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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활기의 골목, 어시장
이일균
마산 어시장은 고단하다. 하루 24시간 쉴 틈이 없다. 새벽 경매시각부터 다음날 새벽 주당들이 복국골목을 휘청거리며 찾을 때까지 시장은 쉬지 않는다. 나이 든 어시장은 고단하지만, 허리가 휘지 않았다. 어시장에는 고단함을 집어삼키는 활기가 있다. 횟집 도마 위에 펄떡거리는 생선처럼, 생선을 겨냥해 횟칼을 집어 올리는 아줌마의 손길처럼 역동적이다. 어시장은 고단함과 활기, 대조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조화를 이룬다.
어시장과 오동동은 마산의 다른 이름이나 진배없다. 마산이라는 도시의 성장과 쇠락이 이들 두 동네의 역사 속에 있다. 어시장과 오동동은 1960~70년대 공업화 이전 마산경제를 일구었던 지렛대였다. 어시장이 대표적인 어업 집약지였다면 오동동은 상업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산업과 상업의 유형별 집중도가 뚜렷한 마산의 골목문화 또한 이들 두 동네에 집약돼 있다. 그것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 아니라 시대 따라 뚜렷하게 변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수협 어판장 골목과 복국 골목, 옛 홍콩빠는 어시장 문화와 역사를 상징하는 골목이다. 1944년 일제 때에 마산 어판장이 처음 문을 열었다. 어판장이 문을 열면서 주변에 어물전과 식당이 생기는 등 어시장의 초기 형태가 시작됐다. 그 후 복국골목과 횟집 촌의 대명사 격인 홍콩빠가 어판장을 축으로 형성됐고, 이는 마산의 명물이 됐다.
어시장과 오동동은 일제 때부터 상권이 연결됐다. 당시 어업이 주축이었던 마산경제의 핵심이 어판장이었다면 인근 오동동은 집중적인 소비지역이었다. 그 중심에 아구찜골목과 통술골목, 현 회원복개천을 따라 줄지어 있었던 나래비집이 있었다. 이 골목들을 축으로 오동동은 전국적인 유흥지역으로 명성을 떨쳤다.
어시장의 시작, 어판장 골목
새벽 시각, 비린내 물씬한 마산시 남성동 수협 어판장에 섰다. 이곳에서 새벽 5시30분이면 선어?활어 경매와 냉동어 경매가 열리지만 오늘은 선어,활어 하나다. 하루 24시간, 어시장 내의 기나긴 어업유통 과정이 여기서 시작된다. 어판장은 그렇게 '어시장이 처음 시작되는 곳'이다.
황장군 옆 공판장이 냉동어를 취급하는 1판장, 그 옆이 선어?활어를 취급하는 2판장이다. 어판장을 중심으로 좌우 1㎞ 이상 관련 업종의 건물이 연결된다. 황장군 쪽에서 왼쪽에 대형 냉동창고, 오른쪽에 중매인 사무실이 즐비하다.
어판장 경매 풍경
어판장 경매로 어시장은 시작되고, 마산이라는 도시는 동이 튼다. 새해의 둘째 날이나 셋째 날 벌어지는 어판장 '초매식'만 봐도 그렇다. 경매사,중매사와 뱃사람, 외에도 마산시장과 지역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다. 도시의 한 해를 열어 제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쪽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반대쪽으로 자리 잡으면서 2판장 경매작업이 시작됐다. 바다 쪽 임시 단상 위에 경매사가 올라섰다. 맞은편 길다란 계단식 단상에는 한 계단에 열댓명 정도의 중매인이 자리를 잡았다. 경매사 옆에서 중매인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소매인들이다. 나중에 중매인과 거래하기 위해 미리 물건을 점찍어 두는 것이다.
생선박스가 공판장에 착착 쌓이면 경매사가 임금처럼 요령을 흔들며 중개인들을 모은다. 알아들을 수 없는 구령과 수신호가 이어지면서 순식간에 낙찰된다. 이른바 '수지법'이다. 수지법은 지역마다 시장마다 다 다르다. 마산 수협 어판장의 경우 검지 하나가 1, 검지,중지를 펴면 2다. 특이한 건 3인데, 중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셋을 편다. 6부터 8까지는 엄지부터 차례차례 편다. 9는 검지를 굽힌 것이다.
경매사의 구령도 감을 잡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몇 번이나 반복해 들으니 내용은 이랬다.
"아 예~(시작), 어이! 4개(박스), 3번 2만3천 원, 10번 2만5천 원~. 15번 3만 원, 15번 (확정)!"
경매사의 목소리보다 숨가쁜 손가락 신호가 경매 과정에는 더욱 상징적이다. 11년 경력의 박상돈 경매사는 이렇게 말했다.
"선어와 활어 위판은 명절과 일요일 빼고는 매일 합니더. 많이 할 때는 하루 7~8천만 원씩 하지만 요즘은 1500만 원 안팎입니더. 경매는 소리나 신호로 진행되지만 아무래도 일반인들은 잘 못 알아 듣습니더. 뭐 다 알 필요도 없다 아임니꺼?"
과감하게 끊는 그의 말투에 일종의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든든한 체격에 두둑한 배짱이 눈에 보이는 기관처럼 몸에 배어 있다. 경매과정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에서 우러난 것이리라.
그렇게 1년 동안 경매되는 액수가 1판장의 경우 400억원, 2판장은 100억원을 넘는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두 판장을 합해 1000억 원을 넘었던 때가 있다. '마산 돈이 여기서 다 만들어진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어판장 안팎의 사람들
같은 시각 어판장 밖은 물건을 경매한 중매인들이 점포에서 도매와 소매를 시작하면서 행렬이 시장을 메웠다. 어느 곳의 어시장이든 가장 강한 메뉴에 해당되는 새벽시장. 역동적인 어시장의 하루가 그렇게 시작된다. 경매 직후 도매와 소매 가격은 어떻게 형성되는지 한 중매인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소매인에 넘길 때와 소비자들에게 직접 팔 때는 가격이 다릅니더. 각각 정해진 선이 있지예. 소매인에게는 4% 정도로 웃돈이 잡히고, 소비자한테는 10% 정도 더 받는다고 보면 되지예. 물론 중매인이 경매를 받는 가격은 시세하고 물량에 따라 다르지예."
이 중매인에게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 일 저 일, 새벽시장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눈코 뜰 새 없었다.
한쪽에서는 경매가, 또 한쪽에서는 소비자들 대상의 소매가 즉석에서 이뤄지는 뜨거운 유통의 현장. 어판장 안팎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으면 그 속에 일하는 여러 직종의 사람들을 만난다.
공판장에는 수협 쪽 경매사(모두 5명)와 중매인(1판만 50명, 2판 29명) 외에 공판 전문 인력들이 있다. 경매 직전 어류의 양육과 배열 등 어창작업, 경매 직후 결복(경매된 생선을 포장하는 것)?상차 등에 각각 전문 인력이 종사한다.
이 인력들은 경남항운노조에 소속돼 일한다. 인근 멸치작업장을 포함해 100명 정도 된다. 이들은 비정규직이다. 도급제, 즉 돈내기로 일하는 셈이다. 일해서 돈이 나온 만큼 받아간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루를 완전히 뒤집어 일하는 만큼 이들의 노동강도는 엄청나다. 어창같은 경우 지금은 배의 맨 밑바닥 냉동창고에서 컨베이어로 생선을 옮기지만 옛날에는 일꾼이 생선궤짝을 지고 올라왔다.
40대 후반의 강인중 씨는 10년 경력의 항운 노조원이다. 검고 마른 얼굴에 눈동자는 마치 상대방 너머 먼 곳을 쳐다보는 듯 하다. 공판과정을 설명해달라는 질문에 퉁명스럽게 되묻는다.
"그건 알아서 뭐할라꼬예. 취재를 할라카먼 그런 것보다 문제점을 제대로 알아야될 꺼 아임니꺼?"
퉁명하게 말하면서도 그는 오히려 한 발짝 다가섰다. 눈길은 이제 정확히 상대방을 응시한다. 이어진 그의 말을 들으면 그가 괜히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안 그래도 이 일은 험한 일임니더. 오죽했으면 못 배우고, 나이 많고, 돈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로 낙인 찍혔겠습니꺼. 요즘은 어업이 완전히 사양길로 접어들어 사정이 더 안 좋습니더. 가까운 바다에서는 아예 고기를 못 잡게 하고, 먼바다에서는 중국?일본 협정에 걸리는데 어업이 살겠습니꺼?"
정부에 대한 주문을 맨 마지막에 덧붙였다.
"어업이 안 되면 어민은 무슨 다른 일을 해야 할꺼 아임니꺼. 나라에서는 어민들한테 재취업교육이라도 해야 되는 것 아인가예? 고기는 못 잡게 하고, 대책은 안 세워주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뭐 이런 걸 쫌 써이소!"
어판장의 역사
1944년 만들어진 마산 어판장의 위치는 현 정우상가와 도로 건너편 수협 신용기금 일대였다. 50년 가까이 같은 곳에서 운영되던 어판장이 현재의 위치로 옮긴 때는 1990년 10월이다. 마산만 매립 때문이었다.
어판장이 만들어진 직후부터 마산 어업의 거점 역할을 한 것은 이곳의 경제력과 일대 상권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작은 규모로 공판이 시작됐고, 옮기기 전까지 현재 호텔 신축 현장까지 규모를 넓혔다.
또 어판장을 정점으로 바로 옆에 복국골목, 건어물골목이, 거리를 두고 집단 횟집촌인 홍콩빠가 형성됐다. 오동동 아구찜과 통술골목도 여기서 유통된 해물을 근거로 위치가 정해졌다는 면에서 성격이 연결된다. 어시장과 오동동의 자궁에 해당되는 셈이다.
1955년부터 지금까지 51년째 이곳 어판장에서 일하고 있는 중매인 서양수(74) 씨를 통해 옛날과 오늘날 어판장의 위세를 비교할 수 있었다.
"지금은 한해 거래 액이 많아야 400억이지예. 80년대에는 한 해 1200 억원을 넘겼을 때도 많았제. 아, 잘하는 중매인 한 사람이 한 해 4~50억을 올리기도 했다 아임니꺼."
그의 말대로 올해 1판장과 2판장을 합한 매출 목표는 400억 원. 80년대 1000억 원을 넘었던 매출 기록도 수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창 잘 나갈 때 중매인의 주가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도 서씨는 일화를 전했다.
"나도 한때 36억을 끌어낸 적도 있습니더. 그 때 맨 처음 조흥은행 지점이 생겼는데, 지점장이 바뀔 때마다 중매인을 찾아다녔지예. 사장 소리도 나는 지점장한테 처음 들었어. 그럴 정도로 마산에 수출이나 한일합섬이 생기기 전에는 어시장 경제력이 제일 컸어예.“
50년 전 어판장 모습은 지금과 판이했다. 현 수협의 전신인 어업조합이 경매과정을 맡는 건 똑 같다. 지금처럼 조합이 지정한 경매사가 진행을 하고, 중매인이 물건을 받는 식이다. 그러나 현재 조합의 업무인 어선 유치는 당시에 객주들이 맡았다. 객주들이 실제 '오야지'였던 셈이다.
요즘 항운노조 조합원들이 맡고 있는 생선 하역과 배열, 포장 업무도 당시에는 달랐다. 하역은 하륙조합(항운노조의 전신)에서, 배열과 포장은 객주 밑의 점원들이 맡았다. 이후 정부 차원에서 객주제도를 없앴다. 유통과정을 한 단계 줄여 소비자에게 그만큼 값싼 생선을 제공한다는 목적이었다.
어판장 인생
마산시 수협 어판장 48번 중매인인 서양수(74) 씨는 이 곳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1955년부터 지금까지 51년째 어판장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 2년은 중도매인으로, 나머지 40여 년은 중매인으로 이곳에 머물러 있다.
그의 얼굴은 나이보다 늙어 보이지도, 젊어 보이지도 않는다. 바닷바람이 그의 피부를 거칠게 했지만 50여 년 쉴 틈 없는 노동이 나이보다 그를 늙지 않게 했다. 바다사람 특유의 쇳소리도 그에게는 없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다. 50여년 한결같은 노동이 그의 목소리 높이를 딱 필요한 만큼 유지하게 했다.
서양수 씨가 어판장에 발을 들여놓은 나이는 다른 사람에 비해 빠르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가업을 잇거나, 직,간접적으로 어업과 연결된 상태에서 어릴 때부터 발을 들여놓는다. 서씨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어판에 뛰어들었다. 6.25 뒤 어수선한 세상에서 제 직업을 찾기가 어려울 무렵 먼저 일자리를 잡은 누님이 권유를 한 것이다. 그의 말이다.
"한 2~3년 다른 일에 눈이 팔려 공판장을 떴던 적도 있습니더. 나라고 매일 비린내 몸에 빼이는 이 일이 지겹지 않겠소. 그런데 남들 다 떠난 지금까지도 내가 여기 남은 걸 보면 뭔가 연대가 맞는 모양이야."
늦은 출발에 쉽지 않은 적응과정을 그가 견뎌낸 데에는 사연 하나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전삼도 중매인과의 만남이 그것. 1955년 당시 30대 중반의 중견 중매인이었던 전씨는 서영수 씨에게 두 가지 교훈을 주었다. 하나는 제 길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것.
"얼굴이 이쪽 일할 얼굴이 아이다. 공직생활 할 인상 아이가. 일찌감치 마음 다시 무라 고마!"
그러나 가족까지 딸린 서씨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끈질기게 서씨가 일에 달려들자 전삼도 중매인은 장사하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쳤다 한다.
"잘 들어라. 남다르게 하는 기 중요하다. 술 담배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똑 같이 해서는 성공 못한다."
그렇지 않아도 술 담배를 하지 않던 서씨는 그 이후 신념처럼 이를 지켰다.
그는 어판장 일을 처음 시작했던 1955년 스물넷 때의 어판장 풍경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위치는 지금의 오동동 수협 신용보증기금 앞. 어시장 쪽으로 일직선이었던 부두가 어판장부터 ㄱ자 식으로 약간 튀어 나왔었다.
부두는 수면 밑까지 직벽이었다가 지상으로 올라올수록 경사를 이루는 식으로 대리석이 쌓여 있었다. 어판장 왼쪽에는 원두막처럼 생긴 음식집이 줄을 지었다. 어판장은 양철지붕에 나무기둥이 곳곳에 있었다.
그가 전한 예전 어판장의 경제력은 엄청났다. 그 속에서 과연 그는 얼마나 벌었을까.
"난 얼마 못 벌었어요. 욕심도 안 냈고, 그냥 내 어깨높이 만큼만 보고 살았제. 그래서 지금까지 버텨왔는지도 몰라. 한 때 돈 많이 번 사람 중에는 망한 사람도 많아. 욕심을 냈던 거지요."
그는 아들에게 가업을 물렸다. 현재의 어판장 2층에 작은 사무실과 판장을 오가며 주로 아들이 일을 관리한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술 담배를 하지 않았어요. 내가 내 어깨만큼 세상을 쳐다보는 거나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게 다 통하는 것 같애. 특별히 욕심을 내지 않는 거지. 다들 욕심 때문에 재산 말아먹고, 그만두고 그렇게 했는데. 그래서 내가 돈도 번 게 없는 지도 모르지만……"
그런 그에게 지금까지 얼마나 벌었는지 질문하는 건 무의미했다.
어시장 문을 닫는 복국골목
어판장 일은 꼭두새벽에 벌어지는 일이다. 게다가 새벽 5시 경매를 시작하려면 네댓 시간 전부터 어선에서 생선을 내려야 한다. 지금은 컨베이어 작업을 하지만 예전에는 하역원들이 직접 생선궤짝을 날랐다. 강도 높은 새벽일이 끝나면 이들은 허기로 허겁지겁 먹을거리를 찾지만 그 시간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다.
이 때문에 1944년 마산 어판장이 생길 때부터 주변에는 가장 먼저 식당이 생겼다. 그렇게 하나 둘 형성되기 시작한 새벽식당 중의 하나가 복집이었다. 마산의 복국골목은 그 규모와 역사 측면에서 전국 어느 곳과도 차별된다. 한군데 모인 서른 집 안팎의 규모나, 40년 이상 된 역사가 그렇다.
골목의 유래
오동동과 동성동에 걸쳐 있는 복국골목. 사실상 24시간 문을 열고 있기 때문에 불이 꺼지지 않는 어시장의 상징이다. 현 남성식당 업주였던 고 박복연씨가 40여 년 전 지금의 미진식당 자리에 복집을 열면서 골목이 형성됐다. 이후 마산,덕성 등이 추가됐고, 7~8년 전부터 지금처럼 서른 집 전후의 규모로 늘어났다.
덕성복집 하익자(63, 여) 대표는 복국골목의 형성을 이렇게 전했다. 30년 가까이 복어를 만졌다는 하 대표. 어느덧 그의 눈자위도, 볼록한 양쪽 볼도 복어를 닮은 것 같다. 24시간 교대하며 복집을 지킨 그의 이력이 표정에 담겨 있다.
"공판장 때문에 복국집이 생겼어예. 당시에 중매인이나 도매인들이 새벽에 경매를 끝내고 때 이른 식사를 할 곳이 여기 뿐이었어예."
중?도매인을 비롯해 경매사, 하역조합원, 뱃사람들까지 공판장 경매시간을 피해 황급히 새벽 식사를 이 골목에서 하고 갔다.
그러나 복국골목의 주요 고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산의 주당들이다. 옛날에는 주로 새벽 시간에, 지금은 술을 마신 다음날 점심이나 저녁식사 때에 이곳을 찾는다. 주당 뒤에는 으레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술집 주변 상인들이 일 마치는 시간쯤 복국골목을 북적이게 했다.
복국골목의 형성은 이 지역 복국집 원조 격인 현 남성식당을 통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원조집 자존심이 얼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나는 김승길(65) 씨는 창업주인 고 박복연 씨의 아들이다. 우선 그는 지금처럼 복집이 늘어난 과정에 대해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70년대까지 복요리를 하는 사람한테는 특수자격증을 도청에서 발급했어요. 마산에서는 어머니하고 신마산의 조일수씨 두 사람뿐이었지. 그런데 도가 귀찮으니까 이걸 시,군으로 넘겨 버린 거야. 그 뒤에는 별일이 다 생겼지. 우리집에 종업원으로 일하러 들어왔다가 한두 달 있다가 나가서 복집 차리고, 콩나물국밥이나 국수 같은 거 팔다가 복집 차리고, 별의 별 일이 다 생겼어."
그가 말한 별의 별 일의 유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복집이 한꺼번에 늘어날 당시 후다닥, 얼렁뚱땅 복요리를 만드는 당시의 행태를 지적한 것. 또 하나는 제대로 된 복 요리법을 몰라서 발생하는 수많은 중독사고의 형태였다.
"복어는 전 세계에서 180종류, 우리나라에만 열댓 종류가 넘어. 복어가 가진 독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사람 목숨을 살리고 죽이고 하는데 그게 한두 달만에 터득이 돼?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복어의 독성
남성복집 김승길 씨의 설명대로 70~80년대 복어 중독 사고는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맛이 이상하다는 손님들 지적에 요리사가 한두 숟가락 맛을 봤다가, 오히려 요리사가 먼저 죽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80년대까지 ‘누가 복어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 하나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복어 요릿집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처럼 복집이 서른 집 가까이 집결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특수면허까지 행정기관에서 발급할 정도로 엄격했으니…….
속담에 '파종할 때에는 복을 먹지 말라'는 말이 있다. 파종 때인 3월, 산란기를 맞은 복어의 독성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라 한다. 특히 독성이 가장 강한 참복어는 한 마리의 독으로 33명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 복어 독성인 '데트로도도기신' 성분이 청산가리의 10배가 넘는 강도를 갖고 있다니, 그 살인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복어보다 더 독한 존재는 그걸 요리하는 사람의 손인 것 같다.
복집 업주들은 그러나 2000년 이후 복어 중독사고가 현저하게 줄었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두 가지. 우선 독이 거의 없는 양식 복어가 많아졌고, 조리법 자체가 독을 제거하는데 철저해졌다. 간과 같은 내장에다 눈, 아가미까지 독이 들었을법한 부위는 죄다 씻어내고, 핏대를 없앤다는 이야기다.
복어는 전 세계에 걸쳐 100종류가 넘는다. 이곳 복집에서 다루는 복어는 쫄복과 까치복, 금복과 은복, 황복 등 10여 종류. 요리는 복국과 매운탕, 튀김, 껍질무침, 지리, 수육 등의 종류가 있다. 우리가 흔히 6천~7천 원 주고 먹는 복국은 값이 싼 은복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마산처럼 서른 집 규모의 복집이 한 동네에 집중된 곳은 전국에서도 드문 경우다. 마산 복집 골목의 인기에 대해 덕성복집 하익자 대표의 비유가 재미있다.
"창원에서 넘어오라고 난리라예. 손님은 책임질테니 창원 쪽에 가게를 내라는 거지. 모두 옛날 마산에 근무하다 창원으로 넘어간 사람들이지예. 기업도 있고, 기관도 있고 그래.“
어쨌든 그렇게 자리를 편 복국골목은 현재 남성식당 골목을 중심으로 인근 두세 블록까지 확대됐다. 복국에 복수육, 튀김에 회까지 종류별로 먹는 복어요리는 수협 어판장 옆 복국골목으로 인해 더욱 풍성해졌다.
복국골목의 요지경
새벽시간 복국골목이나 식당을 찾는 손님은 천차만별이다. 벌어지는 일도 다양하다. 이미 몇 차를 거쳐 거나해진 술기운에 이 사람 저 사람, 별의 별 일이 다 벌어진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떻든,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차별 없는 복국 집은 한결같이 태연하다.
지금도 대부분의 복집은 하루 24시간 영업을 한다. 손님이 주로 찾는 점심?저녁 시간외에 2차,3차의 술자리 끝에 해장을 하려는 사람들이나 공판장 중,도매인처럼 이름 아침 식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벽영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새벽영업 비중은 1997년 IMF를 전후로 정 반대가 됐다. 그 전에는 새벽영업 비중이 오히려 낮 장사보다 높았다는 이야기다.
한 복집 업주의 이야기다.
"어떨 때에는 중,도매인들이 돈 뭉치를 그냥 두고 가고 그랬어예. 나중에 찾으러 와서는 만원짜리 몇 장 건네주기도 했제. 참 돈이 흘러 넘치던 시절이었지."
한때 중,도매인뿐만 아니라 경매사와 하역조합원들, 생선을 대는 뱃사람들까지 북적댔다는 복국골목. 당시 연 매출이 1000억 원을 넘었다는 수협 어판장과 중매인들의 경제력을 그대로 전하는 말이다. 그러나 새벽 손님은 어업 쪽 사람들보다 술을 마시거나 팔거나 했던 술집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 연결되는 이야기들.
"요즘은 새벽 손님이 뜸한 편입니더. 경기가 좋을 때에는 점심 저녁때보다 새벽 손님이 많은 적도 있지예. 80년대 전두환 때에 경기가 좋았는데……. 술 마시고 해장하러 오는 사람도 많았고, 공판장에서 일했던 사람도 많았고예."
또 다른 업주.
"밤 12시부터 오동동에서, 어시장에서 새벽까지 손님이 안 끊기고 왔다 아입니꺼. 아무래도 술꾼이 가장 많았지예. 다음이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또 그 주변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었지예. 그러니까 맨 정신으로 오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아입니꺼."
이야기가 잠시 긴장되는 듯 했다.
"말도 마이소, 술 취한 사람들이 좁은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으이 싸움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주방입구에 그릇 담은 접시는 하루도 남아나는 날이 없었어예. 장사는 됐지만 그 때 일한 아줌마들은 고생 꽤나 했지예."
'좋은 일에는 늘 마가 끼는 법'이라 했던가? 장사가 잘 되는 걸 시샘하는 좋지 않은 일도 많았단다.
"약삭빠른 놈들도 많았어예. 일단 가게에 두세 번 먼저 찾아오는 거야. 그렇게 식사를 하고 가지. 그래서 안면을 익혀놓고는 한날 단체손님을 데리고 오는 거야. 그러고는 외상을 달래는 거야. 그 다음에는 아예 발길을 딱 끊는 거 아임니꺼, 세상에!"
새벽 손님의 유형은 더욱 재미있었다 한다. 복집 구조가 대부분 좁은 방바닥에 다닥다닥 테이블을 놓고 있기 때문에 그 유형은 물론 대화 내용도 엿들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밤새워 마신 듯한 직장인에 대학생들의 모습, 부부인지 연인인지 쉽게 추측할 수 없는 커플. 특히 새벽 한기를 점퍼 속에 가득 담고 허겁지겁 복국을 '후루룩'거리며 마시는 어시장 상인들의 모습은 '활기' 그 자체다.
횟집골목의 원조 홍콩빠
어시장 '홍콩빠'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고 있다. 거칠면서도 왠지 찰떡 궁합같은 두 단어의 조화 홍콩빠. 이는 마산 어시장 최초의 집단 횟집촌 이름이다. 지금의 대풍골목, 진동골목, 장어골목 등지의 원조에 해당된다. 횟집골목은 시장 안에서 더욱 역사가 오랜 건어물전과 함께 마산 어시장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이름의 유래
지금도 홍콩빠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대우백화점 지상주차장 입구의 횟집골목이 그곳이다. 입구 바로 옆쪽 횟집에서 이어진 블록 내 스무 집 가까이 되는 곳을 지금도 '구 홍콩빠'라 한다.
그러나 지금 모습으로는 옛날 다닥다닥 붙어, 마치 나열돼 있는 중매인 점포들을 연상케 했던 예전 홍콩빠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목조로 바다 위에 반쯤 걸쳐 있던 원조 홍콩빠의 모습은 더욱 온 데 간 데 없다.
상상을 해 보라. 어시장 한쪽 바닷물 위에 다리를 세운 목조의 횟집을. 바다가 훤한 건물 안에서 회를 먹으면 건물 밖에는 바닷물이 차올라 찰랑찰랑 거린다. 쫄깃한 회에 소주가 한두 잔 들어가면 사람들은 헷갈린다. 바다가 찰랑대는지, 내가 앉은 횟집이 울렁거리는지…….
구 홍콩빠 내에 있는 대구횟집 김휘남(62) 대표와 전영숙(53) 부부는 이 위치로 홍콩빠가 이전할 때부터 횟집을 운영했다. 특히 전씨는 모친이 1960년대부터 옛 어판장 옆에서 횟집을 시작했고, 그 후 원조 홍콩빠가 만들어질 때부터 열댓 집 중에서 하나를 운영했다.
이들 부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경륜이 느껴진다. 그렇게 바쁘거나 요란하지 않다. 손님이 오면 오는 대로, 가족끼리 있으면 또 그런 대로 넉넉하게 웃고 떠든다. 그러면서 소리 없이 장사 준비를 한다.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가업인 것이다.
"내가 1953년 생입니더. 중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어머니가 횟집을 했는데, 위치가 지금의 정우상가 옆 옛날 어판장 근처였어예. 그 뒤 그 장소에 홍콩빠가 처음 만들어졌지예. 그러니까 지금의 정우상가와 농협 남성동지점 중간쯤 됐지예. 지금의 레벤식품점 쯤 되지예."
그의 입에서 이윽고 왜 '홍콩빠'가 됐는지, 설명이 시작됐다.
"처음 홍콩빠 장소가 참 좁았어예. 그래서 좁은 장소를 넓히려고 바다 난간 위에 나뭇발을 세우고 판대기를 받쳐 장소를 넓힌기라예. 그러니까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집처럼 됐는기라. 그때부터 손님들 몇몇의 입에서 홍콩빠라는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어예. 홍콩에 그런 수상 음식점이 많다꼬 카면서……. 거기 나중에 위치를 옮기면서 아예 공식적으로 이름이 홍콩빠로 정해졌다 아임니꺼!"
"지금 위치로 옮긴 지는 한 20년 됐다아임니꺼. 매립 때문에 옮긴기라예. 처음에는 지금의 대우백화점 시작되는 골목 끝에서 활어골목 옆에 포장횟집이 있는데까지, 200m가 넘었지예. 집도 60집이 넘었고. 그게 1990년도쯤 다시 매립되면서 다시 줄었고, 지금은 몇 집 밖에 안 남았지예."
바다랑 흔들리는 홍콩빠
그가 밝힌 홍콩빠의 근원은 어판장 옆 너댓 개 횟집. 접시에 무를 썰어 소복하게 담고, 그 위에 회를 산처럼 올려 비벼 먹었던 형태가 처음이라고 했다. 이전에는 그런 개념의 횟집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 너댓 집이 원조 홍콩빠에서 열댓 집으로 늘고, 매립에 따라 위치를 바꾸며 성장과 쇠퇴를 거듭했다고 했다.
처음 홍콩빠는 알려진대로 목조였다. 전씨는 '원두막 같았다'고 했다. 썰물 때를 기준으로 홍콩빠 앞 바다수면까지는 콘크리트 직벽이었다. 수면 위부터 사람들이 걸어 다녔던 노면까지는 경사진 돌담이었다. 설명대로라면 경사진 돌담 위에 홍콩빠 건물의 바깥 기둥이 세워졌고, 건물본체가 노면에 걸쳐있었던 셈이다. '홍콩빠'라는 이름도 이런 구조에서 나왔다. “바닷물 위에 떠 있다고 해서 홍콩빠라고 했다”는 것이 전씨의 설명이었다.
그 다음 80년대에 옮겨진 홍콩빠는 매립지 바닷가에 철제 가건물 형태로 똑같은 집이 많을 때에는 60개까지 있었다. 전씨가 80년대 홍콩빠의 영화를 단적으로 전했다.
"그때는 바다 건너 한국중공업에서 단체로 배를 타고 회식을 하러 왔습니더. 마산에서 술을 먹는다 하는 사람들 1차는 일단 홍콩빠였다 그말이지예."
박덕심(76) 씨는 전영숙 씨의 모친이다. 그는 왠지 직접 만나기를 꺼렸다. 친딸인 전영숙 씨의 소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그를 만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도 예전 자신이 했던 일이 비린내 난다고 생각됐던 걸까.
망설이는 그에게 띄엄띄엄 자신의 이야기를 전화로 물었다. 그의 기억에 처음 일을 시작했던 나이가 대충 30세 때. 1960년대였겠다. 그는 처음 어판장 옆에서 생선, 해물 등을 노점 형태로 팔았다.
"그때 어판장 조금 떨어져서 충무?통영 뱃머리 근처에 횟집이 한두집 있었어예. 그게 서너 채로 늘고, 나중에 홍콩빠가 됐어예. 나중에는 아예 홍콩빠라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지예."
그때까지 어시장 옆 노점을 지키던 그는 이후 80년대 대우백화점 앞쪽으로 홍콩빠가 옮겼을 때부터 직접 횟집을 운영했다.
홍콩빠 인생
원조 홍콩빠 3번, 정식 홍콩빠 15번 점포를 운영했던 조상점(여, 77, 마산시 신포동)씨. 1969년부터 2005년 현재까지 어시장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그의 인생을 듣기는 어려웠다. 신세타령을 할 여유도, 생각도 없는 어시장 인생 아닌가. 어느 순간 추근대는 상대방이 귀찮아졌던 것 같다. 30분 이상 말없이 마늘이며 당근을 썰어내는 칼날에 지긋이 눈길을 주던 조씨가 어느 순간 갑자기 책을 하나 꺼냈다. <한국의 민중 100인>. 그의 일대기가 담긴 글의 서두에 이렇게 기록됐다.
'그는 1남 3녀를 남기고 남편이 사망한 서른아홉 때 마산 어시장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당시 위치가 원조 홍콩빠가 형성됐던 옛 남성동 어업조합과 거제,통영 뱃머리 사이. 장사는 노점에서 목조로, 정식 홍콩빠가 들어선 뒤 가건물 형태로 장소를 바꾸며 계속됐다.'
이 대목에서 조상점 씨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덧붙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사가 어느 순간 어시장의 이야기가 되고, 또 자신의 이야기로 되돌아왔다. 두 이야기는 친자매처럼 닮아있었다.
"어시장 노점도 바로 시작한 게 아임니더. 남편이 죽고 나서 감 장사도 하고, 뭐 딴 것도 하고 그랬소. 지금 생각하먼 눈물이 핑 돌지만, 그 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조상점 할머니는 먼저 현 농협 남성동 지점 동쪽에 있었던 바닷가 목조 건물 기억을 떠올렸다.
"광목 다릿발을 세워서 지붕엔 양철을 얹고, 벽에다 밀가리 자리를 덮었다 아이가. 바다 쪽을 훤히 틔워서 술 먹다가 파도가 가게 속으로 들어오고 그랬제. 손님들은 그걸 참 좋아 했습니더."
그렇게 장사를 한 지 5~6년 만에 현 남성동 어시장 활어골목 일대에서 대우백화점 지상주차장에 이르는 정식 홍콩빠로 옮겨왔다.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생존권 보장 차원의 집단점포 건축을 마산시에 요구하며 상인들이 뭉쳤고, 64명이 투자를 한 가운데 땅을 확보하지 않은 채 건물을 먼저 지었다. 뒤에 시는 토지 점유를 허용하고, 홍콩빠라는 이름까지 지정해줬다.
"지금은 전화만 하먼 고기를 갖다 준다 아이가. 그때는 고기를 먼저 차지한다꼬 치고 박고 난리였제. 그땐 뭐 부끄러운 것도 없었지예. 고기를 대주는 남자들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쳐 넣고 냅다 뺏어오고 그랬다 아임니꺼. 어떤 때는 부두에서 고깃배로 바로 뛰어들다가 물에 빠지고 그랬다 아이가."
전성기는 끝까지 가지 않았다. 1989년 당시 어시장 일대 대부분이 매립되면서 홍콩빠는 사라졌다. 이후 지금의 해안도로 건너편 선유도횟집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두세 차례 이전을 거듭했다. 그런 부침 속에 조상점 여사는 현재 '구 홍콩빠'라 불리는 대우백화점 옆 횟 집촌 내에서 '우리횟집'을 운영하고 있다.
홍콩빠의 오늘
홍콩빠는 아직 살아있다고 했다. 앞서 설명대로 현재 신포동 대우백화점 주차장 쪽 블록의 횟집촌을 이곳 상인들은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 어시장의 횟집촌은 한두 곳에 집중돼 있지 않다. 어시장 활어골목이나 대풍골목, 해안도로 건너 바다 쪽의 장어거리까지 형태는 다양하고, 규모는 더욱 커졌다.
'가을전어에는 참깨가 서말'이라고 했다. '가을전어 맛에 집 나간 며느리도 들어온다'고도 했다. 말 그대로 초가을 참깨 같은 맛의 가을전어가 전국적 히트상품이 된 데는 이를 대량 상품화한 마산 어시장의 힘이 컸다. 특히 활어골목과 대풍골목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아예 취급하지도 않던 전어 회를 1980~90년대부터 손님들에게 내놨다. 위치는 농협 남성동지점 일대. 활어골목이 가까이, 그 너머에 대풍골목이 있다. 수족관 넘어 횟집 아줌마들의 고함소리나 칼질이 끊이지 않는다.
"마, 들어오소. 전어가 1키로 2만원이요. 광어도 좋고, 우륵도 싱싱하다 캉께네. 아따 와 그냥 가노!"
고함소리 요란한 활어골목 안 횟집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치는 데에는 제법 뱃심이 필요하다. 왠만해서는 골목 어귀에서 시작되는 아줌마들 고함에 대충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이곳도 기웃거리고, 저곳도 얼쩡거리는 어시장 골목 맛을 느낄 수 없다.
또 한여름 장어골목의 장관을 놓칠 수 없다. 1㎞인가, 2㎞인가, 헤아릴 수 없는 장어집 가판대의 행렬. 분명 가판 옆 바닷바람을 기대하면서 장어집을 찾았을 터다. 사람들은 그러나 옆이 바다든, 매립지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어시장 명물 만들기
신새벽 어시장의 공판장 경매는 활력이 넘친다. 무겁게 내려앉았던 어둠과 정적을 한번에 몰아낸다. 그러나 경매작업 전 서너 시간 동안 생선을 어선에서, 또 다른 차량에서 하역하는 작업은 잠을 자지 않고 진행되는 고단한 작업이다. 생생한 활력을 고단한 노동이 만들어낸 것기이다. 어시장은 고단함과 활, 대조적인 두 단어의 조합이다.
어판장에서 시작하는 어시장은 또 다른 새벽 경매 직전까지 밥 손님을 받는 복국골목에서 문을 닫는 듯 한다. 그러나 어시장에 하루의 마감이란 없다. 이내 다른 하루가 이어진다. 생명, 맥박과 같은 곳이다. 휴식하거나 중단하면 영원히 그 실체를 잃는 존재가 어시장이다.
어시장은 재래시장이지만 재래시장이라는 이름에 드리운 그늘이 없다. 끊임없는 맥박으로 생명을 잇는 어시장은 재래시장 발전모델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서부 시애틀 어시장 '파이트 플레이스 피시'라는 대규모 생선판매점처럼. 상인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이곳의 이름 앞에 '월드 페이머스'를 붙인다. 그런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없다. '자칭 타칭'인 셈이다. 이곳이 시애틀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된 이유가 있다. 우선 손님들로부터 주문 받은 생선을 코너 이곳저곳에서 재빨리 던져 전달하는 행위. 이곳에서 1분에 가장 많은 생선을 던진 기록이 기네스북에 올랐단다. 또 하나는 이곳의 응집력 있는 마케팅 능력이다. 20명도 되지 않는 종사원들이 완전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 느낌, 결정, 행동으로 일한다는 그림 같은 이야기.
어쨌든 시애틀의 '파이트 플레이스 피시'와 같은 활기를 마산 어시장에 기대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이곳의 생선 던지기와 같은 명물을 만드는 일도 멀지 않다. 이른 새벽의 생선경매, 고함과 칼질소리 난무하는 활어골목, 1㎞ 이상 이어지는 장어거리의 불빛. 어느 하나도 조금만 변형시키면 시애틀의 생선 던지기 못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현실을 만들어 가면서 평범함에서 벗어나 위대함을 실현시킬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믿고 실천하는 시애틀 어시장 상인들의 이야기가 마산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