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 들어 부동산 정책 실패가 거듭되면서 그 때마다 재건축 규제 또한 이중 삼중으로 늘어갔다.
결국 다수 재건축 추진단지들이 현 제도 아래서는 과도한 부담금과 사업성 부재로 재건축 추진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이들은 현 정부에서의 재건축을 포기하다시피 한 채 규제 완화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에 따라 도심 내 주택 공급의 흐름이 끊기고 결국 재건축 아파트 가치가 상승, 주변 집값에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본지는 재건축 제도를 완화해 주거환경, 도심환경 개선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한 한편 공급에 숨통을 틔워줌으로써 주택시장 안정화가 가능하다는 견지에서 재건축 중복규제의 실상을 차례로 짚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명성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임규수 총무는 “당연히 (재건축을) 하는 줄 알았는데…”라며 안전진단 예비평가에서 ‘유지보수’ 판정을 받은 것을 아쉬워했다.
지난 1984년 준공된 명성아파트는 시흥시 1호 아파트이다. 5층 건물 2개 동, 6층 건물 1개 동 등 3개 동으로 이뤄져 있다.
준공후 23년이 지나 재건축 연한을 넘겼지만 건물 외벽은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임 총무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건물 내부는 철제 계단 난간이 헐어 바닥에서 이탈해 있었다. 베란다의 철제 난간도 곳곳이 낡아 부스러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임 총무는 “전화 단자 선, 공동배선이 낡은 것은 물론 물이 새는 집도 있다”면서 “비가 오면 지하실에 물이 차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는 “그나마 외벽이 깨끗한 것은 지난해 인근에 들어선 아파트가 하자보수 차원에서 도색을 해줬기 때문이다”고 했다.
지난 연말 실시된 안전진단 예비평가에서도 이 아파트의 건축 마감 및 설비노후도에 D등급을 매겼다. 그러나 구조안전성, 주거환경 등을 합산한 결과 아파트는 전체적으로 C등급, ‘유지보수’ 판정을 받았다. 결국 구조안전성이 재건축을 가로막은 것이다.
임 총무는 “이 아파트 주민 3분의 1이 처음 분양 받아 입주한 사람들이다. 세대수도 작고 분담금도 높지만 집도 좁은 데다 멀리 이사하기 싫어 재건축을 하려고 했다”면서 “서울 같은 대단지나 투기고 개발이익 환수지, 이 같은 지방에 서울과 같은 규제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시시 때때로 변화하는 규제 일변도의 정책도 도마 위에 올랐다.
명성아파트는 지난해 6월말쯤 시흥시에 추진위 승인을 신청했다. 하지만 건물 3개 동 중 1개 동의 준공 날짜가 달라 승인이 반려됐다. 결국 1, 2차로 분할해 지난해 8월 10일에야 승인을 얻었다.
하지만 같은 달 25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 개정되면서 안전진단 절차가 강화됐다.
명성아파트 보다 늦게 지어진 인근 복지장미아파트와 대원아파트는 이미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재건축을 가로막은 것은 구조안전성도 아니고 주거정비법 개정 때문이다.
9개 단지 중 1개 단지만 예비평가 통과
안전진단이 강화된 지난해 8월 이후 명성아파트 1, 2차를 포함해 안전진단을 신청한 단지는 아파트 7개 단지와 연립주택 2개 단지 등 9개 단지에 불과하다.
인천 남동구 신세계아파트와 연수구 연남아파트, 김포 사우아파트, 익산 신동 주공아파트, 진주 대동아파트, 서울 성동구 한양연립, 마포구 경성연립 등이다. 명성아파트 1, 2차가 분할된 과정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8개 단지만이 신청한 것이다.
그나마 예비평가를 통과한 곳은 경성연립 뿐이다.
이 같은 결과를 예상한 듯 재건축 수요가 많은 서울 강남지역에서는 주거정비법 개정 이후 안전진단 신청이 한 건도 없었다.
강남지역에서는 20년 이상 된 100여개 아파트 단지, 10만여 가구가 재건축을 추진중이다. 이 가운데 3만여 가구는 안전진단 절차를 밟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건설교통부는 “지난해 5월 주거정비법 개정이후 8월 시행까지 3개월 동안 여건을 갖춘 단지들의 안전진단이 잇따랐다. 개정 주거정비법의 안전진단 조항이 재건축의 규제가 될지는 1년 정도 시행해 본 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면서 일단 안전진단 규제 완화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안전진단 통과에 추진위 사활
실상 지난해 8월 주거정비법 개정 이전부터 안전진단은 재건축사업에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
건교부에 따르면 지난 2003년 1월부터 2006년 8월까지 240개 단지가 시·구 평가위원회의 예비평가를 받아 80% 가량이 예비평가를 통과했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안전진단 예비평가가 통과의례처럼 비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 정부 출범 후 안전진단 예비평가를 하는 시·군 평가위원회가 정부 부동산정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결국 관심을 끄는 강남 대단지들이 안전진단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업이 지지부진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설상가상으로 안전진단에서 탈락한 추진위는 추진위 흔들기와 리모델링·상업지 추진단체 출현 등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세 번의 안전진단 예비평가에서 고배를 마신 은마아파트가, 최근에는 잠실주공5단지가 이 같은 과정을 겪었다.
정부의 규제가 강화된 이후 여건이 우수한 재건축 대상 단지들이 1대1 재건축마저 감수할 태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안전진단은 재건축 바람을 차단할 수 있는 가장 큰 규제가 된 것이다.
구조안전성 가중치 50% … 비용분석은 10%
지난해 8월 25일 개정 고시된 「주택재건축 판정을 위한 안전진단기준」에 따르면 시장·군수는 건축물의 노후·불량정도 등에 대한 현지조사와 한국시설안전기술공단 등의 의견청취 등을 거쳐 안전진단 실시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한국시설안전기술공단 등은 시장·군수의 의견제시 요청 접수일로부터 20일 이내에 예비평가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시장·군수에게 제출하게 된다.
예비평가의 평가항목은 구조안전성, 건축마감 및 설비 노후도, 주거환경 등 3개 분야, 18개 항목이다.
예비평가 결과 유지보수, 안전진단 실시, 재건축 실시로 판정이 이뤄진다.
이처럼 안전진단의 1차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예비평가는 구조안전성과 노후도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들 평가항목은 정밀안전진단에서도 마찬가지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난해 개정 고시된 안전진단기준에서는 특히 구조안전성의 가중치를 높이고 비용분석 가중치를 낮춰 구조안전성의 가중치가 50%에 달한다.
주거환경 개선은 뒷전
이처럼 기술적 평가항목의 가중치, 특히 구조안정성이 재건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안전진단이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재건축 본연의 기능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명성아파트의 경우 20년 이상 경과한, 실평수 13평 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자기 돈을 들여서라도 평수를 넓혀 보려 했지만 안전진단에 막혀 꿈을 접어야 할 처지다. 명성아파트 주민들은, 건물 구조에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허공에 떠 있는 계단 난간 등 시설의 노후화로 늘상 사고위험을 안고 살아야 한다.
이 같은 문제는 20년 이상 된 재건축 대상 아파트 단지들에서 공통적이다.
지난해 안전진단 예비평가에서 ‘유지보수’ 평가를 받은 잠실주공5단지 주민들 또한 낡은 배관에서 나오는 녹물 때문에 건강에 대한 우려가 높다. 또한 전화·TV단자 부족부터 시작해 요즈음 아파트와 비교하면 주거환경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예 안전진단 무용론도 대두되고 있다.
잠실5단지 재건축 추진위 김우기 위원장은 “안전진단 과정에서 붕괴 여부만 본다”고 전제하고 “재건축을 해서 사업성이 있는지, 지역 환경 개선에 이바지하는지, 교통혼잡 완화에 기여하는지에 앞서 기울었느냐 아니냐를 보는 것은 구태의연하다”고 꼬집었다. 김 위원장은 또 유지보수 판정에 대해 “리모델링하는 비용이 건설비와 맞먹는다”면서 “재건축 연한규제와도 중복되는 안전진단 절차는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교부도 “건물이 낡고 붕괴 위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재건축이 추진되는 것은 아니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이 안정되고 재건축 단지에 대한 과열이 식기 전까지는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 주거환경연합은 “정비구역 지정은 사실상 노후도 등을 감안한 결정으로, 정비구역이 지정된 단지까지 안전진단을 실시하는 것은 사실상 불필요한 규제이다”는 주장이다.
주거환경연합은 “재건축이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것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주택가격 잡기라는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해 안전진단이 일률적인 규제로 작용하는 것도 재고돼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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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5단지, 안전진단 비켜갈 수 있나?
잠실주공5단지는 주거정비법에 규정된 안전진단 제외 요건을 갖춘 후 안전진단 제외신청을 할 계획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주거정비법 제20조 제1항은 “법 제12조의 규정에 의한 주택재건축사업을 위한 안전진단은 공동주택을 대상으로 한다. 다만,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것은 안전진단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동항 제4호에는 ‘정비구역내 도로 등 기반시설 설치를 위한 토지 위의 건축물’을 포함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공원, 도로, 학교 등 기반시설을 위해 아파트 건물 7개 동이 들어간다”며 “전문변호사의 자문을 받아 송파구청에 안전진단 제외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이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을 하는 국내 최초의 재건축추진위원회가 될 것이다”고 전했다.
정상표 기자 2007-01-15 10:5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