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글을 쓰게된 계기
1999년 1월 23일 경기도 성남 월드 웨딩 홀에서 있은, 21기 정 훈군과 22기 박현덕양의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는데 축하차 진주에서 올라온 현 GBS 경상 방송의 실무국장이 내게 건네준 '경상대학교 방송국의 MASTER PLAN' 을 읽어보고 경상 방송의 역사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를 분명히 밝혀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30년 가까이 지나 버린 시간들이지만 아직도 내 기억에는 생생하기만 한 그 당시의 일들이기에, 여기에 기록하는 내용 이외에는 진실이 없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해석 해 주기 바라며, 지금까지 잘못 기록된 GBS의 역사를 확실하게 재정립 해 주기 바란다.
2. 개국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
GBS 재경 동우회 모임에서도 얘기 한적이 있지만, 나 자신이 대학을 다니며 방송활동을 할 때엔 무엇을 어떻게 방송 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지, 현재의 사실들이 훗날 어떻게 평가되고 또 어떻게 남겨 놓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오로지 지금에 충실하고 내 뒤를 이어서 누군가가 방송을 살려 나가기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졸업 후에도 가끔씩은 대학에 들러서 방송을 계속 이어 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했으며, 또 이런 마음 때문인지 가끔은 잠자리에서도 대학 캠퍼스를 찾아가서 옥외 스피커가 어디 있는지 둘러보기도 하고 음악소리를 따라서 방송국에 들어 가 보면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음반만 돌아가고 있어, 이렇게 무성의한 방송을 하나 싶은 생각에 안타까워 하다가 잠을 깨곤 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이 얘기는 최근의 술자리에서 동우회 회원 몇 사람에게 한 적이 있다.) 어쨌던 정성을 다해서 방송을 내보내는데 만 충실했지, 이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질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방송이란 허공에 쏘아 보내고 나면 남아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고, 이런 안타까운 마음에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나씩 기억 나는 것을 남겨두자는 생각으로 저번의 '경상 방송, 이렇게 개국되었다' 와 '경상 방송의 방송 비화'를 적어 본 것이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오늘날까지 이렇게 후배님들이 대를 이어서 경상 방송을 살려 나오리라는 생각을 못한 게 사실이다. 열악한 지방대학의 방송이지만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성장 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을 조금이라도 했었다면 기록들을 철저히 남기고 잘 보관토록 했을 텐데 그 당시로선 그렇지가 못했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살아 있으니 나 자신이 산 증인이 되어 그 당시의 기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3. 1967년 개국설에 대하여...
1997년 2월에 발간된 경상방송국 교육자료집( 밀알 9P)에 따르면 "1967년 진주 농대 방송부( JACBS)로 발족해 1975년 5월 29일 경상방송국( GBS)으로 승격 됐다."라고 되어 있다는데,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내가 엄연히 살아 있는데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산 증인이요 당사자인데 어느 누구의 입에서 이런 연도가 나왔단 말인가?
오해의 소지를 하나씩 풀어 나가 보면...
첫째, 진주농대 방송( JACBS)이라는 명칭과 콜사인은 내가 정했다.
1971년 3월 하순에 방송실 열쇠를 받아서 문을 열고 실내를 정리 한후 앰프의 전원을 확인하고 스피커 선을 연결하면서, 기존 방송국처럼 방송 명칭과 콜사인을 나 혼자 지었던 것이다.( 당시에 학교 이름이 진주 농과 대학이었기에 진주농대 방송으로 정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 샀는지도 모를 낡은 음반 몇 장이 방송실 구석에 꽂혀 있기에 한장 한장 뽑아서 먼지를 털면서 매직펜으로 직접 내손으로 '진주농대 방송' ' JACBS '라고 적었다. 어느 누구도 이런 명칭을 나 이전에 사용한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입 밖으로 뱉은 사람도 없다. 오로지 나 혼자 결정했고 내가 사용하면서 대학 방송은 시작이 된 것이다. 지금도 방송국에 그 음반들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음반 자켓 아래쪽에 적혀있는 그 글씨들이 바로 나의 필체 인 것이다. 방송 명칭과 콜사인은 결코 물려 받은 것이 아니며 내 이전에 제대로 된 방송을 했던 사람도 분명히 없었다.
둘째, 1971년 4월이전의 방송활동은 전무였다.
'경상대학교 50년사' 290P를 보면 " 개국 시기는 1971년으로 기억되며, 그전에는 비공식적인 학생들의 동아리 형태로서 방송실이 존재하면서 음악도 들려주고 안내방송을 맡았다."고 했는데 이때의 상황을 설명해 보면
비공식적인 학생들의 동아리가 방송실에서 음악이나 안내방송을 했던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진주농대 학생회의 한 부서인 여학생부회장( 당시 농가정학과 김남춘양이 부회장이었음)이 특별한 행사(입학식, 졸업식, 개교기념 칠암제등)가 있는 날 아침에 서무과의 양주사(방송실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행사때 마다 방송시설을 설치 관리하는 용원이었음)가 중앙 잔디밭이나 운동장등 행사장에 앰프를 설치해 놓으면, 학생들을 위하여 음반을 턴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또 음악이 끝나면 음반을 뒤집어 놓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행사가 없는 평소에는 대학에서의 음악은 거의 들을 기회도 없거니와 어쩌다 한번 나오는 것도 자기 시간이 나는 대로 점심시간에 잠시 그냥 내 보내다가 말아 버리는 식이었다.( 교육학부--지금의 사범대학--가 생기기 전인 60년대 후반에는 학생수가 많지 않았던 시기이며 농학, 임학, 축산, 수의, 농화학, 농가정 등 6개학과 뿐이었다. 그리고 여학생들의 권익을 위하여 여학생부회장을 학생회 산하에 두고 항상 그 부회장은 농가정학과 학생이 맡았었다. 그리고 이 여학생이 행사 때만이라도 학교 분위기를 위해서 음악을 들려주곤 했던 것이다.) 대학 당국에서는 행사용이라며 행진곡과 클래식 음반 몇 장을 사서 방송실에 보관해 두고 필요 할 때 이것을 사용토록 했다. 바로 이것이 방송실에 굴러다니던 그 낡은 음반 몇 장이었던 것이다.( 농가정학과의 김남춘양에 이어서 가정교육과 2년 김계선양과 과학교육과 1년 김남선양이 당시 행사 음악 담당 학생으로 알음알음으로 대를 이어 가고 있었는데, 김계선양은 김남춘양에 이어서 차기 여학생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김남선양은 김남춘양의 동생이었다. 이들은 방송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여학생부회장으로의 선출을 기대하며 그냥 한두번 음반만 틀어 주는 수준이었다.) 과연 이들의 행사 음악 담당을 방송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당시를 살았던 나로서는 인정 할 수 없었기에, 내가 1기가 되고 내손으로 2기, 3기 방송요원을 공개 선발했던 것이다. 그럼으로 나 이전의 대학 방송활동은 전무였다고 감히 단정을 짓는 것이다.
셋째, 1967년은 어디서 나왔는가?
모교 연혁에 보면 진주농대 학보가 1962년 3월 20일에 창간 된 걸로 나와 있다. 그래서 인지 역대 방송국 실무 국장중의 어느 학생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GBS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개국 시기를 70년대보다는 학보사와 같은 연대인 60년대로 맞추려고 노력(?)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좀더 오래된 방송, 전통 있는 방송을 만들겠다는 애국심(愛局心)의 발로로 여겨진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져야 하며 역사는 정확해야 하기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아마도 대학 본부 건물 1층에 방송실이라는 공간이 생긴 시기가 1967년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방송 기자재 보관 시설에 불과한 좁은 공간의 설치가 개국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우리가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개국시기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있다고 본다. 제대로 된 방송 형태를 갖추어서 제대로 된 방송 활동을 시작 한 것이 언제냐를 개국으로 본다면, 분명한 사실은 1971년 4월 1일 부터라고 감히 단언을 하는 것이다.
넷째, 경상 방송으로의 명칭변경은 1972년 7월 11일이다.
우리 대학 명칭이 진주농대에서 경상대학으로 변경된 때가 1972년 7월 11일임이 대학 연혁에 나와 있다. 대학교 명칭이 바뀜과 동시에 대학 방송의 명칭도 바뀌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임으로 '경상 방송'이라는 방송명과 'GBS'라는 콜사인은 1972년 7월 11일 부터 사용하였다고 확정하는 바이다. 그리고 방송실에서 방송국으로의 승격이 1975년이었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졸업한 이후의 일이므로...
4. 개국 몇 주년에 집착하지 마라.
" 지난 1988년 5월 27일 개국 20주년 기념식을 가진바가 있고, 지난해 5월 29일 개국 31주년 기념행사를 한 것으로 볼 때... 1971년을 개국원년으로 하면 올해가 개국 28주년이 되어 방송국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했는데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고 본다. 잘못된 것을 알고도 그대로 묻어 두고 지나가 버리면 훗날 이 모든 사실은 허구에 가려져서 진실이 묻혀버리는 꼴이 되며 영원히 고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졸업 한후 대학 방송국과 연락을 자주 했더라면 이런 착오가 처음부터 생기지는 않았겠지만, 진주와는 거리 상으로 멀리 위치한 울산에서 20여년 넘게 교직생활을 하다보니 자주 들르지를 못했고, 대학 방송국 측에서도 내 소식을 궁금해하면서도 연락처를 찾지 못한채, 이름 석자만 기억하며 대를 이어 내려갔고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명칭만 남겨 놓았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 역사를 잘못 적어 나가는 줄은 더더욱 모르고 있
었다. 하지만 이제 부터라도 고쳐서 바르게 적어 나가면 될 것 아니겠는가? '지난해에 개국 31주년 행사를 했는데 올해 28주년 행사를 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했는데, 그 점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잘못 된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넘어 가는 그 자체가 이상한 일일 것이다. 1900년대의 마지막 해인 올해가 경상 방송의 제대로 된 역사를 정립하는 해라고 생각한다면, 올해 개국 행사는 더욱 뜻있는 기념 행사가 되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이지만, 어릴 때는 나이를 몇 살 올리고 싶어하며, 어리다는 말보다는 나이가 들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고 형님 대접을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이를 아주 많이 먹고 나면, 이제는 몇 살 올리던 거짓 나이가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고 진실된 나이를 정확히 헤아리고 싶어하게 된다. 경상 방송의 역사가 미천하던 시절에는 개국 연수가 많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제 30기 수습요원을 뽑을 정도까지 왔다면 성인으로서 다 자란 상황이 아닌가? 지금부터는 얼마나 내실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개국 몇 주년이냐에 집착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개국 행사를 매년 5월말에 하는 모양인데, 4월 1일을 기준으로 하여 행사 일정을 잡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어쨌던 경상 방송의 정확한 나이를 다시 헤아려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현 실무 국장에게 감사 드리며, 경상 방송의 역사를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고쳐 놓고 임기를 마치기 바란다.
경상 방송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