 오상철-토마스 아퀴나스-신부였다. 오 신부는 그의 사제서품(1971년 11월 24일에 행해진) 23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심한 여교우 발비나의 권고에 따라 나주에 오기로 결정했었다. 그래서 그는 동북쪽 끝에서 서남쪽 끝까지 한국 전 국토를 건너질렀다. 오 신부는 그 날 있은 두가지 기적을 목격한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다. 얼마동안 기도를 드린 다음 율리아가 교황 대사님께 성모님 머리에 작은 왕관을 씌워 드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대사님과 저와 율리아는 함께 왕관을 씌워 드린 다음 각기 제자리에서 조용히 기도했다.
나는 경당 안쪽에 있었고, 내 왼쪽에 율리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윽고 율리아가 "주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소서!"(요한4장, 1-15절) 라는 말이 한국말로 쓰여 있는 성모상을 모신 벽감(壁龕) 위에 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신부님, 저 위에서 빛이 내려 오고 있어요."하고 가만히 말했다.
나는 바라보았다. 그러나 물론 율리아에게 보이는 것이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에 율리아는 빛이 나오는 곳을 다시 가리키면서 "신부님, 제가 성모님 가까이 가보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리고 율리아는 "성모상의 성모님이 '교황 대리자와 영적 지도자에게 너의 손이 깨끗해지도록 강복을 받아라' 하십니다."하여 교황 대사님과 나는 율리아에게 강복을 해주고 손에 향유로 강복을 해 주었다. 그뒤 율리아는 일어나서 천천히 성모님 앞으로 가더니 몸을 깊이 숙여 절을 하고 한국식으로 꿇어 앉았다. 그는 한동안 위를 쳐다보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율리아가 팔을 뻗쳐 십자가를 향해 손바닥을 폈다. 한동안 그렇게 하고 있더니 별안간 왼쪽으로 쓰러져서 팔꿈치로 몸을 의지하고 손을 펴고 손가락은 위를 향해 세워져 있었다. 오른손은 왼손바닥에 있는 "무엇인가"을 붙잡고 보호하려는 듯이 왼손바닥에 가 닿았다.
그 때에 큰 성체 반쪽이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사이에 살짝 끼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성체는 중지와 약지에 기대 있었지만 약간 떨어진 가운데 손가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딸이신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그리고 대천사 성 미카엘을 시켜 베풀어 주시는 특별한 성체의 은혜를 "받는 것"을 경건하게 깊은 감동으로 목격했었다.
율리아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주목한 세부사항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가 율리아를 에워쌌을 때 율리아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성체의 반쪽 하나가 갑자기 그리고 빠르게 저절로 바로 섰다는 사실이다. 여러 사람이 크게 놀란 외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런 다음 다시 잠잠해졌다.
율리아는 그렇게 힘든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완전히 기진 맥진 했었다. 그러나 착한 남편 율리오와 박루비노의 도움을 받아 차차 몸을 일으켜서 성체 반쪽씩을 교황 대사님과 나 자신에게 줄 수 있었다.
나는 그분께 그분의 반쪽 성체에 있는 그림을 보여 달라고 청했다. 성체에는 십자가와 A,W 등의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수녀들이 마련하는 성체에 찍는 수많은 그림 중의 하나이다. 교황대사님과 나는 성체를 그곳에 있던 순례객 모두에게 영해 주었고, 남은 성체는 내가 지니고 있던 작은 성합에 넣었다.
그런 다음 율리아는 성모님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율리아는 힘들게 말했다. 율리아는 성모님께서 교황 대사에게 당신 곁에 감실 하나를 마련하기를 원한다는 소원을 표명하셨고, 지금까지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소홀히 한 당신의 소원이 실현되도록 도와달라고 "교회의 대리자"에게 부탁하시더라는 말을 했다.
그런다음 율리아는 그의 다락방으로 물러가서 성모님의 메시지를 쓰도록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지방에 이르러서 성모님 집을 떠나려는 순간에 "교황의 대리자와 네 영적 지도자의 손을 잡고 빨리 내 앞으로 다시 오너라"하고 부르시는 성모님의 목소리를 듣고 율리아는 즉시 순종해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눈물의 성모상 앞으로 모시고 갔다. 율리아가 무릎을 꿇으니 교황 대사님과 나도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성모님은 친절하고 상냥하고 다정스러운 말투로 다시 말씀하셨다. 그동안 율리아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았다.
율리아가 이 메시지를 받는 동안 교황 대사님과 비서와 율리오와 박루비노와 나는 거기 율리아 곁에 꿇어서 아주 조용히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나는 율리아가 아직 성모님의 다른 말씀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율리아는 눈을 감고 경건하게 우리의 손을 잡고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강렬하고 지치게 하는 정신집중의 표가 역력히 나타났다. 그러더니 눈을 뜨고 첫 번 기적 때처럼 위를 쳐다 보았다.
율리아가 메시지를 다 받고 "아멘."하는 순간에 작은 성체가 빛에 싸여 내려오는데 "어서 받아 모셔라."하시는 성모님의 말씀을 듣고 한 손은 교황 대사님의 손을, 한 손은 내손을 잡았기에 땅에 떨어질세라 율리아는 얼른 입으로 받아 모셨다 한다.
거기 있던 사람들 중에 아무도 이 작은 성체가 내려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큰 성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아는 눈을 뜨고 그의 혀에 와서 놓인 성체를 내게 보여 주었다. 성체는 평평하게 옆으로 놓여 있지 않고 거의 수직으로 놓여 있었다. 율리아에게 성체를 입에서 꺼내야 한다는 것을 알아듣게 했다. 나는 교황 대사님을 쳐다보고 눈짓으로 성체를 꺼내시라고 권했다. 교황 대사님은 성체를 꺼내서 한 동안 손가락으로 붙들고 계시다가 작은 성합 속에 넣으셨다.
오후 1시 반경에 교황 대사님과 비서와 나는 주님과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특별한 표로 인한 감격에 잠긴 마음으로 우리는 성모님 집에 달려 있는 작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율리아가 방금 받은 메시지들의 초를 잡은 것을 가지고 이내 우리 있는 데로 왔다. 율리아는 성모님의 중요한 말씀을 우리에게 간단하게 알렸다. 성모님은 경당에 있는 당신의 성상 곁에 감실을 마련하고 거기서 미사를 드리기를 부탁하신다는 것이었고... 성모님은 이러한 사실들을 목자로서 조사하고 판단해야 할 책임있는 지도자들이 체면과 이목때문에 당신의 호소를 소홀히 하는 것을 보시고 큰 슬픔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율리아는 그의 다락방에서 메시지들을 쓰고 있는데, 사탄이 서랍장 위에 놓여 있던 꽃병을 머리에 던졌다는 말도 우리에게 했다. 꽃병에 있는 물이 율리아가 쓰고 있는 글 위에 쏟아졌다고 했으며 율리아는 물로 광택을 잃은 그 종잇장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사탄은 단단한 두가지 물건도 율리아의 머리에 던졌는데, 그중 하나는 금속으로 만든 촛대였다. 율리아는 웃으면서 사탄이 때려서 아직 아픈 머리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사탄은 이렇게 율리아를 악착같이 못살게 구는 것이다.
여기에다 그리스도인이 된지 몇 해 밖에 되지 않았을 때 뜻하지 않게 희생하는 영혼으로 선택된 이 작은 영혼에게 인자와 아버지다운 감정과 격려와 빛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의 냉혹과 거부가 덧붙여 진다...
주의 : 율리아가 받은 "작은 성체"와 "1994년 11월 24일의 둘째 메시지"와 관련해서 교황대사님은 1995년 2월 25일 파신부가 찾아 뵈었을 때 그에게 다음과 같은 세부사항을 지적하였다. "율리아는 오른손으로 신부님의 왼손을 잡고 있었고, 왼손으로는 내 오른손을 잡고 있었지요. 율리아의 얼굴은 십자가 쪽으로 돌려져서 움직이지 않고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어느 순간엔가 율리아는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내 손과 신부님의 손을 잡아 당겼지요. 조금 후에 율리아는 입을 반쯤 벌렸고, 또 조금 후에는 입을 크게 벌렸지요. 우리는 작은 성체가 혀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지요." 조금후에 율리아는 교황 대사님과 파신부와 거기 있던 몇몇 사람에게 그의 혀에 놓여 있던 성체를 보였는데, 그 두께가 이제는 여러 밀리미터로 부풀었고, 게다가 빵의 물질적인 외양은 잃고 "살"으로 변해있었다.
1994년 12월 6일
한국, 안양, 파레몬도 신부
T.(0343)83-0804
저는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저의 사제직을 강복해 주시고 또 특히 한국 나주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율리아 자매님이 말레이지아 사라와크의 시부교구 소속의 두 도시(사리케이와 빈탄호트) 를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전달을 위해 방문하셨을때 자매님의 방문사실을 말레이지아는 회교도국이기에 홍보하지 못하였는데도 율리아 자매님께서 메시지 전달하는 곳에 3,000여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동안 교회의 품을 떠나있던 아주 많은 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평상시에는 노인들이 주축이었으나 그날은 젊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특기할만한 것은 젊은 남자들이 많이 참석한 점이었습니다. 집회 참석자중에는 10년이상 심지어는 40년 동안이나 고해성사를 보지않던 상당수의 냉담자들도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이 시부를 다녀가신 후로 고해성사를 더욱 열심히 보고 미사성제에 진지하게 참례하기 시작하여 더욱 열심해졌습니다.
주일미사뿐이 아니라 평일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의 수도 많아졌습니다. 자매님을 통한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 전달로써 평신도들 사이에 이처럼 많은 회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997년 6월 7일
예수성심대성당 지바오로 신부
시부, 사라와크, 말레이시아
지난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축일에 80이 넘은 사제인 나와 일행 25명은 관광버스로 오후 늦게 나주 성모님의 집에 도착했다. 성모님의 집에는 부산, 대구, 인천, 서울 등 먼곳에서 온 교우들로 인하여 발들여 놓을 틈도 없이 대만원이었다.
싱가폴, 필리핀, 미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약 20여명이 참례하였는데 그들의 열성에 놀랐다. 싱가폴에서 온 10세 가량의 한 어린이는 다리 장애자인데 성모님의 특은으로 성한 다리가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철야기도가 시작되어 1차기도가 끝난 후 나는 밖에 나와 있다가 한참 후 다시 들어갔는데 벌써 성모님 한테서 기적적으로 은혜받은 산체험을 발표하는 중이었다.
그날밤 발표자들은 10여명 정도였는데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박수갈채가 대단했다. 10여명 발표자들은 대개 성모님 은혜로 암과 같은 불치병이 완쾌된 이야기, 어떤 분은 아기를 낳지 못해 고민중 성모님의 은혜로 임신, 그러나 난산으로 의사까지 크게 염려하던 중 신기하게도 순산했다는 이야기, 어떤 가정에서는 집안 식구들이 늘 불목으로 싸우며 살아오다가 화목하여 이제는 단란하게 살고있다는 이야기, 어떤이는 너무 노름에만 빠져 살다가 이제는 그 나쁜 버릇을 완전히 고쳤다는 이야기 등등이었다. 나는 우리 신자들의 열렬한 기도모습을 보고 감격하여 마이크 앞에서 나의 사제생활 50여년 동안 이런 열심한 기도회를 처음 보았다고 칭찬해주고 감사하다고 했더니 박수가 나왔다. 체험 발표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사회자가 시간관계로 제지를 요청할 정도였다.
매월 첫 토요일 전국에서 모이는 신자들이 천명이 넘어 도저히 경당에 다 수용할 수 없어 다른 방으로 보내어 비디오를 보고 동참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하였다. 나의 삼가 소망으로는 하루빨리 교회의 정식인준이 되어 성모님의 메시지에 따라 마리아 구원방주 대성전을 전국 14개 교구 협력으로 빨리 지어 신자들의 지극히 정당하고 권장해야 할 기도의 욕구를 채워줄 책임이 교회에 있다고 단언하고 싶다. 대성전이 완공되면 현재 나주 눈물의 성모상 사건을 전세계가 벌써 알고있기 때문에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수만, 수십만이 운집하여 회개, 보속, 희생의 기도회를 열게되면 세계 수많은 냉담자들이 회개하고 비신자들도 이런 세계적인 행사를 보고 전능한 초자연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금만능주의, 쾌락주의, 과학만능주의에서 반성하여 하느님을 찾을 것이 아니겠는가? 나주 눈물의 성모상 사건의 길고 긴 9년간(내년이 10주년) 의 계획이 이런데에 있다는 것을 나는 삼가 확신하는 바이다.
교회 인준이란 사후 사인일뿐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성모상이 단 한번만 눈물, 피눈물을 흘렸다 해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3인이상 수십명, 수백명이 있을 때는 충분히 인준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석고상에서 눈물, 피눈물이 흐른 것은 도저히 자연법칙으로 불가능하며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상 다 잘 아는 저 이태리의 실라노 시라쿠사섬, 불란서 더 라 살렛드, 일본의 아끼다 성모상의 눈물은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교회의 정식 인준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나주의 성모상에서는 7년동안이나 눈물, 피눈물까지 흘려주시고 2년전부터는 향유(기름) 까지 흘려 주시어 교회 2천년 역사상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성모상의 눈물은 1985년 6월 30일에 시작 7년간에 거쳐 700일간 눈물, 피눈물을 흘려주시고 지금까지 향기름을 흘려주신 것을 수만명이 보았고 1987년 12월 8일에는 유명한 마리아 영성 신학박사인 르네 로랑땡 신부님이 나주에 방문했을 때 성모상에서 흘린 눈물을 그날 모인 5백여명의 신자들과 함께 보고 감격했다한다. 그동안 수천매의 사진이 전국에 배포되었고 비디오테이프까지 나와 보는 신자들마다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메시지를 받는 윤율리아 자매의 지도신부로 계시는 파레몬도 신부님은 벨기에 루벤대학 출신으로 일본에 계시다가 한국에 오신 분이다.
성모님 메시지는 외국어로도 번역되었는데 무려 10여개 국어가 넘게 번역 출판되어 전세계적으로 나주의 성모님의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다 한다. 1992년 율리아 자매와 일행 20여명이 필리핀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1주일간 머무는 동안 교회의 공식적인 환영을 받았다.
어떤 성당에서는 5, 6천명 신자들이 모인 가운에 신부님 12명이 합동 미사를 올렸고 또 한번은 마닐라에서 제일 큰 체육관에서 미사를 거행했는데 수만명의 신자들이 운집하고 마닐라 교구장 신추기경님께서 내 관할 구역에서는 어디서나 메시지를 전하라고 허락하시고 율리아자매와 그의 일행을 자신의 관저에까지 초대하시고 율리아자매로부터 기도까지 받으셨다고 한다. 아끼노 대통령은 자매님을 대통령궁으로 초청하여 기도를 청했다 한다.
또 마닐라 그린벨트 성당에서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 하늘에서 장미꽃 잎사귀들이 떨어져 모인이들 중 많은 이들이 보았으며 장미꽃잎을 주운 청년은 그것을 목에 걸고 한국 나주에까지 와서 증언한 바 있었다. 오제리 신부님의 인솔로 율리아 자매님은 필리핀 신자들과 함께 로마를 방문하고 교황 바오로2세를 알현할 때 나주 눈물 흘리신 성모상과 비슷한 성모상과 메시지책자 그리고 피눈물 사진을 선물로 드렸다.
로마에서 좀 떨어진 성체기적 성당으로 유명한 란치아노 성당을 방문, 오제리 신부님의 주례로 미사중 율리아 자매가 영한 성체가 살과 피로 변한 놀라운 광경을 신부님들과 신자들이 모두 보고 크게 감격했다고 한다. 똑같은 성체기적 사건이 한국에서도 네번이나 있었다한다. 참으로 교회 역사상 과거에 일찌기 없었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율리아자매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신부님들 100여명, 수녀님들 200여명, 7,000여 신자들이 메시지를 들으려고 모였고 메시지 전달도중 기립박수를 10번 이상 받았다고 한다.(1990. 3. 25. 성모님 영보축일 피츠버그에서)
이밖에도 외국의 여러 곳에서 율리아자매를 초청하여 얼마나 많은 회개와 영적, 육적인 치유가 일어나고 있는가? 나주 성모님께서 눈물, 피눈물을 흘리신지 10주년이 가깝도록 아직도 정식 인준에 대한 준비도 없고 지방 어떤 본당에서는 나주 성모님께 참배 가는 것을 금하기까지 한다고 하니 무슨 권리로 그런일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성모님께 효성을 드리고 은혜를 간청하기 위해 부산, 서울, 인천, 대구 등지에서 천리길을 멀다않고 가는데 장려는 고사하고 금지가 웬말인가!
성모님의 메시지의 주요 요지는 회개, 보속, 희생, 기도인데 현 시대보다 회개가 더 요구된 때가 있었던가? 성모님의 메시지의 내용을 나는 모두 읽었다. 교리나 교회 전통에 위배되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40대의 율리아자매는 태중교우도 아니고 이른바 신문교우로서 교리학교를 나온분도 아니고 성서를 특별히 공부한 일도 없는, 학력으로는 시골 중학교를 나왔을 뿐이다. 메시지 합본을 보면 누가 꾸며낸 문장이 절대로 아니고 메시지 주시는 분의 말씀 그대로 받아쓴 것이 분명하다. 어떤 메시지에는 예를 들어 '촉범'같은 어려운 말이 가끔 나오는데 이럴 때는 율리아자매는 그 참뜻을 몰라 사전을 찾고 또 남에게 묻기도 했다고 한다. 신비신학 박사의 논문이라고 할만한 이 긴 메시지를 절대로 교리도 잘 모르는 중학정도 학력밖에 없는 율리아자매가 혼자 자기힘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문필학상으로 분명하다.
또 한가지 첨가하여 이야기를 할 것은 율리아자매가 몸져 누워 심한 고통을 받는데 예수님의 오상 고통을 받으면서 실제로 다섯상처에서 붉은피가 흐르는 현장, 순교자들이 겪는 고통, 배가 북통같이 불러 오르는 낙태 보속고통, 온방을 뒹굴면서 고통받는 현장을 비디오 촬영으로 찍은 테이프까지 나와있는데 이런 율리아자매의 고통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 보속하는 의미를 갖는다. 대속은 우리 가톨릭의 교리이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돌아 가셨고 무수한 순교자들과 많은 고통을 당하고 세상을 떠나 천국에 계시는 성인성녀들의 세상에서의 고통도 다 대속의 뜻과 목적에서였다. 한가지 신기한 것은 이상 말한대로 몸져 누워 심한 고통을 겪다가도 자리에서 일어나면 외국까지도 여행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가정주부가 된다. 몇달전만해도 전화도 못받을 정도로 몸져 누워 고통받고 있었는데 지난 11월 24일, 12월 8일 나주에 갔을 때 완전히 건강한 사람처럼 기도를 인도하고 성모님 찬양 노래를 부를 때 아름답고 너무나 고운 율리아자매의 목소리에 놀랐다. 눈물의 성모상 사진을 찍었을 때 성체와 성작사진이 같이 찍혀 나왔는데 어떤때는 성체에 오상을 뜻하는 다섯군데의 피흔적이 있고 또 다른 때는 성체에 A,W 희랍어 문자 두글자가 선명하게 나와 있는 사진도 있고 성모상 손에 성체모양이 사진에 찍혀 나온것도 여러번 있었다. 이런 현상도 과거역사에 없었던 신기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신기한 기적과 특히 1994. 11. 24일 교황대사님께서 나주 성모님의 방문날 보여주신 성체기적은 다 교회의 인준을 독촉하는 징표가 아닌가 삼가 생각해 본다.
눈물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기적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다고 했지만 1-19호까지 나오고 누구의 금지령?으로 정간이 되었던 '성모님의 소식'이란 각 본당 주보같은 소책자를 내가 읽은적이 있는데 기적같은 은혜를 받은 체험담 기록이 많이 적혀 있다. 부산에서 내가 직접 본 일로서는 이경희 마리아씨(32세) 가 골수암과 심장을 7번이나 수술을 받고 사경을 헤매다가 나주를 방문하여 성모상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바치며 회개하므로 완쾌되어 매월 첫토요일 감사기도를 바치려고 나주를 방문하고 있으며, 또 임안젤라(53세) 씨는 남편과 이혼하고 18년간이나 원수처럼 지냈으나 회개하여 남편을 용서하고 다시 만나 화해한 결과로 재결합하여 현재는 남편이 성요셉 성인같이 보인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상 두자매는 우리집에 가끔 오는 자매들로서 순박한 가정주부들이며 현재는 신앙생활에 열중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경하하며 박수를 보낸다. 이상 몇자 적은 것은 절대로 누구를 비난하거나 불평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85세 은퇴 원로 사제로서 교회를 위하고 사랑하는 취지에서임을 밝히고 펜을 놓는다.
추언 : 아직도 어떤 계시나 기적에 있어 소속 주교님의 인준없이는 언론게재나 아무런 행사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절대로 현행 교리법으로 그렇지 않다. 교회에는 독재가 있을 수 없다. 계시문제나 기적에 있어 증거가 확실하면 언론게재도 할 수 있고 다른 행사나 기도행사도 가능하다. 언론은 여론을 환기시키고 여론은 "민심이 곧 천심"이요 "백성의 소리가 곧 하느님의 소리"(Vox populi Vox Dei) 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소속주교의 인준 전에 한 모든 행사는 교황청의 마지막 판단에 복종할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1994년 12월 15일
부산 박동준 신부
1992년 11월 24일(향기로운 기름)
나주의 성모님이 성모상을 통해서 숱한 눈물과 피눈물을 보여주시면서 우리 모두에게 모성의 징표를 주신 것이 네번째이다. 사람들은 가끔 성모상에서 나오는 기름과 향기가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지를 내게 물어왔다.
1993년 4월 8일 성 목요일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이에 관한 뜻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다음은 성모님께서 율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그 뜻이다. "내가 모두를 위해서 주는 향기와 기름은 하느님의 선물인데, 그것은 바로 나의 현존이며 사랑이자 우정이기도 하다."
나는 이 주제에 관해서 과거에 두 개의 설명문을 기록하였다. 그 하나는 기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향기에 관한 것인데, 얼마전에 구입했던 서적 "성서 신학용어" (사비에-레옹-듀흐르, 세르프- Xavier-Leon-Dufour, Ed. du Cerf-출판사, 1975년) 를 참작하였다. 나는 이 뜻을 알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한국어로 번역도 시켰다.
성모님께서 당신의 현존과 사랑과 우정의 징표를 주셨을 때 무슨일이 생겼는가?
1992년 11월 24일은 광주 대주교 윤빅토리노 주교님과 만날 예정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광주에 가게 되었다. 물론 모든 대화는 나주 성모님 쪽으로 기울어졌다. 오전 중에 있었던 만남이 끝나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나주 성모님상 곁에 갔다. 성모상에서는 끊임없이 향기가 계속 풍겼다. 율리아와 그녀의 남편 율리오 그리고 정규 보조자인 박루비노가 성모님 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성모님 발 아래서 함께 묵주의 기도를 열렬히 그리고 천천히 읊었다. 묵주의 기도를 끝내고 우리는 성모상 바로 곁으로 다가갔다. 나는 성모상 오른편에, 율리아와 루비노와 율리오는 왼편에 서 있었다.
우리는 성모상을 바라보며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뜻하지 않게 율리아와 루비노가 내게 말하기를 "신부님, 신부님의 팔로 성모님 상을 안아 드리세요. 성모님께서 아마 사랑의 징표를 주실지도 모르지요!"라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정답고 단순하고 성실하고 즐거운 아이들처럼 이 말을 명랑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역시 유쾌한 어조로 "그야 물론이지요.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랑의 징표를 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성모상이 놓여 있는 장소에서 조심스럽게 천천히 두손으로 성모상을 안아 내렸다. 성모상을 손으로 잡고 채 돌아서기도 전에 기쁨으로 벅찬 한 목소리-놀람과 기쁨과 감동으로-(꽤!) 떠들썩하게 세 사람이 나에게 "신부님, 기름이 솟아 나옵니다."라고 소리질렀다. 우리는 넷이 다 감동하여 성모님의 현존과 사랑과 우정의 징표를 바라보며 머물러 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침투할 수 없는 벽"은 이미 진정 없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름은 하루, 이틀, 그리고 여러 날이 경과하는 동안 흘렀고, 한국의 어린이 날인 5월 5일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또한 흐르고 있다.
성모님께서 두번째로 향기로운 기름을 주셨던 것은 역시 1992년 5월 5일 화요일이었다. 기름과 향기에 대한 두번째 기사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이미 상기(上記) 한 바와 같이 향기로운 기름은 계속 방울져 흐른다. 율리아는 성모상 밑에 작은 헝겊 조각들을 끊임없이 갖다 댄다...
풍겨 나오는 향기는 매우 상쾌하고 여러가지 농도로 풍긴다. 내가 이 헝겊 조각들을 보낸 사람들은 이 헝겊을 동봉한 나의 편지를 받자마자 그 헝겊이 있는 방이나 혹은 홀이 향기로 가득찬다는 편지를 써 보냈다. 기름이 더욱 풍성하게 흐른 것은 올해 특별히 1월달부터 였고, 그 중에도 3월 4일이었다. 이틀전 5월 3일에 나주(루비노) 에서 기름이 계속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몇 사람이나 그 사랑에, 그 사랑 앞에 그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열어 놓을까? 몇 사람이나 성모님께 작으나마 사랑과 감사와 연민의 정을 표시하려고 성모상 곁에 기도하러 가는 시간(?)을 찾고 집을 떠나는 수고를 할까?
오늘, 한국에서는 공휴일인 어린이 날에 언제나 '무시무시하게' 꽉 찬 차도와 가로에 자동차들이 한산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멀리 또는 근교로 기분전환을 하려고 떠났을까... !
모든 것은 자기 자신, 자아에게로 돌리고 집중시키는 반면에, 자녀적이고, 정답고, 자기를 망각하고, 자녀적인 마음을 표시하려고 사랑이신 분께로 가서, 현존하시고 친절하신 어머님께 감사드리며 사랑이신 분 곁에 있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거나 아니면 거의 없고, 있다해도 너무 소량뿐이다.
매일의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즐거운 놀이, 농담, 온정속에서 팔을 내미시고 우리에게 눈물과 피눈물로 고통스러우신 사랑을 보여 주시는 성모 마리아께 대한 열렬하고도 자녀적인 애정, 참되고 깊고 항구하고 견고하고 지속적인 애정이 있을까? ?
1993년 5월
파레몬도(현우) 신부
여러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나주에서 성모상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볼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자주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나주의 성모상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교회당국의 판단에 맡겨야만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교회당국의 판단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교회당국에 순명해야 합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율리아를 알고 있습니다. 푸른 군대 피정 때 마다 참여하였고 푸른 군대 출판물 보급에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습니다. 여성다운 그리고 엄마다운 열심한 신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 후에 성모상에서 눈물이 흐르는 일이 생겨났고 마침내 그러한 분야에 충분한 지식과 더불어 깊은 성모 신심을 갖춘 파 레몬도 신부가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 역시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나주 본당에서 주일 미사 강론을 하게 되었는데 광주대교구장이셨던 헨리 대주교님이 한국에서 처음 부임하신 곳이 나주 본당이라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헨리 대주교의 모토는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로(Ad Christum Per Mariam) "였습니다. 왜 이런 모토를 택하였는지 물어보자, 헨리 대주교님은 뉴욕에 있는 친구 주교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그런 모토를 정해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헨리 대주교를 통해 이 모토를 따라 생긴 레지오 마리애가 한국에 도입되었기 때문입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모토 역시 몽포르의 루도비꼬 성인의 가르침대로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께로"(Ad Jesum Per Mariam) 입니다. 헨리 대주교는 한국의 큰 은인이 되셨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헨리 대주교님이 나주 본당을 맡고 계실 때 틀림없이 성모님께 그 본당을 봉헌하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이 본당의 한 신자를 통해 특별한 은총을 주시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루비노도 오래 전부터 알게 되었는데 공소 회장으로서 몽포르의 루도비꼬 성인의 신심을 찾았다는 것에 내가 놀랐다는 기억이 납니다.
로랑땡(Laurentin) 신부의 말에 의하면 유럽의 여러 나라,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일본 등 전 세계 200여 곳 이상에서 성모 발현이나 성모상에서 눈물을 흘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라찡거 추기경이 메주고리에 성모 발현에 대해 이야기 하실 때 말씀하신 것처럼 "샘을 잘 잡아야 합니다." 어떤 우물을 팔 때 솟아나는 샘물의 원천을 잘 잡아야 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이 나주 성모상의 눈물을 통해서 성모님이 한국교회에 은총을 많이 얻어주시고 교회가 쇄신되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신자들이 기도하고 희생하며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당국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1991년 50호 마리아지에서
하안또니오 신부
우리본당에서 성모신심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둘째 주 강의는 서울 성령 봉사회 스미트 엘레나 수녀님(서울 성산 기도의 집) 이었는데 강의 후 사제관에서 차 한잔 하시면서 나주 성모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수녀님은 나주에 가서 나주 성모님으로부터 직접 체험을 하셨기에 누가 뭐라해도 그 징표의 진실성을 믿는다고 하셨다.
언젠가 휴가 때 나주 성모님의 집에 와서 성모님의 손을 잡았을 때 맥박을 느꼈으며 기도하기를 "성모님은 왜 우시나요? 성모님은 왜 슬퍼하시나요? 저도 눈물을 흘리게 해 주세요." 하시었다 한다.(그때는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다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수녀님의 눈 한쪽에서 눈물이 계속 나왔으며 휴가동안 계속 눈물이 그치지 않아 하도 이상해서 서울 성모병원 안과에 갔더니 의사가 별 이상이 없으니 안약을 바르라고 안약을 주더란다.
집에와서 안약을 눈에 넣으니 눈이 더 아파 그 약을 버렸단다. 그리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기를 "성모님! 죄송합니다. 나주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이 진실한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잘못된 저의 믿음을 용서해 주세요."하는 순간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즉시 그치더란다.
이러한 체험 때문에 나주 성모님의 징표에 대해서 확실히 믿고 증언한다고 하였다.
1992년 11월 2일
염주동 본당 장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