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엽,
동북아시아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다.
조선이 왜국의 침공을 받은 것이다. 「임진왜란」이다.
그때, 많은 전투가 바다에서 벌어졌는데 「한산대해전」, 「명량해전」은
동서고금을 통해 이름난 명승부의 대결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 그 해전들을 지휘한 이순신은
무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명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인간이 하천이나 바닷가에서 생활하며 활동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고기류와 여러 가지 수산물을 얻을 수 있어
자연히 하천과 바닷가를 찾게 되었다.
또 그들은 물위에 배를 띄워 많은 식량과 물자를 편리하게 운송했다.
그리하여 차츰 큰 바다에도 친숙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이 대양을 항해하고 횡단하기 시작하여
미지의 대륙을 발견하게 된 지는 불과 500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때부터 전투적이며 가혹한 정복사업이 벌어지고
인류 역사는 급격한 변천을 거듭하게 된다.
이 지구촌에는 수많은 민족이 제각기 특색있는 언어와 관습,
그리고 문화를 갖고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융성을 떨친 민족이 있는가 하면,
다른 민족에게 정복을 당하여 점차 흡수, 동화됨으로써
끝내는 그 민족 자체가 소멸되어버린 경우도 적지 않다.
잡아먹으려고,
또 그에 대항해서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으려 하는 싸움이
시대를 두고 반복되어 왔다.
한 민족의 흥망성쇠를 가져오고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는
그와 같은 투쟁은 산야에서도 바다에서도 벌어졌다.
우리 민족의 4,300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외부의 침입을 여러 차례 당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국난으로 손꼽히는 것이 「임진왜란」이다.
그 전쟁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1592년 임진년에 일어났다.
1598년까지 7년이나 끌었던 전란은 도중에 화의 교섭이 진행되었던 탓으로
오랜 정체상태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1597년 정유년에 다시 왜군의 침공이 되풀이 되었으므로
「임진·정유왜란」이라고도 한다.
흉포하고 혼란했던 전국시대를 넘긴 왜국은 나라 밖으로 칼날을 돌렸다.
그들은 이전부터 해안을 따라 노략질을 해오던 터이라,
바다 건너 조선 반도를 침공하려는 야욕을 폈다.
명나라를 치려고 하므로 길을 열라는 요구를 내세웠다지만
그것은 거짓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왕조의 지도층 양반들이 바다를 두려워하고
당파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왜국의 사무라이들은 물을 건너뛰어
이웃 민족을 정복할 뱃심을 품었던 것이다.
그 전란은 처절했고 야만적이었으며 치욕 속에 시종했다.
인명의 손실을 비롯하여 큰 피해를 기록했지만
임진 왜란은 결국 왜국의 패배로 끝을 맺는다.
왜냐하면 그 싸움에서 왜국은
그들이 품었던 정복 야욕을 성취하지 못하고 꺾여버렸으며,
그들이 침공했던 조선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세의 흐름을 가름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다의 싸움에서 왜군이 조선 수군을 이겨내지 못한데 있다.
1592년 음력 4월 14일, 350여척의 군선을 동원하여
유럽으로부터 도입한 조총을 둘러멘 왜군이
조선 반도의 남쪽 부산 앞 바다에 나타났다.
총세 15만 8천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강산을 피로 얼룩지게 하면서 북상 진격했다.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그와는 별도로 왜국 수군 9천 군세는 전선을 몰아 경상도 해역에서
조선 수군을 무찔러 제해권을 장악하려 했다.
제해권이란 군사, 통상, 항해 등에 있어 해상을 지배하는 실력을 말한다.
그들은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해상 수송로를 안전하게 하고,
나아가서 육상 침공군의 진격에 발맞추어 전라·충청 해역으로 서진해서
서울에 이르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왜군이 갑자기 밀어닥치자 동래에 수영을 둔 경상 좌수사 박홍은
전선들을 버린채 육상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한편 거제도 가배량에 본영을 둔 경상우수사 원균은
크고 작은 전선 백수십척을 불러모아 왜군에 대항했으나
번번이 실책을 저질러 용감한 장졸과 전선을 잃어버리고
바다를 내어준 채 이리 저리 도망치다가
전라 좌수영에 구원을 청해야 하는 형세로 밀렸다.
옥포해전.
임진왜란의 첫승리.
1592년(선조 25)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일본 함대를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해상에서 첫 승리를 거둔 싸움이다.
경상도 우수사 원균(元均)은 자신의 함대가
북상하는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함대에 패하자
전라도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5월 1일 휘하장병을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키니
전선(戰船)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이었다.
군을 재정비하고 약속된 당포(唐浦)에 이르러
원균의 전선 4척, 협선 2척과 합세하였다.
그 뒤 5월 7일 옥포 앞바다에 기다리고 있을 때,
척후장(斥候將) 김완(金浣)의 신호를 받았다.
이때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지휘 아래 50여 척의 왜선은
해안에 흩어져 있었고 왜군들은 포구에서 노략질을 하였다.
적은 기습공격을 받자 6척을 앞세워 도주하기 시작했으나,
아군은 진격하여 포위하고 화통(火筒)을 쏘며 공격해 26척을 격파했다.
달아나는 왜군을 계속 추격하여 마산(馬山)에서 5척,
통영(統營)에서 11척을 전멸시켰다.
사천해전.
5월 7일에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순신의 함대는
5월 6일부터 9일까지 계속된 제 1차 해전을 통하여,
옥포·합포·적진포에서 도합 마흔 두 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거나
불살라 버리는 전과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5월 초순에 이루어진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통하여,
그들 수군이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의 북상 기도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1592년 5월 29일, 이순신은 제 2차 해상작전에 출전하면서
새로이 창안된 전함인 거북선을 포함한
전라좌수영 조속 정예함선 23척을 동원하였다.
노량으로 항진하여, 전함 세 척의 경상우도 수군과 합류한 이순신 함대는
사천 앞바다로 진출하였다.
이때, 일본군 전함 13척은 사천 선창의 해안에 정박해 있었고,
병력은 선창 주변 육지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은 적선을 바다로 유인해 내기 위하여 함대의 선수를 돌려
먼바다 쪽으로 후퇴하였다.
일본군은 해안에 진을 치고 있던 병력 일부를 승선시켜
이순신 함대를 추격하였다.
대형 전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해역까지
일본군들을 끌어낸 이순신 함대는 선수를 돌려 돌격을 감행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거북선을 앞세우고
총통 등 각종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가하자,
일본 함선들은 사천 포구 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런 사이에 만조가 되자, 이순신은 전 함대를 독려하여
사천 선창 안으로 일본군은 함선을 바짝 밀어 붙였다.
일본 수군은 육지에 있던 병력의 지원을 받으며 내륙으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대부분의 병력이 격침되는 함선과 함께 수장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왜적들이 쏜 총탄에 군관 나대용이 총탄에 맞고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 또한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 조선왕조실록의 '거북선' 묘사부분. ※
그 구조는 배위에 판자를 펴서 거북등 처럼 만들고
등위에는 열 십자(十)처럼 길을 내어
아군이 겨우 다니게 하고 그 밖에는 칼과 송곳을 꽂았다.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구멍으로 삼고
뒤에는 거북 고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도 총구멍을 내었다.
오른쪽과 왼쪽에도 각각 6개의 구멍을 내어 총을 쏘도록 하였다.
군사는 밑바닥에 감추어 놓고 사면으로 포를 쏘면서
좌우 오락가락 하는 것이 나는 듯이 빨랐다.
싸울 때는 띠풀을 엮어 만든 것을 덮어 송곳과 칼이 들어나지 않도록 하여
적이 배에 뛰어내리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하였다.
적이 에워싸며 조총을 쏘아대도 아군은 피해가 없으면서도
적은 크게 상하니 향하는 곳마다 승리였다.
※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제원. ※
선체길이 70자.
저판 길이 50자.
선체 너비 24자.
상장 너비 30자.
승선 인원 125명.
노의 수 14자루.
한산도대첩.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두 차례 해전을 통하여
참패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6월 하순부터 또다시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 무렵,
웅천에 있던 와키사카의 함대와 부산포에 있던 구키,
카토의 함대가 합세하여 조선수군을 상대로
패전을 설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공세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도 남해안에서 일본 함선의 활동이 현저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이런 일본 수군의 움직임에 타격을 가하고
그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하여 제3차 해상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이른 아침에 미리 약속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파손된 전선 7척을 수리하여 이끌고 온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고성의 견내량으로 향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부대를 대거 동원해 호남을 향하고 있었다.
7월 6일,
전함 일흔 두 척의 삼도수군 함대는
7월 7일에 견내량에 정박중인 적의 선단을 발견하고,
이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다.
따라서, 일본 수군이 요행히 조선 수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이 섬에 상륙하더라도 오래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한산도 앞바다를 결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7월 8일,
이순신은 수 척의 판옥선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의 병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낸 다음,
학익진을 펼쳐 일본 수군 선단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리고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면서 거북선을 적 선단 핵심에 돌입시켜
좌충우돌로 맹공을 가하였다.
먼저 2,3척을 격파한 뒤 좌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쳐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을 불태웠다.
이 싸움에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갑옷에 화살을 맞아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김해로 피하였고, 선장 마나베 사마노죠는 자결하였다.
대승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고
선조로부터 칭찬도 듣게 되었다.
부산포해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제 3차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7월 중순 이후
약 1개월간 남해안 일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8월 중순에 이르러 일본군은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무라,
오카모토 등의 부대를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김해에 집결시키는 한편,
군수 물자를 부산으로 운반하였다.
조선군측에서는 일본군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형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이
본국으로의 철군을 준비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경상감사 김수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일본군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해상통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8월 25일,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여
판옥선 일흔네 척, 협선 아흔두 척 등
총 166척으로 통합함대를 편성하였다.
이순신·이억기·원균 등 세 수사가 거느린 조선 수군은
부산포의 일본군 본진을 공격하여 타격을 가하기로 작전 계획을 세웠다.
당시 부산포에서는 하시바군 주력부대와
본국에서 증원된 수군 8000여명이 함선 430여 척을 보유하고
해안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9월 1일 새벽,
조선 수군 함대 160척은 가덕도를 떠나 절영도에 이르는 동안
모두 스물네 척의 일본군 전함을 격침시켰다.
일본 수군 선단은 조선 수군이 공격하자, 변변히 응전조차 해보지도 못하고
배를 버려둔 채 육지로 달아나기에만 급급하였다.
부산포 앞바다의 절영도 부근으로 진출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에 일본 수군 선단 사백여 척이 집결해 있는 가운데,
다수의 육군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조선 수군 통합함대가 절영도 서북단을 통과하여 부산포로 들어가자,
초량 방면에서 일본 수군의 대형 전함 네 척이 출현하여
조선 수군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조선 수군측에서는 일제히 돌진하여 적선 네 척을 격침시켰다.
조선 수군의 본대는 이러한 승세를 타고 장사진을 펼치면서
종대 대형으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 수군의 형세에 압도된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육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활을 쏘아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 전함을 향해 각종 총통 사격을 집중하였다.
이 부산포 해전에서 일본군 전선 백여 척을 격파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를 떠나 가덕도로 물러났다가 9월 2일에 각기 본거지로 귀환하였다.
일본 수군은 일 부산포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이후로
그 기세가 더욱 위축되어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활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직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기지를 보호하기에만 급급하였다.
부산포해전에서는 녹도만호 정운이
조선의총에 불운하게 맞아 전사하십니다.
당포해전, 당항포 해전.
1592년 6월 1일 정오 무렵,
이순신 함대는 삼천포 앞바다를 거쳐 사량도에 이르렀다.
2일 아침,
이순신 함대는 "당포에 적선들이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포로 진출하였다.
그곳에는 높은 누각에 비단 휘장을 둘러 장식한 지휘선 및
대 전함 아홉 척과 중·소 전함 열두 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병력은 당포에 상륙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정면으로 돌진시켜 적 선단을 좌우로 양단시킨 뒤,
전 함대로 적선을 공격하였다.
선두의 거북선은 총통 사격으로 적선을 격파하거나,
선체를 충돌시켜 적선을 격침시켰다.
판옥선들도 총통과 활로 적선에 사격을 집중하거나,
쇠갈고리로 적선을 끌어당겨 거기에 시한폭탄인 발화통을 던져
폭파시키기도 하였다.
이순신 하대가 공세를 계속하여 대소 전함 스물한 척을 모조리 격침시키자,
일본 수군은 마침내 다수의 사상자를 내 버려 둔 채 내륙으로 달아나 버렸다.
1592년 6월 5일,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이 지휘하는 오십여 척의 선단은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일본 함선들이 고성의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 선단은 당항포 포구까지 이십여 리의 긴 해협을 따라
일렬 종대로 진입하였다.
당항포 포구에는 일본군의 대형 전함 아홉 척,
중형 전함 네 척, 소형 전함 열 세 척이 정박 중이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선단이 포구로 접근하자
일제히 조총을 사격하면서 대응태세를 취하였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육지 탈출을 봉쇄하기 위해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수군 선단이 철수하는 척 하자,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뒤를 추격하였다.
일본군 선단이 포구 밖으로 나오자,
조선 수군은 신속히 진형을 바꾸어 퇴로를 차단하고
거북선을 뒤따르던 판옥선에 탄 군사들이 불화살을 쏘아
누각선이 화염에 휩싸이자, 당황한 적장은 우왕좌왕하다가
조선군의 화살에 사살되고 말았다.
전의를 상실한 일본 수군 선단의 대다수는 당항포 먼바다에서 격침되었으며,
일부 함선이 포구 안으로 도피했으나 이튿날 새벽에 탈출을 시도하다가
해협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에 의하여 모두 격침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은 이 당항포 해전에서 적선 스물 여섯 척과
승선 병력 전원을 수장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정유재란 - 칠천량해전.
일본군은 1597년에 전쟁을 재개하면서 남해안의 제해권 확보가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가장 중대한 요소라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조선 수군의 지휘체제를 와해시키기 위한 책략으로써
이순신을 제거하려고 비밀 공작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에 일본군측의 고니시는 첩자인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1월 21일에 가토가 조선에 도착할 터인즉,
해상에 매복해서 급습하면 생포할 수 있다"는 허위 정보를 제공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러한 제보를 믿고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정보를 믿을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파직하여 한성으로 압송하였고,
이순신의 후임 통제사로 전 경상우수사 원균을 임명하였다.
1597년 7월 초순,
조선의 수군 지도자 이순신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을 거둔 일본군은
육백여 척의 선단을 부산에 입항시켰다.
이에 원균은 7월 14일 새벽에
휘하의 전라좌수영군과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군,
배설의 경상우수영군, 최호의 충청 수영군 등 총 백 여척을 이끌고
부산으로 항진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칠천량에서 이를 봉쇄하고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조선 수군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나
한산도의 수군 본영에 불을 지르고 전함 열두 척을 수습하여
전라도 근해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더 이상 회생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와해되어 버렸다.
이 칠천량해전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일본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자,
그들이 정유재란을 개시하면서 구상했던
수륙병진작전을 효과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정유재란 - 명량대첩.
이순신은 8월 18일 회령포에 이르러
칠천량에서 패해 온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되었던 것이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추가되니 해전 당일에는 모두 13척이 싸웠다.
9월 16일,
이순신은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지형이 험난하고 협소한 명량해협으로 300여척의 왜 함대를 유인,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 죽고자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라는 결의를
각 전선의 장령들에게 엄히 촉구하였고,
역조에서 사력을 다해 왜 수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했으며,
순조를 맞이하자 일제히 진격함으로써 133척이 모두 물에 빠졌다.
그중 구루시마 미찌후사는 전사했다.
적선들은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번 승리로 이순신은 은자 20냥을 받았다.
해전 후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낸 함대는
해안을 따라 고군산도 부근까지 계속 북상하여 육지의 상황을 살피고,
군사들의 휴식도 도모하였지만 군량 보급이 시급하였다.
말이 정규군이나, 사실상 의병과 같은 처지였다.
해전 후 20여 일 만에 명량의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 일본측의 명량대첩 패전 상황평가. ※
9월 16일의 일이었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를 격려하여 방전에 힘썼다.
일본군은 분전하였으나 구루시마 미찌후사 이하 10명이 죽고,
토우도우 다카도라는 부상,
모리 다카마사는 물에 빠졌다가 위급하게 구제되는 등 마구 당했는데
배도 수척이 침몰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이순신은 배를 당사도로 옮겨 갔지만
일본군은 수로에 밝지 않아 추격할 수도 없어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이것으로 일본 수군의 서쪽으로 진출하려 하는 계책은 좌절된 것이었다.
정유재란 - 노량해전.
통제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
해남현감 유형, 가리포 첨사 이영남, 군관 이언량,
송희립 등 역전의 휘하 장령들과 함께 출전하였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부총병 등자룡과 진장,
그리고 여러 유격장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조선 수군과 연합하였다.
한편 순천에서 행상의 퇴로가 차단되어 고전하는
고니시의 왜군단을 구출하기 위하여 남해 각처의 왜 수군이 결속하여
속속 노량을 향하여 몰려들고 있었다.
약 500척의 조·명 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왜교의 봉쇄를 풀고 급히 노량으로 진격, 다음날인 11월 19일 새벽 2시경,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의 타찌바나 토우도라,
부산의 테라자와 마사시게, 그리고 남해에 있던 소오 요시토모등
여러 왜장이 합세한 500여 척의 왜함대와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이게 되었다.
해전은 춥고 달 밝은 밤의 전투였다.
각종 화포를 쉴 새없이 발사하고, 화시를 날리고 잎나무불을 마구 던지는 등,
치열한 야간 전투가 계속 되는 동안 밤은 서서히 트이기 시작하였다.
이 마지막 해전이 고비에 이른 19일 새벽,
이순신은 몸소 지휘독전 중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적의 탄환을 왼쪽 가슴에 맞아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군사들이 급히 그를 방패로 가리었으나 그는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이영남, 방덕룡, 고득장 등 10여명의 부장이 전사하였고,
해남현감 유형, 군관 송희립 등이 중상을 입었다.
임진년에 귀선돌격장으로 활약한 이언량도 이 싸움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명나라 수군의 70세 노장 등자룡도 전사하였다.
전과는 태워 버린 적선이 200여척,
적병의 머리가 500여 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란 이래 최대 규모의 격전이었다.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은 거칠고 오만한 인물로만 전해지고 있으나,
1598년 7월 16일 수군 5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한 후
4개월 동안 조선수군과 진을 같이 펼침으로써,
이순신의 천재성과 인품을 가장 잘알고 지내던 유일한 타국인이었다.
그는 지휘군을 이순신에게 양보하게 되었고,
이순신 또한 전리품과 적의 수급등을 명나라 수군에 양보함으로써
진도독의 명분과 공로를 위하여 인색치 않았다.
후일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하여
고사에서 인용한 최고의 찬사를 이순신에게 바치고 있다.
그는 이순신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슬퍼하였고,
장례에도 남다른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으며,
고인의 자제들을 친히 위로하는 예를 잊지 않았다.
또 이순신의 장지였던 아산 금성면의 묏자리 선정에도
명나라 지관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산 대해전과 명량해전을 직접 지휘하여
대승리를 거둔 장수는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왜적을 몰아낸 마지막 해상 전투인 노량해전을 지휘하면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최종 순간에 왜병의 총탄에 맞아
무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런 일생을 마쳤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이른 아침이었다.
나이 54세.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동·서양의 해장 가운데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으뜸으로 추앙받고 있다.
16세기 말엽,
왜국의 침공을 받은 조선이 헤어날 길 없는 위난에 빠졌을 때
그는 온갖 어려움을 견디고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왜적을 물리쳐
왕조와 백성을 살린 대업을 성취했던 것이다.
그가 보여준 인간으로서의 됨됨이와 나라 위한 공헌은
영구불멸의 찬란한 빛이 되어 우리 민족을 밝혀주고 있다.
그를 기리어 선조는 일등 공신에 봉하고 좌의정 벼슬을 추증했다.
그 후 1643년에 인조는 ‘충무’의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1795년에 이르러 정조는 영의정 벼슬을 추증했다.
노산 이은상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이라는 구절로
그를 표현했다.
해전사 연구의 세계적인 대가 헐버트(H. G. Hulbert)나
밸러드(G. A. Ballad)는
이순신의 전법, 기동전술 등에 관하여 최상의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불멸의 이순신(연화부인).
여해, 충무공 이순신(汝諧, 忠武公 李舜臣).
그는 1545년에 덕수 이씨 12대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나이 32세가 되어서 뒤늦게 무과 시험에 합격한 그는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라는 외진 곳에서 종9품의 전관 직위를 맡아
첫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여러 곳을 전전하며 훈련원 봉사, 군관, 수군 만호,
훈련원 참군, 만호, 선전관, 현감 등의 경력을 지냈다.
그가 전라 좌수사로 임명된 것은 나이 마흔일곱살때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4개월쯤 전이었다.
그때부터 어려운 현실과 무거운 책임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는 닥쳐올 국난을 예견하듯
임지인 여수 수영에서 방위를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왜군이 침공을 개시한 이래
그가 지휘한 해상 전투와 큰 행적을 간추려 보면,
1592년 5월 경상도 수역으로 출전,
옥포, 합포 및 적진포 해전(왜선 40여척 격파).
6월 경상도수역으로 다시 출전,
사천, 당포, 당항포 및 율포 해전 (왜선 70여척 격파).
7월 견내량과 안골포에서의 한산 해전 (왜선 70여척 격파 및 포획).
8월 (왜선 70여척 격파 및 포획).
1597년 2월 관직 박탈, 서울 압송.
3월 투옥.
4월 출옥, 백의 종군.
8월 칠천량 해전에서 남도 수군 전멸된 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
9월 고하도에 군영 설치.
1598년 2월 군영을 고금도로 옮김 .
7월 명 수군과 연합.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
(왜선 200여척 격파).
토막 이야기 하나.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를 전멸시켜 버린 일본의 도고 제독은
일약 세계 해전의 명장으로 부각되었다.
바로 그 해에 미국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임관 후보생들이
실습 훈련 중 일본에 기항했다.
일본 해군은 그들을 위해 환영회를 베풀었다.
그때 도고 제독을 대면한 미국 후보생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독께서 숭배하는 분이 있다면……?” 하고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내가 가장 숭배하는 분은 16세기 말엽의 조선수군을 지휘한 이순신 제독일세.
그 분의 인품이나 무공을 따를 해장은 아무도 없어.”
명치유신 이후 급성장하기 시작한 일본은
그들의 해군 참모대학에서 고금의 해전을 학습토록 했는데,
특별히 이순신의 인간됨과 애국충정,
필승의 신념과 뛰어난 전략 전술에 관하여 심도있는 연구를 했다고 한다.
십경도.
과연 우리는 이순신이 남긴 발자취를 통해
명장으로서의 조건을 어떤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첫째로 그는 이기는 전략 전술을 수립하고 구사했다.
그 때의 해전은 연안 수면의 전투였다.
따라서 지리와 수리를 잘 알고
그 점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순신이 운영한 운주당은 작전계획을 숙의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상황실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전력강화 및 군수사업에 대하여 적극적인 지도를 했다.
즉, 둔전제를 실행하여
백성의 식량과 수군의 군량을 동시에 확보토록 하며
소금을 굽고 질그릇을 만들게 하는가 하면
화약을 제조 비축하는 등의 일을 해냈다.
한편, 병선 건조에 있어서도 역량껏 최선을 다했으며
쇠를 달구어 화포를 비롯한 각종 병기를 제조했다.
또 그는 정신 무장과 훈련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언제나 굳건한 애국심과 필승의 신념을 고취하며
강인한 정신 자세를 요구했다.
그리고 어려운 항해기동법이나 활 쏘기 같은 전투 기량을 높이기 위해
엄한 훈련을 반복시키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 이순신을 두고 ‘동양의 넬슨’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큰 오류이다.
일대의 명장들이 남긴 공훈을 비교하거나 차등을 두는 것은
그 자체가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두 시대의 차이와 환경을 감안하고,
두 사람의 개인적 행적을 살펴보며
또한 해전을 지휘한 역량과 그 전공을 분석해 볼 때,
두 해장의 영상은 차원을 달리 하고 있다.
왜군을 격멸하는 마지막 노량 해전에 임하면서
이순신이 “이 원수를 없앤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하고
하늘에 기원한 마음이나,
왜군의 총탄에 쓰러진 최후 순간에 있어서도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말한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는 구국의 혼이 되어 이 민족과 함께 숨쉬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다른 측면에서 바다를 향한 우리 민족의 잠재력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영웅이다.
조선 시대의 쇄국정책은 바다를 배제하고 반도만을 운명적 터전으로 받아들이게끔 강요했다.
이런 조선에서 이순신의 존재는 기적에 가깝다.
쇄국의 나라 육군 출신이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해군 제독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에 내재한 해양성이 발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바다는 불굴의 도전 정신을 요구한다.
반도에 안주해 인재 죽이기로 권력을 유지하던 체제 안주 세력에게
‘신에게는 아직 전함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며 거친 바다로 돌진한 그의 진취성은
민족의 해양적 기질을 상징한다.
한국사는 대륙성과 해양성의 결합으로 완성되며,
이것이 21세기 우리 민족이 지향해야 할 정신이란 점에서,
이순신은 바로 해양성의 원형질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원칙을 중시했던 이순신의 선비 정신은
물신 숭배에 염치도 체면도 팽개친 현시대에 회복해야 할 정신적 자산이다.
친구 유성룡이 미관말직을 전전하는 이순신을 이조판서 이이에게 소개하려 하자
“이이는 동종(同宗: 동성동본)이므로 의당 만나볼만하지만,
전형(銓衡: 인사권)하는 자리에 있어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고,
정승 김귀영의 서녀를 작은부인으로 삼아주려 하자
“벼슬길에 처음 나왔는데, 어찌 권문(權門)에 자취를 의탁해서 되겠는가”라며 사양했다.
이런 선비정신은 자리를 위해서라면 불고염치하는 현 세태에 반성의 재료가 된다.
☞ "호남이 없으면 이 나라도 없다!!!" ☜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
호남의 출신자이기에,
대부분의 호남민들이 주된 지지자를 형성하고 있는,
김대중대통령님께서 이끌어 나오셨던
민주당의 순수한 지지자이기 때문에
민주당에 관련된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書不盡畵不得.(서부진화부득).
1백여년 전의 가객(歌客) 안민영(安玟英)의 시조,
금강산을 그린 수 없는 글과 그림으로도 금강산의 영기 (靈氣) 와
아름다움을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다고 설파하셨다.
桐千年老恒藏曲 梅生寒不賣香.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