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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차 주제 : 청일전쟁
일시 : 2005년 9월 14일
장소 : 사가정바른역사연구회 (면목3동 주민자치센터 4층)
주제 발표자 : scot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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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라크점령 전쟁을 ‘이라크 자유 작전’또는 ‘이라크인들을 위한 해방 작전’ 등으로 부른다.
1894년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조선의 독립’과 ‘조선의 내정 개혁’, ‘야만적인 청나라 응징’ 등의 명분을 내걸었다.
1910년 한일합방의 명분은 동양 평화의 유지와 조선 왕실의 존엄 유지, 악정과 폐습의 개혁 등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양민을 포함해 약 400만명의 베트남인들을 학살한 미국이 전쟁의 명분으로 ‘남베트남 주민의 자유 보호’를 내걸었던 것도 다 기억하는 일이다.
‘주민들을 위한 은혜로운 점령’이라는 궤변의 골자는
100년 전의 일제나 오늘의 미제가 별로 다르지 않다.
100여년 전 청일전쟁의 경우,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개화 지향적인 조선 지성인들도
‘조선 독립의 쟁취’에 대한 일제의 궤변을 믿었다.
그 중엔 일제에 붙어서 영달을 누려보려는 ‘일신 영달형 친일파’도 있었지만,
일본의 ‘지도와 지원’이 조선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순진하게 믿은 인물들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 때도
미군의 간섭이 ‘공산화를 막는 필요악’이라고 믿은
남베트남의 지식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러면 이라크 전쟁에서는 과연 어떨까?
미국의 침략이 ‘독재자 후세인 제거를 위한 필요악’이라고 믿는
이라크 사람들이 있다.
청일전쟁이전 중국이 외국과 벌린 전쟁은 아편전쟁이었다.
아편 전쟁은 1839년에(1839∼1842) 일어났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이 끝난 후 아편의 유입은 더욱 심해졌고, '양약'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정식 무역품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그 수입량은 188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으며, 아편 수입세는 국고의 중요 재원으로 청일전쟁의 배상금 지불에 충당되었다. (중국 서민들의 주머니돈으로 배상한 결과)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과 청나라간에 체결된 난징(南京)조약은
중국 중심의 중화(中華)사상에 기반을 둔 기존의 동북아 국제질서를 붕괴시키고
서구 근대국제법 체계에 따른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했다.
이에 따라 19세기 후반 강대국들의 한반도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된 국제관계의 지배적 양상은
해양세력(영국 미국 일본)과 대륙세력(중국 러시아)간의 대립과 갈등이었다.
청나라와 일본의 갈등,
동북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전개되는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에 따른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년)은 한반도에서 전개된 열강간 갈등의 대표적 양상이다.
조선 정부는 제한된 상황에서나마 주권국가로서 열강과 교섭하려는 노력을 했으며
유럽과 미국에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은 조선과 상관없는 강대국간 갈등의 소산이었지만
한반도의 운명에 중요한 고비였으며 동시에 동북아 국제정치질서를 바꿔 놓았다.
‘힘이 진리’인 국제정치의 양상은 약소국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개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세기 후반 조선의 경우다.
이 시기 조선은 힘도 없고 힘을 보완하는 외교력도 미약해 동맹국을 가질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한말의 국제관계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런 것이다.
청일전쟁이 일어날 당시의 각국을 살펴보면....
1893년에 디젤엔진이 발명되고 미국에서 경제공황 발생하였으며,
Edison이 활동 사진발명. 뢴트겐(Rontgen) X선을 발견(1895년)
조선-고종(1863-1907)31년
청나라-광서제(1871~1908), 백모(伯母) 서태후가 섭정. 실권이 없었다.
일본-1868년부터 명치시대(-1912년까지)
러시아-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1917). 지방 볼셰비키에 처형됨.
미국-Grover Cleveland 대통령, 경제공황, 철도 회사 파업
프랑스-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 체결.
[아메다마]란 말은 일본말입니다.
아메다마는 일본어로 눈깔사탕이란 뜻입니다.
나이가 40대 후반 이상인 사람들은 이 말들을 어려서 들어본 기억이 날겁니다.
우리 땅에서 이런 단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게 바로
1894년의 청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보부상들이 일본인들이 만든 사탕, 분, 구루무, 같은
처음보는 물건들을 봇짐에 싸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팔았습니다.
일본인들은 보부상에게 이런 물건들을 내주고 대신
금, 은, 쌀 같은 것을 받아서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부상들은 일본의 돈에 매수되어 동학잔당의 움직임 같은
국내의 정보들을 그들에게 제공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보부상에 관한 말 중에는
“10전을 보고 물속으로 10리를 가는게 보부상이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메다마]라는 물건은 지금도 재래시장 같은 곳에서 팔고있는 것 같습니다.
작은 물건들 속에서도 역사적인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는 예가 되겠습니다.
저도 이 말들을 조정래씨의 소설 아리랑에서 일고, 처음에는 잘 기억이 안나다가 몇 번 발을을 해보고는 옛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외국군주둔지 용산]
대한민국의 국방부가 있고 한미연합사령부를 비롯한 미군부대 시설이 빼곡이 들어차 있는 용산 지역은 110여 년 전부터 한국을 침략한 외국군대의 요충지였다. 용산이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변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한반도에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면서부터였다.
임오군변 이후 우리 나라에 주둔하기 시작한 청나라 군대는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만들고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선을 지배하려는 무력기반이었다.
이 군대는 1884년에는 갑신정변마저도 피비린내 나는 유혈진압으로 좌절시킴으로써 조선 내부의 근대적 변혁을 저지하기도 했다.
갑신정변 이후 10년간 자주적인 근대적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채 청일전쟁을 맞게 되는 배경에도 이 청나라 군대의 무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에서의 청 세력이 날로 번성해지자 이에 비례해 일본의 위상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본인의 상업활동 쇠퇴가 눈에 띄게 드러났다.
임오군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조선인이 갖게 된 배일 감정이 일본 세력 후퇴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한번에 바꿔놓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청일전쟁이었다.
외국군 주둔사가 청군에서 일본군으로, 다시 미국 군대로 바뀌고 사회적 환경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 갔지만 우리 땅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사용료 한푼 내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지원을 요구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주둔형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120년 전의 힘없던 조상을 비난할 만큼 우리의 현실은 그리 나아지지 못한 것이다. 외국 군대에 의지해, 작전권마저 넘어가 있다.
조선(朝鮮)에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청국군의 출병으로 실패한후, 일본의 자유민권파는 무력에 의한 조선개혁을 계획(오사카사건)하고, 메이지정부는 해군의 확장을 추진하면서 조선을 둘러싼 청일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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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이 일어난 50년 후에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고,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은 해방된지 60년이 되는 시점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부터 시작된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번의 전쟁이 단절을 거듭하다가 한국전쟁의 휴전으로 멈추는 데까지는 59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러일전쟁, 제1차세계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모두 7번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평균 8.4년에 1번꼴로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7번의 전쟁 중 앞의 6번의 전쟁은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입니다.
한국전쟁도 그 근본적인 외인은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있습니다.
마지막의 한국전쟁이 휴전한 후 지금까지 52년이 흘렀습니다.
결국 이 땅에서 평화스러운 시간이 이어진 것이 50여년이 되었고, 그 이전에는 60여년간의 전쟁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전쟁들을 묶어서 [동북아60년전쟁]이라는 명칭을 붙여보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동력으로 움직이는 철갑함들 간의 근대적인 해전이 최초로 벌어진 곳이 이 곳이었으며, 항공기를 이용한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이 처음으로 시도된 것도 이 곳에서였으며, 탱크와 장갑차를 중심으로 한 기계화전이 실험된 것도 이 곳이었다.
무동력으로 움직이는 철갑함은 물론 이순신장군의 조선해군이 세계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의 남해안에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제트추진 전투기가 교전한 곳도 이 곳입니다. 美공군의 F-80과 중국 공군의 MIG-15기가 한국전쟁 때의 북한 상공에서 . 그렇게 보면 한반도는 신무기의 시험장 역할을 여러번 한 곳입니다.
동북아시아는 실로 20세기의 세계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의 중심지였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과 대체적인 삶의 윤곽은 동북아시아에서 있었던 운명적인 50년 전란의 결과에 말미암은 것이다.
청일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의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분할이 시작되었으며,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시대의 막이 열렸다.
유럽에서는 종교문제로 몇십년씩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동북아의 60년 전쟁들은 대부분이 한국과 중국의 영토와 물자를 노린 전쟁이었습니다.
100년전 그때의 영일동맹이 그랬던 것처럼 21세기인 지금 더욱 강화되는 미일 동맹은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부추기고 있으며, 그때의 조선처럼 한국은 해양세력과 배후의 대륙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청일 전쟁이 발발할 무렵,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만이 근대적인 정치체제와 법률, 사회 조직, 과학 기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개국 이전에는 중국이나 조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에 비로소 일본인들은 누구나 과학적인 의료의 혜택과 교육을 받았고, 위생적, 문화적 수준이 확실하게 향상되는 체험을 먼저 하게 되었다.
그런 국가적 역량은 군사력증강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지금 일본이 군사적으로 더욱 강국이 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원인을 알고 우리의 잘못을 짚어보는 노력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현정부는 이 점을 의식하며 북핵문제 등, 현재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문제에 능동적으로 적절히 잘 대처하고 있다고 봅니다.
전쟁을 회피하려하면 전쟁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에 철저히 대비한 나라는 전쟁을 겪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사례를 이순신장군의 유비무환의 자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역사에 관심도 많지만 우리나라의 군사력, 무기개발에 대한 관심도 많습니다.
황우석교수가 우리민족의 정교한 손기술에 대해 언급했듯이
세계기능올림픽에서 우승을 휩쓸던 그 손재주는 림펙훈련 같은 무대에서 실전무기를 다루는 능력에서도 전세계를 놀라게 하는 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군사강국은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놀라운 군사능력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마치 이순신장군의 거북선 같은 것을 다시 보는 느낌입니다.
이런 능력을 잠재적으로 가진 우리 민족이 쇠퇴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쇠퇴한 시기는 조선의 정조대왕 사망이후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정조대왕의 뒤를 이은 조선왕실의 후손을 보면 훌륭한 왕자들이 없었습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정조대왕의 청렴함에 원인이 있기도 합니다. 그는 국가의 재정을 절약하기 위해 궁중에 있던 상궁들을 모두 폐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대전 소속의 상궁들만 없앱니다. 그리하여 아들을 많이 얻지 못하고 순조 하나만 얻고 말았습니다.
큰 흐름으로 볼 때, 조선은 정조대왕이 죽은 후부터 청일전쟁 전까지 약 100여년간은 망국으로 가는 전단계였고 그 이후는 나라가 실제로 망한 단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 단계는 근대국가로 가는 준비단계였고
그 이후는 근대국가를 이룩한 단계였습니다.
일본이 그 때 이룩한 근대국가를 우리는 100년이 지나서
불과 얼마전에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본을 추격해 왔지만, 아직도 그 차이는 남아있습니다.
19세기에 준비를 게을리한 것이 21세기 중반 이후에나 만회될 것 같습니다.
1894년은 세계적으로 보면 프랑스에서 드레퓌스사건이 일어났고,
청나라의 손문은 하와이에서 중국혁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동학혁명, 청일전쟁외에도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 해입니다.
의병운동이 시작된 해이기도 합니다.
이 의병운동이 한일합방이후에는 독립운동의 모태가 됩니다.
또 대원군의 섭정이 다시 시작되고
제1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된 갑오개혁이 있었던 해이기도 합니다.
당시 개혁은 일본은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의 신정부가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독자적으로 수행하였다.
정치면에서는 청과의 종주 관계를 청산하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고,
경제면에서는 재정을 일원화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가장 괄목한 만한 것은 사회면의 개혁이었다.
양반체제하의 신분제 철폐, 조혼 금지와 과부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의복 제도 간소화 등이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서의 우위를 확실히 하였다.
갑오개혁은 19세기 이래로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내재적 개혁의 흐름이면서도
청일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 형성된 일본 중심의 근대적 제국주의 질서 속에
조선이 편입된 과정을 법제화한 양면성을 띤 개혁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있는 위안부문제도 청일전쟁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청일전쟁시부터 일본 군인들을 위해 민간주도형으로 설립되었다.
그 후 1932년 상해사변 당시 상해지역에서 일본 육, 해군이 군위안소를 설치하였다.
이 때 조선인이 처음 포함되었다.
그리고 1884년 12월에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망명한 김옥균이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 해이기도 합니다.
홍종우는 뒤에 보부상을 동원하여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한 사람입니다.
일본은 독단으로 서울과 인천 그리고 서울과 부산 사이에 군용전선 가설공사를 했습니다.
전화, 전신이 가설되면서 일본은 우체국제도를 도입하여 조선땅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조선지배와 중국침략의 도구로 삼았다.
한편 러시아는 1891년부터 시베리아철도공사에 착공하고
만주와 조선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우리모습을 본 서양인 앨런은
"일본이 서구 근대의 성과를 배우고 익혀 일취월장할 때 당신들은 잠만 자고 있었다.“
”조선의 관리들은 ‘한국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다.“
”조선은 엄청난 권력 남용과 공금 낭비가 성행하며 바닥도 끝도 보이지 않는 몰락과 부패, 타락으로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 같다.“고 말했다.
농촌에는 화적떼가 횡행하고 흉년으로 쌀값이 폭등하고
괴질이 만연하여 굶고 병든 사람들이 길에 쓰러지는 가운데 도처에 민란이 일어났다.
흉년과 관련해서는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화산폭발로 그 화산재가
지구 대기의 70%를 일시적으로 덮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온의 하강으로 인한 냉해가 전 지구적으로 있었다고 보입니다.
쌀값이 오른 또 다른 이유는 일본상인들이 쌀을 사서 가지고 가기 때문이었고
당시 사람들이 괴질이라 불렀던 병은 호열자(콜레라)였는데
호열자가 만연한 것도 일본인들이 옮긴 것이었다.
도적떼가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가 하면 왕실에까지 도적이 들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1894년 1월에 전봉준이 전북 고창 고부에서
농민운동을 일으키자 농민운동은 순식간에 호남과 전국으로 번져갔다.
4월에는 동학군이 전주로 북진해오자 정부는 4월 2일 경군京軍을 호남으로 파병한다.
경군이 인천을 출항, 군산에 도착한 것이 3일 뒤인 4월 5일이었고
지휘관은 홍계훈(본명 홍재의)이었다.
경군 병력은 8백 명이었으나 적은 봉급이 3개월씩이나 밀려있는 상태에서
4월 7일 군산에서 전주까지 행군하는 동안 330명이 탈영했다.
관군이 이런 군대였기 때문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의 주력부대는
쉽게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들은 4월 27일에 빈 집이나 다름없는 전주에 동학군이 입성하였다.
이것이 1차 전주성 전투였다.
그러나 5월3일 동학군은 2차 전주성 전투에서
전사자가 무려 5백 명이 넘는 대패를 당했다.
이처럼 전주성 공방전은 관군의 승리로 끝났는데
서울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범하고 있었다.
당시의 실권자였던 민영준(일명 영휘)이 국왕의 재가도 없이
4월 30일에 청국에 파병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조선군의 병력은 통틀어서 1만 5천 명 가량밖에 없었다.
그나마 군기가 엉망이어서 아래 위가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뿐만 아니라 청국군이 한국에 들어온다면 일본군 또한 자동적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앞서 갑신정변때 청일간에 체결된 천진조약 때문이다.
천진조약에 의하면 일본과 청나라는 자국군대를 조선에 출병할 때는
상대국에게 통고하도록 되어있었다.
그것을 민영준이 모를 리 없었는데 어리석게도 출병을 요청해 놓고
나중에 고종의 재가를 얻으려 했다.
나중에 고종이 이 사실을 알고
"이 일은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군신회의를 열어 논의하라"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극동의 첩보기관들]
한국의 안기부는 고종 임금 시절에 창설되었다.
익문사라는 스파이 기관을 양성하여,
일본으로 나라가 넘어가는 것을 막아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19세기 말엽은 한국 등 극동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으로
세계제일의 무법천지가 된 시대여서 스파이(간자)들의 활동도 그만큼 심했다.
이 익문사의 책임자는 이용익으로서,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으로 쫓겨났을 때 왕비를 장호원으로 모시고
임금과 왕비의 교신자 역할을 맡으며
청국 황제에게 청국군의 파병을 상주한 인물이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정부고위관리들과 외국공관원들의 동정,
국사범과 외국인들의 범죄행위 감시, 학교 및 종교 회사 법인의 반국가 행위,
외국의 침략행위에 대한 사전 정보 포착 등을 망라하고 있어
오늘날의 스파이 기관과 하등 다를 게 없다.
더욱이, 이들은 황제에게 친서를 보낼 때 붓으로 묵서를 쓰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는 오징어먹물로 글을 쓰는 등
치밀성을 두어 오늘날의 간첩과 거의 흡사했다.
[일본 낭인들]
이 당시 조선에는 많은 수의 낭인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1892년 부산에 외교관 출신인 야마자 엔지로를 중심으로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조선의 정세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동학혁명이 터지자 이들은 그 동안 모아놓은 정보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현양사의 낭인들은 1893년 일본을 지지하던 김옥균이 청나라 땅에서 암살되자
외무대신에게 청나라와의 개전을 요구하며 전쟁 여론을 부추겼다.
이 때 외무대신은 이 요구를 겉으로는 거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침략주의자인 육군참모총장 가외카미 소로쿠와 이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민간인과 정부의 교묘한 역할분담이 행해진 것이다.
정부와 군부의 내면적인 비호에 고무된 낭인들은
동학혁명을 기회로 행동에 들어갔다.
정부의 개전 결단을 돕기 위해서는 누군가 불을 질러야 한다는
`방화의 역할`을 하기 위해 천우협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천우협의 격문에서 `시주음락으로 소일하는
한국정부와 민씨 일족의 압정을 깨뜨려 도탄에 빠진 조선백성을 구제`하고
`민씨의 악정을 뒤에서 조종하고 지원하는 청국을 한반도에서 쫓아낼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천우협은 1894년 6월 하순 부산에 도착한 후
전국에서 석 달 동안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게릴라 활동과 폭력을 감행했다.
우치다 료헤이는 그 행동대원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의 내정에 큰 소요를 야기했다.
이들은 의도대로 청일전쟁을 점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전쟁중에는 일본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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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을 출발한 군함 2척에 탄 청의 선발대 2,100명이 아산만에 도착한 것은 5월 7일이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5월 8일에 동학군이 전주성을 비워 사태가 가라앉아 버렸으니
당황한 것은 파병을 요청한 우리 정부측이었다.
당시 관군의 지휘관인 엄세영은 동학군을 설득하기위해 부정부패관리의 숙청과 채권의 포기, 횡포한 토호의 엄벌 등을 약속하며 농민군을 달래면서, '동학란이 계속되면 청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조선 땅이 청일간의 전쟁터가 되고 만다'는 논리를 폈다.
외국 군대를 불러들일 수는 없다는 점에는 더 이상 버틸 명분이 없었던 동학은 마침내 전주성을 관군에게 명도하고 철수하였다. 이것이 전주화약(全州和約)이었다.
그러자 정부는 5월 10일 청국측에 동학란이 진정되었으니 철병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응하기는커녕 더 많은 정예부대를 증파하였다.
일본은 이때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고 있다가 때마침 이토오 히로부미 내각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파병을 단행하였다. 그는 8천 8백 명이라는 대병력을 5월 9일 그러니까 청국군보다 2일 늦게 인천에 상륙시켰다. 놀라운 기동력이었고 필요 이상의 병력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일본군과 청국군의 상륙장소가 다른 점에 유의해야한다.
청국군은 동학군을 제압하기 위해 안산에 상륙했으나, 일본군은 서울쪽이 가까운 인천에 상륙했다.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 10년간 엄청난 군사력을 길러왔다. 그래서 일본은 청군과의 일전을 불사하기로 결심하고 있었으며 이 기회에 우리나라를 괴뢰국으로 만들어 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세기 말 각 주요 자본주와 제국주의 국가]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 ·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 ·미국과 프랑스 ·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 ·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 ·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 ·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
19세기 말 각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점차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전세계적 범위에서 식민지 쟁탈의 새로운 투쟁을 전개, 중국의 이웃 나라들과 변경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에 이르러 일본은 중국에 대해 보다 큰 규모의 침략전쟁인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이 해는 음력으로 갑오년이었으므로 이 전쟁을 가리켜 `갑오전쟁`이라 부른다.
일본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던 봉건성과 함께 군사적 특징은
대외적인 강렬한 약탈성과 확장성을 갖게 하였다.
일본 천황제 정부는 `만리파도룰 개척하여 국위를 사방에 펼치자`라고 외치며
중국과 세계를 정복하려는 대륙 정책을 결정하였다.
당시의 이토 내각은 정권의 유지가 한계상황에 있어서 극적인 타개책이 필요했다.
점증하는 일본 국내의 사회불안은 1894년 5월 31일에 중의원에 '내각탄핵상주안'이 상정되어 그것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내각의 붕괴와 사퇴는 거의 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대청전쟁을 가정한 군비증강을 위한 증세(增稅)는 국민들의 고통을 야기시켜, 국회의 총선거는 항상 야당의 우세를 가져왔다.
이토 정권은 사회, 경제적 혼란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청 전쟁 준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1890년, 1892년의 대연습, 1893년의 전시대본영조례의 제정 등이 그런 노력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외상인 무쓰는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고 반대파들을 누르기 위해서는 전쟁의 승리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청일전쟁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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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중요한 전투들을 보면,
풍도 앞바다 해전, 고승호의 상실, 아산 전투, 평양 전투, 압록강 해전이 있다.
일본은 청국이 출병에 대한 통고를 해오기도 전인 5월 5일에 이미 3백 명의 해병과 1개 대대의 선발대를 태운 수송선을 조선으로 출발시켰다. 5월 5일 시모노세키를 출항한 일본의 수송선이 인천에 도착한 것은 5월 9일이었다.
청국이 천진조약에 의해 취한 출병통보가 일본에 도착하고 있을 때는 이미 청일 양군의 선발대는 바다 위에 있었다.
일본군이 5월 10일 서울에 입성한 이유는, 동학난 진압 의뢰를 조선 정부로부터 받아서 동학을 진압한다는 대의명분 하에 조선에 장기주둔을 꾀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한성 입성 다음날 날아온 소식은 '전주 화약'으로 동학 농민군은 자진 해산하였고 동학난은 해결되었다는 것이었다.
조선 외상 최병준은 오오토리 일본공사에게 민란이 평정되었음을 알리고, 일본군의 무단 입경에 항의하였다. 각국의 외교단 역시 오오토리에게 일본의 성급한 출병을 항의해 왔다.
오오토리는 서울의 상황을 검토하여 본국에 "경성은 평온하고, 민란의 조짐은 없음." 하고 전보를 쳤으며 전보의 말미에 추가 파병은 보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동학란의 조기 수습은 일본 내의 강경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오오토리는 청국의 대표인 원세개와 공동 철병을 위한 교섭에 착수했다.
그러나 무쓰로부터 날아온 회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 나머지 병력에 대한 상륙을 중지할 수 없다"는 답신이었다. 조선 국내의 사정 변화에 관계없이 일본의 파병은 원래대로 추진된다는 것이었다.
6월 15일에 일본은 조선 주재 병력의 3/4를 철병하여 250명만 남기고, 청군은 4/5를 철병하여, 400명만 남기며, 민란이 완전히 종식되면 전원 철병한다는 내용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에는 이러한 철병에 승복하지 않고, 기회를 이용하여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청나라와 전쟁으로 승부를 가려야한다는 주전파들이 많았다. 일본의 국민적인 여론도 대청전쟁 불사가 우세하였다.
일본의 국민 감정과 여론이 대청개전(對淸開戰)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진행시켜 오면서 축적된 일본의 힘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일본인들은 자각하게 되었다.
일본외상 무쓰와 일본육군 참모차장 가와카미가 월권하여 전횡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일본 전체의 국내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은 청나라에게 조선의 내정개혁에 개입하자는 제안을 내놓고는 청이 가담하지 않으면 일본 단독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청의 원세개는 우선 철병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결코 물러날 의사가 없었다. 마침내 일본은 속셈을 드러내어 청에게 조선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공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한편 조선정부에는 7월 10일에 일본군이 병영을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남산에서 노인정회담을 열고 「내정개혁방안강목(內政改革方案綱目」이라는 5조 27개항으로 된 권고안을 제시하였다. 군대로 서울을 점거한 상태에서 강요하는 억지 회담이었다.
또 노인정 회담 당일 일본 공사 오오토리는 조선 정부에 대한 무력 행동에 대한 방침을 요청하는 전문을 본국에 보냈다.
오오토리는 그 전문에서 '갑안'과 '을안'이라는 두 가지 방책 중 한 가지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갑안'은 병력을 동원하여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 왕실과 조정의 대신들을 겁박하여 단숨에 결판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을안'은 청국의 종주권을 파기하고 청국과 동일한 권리 및 전신선 가설권을 요구하고 그것이 관철될 때까지 왕궁의 각문을 점령하여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양 안 모두가 군대로 조선 왕실을 협박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에서는 차이가 없었으나 열강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문제였다.
사실 일본과 청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열강들은 제각기 반응을 나타내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외교사절들은 이구동성으로 청일 양군의 공동 철병을 요구하였다.
러시아가 일본에게 철병할 것을 요청했으나 러시아의 극동전력이 아직은 약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이를 거부한다. 그러자 러시아는 청일간의 문제에 국외중립을 선언한다.
일본이 더욱 신경을 쓰고 있던 상대는 영국이었다.
당시 일본은 개국시 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 전국민적 염원이었다. 오랫동안 협의해 온 「영일통상항해조약」의 개정이 눈앞에 와 있었다. 만약에 영국이 전쟁을 반대하는데도 일본이 감행한다면 조약 개정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쓰는 조선에서 무력 행동을 하기 전에 조약의 개정을 마쳐야만 했다.
마지막까지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였던 모자와 사탕의 관세 문제에서 과감하게 양보를 하고 서둘러 7월 16일에「영일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이 날이 내정개혁에 대한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회답이 온 날이었다.
영국은 당시 청일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나라였다.
극동에 배치된 22척의 영국의 함대는 신흥 일본의 해군력 전부와 대등한 정도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불란서와 동맹한 러시아의 남하를 극동에서 저지해 줄 동맹국이 필요했고 일본은 청국에 실망한 영국에게 새로운 파트너로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었다.
그러나 청국은 일본보다 다섯 배 이상의 규모인 중요한 교역국이었다.
특히 상해는 영국의 이권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청일간의 전쟁이 이 지역에까지 불리한 영향을 미칠 우려는 다분히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러시아를 앞세워 일본에 엄포를 놓는 한편, 미국 등 열강들과 협력하여 공동으로 개입함으로서 청일 양군의 동시 철병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의 「불개입 의사」를 확인하여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었고,
미국에 대해서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언질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미국을 앞세워 조정을 하려던 영국의 시도는 러시아를 배제하는 것이어서 미국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일본과 무력 분쟁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선에서 지켜야 할 이익이 없었다.
조선 정부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6월 1일 주한 미국 공사 씨일(Sill)이 본국에 군함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6월 22일 주미 조선 공사 이승수의 개입 요청에 대해 군함 볼티모어호를 파견한 것이 전부였다.
7월 7일 미국의 국무장관 그레샴은 주미 일본 공사에게 "어떤 경우에도 거중조정(居中調停) 이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사태해결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의 무력 개입은 없다'는 것을 확신케 해 주었다.
이로서 영일 조약의 개정과 함께 청일 개전에 대한 외교적 장애물은 모두 제거된 셈이었다.
1894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영사재판제도의 철폐와 관세자주권의 일부회복을 인정하였다. 치외법권이 청일전쟁직전에 철폐됨.
이홍장은 7월 16일 2,0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조선에 건너가 아산에 주둔하고 있던 제독(오늘날의 사단장에 해당) 엽지초(葉志超)에게 전문을 띄워 해로(海路)로 철수하여 평양에 있는 우군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은 8,000명이 넘는 병력이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엽지초는 해로철수를 거부하는 답신을 보내왔다. 이미 황해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이대로 성환에 주둔하여 부산과 경성 사이의 일본군 연락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였다. 현지 사령관의 의견은 무시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과 2,000명의 부대를 적지 한복판에 남겨 둔다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었다.
이홍장은 아산에 증원군을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수송선은 영국의 이화양행(怡和洋行, 쟈딘 메디슨 상회)으로부터 빌린 애인호(愛仁號)와 비경호(飛鯨號)의 2척이었다.
일본이 청국과 조선에 대한 최후통첩을 한 19일 밤에 원세개는 부하였던 당소의를 후임으로 조선에 남겨두고, 자신은 지팡이를 집고 허리가 굽은 노인으로 변장하여 한성을 탈출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예로부터 해상을 통한 보급과 수송이 승패의 관건이었다.(참고-고당전쟁, 고수전쟁, 조일전쟁, 한국전쟁, 장보고) 이점은 이홍장이나 이토나 분명하게 깨닫고 있는 사실이었다. 증원군 제1진 1천3백 명이 천진의 대고(大沽)항을 떠나던 7월 21일, 원세개를 실은 평원호가 천진항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오토리 공사는 23일 새벽에 일본군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에워싸고 왕궁을 경비하던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 국왕과 왕후를 겁박하던 날인 23일 오전 11시에 일본 해군의 선발대로서 요시노(吉野), 아키츠시마(秋津洲), 나니와(浪速)의 3척으로 이루어진 제1유격대가 사세보항을 나서서 군산으로 향했다.
입궐 다음날인 24일에 고종으로부터 전권을 위임한다는 칙서를 받자마자 신속하게 해치운 일은 민씨 일족에 대한 숙청이었다. 민영준(閔泳駿), 민형식(閔炯植), 민응식(閔應植), 민치헌(閔致憲) 등이 삭탈관직되어 멀리 유배되었고 민비파에 밉보여 억눌려 지냈던 개화파와 친일파들이 대거 등용되었고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에게도 귀국길이 열리게 되었다.
일본군은 탄약을 제외한 군량과 여타의 보급품은 조선 내에서 조달할 생각이었고, 보급품을 수송할 별도의 병참대를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군수품의 수송은 조선에서 징발한 우마와 조선인 노무자를 동원하여 해결할 생각이었다.
25일을 행동개시일로 지침을 받은 일본 해군의 선발대가 항구를 떠난 것이 바로 23일이므로 한성의 육군도 경복궁을 점거하고 대원군을 입궐시킨 직후부터 남하준비를 서둘렀으리라고 짐작된다.
궁중으로 난입한 오오토리와 일본군은 고종과 황후를 연금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 내각을 조직했다. 1차 김홍집 내각이었다.
일본의 총칼 아래서 탄생한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요구대로 7월 25일, 중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단절하고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동시에 조선은 지금까지 중국과 맺었던 모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고 일본에 대하여 조선에서 청군을 축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제 일본은 조선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조선에 들어와 있는 청군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갖게 된 것이었다.
이때 조선국왕이 일본에 건넸다는 공문은 조선의 문서철에는 남아있지 않다. 대원군은 민씨일파에 대한 복수심으로 일본군에 옹위되어 궁궐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일본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청일전쟁은 조선의 충청남도에서 시작되었다.
해상에서는 태안반도에서 덕적도 방향으로 이어지는 직선상에 있는 풍도 앞바다에서 7월 25일 오전 7시 일본해군 제1유격대 사령관 쓰보이 고조 소장의 4,160톤급 순양함 요시노호가 청나라 군함 두척, 2천 톤이 조금 넘는제원호와 광을호를 향해 포탄을 발사함으로써 해전이 시작되었다. 세계 최초의 근대적 해전이라고 말해지는 압록강 해전(The battle of Aru river, 일본 측에서는 황해 해전이라고 부른다)이 시작된 것이다.
육지에서는 일본군 7천명 대 청군 2000명이 7월 29일 충남 성환에 있는 월봉산에서 첫 전투를 시작했다,
1894년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오전 7시 경,
아산 근해의 섬 풍도 앞바다를 청나라 북양 함대 제원(濟遠), 광을(鑛乙) 두 척의 군함이 달리고 있다. 두 군함의 후미 쪽으로 일본의 나니와호와 호시노호 등 세척의 쾌속선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풍도 앞바다를 뒤집어놓을 듯한 포성이 울린 것은 청나라 군함 쪽에서 정황을 판단하기도 전이었다. 포탄은 순식간에 제원호의 화약고를 터뜨려버렸고, 광을호는 응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일본 군함에 나포되었다.
이홍장의 대일전 구상은 북양군과 동북군 산하의 1만2천 병력을 평양으로 집결하고, 아산에 있는 청군 2천명도 평양에서 합류하게 하여 일본군과 결전한다는 것이었다. 장소가 평양이라면 청군에게는 병참선이 가까운 이점이 있었고, 일본군의 보급로는 상당히 길어지는 지점이었다.
일본 함대의 제1유격대가 황해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7월 24일 오전이었다.
요시노를 선두로 3척의 순양함이 일렬 종진을 지어 북상했다.
군산을 지나 아산만 입구에 이르자 작은 섬을 배경으로 하여 두 줄기 군함의 연기가 보였다.
섬은 아산만 입구의 풍도라는 작은 섬이었고, 두 척의 군함은 청국의 제원(濟遠)과 광을(廣乙)이었다.
바로 전날 아산에 증원군 1천3백 명을 양륙시킨 비경호와 애인호를 호위하기 위하여 파견된 군함이었다. 증원군은 무사히 상륙을 마쳤고, 2척의 군함은 아산만 입구를 초계하고 있던 중이었다.
제원과 광을에서도 오후 5시 못 미쳐 일본의 순양함대를 보았다.
당시에 인천과 아산 주변에는 세계 각국의 군함들이 왕래하고 있었고, 일본과 청국의 군함들도 수시로 마주치고는 하였기 때문에 청국 군함은 별다른 경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청국함은 설마 일본 함대가 공격해 오리라고는 예상을 못하고 있었다. 오전 7시, 거리가 3천m 정도 되었을 때, 요시노가 발사한 초탄이 아침 공기를 가르면서 바다를 가로질렀다. 청일 전쟁의 첫 포탄이었다.
제원과 광을의 2척은 일본의 신형 순양함 3척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방백겸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청국 함대는 독일 무관을 초빙해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조함과 전투에 필요한 명령어들과 해군 용어들이 중국말로 번역이 되어있지를 않아서 독일어 그대로 사용을 했다. 제원의 경우 관대인 방백겸을 비롯해서 간부 사관 대부분이 독일어 명령어를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병들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평시의 수송선 호위 임무라던가, 항해 정도는 겨우 해낼 수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전투에 돌입하다 보니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사관들이 뛰어다니며 고함을 질러댔지만 수병들에게는 먹히지가 않았다.
제원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없이 상처 입은 짐승이 본능적으로 자기 소굴을 바라보고 달리듯이 무작정 발해만을 향해 도주할 뿐이었다.
도오고오가 남긴 일기에 의하면 이때 도주하던 제원의 마스트에는 백기가 걸린 아래에 일본군함기까지 올라와있었다고 한다.
백기를 올렸는데도 계속 포탄이 날아오자 방백겸은 일본군함기까지 게양하도록 명령을 했을 것이다.
훗날 장개석은 중국 역사의 여러 전쟁들 중에서 갑오전쟁(청일전쟁)이야말로 가장 수치스러운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도오고 하치로]
해군사관이 되어 1871∼1878년에 영국에 유학하였다. 청일전쟁 때는 나니와 함장[浪速艦長]으로서 청국군함 고승(高陞)을 격침시키기도 하였다. 러일전쟁에서는 일본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서 전해군을 지휘하여 동해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유명한 정자전법(丁字戰法:즉 敵前回頭作戰)으로 격파하였다.일본의 러일전쟁 숭리는 일본 역사상 최고최대의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 함대의 총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세계적인 명장이 되었으며, 일본 역사 10대 영웅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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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을은 제원보다 더 소형이고 무장도 빈약한 포함이었다. 원래는 목탄을 때는 보일러로 움직이는 배였고 광동(廣東)함대 소속인데 북양함대에 연수차 파견된 것들이다. 일본 순양함들이 공격을 해오자 광을의 함교에서는 제원의 마스트를 바라보며 지휘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터무니없게도 제원의 마스트에 올라간 것은 백기였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제원을 따라 넓은 바다로 도망쳐 나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일본 순양함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가망성은 없었다.
광을은 제원과 갈라졌다. 육지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서해안은 간만의 차이가 심하여 대부분 넓은 개펄이 펼쳐져 있고 수심이 완만하고 깊지가 않았다. 광을은 태안반도의 개펄에 올라앉고 말았다.
일본은 요시노와 나니와 2척이 제원을 쫓고, 맨 후미의 아키쓰시마가 광을을 잡으러 왔다.
요시노는 일본 함대에서 가장 속력이 빨라서 22.5노트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영국의 엘직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1년 전인 1893년 10월 5일 영국에서 출발하여 금년 3월 6일에 구레 군항에 도착했으니까 일본 해군이 인수한지 몇 개월도 안 되는 최신형 함이었다.
후에는 2등 순양함으로 분류되었지만 청일전쟁 때만 해도 순양함이나 해방함 같은 함종 명칭은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그냥 중형함이라고 불렀다.
배수량은 4,160톤에 무장으로는 15센티 속사포를 4문, 12센티 속사포 8문을 장비하고 있었다.
반면에 도주하고 있는 청국의 제원은 2천 톤이 조금 넘는 체구에 18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수백 미터에서 2-3천 미터 사이에서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경주를 하고 있는 두 척의 군함에서 4-5킬로 뒤처져 나니와가 따르고 있었다.
나니와의 함교 위에는 도오고오 헤이하치로 대좌가 망원경으로 앞에서 달리는 두 군함을 보고 있었다.
추격을 중지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생각하는 차에 같이 함교에 서있던 부사령이 도오고오에게 10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도오고오의 망원경에 멀리 수평선에 피어오르는 두 줄기 연기가 가느다랗게 보였다.
마스트에 영국의 국기 유니온 잭이 휘날리고 있었다. 영국의 상선이었다. 그러나 그 옆을 따르고 있는 또 한 척의 배는 분명히 청국의 군함이었다.
영국 국적의 상선이라 하더라도 청국 군함의 호위를 받고 있다면 청국의 군대나 보급물자를 수송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아산에 보낼 증원 병력의 제2진 1천1백 명의 병력과 대포 14문을 싣고 조선으로 오고 있던 고승호는 이렇게 해서 제원을 추격하던 일본 순양함들에게 덜미가 잡혀버렸다.
영국 상선 옆의 배는 목제 포함 조강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청국의 군함기와 황룡기가 펄럭이고 있는 것이 망원경에 잡혔다. 도오고오는 점멸 신호로 정선할 것을 명령했다. 영국 상선은 정면에서 다가오는 일본 순양함의 정선 신호를 받고 배를 멈추었으나 청국 군함은 뱃머리를 틀었다. 도오고오는 뒤따르던 아키쓰시마에게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조강을 추격하라고 지시하고 보우트를 내렸다.
고승호를 버려두고 되돌아 도망쳤던 포함 조강도 뒤쫓아 온 아키쓰시마에게 포획 당해 일본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청일전쟁의 서전이라 할 수 있는 풍도 앞바다 해전은 이렇게 일본 해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러일전쟁,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진주만 기습까지 거듭 되풀이되는 일본의 선제 기습의 효시였다. 일본 해군은 언제나 선전 포고보다 앞서는 기습 공격으로 전단을 여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이 일본군의 특기?)
풍도 앞바다 해전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운이 좋았던 것은 제원호 뿐이었다. 천신만고 구사일생으로 요시노의 추격을 떨치고 여순항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제원은 뒤이어 벌어진 황해해전에서도 제일 먼저 도망쳤다가 방백겸은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일본이 청국에 대하여 정식으로 선전을 포고한 것은 풍도 앞바다에서 이미 포탄을 주고받은 지 엿새나 지난 8월 1일이 되어서였다. 선전포고보다 먼저 천진의 북양대신겸 직례총독 이홍장에게 전해진 것이 픙도앞바다의 해전과 고승호 침몰의 비보였다.
1천명의 병사들이 총 한발 쏘아보지 못하고 바다의 원귀로 희생된 고승호의 참극은 쉬쉬되는 가운데
북경은 광서제의 탄생을 측하하는 연회가 성대하게 베풀어지고 있었으며,
정부의 고관들은 영수궁(寧壽宮)에서 상연된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이홍장은 홀로 고뇌에 빠져들었고,
증원군을 기다리던 아산의 청국군은 침통과 비탄에 잠겨들었다. 고승호가 운반하던 14문의 대포야말로 조선에서의 싸움에 없어서는 안 될 무기였다. 아산에 주둔 중인 청국군이 보유한 대포는 고작 여덟문 뿐이었다.
고승호의 침몰은 조선에 와있던 청국군에게 이 8문의 대포만을 가지고 일본군에 대적해야 한다는 절망적인 현실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풍도앞바다 해전의 소식이 전해진 일본 열도는 축제분위기로 들끓었다. 일본의 신문들은 하나같이 청국 군함의 선제 포격을 받고 일본 측이 응전한 것으로 보도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3년 전인 1891년 7월에 청국의 북양함대가 친선차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일본 국민들은 북양함대의 제독 정여창이 이끌고 온 청국함대의 위용을 부러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청국이 북양함대를 나가사키, 고오베, 요코하마 등 일본의 주요 항구를 순방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력시위였고 해군력의 과시였다.
승전에 환호작약하는 시중의 분위기와는 달리 전문을 받은 무쓰 외상은 고승호 격침 소식에 떨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영국 국기를 단 영국국적의 선박을 일본 군함이 포와 어뢰를 발사해서 격침시켰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토오 히로부미는 오히려 냉정하게 침착을 유지했다. 무쓰의 건의를 일축해버린 이토오는 흔들림 없이 예정된 후속조치들을 실행해 나갔다.
일본은 청일전쟁 개전 시점까지도 구미의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다른 열강들과 이런 불평등조약을 맺고 각종 이권을 수탈당하고 있던 청국조차도 일본에서는 다른 열강과 마찬가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일본 내에서 외국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재판권은 주재국에 있었다. 이런 불평등조약의 개정은 일본국민의 열망이고 염원이었다.
당시 이토오 내각이 궁지에 몰려있던 이유도 조약개정의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데 큰 이유가 있었다. 가까스로 10만이 넘는 근대적 군대와 50척이 넘는 신식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제국주의의 정점에 올라있던 구미의 열강과 비교해 보면 아직까지도 어른과 어린아이의 격차가 있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이 5대강국의 어느 한 나라라도 작심을 하고 간섭을 하려들면 일본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때문에 청일전쟁은 무슨 수를 쓰서라도 이들 열강들의 간섭이 배제된 채 오로지 청국과 일본의 1:1 싸움이 되어야 했다. 청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개입을 이끌어내서 전쟁을 막으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고, 일본 외상 무쓰는 반대로 조선 문제에 관한 열강의 무관심과 불개입을 얻으려고 노심초사를 해왔던 것이다. 러시아는 조선과 만주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영국의 단호한 저지에 막혀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거문도 사건이 대표적인 러시아의 좌절이었다. 러시아는 실력으로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영국은 말을 갈아타고 있는 중이었다. 영국은 점차 극동에서의 동맹자로서 일본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영일조약개정은 일본에 주는 영국의 선물이었다. 그런 차제에 고승호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무쓰로서는 십년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판이었다. 해양제국 영국의 힘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극동함대가 일본 해군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다.
무쓰의 우려대로 도오고오에 의한 고승호 격침 사건은 영국의 조야를 들끓게 했다. 영국이 기존의 불개입 정책의 고수 여부를 재검토할 정도로 심각한 외교적 문제로 비화했다.
그러나 영국해군 참모부의 생각은 영국 극동함대의 실력이 일본 해군에 맞설 정도의 수준이 못 된다는 점 때문에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으로 기울어 있었다.
영국정부는 리챠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중해와 인도의 예비함대에서 순양함 5척을 빼내 극동함대를 증강하였으나, 강경대응방침은 철회하고 종전대로의 불개입정책으로 돌아섰다.
이홍장도 전쟁에 서툰 사람이 아니었고, 전쟁의 대비에 태만하지도 않았다. 고승호의 증원병력이 도착하기만 했더라면 조선 내에서의 전력은 최소한 대등할 수 있었다. 병력은 여전히 적었겠지만 고승호로 보내려던 14문의 대포는 포병의 화력에서 청국군이 압도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증원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이홍장이 내릴 수 있는 지시는 '철수'뿐이었다. 그러나 제독 엽지초와 총병 섭사성은 해로에 의한 철수를 거부했다.
그리고 섭사성이 2천명의 병력을 가지고 북상해서 성환의 월봉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엽지초는 나머지 1천5백 명의 병력으로 공주에 2차진지를 준비했다.
진지를 점령하고 기다리고 있는 청국군의 코앞에 일본군이 모습을 나타낸 것은 7월 29일이었다. 일본군은 보병 4개 대대, 기병과 공병 4개 대대로 모두 8개 대대의 병력과 야포 8문을 가지고 공격을 개시했다.
양군의 비교에서 특히 차이가 크게 난 것은 바로 소총이었다. 일본은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고 정확하기로 유명한 무라타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훗날 일본군의 제식소총으로 오랫동안 사용된 38식의 원형이 되는 물건이다.
무라타 소총의 발명자인 무라타 쓰네요시(村田經芳)는 1838년생으로 싸스마번 출신으로 막부 시절에 이미 소총에 대한 관심이 많아
1875년 소령 때 세계 각국을 돌면서 소총과 그 생산 공장들을 돌아보고 온 후에 1880년 일본 최초로 근대적인 유저식(遊底式) 소총을 발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13년식 무라타 소총이라는 것으로 구경은 11mm에 길이는 129.4cm인 단발총이었다. 이 총은 출현 당시의 기준으로 세계 1류의 물건이었다.
무라타 소총이 개발되기 1년 전에 프랑스에서 무연화약(無煙火藥)이 발명되었고 그 2년 후부터 일본은 이것을 소총탄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포병회의연구실에서 국산화에도 성공하였다. 무연화약 이전에는 총의 발사시에 흰연기가 쏟아져 나와 사수의 시야를 가렸고, 흑색화약에 함유된 유황이 총강 내에 쌓여 몇 발을 발사하고 나면 반드시 꼬질대로 총강내부를 청소해야만 했다. 이것이 연발소총을 만들지 못한 주된 이유였다.
무연화약이 발명되자 무라타는 바로 소총의 개량에 착수해서 메이지22년인 1889년에 마침내 연발소총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탄환의 최대 비거리가 2,200m에 달했다.
반면에 청국군은 소총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미국제 앤필드 소총, 독일제 드라이제 소총, 모제르 소총 등 각국의 다종다양한 총기류가 혼재되어 있었다.
일본의 순양함 나니와는 수십 발의 포탄과 수발의 어뢰로 1천명의 병력과 14문의 대포, 그리고 막대한 탄약과 식량, 자금을 깨끗하게 전멸시킨 셈이었다.
만약에 육지에서의 전투로 비슷한 전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 수백 배, 수천 배가 넘는 물자와 병력을 희생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해상에서의 적 보급선의 파괴가 얼마나 경제적인 전쟁수단인지 잘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해상에서의 보급의 저지는 육전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단 한발의 어뢰가 수만 발의 포탄보다 더 큰 전과를 올린 예는 이후의 전사에도 무수하게 등장한다.
훗날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은 태평양 곳곳에 산재한 점령지에 증원군과 물자를 보내지 못함으로써 패망하게 된다. 미해군의 잠수함들에게 격침당한 일본의 수송선들에는 그것들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전쟁의 승패를 바꾸었을 병력과 물자들이 실려 있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전쟁에서 승패의 열쇠는 예로부터 변함없이 제해권이었다.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진 것도, 당태종이 비참하게 도주하게 된 이유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군이 결국 전멸하고 만 것도, 몽고가 고려를 끝내 없애지 못한 것도, 임진왜란에서 왜군이 쫓겨 간 것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것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진 것도, 한국전쟁에서 중공이 결국 이기지 못한 것도 모두 제해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해 바다를 보급로로서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해군력을 가졌더라면
수양제도, 당태종도, 몽고군도, 청국군도, 러시아군도, 중공군도 그렇게 고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를 낀 동북아시아의 전쟁에서 서해바다를 확보하지 못한 나라가 전쟁에 이긴 예가 없다.
성환전투의 승패는 청국군과 일본군이 월봉산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 전에 풍도앞바다에서 결정나버린 것이나 진배없었다. 성환 전투는 이미 나 있는 승패를 확인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시마 여단은 6월 9일 인천항에 내린 후에 본국으로부터의 추가적인 보급은 받지 못한 채였다. 식량과 잡자재는 조선에서 구입하여 충당했으나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소모가 심한 탄약은 조선 내에서 조달이 불가능한 품목이었다.
대원군을 앞세워 무력으로 급조해낸 조선정부는 기대했던 만큼 협조적이지 않았고, 지방 관청이나 조선 민중들에 이르면 노골적인 반감에 부딪혔다. 노무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청일전쟁 초기에 한해서는 조선은 상하가 모두 청국편에 더 가까웠다.
조선민중이 일본군에 대한 적의를 약간 누그러뜨리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다름 아니라 성환에서 지고 평양까지 도주하게 된 청국병들이 그 과정에서 보여준 추태와 난동 그리고 민중에 대한 행패였다.
어쨌건 오시마 여단은 청국군을 추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회두하여 8월 5일에 다서 서울에 들어섰다.
엽지초와 섭사성은 조선 지도를 펴놓고 평양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손가락을 짚어가며 철수로를 정했다. 공주에서 출발하여 청주로 갔다가 진천, 괴산, 충주로 가서 남한강 지류를 건넌 다음에 제천, 원주, 홍천, 춘천, 화천, 금화, 평강, 이천, 수안, 상원을 거쳐 평양이 보이는 대동강 남안에 도착한다는 장대한 우회기동계획이 세워졌다. 도상 직선거리로 얼추 400km가 넘는 이동이었다.
그들이 걸어야 할 길은 우마차도 다닐 수 없는 들길, 산길이 대부분이었고,
제대로 된 다리가 놓여 진 곳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조선 사람들은 우마차를 이용하지 않고 대부분의 운송을 사람이 등에 지는 지게에 의존하여 해결했다.
조선시대에 큰 길을 만들지도 않고 우마차를 운송에 쓰지 않은 이유는
역대 중국왕조가 조선에서 나는 말을 가혹하게 공물로 뺏어가 버렸기 때문에
고려시대 이후에 조선에는 말이 귀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소는 수송용이 아니라 주로 경작용에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다음 이유로는 국방상의 이유로 일부러 길을 크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진란 이후에 더욱 강화된 이 방침은
조선에 침입한 외적에게 병참상의 불편과 고통을 주기도 했지만
방어하는 조선 자체도 역시 불리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가는 데도 실패하고
더 남쪽의 지원군에도 이르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가서 포위된 것도
열악한 도로사정 때문이었다.
성환 전투의 승리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은 다시 한번 열광했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화제는 '나팔수의 미담'이었다.
돌격 나팔을 불던 나팔수가 죽어서도 나팔을 입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는
이 무용담은 감격하기 쉬운 일본인들을 집단적인 희열상태로 몰아넣었고,
일부 신문들은 이와 비슷한 용감무쌍한 일본군의 전설들을 지어내는데 광분하고 있었다.
물론 '나팔을 입에 물고 죽은 나팔수'의 이야기도 일본군 지휘부에서 지어낸 이야기였다. 이와 같은 무용담으로 일반 국민들을 감동시켜 전쟁의 슬픔을 잊게 만드는 일본군의 상투적인 선전술은 이때부터 벌써 간교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훗날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만들어 낸 상해전투의 '폭탄 3용사' 같은 전설이 바로 그렇다.
이홍장과 청국정부는 일본과 같은 날인 8월 1일에 일본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했으며, 그 이틀 후에는 성환 전투의 승전보를 황제께 상주하여 상금까지 하사받았다.
8월 2일에서 3일에 걸쳐 공주를 출발한 엽지초의 부대는 20여 일 동안이나 소식이 끊겼다가 8월 22일이 되어서야 평양에 나타났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대병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1만 명도 안 되는 오시마 여단이 한성에서 성환까지 이동하는데도
보급문제 때문에 쩔쩔맸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북양함대가 건재한 이상 일본은 해로를 통해 조선의 서해로 보급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부산에 상륙해서 육로로 평양까지 북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조선에는 단 한 가닥의 철도도 놓여있지 않았고, 도로도 없으며, 조선 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여러 강에는 단 한 개의 교량도 서있지 않았다.
워털루 전투는 웰링턴보다는 나폴레옹에게 더욱 많은 승리의 가능성과 기회가 있었던 전투였다. 나폴레옹에게 부족한 것은 인재였다. 그리고 운이었다.
청일전쟁의 이홍장에게도 이 두 가지가 없었다. 청국이 비록 쇠퇴의 기색이 역력한 말기의 제국이었으나 온 나라의 힘을 모아 임한다면 일본에 대적치 못할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일본의 승리를 쉽게 예상하지 못했고 조선 정부도 양쪽의 눈치를 살피면서 함부로 거취를 정하지 못하였다.
[조선의 발버둥]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대원군이 일본군 축출을 계획할 때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과의 협조를 꾀했다.
교전 중이던 청이나 내정개혁을 강요받던 조선측 입장에서 보면 상부상조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을 국제적으로 여론화하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
그는 이미 청과 일본이 출병했을 때
러시아의 개입을 예견했을 정도로
러시아의 조선지배 야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러시아측과 접촉하여 러시아를 통한 일본견제를 꾀하였다.
그렇치 않아도 러시아는 은밀히 청·일을 중재하고 있었고
3국협동론을 제시하여 조선에 관여할 의사를 비쳤었다.
별로 소득이 없었지만 대원군은 러시아 외에도
영국이나 미국과도 외교접촉을 시도하였다.
영국도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역시 드러나지 않게 중재를 시작했는데
이때의 중재안은 청과 일본이 조선을 분할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결전장을 어디로 하느냐?]
엽지초는 평양 전투도 승산이 없다고 보았으며, 시종일관 압록강 이북으로의 후퇴를 주장했다. '결전은 만주에서...'라는 것이 엽지초의 전략이었다. 그의 구상대로 청국군이 평양에서 철수해서 심양이나 봉천 정도에서 일본군을 요격했다면 청일전쟁의 양상은 훨씬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고, 실제보다는 훨씬 청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청국이 그런 전략으로 나왔다면 일본군은 그야말로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평양까지의 진격만으로도 일본군의 보급능력은 한계상황을 보였으며, 평양전투는 실제로 일본군의 탄약 고갈로 질 뻔 했던 전투였다.
심양이나 봉천이라면 일본군의 보급사정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압록강 해전에서 북양함대가 패하는 일도 없었을지 몰랐다. 이홍장이 조선에 출병한 군대의 병참과 보급 임무를 맡긴 원세개와 주복은 겨우 산해관까지 나와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후근사령부와 전선인 평양 까지는 요동 천리의 거리가 있었다. 평양은 청국과 일본의 보급의 균형점이었다. 어느 쪽이 더 유리하다 말할 수 없는 중간지대였다. 병력과 물자의 집결 능력으로 본다면 평양에서의 결전은 오히려 청국에 불리하였다. 만주나 요동이라면 사정은 바뀔 수 있었고 청국은 당연히 그런 전략으로 나가야 했다. 엽지초의 부전퇴각(不戰退却)론은 전략적으로 그리고 순수하게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전쟁을 모르면서도 대국으로서의 자존심만 내세우며 실력을 돌아보지 않은 비분강개와 허장성세만이 능사이던 청국의 조정대신들이 이를 용인했을 리도 없고, 막하의 장수들부터가 이에 따라오지 않았다.
[일본이 왜 조선땅에 경부선 등의 철로를 깔았는가?]
일본은 할 수 없이 제5사단의 잔여부대를 부산에 상륙시켰다. 대마도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부산항까지야 북양함대가 나타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엽지초의 청국군이 공주를 출발해서 평양을 바라보며 걷고 있던 같은 시기에 일본군 제5사단은 부산에서 한성까지 천리길을 걸어야 했다. 엽지초군과 일본 5사단의 행군거리는 비슷했고, 지형과 기후조건도 다를 바가 없었다. 8월의 타는 듯한 뙤약볕 아래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양국의 병사들은 조선땅을 헐떡거리며 걸었다. 옛날 조선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갈 때 짚신 몇 켤레와 괴나리봇짐을 울러 메고 터벅터벅 걸어갔던 그 길은 사람의 두 다리로 걷는 경우 외에 바퀴달린 물건이 지나갈 것은 고려해 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길은 조금 넓어졌다가도 얼마 못 가서 마차 한 대도 지나갈 수 없는 소로에 이어졌고, 비가 오면 다져지지 않은 길은 쉽게 무너지고 패여 버렸다. 평지의 논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어느덧 숲이 우거진 산속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숲을 벗어나면 산을 감고 도는 위험하게 가파른 곳을 지나게 되었고, 구름도 쉬어 갈만큼 높은 재가 연이어 나타나기도 했다.
병사들은 개인 소지품을 운반하는 외에도 포탄을 걸머지고 걸어야 했고, 몇 발짝 걷다보면 장교의 호루라기가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도로에 빠진 대포를 끌어내고, 마차를 가로막는 나무를 베어 넘기고 바위를 치우고, 좁은 길을 넓히는 일에 동원되었다. 강을 만나면 병사들을 풀어 배들을 징발해야 했는데, 조선배들은 그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부교를 가설하는 일도 쉽지 않았고, 뱃사공이 도망을 가버려서 찾을 수 없는 일도 흔했다. 부교를 놓거나 노를 저어 강을 건너는 일도 쉽지 않은 노역이었다.
부산에서 북상하는 제5사단의 고초를 전해들은 일본지휘부는 나머지 병력을 원산에 상륙시켜 평양에 보낼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부산에서 한성까지의 행군과 보급이 난사(難事)였던 때문이다.
8월 하순에 접어들자, 일본군은 청국군의 속셈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북양함대는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고, 평양의 청국군은 결코 남하해 오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야마가타 대장은 부산과 원산으로 보내려던 제3사단 병력을 인천으로 보내기로 단안을 내렸다. 약간의 모험이긴 했으나 북양함대가 인천 가까이 출격하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야마가타는 직접 인천에 상륙하는 3사단 병력을 실은 수송선에 함께 올랐다.
동시에 야마가타는 본국의 정부에 1만 명의 노무자를 모집해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보급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평양 전투는 이 노무부대가 시간에 대지 못하여서 고전을 피할 수 없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일본이 제일 먼저 서두른 일이 바로 조선 땅에 철도를 놓는 것이었음은 이때의 뼈저린 체험에서 나온 일이었다. 조선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은 청일전쟁이 끝난 2년 후인 1897년에 착공된다. 일본은 조선에 신작로를 닦고, 철도를 부설하지 않으면 조선 경영은 물론 만주에서의 권익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이 전쟁을 통해 절감했던 것이다. 일본의 대륙 침략에 있어서 최대의 장애물이 바로 조선의 열악한 교통이었고, 낙후된 인프라였다.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의 대륙침략에 있어서 최우선의 선결과제였다. 청일전쟁은 일본에게 무엇이 시급한 일인지를 가르쳐준 교사였다.
[이 문제는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될 북한의 철로사정이 좋지 않다는 점도 앞으로의 한반도발전에 장애물이 되고 있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청국도 말기에 이르러 부패와 무능이 심화되자, 차별받아온 한족의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 아니라 이홍장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청나라의 조정은 일본과의 전쟁을 이홍장에게 밀어버리고 내심 지기를 바라는 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홍장은 한족(漢族)이지 만주족(滿洲族)이 아니었다.
만주족은 같은 유목민인 몽고족(원나라)과 마찬가지로 군사국가였다. 전 국민이 다 군대였다. 만주족은 누구라도 팔기군(八旗軍)의 어디엔가 소속되어야 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팔기군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의병을 모아 태평천국군을 무찌르고 만주족의 왕조를 지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족(漢族) 출신의 의병장들이었다. 이들이 곧 증국번과 이홍장이다.
태평천국의 난이 끝나고 증국번이 사망하자 자연히 중국천하의 군권(軍權)이 이홍장 일인에게 쥐어졌다. 말하자면 실력으로 천하의 일인자가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회군은 중국의 군대가 아니라 이홍장 개인의 군대였다. 이홍장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해군인 북양함대도 이홍장의 개인재산이었다. 만주족의 나라 청국은 한족 실력자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한족국가의 부활이라는 염원은 이즈음부터 혁명의 기운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이홍장은 사방에 일본과의 전쟁에서 지기를 바라는 세력에 둘러싸여 외로운 전쟁을 해야만 했다.
일본의 언론들이 '나팔수의 미담'을 연일 만들어내면서 일본국민들을 전쟁의 광기에 도취시키고 있을 때
중국의 인민들은 이 전쟁에 거의 무관심하였다.
중국의 젊은 혁명가들은 '이 전쟁에서 이홍장이 져야 한족 국가를 다시 세울 기회를 앞당길 수 있다'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속삭이고 다녔다.
오히려 청국의 편은 조선이었다.
조선 정부는 그래도 대국 청나라의 힘을 어느 정도 믿고 있어서,
일본의 강압 아래에서도 은밀하게 청국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양의 청군 진영에는 일본군의 동정을 알려주는 밀사가 보내졌으며,
국왕의 밀서가 도착하기도 했다.
평양의 청국군 지휘관들은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사실상 조선 정부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청국이 해군을 확충하지 못한 이유는 한가지뿐이었다.
서태후의 환갑잔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해군의 예산을 호부(戶部;재무부)가 전용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청국의 해군은 일본해군보다 월등히 우세했다.
일본의 연합함대가 28척의 군함과 24척의 어뢰정으로 총 5만9천69톤이었던데 반해,
청국은 64척의 군함, 24척의 어뢰정으로 총 8만4천톤에 달했다.
이 해군은 북양(北洋)함대, 남양(南洋)함대, 복건(福建)함대, 광동(廣東)함대의 4개의 함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 이홍장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북양함대 뿐이었다.
물론 4개의 함대 중에 북양함대가 제일 강해서 군함 25척, 어뢰정 3척에 총 5만톤의 세력이었다. 특히 당시 아시아 최대의 군함인 정원과 진원이 북양함대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청국의 나머지 3개 함대는 이 전쟁에 동원되지 않았다. 만약에 청국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했다면 일본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상대는 청국이 아니라 이홍장 1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방이 정적으로 둘러싸인 고독한 노인이 신흥 일본제국의 첫상대였다. 노인의 손에는 5만톤에 가까운 근대식 함대가 있었고 세계 일류의 군함이 두 척이나 있었지만 노인의 손에는 두 군함의 포탄이 합계 3발뿐이라는 보고서가 들려있었다.
정원과 진원의 포탄을 구입할 예산은 서태후의 만수절 경비로 쓰여지고 말았다.
"이래서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북양수사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받아 쥔 이홍장은
해군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육전에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리고 그 동안에 열강의 도움을 끌어내어 전쟁을 끝내야 한다"
그러나 이홍장은 해군의 불비에 대한 이유가
서태후의 환갑잔치 때문이었다고 황제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휘하의 부하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없었다.
이홍장은 상주문에 모든 책임과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고 썼다.
그리고 북양수사에는 출동을 명령했다.
한편 일본은 8월 20일에는 조선과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을 체결하여,
오오토리 공사가 조선정부에 요구했던 내정개혁과 조선의 철도, 전신을 일본의 자금과 기술로 부설하는 것에 대한 조선정부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어 동월 26일에는 '대일본·대조선 양국맹약'이라는 것을 체결했다. 역사상 최초의 한일동맹조약이다. 이것으로서 조선과 일본은 동맹국이 된 것이다.
이홍장이 북양함대를 대련만에 집결시키고 있던 시기에 일본 역시 전함대를 사세보항에 모으고 있었다. 3개 함대를 하나의 함대로 결집하여 그것을 연합함대라 불렀다.
[평양전투]
대동강 남쪽에 겨우 도착하여 평양성을 보게 되었을 때, 일본군 제5사단은 보급품이 죄다 소진되어버린 상태였다. 특히 식량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조선은 모든 논이 추수직전이었다. 벼는 아직 익지 않아서 진군해 오는 도중의 들판마다 황금물결이 출렁이고 있었지만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때가 바로 조선의 농가들에 식량이 극도로 부족한 시기였다. 돈을 주고 매수하려고 해도 조선천지에 쌀이 없는 시기였다.
농가를 뒤져봐야 감자 몇 알 나오면 다행이었다. 조선은 그만큼 가난했던 것이다. 한성과 부산에서의 급행군 결과 대부분의 부대는 식량과 탄약의 여분을 지참하고 있지 못했다.
9월 13일에 노즈 중장이 참모들을 시켜 조사한 바로는 현재 전 부대의 식량은 이틀분 뿐이었고, 탄약도 개인 휴대량이 전부였다. 야포의 포탄도 행군 도중 많은 부분을 망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속전속결, 이틀 내에 전투를 끝내지 않으면 식량과 탄약이 없는 일본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일본군은 제3사단이 도착한 후에 공격을 해야 했지만 제3사단도 보급사정은 마찬가질 터였다. 3사단 병력이 더해지면 전력이 증강되는 것이 아니라 먹여야 할 입이 더 늘뿐이라고 노즈 중장은 생각했다.
[역사의 반복]
평양성이 요새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은 역사상 딱 두 번 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두 번 다 상대는 중국과 일본이었다.
청일전쟁보다 3백 년 전인 1593년에는 지금과 정반대로
소수의 왜군이 평양성을 의지해서 가망 없는 방어전을 하고 있었다.
왜군의 사령관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평양의 왜군은 모두 1만5천명으로 훗날 엽지초의 청국군과 비슷한 규모였다.
공격하는 조선·명나라 연합군은 조선군 1만 명과 명군 4만5천명, 도합 5만5천명의 대군이었다.
청일전쟁의 평양전투가 한여름에 벌어진 것과 달리
임진란의 평양전투는 가장 혹한기인 1월 6일부터 9일까지의 사흘 동안 벌어졌다.
청일전쟁의 경우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 동안 벌어졌다. 공방전의 기간도 똑같다.
임진란 때는 대동강이 꽁꽁 얼어있었기 때문에 해자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반면에 그랬기 때문에 왜군이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달아날 수 있었기도 하였다.
여름이었다면 유키나가는 평양성에 뼈를 묻어야 했을 것이다.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북·서·남의 세 방면에서 포위하고
얼어붙은 대동강 쪽은 일부러 비워두었다.
왜군이 탈출할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둔 것이었다.
조명연합군의 공격이 사흘째 계속된 끝에 평양의 왜군은 결국 도주하게 된다.
3백년 후에 벌어진 청일전쟁의 평양전투는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었을 뿐,
임진란의 그것과 판박이 같은 재현이었다.
15일 새벽 동이 터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주공은 성의 북문 쪽이었다.
기도비익을 위해서 일본군은 이동 중에 눈에 띄는 조선인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구금했다. 때는 가장 논에 일손이 필요한 늦여름이었다.
새벽부터 들에 일하러 가던 농민들도 체포되었고, 그 속에는 조선 농민으로 위장한 청국군의 첩자도 있었고, 청국군에 고용된 조선인도 있었다.
강을 건널 배를 찾고 있던 일본군은 배를 숨긴 조선인이나 도강에 협조하지 않는 조선인들도 청군의 간첩으로 체포했다.
15일 아침 날이 밝자 평양성 주변의 조선인들은 높은 나무에 목대달린 동네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비협조적인 조선인에 대한 엄포였다.
도산이 16세 되던 해인 1894년은 동학농민혁명운동과 청일전쟁 등으로 혼란할 무렵이었다. 청일전쟁 당시 도산은 평양에서 전투가 벌어져 주민들이 피난하고 명승고적들과 가옥들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때 도산은 우리 민족의 불행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중간 생략]
노즈 중장은 사또오 대좌의 전령을 앞에 두고 퇴각을 결심하고 있었다. 분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탄약을 다 소진한 부대를 가지고 전투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성문이 열리고 성안으로 돌입한 순간에... 천우신조는 일본을 저버리시는가..." 노즈는 참담하여 한동안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각하..." 사또오의 전령이 명령을 재촉했다. 노즈가 고개를 들었다.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진막 밖에서 사관이 뛰어들었다. "평양성에 백기가 올랐습니다." 노즈와 막료들이 후다닥 뛰어나갔다. 과연 대동문 높이 백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노즈는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항복하려는가..." 어리둥절한 5사단 지휘부의 눈앞에서 대동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기슭에 묶여있던 나룻배에 몇 사람인가가 올라타더니 뱃전에 백기를 걸었다. 평양성의 사자는 뱃머리에 백기를 달고는 노를 저어 건너오기 시작했다.
엽지초는 자기가 백기를 걸고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사격이 멈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탄약이 고갈되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던 엽지초의 입장에서는 달리 생각할 도리도 없는 일이었다. 일본군 사절은 말하자면 망통 패를 들고 공갈을 친 셈이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하나 더 알고 있다. 훗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에 벌어졌던 싱가폴 공략전이 그것이다. 영국의 싱가폴 요새의 막치치 저수지 동남방에 있는 BMBC 방송국 옥상에 백기가 펄럭인 시간은 1942년 2월 15일 오후 3시경이었다. 약 3시간 40분이 지난 6시 40분경에 영국 말레이시아 주둔군 사령관 A.E.파시발 중장과 일본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가 마주 앉았다. 파시발은 야마시타에게 "항복 조건을 협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에 야마시타는 책상을 치며 "예스까, 노오까?"하고 눈을 부라렸다. 잠시 후 파시발은 고개를 떨구며 "예스."하고 대답했다. 영국이 아시아에 건설한 최고의 요새 싱가폴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때 야마시타는 겨우 3만명을 가지고 싱가폴을 공격하고 있었고, 파시벌은 영연방군 13만 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청일전쟁 때의 노즈군과 마찬가지로 식량이 부족해서 한 공기의 밥을 하루에 두 번 먹는 것으로 버티고 있었다. 탄약이 없어서 일본군 포병은 더 이상의 지원사격을 해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퍼시발이 조금만 더 대담했다면 일본은 싱가폴에서 큰 패배를 당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노즈처럼 야마시타는 공갈로 나갔고 엽지초처럼 퍼시발은 그것에 굴복했다. 공교롭게도 이때 싱가폴을 공격했던 선두의 사단이 역시 제5사단이었다.
엽지초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온 일본군 사절에게 제안한 것은 "즉각적인 휴전과 청국군의 안전한 철수의 보장"이었다.
"명예로운 철군"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본군 협상사절은 청국군이 내어준 배를 타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는데, 노를 맡은 일본군 사병은 너무나 느리게 배를 몰았다. 수만 명의 군대가 총포로 노려보는 전장의 한가운데를 마치 술 취한 이백이 노 저으며 시를 짓기나 하듯이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움직여 갔다. 그 모습은 마치 청국군에게 "이때 빨리 도망가라"고 암시를 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암시였다. 일본군 사절은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속으로 청국군이 도망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 만약에 청국군이 도주하지 않으면 일본군은 다시 공격해야 하지만 일본군에는 남아있는 탄약이 없다는 것을 사절은 잘 알고 있었다.
똥패를 가지고 공갈을 친 것이 먹혀주기를 빌고 또 빌면서 사절을 태운 배는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대동강에 저녁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당시에는 해가 지면 전투도 끝내는 것이 상식이었다. 일본군은 총알이 없어서 더 이상 싸우지 못한다는 것을 들키지 않고 그 날을 넘겼다. 일본군은 전 부대의 탄약을 모아서 평양성 서북의 별동대에 넘겨주었다. 보통강변에 도착한 별동대는 탄약을 어느 정도 소지하고 있는 채였다. 노즈는 두 별동대에 퇴각하는 청국군을 요격하라고 명령했다.
청국군은 이날 밤에 2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3백 년 전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을 탈출하면서 입은 손실이 꼭 그 정도였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어서 반복된다.
북양함대가 대련만을 나선 시각은 평양성을 탈출하는 청국군과 이를 쫓는 일본군의 추격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9월 15일의 밤이었다.
청일전쟁의 양상은 일본군의 공격이 빠른가, 청국군의 증원이 빠른가 하는 평양에의 경주라는 양상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증원에서 계속 간발의 차이로 일본이 앞서 나가고 있었다.
마치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이 카드 게임을 하는데 연거푸 한 끗발 차이로 이홍장이 계속 눌리는 흐름을 보인 것이었다. 아산에서의 증원도 반나절 차이로 고승호가 덜미가 잡혀 때를 놓쳤고, 평양전투에도 결국 증원군을 제시간에 대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북양함대의 포탄은 독일에서 사와야 했다. 이홍장이 개전 후에 가장 다급하게 매달린 일이 바로 포탄의 구입이었다.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돈을 크룹사에 지불하여 200발의 12인치 포탄을 겨우 시간 내에 도착시켰던 것이다. 이것을 두 군함에 나누어 싣는 작업에 꼬박 하루가 소요됐다.
북양함대는 무연탄이 아닌 만주산(滿州産) 석탄을 연료로 써서 특히 연기가 짙고 검었다. 그래서 북양함대는 맑은 날에는 4만미터 밖에서도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아편전쟁과 청불전쟁에서 청국의 목제 정크선으로 이루어진 수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신식함대에 상대가 되지 못했으며 말 그대로 궤멸되고 말았다. 그 후 절치부심한 청국은 해군을 건설하기 위하여 국력을 기울인 노력을 경주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 결실의 하나가 북양함대였다.
다만 그 후에 서태후의 회갑이 다가오면서 수년간 해군의 예산이 만수절에 돌려졌으며 해군의 육성은 정체상태에 빠져 최근 6년 동안 새로운 군함을 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해군은 급속하게 실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닥치는 대로 군함을 사들여 함대를 키웠다.
일본해군이 청국해군과 승부를 가려볼만 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청일전쟁이 발발하던 바로 그해부터였다.
갑신년에 개화당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일본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조선을 내어주고 좇겨간 것도 실력에서 중국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일본이 갑오년에는 청국에 대해서 해륙 양면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만큼 커 있었다.
북양함대는 독일의 폴칸 조선소가 주 구매처였고, 일본은 영국의 암스트롱 조선소가 군함를 사오는 곳이었다. 해군의 전술도 북양함대는 독일인에게서 배웠고, 일본은 영국해군을 스승으로 삼았다.
아시아의 두 라이벌이 드디어 자웅을 결할 운명의 시간은 눈앞에 다가왔고, 세계의 모든 해군의 눈이 서해바다에 쏠려 있었다.
압록강 해전이야 말로 양 편이 모두 동력으로 움직이고 전체가 강철로 만들어진 철갑함이며, 순수하게 화포에 의한 교전으로 시종한 세계최초의 근대적 해전이었다. 당연히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군함에 의한 해전이 벌어질 경우 어떤 진형을 택해야 하며,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교전을 해야 하며, 함대의 속도는 어느 정도라야 하는가 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정답을 알고 있지 못했다. 해전교리는 다만 이론으로서만 제시되고 있을 뿐, 실전에서의 검증은 어느 것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북양함대의 출동은 그런 점에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장도였다.
당시의 서해바다에는 청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열강들 모두가 관전(觀戰)을 이유로 군함을 파견하고 있었다.
최초의 연합함대 사령관은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중장은 북양함대와의 결전에 사용할 주력함 10척만을 추려내어 이들을 9월 16일까지 황해도의 척백곶에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일본함대는 9월 16일 낮 동안 척백곶의 그늘에서 집합을 완료하고 각 함장들이 마쓰시마의 사령실에 모여 북양함대를 찾기 위한 초계일정을 숙의하였다. 각 함에 탑재할 수 있는 석탄의 양으로 볼 때 가능한 작전일수는 일주일 정도였다.
곶을 빠져나온 일본함대는 방향을 북쪽으로 틀었다. 1차 초계목표지점은 압록강 하구의 남쪽에 있는 해양도(海洋島)였다.
그 시각 북양함대는 압록강 하류 대동구에 병력을 양륙하고 한가로이 쉬고 있었다. 이들이 압록강 하구에 도착한 것은 정오경이었으며 육군병력의 양륙은 오후 중에 끝나 있었다. 한반도의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해안의 수심이 매우 얕았다. 때문에 북양함대의 주력함들은 바다 멀리 닻을 내린 채 길게 늘어섰고, 몸집이 작은 포함과 어뢰정들, 그리고 각함의 단정들이 병력을 싣고 대동구의 포구 안까지 들어가 병력을 풀었다. 북양해군은 여기서 평양 전투의 패보를 접했다. 또 한발 늦은 것이었다.
대동구에 상륙한 명군은 평양으로 가려던 방향을 바꾸어 구련성을 바라보고 행군했다. 다시한번 아군의 패배를 전해들은 청국의 병사들은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에 한기를 느끼면서 압록강의 둑방을 따라 질척질척 걸어갔다.
북양함대의 행동범위는 산동등대로부터 압록강 하구를 잇는 선 안으로 제한되었다. 이홍장은 북양함대 만큼은 최후의 순간까지 보존할 생각이었다. 일본함대가 북양함대의 소재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북양함대 역시 일본함대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정여창과 이토는 이날 아침 자신이 불과 3시간 거리 안에 적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다소 한가로운 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연합함대가 1차 초계 목적지인 해양도에 도착한 것은 17일 새벽이었다. 해양도 그늘 아래 잠시 닻을 내린 연합함대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진형 연습을 한차례 하고 해양도를 떠날 생각이었다. 같은 시간 대동만의 북양함대는 출발준비로 부산하였다.
[해양도 인근의 일본해군이 청국해군을 발견]
해양도 남서쪽에서 진형연습을 하며 북상하던 요시노의 망루에서 발견한 한줄기 희미한 연기는 대동만을 앞장서서 빠져나오던 진원의 굴뚝에서 나온 것이었다. 시간은 오전 10시 23분이었다.
진원함의 청국해군이 일본함대를 발견한 것은 30분 정도가 늦은 11시경이었다. "남쪽에 연기가 보임!"
이때 북양함대는 아직 전체가 출발을 완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직도 몇 척은 그제서야 닻을 감아올리고 있었고, 일부의 함은 아직 보일러의 압력이 충분히 올라와 있지가 않았다.
일본군도 연기의 정체가 북양함대라는 것이 확인된 것은 최초로 연기를 발견한지 1시간도 더 지난 11시 30분이 되어서였다. 이때 양 함대는 약 20km의 거리에 있었다.
양 함대의 거리가 약 12km 정도로 좁혀진 12시 5분에 이토는 전함대에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일본함대가 단종진을 지은 반면에 북양함대의 각 함에 내려진 진형명령은 횡진(橫陣)이었다. 즉 가로 일열로 늘어서는 형태였다.
청나라 해군이 횡진을 한 이유는 주포2문이 전방을 조준할 수 있게 위치가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정원과 진원의 뱃머리에 장착된 무시무시한 충각(衝角)이었다. 기원전부터 중세까지 변함없이 애용되었던 해전의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적의 배를 들이받아서 부수는 충돌전이었다. 조선수군은 이것을 당파(撞破)라 했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수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비장의 전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배들은 오직 전방에 적을 두고 전방을 지향한 두 개의 회전포탑을 이용해서 사격을 가하면서 돌진하여 마지막에는 충각으로 받아서 깨트리는 전법을 쓰도록 만들어진 배였다. 때문에 정원과 진원의 전투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횡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 해전은 "충각은 역시 시대착오적인 물건이었다"라는 것을 증명해준 해전이 되었지만 그때까지는 이게 현실성이 있는 전법인지, 무용지물인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일본함대의 첫 포탄을 사격한 배는 역시 선두의 요시노였다. 시각은 12시 55분, 거리는 3천 미터였다. 일본 함대는 북양함대의 횡진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각도에서 우현의 포문을 일제히 열었다.
놀랄 만큼 경쾌하게, 고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일본함대에 대해서 정원과 진원이 자랑하던 충각은 무용지물이었고, 북양함대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심정으로 멀어져 가는 일본함대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중략]
이토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망설였다. 다시 되돌아서서 싸우려면 왼쪽으로 한번 더 반전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토의 팔은 크게 오른쪽으로 호를 그렸다. 마쓰시마의 기관이 손상을 입어 증기가 자꾸 새고 있었다. 더구나 후소의 마스트에는 '포탄 없음'이라는 신호기가 올라와 있었다. 후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함이 포탄이 떨어질 직전이었다. 병사들의 체력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할 만큼 했다" 이토는 자신이 지쳤음을 느꼈다. 생사를 가르는 공포 속에서 다섯 시간을 헤매고 다닌 끝이었다. 배도 사람도 기진맥진이었다.
해전의 결산
압록강 해전의 결과는 일본의 판정승으로 드러났다. 청국의 북양함대는 초용, 경원, 치원이 해전이 진행되는 동안에 침몰했고, 양위는 대파 당했고, 광갑은 수면하의 암초에 좌초된 상태였으나 2척 모두 해전 후에 포기되어 총 손실은 5척이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1척도 격침당한 것은 없었지만 기함인 마쓰시마가 정원의 12인치 주포에 직격당해 후부 전체가 크게 파손 당했고, 승조원의 약 3분지 1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으며, 히에이와 아카기가 약간 심한 손상을 입고, 그 밖의 함들은 그렇게 피해가 크지 않았다.
압록강 해전은 나라에 따라 '대동구 해전', '황해해전',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영어권에서는 'The battle of Yaru'라고 부른다. 그런데 10년 후에 벌어진 러일전쟁에서도 러시아의 여순함대와 일본함대 사이에 '황해해전'이 다시 벌어지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압록강 해전'으로 하였음을 밝힌다.
이 해전 이후에 전 세계 해군에서는 충각이라는 것이 영원히 사라졌으며, 횡진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또한 소구경 속사포의 효용성에 의문을 품게 되어 대형 함포의 명중률 향상과 관통력을 높이기 위한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함대의 진형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되풀이 되다가. 후일 러일전쟁에서 실전을 통한 해답을 얻게 된다.
만신창이가 된 함대를 이끌고 모항인 여순으로 돌아온 정여창은 압록강 해전의 시말에 대해 상세한 장계를 이홍장에게 올렸다. 함대의 수석고문을 맡은 하네켄도 여순항의 외국인 조선기사들을 대동하고 군함 한척 한척의 상태를 점검하여 보고했다. 하네켄의 보고는 북양함대의 수리에는 최소 35일 정도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함이 그러했다. 북양함대는 앞으로 35일 동안은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이야기였다.
풍도 앞바다 해전, 고승호의 상실, 아산 전투, 평양 전투, 압록강 해전... 지난 두 달 동안의 전쟁은 말 그대로 연전연패였다. 북양육군은 패잔병을 수습해서 압록강으로 패주하고 있었고, 북양해군은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홍장은 정여창에게 전보를 발신한 후 바로 주복과 원세개한테 보낼 지시문을 써 내려갔다. 당장 급한 일은 평양에서 압록강 쪽으로 쫓겨 오고 있는 육군과 북양함대가 대동구에 양륙한 명군 병력을 수습하여 압록강 일대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일이었다. 패주하고 있는 평양군은 병기와 자재 일체를 버리고 거의 유랑난민과 같은 꼴이라고 한다. 평양-의주간에 조선 민중에 대한 작폐가 극심하다는 보고가 있었고, 조선에서 보내온 항의문도 있었다. 이들을 구해내는 일이 급했다.
청군의 군수지원사령부라 말할 수 있는 전운참(轉運站)이 구련성에 세워진 것은 달이 바뀌어 10월이 되어서였다.
이홍장은 양강총독(兩江總督)인 유곤일(劉坤一)과 자기의 친형인 양광총독(兩廣總督) 이한장(李瀚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띄웠다. "북양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 이홍장은 중국 천하의 실력자들 중에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떠 올렸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편지를 보냈다.
평양성 전투가 끝난 뒤 일본군이 도주하는 청국군을 신속하게 추격하여 북상하지 못한 이유는 보급 때문이었다. 평양성에서 병력의 7분지 1의 손실만으로 청국군이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군의 탄약이 떨어진 것에 도움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압록강해전의 승리는 일본군에게 자유로운 해상이용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제는 한반도의 서해안 전체를 앞마당처럼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로망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한반도를 육로로 종단하는 보급에 매달리지 않고 바로 대군과 물자를 만주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진주한 제1군(제5사단과 제3사단)과는 별도로 만주로 직행시킬 새로운 군을 편성했다. 바로 제2군이었다. 제1사단과, 제2사단, 혼성 제12여단(후에 제6사단으로 증편)의 3개 사단으로 편성하였고 군 사령관으로는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대장을 임명했다. 역시 싸스마번 출신이다.
당시 일본이 보유한 기선의 수는 총 4백17척으로 톤수는 합이 18만1천8백19톤이었다. 그 외에 배라고는 범선이 2백22척에 3만3천톤 정도가 있었다. 이 기선들 중 3분지 1을 일본 우체선이 가지고 있었다. 일본 육군 참모차장인 가와카미 소로쿠는 우체선 건물을 방문해서 우체선 소속의 기선 명부를 가져오게 한 다음에 배의 크기순으로 열 척의 이름에 빨간 점을 찍고, 일주일 내에 히로시마의 우지나항에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그해 10월의 히로시마는 일본이 총동원한 기선들과 전국의 주둔지에서 몰려든 군인들과 물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이 대군이 언제 출발해서 어디로 가게 되는지는 1급 기밀이었으며, 10월에 들어서자 밤을 틈타 한척씩 살금살금 히로시마만을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청나라도 북양 방어를 위해 다급하게 군대와 물자를 동원하고 있었다. 번번이 일본에 기선을 제압당해온 중국이었다. 더 이상 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홍장의 후견인이었던 서태후는 해전 후에 서둘러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하도록 종용했으나, 황제의 측근들은 강경했다.
이홍장의 상주문을 받은 조정은 9월 30일, 노장(老將) 송경(宋慶)을 대일전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송경은 이 결정이 나기 전인 9월 20일에 주둔지였던 여순을 떠나 구련성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철수한 청국의 패잔병들과, 북양함대가 대동구에 내려준 유성휴의 명군과 송경의 의군이 구련성으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독전의 임무와 병참책임을 맡은 주복과 원세개도 구련성에 들어왔다. 원세개는 당시 35세. 팔팔한 장년이었고, 송경은 75세의 노인이었다.
구련성에 도착한 송경이 붉은 단풍에 물든 조선의 산하와 굽이쳐 흐르는 압록강을 성루에서 내려다보며 탄식하고 있던 10월 8일, 영국은 일본 외상 무쓰에게 정전의사를 타진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 속에서 영국은, "열강이 함께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청국이 일본에 전비(戰費)를 배상하는 조건이면 화의할 용의가 있는가"라고 일본에 물어온 것이다. 이 서한을 가지고 무쓰를 찾아온 사람은 신임 주일영국공사 트렌치였다.
영국은 청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바로 행동에 나섰다. 청국의 패배는 영국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았던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의 정보조직은 또 다른 측면의 우려를 보고해 오고 있었다. 바로 하와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혁명가 손문(孫文)이었다. 손문은 이때 청조(淸朝)의 개혁과 쇄신에 대한 미련을 접고 청조타도의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만약에 일본과의 전쟁에 크게 짐으로써 청조가 더욱 약화되고, 한족(漢族)이 주도하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은 영국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은 청일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한 국제적인 협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트렌치가 일본에 부임하기 직전인 10월 5일에, 미주와 유럽의 여러 나라에 대해 "만약에 중국에서 반정부 활동이 격화되는 경우 재중국 구미인의 보호를 위해 구미 각국의 협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라고 중국에서의 공동보조를 제안하고, 다음날인 6일에는 프랑스, 독일, 이태리, 러시아, 미국의 다섯 나라에 청일강화를 공동으로 권고하자는 안을 냈다. 영국의 제안은 '열강의 관심'이라는 것을 배경으로 해서 일본에 내밀어진 것이었다. 일본은 이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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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의 결과
1895년 청일강화조약(下關조약)이 맺어졌다.
이로서 청은 일본에게 요동반도․대만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이 중 요동반도는, 러시아등 삼국의 간섭으로 청국에 반환하게 되어, 일본국내에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국가주의가 고양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국가세입의 약 3배정도였던 배상금 덕분에 일본정부는 금본위제를 확립하고, 군사공업과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청일전쟁후 중국․조선시장이 개척되어 방적업과 직물업이 급속히 발달하였으며, 미국수출을 중심으로 제사업이 발달하여, 1900년경까지 방적업․제사업등 경공업 부문에서 산업혁명이 달성되었다.
일본국내정치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정부와 정당이 손을 잡고 군비확장·산업진흥에 나서게 된 것이다.
1899-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열강과 함께 청국북부에 출병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대군을 만주에 계속 주둔시키고 조선에도 영향력을 강화하자 카츠라 타로(桂太郞)내각은 1902년 영일동맹조약을 체결후 일본국내에서는 유력 신문들이 대러주전론을 이끌었다.
1904년 2월 일본과 러시아는 전쟁에 돌입한다.
[이토는 전쟁이 아닌 외교적 방법으로 조선을 차지하려 했다]
이토는 전쟁이 아닌 외교적 방법으로 조선을 차지하려 했다. 1873년의 ‘정한(征韓)논쟁’에서 이토는 내치(內治)를 우선해야 한다는 세력을 단결시켜 당장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는 ‘정한파’를 물리쳤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할 방파제인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며 ‘만한(滿韓)교환론’을 제기했다. 만주는 러시아에 주고, 대신 일본이 조선을 차지한다는 논리였다. 외교적 협상으로 조선을 독점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러시아로부터 일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조선이 필요하다는 이토의 논리는 오늘날 일본 우익 세력의 역사인식과 일치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아시아 미래를 결정짓는 한국의 위상은 바뀌지 않았다.
제2의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는 오늘날에도 동아시아에 살아 있다.
그들이 다시 ‘파국’을 맞을지 여부는 이 시대를 사는 한·중·일 시민들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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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둘러싼 전쟁과 갈등은 일본, 소련, 미국 같은 강대국들의 침략과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지만,
더 근본 원인을 이 지역 강대한 중국 1개국 혹은 중. 일 2개국, 아니면 중, 일, 러 3개국에 편중되어 있어서 국가 간에 세력균형체제가 안정적으로 형성 및 유지 될 수 없는 객관적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
더욱이 한반도가 허약한 '3류 국가'였기 때문에 주변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하나의 강대국이 먼저 한반도를 선점하면, 다른 강대국에 큰 위협이 되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항상 주변 강대국의 권력투쟁의 대상이 되어
모든 동북아 전쟁과 분쟁을 촉발한 원인이 되어 왔다.
장차도 한반도가 약소국으로 남아 있는 한
동북아의 국제관계는 20세기의 불행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한반도의 '준 강대국'화는 한민족의 문제 일 뿐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 공존적 질서 유도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동북아 민족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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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삼전도비]
청일전쟁 이후 고종은 삼전도비를 한강물에 던져버리도록 명령했다.
더이상 청나라의 영향력이 받지 않는 조선에서
치욕의 비는 더이상 세울 이유가 없다는 데에서였다.
그뒤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일제 지배가 시작되며
일제는 다시 삼전도비를 세웠다.
자신의 조선지배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광복 후 다시 삼전도비는 다시 수장되었다가,
1983년 지금의 여의도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일부에서는 왜 치욕의 비를 세우느냐고 했다고 하지만,
당시 문교부에서는 치욕의 역사 증거물을 세움으로써
자라나는 후대에게는 이런 치욕적인 역사를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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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침략과 화폐]
일본의 침략은 한국에 외국화폐를 갖고 왔다. 두 외화가 유통되었다.
처음에는 멕시코 은화가 유통되었으나 점차 일본의 은화로 대체되었다.
일본의 은화가 유통되자 일본의 지폐가 뒤따라 들어왔다.
청일전쟁은 일본 돈을 대량으로 몰고 왔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6월에
한국의 통화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일본제일은행권이 한국에서의 화폐이다.
둘째, 백동화의 유통을 금지시키고 새로운 주화로 대체한다.
셋째, 엽전의 유통도 금지시킨다.
백동화는 형편없는 가격으로 사들여 회수되었으며,
엽전은 그 재료가 구리이므로 마침 세계적으로 구리값이 뛰는 기회에
외국에 팔아서 회수되었다.
일본의 제일은행은 1878년에 그 지점을 부산에 설치하였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은행이다.
일본은행은 일본의 개인은행이지만 한국땅에서 사실상 중앙은행의 노릇을 하였다.
처음에는 외환과 관세업무를 주로 하였으나 청일전쟁과 노일전쟁 동안 일본정부의 허락 하에 한국에서 일본정부의 국고 역할을 대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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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1894년 청일전쟁이 한창일 때
아들딸들에게 세계지도를 펼쳐 조선의 위치를 알려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또 ‘내가 만일 러시아 차르(황제)라면
한국 만주에서의 영지 소유권을 거절할 것’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톨스토이가 말년에 노자(老子)의 ‘도덕경’을 항상 곁에 둘 정도로
동양정신에 심취해 있었다”며
“특히 한국에도 적잖은 관심과 애정을 가졌다”.
“톨스토이는 1906년 8월 고향인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손님들과 만나
‘한국인은 동양적 의미에서 볼 때 대단히 문명화된 국민’이라고 말했지요.
한국을 강탈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는
‘타락한 무도(無道)의 인간’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주치의였던 슬로바키아인 두샹 페트로비치 마코비츠키가 기록한
‘야스나야 폴랴나 일기’를 보면 이 같은 내용들이 고스란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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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하고 반식민지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청일전쟁은 중국도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분수령이었다. 청일전쟁은 가치관은 유지하되 도구만 서양 것을 들여온 중국과, 가치관과 도구 모두 서양화한 일본의 싸움이었다. 물론 청일전쟁은 가치관의 차이로 승패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적 국민국가체제와 전근대적인 봉건국가체제는 전쟁수행 능력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중국은 자강운동을 통해 서양의 기계와 무기를 도입했다. 중국은 1870년대 이후 해군건설에 착수하여 영국과 독일로부터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철제 중순양함을 도입했다.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중국 해군은 군함, 주포 등 하드웨어 면에서 일본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청일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놀랍게도 이홍장(李鴻章)의 사병과 일본의 국민군대 간 전쟁이었다. 승리를 예상한 중국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최정예인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과 격렬히 싸우고 있을 동안 남양함대 등 여타 중국 함대는 뒷짐을 진 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홍장도 자신이 군함을 한 척이라도 잃게 되면 국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잃게 될 것을 우려했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전쟁을 마치 지방의 국경분쟁을 다루듯 지방관에게만 맡겨 놓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이룬 일본이 총력전을 펼친 반면, 전근대적인 봉건국가인 청조는 무기력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북양함대 중순양함들의 거대한 함포가 거의 무용지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포탄이 없었고, 그나마 있는 포탄에는 화약 대신 모래가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해군에 가야 할 자금이 서태후의 여름궁전인 이화원(?和園)을 짓는 데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해 볼 때 내부 부패는 천명을 잃고 왕조가 붕괴하는 최대 요인이다. 부패는 또 외부 침략을 유발한다. 19세기 말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화원 호수에는 대리석으로 된 유람석 모양의 커다란 석조물이 있다. 그것이 예정대로 중국 해군의 군함으로 태어났다면 청일전쟁의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청일전쟁의 패배는 중국에는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이후 중국은 제국주의의 희생물로 전락해서 1949년 모택동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반세기 이상 침략과 내란의 혼돈에서 수많은 목숨과 재산을 잃어야 했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반쪽짜리 자강운동으로는 서세동점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줬다. 중국은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근대 국민국가로 전환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의 유교는 사회체제 그 자체였으며, 이것을 하루 아침에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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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패배는 중국인,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중국 근대사에 있어서 아편전쟁에 필적하는 시대의 전환점이었고 국민들에게 주었던 심리적 영향은 오히려 더 심각하였다.
전후 이를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격화를 배경으로 중국에서는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려는 두 가지의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하나는 만주 이민족의 지배의 존속을 전제로 하여서, 위로부터 개혁을 행하려는 개량주의적 운동이다.
또 하나는 청 왕조를 타도하고 그 바탕위에 민주주의에 따르는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혁명운동이었다.
전자의 리더가 되었던 사람이 강유위였고 후자의 리더는 손문이었으며 이 양자에게 공통되는 점은 열강의 위협에 대한 강한 위기의식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손문은 혁명론에 기울어지면서도 한편으로 위로부터의 점진적 정치개혁에 의한 구국이라는 개량주의적 방향과도 완전히 결렬하지 못했다. 이러한 일종의 혼미는 1894년 직예총독겸 북양대신인 이홍장에게 상서를 올리는 형태로 나타났다.
상서의 내용은 부강의 근본은 단순히 군사면의 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재의 등용 및 농,공,상,공,광업의 진흥에 의해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였고 이것은 1860년 이래 증국벙, 이홍장등 유력관료에 의해 추진되어 온 양무운동에 대한 비판이며 역시 청일전쟁패배 이후 큰 흐름이 되었던 변법론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손문의 상서에 관해 이홍장은 약간의 관심을 보였지만 청일 사이의 전운이 급박했던 떠이므로 이에 대한 대응에 바빠 상서는 무시되었으며 이것이 결과적으로 손문으로 하여금 혁명운동의 실천을 결심하게 하여 이윽고 흥중회를 결성하고 이어서 광주에서 제1차 무장봉기를 진행시키게 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손문이 개량주의적 정치개혁에 기대했던 것은 거의 소멸해 버렸다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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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가들은 청일전쟁이후의 수년간을 열강에 의한 '이권쟁탈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열강의 무지막지한 침략정책은 당연히 중국민중의 격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1900년 절정에 달한 의화단운동이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