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종생(李從生) 함평인(咸平人)
※世祖朝 國朝人物志에 從生은咸平君으로 記錄
세조조 국조인물지에 종생은함평군으로 기록
李從生 字繼之咸平人以武藝進四道節度使 世祖朝吉州人
李施愛殺節度使及諸鎭將校據十城以叛 上命將討之以從生
爲先鋒至蔓嶺遇賊兵甚熾左右皆 사 魄不敢進大軍亦不至
從生銳意進戰責諸將曰國家安危在此一擧今賊勢如此諸將
何不出死力以戰乃不馬拔樹揮左右알叱之軍皆服栗鼓 조
以進從生躍馬奮擊賊勢披靡大軍繼至望見曰彼黑面頂大玉者
誰軍中爭告曰李衛將也凱還策敵愾功封咸平君建州女
眞久梗王化又明國請援師來攻 上命領議政尹弼商爲元師部
署諸將以從生爲虎賁衛將渡鴨綠江路 초氷滑所騎馬顚부
從生隨傷右※元師驚救醫治因曰若非公誰能爲先鋒對曰當
萬死以戰卽上馬直人賊穴燒盧帳元師勞慰曰是役之捷皆公之
力官至漢城左尹謚莊襄 崔溥 撰墓碑
※世祖朝 國朝人物志에 從生은咸平君으로 記錄
2.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이종생(李從生)
# 전라도(全羅道) 함평(咸平)
*사정촌사우(射亭村祠宇)
제향. 이 언(고려신무위대장 본함평). 이춘수(언구세손 수사 증이판 본함평). 이종생(언십세손 병마절도사 함성군 시장양 본함평). 이 긍(춘수자 이참 기성군 본함평). 이 습(호효우당 긍제 현감 본함평).
祭享. 李 彦(高麗神武衛大將 本咸平). 李春秀(彦九世孫 水使 贈吏判 本咸平). 李從生(彦十世孫 兵馬節度使 咸城君 諡莊襄 本咸平). 李 兢(春秀子 吏參 箕城君 本咸平). 李 습(號孝友堂 兢弟 縣監 本咸平).
3. 사산사(射山祠): 함평 나산면 초포리
전남 함평(咸平)은 함평이씨(咸平李氏)의 아성이다. 함평군(咸平郡) 일대에는 2천여호 1만여명이 살고 있는데, 조선 초기에 수사(水使)를 지낸 춘수(春秀)가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함평(咸平)에 정착, 후학들을 양성하며 나산(羅山) 초포리(草浦里)에 입향(入鄕)한 뒤, 그의 아들 긍(兢)과 습(△) 형제의 후손들이 이 일대에 번져 세거지(世居地)로 되어 있으며, 시조 언(彦)과 6位(春秀, 從生, 從遂, 兢, 습, 稠)의 조상을 모신 사산사(射山祠)가 있다.
세파(世派)별로 세거지(世居地)를 살펴보면, 고려 첨서사사(詹書司事)를 지낸 인원(仁元)의 후손은 충남 홍성(洪城)과 결성(結城)에 자리잡고 기반을 굳히었으며, 백당(伯棠, 雲奉公)의 후손은 광주(光州), 광산(光山)과 부여(扶餘)에 자리하였으며, 극해(克諧)의 후손은 나주(羅州)와, 그의 아들 종동(從仝)의 후예는 고창(高敞), 정주(井州), 여주(驪州) 등에 많이 살고 있다.
4. 조선 세조 때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으로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진 종생(從生)의 후손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일원인 화성(華城), 양평(楊平), 광주(廣州), 개풍(開豊) 일대와 충남북의 청양(靑陽), 부여(扶餘), 당진(唐津), 제천(堤川), 충주(忠州) 그리고 황해도의 벽성(碧城), 함남의 갑산(甲山), 단천(端川) 등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그의 동생 종수(從遂)의 후손들은 그 선대(先代)부터 나주(羅州)에 집거(集居)하여 반세(班勢)를 누리었고 그의 6세손인 선지(先智)는 밀양(密陽)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어 오례(五禮), 퇴로(退老), 월산(月山) 등에 후손(後孫)들이 정착(定着)하여 반성(班姓)으로 행세하였다.
중길(中吉)은 평택(平澤)에 입향(入鄕)하여 그 후손들이 퍼져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으며, 세조 때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인 운로(雲露)의 후손들은 화성(華城), 양평(楊平), 홍천(洪川)에 자리잡았고, 현령(縣令)을 지낸 조(稠)의 후손들은 장성(長城), 고창(高敞)에, 종(種)의 후예들은 부여(扶餘) 쪽에 많이 살고 있다. 또 고려 충숙왕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이며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진 광봉(光逢)의 후손들은 전북의 고창(高敞), 부안(扶安)과 함평(咸平) 일대에 만영(萬榮), 장영(長榮) 형제들을 입향조(入鄕祖)로 하여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지낸 춘령(春齡)은 양양(襄陽)에 입향(入鄕)하여 자리를 굳혔고, 수년(秀年)은 여주(驪州)에 기반을 두었다.
이외에도 많이 살고 있는 곳은 영광(靈光), 무안(務安)등을 꼽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