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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김문 著
차례:
머리말 1. 바리새인의 누룩 2. 무엇이 하나님을 아는 것인가 3.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4. 하나님의 은혜와 바리새인의 누룩 5. 성령님의 역사와 바리새인의 누룩 6. 참된 믿음과 바리새인의 누룩 7. 바리새인의 누룩을 버리자 맺는 말
머리말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율법주의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쉽게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는 율법주의 신앙이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바리새인의 누룩의 전염성에 면역이 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나는 본서를 통하여 바리새인의 누룩이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바리새인의 누룩인 율법주의는 단지 수단만 바꾸었을 뿐,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여 넘어뜨리고 있다. 마치 구약시대의 아세라 우상이 초대교회 때에는 다이아나 신으로, 중세시대에는 성모라는 칭호로, 현대에 이르러서는 평화의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만일 영적인 안일함에 빠져서 우리의 신앙을 그저 완전한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본서는 휴지통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서가 조금이라도 우리의 신앙을 반성해보기 위한 안내서로 소중히 취급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006년 가을 게스트하우스에서
제 1장 바리새인의 누룩
바리새인의 누룩- 율법주의
성경에서 바리새인의 누룩은 율법주의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 오지 아니 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 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치 못 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 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6-12). 위의 말씀에서 보다시피 바리새인의 누룩은 그들의 외식(눅12:1), 즉 율법주의 신앙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주의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율법주의가 참 신앙과 매우 비슷하여 분별해 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깨어있지 않으면 율법주의 신앙에 쉽게 빠지게 될 것이다. 율법주의 신앙은 참 신앙과 어떤 부분에 유사점이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때 신앙의 의식을 열심히 행하게 되지만, 율법주의에 빠졌어도 신앙의 의식을 열심히 행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다만 율법주의에서는 신앙의 의식이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한 표현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내려는 수단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율법주의와 참 신앙의 유사한 점인 동시에 구별되는 점이다. 이와 같이 거짓 신앙인 율법주의는 참 신앙의 옷을 입고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자신의 신앙이 완전한 것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에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관련된 이러한 부분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주의 신앙은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는 말하지만 그것이 어떤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들과 꼭 같은 신앙에 자주 빠지면서도 자신의 신앙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에서 어떤 부분이 바리새인의 누룩인지를 알고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본서를 통해 우리 모두가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실재 삶에서 바리새인의 누룩이 제거되며, 신앙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율법주의의 심각성
신, 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율법주의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고, 참다운 신앙을 왜곡시키는 일을 해 왔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관인 율법주의의 배후에 사탄이 자리 잡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 바리새인은 신약 복음서의 기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말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 구약 시대를 이어주는 400년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암흑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의 패권 국가들에게 침략을 당하여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수난의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민족 종교가 취해야 할 행위 양식을 고수해 나갔던 자들이었다. “바리새”라는 말은“분리된 자”라는 뜻으로서, 헬레니즘의 타락한 영향으로부터 선민의식으로 자신들을 분리시킨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의식적 정결에 관한 율법을 지키는 데에 보다 철저했기 때문에, 이방인으로부터 음식이나 음료 따위를 구매함으로써 자신을 더럽히는 것을 멀리 했다. 후일 바울은 이러한 율법주의의 두터운 벽을 깨뜨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전10:25-26).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의식에 대한 모독을 두려워했으므로, 자신의 집에 “죄인”을 초대하기는 해도 결코 죄인의 집에서는 식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같이 식사할 때,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판단하게 된다.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5:30),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눅5:32).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처럼 신앙의 전통에 따라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와 은혜의 복음을 포도주와 가죽 부대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을 수 없다는 비유로 말씀하셨는데(눅5:37), 이는 오랜 인습적인 종교 의식이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에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에도 율법주의는 십자가의 복음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리했던 것 같이, 참 신앙을 대적하였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2:16). 우리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여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베드로는 십자가의 복음을 올바로 알고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간에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반영하는 행동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회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갈2:12-13). 바울은 이 사건을 두고 베드로의 행동이 복음의 진리를 거스르는 행동이라고 하며, 베드로를 심하게 질책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당시 전통과 관습에 따른 단순한 행동인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베드로의 행동이 복음을 대적하는 행동이라고 지적을 받았을까? 그것은 베드로의 행동이 그 가치관과 사고에 있어서 사람이 어떤 음식은 먹지 않고 또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 하지 않음으로써 거룩하게 된다는, 즉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중의 사도인 베드로도 이와 같이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빠질 수 있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떠할까?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7). 단지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의 차이일 뿐,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율법주의는 교묘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리려고 틈타고 있다. 우리의 신앙에 회복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율법주의를 분별하여, 그것을 우리의 삶에서 철저하게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주의 신앙은 복음을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에서 율법주의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뜨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계속해서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패권 국가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실행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요구에 따라 다양한 상황에 율법을 적용시킬 수 있게끔 자신들의 전통들을 발전시켰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율법을 해석해 온 전통은 율법 자체와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정당화하기 위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는 “성문 율법”인 토라뿐 아니라 “구전 율법”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구전 율법이 성문 율법보다 평민의 생활에 더욱 친밀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탈무드의 미쉬나에서는 심지어 구전 율법이 성문 율법보다 더욱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율법의 세목에 보다 더 관심을 갖고 있던 바리새주의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3절에서 전승이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간과했음을 지적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침해하는 경우를 언급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8-9). 여기서 언급되는 “장로들의 유전”을 이해하기 위해 “고르반”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십계명의 제 5계명에 따라 신실하게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무거운 짐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이 계명을 대신할 수 있는 유전을 지어냈는데, 그것은 바로 부모님을 봉양하는 데 사용될 돈을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면, 그것으로 부모님을 봉양하는 책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십계명의 제 5계명을 어긴 유전인 것이다. 그들은 비록 교회에 헌금을 하는 신앙의 의식은 잘 지켰을지 모르지만,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님도 그와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신앙의 본질은 잃어버린 셈이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어리석음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책망하신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4). 즉 하루살이 같이 작은 종교적 행위 의식을 철저하게 잘 지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은 어디에 삼켜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말씀은 바리새인에게만 해당되는 메시지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교회와 개인의 삶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우리의 교회에서는 교단 법을 성경의 권위 위에 두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만일 교단 법을 진실로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시키고 있다면 일부 교단 내의 금권선거나 일부 목회자들의 재물과 여자로 인한 타락은 막을 수 있는 일들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의 주변에는 어쩌면 교회의 활동에 지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핑계로 가족들의 식사를 제 때에 챙기지 못하는 어머니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의식인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성전에 예물을 드리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의무를 대신할 수 없듯이, 종교적인 행위에 대한 외면적인 열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의 삶을 살펴보면,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에는 열심을 내서 동참하면서도, 가정에서는 자녀가 부모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고 신앙적인 언어와 모양은 가득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나타나는 삶의 열매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닐까...... 신앙의 의식을 철저히 행하지만 신앙의 본질이 빠져버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책망하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
율법주의의 특징- 영적 우월감
바리새인들의 경건함이라는 것은 결국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다는 자만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들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이 기도에서 볼 수 있다시피 바리새인은 신앙의 본질을 단지 율법의 행위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에 두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잘 지키는 자기들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말씀에서 바리새인의 문제는 무엇인가? 바리새인은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려고 했던 것이다. 여주봉 목사님의 책 “십자가의 복음”에서는 율법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율법주의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도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를 더욱 신뢰하며,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신앙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의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기 의를 의지하려고 했기에, 즉 자신을 높이려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셨다고 말씀하신다(눅18:14).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벧전5:5).
이사야 시대의 율법주의
우리가 바리새인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체계를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은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다(마23: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체계를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 말씀하실 때, 그들을 잘 못 인도한 바리새인들을 “소경된 인도자”(마15:14, 23:16, 24)라고 책망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교훈을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부르셨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교훈이 곧 누룩처럼 영적인 전염병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위험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 율법주의 신앙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있었던 거짓 신앙체계이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많은 희생과 제사를 드렸다. 그들은 모든 절기들을 철저하게 지켰고, 각 절기마다 수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수양, 수송아지, 어린 양, 숫염소 등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또한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사야 58장에 의하면, 정기적으로 온 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와 봉헌과 기도를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싫어하신다고 까지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이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1:11-15).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의식을 열심히 행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무를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받아주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보신 것이다. 우리의 예배에도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면 아무리 화려한 의식이나 많은 희생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무엇 때문에 종교적인 의식에 그렇게 열심이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잘못 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 신앙은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가장 기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도 잘못된 이해를 가지게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제 2장 무엇이 하나님을 아는 것인가
성경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오경을 외우고 다닐 정도로 성경에 관해서는 누구 보다 더 잘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모세의 글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5:46). 즉 그들은 모세오경의 교리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많이 알지 몰라도, 모세를 통해 보여주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진 상태였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성경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본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의 오해이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5:37-38).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이해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실재 삶에서는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보다 교리적인 것을 더 중요시 하게 된다. 성경을 잘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공부도 이와 같이 율법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관해 성경을 이론적으로 많이 아는 것을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자리에 대체해 버렸던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 다른 신앙의 의식들도 마찬가지로 율법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일정한 종교적인 의식과 규칙들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전락하게 되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자기 의에 빠지게 만든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데로 이끄는 지름길이며,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지름길이나 수단을 안 것일 뿐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체해 주지는 못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을 아는 것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의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은 잘 알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들은 이방인인 동방박사들보다도 하나님을 몰랐다. 동방박사들은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찾아왔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동방 박사들이 드렸던 예물 중에 황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유향은 그의 순결을, 몰약은 그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동방 박사들이 이 의미를 알고 예물을 드렸는지는 몰라도,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들은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알아야 했던 예루살렘의 영적 지도자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몰랐으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뻐하기는커녕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을 지식적으로는 잘 알았던 사람들이었다. 헤롯왕이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날 것인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면서 미가 5장 2절의 말씀을 외웠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4-6). 이처럼 성경을 잘 안다고 자처하는 그들이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만일 진실로 하나님을 알았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베들레헴에 찾아갔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인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공부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알고 사랑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한다면, 성경 공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지식과 정보를 위한 수단으로만 취급한다거나, 또는 자신이 성경을 다른 사람 보다 더 많이 읽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적인 사고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관이 담겨진 교훈이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바리새인의 누룩이라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만 잘 습득하면 하나님을 알 만큼 다 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교회에서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싶다. 예를 들어서 여기 고아가 한 명 있다고 하자. 이 아이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 자신이다. 만일 누군가 이 아이에게 “너의 아버지는 이런 분이야. 믿기만 하면 돼.”라고 말해주었는데, 이 아이가 “아니예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면 저는 이미 들을 만큼 들었어요. 저는 아버지 자신을 원해요.”라고 대답하였다면 이 아이가 이상한 아이일까? 그렇지 않다. 이 아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가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내가 이 비유를 언급하는 것은 성도의 삶과 인격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조금이라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밝히는 바이다. 물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지는 데 있어서 최고의 보혜사이시다. 나의 의도는 다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에 대하여 거룩한 배고픔을 가져야 한다는 것,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격체이신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게 되면, 우리는 비록 성경 지식을 많이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영적 소경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소경된 인도자라고 책망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영적 소경이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신학자나 성경 박사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요5:37-40).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만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겠는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바리새인의 누룩은 이처럼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그분을 아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알았던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이미 기록된 성경(모세오경)을 통해서만 아니라, 바로 인격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개인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그분을 알지 못하면, 비록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성경 지식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중매꾼을 통해서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안다고 하자.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과 직접 만나서 교제하기 전에는 그 사람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있어서 중매꾼 역할만 할 뿐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은 단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이끌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론의 집합체가 아니라, 인격체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비인격적인 어떤 절대적인 힘이나 세력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소유자이시기에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나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교제도 하시고, 말씀도 하시고(출33:11), 생각도 하시고, 탄식도 하시고(창6:6, 롬8:26), 기뻐하기도 하시고(습3:17), 화를 내기도 하시며(신1:37), 질투하기도 하시고(출20:5), 인간 생활 속에 들어와 우리와 더불어 호흡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 것이 아니다. 이 하나님은 누가 뭐라 해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사63:16, 말2:10, 마6:6, 고후6:18).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우리는 자녀가 아버지를 알듯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그분이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진실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너무 좋아서 잠을 이루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알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에만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만 잘 습득하면 하나님을 그만큼 안 것으로 여기는 거짓된 신앙관이 널리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 곧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인의 누룩의 일부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하나님의 인격적 나타남의 최고의 표현은 바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바로 보이는 하나님이시다(골1:15).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하셨으며,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인격 대 인격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알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시면서, 이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진리”(요14:6)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진리는 어떤 추상적인 교리나 이론의 집합체가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그것을 의지할 때 구원이 있다는 이론적인 교리를 수학 공식처럼 이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체이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그 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오늘 날에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겠음이라”(요14:16-17). 이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실재 삶에서 길을 걷거나, 잠자리에 누워서도 교제할 수 있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시다. 내가 본 장을 마무리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우리가 친구와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그 친구를 알듯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의 이해를 그대로 소유한 격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버리고, 매일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구하며, 그분의 얼굴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제 3장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한 오해
앞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이해를 살펴보았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졌기 때문에, 비록 그들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지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그렇다면 바리새인들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안식일을 누구보다 철저히 지키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와 구제도 누구보다 더 잘 하는데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면 신앙의 의식에 이렇게 까지 열심을 낼 수 있을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신앙의 의식에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록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신앙의 행위와 외면적인 종교 의식은 잘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그 중심에 진정 하나님을 사랑함은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5-28). 한마디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신앙의 의식을 잘 지켰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할 때, 신앙의 의식을 잘 지키게 되어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경우에는 신앙의 의식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체한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 하는 등 신앙의 외적인 행위를 잘 하는 것을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단정 지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의 이해이다.
신앙의 본질이란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의식과 신앙의 본질 사이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예배에 잘 참여하고, 기도생활 잘 하고, 봉사 잘 하는 등 외적으로 표현되는 신앙의 행위를 신앙의 의식이라고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신앙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신앙의 의식을 컵이라고 할 때, 신앙의 본질은 컵 속에 담겨진 물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목이 마를 때 컵에 물을 담아서 마신다. 그러나 컵이 우리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컵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물은 컵에 담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을 물이 담겨진 컵으로 비유할 때,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의식 속에 담겨져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신앙의 의식은 너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그러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으로 표현되는 신앙의 행위에만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은 외모(신앙의 의식)를 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중심(우리 속에 있는 신앙의 본질)을 보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의식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빠져버리면 우리의 신앙의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우리 신앙의 모든 행위와 의식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화려한 의식이나 풍성한 신앙의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갈 찌라도 그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열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다시 비유를 들자면 아버지가 목이 마르다고 할 때, 우리는 컵에 물을 담아서 드릴 것이다. 그런데 만일 컵이 아무리 화려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 물을 담아서 드리지 않는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날 어떠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본질이 빠져버린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부분을 묵상해 보면서 아래의 말씀들을 보기로 하자.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21:3).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 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 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 찌로다.”(암5:21-24).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 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 보다 나으니”(삼상15:22).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2).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또 마음을 다 하고 지혜를 다 하고 힘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 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위의 말씀에서 언급되었듯이 “제사, 절기, 성회, 찬양하는 소리, 번제, 소제, 화목제, 십일조” 등은 신앙의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주일성수, 십일조, 예배와 봉사, 그리고 성탄절, 부활절, 추수 감사절 등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곧 신앙의 본질이다. 위의 말씀에서 보면 “의, 공평, 공법, 정의, 인애, 하나님을 아는 것, 공의, 인자, 겸손, 순종, 긍휼, 신(신실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등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의식을 원치 않으시고, 신앙의 본질을 원한다고 말씀하신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형식적인 예배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신앙의 의식을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의식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비롯한 신앙의 본질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이러한 부분들이 적지 않다. 많은 성도에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정답을 말한다. “무슨 근거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묻는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할 것이다. “내가 교회의 모든 예배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참여하고, 십일조도 꼭꼭 잘하고, 봉사도 잘 하고 있는데, 내가 그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경우를 볼 때 우리는 많은 성도가 신앙의 의식을 신앙의 본질의 자리에 대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단지 주일성수 잘하고, 예배에 정성을 다 하고, 십일조와 기도 생활을 잘 하는 등 “교인의 7대 의무”를 잘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단지 자기들이 일정한 신앙의 의식을 잘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단정 짓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의 잘못된 이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의 누룩을 제거해 버리고, 우리의 마음으로 부터 하나님을 알기를 사모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알아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분별하여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비록 우리의 신앙의 외적인 행위로 표현되지만, 그 의미는 훨씬 그 이상이다. 앞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격체이시다. 우리가 한 인격체를 사랑하는 것은 행동 이전에 마음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부터 시작된다. 앞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연인지간에도 마찬가지이다. 남녀가 서로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생길 수 없다. 연인지간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서로를 향한 마음도 서서히 멀어지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아가”에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청춘남녀의 연애를 비유로 드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인격적인 관계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당신이 만일 당신의 신앙 연령만큼 이성 친구를 사귀어 왔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게 되면 당신은 자신의 이성 친구에 대하여 그(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취향인지, 혹은 그(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서서히 알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당신은 그(그녀)가 옆에 없을 때 허전함이 느껴질 것이다. 만일 그 때 당신의 이성친구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당신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그녀)가 다른 핑계를 대고 당신을 만나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그녀)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는 상태라면 아마 당신은 아가서 5장 8절의 말씀에 이해가 될 것이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는 중에 언제 부터인가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라.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느껴지지 않고,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보이지 않게 되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 미칠 지경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절규할 것이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아마 이만큼 간절하지 못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아도 그냥 그렇겠지 하고 기도를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성령님의 감동과 함께 하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에 대해 “그럴 수도 있겠지”라는 식으로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다면, 이는 여러분이 아직 하나님과의 연애를 시작하지도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만 만족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주위의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거나 주위의 환경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면,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표현이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서 편히 안식을 누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아8:4).
거짓된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나의 경험을 실례로 말해보겠다. 고중 시절 나는 신앙의 의식에 누구보다도 열심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고 있었는데, 찬양을 인도하면서 가끔씩 회중을 향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외쳤다. 그렇게 외칠 때마다 나는 누가 어떻든지 나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 때 누군가 나에게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고 물었다면, 나는 당연히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신앙의 의식에 이처럼 열심이 있는데 그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찬양 인도에 이렇게 열심을 쏟을 수 있을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돼.” 그러나 그 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 했었다. 나의 열심은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고중을 졸업할 무렵이 되어서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는 겨울이었는데, 나의 아버지는 도박에 손을 대서 전 재산을 날리게 되었다. 집도 전당 잡혔으므로 그 때까지 내가 살던 집은 더 이상 나의 집이 아니었다. 주위로 부터 빚을 갚으라는 재촉이 시작되자 나는 눈물로 날을 보냈다. 세상이 끝 난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때 하나님만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돈도 사랑했었다. 나의 삶을 통해 볼 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힘이신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돈이 없다는 이유로 힘이 빠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떠나지 않으셨는데, 돈이 없다는 것이 저를 너무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돈이 저의 힘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모든 것을 관섭하셔도 되지만 돈 문제만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저를 이렇게 힘든 상황에 빠뜨리십니까!”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분의 설교를 통해 나는 시편 18편 1절 말씀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돈이 없다는 이유로 힘이 빠져 있다면, 더 이상 여러분의 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돈이 여러분의 힘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힘이 빠져 있다면 돈이 여러분의 힘이고 우상입니다.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에서 돈이 없다는 것이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나는 회개하였다. 시편 18편 1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 말씀에서 다윗의 힘은 하나님이셨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부강한 나라로 세운 왕으로서 그에게는 모든 부귀와 영화가 주어져 있었고, 그의 한 마디 말에 목숨을 걸고 나설 수 있는 부하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들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만을 자기 힘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였다. 나의 이 실례를 통해 알 수 있다시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다른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마6:24)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하나님만을 사랑하되, 우리의 전 존재를 다 걸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와 같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사랑은 거짓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한 그릇된 이해 즉 바리새인의 누룩을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제거해 버리고, 우리 속에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할 것이다.
제 4장 하나님의 은혜와 바리새인의 누룩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해
우리가 구원 받은 것에 대해 로마서 3장 24절에서는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열심히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여 받은 은혜에 보답해야지.” 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표현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노력으로 보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뿐 아니라, 소명을 감당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1:12).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사도 바울은 그가 그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은 가만히 앉아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이루셔서 바울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말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일 수는 없어. 만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바를 우리로 하여금 실천할 수 있게끔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역을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하여 언급할 때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일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고 나머지 일부분은 우리의 공로에 달려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100%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100%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유로 말씀드리자면 아버지가 새 옷을 사주는 것이 은혜라고 할 때, 그 옷을 입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새 옷에 대해 100% 값을 지불하고 새 옷을 입게끔 설득하는 분은 아버지이며, 새 옷을 입는 것은 100% 자녀의 소견에 달려있는 셈이다(물론 이 비유가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새 옷을 사주었다 해도 자녀가 입지 않는다면 새 옷은 역할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순간순간 필요하다. 죄를 이기기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소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면에서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이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값없이 부어졌다. 아버지는 이미 새 옷을 사주신 것이다. 그런데 자녀인 우리가 그 옷을 입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에서 실재가 되지 않고 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은 곧 은혜에 의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십자가상의 예수님께 옮겨놓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여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매일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의 모든 의를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매 순간 십자가 아래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은 은혜에 의한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은혜를 풍성히 누릴 수 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6-7).
은혜의 적- 율법주의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이 풍성한 은혜를 우리로 하여금 누리지 못 하게 방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곧 바리새인의 누룩인 율법주의라는 것을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한 마디로 말해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신앙이 곧 율법주의이며, 이 율법주의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역이 율법주의에 속한 유대인들과의 갈등과 영적 싸움으로 지속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는 곳 마다 따라 다니며 그를 핍박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이러한 율법주의 신앙은 사도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팽배하였다. 이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성도들이 인격체이신 하나님보다도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를 더 신뢰한다. 예를 들어서 예배를 드릴 때,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보다도 사도신경으로 부터 시작하여 주기도문으로 마치는 신앙의 정해진 의식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러한 신앙의 의식을 더 잘 지켜 행하는 자신들이 그렇지 못 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어떠한 종교적인 헌신이나 신앙적인 노력을 주고도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대신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은혜를 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율법을 주신 목적과 상관없는 행위가 된다.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할 찌라도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면 율법주의에 빠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은혜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공로를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보다도 자신의 종교적인 헌신과 신앙적인 노력을 더 신뢰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그들의 실재 삶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자기 공로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인은 신앙에 대한 노력과 열심이 없어도 된다는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주님을 향해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내가 본 장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이 주님의 은혜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은 이미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감사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은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비유할 수 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자녀가 어떤 행위를 잘 했거나, 아버지의 기대에 보답했기 때문에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단지 자녀라는 신분 때문인 것이다. 우리 말 속담에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듯이, 아버지는 미운 자식에게나 고운 자식에게나 똑 같이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우리가 뭔가를 잘 하여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을 갖추었기에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신앙의 의식을 잘 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공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내려고 하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잘 말해주는 것이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두 아들을 둔 인자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할 수 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잘 듣고 아버지를 잘 공경하는 착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망나니 아들이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맏아들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반면 둘째 아들은 자식으로 취급해 주지 않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은혜는 두 아들에게 똑 같이 베풀어 졌던 것이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이 아버지의 은혜에 대하여 이해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두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입기 위해 아버지가 기대하는 어떤 행실을 잘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가 기대하는 어떤 행실을 제대로 한 것이 조금도 없기에, 자신이 아버지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께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 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눅15:21). 그러나 아버지의 은혜는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15:22-24). 반면 맏아들은 자신이 아버지가 기대하는 어떤 행실을 잘 했기에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베푸는 은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29-30). 그러자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1-32). 이와 같이 아버지의 은혜는 자녀가 아버지의 기대에 보답해서가 아니라 자녀라는 신분 때문에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은혜의 사역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은혜로우신 분이다(마5:45, 눅6:35). 그리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사역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이 땅에 베풀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인 동시에 은혜의 복음이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은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값없이 베푸신 은혜이므로 복음이란 곧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6-17).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자신에 대해 쓴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보여준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4:16-21).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1:1-2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사역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곧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등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이 사역은 한 마디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결론이 내려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주리고 목마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질병에 눌린 자를 치유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의 사역을 대적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그 은혜를 안식일에 베풀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핍박하였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한 적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편견 즉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깨뜨렸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라는 신앙의 의식에 대해 율법주의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밭에서 밀을 잘라 먹는 것을 긍휼히 보지 않고, 자기들의 율법주의적인 사고로 그 날이 단지 안식일이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핍박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자기들의 안식일관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며, 예수님의 사역을 의심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어떤 행위가 자기들의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거스르는지 아닌지에 관심을 가졌다. 즉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이 없이 율법의 행위를 잘 지키는 자기 의를 의지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귀신에게 눌려 18년 동안 꼬부라져 있었던 여인의 병을 치유해 주셨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런데 이 장면을 목격한 회당장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안식일관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시는 예수님께 분을 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눅13:14). 그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13:15-16). 이와 같이 율법주의의 두터운 벽을 깨뜨리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일부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에서 바리새인의 누룩인 율법주의가 제거되어야 한다.
제 5장 성령님의 역사와 바리새인의 누룩
성령님의 인격과 사역
우리의 신앙생활은 은혜에 의한 삶인 동시에 성령님에 의한 삶이다. 성령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우리의 삶과 인격에 끊임없이 적용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만일 우리의 삶에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성령님은 내가 본서의 제 2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실재 삶에서 길을 걷거나, 잠자리에 누워서도 교제할 수 있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님께 지식과 의지와 감정과 같은 인격의 특징들이 나타남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성령님께서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했으며(요14:26),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이라고 함으로(요15:26) 성령님께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12:11)고 함으로 성령님께 의지 작용이 있음을 증거하였다. 또 이사야 63:10에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다”고 했고, 에베소서 4:30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함으로 성령님께 감정 작용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인격성에 적합한 행동들을 우리의 삶 속에 실행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인격체이신 성령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조직신학에서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과 인격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사역에 대해 아홉 서정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이 아홉 가지는 다음과 같다. 부르심, 거듭남, 회심, 믿음, 의롭다 하심, 자녀로 삼으심, 거룩하게 하심, 끝까지 붙들어 주심, 그리고 영화롭게 하심이다. 이러한 성령님의 사역을 로마서 8장 30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성령님에 의한 삶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수라는 것이다.
성령님과 육체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절대로 우리의 올바른 행실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누룩인 율법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님에 의한 삶을 살지 못 하게 방해한다.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4:29). 이 율법주의 신앙은 사도시대에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을 꾀어 그들이 구원 받은 것이 성령님의 역사였음을 망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여 구원 받아야 한다는 의식을 주입시켰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갈라디아 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1-3). 이 바울의 글이 우리에게 보여주다 시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였다. 그것은 절대로 우리의 율법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었다. 육신의 행위를 의지하여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구원 받았으며, 우리의 신앙은 성령님에 의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우리의 신앙을 성령님에 의한 삶에서 자기 육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삶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우리의 실재 삶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많은 성도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구원받은 것이 성령님의 역사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구원 받은 후에는 자신의 노력을 동원해서 뭔가를 이루어 내야 하는 줄로 생각한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의 의식들을 행하면서 그러한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한계가 비춰지면 한 동안 열등감에 사로잡히다가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자기 의를 의지하여 일어서려고 힘쓴다. 이러한 삶은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으로 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참된 안식도 없다. 열심히 하는 모양은 있을지라도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렇다면 성령에 의한 삶에는 열심이 없어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성령에 의한 삶에는 반드시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심이 따르게 된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열심이 다 성령님의 감동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서 율법주의는 우리를 거짓된 열심에 빠지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성령님에 의한 삶에서 멀어지게 한다. 바울은 이러한 열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성령님과 우리의 성화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전부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으로 되어진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성화되는 것이 우리의 노력을 벗어나서 성령님의 역사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말씀에서 “저(예수님)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라는 것은 우리의 성화를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 성화는 율법의 행위를 잘 지키려는 노력과 자기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즉 성령님의 역사로 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기 의를 의지하여 성화에 이르기에 노력한다면, 우리는 결국 좌절하게 되거나 혹은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렇게 나아가려는 신앙이 곧 율법주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성화된다. 그래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다시 말해서 우리를 성화되게 하는 것은 율법주의 신앙에 따른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화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된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성화되기 위해 끊임없이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하리라”(갈5:16-18).
성령님과 우리의 사역
성령님의 역사는 또한 우리의 사역을 위해서도 필수이다. 우리의 사역은 우리의 계획에 따라 우리가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것이 곧 우리의 사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보고 그 일에 순종하여 동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은 곧 성령님에 의한 사역인 것이다. 예수님과 초대교회는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우리의 사역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의 사역은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누룩인 율법주의는 성령님에 의한 사역을 방해하였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치유해 주셨을 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주의적인 사고로 그 날(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날)이 단지 안식일이었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사역을 핍박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자신의 사역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한 것임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 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그러자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표현하신 것 때문에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까지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 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5:19-20). 내가 본서의 제 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영적 소경이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님에 의한 사역을 대적하는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이 철저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드리는 예배
한 마디 더 언급한다면 우리의 예배도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우리의 예배는 단순한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예배의 주관자는 성령님이시다. 예배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되 성령님께서 감동으로 주시는 찬양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을 그대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예를 들어 보면 시편도 마찬가지이다. 시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인 동시에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인 글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 여기서 “봉사”라는 단어는 NIV 영어성경에서는 “Worship”(예배)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며”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와 성령님을 갈라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예배드릴 때,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예배는 단지 자기들이 임의로 정해놓은 순서에 따라 종교적인 행위를 사도신경으로 부터 주기도문에 이르기 까지 그저 매끄럽게 진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자기들이 정해놓은 예배 순서라는 틀을 좌우지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의 예배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므로 더욱 의식화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님의 감동과 주관하심이 없다면 예배가 예배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배- 영적인 갈급함
성령님의 감동으로 예배드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마음이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마음은 우리의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를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다. 이 갈급함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나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갈급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원하며, 하나님으로만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말한다. 이 갈급함을 토미 테니 목사님은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주리고 목마른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지 못 하신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시51:17). 오늘 날 훌륭한 교회의 건물과 음향시설, 그리고 틀에 맞춘 찬양과 율법주의적인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줌에 있어서 부족하다. 그런데 오늘 날의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으로 인해 영적인 기아에 허덕이는 교인들의 배고픔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그들은 율법주의라는 울타리 안에 교인들을 가두어 두고, 그들이 교회가 원하는 일정한 신앙의 표면적 의식을 잘 따라 줄 경우에 축복의 메시지만 들려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책망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렘23:16-18). 하나님으로 인한 우리의 배고픔은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의식은 하나님으로 인해 배고픈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신앙의 의식은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우리의 배고픔은 곧 영적인 본성이다. 내가 심양에 있는 성경 학습반에서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나의 공동체는 나에게 찬양 인도를 해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날 부를 찬양을 기도로 준비한 후 공동체 앞에 나서서 찬양을 인도하게 되었다. 나는 찬양하는 중에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따라 찬양과 기도의 순서를 조금 바꾸게 되었다. 그랬더니 찬양이 끝난 후 나에게 찬양 인도를 부탁했던 형제님이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었다. “왜서 찬양과 기도의 순서를 마음대로 바꾸는 거야? 예배의 순서를 틀에 맞추지 않으니, 다음에 있게 될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주게 되잖아!” 나는 그 때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배에 대한 그 형제님의 관심사는 예배에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나 성령님의 감동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은혜스러운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배라는 종교적인 행위를 그저 순서에 따라 매끄럽게 진행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주의는 성령님에 의한 예배를 방해하는 자리에 있다. 나는 본 장을 마치면서 빌립보서 3장 3절의 말씀을 다시 써본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제 6장 참된 믿음과 바리새인의 누룩
진정한 믿음
앞 장에서 나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은혜에 의한 삶인 동시에 성령님에 의한 삶이라고 하였다. 본장을 통해 한 마디 더 보충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또한 믿음에 의한 삶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 편에서 나타내신 구원의 영광스러운 메시지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을 말한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어린 아이와 같은 신뢰를 의미한다. 마치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어린 아이가 주위의 환경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손을 꼭 잡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고난을 이겨 나가게 이끌어 준다. 시편 23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볼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1-6). 이 믿음은 또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 따른 행실을 하게끔 이끌어 준다. 야고보서 2장에서는 이러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14-26). 우리는 위의 말씀을 통해 참된 믿음은 이론적인 인식이나 감정적 상태에만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지적 결단을 통한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인정하는 확실한 지식일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 나의 심령 속에 복음으로 역사하고,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죄의 용서와 영원한 의와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신뢰이며, 동시에 하나님께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드리는 행동적 결단을 포함한다.” 위의 말씀에서의 “행함”에 대해 우리는 흔히 율법주의적인 사고로 그것이 우리가 이루어내는 어떤 선행이라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게 아니라,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사도 야고보는 분명히 말씀했지.”라고 “이신득구”의 진리에 모순되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이해이다. 말씀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에 대한 고백이 우리의 삶을 통해 실재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야만 우리는 뒤에 언급하게 될 “믿음과 행위”에 대한 내용을 오해 없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
우리의 신앙생활이 믿음에 의한 삶이라는 것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말은 NIV 영어성경에서는 “By faith from first to last”(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라고 번역되어 있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신앙생활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 속에 주님이 사시는 삶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성령님의 역사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2,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믿음과 행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하나님께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의 반대는 자기 행실과 헌신을 의지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의에 기초한 율법주의 신앙이며, 바리새인의 누룩인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 의에 기초한 율법주의적인 자세와 사고를 반드시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주의 신앙은 철저하게 믿음에 의한 삶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 율법주의 신앙이 사도 베드로를 믿음에 의한 삶에서 넘어뜨린 적이 있음을 보게 된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회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갈2:12-13). 겉으로 보기에는 그 당시 전통과 관습에 따른 단순한 행동인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치관과 사고에 있어서 베드로의 행동은 믿음에 의한 삶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거룩케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행동은 사람들이 어떤 음식은 먹지 않고 또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 하지 않음으로써 거룩하게 된다는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옛 본성은 자신의 도덕적인 행위나 선한 동기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보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삶의 영역이며, 성경에서는 이를 “육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인에게는 신앙의 겉으로 표현되는 행위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물론 믿음이 있는 성도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가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성경을 많이 읽게 된다.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기도를 많이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열심 그 자체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물론 믿음의 “겉으로 나타나는 표현”으로서의 행위는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믿음을 대신하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믿음을 통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신앙생활 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종교적 의무를 다 하면 되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신앙의 의식을 제대로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왜 그럴까? 예를 들자면 어떤 성도는 10일 작정기도를 시작하여 마지우 이 하루를 빼먹은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죄송스러워 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기 보다는 10일 작정기도라는 자기 의를 붙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의 부족한 면을 보완하여 좀 더 완전한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는 버릇이 있다. 이것이 곧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인의 누룩인 것이다.
마틴 루터의 믿음
마틴 루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율법주의 신앙이 믿음에 의한 삶과 적대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화가 될 것이다. 마틴 루터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신앙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는 율법주의적인 신앙이 팽배해 있었다. 그는 21세의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규칙에 따라 매일 일곱 차례씩 기도를 드렸다. 새벽 한 시나 두 시에 종소리와 함께 일어나 십자가를 가슴에 그리고 나서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두 번째 종소리에 맞추어 교회로 들어가 성수를 뿌리고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는 세상에 나가지 않고 수도원 안에 틀어 박혀 도를 닦는 것이 죄를 벗는 길이며 이렇게 자신의 종교적인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곧 성화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두문불출하고 이전보다 더욱 힘써 도를 닦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죄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평안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끊고 사는 것은 다만 문 밖의 타락한 풍속을 피한 것일 뿐, 마음속의 악한 생각은 없애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악한 생각을 억제하지 못해 라틴어로 된 기도문을 수백 번씩 외웠으며, 어떤 날은 종일토록 금식할 때도 있었다. 또 성경을 읽는 중에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을 상고했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의 죄가 더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동료 중의 한 사람이 루터에게 “만일 네가 선한 일을 많이 행하여 공로를 쌓게 되면 하나님의 선한 권고를 받을 것이다.”라고 충고해 주었지만, 루터는 그의 말에 실천하려고 하였으나 확신이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민하게 되었다. “나의 이런 선행이 내 죄를 도말하고,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을 과연 면하게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금식, 철야기도, 참회, 미사, 그 밖의 여러 가지 고행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는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나 같이 심약한 자가 선을 행한다고 해서 어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인가. 큰 죄 짐이 자꾸 나를 억누르는구나...... 나에게는 아직까지 투기하고 분노하는 것이 있는데, 이처럼 근심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슬프다.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나는 왜 이렇게 고민해야 하는가?” 이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루터를 도와 준 사람이 있었는데 에어푸르트 수도원의 간부이며, 비텐베르크 대학장직을 맡고 있던 슈타우피츠였다. 그는 루터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해 주었다. “그대는 마음속에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으로 번민하며 스스로 괴롭게 하면서 어찌 구세주의 공로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의뢰하지 않는가? 이제부터는 다만 구주만 믿고 그 하신 일을 힘입고 그 의로우신 것을 의지하고, 또 구속하신 것을 믿고, 그 명하신 말씀을 순종하게나. 주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부르시고,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가볍게 하여 주시는데 어찌 그대는 주를 의지 하지 않는 것인가?”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말에 “내가 내 마음을 변화시킨 후에야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시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슈타우피츠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대가 몸과 마음의 변화를 원하거든 먼저 그리스도께서 구주되신 것을 믿게나. 그대가 죄악을 인하여 복잡한 생각 속에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헛일이거늘, 지금부터는 다만 예수님만 바라보게. 그분이 그대를 먼저 사랑하셨으니 그대는 예수님을 사랑하게나. 예수님께서 그대의 죄를 인하여 대신 죽으사 구속하여 주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셔서 구주가 되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네.” 슈타우피츠와의 대화는 후일 루터가 복음을 깨닫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루터는 1510년 가을부터 1511년 1월까지 로마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27세의 철학 교수이자, 신학도였던 루터에게 로마는 여러 가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는 참회자의 불결한 모습, 수도사들의 무식과 무질서에 놀라게 되었다. 로마에는 빌라도의 계단이 있는데, 로마 교황이 규례를 정해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기어 올라가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루터도 자기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무릎을 꿇고 올라가다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1:17)는 말씀이 비춰져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여겨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 1545년 라틴어로 출간된 루터의 전집 제1권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생각을 가다듬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는 말씀에 집중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 즉 믿음으로 사는 의라는 것을 알았으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그 의가 복음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천국으로 들어가는 듯 한 새로운 느낌을 받았으며 성경 전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갔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굉장한 혐오로 배척했으나 이제는 사랑을 가지고, 그야말로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가장 달콤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로마서 말씀은 내게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예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다시피 믿음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의 신앙에는 율법주의적인 사고가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곧 믿음에 의한 삶인 것이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성경의 신, 구약에서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는 진리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면서 내 건 기치 중의 하나가 바로 “오직 믿음으로”였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모든 부흥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가 재발견됨으로 시작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오직 믿음으로 오늘날이야말로 우리가 이 기치 아래 모여서야 할 때가 아닐까......
제 7장 바리새인의 누룩을 버리자
율법주의의 악영향
우리는 앞에서 바리새인의 누룩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율법주의는 은혜에 의한 삶, 성령에 의한 삶 그리고 믿음에 의한 삶을 대적한다. 또한 율법주의는 우리의 신앙을 이론에만 머물고 실재를 모르게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성도가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게 되면 교리적으로는 잘 알아도 실제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에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미가서의 말씀을 교리적으로는 잘 알았지만 예수님을 찾아가서 경배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면 신앙이 점점 화석처럼 굳어지고 기쁨이 사라진다. 또한 삶이 변화되지 않으며, 죄를 이길 힘을 상실하게 된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열리지 않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연스럽게 종교생활화 되어 간다. 이러한 신앙에 대해 이사야 29장 1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거듭 인용하시면서 유대인의 율법주의를 책망하셨다(마15:8, 막7:6).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임무가 있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우리의 신앙에서 제거해 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전염시키는 자들을 경계할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심지어 “개들을 삼가라”고 했다(빌3:2). 바리새인의 누룩이 제거되기 위해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은혜에 의한 삶, 성령에 의한 삶 그리고 믿음에 의한 삶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실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제거하는 길
율법주의는 마치 무거운 짐처럼 우리의 신앙을 짓누르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율법주의를 책망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눅11:46). 그리고 사도 야고보도 율법주의를 짐으로 표현하였다(행15:28). 우리가 이 짐을 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의 삶에는 참 안식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짐을 지고 힘들게 사는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본서의 제 1장에서 율법주의의 근원이 사탄이라고 말한 적 있다. 이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다(요8:44). 사탄의 권세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파괴되었으므로 사탄의 힘은 단지 거짓말뿐이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져 주신 짐들을 우리가 계속 지고 가야 하는 것인 양 우리를 거짓말로 속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짐들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로 옮겨주셨음을 알아야 한다(시68:19). 우리가 만일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신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수고하며 지고 있는 무거운 짐들은 우리의 어깨에서 떨어져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없다는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도 마땅히 멍에를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져야 할 멍에는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우리의 짐을 대신하여 져주신 예수님의 멍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져야 할 다른 멍에를 말씀하고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게 되면, 사탄은 더 이상 율법주의로 우리를 속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누룩은 우리의 삶에서 제거될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지니라”(롬7: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 여기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라는 말은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롬4:15)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율법의 멍에는 우리를 심판과 죽음 아래로 이끌고, 예수님의 멍에는 매 순간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리로 이끌어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삶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만일 율법 아래 있게 되면, 즉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게 되면, 성령님의 임재는 우리의 삶에서 걷히고, 성령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만일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따라 살게 되면,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서, 인격체이신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누룩이 우리의 삶에서 제거되기 위해 끊임없이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하리라”(갈5:18). 만일 우리의 삶이 매 순간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의 요구는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육신을 쫓지 않고 그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
십자가를 의지하는 삶
바리새인의 누룩을 버리려면 우리는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기에 앞서 우리의 신앙에는 자신의 도덕적인 행위나 선한 동기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율법주의적인 사고가 내려져야 한다.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식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인식하였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진정한 겸손을 말해주고 있다. 진정한 겸손이란 바로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조금도 없으며, 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자기 자원을 의지하는 삶으로 돌아가게 되며,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된다(갈5:4).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서 살고 있다. 그들은 자기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지 못 하는 것이다. 자신은 그래도 괜찮은 구석이 있다고 믿고 있다.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진리를 잘 모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이 필요하다. “아,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죄인이기 때문에 나에게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었구나!” 이렇게 자신을 올바로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겸손히 나아가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까지 고백하였다(딤전1:15). 우리는 매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매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십자가의 공로를 매 순간 의지하려면 우리에게는 믿음에 의한 삶이 필요하다. 믿음이 없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해되지 않는다. 매번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기 위해 우리는 매번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야 한다. 우리가 진실로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 때, 자기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은 우리 안에서 발 붙일 틈을 찾지 못 할 것이다.
맺는 말
본서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바리새인의 누룩이 우리의 삶에서 제거될 때, 우리의 신앙은 새로운 회복이 있을 것이다. 본서를 쓰기 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나는 고린도전서 5:6-8의 말씀으로 본서의 끝을 맺으려고 한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 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아멘!
참고 서적: 톰슨 성경, 교의신학,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