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움직이는 영상을 선보인 지 내년으로 1백년이 된다. 이 '과학혁명'으로부터 1백년이 지난 오늘날 영화는 각광받는 첨단산업, 가장 대중적인 예술로 자리를
굳혔다. 영화 1백년을 맞아 세계영화사를 다시 쓰는 '영화 100년, 영화 100편'을 수요일마다 연재한다. 영화평론가 안병섭·주진숙·김지석·정성일·이효인씨 5명이 작품 선정을
맡고, 이들을 비롯해 김홍준·김소영·이정하·강한섭·이용배씨 등 20여명이 필진으로 참여한다. - 편집자
#1. <인톨러런스 Intorelance>(1916) / 감독: D.W. 그리피스
왜 D.W. 그리피스인가?
우리는 이 시리즈가 왜 미국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리피스로부터 시작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그의 영화 <국가의 탄생>(1915)은 미국의 지배적 신화를 국
가의 탄생에 관한 것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후 서부극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장르 영화들이 이 신화를 재구축해 나갔고, 할리우드가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영화가 미국을
만들어 나갔다는 역설은 그리피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그리피스는 할리우드가 전세계 영화 시장을 헤게모니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감독이다.
켄터키주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책 외판원으로 인생을 시작해,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 된 그리피스는 월트 휘트먼의 애독자였다. 그는 특히 '역
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된다'는 휘트먼의 시집 <풀잎>의 한 구절을 늘 외우고 다녔다. 그런데 드디어 그 구절을 영화화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에게 엄청난 명예와 부를 안겨
다 준 <국가의 탄생>이 그 인종차별적 색채로 말미암아 흑인 인권 운동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쿠클럭스클랜(KKK)단을 옹호하다가 궁지에 몰리게 된 그리피스
는 오히려 흑인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러한 무자비한 불관용이 전 인류사를 통해 반복되었으며 그래서 역사가 그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자기방어적인 작품을 들고나왔
다. 그것이 바로 <인톨러런스(불관용)>(1916)이다.
네 가지의 이야기들이 평행 몽타주로 전개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작품 <인톨러런스>에는 20세기초 미국의 한 젊은 연인들의 고난과 1572년에 일어난 위그노 학살,
예수의 삶에 대한 에피소드, 그리고 페르시아 왕에 의해 함락되는 바빌론이 동시에 등장한다. 즉 시간적으로는 고대의 이교도들과 유대기독교 시기 그리고 르네상스와 현대가 한
꺼번에 다루어지고, 공간적으로는 오리엔트에서 시작해 지중해와 서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이동하는 제국들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그 당시 미국 관객들에게 이미 친숙한 여러 영화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필름 다르'(예술 영화)와 고몽사의 작품
들, 이탈리아의 스펙터클 등이 각 에피소드들마다 적절하게 인용된 이 영화는 유럽 영화를 미국식으로 길들이려는 그리피스의 야심에 찬 스펙터클이며, 특히 둥근 기둥에 코끼리들
이 늘어선 거대한 바빌론 세트 장면은 이후 "할리우드 바빌론(탐욕과 악의 상징)"이라는 미국 영화산업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이 바빌론에서 그리피스는 바벨탑의 붕괴 이후 잃어
버린 보편적 언어의 복권을 열망했고, 그것이 바로 미국 영화의 언어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세계 영화 시장은, 그의 그러한 요구에 충분히 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
#2.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The Cabinet of Dr. Caligari>(1919) / 감독: 로베르트 비네
영화사를 통해서 1920년대 유럽만큼이나 영화매체의 독자성을 밝히기 위한 실험이 활발했던 시기는 없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러시아의 형식주의, 그리고 독일의 표현주의가 그
시기 영화의 대표적인 경향들이다. 그들의 공통분모는 현실을 재현하는 영화매체의 기존의 속성에 도전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낯설게 바라보도록 영상의 내재적 의미를 탐
구하고자 한 것이다.
1919년에 제작된 <칼리가리박사의 밀실>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그 서사와 시각적 특성은 당대의 가장 실험적 양상의 하나로 꼽히며 이후 수년간 지속된
표현주의 영화경향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영화는 주인공이 칼리가리라는 연쇄살인범을 회상하며 얘기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칼리가리는 몽유병자에게 최면을 걸어 자신의 친구를 죽이고 여자친구를 유괴
한다. 그의 추적 끝에 칼리가리는 18세기에 있었던 대리살인을 재현하고자 하는 강박관념에 빠진 정신병원의 원장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이제까지 이 이
야기를 해준 주인공은 사실 정신병원의 환자이며 칼리가리는 그를 담당한 의사라는 것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병실로 끌려가며 소리치고 의사 칼리가리는 그제야 그의 병증을 이해
했다고 한다.
이 마지막은 관객을 당황시킨다. 관객은 이제까지 보고 들은 것이 미친 자가 꾸며낸 망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러면서도 그가 정말 미쳤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관객의 의구심을 누르는 것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이다. 영화의 장면화는 현실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형태와 색채를 통한 왜곡, 구성의 부조화 등 당대의 표현주의
회화의 특성이 세트 곳곳에 그대로 살아 있다. 평면적으로 그려진 세트에는 원근감이 과장되어 있고 사물의 형태가 각지거나 왜곡되어 있다. 인물 또한 분장이나 의상을 통해 그
세트의 일부처럼 기능한다. 조명은 명암의 대조가 극단적으로 이뤄져 있으며 연기 또한 극히 기교화되어 있다.
이런 극히 양식화된 장면이 창조하는 것은 현실과는 먼 환상세계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서 공간의 표현이란 곧 정신의 표현이다. 즉, 영화 속 공간에 합리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불안과 과대망상증으로 가득찬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 광인의 이야기가 시각화돼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가 된 것은 헤르만 바름 등 세트 디자이너의 역할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제작자 에리히 포머의 역할이 컸다. 칼리가리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미친 악당으로 되어 있는 원래 각본을 뒤집어 주인공을 광인으로 설정한 것도 그였으며, 세계시장을 지배하던 미국영화와 경쟁하기 위해 예술적인 영화를 만
들고자 표현주의 회화기법을 영화에 끌어들인 것도 그의 결정이었다.
포머의 그런 결정은 이 영화의 해석에 흥미 있는 변수가 된다. 원래 각본의 의도는 어쩌면 개인의 자유가 폭정적 권력에 의해 남용되는 것을 비판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완
성된 영화는 폭정적 권력이 어쩌면 개인들에게 유익할지도 모른다는 시사를 한다. 이는 당시 독일인물의 의식 저편에 있는 불안과 공포심을 암시한 것이며, 칼리가리라는 인물을
통해서 히틀러의 등극을 예시했다는 이 영화의 의미를 명확히 해준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
#3.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1922) / 감독: 로버트 플래허티
로버트 조지프 플래어티(1884∼1951)의 '기념비적' 다큐멘터리 <북극의 나누크>는 1922년에 만들어졌다. 설원에 사는 에스키모인 나누크와 그의 가족의 생활을 그린 이 영화
는 당시 파테영화사에 의해 미국과 캐나다 전국에 배급되어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고 유럽, 러시아, 일본 등 전세계에서 상영되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일반극장에 흥행 목적으로 배급된 최초의 장편 기록영화였고 에이젠슈테인을 비롯한 당대의 러시아 영화인들로부터 1960년대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에 이르기
까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북극의 나누크>가 1920년대 관객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 영화는 낯선 풍물과 이국적인 삶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대중매체로서의 영화를 발명한 그 순간부터 카메라는 '구경거리'를 찾아 전세계 곳곳을 누볐고, 1920년대까지는 "미개인의 기이한 풍습"류의 짤막한 영
화들을 보는 데 관객들이 익숙해져 있었다. 아직 '다큐멘터리'라는 용어와 개념이 나타나기 전이었지만 카메라가 잡은 생생한 현실을 보고 즐기는 관객층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관객들에게 <북극의 나누크>는 익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영화였다. <북극의 나누크> 이전의 기록영화들은 모두 20분 미만의 짧은 길이였고 춤, 제의, 전투 등의 단편적
인 에피소드를 다룬 것들이었다. 1910년대 극영화에서는 이미 장편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촬영, 편집, 극적 구성 등에서 많은 테크닉이 개발돼 일반화되고 있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바로 이런 극영화기법을 기록영화에 적용하여 커다란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영화에는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가는 주인공이 있고(순박하고 유능한
에스키모인 나누크), 쉽게 공감할 수 있는주제가 있으며(혹독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 유머러스한 장면과 긴장된 장면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줄거리의 전개가 있다.
측량기사 출신인 플래어티는 광물탐사를 목적으로 캐나다 북부지방을 여행하며 에스키모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탐사작업 틈틈이 에스키모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던
것에서 출발해 그는 그들의 삶을 영화로 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플래어티 연구가들에 의하면 그는 처음부터 이 영화를 장편으로 만들어 극장에 배급하려는 의도를 분명
히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플래어티는 오늘날 독립영화작가들의 원형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북극의 나누크>의 성공은 플래어티에게 그가 바라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예술가로서 영웅대접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모아나><아란의 사
람들> 등 이후 그가 만든 영화를 통해 확고해졌다.
그의 영화들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대상인 인간에 대한 애정과 장기간의 현지 조사를 통한 사전작업은 다큐멘터리 영화작가들에게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체계적
인 방법론의 구축보다는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문화의 이해에 의존한 점, 살아 있는 문화를 필름에 담기보다는 이미 사라져버린 원형의 복원에 집착한 점은 많은 비판의 여지를 남
기고 있다. <필자: 김홍준/영화감독>
#4. <마지막 웃음 Der Letzte Mann>(1924) / 감독: F.W. 무르나우
독일 표현주의로 불리는 1919∼25년 시기의 영화들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프리츠 랑의 <숙명>(1921)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신화로 남은 역사의
사건들을 재구성하는 역사물들이다. 둘째는 표현주의 연극의 무대장치와 연출에 의해 영향받은 괴기스럽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영화들로, 이 부류의 대표작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이다. 마지막 세번째 부류는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극에서 비롯된 이른바 '실내극 영화'들이다.
실내극 영화들의 특징은 다른 표현주의 영화들과는 달리 특정한 시간·공간 속에서 대개는 사회에서 중간계층 이하인 인물들의 행위와 심리가 단순한 내러티브(이야기)에 의해
전달된다. 실내극 영화의 부류에 포함되는 '거리영화'들을 예로 들면 대부분이 가속화하는 근대화에 편승해 헛된 꿈을 좇는 남자들에 의해 버림받는 비극적인 여자주인공들의 이야
기로,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종래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무르나우의 1924년작 <마지막 웃음>은 폴 레니의 <뒷계단>(1920), 루푸픽의 <파편>(1921)과 함께 실내극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다른 두 편과 마찬가지로 칼 마이어가
시나리오를 쓴 <마지막 웃음>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호텔 도어맨(에밀 제닝스 연기)이 나이 들어 화장실 조수로 밀려나자 주위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되는데
화장실을 사용한 미국인 백만장자의 뜻하지 않은 유언(화장실에서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지켜본 사람에게 유산을 남겼다)에 의해 비참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이야
기이다.
해피 엔딩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웃음>은 관객들에게 씁쓸한 웃음으로 영화의 마지막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한다. 영화 내내 관객들로 하여금 늙은 도어맨의 좌절과 비참함을
공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도어맨이 유니폼을 벗을 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용한 자막을 통해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하고, 이 자막은 부
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하락하게 되는 중산층에 대한 감독의 연민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웃음>이 영화사에서 자리매김되는 이유는 1920년대 독일 사회가 직면하게 된 중산층의 부상을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 관객들에게 설명함에 있어서 뛰어난 카메라 테
크닉과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마지막 웃음>은 영화에 대한 가장 일상적인 질문인 영화의 주제와 형식의 일치의 중요성에
대한 하나의 모범답안일 수도 있다.
영화의 시작은 자전거에 장치된 카메라가 호텔의 엘리베이터와 회전문, 그리고 화려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로비 등을 자유롭게 다니며 도시화, 근대화가 대두하는 당시 사회상
을 엿보게 한다. 칼 프룬드가 촬영한 이 도입부분은 도어맨이 처하게 된 피할 수 없는 어두운 운명을 예시하고 있다. 영화사에서 유명한 도어맨이 술에 취한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도어맨의 가슴에 매달려 세트를 비틀거리며 휘젓고 다니는데, 이는 도어맨의 심리적 불안과 함께 당시 중산층 계층의 불안정한 위치를 말해준다.
<마지막 웃음>은 감독 무르나우, 카메라맨 프룬드, 작가 마이어에 의해 고안된 영화적 테크닉에 의한 내러티브의 성공적 재현으로 찬사를 받고 있고, 영화사가들은 이 영화가 그
리피스의 카메라 트래킹과 시점 편집을 발전시켜 더 정제된 영화문법으로 정착시키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필자: 문혜주/영화평론가>
#5. <황금광 시대 The Gold Rush>(1925) / 감독: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은 188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977년 88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2살 때 극단의 아역배우를 시작으로 유리공, 이발사, 팬터마임 배우 등을 전전했으며 네번
결혼과 한번 약혼에서 열명의 자녀를 생산했다. 1910년 팬터마임 배우로 미국에 발을 디딘 뒤 40여년간 미국에서 살다가 47년 할리우드의 '빨갱이 사냥'에 걸려 52년 추방당했
다. 평생 동안 그는 81편의 작품에 관여했는데 이중 70여편이 자신이 직접 감독과 주연을 겸한 것이었다.
<황금광시대>(1925)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다. <시티라이트>(1931)가 자본주의가 이미 자리를 잡은 도시의 쓸쓸한 풍경이자 돈과 인격
에 관한 수채화라면 <황금광시대>는 황금을 쫓아 부나방처럼 헤매는 인간들을 그린 흑백사진이다. <모던 타임스>(1936)가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의 시작이라면 <황금광시대>는
공격을 위한 몸풀이다. 채플린의 5대 희극 안에는 이 세편 외에 <독재자>와 <무슈 베르두>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 희극 5편은 채플린 최고의 영화들 속에 포함된다. 채플린은 삶
과 사회에 대해 지극히 비관적이었던 대신에 그것을 묘사하는 무기로 웃음을 선택한 셈이었다. 물론 그가 웃음을 택했던 것은 불우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거부했던 심리와 철벽
같은 세상에 대한 전술이었겠지만 이 속에 상업주의적 타협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밝은 화면과 또렷한 사물들, 그리고 사건 위주의 단순한 이야기 구조 등 그의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의 모두가 그랬듯 예술보다는 상품에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채플린의 영화들, 특히 <황금광시대>가 세상을 향해 내쏘았던 질타는 사회비평적 모범으로서 이후의 영화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정신적인 부분과 더불어 우리는 어두운 도시를 배경으로 한 많은 현대영화에서 채플린 영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찰리는 지독한 굶주림 때문에 구두를 삶아 먹으며 구두창의 못을 뼈다귀처럼 핥고 찰리의 상대편에 있는 사람은 찰리를 닭으로 착각하고 덤빈다.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은 자기
들끼리 싸우지만 현실(눈사태)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찰리는 어느 오두막에 들어가 고달픈 육신을 달래지만 이제 그에게는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온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현실은 언제나 초라했으며 욕망은 항상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그래서 찰리로 나온 채플린은 웃음으로, 엉뚱한 댄스스텝으로, 초라함과 낭만이 가득찬 풍경으로 그것에 대항했
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채플린이 금광을 발견한 사람의 동료가 되고 게다가 아름다운 주점 무용수를 품에 안고 행복한 웃음으로 키스를 나누려는 장면으로 끝난다. 원래는 우수
와 비애로 가득한 사회비판적 영화였는데 채플린 역시 할리우드 사람답게 할리우드의 고색창연한 행복한 결말의 관습을 이어받았다. 상업주의와 야비하게 타협한 셈이었다.
채플린은 그뒤 <시티라이트>에서 최대의 서정으로 현대를 그린 뒤 <모던 타임스>에 가서 구체적인 비판을 시작한다. 이것은 <독재자>(1940)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짧은 콧수염의 히틀러와 찰리, 찰리는 꽉 죄는 윗도리와 헐렁한 바지, 그리고 군함만한 구두와 대나무 지팡이로 히틀러에 대항했다. 남들은 현재에 안주할 나이, 쉰살 때의 일이었
다.
이런 채플린이 두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와 몰래 결혼하고 <황금광시대>를 만들 때, 절망한 독일의 영화 예술가들은 <마지막 웃음>(1924)을 만들거나 필름 느와르의 원조격인
<활기없는 거리> 등을 만들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나운규가 <아리랑>(1926)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이제 막 근대영화의 진입단계에 다다랐을 때였고 그뒤 각 나라의 영화역
사는 나라 사정에 따라 제각기 걸음을 내딛었다. <황금광시대>는 이러한 영화역사의 비극성과 현대의 비극성 모두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필자: 이효인/영화평론가>
#6. <전함 포템킨 Bronenosets Potemkin>(1925) / 감독: 세르게이 에이쩬슈테인
장 누아르와 그리피스 그리고 에이젠슈테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서양 영화 초창기의 맥락과 영화이론을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 서양 영화가 동양영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
할 때 비록 그 영향이 때로 강압적이었더라도 이 세 감독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거쳐야만 할 과제이다. 특히 에이젠슈테인이 사회주의 영화를 대표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한,
타락한 영화세상에서 사회주의 영화를 통해 어떤 희망적 단서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찾아가곤 했다. 그 대표작이 바로 <전함 포템킨>(1925)이다.
전함 포템킨의 수병 반란, 그리고 오데사 계단에서의 대학살극이 <전함 포템킨>을 이루고 있는 핵심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화가 무기가 될 수 있으며, 대중교육책이며, 뛰어
난 선동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억누르는 전함의 장교와 억눌리는 수병들, 압살하는 백군 기병대와 코사크 군대와 피를 흘리는 인민들, 모든 것이
극단적인 대조를 통하여 표현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고 극장의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던 에이젠슈테인에게 그러한 서술상의 대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는
지도 모른다. 정작 에이젠슈테인을 에이젠슈테인으로 만든 것은 그의 화법이었다. 그것은 흔히 몽타주로 알려진 것이다.
그의 선배 프도프킨이 필름의 결합을 통해 서술적 의미의 확대와 강조를 꾀했다면 에이젠슈테인은 두개의 대조적인 쇼트들을 통합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 코사크 병사가 내
리치는 칼, 깨어져 뒹구는 안경, 피 흘리는 여인 얼굴의 클로즈업…. 이런 편집을 통해 에이젠슈테인은 상황묘사라든가 감정의 고조를 넘어서서 관객들에게 단호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논리로 떨쳐나갔던 것이다. 물론 그는 이 오데사 계단 장면뿐만 아니라 많은 장면에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크기로 쇼트들을 찍었다. 그는
찍힌 것을 어떻게 편집하느냐가 영화 창작의 처음이자 출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함 포템킨>은 이렇게 포템킨호의 선상 반란에서 시작하여 오데사 계단 그리고 마지막 승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쇼트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영화를 끌어간다. 서구 무성영화
특유의 지루하고 나른한 느낌은 이곳에서 찾을려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몽타주론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치 않았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1929) 등에 대한 비판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는 자신의 몽타주론을 완성하기 위해 낮에는 소련
영화학교의 강단에서, 밤에는 연구실에서 일했다. 급기야 그는 형식주의자로 매도당했고 어떤 영화는 정부에 의해 제재를 당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위대한 사회주의'를 믿었지만 그것을 온순하게 따르는 멍청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형식을 연구하는 사람을 형식주의자라고 한다면 매독을 연구하는 사람
은 매독주의자다"라고 항변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이후는 불행으로 이어졌다.
결국 <전함 포템킨>은 소련 영화의 명예로 남아 있을 뿐 자신의 조국에서는 이어지지 않았다. 또 그의 독특한 인물 전형화론 등의 이론은 이제 후학들의 과제로만 남아 있다. 역
설적으로 그의 몽타주 기법과 사회의식은 1930년대 영국의 사회적 다큐멘터리로 전수되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제 거의 모든 할리우드 영화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그의 편
집 기법을 써먹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몽타주론은 이 타락한 영화세상 만큼 통속화되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흥행작들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전함 포템킨>을 읽어야 한다. 고전이라서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 세상과 아이들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뜻에서다. <필자: 이효인/영화평론가>
#7. <어머니 Mat>(1926) / 감독: 프세볼로트 푸도브킨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러시아의 혁명문학 중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프세볼로트 푸도프킨(1893∼1953)의 <어머니>(1926)는 바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무성영화의 걸작이다. <전함 포템킨>이 시종 망치로 때리는 듯한 충격을 안겨주는 숨가쁜 영화라면 <어머니>는 서정을 통해 격정을 쌓아가는 질긴 밧줄과 같은 영화이다.
푸도프킨과 시나리오작가 자르히는 고리키를 영화로 옮기면서 원작의 이차적인 이야기는 과감히 버리고 등장인물의 수를 줄이는 대신 날카로운 갈등을 중심으로 한 극적구조를
부각시켰다. 그들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한 가난하고 무식한 노동자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어떻게 혁명의 길로 나아갔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리키의 깊이와 넓이를 희생시키
는 것이었지만 무성영화로서 극적 혁명적 효과를 달성하는 데는 최선의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영화는 의식적으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술집과 집과 공장의 파업을 오가는
도입부의 알레그로와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장례식의 아다지오, 수색·배반·체포·재판·감옥생활을 그리는 알레그로와 해방·시위·폭동·아들과 어머니의 죽음을 그려나
가는 격렬한 프레스토의 차례로 영화는 연주된다. 이 계산에 의해 푸도프킨의 <어머니>는 보는 이의 감정곡선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뛰어난 운율의 영화이며 성격과 사건과 극을
하나로 엮어나가는 탁월한 비극이기도 하다.
에이젠슈테인, 도브첸코와 더불어 소련 무성영화시대의 3대 거장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푸도프킨은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한 과학도였으며 시·회화·연극·연출 등 여러 예술분
야를 두루 섭렵한 재기 넘치는 예술가였다. 그는 러시아 몽타주의 아버지 쿨레쇼프의 수제자로 소련 영화의 중심으로 진입했는데, 엑센트릭한 단편 <체스열기>와 과학영화 <뇌의
역학>에 이어 만든 <어머니>는 사실상 그의 첫 장편이었다.
<어머니>에는 그의 이런 예술적 역정들이 창조적으로 담겨 있다. 예컨대 재판장면은 톨스토이의 부활장면의 재창조이며, 감옥에서의 원운동장면은 명백히 반 고흐의 '감옥 안마
당'에서 따온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타마리나가 연기한 어머니의 형상에는 드가와 청색시대의
피카소와 콜비츠의 판화가 응축되어 있다. 그 자신 배우이기도 했던 푸도프킨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사실주의 연기전통을 고스란히 영화에 가져옴으로써 뛰어난 심리적·서정적
효과를 창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를 세계영화사의 걸작으로 만든 기본요인은 탁월한 몽타주에 있다. 서정과 서사, 배우의 연기와 편집, 세부와 전체, 심리와 카메라의 시선, 긴 흐름과 짧은 단절
을 적절히 교차·병치·조합하는 그의 몽타주는 에이젠슈테인과 또다른 특징을 갖는 것이다.
흔히 그의 몽타주이론을 연계의 몽타주라고 단순화하나 이는 옳지 않다. <어머니>의 마지막 부분인 시위와 학살과 투쟁의 장면은 '오뎃사 계단' 못지않게 충격적이다. 사실 그와
에이젠슈테인의 본질적 차이는 후자가 몽타주를 영화의 방법론으로 접근했다면 그는 서술의 기술로 간주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듯한 차이는 결과적으로 세계영화사
에의 평가를 가르고 말았다. 그의 영화는 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영화의 한 전범으로 평가받았으나 정작 그 자신은 발성영화가 도입된 뒤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
다. 이 아이러니는 물론 스탈린주의에 의한 억압 탓이기는 하나 기술적 실험과 타협을 맞바꾸고자 했던 그의 쇠약한 예술혼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8.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1927) / 감독: 프리츠 랑
영화가 역사 바깥에서 만들어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만일 볼셰비키혁명이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만들었다면,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는 나치즘을 '예언'하
는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친구였으며, 루카치가 증오하는 예술가였고, 벤야민이 찬미했으며, 아도르노가 비난했던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대가 프리츠 랑(1890∼1976)은 건축학과 미술을 공
부했으며, 괴테와 말러의 찬미론자였다.
그의 꿈은 원래 화가였으나 1차대전 참전중 부상으로 후송되어 병원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독일 영화의 거물 프로듀서 에리히 포머를 알게 되었고, <마브세 박사>(1924)를 만
들면서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와 함께 독일 무성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러나 무르나우가 회화적인 표현주의를 추구했다면, 랑은 건축적인 표현주의 양식을 완성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촬영감독 카를 프로인트와 귄터 리타우, 미술감독 오토 훈트와 에리히 케텔후트, 카를 볼프레히트 등 표현주의 영화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독일 최대의 촬영소 우
파 스튜디오에서 3백10일에 이르는 대작 <메트로폴리스>의 촬영작업에 들어갔다.
미래도시 메트로폴리스는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행복하고 안락한 부르주아들의 지상낙원이고, 또 하나는 온통 기계로 둘러싸인 노동자들의 지하감옥이다. 지상의
가진 자들은 지하의 빼앗긴 자들의 노동의 대가로 천국을 소유한다.
그러던 어느날 지상세계를 움직이는 자본가의 아들 프레더가 우연히 비밀의 문을 통해 그 끔찍한 지하세계로 내려가 천사같은 소녀 마리아를 알게 된다. 그녀는 노동자들의 유
일한 성녀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과학자가 음모를 꾸민다.
그는 마리아를 납치해 마리아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지하세계로 내려보낸다. 가짜 마리아는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지하세계의 노동자들은 계급투쟁을 향해 전진한다.
랑이 만들어내는 이 어둡고 음침하면서도 무섭도록 열광적이고 흥분을 자아내는 계급투쟁의 우화는 공상과학영화라는 형식 속에서 무성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압도적인 시각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는 독일 영화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기 위해 당대 러시아 영화의 몽타주나 프랑스 영화의 아방가르드 전통을 모두 무시했다. 그 대신 영화 전체를 거대한 건축적인 유기체
처럼 설계하고 그 속에서 집단적 움직임과 기하학적 구도,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와 그 사이로 늘어선 기형적인 세트, 그리고 기계적인 화면과 카메라의 이동으로 표현했다.
아마도 어떤 표현주의 영화도 이보다 더 표현주의 정신을 구현한 작품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랑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트로폴리스>는 위험한 결론으로 이끌린다. 그는 선동과 집단봉기의 계급투쟁의 결과를 공상과학영화
라는 모호한 변명 속에서 이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변질시켰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는 자본가와 자본가 아들 사이의 화해로 변질해 노동자계급의 패배로 끝나며, 혁명은 폭동으로 변질하고, 결국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승
리로 막을 내린다.
<메트로폴리스>는 무시무시한 인플레가 독일 전역을 휩쓸던 1927년 1월10일 베를린에서 개봉되었다. 두 사람이 이 영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 사람은
아돌프 히틀러였고, 또 한 사람은 할리우드 제작자 월터 윈저였다.
13년 뒤 프리츠 랑은 괴벨스의 나치 선전영화 제안을 거절하고 할리우드로 가 필름 누아르 영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그는 '실패한' 독일 영화의 바그너였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9. <황금 시대 L'Age d'or>(1930) / 감독: 루이 브뉴엘
루이스 부뉴엘(1900∼1983), 20세기와 함께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 미국 멕시코를 거쳐 프랑스에서 긴 영화역정을 마감한 이 거장은 생애의 대부분을 상업영화를 만들며
보냈으면서도, 당대의 주류문화를 거스르는 '스캔들'로서의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낸 특이한 존재이다.
그는 첫 작품 <안달루시아의 개>(1928)에서 마지막 작품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영화에 일관된 세계관은 초현실주의라고 주장하였다. 부뉴엘은 인
간이 자신의 본능과 비이성적인 면들을 제도와 문명이라는 틀로써 다스리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 일인가를 끈질기게 보여주려 하였다. 그래서 그의 영화세계에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종교 - 그의 성장 배경인 카톨릭 교회 - 를 향한 공격, 유럽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야유와 경멸, 그리고 무의식과 본능의 영역으로서의 성에 대한 탐구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음흉하리 만큼 우회적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부뉴엘 영화의 특징들은 그의 두번째 영화 <황금 시대>(1930)에 가장 잘 압축되어 있다. 상영시간 1시간인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전갈의 생태를 묘사하며 시작해서 산적들, 사제, 군인, 관료가 차례로 등장하고, 영화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사랑을 벌인다. 이들의 사랑
이 부르주아들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받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인 셈인데,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영뚱하게도 사드의 소설 <소돔의 120일>의 후일담으로 넘어간다. 여기
등장하는 4명의 '패륜아' 중의 한명은 예수의 모습을 하고 있고, <황금 시대>의 마지막 이미지는 사막에 버려진 십자가이다. 이러한 이야기 사이사이에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부르주
아의 삶의 단편들이 끼어들고, 자막과 대사와 음악(<황금 시대>는 최초의 발성영화 중의 하나이다)은 이 영화의 공격대상이 무엇인지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부뉴엘이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만든 첫 작품 <안달루시아의 개>는, 당시 파리 문화계에 유행하던 예술지상주의적인 전위영화에 대한 공격이라는 만든 이들의 의도와는 달
리, '예술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라는 오해(?)와 함께 부르주아 문화인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이어 부뉴엘이 <안달루시아의 개>의 성공에 힘입어 만들 수 있
었던 다음 영화 <황금 시대>는, 일부 좌파 지식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격렬한 분노와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예수를 사드 소설의 주인공으로 묘사한 '신성모
독' 부분이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몰려온 극우단체 회원들은 영사막을 찢었고, 찢어진 영사막 위에 영화는 며칠간 계속 상영되었다. 결국 들끓는 여론과 카톨릭 교회의 압
력에 따라 파리시 당국은 상영금지 조처를 내리고 프린트를 압수하였다. 1950년에 <잊혀진 사람들>로 유럽영화에 '복귀'하기까지, 부뉴엘에게는 '악명높은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고, <황금 시대>의 오리지널 네가는 1993년에야 원래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안달루시아의 개>가 '고전'으로 인정받아가던 세월 동안, <황금 시대>는 여전
히 '스캔들'로서 남아 있었던 셈이다. <필자: 김홍준/영화감독>
#10. <장군 The General>(1926) / 감독: 버스터 키튼
버스터 키턴은 1895년에 태어나 보드빌(노래·춤·곡예 따위를 곁들인 소희극)의 연주자이던 부모와 함께 세살 때부터 무대에 섰다. 슬랩스틱 코미디(배우가 치고받고 하면서
연기·동작을 과장하는 희극)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17년 영화연기를 시작했으며, 1920년대에는 자신의 영화사를 갖고 본격적으로 연출과 연기를 겸하기 시작했다. 1928년
그의 영화사가 MGM으로 넘어가기까지 키턴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열두편의 장편희극영화를 만들었다. <우리의 환대> <셜록 2세> <조종사> <장군> 등이 그 시기
에 만든 대표작들이다.
<장군>은 "어수룩한 낙오자가 사내다운 용기를 증명해보여 사랑하는 여자를 얻게 되는" 이야기이다.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몇번을 보아도 신선하다. 정치성도, 사회에 대한 풍자
도 없다. 단지 키턴의 독창적인 희극적 효과가 있을 뿐이다. 백치 같음과 철학적인 것이 엿보이는 키턴 특유의 무표정과 절제된 신체적 움직임, 주인공이 싸워야 할 상대가 한 소
대가 타고 있는 기차 혹은 한 부대가 주둔해 있는 적지라는 것, 기관차라는 거대한 기계덩어리로부터 무한한 희극적 효과들을 끌어내는 규모 등은 당대 여느 코미디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동시대 슬랩스틱 코미디와 채플린 영화들이 연기자의 신체적 움직임과 얼굴표정을 중시하고 영화가 단지 그것을 기록한 데 비해 키턴은 특정한 카메라 위치와 시각적 효과, 정
확한 타이밍, 편집리듬을 중요하게 여긴다. 주인공 자니가 실연당한 뒤 장면은 그런 요소들의 묘미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자니는 '장군호' 바퀴의 빗장 위에 힘없이 앉아 있다. 잠
시 뒤 기차는 천천히 움직이고 자니의 몸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니의 몸은 자니가 지닌 실연과 고뇌의 무거움에 비해 너무나 가볍게 빗장 위에서 원을 그린다. 두바퀴를 돈 뒤,
화면 오른쪽으로 그가 사라지기 직전에야, 그는 상황을 깨닫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운명의 힘, 그 주변을 따라 도는 자니, 희비극이 공존하는 그 순간은 고정된
카메라, 거리를 둔 카메라 위치, 인물의 미세한 움직임 직후 곧 페이드아웃되는 편집 등이 그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한 것이리라.
<장군>이 영화사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 현대적 면모일 것이다. 카메라는 관객으로 하여금 곤경에 빠진 주인공을거리두고 관찰하게 하고 그 곤경을 즐기게 한다. 그래
서 관객은 주인공과 감정의 동화를 이루지 못한다. 또한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절망감을 보여주는 키턴 특유의 냉철한 무표정은 그러한 이화작용을 더욱 강화시킨다.
또하나 영화의 현대적 맛은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적 신사도를 물려받아 여성을 영화에서 곱게 다루던 시기에 여성을 세상 안으로 끌어낸 점이다. 자루에 넣어 화물칸에 던지고
그 자루를 나중엔 발로 무자비하게 밟고, 몸이 쓸려버릴 듯한 펌프물 세례를 주고, 목숨을 건 탈주에 어리석게 행동하는 여자의 목을 조르다 할수없어 입맞춤을 하긴 하지만. 당대
로서는 진지한 소재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남북전쟁 때의 로맨스는 이러한 현대적 면모들로 패러디가 되고 그의 영화에서 감상은 모두 씻겨나가 버린다.
30년대 메이저 스튜디오 아래서 재능을 잠식당한 키턴은 다시는 <장군>과 같은 독창적 코미디를 만들지 못했다.
키턴은 채플린에 버금가는 유일한 희극영화인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채플린과는 아주 다른 현대적 감성으로 죽은 뒤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다. 특히 부조리극이 성행하고 브레히
트가 영화에 수용되던 시기의 그의 죽음은 수십년 전 그의 영화가 보여준 현대적 감성을 되씹게 했는지도 모른다. <필자: 주진숙/중앙대 교수·영화학>
#11. <잔다르크의 수난 La Passion de Jeanne D'Arc>(1928) / 감독: 칼 데어도어 드레이어
"잔 다르크의 투명한 눈물 한방울을 상자 속에 간직하고 싶다."
루이 브뉘엘이 이 영화에 대해 한 말이다. 하지만 에릭 로드 같은 영화사가는 감독 카를 테오도르 드라이어에 대해 고통에 빠진 여성들(이 영화와 <분노의 날>(1943), <오데
트>(1955), <게르트루드>(1964) 등의 작품)을 가학적으로 재현해내는 남성우월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반면 질 들뢰즈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드라이어야말로 관객에게 최고의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만든다고 평했다. 또 혹자는 "절규하는 소리가 나는 무성영화"라고
이 영화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관점에서 보건 부정할 수 없는 점은 그가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카메라 움직임과 미니멀리즘으로 관객들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드라이어는 사실 세계영화사에서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나 프랑스의 브레송과 더불어 독특한 전통을 차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느낌표나 의문부호보다는 말줄임표를
즐겨 사용하며, 오히려 데스마스크에서 가장 강렬한 삶의 표현을 포착해 낸다.
1920년대 후반 르네 클레르와 페르낭 레제 그리고 루이 브뉘엘이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영화에 관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을 때, 덴마크에서 프랑스로 옮겨온 드라이어는 프랑
스 영화사로부터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는 역사상 흥미로운 세 명의 여성들, 즉 카트린 드 메디치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잔 다르크 중 한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생각하다가, 드디어 마지막 인물로 낙점
한 뒤 중세의 일상을 재현하기 위한 꼼꼼한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잔 다르크 역을 맡을 배우로는 순박한 시골처녀 같으면서도 순교자의 열정과 고통을 간직한 지방 연극
배우 마리아 팔코네티가 선정되었다.
모든 사람들을 놀라운 시각 경험에 빠지게 한 섬세한 클로즈업 중심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다양한 톤에 반응하는 팬크로매틱 흑백필름을 사용했고,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서술구조에 적합한 짧은 길이의 '숏'들로 이루어진 평행편집이 채택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기 위한 재판 과정과 화형 장면으로 나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들(주교, 영국인, 판사 그리고 군중)이 각기 다른 종교적 신념
과 분노를 가지고 이 전쟁터에 뛰어든다.
'숏'과 거기에 대응하는 '뒤집힌 숏'의 관습적인 사용을 피해 가면서 흐르듯 이어지는 클로즈업을 채택한 이 영화의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것은 잔 다르크의 고통에 찬 얼굴과 그
뒤 하얀색의 텅빈 실내공간이다. 말하자면 원근법에 따른 공간적 깊이가 부재하는 것인데, 이때 이것을 대체하는 것이 바로 정신적 깊이이며, 잔 다르크 역의 팔코네티의 얼굴은
마치 중세의 종교적 도상화처럼 정신적 형상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중세와는 달리 이 영화의 후반부는 종교적 구원의 영원성보다는 잔 다르크의 삶에 대한 열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삭발당한 채 화형대에 올라 "오늘밤 나는 어디에 있
을까"라는 독백을 할 때, 그리고 바람에 날려가는 머리카락과 하늘을 나는 비둘기들, 어머니의 품에 편안히 안긴 아기의 이미지들이 보여질 때, 천상의 세계는 멀어 보이고 지상
은 그보다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문제제기는 정말 이제 고전적(진부함)으로 보이고, 이 영화가 영화 100년사에서 갖는 의미는 그래서 형식미의 탁월함 정도에 머무를 것 같다.
그러나 들뢰즈의 의견은 또 다르다. 이 영화는 오히려 세상이 저질영화처럼 보이는 20세기에 태어난 서정적 영화이며 바로 그 정서적 효과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것
을 복원할 꿈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복원한단 말인가?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
#12. <대지 Zemlya>(1930) / 감독: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알렉산드르 도브첸코(18941956)의 <대지>는 소련영화의 발달사에서 다민족국가 영화의 출현을 의미한다. 볼세비키 혁명 후 소련영화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발달했으나 곧
이어 그 동력은 각 민족국가로 확산되었다. 그루지아와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러나 <대지>의 영화사적 가치는 그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혁명의 선전선동과는
궤를 달리하여 인간과 대지의 하나됨이라는 영원성의 테마를 추구한 것이었으며 형식상으로는 당대 소련영화의 거대한 흐름이었던 몽타주영화와는 달리 명백히 시적 영상으로 형
상화된 작품이었다.
도브첸코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코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혁명의 와중에서 그는 교사, 공산당 지하요원, 외교관 등의 다양한 경력을 쌓게 되는데 사실 그를 매료한 것
은 예술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시절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귀국해서는 풍자화가로 나섰다가 1926년에 영화에 몸을 던졌다. 영화에서 도브첸코의 첫
작업은 엑센트릭한 코미디 장르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그다지 주목을 못 끈 실험작들이었다.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것은 네번째 영화인 <즈베니고
라>(1928)였다. 여기서부터 그의 영화는 고향 우크라이나의 자연과 삶과 빈곤과 혁명을 담아내기 시작하였다. 앞의 영화와 <무기고>(1929), <대지>, 발성영화 <이반>(1932)은
이 계열의 4부작이라 해도 좋은 영화일 것이다.
<대지>는 우크라이나의 한 농촌마을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사회적 변동을, 새 것과 낡은 것, 콜호스 농민과 지주, 사람에 대한 신뢰와 신에 대한 신앙 사이에서 생기는 비극적 충
돌을 통해 응시하고 있다.
도브첸코는 '나는 <대지>를 농촌에서 새 생활의 새벽을 예고하는 작품으로서 기획했다'라고 말했으나 결과는 그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완성된 영화는 농촌사회의 계급투쟁을 담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의 영원한 세계인 노동과 대지의 친화, 자연의 순환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생명의 순환, 그리고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지방의 토속
적 서정으로 가득찬 영상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지>는 인간의 노동으로 기름진 자연에 대한 찬가에서 시작한다. 휘늘어지게 열매를 맺은 사과나무 아래서 한 노인이 사과를 씹으며 죽어간다. 그의 곁에는 노인의 생명을 이
어가기라도 하듯 한 어린애가 역시 사과를 먹고 있다. 느리고 시적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농업의 집단화를 둘러싼 지주와 빈농의 갈등으로 긴장을 더해가다 바실리가 이 마을의
첫 트랙터를 들여와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낡은 소유의 상징인 밭두렁을 허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 장면은 지주에게 살해된 콜호스 농민지도자 바실리의 장례식이다.
친구가 든 그의 미소짓는 초상이 사과나무 가지를 스친다. 이어 바실리의 어머니가 또 하나의 생명을 낳고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 시적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도브첸코는 이 영화에서 서술을 위해서든 충돌을 위해서든 장면 내에서 당대 소련영화의 화려한 몽타주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미지와 이미지, 장면과 장면의 연결과
병치와 상승작용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의 쇼트들은 대체로 느릿하고 길며 종종 극도의 광각으로 촬영된다. 그것은 대지의 광대함과 자연의 영원성을 드러내는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단세포적인 혁명론자들에게 공격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영화사가 <대지>를 도브첸코의 오랜 화가의 꿈이 스크린에서 성취된 걸작으로 기록하게 한 요소였
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13. <M>(1931) / 감독: 프리츠 랑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 가운데는 대중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거나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경우가 많지만 그와 더불어 다음 세대의 영화에 끼친 영향력이 더 비중있게 다루어
지는 경우도 있다.
프리츠 랑의 <M>도 그러한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이다. 30∼40년대 필름 누아르 감독들에게 <M>은 교과서와 같은 텍스트였고, 20년대말 유성영화가 갓 태어난 뒤 사운드
를 영화 속에 어떻게 삽입할 것인가에 대해 우왕좌왕하고 있던 영화인들에게 <M>은 역시 모범적인 교본이었다.
20년대와 30년대의 독일사회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권위주의를 지향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작품이 바로 <M>이다.
뒤셀도르프의 어린이 살해사건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은 어린이 살해범 베케르트를 쫓는 경찰과 지하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랑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하여 개인과 공
동체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제시한다.
근대적 의미의 공동체는 자손을 통해 영속되며 법과 같은 권위적 관리체제에 의해 유지되는데, 그러한 권위는 개인의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없는 자
유를 원하는 개인의 본능은 공동체와 권위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살인범 베케르트는 바로 그러한 위협의 상징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물이다. 이러한 베케르트의 정체성 혼란, 즉 또다른 자아를 구현한
랑의 기법들은 필름 누아르의 시각적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베케르트의 또다른 자아는 그림자나 거울 또는 유리창에 반영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림자나 거울은 필름 누아르의 가장 지배적인 시각적 모티브 가운데 하나다.
또한 랑은 베케르트의 개인적 혼란과 더불어 사회적 혼란도 이야기한다. 즉 베케르트를 추적하는 사회적 세력이 경찰과 지하세계로 이원화되어 있는 것이다. 랑은 이러한 두 집
단의 장면들을 완벽한 대칭구조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두 집단의 베케르트 추적을 위한 회의 장면은 교차편집의 전형으로 꼽힌다.
사운드기법은 오늘날에도 그 탁월함이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랑은 사운드를 단순히 영상에 종속적인 것이 아닌, 대위법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특히 경찰과 지하세계의 장면들은 그 유사한 구도에 반해 사운드를 통해 대립적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즉 두 집단이 살인범을 쫓는 과정에서 경찰은 시각적인 것(지도, 필적
등)에 치중하는 반면, 지하세계는 소리를 통해 베케르트를 붙잡는다. 맹인거지가 기억해낸 베케르트의 '페르귄트 조곡'의 휘파람소리는 청각적인 모티브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러나
랑의 가장 탁월한 사운드기법은 은유적 기법이다.
소녀 엘시가 납치되었음을 알리는 장면은 어머니가 엘시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다음 장면인 텅빈 계단에서 울려퍼지며, 이어 엘시의 공이 공터로 굴러가는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이처럼 랑은 사운드를 영상과 결합시켰을 때 그것이 만들어내는 은유적 효과에 대해 누구보다도 앞선 생각을 가진 감독이었다.
이 작품이 지닌 또하나의 가치는 표현주의의 그림자를 안고 심리적 사실주의의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M>을 영화사의 전환기에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
기에도 있는 것이다. <필자: 김지석/부산예술학교 교수>
#14. <모던 타임스 Modern Times>(1936) / 감독: 찰리 채플린
헐렁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윗도리, 작은 중산모에 크고 낡아빠진 구두, 짧은 콧수염에 특유의 마당발 걸음, 그리고 옆구리엔 지팡이를 지닌 구시대의 신사. 서울의 수많은 레스
토랑 간판에 새겨져 있어 이제는 그 분장이 갖고 있는 고유한 의미도 다 바래버린 형상.
이 형상은 찰리 채플린이 지금으로부터 80년전 처음 영화에 출연하면서 창조한 방랑자의 모습이다. 시대를 거슬러 가는 이 방랑자의 분장은 채플린의 무성영화 모두에서 산업화
를 향해 치닫는 미국사회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존재의 상징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도와 자부심으로 전통을 고수하며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도전하는 인물을 표상
한 것이었다.
1936년도 영화 <모던 타임스>(현대)는 채플린이 이 방랑자의 분장으로 등장한 마지막 영화이며 또한 그의 마지막 무성영화이다. 방랑자는 기계만능의 현대를 풍자하는 데 발레
와 같은 슬랩스틱 제스추어를 이용하며 감상적 로맨스와 함께 그 사회를 떠나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채플린에게서 말하는 방랑자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이 마지막 무성영화에서 방랑자로 하여금 무국적의 묘한 언어로 노래하게 함으로써 무성과 유성의 경계를 넘어버린다.
<모던 타임스>에서 채플린이 그리는 현대는 냉혹하다. 노동자들은 축사로 끌려가는 양떼처럼 공장으로 몰려 들어가고, 자본가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노동자들을 감시한다. 최
소의 시간에 최대의 생산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숨쉴 틈도 없으며 화장실 가는 시간도 체크당한다. 화장실에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려 하면 한쪽 벽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자본가가
불호령을 내린다. 점심시간도 아까워 자본가는 작업 중에 급식할 수 있는 자동급식기계를 설치한다. 자동화되는 일터는 실직자를 대량 생산해내고 그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벌인다.
굶주림 때문에 빵 하나를 훔치는 사람도 있고, 시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이도 있다. 그러한 이들로 인해 거리에는 경찰관들이 가득하다.
주인공 방랑자는 현대의 노동자이다. 그는 무엇을 생산해내는지 알 수 없는 작업대에서 볼트를 조인다. 그의 손이 반의 반초만 늦어도 일관작업체제는 엉망이 되고 쉴새없이 볼
트를 조이는 그의 두 손은 작업대를 떠나도 자동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여자의 엉덩이에 달린 단추도 조이려 달려든다. 그는 자동급식기계를 시험하는 대상으로 뽑히지만, 고장이
나 광포해진 기계는 그에게 음식물을 내치고 그를 폭행하고 미치게 하고 거대한 기계의 흐름으로 먹혀들어가게 만든다.
거리에서 그는 트럭의 꼬리에서 떨어진 붉은 깃발을 들고 뛰다가 시위대열에 앞장서기도 하며, 고아 소녀를 만나 가정을 꿈꾸고 직업을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랑자는 현대의
작업에 적응하기 힘들다. 결국은 소녀와 지평선을 향해 떠난다.
대중사회에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성에 대한 고발과 물질문명이 가져오는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모던 타임스>는 공산주의적 경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물의를 일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으며, 오스트리아에서는 붉은 깃발을 들고 뛰는 장면이 검열에서 잘렸다 한다. 그리고 이 영화와 뒷날 만들어진 <위대한 독재자> <베르두
씨>에서 보여준 비판적이며 좌파적 색채는 훗날 매카시 선풍이 할리우드를 뒤흔들 때 채플린이 미국으로부터 추방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담긴 비판의 소리는
아직도 또 앞으로도 유효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15. <올림피아 Olympia>(1938) / 감독: 레니 뤼펜쉬탈
레니 뤼펜쉬탈이 파시스트의 어용작가라는 치욕적인 오명을 얻게 된 것은 1934년 나치의 전당대회를 기록한 <의지의 승리>로부터 출발한다.
히틀러를 천상에서 내려온 구세주로 표현하면서 지루한 정치적 이벤트를 웅대한 드라마로 탈바꿈시킴으로써, 그는 베니스 영화제의 그랑프리를 거머쥠과 동시에 대표적인 관변
작가의 대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그의 다음 작품 <올림피아>는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나치당의 공식선전영화라고 하기에는 힘든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인간육체의 미적 가치에 매혹당한 뤼펜쉬탈은 국제
올림픽위원회와의 직접 교섭을 통해 촬영허가를 받아내는 데 몇개월을 소진해야 했고, 자신과 애증관계에 있었던 선전상 괴벨스의 방해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36년 베
를린 올림픽이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파시즘의 도도한 흐름을 전파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의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나치당에게 그리 매
력적인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도 '느린' 매체였으며, 선전의 효율성에서 보자면 영화보다는 라디오가 확실한 투자 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오락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우민화의 도구로 정의되었다. 기념비적인 행사에 걸맞는 예술작품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하던 히틀러의 독단이 없었다면, 뤼펜쉬탈은 엄청난 제작비를 끌어들일 수 없
었을 것이다.
개회식 장면을 성대하게 묘사하기 위해 비행선에까지 카메라가 장치되고, 다이빙 장면을 연속적으로 찍기 위해 촬영기사들은 몇개월 동안 수중촬영 훈련에 몰두해야 했다. 그런
치밀한 사전준비 결과 2주간의 운동경기는 2백25분의 서사시로 새롭게 탄생했다. 바그너풍의 음악을 배경으로 안개에 싸인 고대 그리스에서 채화된 성화가 독일로 전해지고, 히
틀러는 천상의 신전에서 이를 내려다본다. 프로파간다의 기조가 깔려 있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나레이션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인간육체와 음악을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뤼펜쉬
탈은 전혀 새로운 예술적 성과를 창조해냈다.
게다가 가장 역동적인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흐르는 육상경기들을 미국의 흑인선수들이 휩쓸어버리는 바람에 영화는 애당초 선전의 목표를 달성하기 힘들어졌고, 이러한 장면을
삭제하라는 나치관료들의 요구를 뤼펜쉬탈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정치적 구호의 거세도 프로파간다로부터의 탈출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육체가 시종일관 찬양되고, 준군사적이며 독특한 양식으로 패턴화된 시각적 모티브들이 반
복해서 등장함으로써 파시스트의 미학과 시각적 상상력의 정수가 드러난다. 그 점에서, 히틀러에게는 매력을 느꼈지만 나치의 이데올로기에는 반대했다는 뤼펜쉬탈의 항변은 별다
른 힘을 지니지 못하며, 파시즘의 매혹적인 시대정신을 그는 무의식적으로 담아내버린 셈이다. <올림피아>가 이후 대중세뇌의 주요수단으로 등장한 텔레비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장르의 원초적 형태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평가를 뒷받침하는 또다른 근거이다.
객관성을 가장한 물신주의는 언제라도 파시즘과 만나게 되기 마련이다. <올림피아>가 남긴 교훈은 하나의 이벤트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당대 현실의 왜곡과
동치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국가의 정책적 개입에 의한 것이건, 아니면 개인의 작가적 소신에 의한 것이건, 어떤 '기록'도 역사적 책임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필자: 김명준/영화평론가>
#16. <커다란 환상 La Grande Illusion>(1937) / 감독: 장 르누아르
만일 영화가 리얼리즘과 형식주의 사이에 놓여 있다면, 그건 미장센과 몽타주의 역사로 다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미장센은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크다는 변증법적인 몽타주
와 반대로 시간과 공간의 현실적 반영 위에 놓여진 전체로서의 시스템이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리얼리즘은 카메라가 현실을 기계복제할 때 어떻게 모순을 보존
하고 반영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어 왔다.
장 르누아르(1894∼1979)는 미장센이라는 영화 수사학과 리얼리즘이라는 미학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구현해낸 감독이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로 태
어났으나, 그는 회화보다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보마르셰의 연극, 그리고 좌파 인민전선의 활동에 더 많은 정열을 바쳤다. 르누아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인 적은 없었으나, 한
번도 노동자들과 인민의 편에서 벗어난 적도 없었다. 그러한 세계관이 때로는 모순되고 때로는 모호한 상태로 머물면서도 그의 영화 속에서 사해 동포주의적 휴머니즘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르누아르의 믿음이 담긴 영화가 <커다란 환상>이다.
영화의 무대는 1차 세계대전 말, 프랑스 공군 마레샬(장 가방)과 장교 보엘디외는 비행기가 추락하여 그만 독일군 포로가 된다. 이 포로수용소에는 여러 나라의 군인들이 잡혀
있었고, 수용소장은 귀족 출신인 폰 라우펜쉬타인(<그리이드>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감독)이다. 그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신사적으로 포로를 대하지만, 포로들은 탈출을 계획한
다.
그리고 프랑스 장교 보엘디외의 희생 덕분에 마레샬과 유대인 로장탈은 탈출에 성공한다. 두 사람은 천신만고 끝에 영구 중립국인 스위스 국경을 넘는다.
장 르누아르는 이 영화를 '전쟁장면이 하나도 없는 전쟁영화'라는 전무후무한 원칙을 갖고 연출한다. 그것은 평화에 대한 그의 희망이고, 신념이다. 하지만 포로수용소에 모인 수
많은 인간들 사이의 모순에 찬 세상만사의 만화경은 그러한 꿈을 또다른 전쟁으로 이끈다. 거기에는 귀족과 노동자 또는 자본가 사이의 계급모순, 유럽 속의 유대인의 민족 모순,
국가간의 모순, 종교 모순이 서로 충돌하고, 편견에 차서 증오를 드러내고, 미워하고 맞선다. 그것을 르누아르는 어느 편에 서는 대신 장시간 이동 카메라와 편집 없는 롱 테이크,
그리고 딥 포커스를 이용한 공간적 깊이를 통해 고전적인 현실모순의 리얼리즘으로 담아낸다. 르누아르는 전쟁 아래서의 자유, 전쟁 속에서의 평등, 전쟁과 박애를 준엄하게 묻는
것이며, 그의 질문은 주제와 형식의 일치를 통해서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사상 유명한 마지막 장면. 인터내셔널한 단결을 꿈꾸는 노동자 출신의 마레샬은 말한다. "이제 곧 전쟁이 끝나겠지, 그러면 다시는 전쟁이 없을거야." 그러자 유대인 은행
가 로장탈은 대답한다. "그건 자네의 커다란 환상일세." 그리고 두 사람은 눈 덮인 스위스 국경을 넘는다. 이 영화는 37년 6월4일 개봉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 예언대로(!) 2
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커다란 환상>을 '영화의 적 1위'라고 부르며 모든 프린트를 소각시키라고 지시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전후 이 영화의 프린트가 발견된 곳은 46년 뮌헨이
었다. 그뒤 수많은 시네마데크의 노력으로 72년에야 비로소 우리가 볼 수 있는 '완전판'이 복원되었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17. <게임의 규칙 La R gie du jeu>(1939) / 감독: 장 르누아르
1956년, 파리의 시네클럽을 운영하던 장 가보리와 자크 마르샬이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게임의 규칙>의 필름을 발견해 냈다. 이 필름은 그뒤 3년이 지난 1959년에 1939년
의 원판에 거의 가까운 상태로 복원되어 다시 공개됐다. 이 작품의 전면적인 재분석에 들어간 영화평론가, 학자들은 영화사상 가장 복잡한 등장인물간의 관계와 풍부하고도 상징적
인 영상기법에 놀랐다.
후작 로베르의 성에서 열리는 사냥파티에 참가한 상류계급 사람들간의 갈등과 하인계급 사람들간의 갈등, 그리고 이들 두 부류 사이의 얽히고 설킨 갈등이 마지막에 가서 만나
는 플롯을 통해 장 르누아르는 '사회의 각 계층'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상류·하류계급의 등장인물의 관계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여러번 이 작품을 보지 않고서는 그 관계를 이해하기 힘들다.
상류계급의 경우 후작부인 크리스틴은 젊은 비행사 앙드레, 앙드레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옥타브, 생오뱅과 미묘한 관계에 빠지고 로베르는 주느비에브와 연인관계이다.
로베르와 주느비에브의 관계는 옥타브가 알고 있으며 크리스틴도 알게 된다. 하녀 리제르는 남편 슈마허와 새로운 하인 마르소와 삼각관계에 빠지며 이들의 관계가 엉뚱하게 앙드
레의 죽음을 불러 일으킨다.
르누아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모든 게임이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규칙을 깨뜨리는 이는 게임에서 지는 것이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은
상류사회의 결혼과 간통, 사냥 등이며 하인계급의 유희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게임은 궁극적으로는 성의 게임이며 또 서로 얽히고 깨어지지만 상류사회의 그것이 보다 '위선'적이다. 앙드레는 이러한 규칙을 깨뜨리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
르누아르는 그 자신이 직접 옥타브로 출연하여 이들의 성적 게임의 매개자이자 또 참여자가 된다. 그래서 유려한 카메라워크는 옥타브를 중심축으로 이동해 나간다. 카메라는 그
를 따라다니며 귀족계급과 하인계급의 사회를 자연스럽게 대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의 딥 포커스 촬영이 이미 여기서 확고한 미학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영화적 공간개념을 확장시킨 것이다. 전심초점 공간
의 표현으로 깊이감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프레임의 경계를 계속 드나들게 함으로써 훗날 영화학자 노엘 비루시가 체계적으로 분석한 외화면공간(오프스크
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탁월한 연출기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클로즈업이 거의 배제된 풀숏화면의 배경이 되는 세팅과 의상코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남성성/여성성, 우아함/천박함, 전통/현대, 도시/시골, 상류/하류계층 등).
이처럼 이 작품에서 르누아르가 20세기초 프랑스 사회의 모든 계층을 들여다보는 영화적 형식은 독창적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의 방대한 문화적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18세기
프랑스 코미디 야외극의 전통과 뮤세, 보마르세, 마리보의 영향에서 낭만주의 회화의 전통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규칙>에 세세하게 스며있는 문화적 전통은 왜 르누아르의 영화가
프랑스인들로부터 그토록 사랑을 받았는지를 짐작케 해 준다. <필자: 김지석/영화평론가·부산예술학교 교수>
#18. <판타지아 Fantasia>(1940) / 제작: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월트 디즈니는 1937년 겨울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를 개봉했고 이 작품의 엄청난 성공은 디즈니에게 해마다 장편 만화영화 한 편씩을 공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심어 주
었다. 그는 곧 <피노키오>와 <밤비> <판타지아> 등 세 편의 장편 만화영화를 동시에 제작한다는 계획에 착수했다.
해를 넘기면서도 승승장구하는 <백설공주…>에서 얻은 세계적인 명성과 결벽증에 가까운 완성도를 이어가고자 디즈니는 늘 그래왔듯이 <피노키오>의 줄거리를 완전히 개작하는
한편,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였던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교류하며 <판타지아>의 명장면들을 구상해 갔다.
<판타지아>는 1940년에 처음 발표되었지만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장면들은 1990년에 영화 발표 50주년을 맞아 현대적인 영상기술과 과학에 힘입어 원작보다 세련되게 복원
한 작품이다.
이 장편 만화영화는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디즈니 프로덕션의 화가들을 포함한)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애써 강조하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화면 중심에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뒷모습이 실루엣으로 우뚝 서고, 간혹 반사된 그림자로 처리되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클래식 명곡이 도입부를 장식한다. 그 첫 삽입곡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라단
조>. 이때의 화면은 디즈니 작품 스타일로서는 의외라고 여겨지는 실험적 영상들로 꾸며져 있다.
음악과 어우러지는 선과 면의 움직임, 속도감과 중첩의 이미지, 인류가 이루어 온 음악의 성과와 새로운 영상인 애니메이션의 조화는 제목 그대로 관객들을 판타지아의 세계로
끌어간다. 독일의 표현주의 전위미술가 오스카 휘싱거의 추상 애니메이션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음 곡은 디즈니의 전형으로 굳어진 금빛가루 뿌리는 요정 팅커벨이 유도하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인형조곡>이다. 이 부분을 구성하는 음악과 춤의 장면들이 사실은 <미
녀와 야수>의 황홀한 댄스 장면 등 이후에 제작된 거의 모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화면 구성에 정형적인 모범으로 재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디즈니의 미키마우스에 대한 집착은 이어지는 삽입곡을 담은 세번째 장면에서 드러난다. <마법사의 도제>(폴 듀카스 작곡)라는 표제음악이 선행하는 이 부분에서 디즈니는 무언
의 미키의 행동을 첫 곡인 바흐의 삽입곡에서와 일치하도록 꾸며 자신이 공들여 창조한 만화영화의 주인공에게 인간의 예술을 향유하도록 한다.
인류의 클래식 예술을 향한 디즈니의 허영은 이어지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장면에서는 우주의 창조와 지구의 탄생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면서 진가가 드러난다.
완전 수공으로 제작되었을 당시의 작업 환경에서 이러한 교만에 가까운 작품을 지휘할 수 있었던 디즈니의 집착은 그의 감추어졌던 생의 진면목이 일부분 드러나면서 이해를 구
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 작품의 예술적 방황은 베토벤 6번 교향곡 <전원>을 삽입곡으로 하는 부분에서 그리스 신화와 만화영화의 접맥을 시도하면서 나른한 로맨스를 표현하더니, 이윽고 발레 오페
라인 <시간의 춤> 장면에서 코끼리, 악어, 하마 등이 벌이는 잡탕적 무희로 이어져 한숨을 돌리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러시아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삽입곡이 이어지면서 이 모든 것을 일거에 거부하는 듯 흉칙한 악마의 죽음을 부르는 몸짓으로 비틀린다.
움추린 악마의 몸뚱아리가 교교하게 험한 산봉우리에 몸을 숨기면 카메라는 서서히 빠져나와 어느덧 신을 경배하는 길고 긴 촛불행렬로 이어지며, 슈베르트 곡 <아베마리아>의
선율만 남기며 '역사상 등장했던 더없이 기묘하고 아름다운 작품 하나'가 끝이 난다. <필자: 이용배/만화영화 감독>
#19. <시민 케인 Citizen Kane>(1941) / 감독: 오손 웰즈
영화의 역사는 1941년 5월1일 개봉한 <시민 케인>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어떤 영화도 이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화의 모든 사고에 새로운 배치가
이루어졌다. 역사는 갑자기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하고, 고전주의 영화의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그리고 <시민 케인>은 모더니즘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오손 웰즈(1916∼1985)는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체홉과 입센에 정통한 연극연출자였다. 그는 22살에 머큐리 극단을 결성하여 실험극을 시도했지만 후원자는 아
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하여(!) 라디오 드라마 연출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38년 10월30일 CBS 라디오에서 "임시 뉴스를 알려 드립니다"로 시작하는 가상
화성인 침입 드라마 <우주전쟁>으로 라디오 역사상 유례없는 소동을 일으켰다.
오손 웰즈는 그 해의 인물이 되었으며, RKO 영화사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에게 영화 연출을 제안하였다.
오손 웰즈는 머큐리 극단을 이끌고 할리우드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화에 관한 전권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허만 맨키비츠와 공동으로 쓴 시나리오로 '비밀리에' 촬영에 들어
갔다.
영화는 거대한 성 제나두에서 신문왕 찰스 포스터 케인이 "장미꽃 봉오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관한 기록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아무래도 그 한마디
가 걸린다. 그래서 기자 톰슨은 살아 생전 친했던 네 사람을 만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취재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비밀을 알지 못한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어린 시절 썰매에
쓰인 이름인 줄은.
오손 웰즈는 단 한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기자를 따라가며 네 사람을 만나 플래시 백 구조로 케인의 주변에 있던 다섯 사람의 눈으로 케인을 본다. 잘 짜여진 19세기 소설
의 기승전결 이야기 구조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그 속에서 같은 사건과 같은 인물은 서로 상이한 진술에 의해 반복과 차이를 경험한다. 그것은 영화에서 이중화법을 통하여 영화
적 시간으로 이야기를 다시 배열하고 거기서 생겨나는 모순을 드러내, 질서정연하다고 믿었던 고전적 세계를 비판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손 웰즈는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만남을 담으면서 촬영감독 그레그 톨란드의 '혁명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는 초점거리가 깊은 딥 포커스와 정지할 줄 모르는 이동 카메라, 그
리고 장시간 촬영과 경사 구도로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공간과 소련 몽타주 기법에서 끌어낸 화면과 사운드의 충돌, 그리고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미장센을 할리우드의 거대한
기술적 토대 위에서 전적으로 새롭게 배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영화의 백과사전이며, 전례가 없는 대규모의 실험영화였다.
그러나 당시 언론 재벌이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자신의 스캔들을 소재로 삼았다는 이유에서 이 영화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장하였다.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하였으며,
오손 웰즈는 평생 그 빚 속에서 헐떡거리며 저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복권한 <시민 케인>이 모든 영화평론가들의 열광이며 모든 영화감독들의 절망이
되기는 했지만, 오손 웰즈 자신에게는 지옥이었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20. <폭군 이반 Ivan the Terrible>(1944/1946) / 감독: 세르게이 에이쩬슈테인
이반 4세(1530∼1584)는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통일 러시아를 건설한 최초의 차르이니, 그는 뒤에 폭군 이반으로 불린다. 이 인물의 성격과 비극과 역사적 역할은 이후
러시아 예술의 주요한 테마로 등장하였다. 에이젠슈테인이 제정 러시아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테마로 한 <파업>으로 그의 영화활동을 시작하여 제정 러시아의 기초를 놓은 폭
군 이반에 관한 영화로 이를 마감하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공포와 피로 얼룩진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국가 지도자들의 의외성과 비밀, 조폭성과 공포, 모스크바 공국을 위한 이반의 활동과 투쟁을 전면적으로 그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든 전체주의 국가에서 그러하듯 역사영화는 고도의 정치적 은유를 띠게 마련이다. 여기서의 이반이 곧 스탈린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마지
막 영화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에 앞서 수백쪽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영화적 전기를 만들고 모든 인물성격과 무대의 장면과 쇼트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의 작업 방법은 이전과
는 달리 극히 독선적이고 광적인 것이었다.
1944년 3부작 중 1부가 완성되었다. 영화는 찢어진 러시아를 통일하는 이반의 투쟁을 그린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낙관적 정서로 차 있었다. 당은 이를 환영했지만 그의 진짜 의
도는 46년 2부가 완성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3부가 거의 편집되던 시점인 46년 8월부터 당국은 <폭군 이반> 2부를 신랄하게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진보적 군대였던 이반의 오프리치니키(친위대)를 미국의 KKK단
을 연상케 하는 타락한 무리로 그렸으며, 강력한 의지와 성격의 소유자 이반을 나약하고 의지가 여린 햄릿과 같은 성격으로 그린" "무가치한 영화"라는 당 중앙위원회의 비난은
2부를 58년까지 상영금지로 묶어 놓았고 3부의 네가와 편집필름 모두를 불살랐으며 결국 에이젠슈테인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빚었다.
미완성 영화 <폭군 이반>은 이상한 아름다움과 전율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전함 포템킨>과 영화적 방법은 다를지라도 영화사상은 참된 인간주의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극적으
로 증명하는 작품임과 동시에 색채와 음악, 화면구성과 몽타주 등 모든 영화적 요소의 유기체적 통일을 지향한 그에게 제2의 정점을 의미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역사와 관련하
여 이 영화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 있는가는 동료감독이었던 미하일 롬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1부와 2부를 확연히 구별하는 것은 제작기술의 관현악적 완
벽성도, 각 에피소드의 놀라운 완성도도, 액션의 압도적인 표현력도, 편집도, 열광적인 리듬도, 영상과 소리의 대위법도 아니다. 이 모든 면에서 2부가 1부에 비해 더욱 완벽하긴
했지만, 두 영화의 차이점은 내적 주제에 있다. 스탈린 개인숭배의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에이젠슈테인은 2부에서 감히 그 개인숭배에 반대하여 손을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공공연한 역사적 등가물들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으나 영화의 전체구조가 그것을 시사하며, 실제로 모든 장면의 문맥(컨텍스트)을 형성하고 있다. 거의 피부에 닿을 듯이 영
화의 표현력은 풍부하였다. 그래서 살인, 처형, 혼란, 고뇌, 잔혹, 의심, 책략, 배신 등의 분위기는 이 영화의 첫 관객들에게 광기에 가까운 불쾌감을 가득 채워 주었고, 그들은 그
것이 의미하는 바를 감히 입 밖에 내려고 하지 않았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
#21. <말타의 매 The Maltese Falcon>(1941) / 감독: 존 휴스톤
필름 누아르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던 41년 존 휴스턴 감독의 <말타의 매>와 함께 태어났다.
프랑스의 범죄소설을 지칭하는 세리 누아르에서 가져온 이 말은 하드보일드풍의 펄프 픽션 이야기 구조와 사립탐정, 어두운 세트 공간의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속에서 벌어지
는 범죄를 그려내면서 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에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분명했던 기승전결은 범죄의 욕망 속에서 헝크러지기 시작했고, 얌전했던 여주인공들은 요부로 변신하였
으며, 남자 주인공은 사방이 악으로 둘러싸인 함정 속에서 배신당하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필름 누아르는 할리우드의 모든 장르 중에서 가장 음울하고 비관적인 기분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지키는 파수병이었다. 그리고 <말타의 매>에는 그 모든 것이 거의 완전한 원형
으로 보존되어 있다.
존 휴스턴(1906∼1987)은 윌리엄 와일러와 하워드 혹스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았으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 평생 제임스 조이스의 열렬한 독자였다. 그는 여러 장르의 영화를
찍었으나 자신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필름 누아르로의 복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말해왔다.
그는 빔 벤더스와 존 밀리어스, 로만 폴란스키, 오우삼 그리고 퀜틴 타란티노의 우상이었으며 또한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에 의해 이류 감독(!)으로 낙인 찍힌 연출
자이기도 했다.
<말타의 매>는 하드보일드 소설가 새뮤얼 대시엘 해밋 원작의 세번째 영화화이다.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험프리 보가트)는 브리지드라는 미스테리한 여성의 방문과 함께 동료를
살해당한다. 그는 사건을 뒤쫓으면서 사방에서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음험한 사내 카이로(페터 로레)와 그 뒤에 있는 '뚱보' 굿맨은 그에게
'말타의 매'라는 조각을 요구한다. 그 속에는 보석이 들어 있다는 단서와 함께.
음모와 허무로 가득 찬 하드보일드 소설을 어둠과 욕망의 영화로 옮겨놓은 것은 전적으로 존 휴스턴의 뛰어난 각색과 연출이다. 그는 영화 전편을 세트에서 촬영하면서 실내 공
간을 밀폐공포증의 노이로제와도 같은 상황으로 만들어 놓았다. 등장인물들은 예외없이 운명의 덫에 빠져든 것처럼 꼼짝 못하고, 영화는 이야기가 한단계 진전될 때마다 매번 같은
공간으로 돌아와 이야기 구조 속에서 플롯을 발전시킨다. 그것은 반복이면서 또한 차이의 효과를 만들어내면서 프레임과 사운드의 관계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 관계는 끝이 없을
것 같은 쇼트와 상대 쇼트의 반복 속에서 두 사람만이 있는 미디엄 쇼트(프랑스어에서 '아메리칸 쇼트'라고 번역하는!)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으며, 거기서 할리우드는 고전적인
프레임의 공간을 완성하였다.
웨스턴의 올 쇼트, 뮤지컬의 풀 쇼트, 갱스터 영화의 편집, 멜로드라마의 클로즈업에 이어 필름 누아르는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새로운 신화적 공간을 만들어냈으며, <말타의
매>는 바로 그 입구이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22. <인생유전 Les Enfants du Paradis>(1945) / 감독: 마르셀 까르네
2차대전이 발발하자 30년대 프랑스의 시적 사실주의를 주도하던 중요한 작가들은 프랑스를 떠났다. 장 르누아르와 줄리앙 뒤비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자크 페데는 스위스로
피난갔다. 그들이 프랑스를 비운 사이 이미 <안개 낀 부두>로 명성을 떨치던 마르셀 카르네만이 파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평론가는 "비시 정권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안개 낀
부두>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 염세적이며 패배감에 찬 성향이 문제라는 것이다.
카르네는 1840년대 루이 필립 치하의 파리 극장가 블르바르 뒤탕플을 무대로 인간극을 연출했다. 극장과 나이트 클럽이 줄지어 서 있던 환락가이자 범죄의 거리인 이곳에서 팬
터마임 연기자 바티스트 뒤브로아주는 스테이지에서 나체춤을 추는 가랑스와의 애정을 축으로 장장 3시간35분의 인간 드라마를 만들어낸 것이다. 가랑스를 둘러싼 뒤브로, 극작가
피에르 라스네르, 연극배우 프레데리크 르메트르 등은 실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낭만적인 사랑은 가상적인 것이었다.
우리들에겐 샹송 <고엽>의 작사자로 더 알려진 시인 자크 프레베르가 시나리오와 대사를 담당했다. 나치 점령하의 파리에서 3년3개월간의 제작 끝에 이뤄진 작품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서민들의 기질과 사랑의 끈질긴 근성을 보여줌으로써 나치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되었던 <인생유전>에는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갈채를 보냈다. 카르네는 프랑스
가 해방되고 다시 이 영화를 상영했을 때 의상제작자 제리코 역의 로베르 비강이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피에르 르누아르로 교체시켰다.
모두 2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1부 <범죄의 거리> 2부 <하얀 남자>이다.
장 루이 바로의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사랑과 팬터마임 연기. 당대의 명배우 피에르 브라쇠르, 마르셀 에랑, 마리아 카르레스와 무엇보다 여주인공인 아를레티 등의 불꽃튀는 열
연으로 발자크의 인간극장을 연상케 한다.
<세계 영화전사>를 쓴 프랑스의 영화사가 조루주 사들은 이 작품을 카르네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뒤브로의 사랑. 팬터마임. 발자크적인 여인 아를레티와 정숙한 아내 마리아 카
자레스와의 대비, 보헤미안적인 배우 브라쇠르, 무정부주의적인 암살자 에를랑. 그리고 대중연극과 범죄의 거리의 풍속도 등은 예술과 현실 사이를 넘나드는 걸작이다. 멜로드라
마, 비극, 팬터마임 등의 묘미가 섞여 있다.
이 작품이 나치 치하의 파리에서 상영되기 시작했을 때 연합군은 이미 이탈리아 제노아에 막 상륙했다. 또한 프랑스 정부는 한편에 2천7백50미터 이상의 필름을 사용하지 못하
게 모든 제작사에 명령했지만 이 작품은 5천미터나 되는 필름을 사용했다.
원제목을 직역하면 <천국의 아이들>이지만 'paradis'라는 뜻은 극장 3층의 가장 값이 싼 자리를 일컫기도 하나, 프레베르는 서민과 연극배우를 통틀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인생유전>은 나치에 저항하는 프랑스 서민들의 예술기질과 사랑의 대서사시이다. 즉 프랑스 서민과 민중을 대변하는 민족적인 영화인 것이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단국
대 교수>
#23. <무방비 도시 Roma, Citt Aperta>(1945) /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사회현실과 역사를 충실히 기록함으로써 관객의 의식을 변화시키려는 영화의 시작은 아마도 네오리얼리즘일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고, 열린 결말을 추구하
는 모더니즘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도 네오리얼리즘 영화였다. <무방비도시>는 네오리얼리즘의 서장을 장식한 영화이며 그 방법론과 실제를 구체화한 로셀리니의 전쟁 3부작 중 하
나다.
2차대전중 독일 점령하에서 비밀리에 기획된 이 영화는 연합군이 상륙한 직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기록영화에만 제작허가를 내주었으나 로셀리니는 이를 장편극영화로
만들어 종전 직후 완성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동시녹음을 위한 필름과 기자재는 엄두도 못낼 만큼 비쌌고 촬영할 스튜디오도 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무방비도시>는 각기 다
른 종류의 자투리 필름으로 찍혀 화면은 다양한 질감을 갖게 되었고 로케이션 촬영이 돋보이는 기록영화적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게다가 느슨한 플롯과 열린 결말의 이야기에
가미된 감상적 멜로드라마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독일군에게 살해된 한 신부의 실화를 근거로 만든 <무방비도시>는 이야기의 전개가 매우 완만하다. 영화를 시종 이끄는 인물은 레지스탕스 요원 맨프레디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그가 피신하는 행로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있다. 먼저 그의 동료의 약혼녀 피나가 있다. 이미 아들이 하나 있는 그는 독일군들이 약혼자를 붙잡아가는 것을 뒤따르다 결혼식날
무참하게 총살당한다. 피나의 결혼을 주례할 돈 피에트로 신부는 레지스탕스의 자금을 운반해주고 맨프레디와 동료를 수도원에 숨기려다 체포된다.
맨프레디의 옛 정부는 그를 하룻밤 피신시켜주나 그로부터 경멸을 받는다. 그리고는 마약과 사치품, 변태적인 애정행위에 팔려 그를 독일군에게 밀고한다. 맨프레디는 모진 고문
에도 입을 열지 않고 영웅적인 죽음을 맞으며, 같이 체포된 신부도 결국 총살당한다.
그밖에도 전쟁이 싫어 탈주했으나 체포돼 감방에서 목매는 오스트리아 군인이, 또 게슈타포지만 나치이념에 냉소적이고 결국은 그 이념이 실패하리라 확신하는 술취한 장교가
이야기에 양념을 얹어준다.
로셀리니는 이들을 공평하게 자유롭게 그러나 아주 강렬하게 그린다. 주인공은 하나가 아니며 중심이 되는 사건도 없다. 억압적인 나치·파시즘 아래서 모든 인물들이 겪는 사건
들은 그 자체로 강렬하다. 로셀리니는 이들을 통해 독일 점령하의 이탈리아에서, 로마의 골목길에서 벌어졌을 일들,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 혹은 그에 반하는
타락의 모습을 훑어줄 뿐이다. 그 모습들은 하나하나가 멜로드라마다. 그래서 영화는 여러 겹의 멜로드라마가 된다.
이 감상적인 비극에 희극적 요소들을 삽입하는 로셀리니는 관조적이고 희망적이다. 맨프레디를 쫓던 독일군들은 여자들의 치마밑 풍경을 보느라 그를 놓치는가 하면, 동네아이들
은 어디엔가 폭약을 설치하고 늦게 집으로 와 부모에게 야단맞으며 끌려들어간다. 그리고 신부는 병자성사를 위장하기 위해 멀쩡한 노인을 프라이팬으로 때려 눕힌다. 로셀리니는
그 신부가 총살당하는 마지막 장면에 아이들로 하여금 레지스탕스의 휘파람을 불게 함으로써 희망을 준다.
전후 이탈리아인들의 도덕성과 심리적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표출한 이 영화는 당시 이탈리아 영화가 지향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현실도피적 환상을 부추겨온 전쟁전 부르주
아 영화를 벗어나, 세계를 왜곡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곧 그것이었다. 로셀리니를 세계적 감독으로 만든 이 영화는 영화의 사회변혁기능을 실천한 많은 영화운동
에 영향을 주었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
#24. <품행 제로 Zero de Conduite>(1933) / 감독: 장 비고
최초의 사운드 영화라는 <재즈 싱어>가 1929년 프랑스에서 개봉되면서 아벨 강스와 마르셀 레르비에가 이끌던 20년대 프랑스 무성영화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할리우드와 경쟁할 만한 음향기술 시스템도 미처 갖추지 못한 프랑스 영화계가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동안 <재즈 싱어>는 그 당시 50만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즉시 미국과 독일의 음향기술이 프랑스 영화계에 도입되었고 제작비는 3배로 치솟았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아벨 강스는 자신의 성공작 <나폴레옹>을 음향을 입혀 다시 제작했
다가 실패한다. 이제 무성영화의 대감독들은 연이어 몇 편의 실패작들을 남긴 채 황혼의 전사로 사라져갔다.
1930년 초 프랑스 영화계는 <파리의 지붕 밑>(1930년)이라는 영화를 만든 르네 클레르와 함께 <품행 제로>의 감독 장 비고의 시대였다. 장 비고는 전기작가들이 군침을 흘리
며 달려들 만한 모든 요소들을 갖춘 예술가였다. 우선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무정부주의자여서 감옥을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자신의 이름마저도 '똥이나 먹어라'식으로 개명할 만
큼 파격적인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비고는 12살의 병약하고 조숙한 소년이었고 이미 반카톨릭적인 자유주의자였다.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이 소년은
학교 기숙사에서 영화 <품행 제로>에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문제아들을 만나 그야말로 성적표의 품행란에 영점을 기록하며 십대를 보낸다.
결핵을 앓기도 하던 20대, 그는 마침내 전설적인 소련 다큐멘터리스트 지가 베르토프의 아우인 보리스 카프만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도시 다큐멘터리 <니스에 관
하여>라는 걸작이다.
1932년과 33년 사이에 만든 <품행 제로>는 여름방학을 집에서 지낸 두명의 소년 코사와 브루엘이 학교 기숙사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시작한다.
담배연기와 증기기차의 수증기가 어우러진 기차 안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아이들은 악몽으로 끌려들어가듯 학교로 돌아간다. 곧 그들은 '마른 방귀'라는 별명을
가진 기숙사 사감에게 처벌당하는데,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은 이 영화에서 작은 폭군들인 양 희화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위게라는 젊은 교사는 찰리 채플린의 흉내를 내고 만화를 그려주기도 하면서 학생들의 숨통을 터준다. 이 선량한 선생님과 아이들이 마을로 소풍나가 떼지어 한 숙녀를
따라가는 장면과 그것과 교차되는 난쟁이 교장의 음모 장면은 슬랩스틱 코미디와 다큐멘터리를 혼합한 것 같은 이 영화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교장과 교사들의 규율과 처벌에 맞서 코사 일행은 일대 소동을 일으키는데 바로 이때 베개와 침대보에서 터져나온 하얀 오리털이 폭설처럼 방안을 가득 채우는 세계 영화사의
환상적인 명장면 하나가 탄생한다. 느린 속도로 촬영된 이 부분은 사실 미적이면서 가치전복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이다.
마침내 마지막 시퀀스의 학교 축제를 맞아 국가, 종교, 군대를 대변하는 세명의 손님이 도착하자, 코사 일당은 지붕 위에서 책과 돌, 신발 등을 던지며 이들을 마음껏 조롱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마침내 프랑스 국기를 내려버리고 자신들의 혁명기를 올린다. 그리고 지붕 위를 걸어가며 하늘을 향해 노래한다.
<품행 제로>는 종교와 교육제도에 대한 신랄한 조롱 때문에 "사회질서를 교란시킨다"는 이유로 그 당시엔 상영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들과 풍자 코미디 그
리고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이 실험성 높은 영화는 오히려 미래를 위해 만들어진 듯 보인다.
프랑스 누벨 바그의 악동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나 영국 프리 시네마의 기수인 린지 앤더슨의 <만약에> 등과 같은 제도교육의 모순을 다룬 영화들은 사실 모두 이 영화에 빚
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
#25. <파이자 Paisa>(1946) /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이탈리아는 2차대전에서 패배한 나라다. 그러나 영화로 세계를 제패했다. 낡은 카메라와 자투리 필름을 모아 영화를 만들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비롯하여 비토리오 데 시카, 알베르토 라투아다, 주세페 데 산티스, 루이지 잠파 등 수많은 영화인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분명히 새로웠다.
평론가 피아트란젤리는 그것을 '새로운 사실주의'라는 뜻의 '네오 레알리즈모'라고 명명했다. 카메라를 현실 속에 놓고 상황과 작가 사이에서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낸 것이다.
샤를 스파크나 앙리 장송 그리고 자크 프레베르, 더들리 니콜스, 로널드 리스킨 등 극적 구성의 시나리오가 중심이 되어 인간을 극의 틀 속에서 파악하던 30년대의 가공된 미학에
서 벗어나 현실 속에서 인간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낸 것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무방비도시>로 그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의 두번째 작품 <파이자>는 놀랄 만한 충격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로셀리니를 비롯하여 나중에 대가가 되는 페데리코 펠리니, 그리고 세르지오 아미데이 등 6명이 시나리
오를 썼다. 이는 2차대전 때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시칠리아로부터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여 북상하며 해방시킬 때까지의 6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제1화는 1943년 7월10일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한 때의 이야기다. 조라는 미군 병사는 카르멜라라는 이탈리아 소녀를 알게 되지만 둘은 차례로 총살된다.
제2화는 10월1일의 나폴리다. 흑인 미군과 그의 군화를 훔친 이탈리아 소년의 이야기다. 미군은 소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지만, 그에겐 집도 부모도 없다. 부모는 전쟁중 폭격으
로 사망한 것이다. 소년의 유머러스한 모습이 재치있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로마다. 한 미군 병사가 거리의 여자를 따라가지만 몇달 전에 사귄 프란체스카를 잊지 못한다. 여자는 주소를 가르쳐 주고 문 앞에서 기다린다.
제4화는 피렌체다. 레지스탕스의 영웅 루포를 찾아 나서는 여자와 남자 이야기다. 시가전의 틈을 타 그들은 거리를 가로질러 가지만 남자는 살해된다.
다섯번째 에피소드는 전쟁중에 휴식을 취하는 듯한 삽화다. 어느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찾은 미군 선교군목 세 사람과 수도승과의 하룻밤이다. 수도승은 군목 중 유대교인이 한
명 있다고 놀란다. 군목들은 비참과 가난의 전쟁터에서 모처럼의 안정과 평화를 찾는다.
여섯번째 에피소드는 미국의 OSS(CIA의 전신)와 영국군, 그리고 빨치산이 펼친 포 강에서의 저항이다. 결국 이들은 모두 독일군에게 잡혀 배에서 강물 속으로 차례차례 밀려
떨어진다. 충격적이다. 세 가지 에피소드가 레지스탕스와 관련이 있다.
앙드레 바쟁은 이 작품이 미국 소설가 사로얀을 비롯하여 도스 패소스, 포크너, 헤밍웨이 등의 중편소설들과 같은 구성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섯 가지 에피소드는 각각 분
리되어 있지만 미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한 뒤 있음직했던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파이자'는 이탈리아계 미군이 이탈리아 사람을 일컫는 말로 영어로는 '파이잔'이다. 일본에서는 이 작품을 <전화의 건너편>이라고 번역했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