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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조된 관동군 120 사단 빼앗긴 교실 1944년 11월 관동군 120사단이 대구에 주둔하면서 경상도 지역에 있는 학교에는 어디서 왔는지 갑자기 군인들이 모여 들어 학생들은 교실을 내어주고 다리밑이나 교회당이나 빈터로 쫒겨 났으며 책상이나 걸상은 군인들이 때깜을 쓴다면서 그대로 두고 나왔다. 당시 소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는 책보따리를 등에 메고, 아버지가 만들어준 무거운 걸상을 짊어지고 읍내 예배당 안으로 옮겨갔다. 예배당은 살고 있던 집 근처이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 “핵교 가까우이 잘됐네” 하였다. 넓은 예배당 안에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학급 구분도 없이 옹기종기 모퉁이를 나누어 모였고 담임은 제가끔 목소리를 높여 떠들었다. 책을 펴들고 읽어내려 가는 선생도 있고 이야기를 하는 선생도 있어서 이야기 잘하는 선생쪽으로 귀를 기울일 때가 많았으나 눈의 방향은 담임선생에게 두었다. 음악시간에는 학년 학급을 가릴 것 없이 교회 풍금소리에 맞춰 모두가 한 반처럼 불렀다. 물론 왜군들이 침략할 때 부르는 군가뿐이지만 목이 터질세라 부르고 또 불렀다. 2박자로 된 행진군가를 부를 때에는 예배당 판자마루가 쿵쿵하고 울리도록 발을 맞추면서 제자리걸음으로 걷기도 하고 빙빙 돌며 병아리 떼처럼 외쳤다. 이 교회는 어머님이 다니시는 교회였는데 가끔 어머님을 따라 교회에 와서 예배도 보고 놀던 곳이었다. 발걸음도 조용히 걸어야 한다고 어머님으로부터 주의 받던 곳이라 왠지 모르게 콧물이 많아 눈치껏 훌쩍이던 이곳에서 군가를 우렁차게 불러대고 발을 쾅쾅 굴러 본다는 것은 신나는 일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우리가 예배당으로 교실을 옮긴 후부터는 엄숙한 모습의 목사님도 못 봤고 어머님 역시 노는 날에도 빨래만 할 뿐 교회에 가실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모두 잡아간다더라.” 라는 말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방구석 어디서나 보이던 어머님이 소중하게 지니고 계시는 책은 구경할 수 없었고 일요일에는 동생을 업고 나의 학교이자 어머님의 교회인 그 예배당에 놀러갔다. 조용한 마당에 풀잎만 굴러다니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여 썰렁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는 양지바른 계단 앞에 동생을 앉혀 놓고 담벽 아래에 있는 코스모스 꽃씨를 훑으며 이것을 우리 집 담안에 가지런히 뿌려볼까 생각에 열중하고 있는데 동생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히야! 추워! 집에 가. 앙앙” 동생이 아파하는 곳이 발인가 하고 우선 발바닥을 뒤집어 보고 내 발바닥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동생의 발바닥에 이상이 있었다. 동생의 발바닥은 잔금이 수없이 많고 내 발바닥처럼 굵은 금이 하나도 없었다. 놀랜 나는 즉시 동생을 둘러 업고 집으로 돌아 와서 어머니에게 숨이 넘어갈 듯 울먹이면서 황급히 말씀드렸다. “엄마! 큰일 났어. 야가 많이 아픈가 봐?” 어머니는 동생의 이마를 만져 보신 후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빙긋 웃기만 하셨다. 부러진 복깽 나는 운이 나쁜지 1학년부터 2학년까지 줄곧 마쓰오까라는 이름의 조선사람 선생이 담임을 맡아 사사건건 트집을 잡은 바람에 풀이 팍 꺾여 지냈다. 마쓰오까 센세이는 나이도 들만큼 든 중년남자로서 키도 크고 말씨도 우렁찬 사내였다. 그는 유독 조선 학생들에게만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려 나도 그 앞을 지나치거나 혹 잘못으로 불려가기만 하면 오금조차 펴지 못할 뿐 아니라 말도 더듬더듬 했다. 이 마쓰오까 센세이는 조선인은 나무를 칼처럼 다듬은 ‘복깽’을 허리에 차고 눈을 부라리면서 다니는데 그의 눈에 잘못 걸렸다 하면 어깨고 종아리고 구분 없이 퍽퍽 소리가 나도록 후려 팼다. 내가 그의 복깽에 잔인스럽게 맞았던 사실은 50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떠오른다. 우리 학급에는 왜놈 학생이 몇 놈 섞여 있었고 모든 책은 왜놈말로 쓰여 있었다. 평소 집에서 하던 말을 무심코 중얼거리기만 하여도 그 날 변소 청소는 맡아놓고 해야 했다. 우리말을 한다고 하는 사실을 마쓰오까 센세이라는 조선인에게 일러바치는 자는 주로 왜놈 종자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 같은 조선 학생들 중에서 공부께나 한다고 하는 자, 까만 제복을 맞춰 말쑥하게 차려 입었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자식들이 잘 일러바치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조선놈끼리는 일러 바쳤다 해도 별 괘씸한 생각보단 다소의 동정심도 아닌 그저 측은한 생각 같은 것이 들어서 반감이나 적대적 감정은 없었다. 다만 왜놈이 그런 고자질을 했다 하면 그저 박살을 내려고 벼르기도 했다. 하루는 집으로 가려고 다리를 건너는데, “나강끼! 니강끼!” 내 왜놈식 이름을 부르며 뒤따른 놈이 있었다. 바로 두 명의 왜놈이었다. “뭐라꼬? 니 머라켓노 이놈아야.” 나는 팩 고함을 쳐서 기를 돋우었더니 따라오던 두 놈은 내 작고 처진 눈초리를 보고서 슬금슬금 피하는 척 하더니 저희끼리 눈을 맞춰 ‘개다’라는 그놈들 나무 신발을 벗어 들고 덤벼들었다. 덩치는 나보다 크지만 그래도 나는 어릴 때부터 낙동강가 모래사장에서 배운 씨름 솜씨도 있고 평소 집안팎에서 소문난 깡다구 기질이 발로되어 순식간에 두 놈을 거꾸러뜨렸다. 한 놈은 도망가고 한 놈을 타고 앉아 목을 사정없이 졸랐다. “쾌엑! 쾌엑!” 놈은 눈알을 굴리며 죽는 시늉을 하기에 고무신짝으로 낯짝을 때려주고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내일 일어날 꼬락서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했다. 그 이튿날 아침 일찍, 그 마쓰오까 센세이라는 조선인 무법자에게 끌려간 나는 냄새 고약한 변소 뒤에서 그 ‘복깽’이 두 동강이 날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뒤늦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오셔서 간신히 집까지 옮겨져 왔는데 부러진 곳은 없어도 전신에 시퍼런 멍이 구렁이 감은 것처럼 돋아났었다. 그리고 해방되던 날 안 일이지만 마쓰오까는 ‘이XX’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도 낙동강 모래사장에 내려서면 그 왜놈 자식이 내 발밑에 목이 깔려 숨을 몰아 쉬면서 “쾌액! 쾌액” 하는 몰골이 가끔 떠오른다. 망할 때가 되었다 관솔을 따러 갔다. 소나무에 붙어 있는 관솔이라고 하는데 소나무공이에는 송진이 붙어 있어 옛날 전등이 없거나 기름대신 이를 모아 밤에 불을 밝혔다. 끄으름이 많이 나서 방안에서보다는 주로 야외행사 때 쓰였는데 바람이 불어도 잘 꺼지지 않고 오래가는 것이 특색이다. 처음에는 4학년 이상만 따오라고 하더니 1945년 봄에는 1학년까지 책임량을 지정하여 가져오라고 했다. 집에 있는 장작더미에 붙어 있는 관솔을 따다 주다가 결국 그것으로는 책임량을 다 못해 할아버지를 모시고 산에 올라 소나무공이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내 키보다 더 길고 큰 굉이자루를 들고 아무리 휘저어도 단단히 붙은 솔공이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질긴 솔가지를 뜯어내느라 이빨로 물어뜯어도 하고 손톱으로 긁어 보기도 했는데 솔공이 하나를 캐는데 한나절을 그냥 보내거나 하루를 산 위에서 그냥 보낼 때도 많았다. 솔공이가 무겁기는 또 꽤 무거웠다. 산꼭대기에서 짊어다 집에 가져다 두었다가 학교에 가져가서는 공부가 끝나는 오후에 관솔기름을 짠다고 하는 공장까지 운반해야 하는데 어린것들이 들짐으로 져다 날라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약 20여리는 됨직한데 등골에 박히는 고통과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는 어린 우리들의 얼굴에는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땀방울이 눈을 적시고 앞을 가렸다. 1945년 3월 25일 유황도의 일본군이 전멸하였다는 아버지 말씀을 듣고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기는 했지만 학교를 오고 갈때에는 "덴니 가와리데 후기오오쓰..."를 열창하라면서 상급반 인솔자가 구령을 불렀다. 마치우리도 군인이 되는 것 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어디에서 들었는지 몰라도 할아버지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엿듣곤 했다. 4월 1일에는 미 해병대가 오끼나와를 점령하고 그 다음은 구슈를 공격코자 할 때 일본군은 만주에 있던 소위 막강한 관동군을 풀어 반도의 남단을 거점으로 제주도를 교두보로 하여 일본 본토로 진격해 들어갈려는 미국군의 주력을 협공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의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려고 하는 한편 일본 본토가 전쟁의 중심이 되는 것을 피하고 한반도를 전쟁의 중심으로 유인하여 이 땅을 쑥밭으로 만들려는 속셈도 아울러 계산하고 있었다. 이러한 짐작은 그 당시 일본군의 병비증강 상황을 눈여겨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악랄한 자는 언제 어디서나 못된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45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특히 제주도를 중심으로 하여 나남, 고창, 이리, 부안, 군산, 서천, 신태인 등지에 병단이 속속 들어섰고 이들은 주로 함경북도 경원, 남양, 도문, 동관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으로서 79사단, 96사단, 150사단, 160사단 등이 재편성 또는 혼성의 형식으로 창설하여 남하시켰던 것이다. 이외에도 위수사령부를 서울 용산, 대구, 광주에 별도로 분구를 두어 확장시키는 등 경상, 전라, 충청지방과 제주도를 전쟁터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45년 4월 15일에는 서울 용산에 있던 58군사령부를 설치하고 5월 하순에 걸쳐 배치 완료했다. 이로서 제주도에는 무려 8만의 병력이 동원되어 미군의 구슈열도 진공을 간접적으로 저지하며 그 예봉을 한반도로 돌려 마지막 혈투를 이 강토에서 벌려보려고 애를 썼던 얌충머리 없는 작당을 서슴없이 했던 것이다.
얌체전략의 괴멸 45년 5월 30일 관동군은 중국 북부지역과 만주 전역을 포기할 정도로 전략을 다시 수정하여 오끼나와를 발악적으로 사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끼나와는 6월 25일에 함락되고 이를 기지로 미군의 제해권과 제공권이 확장되었다. 이리하여 남한 일대의 선박과 항공이 통제되면서 병력은 대개 야간에만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남한에서 병력을 대거 징발하려 하였으나 이미 징용과 학병으로 끌려간 뒤였다. 이 때의 병단은 22개부대에 2만명 정도를 넘지 못한 취약한 상태였다. 재향군인 중 늙은이도 뽑았고, 조선인 징병자도 훈련도 시키지 않고 군대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통영에서 만난 노인분들이 이를 실증하는 말을 들려 주었다. “당시 나는 학교 교사인데 학교마당에 교사전원을 모아 놓고 느닷없이 장교복을 한벌식 나누워 주더니 항구 어귀에 묶어둔 어선들위에 각기 올라 태워 남해바다 이곳저곳을 떠다니게 하면서 시위를 하게 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이선생이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때 왜 놈들이 우리를 미끼삼아 눈속음질 하려한것인줄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상 45년 2월 11일 이후 반도에 동원된 일본군의 군사력은 1개군, 4개 사단, 5개 위수사령부, 직할여단 및 30여개의 병단을 통틀어 10만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반도를 최후까지 사수하면서 영원한 식민지로 갖고자 한 음흉한 술책과 아울러 본토로 향하려는 미군의 정예를 유인하여 보려는 술책도 감추어져 있었다. 막강한 관동군이라 할지라도 이미 정예군은 모두 말레이지아, 버마, 인도네시아 등 남방전투로 실어 보내고 나이 많은 군인이나 현지조달한 중국인과 조선인 혼성으로 형성된 상태여서 외형적으로만 숫자를 채운 정도에 불과했다. 유명무실한 군대이긴 하지만 피로에 지치고 다투어 전과를 올리려고 하는 공격군들에게는 좋은 미끼임에 틀림없었다. 맥아더가 이끄는 미태평양사령부소속 해병부대는 유구열도 오끼나와(沖繩)에 상륙한 다음 제주도로 북상하지 않고 다행히도 구슈(九州)로 다시 일본본토로 진격함으로 해서 반도에서의 전투는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과거 우리역사에서 보듯이 또 이 땅에서 청일전쟁과 같은 대리전쟁을 겪을 뻔 했지만 천만다행하게도 간신히 남의 싸움에 등터지는 대리전쟁을 모면한 것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상흔이 남아 있는 제주도 남벽에는 당시 왜놈에 의하여 파 놓은 위장된 포대구멍이 그대로 있지만 우리는 천우신조로 이 교묘한 모략에도 불구하고 험한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 힙쓸릴뻔한 아슬아슬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에는 그보다 더한 민족상잔의 뼈저린 고통을 지금까지 되뇌고 있긴 하지만 여하간 이래저래 그놈들의 소행은 끝없이 밉고 또 미워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종자들임에는 틀림없다. 이 종자들이 또 무기를 들고 아시아를 다시 침략하겠다고 하는 모의를 한다고 한다. 그 전쟁 이후로 이제 겨우 45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때 그 어린아이가 늙은 노인이 되어 걱정을 하고 있건만 사람들은 망각증 들린 쥐떼처럼 곧장 잊어 버린다. 지금 일본 자위대병력이 25만명이라고 하는데 이 25만명이라면 1,000개의 사단과 그 부속부대를 즉각 편성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1명의 자위대대원의 능력은 곧 1개 중대병력을 편성지휘할 수 있는 중대장급 고급병력을 의미하는 고로 일본은 언제던지 1,000여개의 보병사단 병력을 급조할 수 있어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해도 이에 맞서는 충분한 병력을 최대한 신속하게 동원할 여력이 있는 것은 참고로 우리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할것이다. 또 한차례의 비바람이 몰아 천둥번개로 크게 한 번 놀랄 것이고 벼락이 그 악독한 종자를 싹쓸이 할 날이 가까워 올 것만 같다. (1995년) 이 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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