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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천리(遠川里)
원천리는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예안군 의동면의 지역이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촌동, 천곡동, 이곡리를 병합하여 원촌과 천곡의 이름을 따서 원천동(리)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1976년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원천리에는 원원천 마을인 원촌 마을과 내살미 마을이 있으며 50여가구가 살고 있다.
◇ 왕모산성(王母山城):왕모(王母)가 머물렀던 산성이라 전해지는 곳으로 원천 마을 뒤 왕모산
(王母山)에 있다.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리를 피해 안동으로 몽진 왔을 때, 안전을 위해 그
어머니를 이곳 원촌 부근에 머물게 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산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산성
은 흙과 돌로 축성하였는데 서쪽은 자연석으로 된 석성이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약 360m이
고 석축이 잘 남은 곳은 약 50m쯤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왕모가 홍건적의 난을 피해 복주(福州; 안동의 옛 지명)에서 동쪽으로 임동(臨東)까지
행차하여 다시 북쪽으로 돌며 낙동강변을 거슬러 상행하다가 천사(川沙)에 있는 이곳에 자리
잡고 피난을 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때 적의 공세에 부득이 목적지 청량산을 향해 왕의 행차가 거동하기를 왕모
산성 우측 낙동강을 도강(渡江)하여 단사(丹砂) 모래사장을 지날 때 강 건너편 삼송정(三松
亭)에서 불의에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말울음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난 데 없는 백마(白馬)가
무명의 장수를 태우고 쿵 소리를 내자마자 왕 행차 앞에 뛰어와 멈췄다. 이때 몸집이 보통 장
수보다 크고 백발이 성성한 '구인토룡'이란 노장수가 말에서 성큼 내려서 문안 올리며 '성왕
을 도우려 왔으니 싸움에 한 몫을 담당하도록 윤허하여 주신다면 동행할 것이며, 소인에 대하
여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말아 주십시요' 하고는 곧 길을 떠났다. 항곡(項谷) 입구 맞은 편을
통과하여 백운지(白雲池), 면천(綿川), 맹개, 월명담(月明潭)을 우측으로 끼고 소두들에서 가
사리를 건너다보며 배사무(봉화군 명호면 관장리) 나분들에 도착하니 여기가 청량산 입구 강
변이라 잠시 노독을 풀고, 청량산 의성봉(義城峰)에 진을 치고 수일 후 싸움이 벌어졌는데 신
출노장(神出老將)이 활 쓰고 칼 쓰는 기량이 비호같이 날쌔어 거의 전멸되고 싸움은 끝났다.
어느 날 아침식사 시간에 노장이 보이지 않아 전원이 여기 저기 찾기 시작하여 법석인데 군량
미와 소금을 쌓아 놓은 옆에 투구와 갑옷만이 덩그렇게 남고 몸집이 있던 자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굵고 긴 지렁이가 점점 녹아지고 있더라 해서 혹자가 말하기를 '이 지렁이가 천
년 이상 묵어서 인간으로 화신(化身)하여 우리 성군을 도와주라고 보내 주신 것이 아닌가'라
고 하였다. 백마는 죽은 곳도 없이 행방이 모연하였으며 이로써 공민왕 피난길은 여기서 끝나
게 되었다고 한다.
◇ 왕모산성 성황당(王母山城城隍堂):성의 동쪽에 공민왕의 어머니가 기거했다는 약 100평 남
짓한 터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공민왕의 어머니를 위하는 성황당이 있어 내살미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위해 매년 동제를 올린다.
◎ 단천리(丹川里)
단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의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면천리, 백운리, 항곡리, 단사리, 원촌동 일부를 병합하여, 단사와 면천의 이름을 따서 단천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의 일부가 수몰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이 마을은 단사, 항곡, 백운지, 면천 등 4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가구수는 약 30호를 헤아린다.
◇ 공멸리(恭滅里):왕모산에서 500m쯤 내려와 낙동강변 일대를 가리키는 지점인데 고려 공민
왕의 군사가 멸했다는 뜻에서 공멸리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은 부르기 쉽게 핑매리로 부
르고 있다.
◎ 태자리(太子里)
태자리는 원래 봉화군 하남면의 지역으로서 태자산(太子山; 도 산천)이 있어서 태자산, 태자산리 또는 줄여서 자산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하곡, 반정리, 여울며리와 예안군 의동면의 가송동 일부와 의서면 고산의 일부를 병합하여 태자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태자리는 태자 1리와 태자 2리로 구분하는데 가구수는 120가구를 헤아린다. 이 중 태자 1에 소속된 마을이 지경, 널매, 고리재이며, 태자 2리에 속한 마을이 장선, 소정, 원태자, 머골, 다랫재이다.
▶ 원태자(原太子)·태자(太子)·자산(子山)
태자리의 원래 마을로 태자 혹은 자산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이 붙여지게 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왔을 때 태자가 이 곳에 머물러 있어서 태자라고 했다는 설과,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갈 때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태자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왕이 불공을 드려 태자를 낳았으므로 태자사(太子寺)라는 절을 지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태자 혹은 자산이라 했다는 전설도 있다.
◎ 의촌리(宜村里)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예안군(禮安郡) 의동면에 편입되었으며, 왜정초인 1914년에는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인리와 섬촌을 병합하여 의촌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선성지를 보면 의인(宜仁)은 '현 동쪽 9리에 있으며 고려 공민왕이 승격시켜 현으로 만들어 지금의 명칭으로 고치고 안동에 복속시켰으며 공양왕때 다시 예안현에 복속 되었다고 하였다.'
1973년 안동댐이 시설됨에 따라 수몰 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마을이 수몰되고 의인 마을과 섬촌 마을에 20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 의인(宜仁)
의인은 어진[仁〕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의인이라고 불렀다하며 안동댐으로 인해 대부분이 수몰되었지만 수몰 전에는 큰 마을이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예안현(禮安縣) 고적조(古跡條)를 보면 이 마을은 원래 안덕현(安德縣; 고려 초)의 지도부곡(知道部曲)이었다한다. 이렇게 지도부곡으로 내려오다가 고려말 공민왕(恭愍王)이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복주(福州; 당시 안동)으로 피난 왔을 때 현으로 승격하여 예안(禮安)이라고 고치고 안동에 복속케 했다고 한다.
◎ 가송리(佳松里)
가송리는 풍수적으로 천옥(天獄)이라 불리울 만큼 매우 폐쇄적인 지형세를 띄고 있는 마을로 청송 주왕산(周王山)과 더불어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일컬어지는 청량산(淸凉山) 줄기가 마을을 에워싸고, 한복판으로는 낙동강의 원줄기가 흘러간다. 특히 청량산의 대(臺) 밑에 형성된 가송협(佳松峽)은 안동 땅의 수많은 경승 가운데서 산수미(山水美)의 첫째를 곱을 만큼 안동산수의 압권이라 일컬을 만하다. 마을은 강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 가사리, 서쪽에 소두들, 그리고 소두들에서 남서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올미재가 있다.
가송리는 구한말 예안군 의동면에 속한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사리, 송오리, 고리, 광석동 일부, 운천동 일부와 봉화군 하남면의 여을며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사리와 송오리의 이름을 따서 가송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가송리는 현재 고리재, 소두들, 가사리, 올미재 마을 등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70호를 헤아린다.
▶ 고리(古里)재·고려재·분체정(粉體亭)
가송리로 넘나드는 긴 고개 길에 있는 마을로 30여 호가 살며 일부는 태자리에 속해있다. 고리, 고리재, 고려재, 고리현(古里峴) 등으로 불렀으며 또 분체정으로도 불렀다한다. 고리재란 이름은 고개의 모양이 고리처럼 생겼다하여 생긴 이름이며, 분체정은 옛날 이 곳에 절이 있었고 마을 뒤에 돌부처가 하나 있다 해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 부툿골, 불티골:고리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분토(粉土)가 났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가 많은 것을 과장하려고 그 곳 산성에서 흰 찰흙
을 파서 시냇물에 풀어 뜨물처럼 흐르게 하자 홍건적은 겁먹고 불티가 날아가듯 빠르게 도망
갔다고 하여 불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가사리(佳仕里)·가송(佳松, 嘉松)
가사리는 가송리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로 소두들에서 독산(獨山) 뒤를 돌아 조금 가다가 다리를 건너면 가송(佳松), 즉 가사리이다. 수십 년 전까지 만해도 외부로 통하는 길이 없어 배를 이용해서 외부로 나갈 만큼 오지 마을이었으나 교량이 놓이면서 교통사정이 다소 좋아진 편이다.
이 마을은 퇴계(退溪) 선생이 청량산을 왕래하던 중 강가에 늘어선 소나무를 보고 참으로 아름답다하여 가송(嘉松)이라 하였다하며, 그 후 그 소나무가 아름답게 잘 보이는 강 건너 이 곳 마을을 가사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사리는 강 근처의 평평한 평지지역의 평가사리와 골짜기 쪽으로 들어가면서 약간 높은 곳에 있는 골가사리로 세분하며, 또 도랑을 기준으로 위쪽을 웃마, 아래쪽을 아랫마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가사리에는 17 가구가 거주하며 담배농사를 많이 짓는다.
◇ 부인당(婦人堂):가송리의 소두들, 가사리, 올미재 3개 마을이 공동으로 모시는 서낭당으로
공민왕의 딸을 동신(洞神)으로 모시고 있다. 가사리의 동쪽 입칠봉 능선이 끝나는 곳에 위치하
고 있으며, 부인당 서쪽 40m 떨어진 곳에 수령 600여년의 당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