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 충청남도 태안무한대의 해안선 펼쳐진 ‘낙지발’ 반도
▲ 청포대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고 있는 주민들. 3월 중순으로 들어섰지만 바닷바람이 아직 매서운 편인지 보온용 귀마개를 썼다.건강한 갯벌, 거센 파도와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고을
태안은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진 반도다. 지형도를 보면 태안읍의 백화산(284m)을 중심으로 해서 바다를 향해 발을 뻗은 낙지처럼 생겼다. 안내책자에는 ‘태안반도 해안선의 길이는 530.8km’라고 설명하고 있다. 반올림을 한다 해도 531km. 하루에 100km씩 다닌다고 치면 대엿새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다. 차를 이용하니까 기간을 절반까지 확 줄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선 태안이었다.
▲ 안면도 남쪽 끝에 자리한 영목항은 조용하고 호젓한 항구다.하지만, 첫날 포구 몇 개만 지났는데도 이는 너무 무모한 계획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실제 단순 반복으로 무한대로 펼쳐지는 해안선을 따라 돌다보면 어지럼증조차 인다.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진 해안과 포구와 백사장을 드나드는 파도, 그리고 그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풍어가와 한숨소리를 다 엿들으려면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여행의 끝에서 프랙탈(Fractal)이라는 용어를 만든 프랑스의 브누아 만델브로 박사의 학설을 인정해야만 했다. 1975년 당시 영국 서부의 리아시스식 해안선의 길이를 고민하던 그가 프랙탈 구조를 이용해 계산한 해안선의 길이는 ‘무한대’. 결국 만만치 않은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진 태안반도의 길이도 ‘무한대’였던 것이다.
‘포구의 단순 반복’을 생각하며 태안서 77번 국도를 따라 남진하다 청포대 해안으로 들어선다. 실치로 유명한 마검포를 가는 길인데, 청포대 해안을 구경하면서 갈 요량이다. 모래언덕을 덮은 방풍림 소나무 풍경이 좋아 눈길을 끌지만, 이 역시 태안 땅에서 내내 만나게 될 경치 중 하나다. 그런데 비포장길은 해변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물 빠진 갯벌에는 바지락을 캐고 있는 청포대 주민들이 보인다.
“마금포유? 절루 가면 되유.”
바지락을 캐던 사내의 호미 끝으로 청포대 남쪽 해안이 걸려들지만 길은 뵈지 않는다.
“……”
“저 해안 끝으루 죽 따라가면 되유.”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접경. 그곳에 길이 있다. 주민들이 바지락을 나르는 데 쓰는 경운기 바퀴 자국을 얼마쯤 달리니 바다를 향해 검처럼 튀어나온 마검포가 눈앞에 나타난다.
마검포는 실치로 유명한 마을이다. 실치는 잡힌 지 1, 2분이면 죽기 때문에 태안반도에서는 이곳 마검포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다. 마검포 맨 끝에 자리잡은 식당으로 들어간다.
“사흘 전부터 실치가 잽히기 시작했어유.”
그렇다면 이곳 태안 땅에도 봄은 오고 있는 거다. 실치는 3월 중순쯤부터 태안 앞바다에서 잡히기 시작하는 물고기로, 봄을 대표하는 태안의 별미가 아닌가.
입안에 도는 쌉싸롬한 봄맛을 음미하며 77번 국도로 나오면 남쪽에서 안면도가 손짓한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편안히 누워 쉴 수 있는 섬’이란 뜻을 지닌 안면도(安眠島)는 원래는 섬이 아닌 육지였다. 1638년(인조 16년) 안면도 북쪽의 개미목(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에 운하를 만들면서 호적이 바뀌어 섬이 된 것이다.
백사장항은 안면도에서 들어서자마자 만날 수 있는 첫 항구. 도다리, 주꾸미, 간자미, 개불 같은 어물을 한 짐 부려놓고 “일루 들어오슈” 하며 행인을 부르는 구수한 사투리도 좋고, 관광버스로 들이닥친 손님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란도 괜찮다. 이어 해안도로를 따라 삼봉에서 기지포 넘고, 안면·두여·밧개·방포 같은 호젓한 해안을 지나면 곧 지난 해 국제꽃박람회가 열렸던 꽃지 해안이다. 일몰을 보러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울창한 솔숲을 등지고 10리 가까이 길게 이어진 꽃지 해안은 거센 파도가 하얀 백사장을 거칠게 애무하는 광경만으로도 바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 꽃지 해안의 낙조. 할미·할아비바위가 있는 이 해안은 아름다운 풍경이 많은 안면도에서도 첫손에 꼽힐 만큼 인기 있다.백사장 북쪽 끝에 솟은 두 개의 바위봉은 할미·할아비바위. 신라 때 전쟁에 나간 지아비를 평생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가슴 아픈 전설을 간직한 바위는 조금은 단조로운 듯한 꽃지 해안의 미학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바위가 두 봉우리 사이로 떨어지는 ‘꽃지해변의 낙조’는 서해안 3대 낙조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의 발길도 잦은 편이다. 아마도 꽃지 해안에 저 ‘노부부’가 없었다면 여름 해당화 아무리 곱다한들 이처럼 유명해지진 못했을 것이다.
할미·할아비바위 주변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셔터소리가 들린다. 바쁠 것 없는 연인들은 팔짱을 끼고 천천히 노부부 곁으로 들어간다. 찰박거리는 파돗소리는 한없이 정겨운데, 노부부 사이가 생각보다는 멀다. 이렇게 애틋하게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보냈을까. 해가 넘어가자 노부부 사이로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진다.
노부부 있는 꽃지 해안이 정겹기는 하지만 유명세 탓에 조금 번잡하다. 잠자리 찾아 캄캄한 해안을 이리저리 헤매다 길을 잃기도 하면서 들어간 곳은 꽃지 해안 바로 북쪽의 방포.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해상 전진기지를 두어 바다를 지켰으며, 고려 때도 삼별초가 주둔했다는 이 항구는 꽃지보다 인적도 드물고 호젓하다.
그런데 방값이 생각보다 5,000원이 비싸다. 30대 중반의 여주인은 짧은 흥정 끝에 “여기서 자면 파돗소리가 얼마나 좋은데….” 하며 깎아준다. 방에 들어가니 어두운 저쪽 해안에서 파돗소리가 정답게 들려온다. 그렇다면 이 파돗소리의 가격이 5,000원? 그런데, 그것을 깎았으니 오늘밤에 듣는 저 파돗소리는 공짜인 셈이다.
▲ 청포대 주민이 캔 바지락을 운반하기 위해 경운기를 타고 갯벌로 들어서고 있다.아침 바다는 멀찍이 물러나 있다. 어젠 늦어서 중부 서해안에서 가장 혈통이 좋다는 안면송(安眠松)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태안 해안엔 아름다운 소나무숲이 많지만 그래도 안면 자연휴양림 시설이 있는 소나무숲이 그 중 제일이다.
부드럽게 굽도는 길을 따르다보면 키 큰 소나무들의 열병식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불그스레한 몸에 늘씬하게 솟은 소나무들에선 귀족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휴양림 솔향에 파묻혀 산책하는 연인들 표정이 사랑스럽다. 안면도는 일제 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섬 전체가 소나무숲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울울창창했다. ‘도끼 하나만 있어도 잘 살 수 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지만, 해방 후 무자비한 남벌로 많이 훼손되었다가 이후 꾸준한 산림정책 덕에 다시 예전처럼 안면송의 그윽한 솔향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휴양림을 벗어나면 이번엔 멀리 남쪽 끝의 영목항이 부른다. 도중에 샛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이내 샛별·장삼·바람아래 같은 정겨운 해안들이 있다. 그렇게 보아온 해안인데도 조금도 질리지 않는다. 고남면 소재지의 패총박물관에서 안면도에서 구조개 캐먹고 살았던 선사시대인들의 흔적을 살펴보고, 매년 여름마다 바다 좋아하는 시인들 모여들어 시상에 잠기는 시인학교를 지나면, 안면도 최남단의 영목항.
▲ 순박한 미소로 나그네를 반겨준 어운돌 할머니들이 봄 굴을 캐고 있다.방파제 앞 조각배에 앉은 괭이갈매기들의 울음소리 요란하다. 어부들은 새로 사온 통발을 손질하며 만선의 꿈에 부풀어있고…. 가까이는 장고도, 고대도, 앞의 큰 섬은 원산도와 삽시도다. 77번 국도는 현재 여기서 끊긴다. 그러나 조만간 원산도를 거쳐 대천항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놓이면 안면도는 육지와 남과 북 양쪽으로 연결되는 섬 아닌 섬이 된다.
다시 북진이다. 안면도를 빠져나가기 전에 꼭 들러보고 싶은 섬이 있다. 매년 정월 초이틀과 초사흘 사이에 열리는 붕기풍어제로 유명한 황도(黃島). 창기리 갈림길에서 우회전해 나지막한 구릉지대를 4km쯤 달리면 황도. 귀가하는 가장들 손에 들린 살림망에는 간자미, 우럭, 놀래미 같은 바닷고기들이 들어있다. 그냥 집에서 반찬이나 해먹으려고 잡은 것이라는 데 그 양이 솔찮다.
황도는 태안에서도 제법 부자 섬으로 손꼽힌다. 주민들은 섬이 풍수지리 상 게를 닮았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라 한다. 게의 머리 앞에 있는 동쪽의 자그마한 옥섬은 맛있는 먹잇감이다. 참조기나 민어 같은 고급 어종을 잡는 안강망 어선이 한창 호황을 누리던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섬은 600여 명이 거주할 정도로 번창했다. 당시 섬마을 주민들은 안강망으로 이런 고급 어종을 잡아들이고 풍어가를 부르곤 했는데, 100t급 중선배만 30여 척에 이를 정도로 떵떵거렸다고 한다.
그렇게 널널하게 살던 이 마을에 잠깐 위기가 닥쳤다. 70년대에 서산 A·B지구 방조제를 건설하자 점차 바다 환경이 바뀌는 바람에 더 이상 안강망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된 것. 하지만 황도가 항상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게 형국을 닮았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섬 둘레 갯벌에 바지락 어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바지락 채취로 업종을 재빠르게 변경해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
섬 주민들은 풍수 덕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섬 한쪽에 솟은 당산도 주민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제를 안 지내면 아마 황도는 먹구 살기 힘들거유. 우리 부락 사람들은 다 이걸 믿지유.”
당제에 대한 황도 주민들의 믿음은 상상 이상이다. 제법 번듯한 교회가 들어서 있긴 하지만, 주민들은 아직도 마을의 안녕을 보장하고 부를 지켜주는 근원인 당나무를 잘 모시고 있다.
황도교와 안면교 두 다리를 빠져나가면 이젠 육지다. 육지라 해도 결국 바다다. 태안은 어디에 있건 한 달음만 달리면 금방 파도와 만날 수 있는 반도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풍요로운 황도를 벗어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하나. ‘바닷가에 살던 인류의 가장 손쉬운 생존법은 무엇일까.’ 인류가 물고기를 잡아 먹거리로 삼기 시작한 것은 채집수렵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라고 한다. 구석기 중기부터 물고기를 잡기 시작한 인류는 처음에는 강이나 바다에서 주로 손과 발, 그리고 간단한 도구를 사용해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다 구석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도구를 이용한 방법을 통해 물고기를 잡아 생존해나갔다.
물고기잡이는 크게 막이류, 낚시류, 그물류 등으로 분류된다. 낚시와 그물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막이류에 속하는 ‘어살’이었다. 그중 돌로 만든 독살은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에 퍼져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춘 어살이다. 이 굴혈 독살이 지금도 실제 고기를 잡고 있는 유일한 독살이다.
몽산포 지나 찾아간 굴혈포. 물이 나가는 중이긴 한데 독살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독살을 볼 수 있을까. 백사장에 발자국을 만들며 빨리 간조가 되기만 고대한다. 그 때, 저 멀리 갯바위 사이에 한 남자가 보인다. 괭이갈매기처럼 그에게 달려간다. 이 곳 굴혈 부근서 몇 대째 살고있다는 40대 후반의 남자. 얼마나 기다려야 독살을 볼 수 있을까 물었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때를 계산하던 남자는 “어제가 조금이었으니 어쩌면 꽃만 나고 말겠네유” 한다. 꽃? 남자는 물이 빠져나가면서 수면 위로 조금 드러난 독살을 가리킨다. “저걸 여기선 ‘독살꽃’이라구 불러유.” 아하, 물 위로 뾰족 솟은 돌을 꽃이라 한다. 참 절묘한 이름이다.
어릴 적 직접 독살서 고기도 건졌다는 그는 옛 추억을 더듬는다. 굴혈 독살 위 아래로 서너 개가 더 있지만 지금은 거의 허물어졌고, 현재 이 굴혈 독살에서만 고기를 건진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숭어, 전어, 멸치, 꼴뚜기, 갑오징어, 가오리 등이 부게(대나무로 만든 들통)에 가득 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걸려들었다. 물고기가 많이 든 날이면 독살 주인은 동네방네 사람들 불러모아 퍼가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어족에 대한 무차별적인 포획이 남발하면서 연근해 물고기들이 사라지고, 독살이 있는 갯벌과 모래밭도 개발론자들의 경제논리에 밀려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 이곳 굴혈 독살도 이젠 동네 사람들과 조금 나눠먹을 정도밖에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고집스럽게 기다려보건만 물은 더 이상 빠지질 않는다. 부근에 산다는 독살의 주인장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니 오늘은 틀린 모양이다. 독살꽃만 보고 나서는 길. 뒤돌아보니 어느새 밀물이다.
굴혈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지체했다. 벌써 해는 중천에 솟았다. 태안으로 나가 나지막하게 바다로 잦아드는 금북정맥(錦北正脈)을 끼고 모래 깨끗한 채석포와 연포를 지나고, 낙지 잡는 정산포를 스쳐, 오염 안 된 해변이 일품인 갈음이 모래를 만지면 안흥진(安興鎭). 바로 경기도 안성 칠장산(492m)에서 서해로 내달리던 금북정맥이 내포 지방 지나 바다로 빠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빚어놓은 땅이다. 안흥항은 지금은 서해 끝의 작은 어촌이지만, 백제 시대에는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크게 번창했던 항구였다.
안흥항 앞바다는 물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해역이다. 그래서 이곳은 지나기 어렵다 하여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렀는데, 다니던 배들이 자꾸 조난을 당하자 평안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이름을 안흥량(安興梁)이라 바꾸면서 이곳 지명도 안흥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안흥항을 지키던 곳이 바로 안흥성이다. 성곽에서 보는 안흥 앞바다 풍광도 아주 좋다.
▲ 물이 빠져나가면서 안흥항과 신진도 사이에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갯벌이 드러났다. 이런 건강한 갯벌은 태안 주민들의 '문전옥답'이다.안흥항 앞바다에 있는 신진도는 10년쯤 전에 연륙교가 놓이면서 자동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섬. 역사가 깊지만 바다가 얕고 암초가 많아 큰 배 드나들기가 여의치 않았던 안흥항보다 말굽처럼 생긴 포구를 지닌 신진항(안흥외항)이 항구 자리로 적격이라 태안의 고깃배들이 점차 신진항으로 몰리고 있다. 안흥항이나 신진항은 꽃게가 명물로 꼽히지만, 아쉽게도 요즘은 제철이 아니다.
안흥을 빠져나와 32번 국도로 붙으면 길은 파도리~모항리~의항리로 이어지는 해안으로 연결된다. 드문드문 자리한 염전 너머로 논두렁 밭두렁도 보이는데, 여기저기서 들불이 한창이다. 진드기 같은 병충해도 없애고, 재가 된 잡풀이 땅을 기름지게도 해주는 들불. 예전엔 농사철을 앞두고 농촌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이젠 산불 위험 때문에 들불 놓는 걸 막고 있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계도차량이 확성기로 “논두렁에 불을 놓지 맙시다” 하고 다니지만 바닷가이기 때문인지 내륙의 마을들처럼 통제가 심하진 않다.
염전과 들불의 안내를 받으며 소원면 해안으로 간다. 하고많은 해안 중에 발길이 먼저 파도리로 옮겨지는 건 이름 때문이다. 태안엔 아름다운 지명을 가진 해안이 많지만 파도리 해안만큼 바다의 정취와 잘 어울리는 곳도 없다. 파도리 해안으로 내려가면 저녁 햇살에 반사된 젖은 조약돌들이 영롱한 색깔로 빛난다. 파도가 해안을 더듬을 때마다 차르륵 차르륵 들려오는 해조음(海潮音)도, 중년 부부의 나란한 발자국에서 피어나는 조약돌 소리도 예쁘다.
▲ 금북정맥이 잦아드는 곳에 자리잡은 안흥항(안흥 내항).해안 풍경은 예쁜 이름에 조금 치이는 편임에도 제법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데, 바로 해안의 조약돌로 다듬은 해옥(海玉) 때문이다. 파도리 해안의 조약돌은 이곳 주민인 안정웅씨의 손길을 거쳐 아름다운 공예품으로 거듭난다. 여러 차례의 어려움을 거쳐 조약돌 깊은 속까지 물들이는 특수 가공법을 개발해 이젠 국내는 물론 외국까지 수출하는 품목이 되었다. 허름하던 해옥전시장이 제법 번듯하게 바뀐 걸 보니 해옥이 인기가 있긴 있는가 보다.
붉은 햇덩이가 서해로 떨어지고 있다. 저녁노을이 적색 카펫처럼 깔리는 길을 따라 파도 마을 북쪽의 어운돌 해안으로 간다. 머리맡까지 파도가 밀려올 듯한 민박집에 짐을 부린다. 이 민박집 노부부는 파돗값을 따로 달라고 하지 않았다.
해뜨기도 전인데, 괭이갈매기들은 부산하게 날아다니며 고양이 소리를 내고 있다. 해안 백사장도 젖어 있고 물 속에 잠겨있던 여도 드러난 걸 보니 썰물인가 보다. 그때 문득 동녘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 어리석게도 잠시 잊고 있었다. 서해에서도 일출이 있다는 사실을…. 굴껍질 다닥다닥 붙은 갯바위 위에 앉아 고즈넉한 아침 항구를 물들이는 일출을 감상하는 행복감이란!
▲ 1.봄 농사를 위해 밭둑에 들불을 놓고 있는 주민.2.갯바위에서 자연산 굴을 채취하고 있는 어은돌 할머니들. 태안의 아담한 포구처럼 굽은 허리에서 할머니들이 겪어온 바닷가 삶의 일부를 읽는다. 3.파도리 해안의 오래된 전설을 들려줄 것만 같은 해옥. 파도리 해안의 조약돌로 만든 것이다. 4.꽃게 집산지로 유명한 신진도의 신진항(안흥 외항). 이전엔 호젓한 항구였지만, 안흥과 연결하는 신진교가 놓이면서 규모가 많이 커졌다.해안 북쪽 끄트머리의 갯바위에선 할머니 두 분이 열심히 조새(굴 따는 기구)로 굴을 캐고 있다. 아담한 포구처럼 굽은 허리에서 할머니들이 겪어온 바닷가 삶의 편린을 읽는다. 할머니 옆에 쭈그리고 앉자 도시서 온 외손주 보듯 다정한 눈길을 건넨다. 지금 막 나왔는지 바구니엔 굴이 그리 많지 않다.
“오늘이 두매라 굴 따러 나왔슈. 괭일날 여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팔라구유.”
역시 태안 곳곳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익히 들었던 넉넉한 대꾸. 할머니들이 채취한 이 자연산굴은 1kg에 5,000원이라 했다. 봄이 가까워지는 탓에 굴도 많지 않고 성수기가 아니기 때문에 굴이 싼 편이라 한다. 자연산 굴에 소주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른 아침부터 술잔 들긴 좀 그렇다. 젊은이들은 벌써 해 뜨기 전에 주낙 던지러 나갔는데, 저녁 무렵이면 놀래미 우럭 간자미 같은 물고기를 잡아서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 일찍 일어나 일출까지 본 터라 바지런한 괭이갈매기처럼 내심 뿌듯해져서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이 항구가 어부들의 사투리로 소란스러워지겠지’ 하고 기대하고 있었건만…. 정말 파도처럼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다음에 또 와유~” 길게 늘어지는 할머니들의 사투리를 뒤로하고 어은돌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기수를 돌리면 언제나 흥겨운 노랫소리로 나그네를 반겨주는 해안이 있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사랑’. 여름날의 흥겹던 추억이 아롱진 이 곳은 만리포. 푸른 솔밭과 쪽빛 바닷물과 조개껍질 섞인 은빛 백사장 풍광이 좋아 여름 휴가철이면 무려 100만 명이 넘는 피서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지금은 3월 중순 비수기인데도 관광버스 몇 대 관광객들을 부려놓았고, 물 빠진 백사장 한쪽에선 신입생 환영 MT라도 온 듯한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춘 남녀들이 왁자지껄 신나게 떠들고 있다. 옛 생각에 젖어 ‘만리포사랑 노래비’에서 기념사진을 찍던 중년의 남자들은 ‘참, 좋을 때지’ 하는 표정으로 젊은이들을 바라본다.
만리포의 원래 지명은 ‘만리장벌’. 조선 세종 때 뱃길로 조선을 찾은 명나라 칙사가 풍랑 때문에 안흥항으로 상륙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는 해녀들이 잡아온 꽃게와 해삼, 전복 맛에 반해 귀국할 때도 다시 들렀다. 맹사성이 주관하여 역시 해삼, 전복 등을 대접하면서 명나라 칙사의 수중만리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전별식을 가졌고, 그가 떠난 백사장을 수중만리 무사항해를 기원한 곳이라 해서 ‘만리장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일몰의 아름다움에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어은돌의 일출. 잊기 쉽지만 서해라고 해서 일출이 없는 건 아니다.그러다 1955년 서해안 최초로 이곳에 해수욕장을 개장하면서 만리포라 했고, 이후 대천 해수욕장과 함께 서해를 대표하는 해수욕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그런데, 소원면 주민들은 이 ‘작전’이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했는지 이쪽 해안은 대부분 거리를 헤아리는 단위인 이수(里數)를 포구 이름으로 삼았다. 그냥 웃고 말 수도 있지만 가서 보면 이름과 비교적 맞아떨어지는 규모의 해안들이 정겹다.
만리포를 벗어나 봄맞이 준비에 한창인 천리포수목원을 지나면 미국에서 귀화해 황무지였던 천리포 일원을 국내 최대 규모의 민간수목원으로 일군 민병갈(閔丙渴·Carl Ferris Miller·1921-2002)씨가 그리워지는데, 길은 천리포 항구를 지나 푸른 바다가 발아래 까마득히 펼쳐진 비포장 언덕길로 이어진다. 소나무 숲에 폭 안긴 아늑한 백리포(방주골)에 들렀다가, 십리포(의항)와 일리포(구름포)에서 독살 흔적을 살피면 길은 의항리 동쪽 해안에서 끊긴다. 저 바다 건너가 소근진(所斤鎭)이다.
소근진으로 넘어가는 3km쯤의 의항리 동쪽 해변길은 어떤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아 도중에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 하지만, 태안반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소박한 맛이 참 좋다. 바닷물은 맑고 깨끗해 속까지 훤히 보인다. 찰랑거리는 파도에 넘칠 듯한 해안 콘크리트 도로를 끼고 모룽이를 몇 번 돌면 봄 햇살에 새하얗게 반짝이는 언덕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길이 끊긴 것일까. 아니다. 길은 그 하얀 언덕 사이로 나있다. 언덕은 다름 아닌 굴껍질인데, 의항리 주민들이 20여 년간 작업하면서 생긴 일종의 패총인 셈이다. 굴껍질로 이루어진 길은 주민들이 잘 다져놓아 웬만한 콘크리트길보다 안정감이 있다.
비닐하우스 작업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주민들이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에 관심을 보이며 ‘소근진 가는 더 좋은 길’을 일러준다. 하지만 이보다 좋은 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굴껍질 길이 끝나면 이번엔 한쪽 바퀴를 찰랑거리는 바닷물에 적신 채 지나간다.
그렇게 파도에 바퀴를 적시며 해안을 지나고 방파제 여러 개 건너 물어물어 찾아간 소근진 마을. 나그네는 성터를 찾건만 눈에 띄지 않는다. 소근리 주민들 역시 의항리 주민들처럼 비닐하우스 안에서 굴까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 일루 와봐유. 여기가 성밖이구, 저긴 성안이유. 저짝은 동문이구.”
마침 점심상을 내가던 아주머니가 옛 성터를 일러준다. 아주머니가 알려준 대로 언덕을 50m쯤 오르자 대숲에 가려져 있던 허물어진 동문이 나타난다. 높이 4m 남짓한 성곽이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지만 대부분 허물어졌다. 성벽에 오른다. 역시 전망이 좋다.
▲ 1.굴 작업장에서 나온 굴 껍데기가 언덕을 이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20여 년간 작업하면서 쌓인 것이라 한다. 2.원불면 삼거리의 '밀국낙지' 상징물이 눈길을 끈다. 3.푸른 마늘밭 너머로 파란 바다가 펼쳐져 있다. 태안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텃밭과 갯벌 그리고 바다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4.태안과 서산 사이의 굴포. 만약 이곳에 운하를 내는 데 성공했다면 태안반도는 섬이 되어 태안도(泰安島)로 불렸을 것이다.소근진은 남쪽의 안흥진과 함께 군사적으로는 왜적을 막던 요충지요, 경제적으로는 세곡선이 한양으로 통하는 해상 교통로의 중심지였다. 또 여의치 않을 경우 이곳 소근진에서 원북과 태안을 통해 천안으로의 육로연결도 수월했다. 지금은 민가 10여 채에 불과한 한적한 어촌 마을이지만, 조선 초기만 해도 1만 호나 되는 많은 가옥에 사람들이 모여 살 정도로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그러다 육상교통이 점차 발달하면서 이곳은 1년 내내 외지인 발길 뜸한 한적한 오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소근진에서 북쪽의 방조제 하나 건너면 신두리.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너른 모래언덕인 ‘신두 사구(砂丘)’가 있는 곳이다. 태안 해안가는 옛날부터 모래바람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바닷바람이 거센 초봄이면 눈뜨기 어려울 정도로 거센 모래바람이 불어댔는데, 그중 신두리 모래바람은 태안에서도 거세기로 유명하다. 심할 때는 마치 몽골 사막에서 황사가 일어날 때와 같은 분위기의 모래바람이 불어댄다. 그래서 바람 심한 날이면 밤새 산 하나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한반도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조화가 이곳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모래바람이 부는 날이면 눈을 뜰 수도 없는 지경이 된다.
지레 겁부터 먹고 해변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짙은 해무(海霧)가 밀려든다. 자욱한 바다안개에 휩싸인 모래언덕은 제주의 오름 같기도 하고, 대관령 목장처럼도 보인다. 먼 빛의 나무 몇 그루도 신기루처럼 솟아있다. 안개가 조금만 더 짙었어도 반드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었을 사막지대다.
보호지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곳곳에 천연기념물 지정을 반대하는 표어가 적힌 표지판이 있다. 이곳 사구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재산권 제약을 받게 된 지역주민들이 반발한 흔적이다. 며칠 전에 들은 뉴스에선 주민들이 신두사구에 집을 짓기 위해 제출했던 ‘산림형질변경 허가 신청서’를 반려한 태안군이 행정소송에서 승소했다고 하던데…. 하지만 이곳엔 이미 또 다른 위험이 닥쳐왔다. 인근 해안에 방파제를 쌓은 후부터 파도와 바람이 약해져 모래층이 점차 엷어지고 잡초들이 모래언덕을 점점 뒤덮으면서 특유의 사막지형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해당화 가시에 찔려 따끔거리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신두사구를 뒤로한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태안이 배출한 구한말 독립운동가인 옥파(沃坡) 이종일(李鍾一·1858-1925) 생가에 들러 매서운 정신을 살펴보고 원북면 소재지에서 박속낙지탕으로 늦은 점심을 한다. 여주인은 “낙지 다리는 맛으로, 머리는 영양으로 먹는다”고 했지만, 머리도 다리도 다 맛있고 박속과 어우러진 수제비 맛도 제법 깔끔하다.
배 두드리며 나서면 길은 태안반도의 북쪽으로 이어진다. 이원면 소재지에서 4km쯤만 북으로 달리면 이후 반도의 폭이 1km 내외인 이원곶이 8km쯤 이어진다. 해안선을 따라 아담하게 자리한 염전과 굴과 바지락 등 온갖 갯것이 나는 갯벌과 작은 돌섬들, 그리고 말 붙이면 순박한 미소로 대답해주는 주민들을 만나다 보면 어느새 만대 마을. 이제 육지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태안반도의 북쪽 끝이다. 바다로 잠겨드는 부두 끝에 서니 철썩거리는 파도가 발을 핥는다.
오던 길 되짚지 않고는 태안읍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태안 시가지 뒤로는 봄 햇살에 빛나는 백화산(白華山·284m)이 우뚝 서있다. 표고가 비록 300m도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바다와 함께 살아온 태안 사람들을 지켜본 태안의 진산이다. 정상께 자리한 태을암(太乙庵)에는 태안에 들렀다면 꼭 봐야할 유물인 태안마애삼존불(보물 제432호)이 있다. 90년대 중반에 보수공사를 하고 보호각에 안치했지만, 당시 이미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노출된 데다가 부처의 눈과 귀가 아들을 낳거나 병을 낫게 하는데 효험이 있다는 속설을 믿는 사람들이 돌로 갈아간 탓에 얼굴 표정을 알아보기 어렵다. 물론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보다 세련미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이 마애불이 보물로 지정된 까닭은 바로 우리나라 각지에서 볼 수 있는 마애불의 초기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마애불의 예술성과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일은 전문가들의 몫이라 쳐도 마애불의 얼굴 표정을 상상해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태안 여행 중에 만난 토박이들의 미소를 하나하나 떠올린 다음, 공통부분을 취해 석상 얼굴에 대치하면 된다. 아마 순박한 미소를 지닌 서산마애삼존불과 그리 다르지 않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프랙탈 구조를 지닌 리아시스식 해안을 실컷 돌면서 주민들과 대화도 나누고 태안마애삼존불까지 만났으니 태안은 대부분 돌아본 것이다. 하지만 태안을 제대로 읽으려면 마지막으로 갈 곳이 있다. 바로 ‘굴포(掘浦)’. 이곳은 해안과는 달리 볼 것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평범한 논밭이지만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태어난 태안반도의 운명이 극명하게 드러난 곳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며 무려 500여 년간이나 진행되었던 끈질긴 대 운하공사가 태안반도에서도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지하 암반과 뻘흙 때문에 모두 실패했고, 1638년에 지금의 안면도 북쪽의 개미목을 뚫어 아쉬우나마 거리를 줄이고 안전을 꾀하는 데 만족해야만 했던 것이다.
만약 당시에 굴포운하가 성공했다면, 태안반도는 섬이 되어 지금쯤 ‘태안도(泰安島)’로 불렸을 것이다. ‘넉넉하고 편안한 섬’이라. 그럴 듯한 이름이다. 저녁 노을이 태안반도를 뒤덮을 무렵, 태안을 벗어난다. 자동차 옆거울엔 붉은 굴포가 한가로운 섬처럼 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