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백제 대왕이 하사한 칠지도와 관련 있는 신공왕후는 389년 100세에 죽고 이어 왜왕이 된 응신(應神)에 관한 이야기는 광개토호태왕 편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고구리에서는 371년 고국원제가 붕어하자 태자 구부(丘夫)가 천룡궁(天龍宮)에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소수림(小獸林)제이다. 또 다른 이름은 소해(小解)이며 초기에는 주유대왕(朱留大王)으로 불렸는데, 이는 339년에 모친 해태후가 꿈에 대무신제를 보고서 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장대한 체격에 웅대한 계략이 있었으며, 정사의 개요를 능히 꿰뚫고 있었다. 아울러 궁마와 병법에도 능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고 어질고 화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국원제 25년(355)에 정윤(동궁)이 되었고 32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르게 된다. 천원공의 딸 천강(天罡)을 황후로 삼고, 아우 이련(伊連 고국양제)을 태제로 세웠다. 새로이 선 황상이 부황의 원수를 갚고자 친히 백제를 정벌하려 했더니, 주위에서는 서쪽의 일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힘껏 말렸다. 2년(372) 임신 2월 25일, 대행을 고국원(탕하원)에 장사지냈다.
(탕하 위치 =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6009 참조)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리와 백제
소수림왕의 초기치적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2년 여름 6월, 진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해 불상과 경문을 보내오자, 왕이 사신을 보내 답례로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했다. 3년 처음으로 법령을 반포했다. 4년 중 아도가 왔다. 5년 봄 2월 처음으로 초문사를 창건해 순도에게 이 절을 주관하게 했다. 또한 이불란사를 창건해 아도에게 이 절을 주관하게 하니, 이것이 해동 불법의 시초가 되었다”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고구리사초략>에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년(372) 6월, 진(前秦)왕 부견이 승려(浮屠) 순도를 보내왔기에, 상이 교외에서 맞이했으며 객사를 만들어 대접했다. 순도가 “진은 불도(佛道)로 인해 흥했으며, 연(前燕)은 선도(仙道)로 인해 망했습니다. 폐하 역시 불법을 받들어 믿고 계신즉 천하의 왕을 할 만 하십니다”고 아뢰니, 상은 “신선은 조종들께서 받드셨던 것이며, 불력 또한 넓고 크니 모실만한 것이오”라고 말하고는 순도를 왕사로 삼았으며 종실의 자녀들에게 불경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참고로 浮屠는 Budda의 이두식 표현으로 불교 또는 승려라는 뜻이다.
▲ MBC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의 소수림제와 태제 이련(독고영재 분, 앉은 사람 왼쪽) 왕맹을 보내 370년에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의 부견왕은 여색을 좋아했기에, 고구리에 미녀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는 불상과 불경을 보내 청혼을 했다. 상은 이에 해명을 빈부의 대형(賓部大兄)으로 삼아 진에 가서 사례하게 했다. (주: 당시 동진(東晋)과는 적대관계였던 전진은 고구리와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9월, 순도가 상에게 “신이 폐하의 나라를 돌아보았더니 무를 숭상하고 귀신 섬기기를 좋아하며, 지체 낮은 백성들은 어리석고 대부들은 음란했습니다. 대학(大學)을 세우시어 글자와 예의를 가르치시기를 청하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상이 태후와 이에 대해 상의했는데, 종친들 대다수가 이를 불편하게 여겼으나 상은 부견이 보내온 것을 아녀자들에게 시험해보라고 했다.
5년(375) 을해 2월, 상원(象院)을 초문사(肖門寺)로 개조해 순도가 설법하도록 하고, 침태(葴胎)를 이불란사(伊弗蘭寺)로 고쳐 아도에게 설법하도록 했다. 상은 음란한 후궁들에게 염증을 느껴 밖에서 들어온 불법이 이들 대원(大院)들을 주도하게 해 청정함을 법으로 삼았음을 보여 선인들을 깨우치려 함이었다. 이렇듯 고구리에서는 372년에 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백제에서는 384년 갑신 4월에 근구수왕이 죽고 아들 침류왕이 섰는데, 9월에 모후인 아이(阿爾)부인이 진(東晋)에 있던 호승(胡僧)를 불러들여 인도 출신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로 오게 되는데, 이것이 백제에 전래된 불법의 효시이다. 이듬해 2월 한산에 불교사찰을 창건하고 도승 10명을 두었다. 참고로 <고구리사초략>에는 멸난타(滅難陀)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이보다 약 150년 늦은 6세기 전반에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대웅전의 원래 이름은 대시전의 환웅전
행촌 이암선생이 쓴 <단군세기> 11세 도해 단군조에 “경인 원년(B.C 1891) 단제께서 명을 내려 12개 명산 중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國仙蘇塗)를 설치케 했다. 주변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제사지내며 웅상(雄常)이라 불렀다. 겨울 10월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하고 크게 장려했다. 천제 환웅의 유상(遺像)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찬란해 마치 큰 태양의 둥근 빛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박달나무 밑 환화(桓花) 위에 앉아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 가운데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천제 환웅의 유상을 모신 대시전(大始殿)을 일명 환웅전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이러한 환웅전은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본전에 있는 자리를 내주고 후전인 삼성각(三聖閣)으로 옮겨가게 된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환인, 환웅, 단군 삼인의 성인을 모시는 삼성각도 있다. 그 불교가 고구리 소수림제 2년(372)에 처음 들어와 호국불교로 발전해 융성해지는 것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는 <고려팔관잡기>를 인용해 “불상이 처음 들어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 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함을 보아 알 수 있다”라는 문구가 있어 현 사찰의 대웅전은 석가모니가 본당을 차지하면서 환웅전에서 이름이 바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의 원래 이름은 환웅을 모시던 환웅전 [사진=필자제공] 새로운 법령의 반포
3년(373) 계유 10월, 새로운 법령을 반포했다. 이전 국법이 너무도 엄했기에 죄지은 자들이 많이 죽었다. 미천대제 때부터 새로운 법을 섞어서 사용했으며, 고국원제 때는 창번(倉樊)의 법령을 사용했으나 아직도 많은 죽임을 면할 수가 없었다. 상은 지극히 어진 임금인지라 죄지은 자라도 살리고자 했기에, 해명에게 진(前秦)과 진(東晉)에 가서 그들의 형법정책이 어떤지에 대해 알아보고 오도록 했다.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거나 곤장을 치거나 노비로 삼는 죄 300여 가지의 법령을 정해 관리와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했다. 또한 멋대로 노비로 삼거나, 남의 어미나 처를 함부로 탐하지 못하게 했다. 곤장 30대가 넘는 죄는 관청에서 다스리게 해 개인이 매를 치는 폐단을 없애니 백성들이 진정으로 크게 흡족했다. 이듬해 2월 상은 태제인 이련에게 나라 안을 순행하며 새로운 법령이 편한지 어떤지를 점검하라고 명했다.
5년(375) 을해 2월, 시부(施部)를 설치해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을 치료하는 등 구휼하는 일을 맡게 했으며, 적원(籍院)을 설치해 선(仙)・군(軍)・향(鄕)의 3가지 호적을 관장하게 했다. 남녀 모두 15세가 되면 호적을 받게 되었다. 이전에는 우태(于台)가 주관했었는데, 이때부터 상은 서민들 대다수가 호족들에게 상해를 입는지 구휼이 공정한지 여부를 이련으로 하여금 순시케 하고 이러한 부와 원을 설치했던 것이었다. 소수림제는 부황인 성군 고국원제에 못지 않는 성군이었던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던 것이다.
[출처] 사찰 대웅전, 천제 환웅 대시전(大始殿) 환웅전서 유래|작성자 향수선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