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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성공회 선교의 시작
원래 한밭으로 알려졌던 대전은 1905년 경부선 열차가 개통 되고, 1914년 호남선이 연결되면서 호남과 영남 그리고 충청도를 연결하는 일약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1940년대 말까지만해도 인구가 55,000명인 농촌 마을이었다. 1932년에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였고, 1949년에는 대전시로 승격되어 점차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대전 방직이 생기고 1964년 조폐공사 등이 대전에 자리를 잡으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룸에 따라 1965년 인구가 40여만이 되는 큰 도시로 변하고 있었다.
제 5대 김요한(John C. S. Daly) 주교는 대한성공회를 관구로 발전시킬 것을 구상하고, 첫 단계로 1963년에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새 교구로 만들어 한인주교 관리 하에 자립하게 하고, 나머지 지역을 선교교구로 정하여 선교주교가 관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대한성공회 상임위원회 의결을 거쳐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한국선교 75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1965년에 서울교구와 대전교구로 분할이 이루어졌다.1)
성장하는 대전교회
대전교구 제 1대 주교로 전임한 김요한 주교는 1965년 5월 29일 대전에 주교관과 오주변용기도실을 축복하게 되는데 이것이 대전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오주변용기도실은 주교관 아래층에 자리 잡은 응접실로 한쪽 끝에 제단과 주교좌가 있어 주중에는 미닫이로 제단을 가리고 응접실로 사용하다가 주일에는 예배실로 사용하였다. 당시 이석형(요한) 전도사가2) 김요한 주교의 통역과 비서 역할을 하면서 대전교회 초창기에 기반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주일미사 때 주교의 설교도 통역 하면서 그동안 흩어져 있던 신자들을 모으는데 많은 수고를 하였다.
대전교회는 적은 숫자지만 신실한 대전지역 성공회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와 대한성공회를 관구로 발전시키려는 분들의 노력으로 설립되었다. 성공회가 대전에 자리를 잡기 전에는 송미다 교우(남편 최석환씨) 댁에서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대구 전도구 관할사제로 계시던 김신덕 신부가 미사를 보기도 하였고, 또한 1947년 6월 23일 구세실 주교가 대전을 방문하여 조병선(요배) 교우의 회사 사무실에서 기도회를 가졌으며, 은행동 93번지 자택에서 조요배 교우의 딸 영세 식을 한 바가 있다고 한다.3)
1966년 12월 19일 호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근홍(누가) 전도사는 대전교회에 새로 부임하여 김요한 주교를 보좌하면서 대전교회를 맡았다. 이근홍 전도사는 대전 선화동 법원 앞에 작은 상점과 방을 전세로 얻어 성공회 사무실 간판을 걸고 교리공부와 상담 및 영어공부 등을 시작하였으며, 아직 전임성직자가 없었던 대전교회에 이근홍 전도사가 1967년 2월 19일 청주 성그레고리 성당에서 노대영 주교 집전으로 부제서품을 받고, 임시사제관으로 선화동 파출소 앞에 전셋집을 계약하여 이사함으로 처음으로 대전교회에서 상주하는 전임성직자가 되었다. 이후 1968년 3월 9일 오주변용성당에서 노대영 주교 집전과 피츠버그 마운트 레바논 전도구 관할사제인 도렌 신부 설교로 사제서품을 받고 계속해서 대전교회 초대 관할사제로서 시무하게 되었다. 이로써 오랫동안 목자 없이 지내던 교우들에게 힘을 주게 되었고,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대전교회 발전에 전력을 가하게 되었다.4)
김요한 주교의 사임과 노대영 주교의 승좌
1967년에는 성미가엘신학원 원장으로 계시다가 대전교구 보좌주교가 되신 노대영(Richard Rutt) 주교가 8월 31일 대전시 대흥동 318번지에 방을 얻고 이사를 하시어 대전 선교구역에 주교님이 두 분이나 계시게 되었다.5) 물론 이는 1968년 1월에 퇴임하는 김요한 주교님과의 사무인계 등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노대영 주교는 대전성공회 교회위원회에 참석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대전교구에 주교좌성당 설립과 교회발전을 세계에 홍보하려는 계획으로 세계성공회 교구를 위하여 알파벳순으로 기도하고 그 해당 교구장에게 대전 주교좌성당에서 귀 교구를 위해 기도했다는 내용을 담아 우편엽서를 발송하였다. 이는 노 주교의 제안으로 된 것으로 많은 곳에서 감사하다는 회신을 보내왔으며, 대전교구를 세계에 알리고, 후에 대성당 건축모금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6)
김요한 주교는 1956년 1월 대한성공회 5대 교구장으로 승좌식을 하고 1965년에는 대전교구와 대전교회를 세워 수고하시다가 1968년 2월 9일 교구장을 사임하시고 일찍 영국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떠나시기 전인 1월 13일 김주교의 생일잔치를 교구차원에서 하고, 14일에 대전교회에서 송별회를 하고 15일 기차로 대전을 떠나셨다. 곧 이어서 2월 26일 노대영 주교 승좌식이 대전 성모여중 강당에서 있었는데, 취임설교에서 대전교회 설립 필요성과 영남지역에 제3교구 설립 필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하였다. 노대영 주교 승좌 식으로 대전교구는 새로운 전기가 시작되었다.
성 베네딕트 주교좌 임시 성당
1967년에는 많은 일들이 진행되었던 해였다. 3월 29일에는 처음으로 교회위원회를 하였으며, 안건은 처음부터 교회가 자립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교회운영비는 교우가 부담하는 의무금제도를 시작하였다. 봉헌금은 대성당 건립기금으로 적립하기로 하였고 교회위원회를 1주일에 한 번씩 한다는 원칙 등을 세웠다. 심방 및 전도에 관하여는 지역구별 혹은 교우들을 3인에서 5인씩 조를 편성하여 전도의 자세를 취하자는 의견 등 활발한 회의모임이 되었다. 곧 이어서 4월 12일부터 지역기도회를 수요일마다 시작했으며 주보발행을 위하여 등사기를 구입하였다. 또한 교회게시판에 성구를 적어서 전도를 하였으며, 학생회를 시작하는 등 다양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교회가 전도용 자전거를 구입하기로 했는데 이근홍 부제가 자전거 타는 것을 처음 배워서 청년들과 함께 지역을 나누어 토요일마다 심방을 하기 시작하였다.
4월에는 성가수녀원에서 오카타리나 수녀와 다비다 수녀가 와서 서울 성모관에 기숙하고 있던 학생들의 가정과 교회주변 90여 집을 심방하고 어머니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앙과 교회예식에 관한 교육을 하는 등 교회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그때 심방안내를 맡은 주엘리사벳, 이다비다, 송앵니스 등 여러 교우들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심방을 하여 교회성장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4월 12일부터 권오걸(저스틴) 교우 댁에서부터 시작한 저녁기도회가 매주 장소를 바꾸어 모이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모여 수요저녁기도를 하는 것보다 대전교회 관할구역 내에 있는 대전시를 지역별로 나누어 여러 곳에서 매주 저녁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욱 바람직했다. 이 지역기도회를 ‘애경회’ 라는 명칭을 부쳐 교우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서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빛을 이웃에게 전하려는 목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였다. 이는 초대교회처럼 집에 모여서 근처에 있는 이웃이나 친구들을 초청하여 성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나누고 기도하면서 교회발전을 도모하는 대전성공회의 귀한 모임이 되었다.
활발한 전도활동으로 교인수가 늘어나면서 오주변용성당에는 예배드릴 장소가 부족하여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예배드리는 사람들로 차게 되어 성당과 사제관 건립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7)
1967년 12월 30일에 노 주교의 지시에 따라 서울 아도무건축연구소 장석웅 소장에게 사제관과 임시성당 설계를 의뢰하게 되었다.8) 성베네딕트 임시 주교좌성당과 사제관은 60평 건물로 당시에 300여 만원을 들여 건축하여 1968년 6월 16일에 축성하였다. 동시에 대전교회가 대전전도구로 정식 승격되었고 이 근홍 신부가 초대 관할사제로 임명 되었다.9)
성 베니딕트 대성당 신축 계획
오주변용기도실에서 3년간 미사를 보다가 성베네딕트 임시 주교좌성당이 신축되어 이전하였으나 급속히 성장하는 교우들을 수용하기에는 여전히 협소하여 대성당을 다시 건축하는 계획을 세워야 했다.
1969년초 노대영 주교의 지시로 아도무건축연구소에 의뢰하여 대성당의 설계도와 모형은10) 되었으나 건축비용이 약 4천만 원이나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매우 큰 금액이었다. 성 베네딕트 대성당 건립모금위원회를 1969년 6월 10일에 구성하고 한국어와 영어 대조 모금 홍보물을 만들어 국내는 물론 세계를 상대로 모금을 시작하여. 처음 한 해 동안에 외국 원조를 포함하여 500여만11) 원을 모금하는 등 교회건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 모금을 위하여 대전우체국 사서함 59호와 전화(2274)를 개설하기도 하였으며, 사서함은 후에 대전교구 평신도 통신교육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처음 한 해 동안에 외국 원조를 포함하여 500여만 원을 모금하는 등 교회건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 모금을 위하여 대전우체국 사서함 59호와 전화(2274)를 개설하기도 하였으며, 사서함은 후에 대전교구 평신도 통신교육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12)
1970년 4월 6일에 열린 대전교구 의회에서는 “대성당 건립을 범 교구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모든 전도구가 4월 19일을 대성당 주일로 지키며 3,121명의 전체 교인 중 1,500명을 대성당 건립 후원자로 예상하고 1인당 100원 이상의 특별헌금을 실시하는 모금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고(51호), 주교좌성당 건립을 위한 모금을 시도하기도 하였다.13)
시련 받는 대전교회
교회일이 잘 되면 마귀가 샘을 낸다는 말이 있듯이 대전 교회에도 큰 시련이 닥치게 되었다. 당시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우 중 한명이 대성당 설계도를 빌려가 허락도 없이 사본들을 만들어 서울에 있는 청부업자들에게서 대 성당 건축을 하게하여 준다는 명목으로 많은 돈을 받은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건축업자들이 교회를 찾아와 왜 건축이 늦어지냐고 항의를 하게 되어 사건의 전모가 들어나게 되었고 관할사제가 이를 강력하게 처리를 하려고 하자 그 교인은 오히려 근거 없는 불미스러운 소문을 만들어 관할사제를 곤경에 빠지게 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한동안 소용돌이로 빠져 들게 되었다.
이 사건을 수습하느라 교회가 몇 달 동안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이 근홍 신부를 음성 전도구로 인사이동하게 되고 10월 당시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윤 환(바우로) 신부를 대전 관할사제로 임명함으로써 일단락 짓게 되었다. 한편 이근홍 신부는 인사이동의 부당성을 주장하였으나 교구장에게 한 복종 서약에 따라 음성 전도구 관할사제로 발령을 받아 대전교회를 떠나게 되었다.14)
교회자립과 초기 교회의 일꾼들
대전교회는 시작 처음부터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하여 교회운영은 교인들이 부담하는 의무금제도를 시작하였으며, 임시성당 마련과 함께 전도구로 승격되면서 1969년에는 교회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1969년 10월에 있었던 교회예산회의에서는 관할사제와 부제의 보너스를 포함한 생활비를 전도구에서 부담하기로 예산을 세우고 자립을 선언하였다. 이를 위해서 부흥회도 하고, 애경회를 통해서 교우들에게 우리 교회의 살림은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회성장을 위하여 각 교인 주변에 사는 전도대상자를 10세대씩 정하여 성직자가 심방하는 일을 하였다. 동년 9월에는 전년에 이어 조광원 신부,헬레나 수녀,애텔데리다 수녀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하였다.
1968 5월 14일 황정기(요셉)부제가 천안성당에서 부제품을 받고 대전에 보좌로 부임하여 1969년 6월 11일 대전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9월에 춘천교회 관할사제로 떠날 때까지 교회음악 부분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교우심방과 주일학교 및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교회장식에 많은 도움을 주어 교회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특히 매주 토요일 오후에 모이는 학생회 활동을 잘 인도하였으며 그 중 고전음악 감상회를 통하여 회원수가 날로 증가하였고 학생회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대전교회에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소명을 받아 신학생이 된 남태일(요셉)이15) 처음으로 목회실습을 하게 되었는데, 검은 캐석을 입고 시내 심방을 다니며 사거리를 돌 때는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처럼 90도 각도로 돌아서 길거리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1968년 12월 21일 천안에서 부제품을 받은 강명식(요한)부제가 둔포에서 대전 보좌부제로 1969년 9월에 발령받았고, 1970년 5월 24일에 사제품을 받고 대전교회에서 사목하였다.
대전교회는 평신도교회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평신도의 활약이 컸고 성직자와 평신도가 혼연일치되어 처음부터 교회 일을 계획하고 처리하였다. 초기에는 교회위원회를 매주 할 정도로 같이 계획하고 실천하는 일들에 모두 다함께 참여 하였는데 이는 평신도들의 믿음과 열성에 기인하였다. 초대교회 회장으로 수고한 권오걸(저스틴)교우를 비롯하여 주엘리사벳, 송바우로,김루시안,그리고 송미다,이다비다,김헬리나,박스데반 장바나바 등 많은 교우들에게 대전교회는 사랑의 빚을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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