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과 의욕에는 항상 차이가 있는법, 사람에 따라 의욕만 남고 능력은 이미 한계에 이른 사람이 있고 반대로 능력은 아직 넉넉한 채로 의욕을 접어야 되는 경우도 있다. 연령에 의한 정년이 시행되고 있는데는 다소 무리도 따를 것이나 어쨌든 교단이 정한 법이기에 지켜야 한다는 데는 반대하지 않는다. 실제로 은퇴하고 나니 마음도 가볍고 아직도 목회현자에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결국 인생을 통해 절감하는 바이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는 이제 중요한 세대 교체기에 들어섰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분단과 6.25전란 이후 급격하게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고 전쟁이후 복음사역에 뛰어든 세대들이 이제는 거의 강단을 떠나야 되는 시기가 된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우리 교단에도 은퇴목사의 수가 급격히 증가 일로에 있게 될것이다. 이들 노령자들에 대한 교단적인 대책을 위해 많은 준비도 있는 줄 알지만 천차만별의 개인적 사정을 일일이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대형교회는 물론이고 자립이 넉넉한 중형이상의 교회들이라면 은퇴후에도 적당한 생활대책과 아울러 남은 여력을 가지고 담임목사와 함께 봉사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 수도 있으나 농어촌의 미 자립 교회에서 은퇴하게 되는 목사들의 문제는 아직 여러 가지로 미흡한 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난한 농촌 교회를 은퇴한 원로목사의 현황을 정리하며 적어보기로 한다.
은퇴전후
내가 목회하던 곳은 충북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 교회는 모산 교회, 원래 무 교회의 농촌지역으로 개척당시의 생활수준이나 교육수준은 상상이상으로 열악하였다. 한 동리에 절이 다섯 곳이오 당시 술집이 열도 넘었다. 의림지란 유원지를 앞에 두고 있어 제천시내의 불량자 취객 환락객 들의 소란지역이기도 했다. 겨우 예배장소를 마련하고 무지한 주민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나름대로의 교회당을 건축하고 정성을 쏟아 키워갔다. 하지만 워낙 지역이 지역인지라 큰 기대는 할 수 없었고 겨우 외부 지원 없이 자립을 유지하는 정도로 성장시켰다. 비록 교회의 규모는 적을 지라도 자라나느 유년들을 열심히 교육시키며 지역의 낙후된 문화생활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시간과 함께 현저한 변화르 ㄹ가져왔고 교회로서의 선도적 책임도 감당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정년이 왔다. 1999년 5월, 우선 후임자를 선택하고 노회에 상신하니 20년 이상의 재직기간을 생각하여 원로목사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교회 자체로서는 은퇴목사에 대한 예우문제가 있어야 했지만 형편상 여의치 않았다. 적립된 금액 1500만원을 수령했고 매월 10만원을 수령키로 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도 현 목회자의 대우도 어려운데 은퇴목사에게 다소라도 예산이 지출된다면 교회의 재정은 더욱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고 전혀 관계를 끊을 수도 없고 궁여지책으로 받는 쪽에서 매월 10만원을 송금하기로 하고 결정을 보았다.
노회의 주도하에 정식으로 은퇴를 했고 새 담임에게 모든 책임을 위임하고 떠났다. 전부터 원로와 담임목사와의 관계에 대해 들려오는 교계의 소식들을 들으면서 더구나 시골교회로서는 근처에 남아서는 안된다는 소신이었기에 깨끗이 떠나기로 했다. 앞으로 지방교회에서 은퇴하게 되는 많은 목사님들에게 가장 어렵게 대두되는 문제는 아마도 이 점일 것으로 짐작된다. 은퇴 후 계속 주변에 남아 있어 협력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나 일체의 관계를 않을 것인가? 떠난다고 한데도 거처나 생활비가 문제요 가까이 있다고 해도 후임자에게 막대한 부담이 될것이다. 수고할 문제라고 본다.
현재 생활 소묘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자식들의 지원을 받아 우선 거처의 문제는 걱정 없었다. 그것도 아직 독신인 공부원으로 근무하는 여식이 있어 동거하기로 하고 수도권의 의왕시로 거처를 옮겼다. 지방에서 20여 년을 살다보니 서울이 완전히 타향으로 변한 것이다. 월남 이후 취직한 것이 남산 밑의 필도이 본적지인데도 말이다. 서울에서 살던 시절은 명돌을 중심으로 한 강북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오늘의 강남의 발전상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다. 처음 상경하여 얼마 동안은 갑자기 너무 단조로워진 생활 탓을 놓으니 가장 쉬운 것이 낮잠이다. 희년 같은 것은 꿈도 못꾸었고 연차휴가 정도의 휴식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시골 교회 목회자들의 현실인데 어쨌던 직무에서 해방되다보니 먼저 할 것은 자유로운 낮잠인 것이다. 아마 한두 주간 쯤 실컷 잠을 자다 보니 그것도 진력이 났다. 앞으로 나름대로 살아가야 될텐데 적당한 일거리가 생각되지 않았다. 주일이 돌아오면 예배는 드려야 하겠기에 우선 가까운 교회들에 출석해도 마음에 안정이 되지 않는다. 목사라는 신분도 밝힐 것 없이 한 교회씩 순회하는 중 느끼게 된것은 예배 자체만 해도 너무 다양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간판은 대부분 "예수교 장로회 00교회"로 되어 있는데 실제 예배에 참석해 보면 너무 이질적인 양상 이어서 당황하게 했다.
저도 모르게 나 자신의 목회 스타일과 흡사한 교회를 찾게 되고 지역의 교회를 거의 다 참석해 본 후에야 비로소 계속 출석해야겠다는 교회를 거의 다 참석해 본 후에야 비로서 계속 출석해야겠다는 교히를 찾아내고 매 주일 출석했다. 반드시 내자신 까다로운 성격의 탓이라고 자책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장로교회의 전토을 이탈해 본적이 없고 보수적인 신잉을 세습한 나로서의 취할 태도는 이 밖에 없다.
여기서 잠시 내 자신의 신앙 경력을 소개함도 필요할 것이다. 일제시대였던 1929년 평북의주에서 출생했는데 당시 서북지방에는 이미 기독교가 많이 전파되어 비록 농촌이었지만 우리 마을에도 교회가 세워졌고 선친은 바로 그 교회의 장로로 일하셨다.온 식구가 함께 주일이면 흰옷으로 갈아입고 어김없이 교회에 출석했다.
당시 교회는 남녀구별을 위해 어떤 교회는 ㄱ자형으로 되었거나 아니면 교회당 중간에 예배시간이면 반드시 휘장을 치는 시절이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후자에 속했는데 선친은 자주 성경공부를 위해 강단에 섰다. 장로님의 막내로 출발한 내 인생은 그후 민족의 해방을 경험했고 5년의 공산치하에서 그들의 사상교육에 형식적으로나마 동참해야 했고 지루하게 통일을 기다리다 급기야 6.25를 맞고서야 남하에 성공했다. 물론 북진 통일이 눈앞에 잡히는 듯 하다가 남한군과 미군의 후퇴로 피난을 오는 신세인지라 가족들과는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어린 시절이라고해야 할 당시 나는 대구로 부산으로 유리하다 가장 안전한 호구지책이오 명목상은 애국정신의 발로로 국군에 입대 전투에 참가했으나 정말 하나님의 주밀한 보호 속에 제대하였고 이후 어려운 과정들을 거치면서 공부도 하게 되고 가정도 이루게 된것이다.
신학을 마치고 목회의 길에 나서려니 쉽게 목장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 개척의 적격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충북으로 내려가 개척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목회경력이라면 지극히 단순한데다 한 교회를 섬기다가 그 교회에서 은퇴해야 하는 어떻게 보면 좀 못나게 보이는 목회 일생처럼 보인다. 은퇴이후 고요히 묵상해 보면 가장 큰 민족의 수난과 격동기를 경험하면서도 나에게 계속하여 선대의 신앙을 지속할 수 있게 하신것도, 전란 중에서도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게 해주시고 목회에 임하여 그래도 흠없이 일선을 명예롭게 떠날 수 있게 해주신것, 더구나 이때까지 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 할 것 밖에 없다.
이름 있는 이들과 같이 크게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을 해 보지도 못했고 그러면서도 노히자으이 경력도 가져 본 것을 보면 그렇게 비난받을 정도의 무능한 목회만도 아니었음을 자부하기도 한다. 목회 사역 중 타 교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해 본 경험도 없고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개척 초기 한 두 번외에는 부흥회도 해 보지 않았다. 나의 목회방침은 어디까지나 말씀중심에 치중했으며 이같은 소신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목사의 생염은 설교에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먼저 강단이 제 구실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의 개쳑이란 한 마디로 오염된 강단을 순수하고 능력있는 말씀의 강단으로 되돌리는 작없이라고 확신한다. 얼마후 자식들의 직장관계로 다시 서울 광진구로 거처를 옮겼다. 고층 아파트의 한층에 자리한 거처는 생활에 불편은 없을 정도다. 다행히 한강변에 위채해 있어 조망이 괜찮고 오후엔 강변의 산책이 하나의 일가가 될 정도이다. 노후 건강을 위해 가장 효과적이란 보행을 위해서다. 감사하게도 하직 독서에 필요한 안력도 있고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못한 책들도 있어 책을 가까이 하려 하지만 아무래도 한계를 느끼는게 사실이고 더구나 책임에서 해방된 감정이 쉽게 자신을 가다듬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음을 고백한다. 지금 출석하는 곳은 규모가 작은 교회로서 담임목사가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혹시라도 젊은 목회자의 지도 방침에 장애가 될지도 모를까해서 본 교회를 떠난 은퇴목사의 처신에 따른 설명알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게 된다. 내 교회라는 느낌이 없는 데다 관계를 깊이 하려는 자체가 결례가 되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은목교회(은퇴목사들의 모임)가 있다는 말도 들었지만 찾아보지 않았다. 이제는 예배 출석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는 것을 최상으로 삼으련다.
항상 염려되는 것이 노후의 건강문제인데 여기서 근간 나의 건강관리의 비법 하나를 소개햐 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줄 안다. 물론 이미 많이 알려진 줄로 알지만 적어도 내게는 전에 니처 시도해 보지 못한 방법이었고 내가 이 방법을 시작하고 나서 현저한 효과가 있었음을 증거할 만큼 확신이 서기 때문에 옮기려는 것이다.
이름하여 "半身浴인데 일본의 신도오 요시하루의 고안으로 상당히 신임을 받을 만한 방벙이라고 생각한다. 내용은 지극히 간단한 것으로 매일 아침 30분간을 할애해서 욕조에서 보내면된다. 노후의 병환은 대체로 두 가지 원인이 주가 되는데 그것이 혈액순환의 불균형과 냉의 문제이다. 보통 우리는 추운것과 찬 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쉬운데 늙게 되면 냉증이 강하게 느껴지게 되고 쉽게 고혈압에 고생하게 되는것이다.
그런데 이 반신욕법은 욕조에 들어가 앉은 자세로 명치까지만 40도 내외로 미지근한 물에 담근 채 20-30분 계속 있다가 보통 때와 동일한 목욕을 하고 마친다. 이해할 수 있는 원리는 신체의 구조상 간에서 피를 만들어 혈관을 통해 신체의 끝 부분까지 보내야 하는데 가장 먼 곳이 발끝이다.
하반신을 온수로 따스하게 하는 동안 혈관의 위축은 충분히 이완되고 체내의 냉기도 치유하게 된다. 하반신을 온수에 담그고 있는 시간은 명상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 좋고 매일 계속한담녀 청결에도 좋다. 처음 시작해 한 두 주간은 욕조에서 땀을 많이 흘리게 되고 나오면 기운이 진해 얼마동안 휴식이 필요한데 그것은 당연한 과정이고, 계속하게 되면 땀도 덜 흐르고 욕실에서 나와도 평상시와 차이를 느끼지 못하니 안심할 일이다.
무릎 어깨가 시리고 냉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증세는 깨끗이 물리칠 수 있고 근육도 부드럽게 무릎과 어깨의 통증도 사라진다. 결국 혈액순환이 잘되고 냉을 제거하므로 전신에 새로운 활력을 얻게된다.
이상은 내 자신이 실행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생활의 단면을 그리는데 의미가 있음을 물론 은퇴후의 동역자들에게 다소 참고가 될까 하여 기술해본다.
의미를 찾아서
소속이 지방의 지역 노회로 소속교회 대부분이 열악한 교세인 탓에 노회 자체도 재정이 어려운데 두 사람 은퇴목사가 있어 매월 얼마의 재정지원이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겨우 정기노회시에나 얼굴을 대하는 형편이다. 같이 수고했던 후배 목사님들에 대한 애정도 앞서고 선험자로서 교회의 예배와 행정등 각 방면에 나누고 싶은 의견이 있어 한가지 방안을 찾은 것이 유인물의 발송이었다.
이름하여 "늦은 비" 체제는 A4용지 6면, 1면에 인사와 서언, 2면에 놀선, 2,4면에 설교 한편, 5,6면에 생각하는 문제점들을 문항별로 검토하였다. 그것도 생각 끝에 2001년 정초에 시작 격월간으로 노회 안의 후배 목사님들에게만 발송하기로 하여 현재까지 7호가 계속되었다.
목사님들에게만 제한한 것은 목회에 있어 평신도들에게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느 ㄴ지식이나 관리능력의 비법도 있을 수 있겠기에 취한 고의적인 배려였음을 말해둔다. 물론 기획 편집 인쇄 발송이 철저한 개인적 신념의 소산이므로 사신(私信)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나 늙은이라고 가만있는 것만도 죄송스런 심정의 발로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분 목사님들이 기쁘게 읽어주시는 것을 감사하며 능력이 닿은 대로 계속할 생각이다.
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에도 소신에 따라 가끔 기독신문에 단문을 발표한 바 있느데 목회현장을 떠나고 보니 문제의식도 감소될 뿐 아니라 나의 지나친 보수적 견해로 자칫 교회의 진취적 개선책에 차질을 줄까 두려워 자제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예배나 행정에 있어 붌합리한 단면들이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록 소속 노회의 범주 안에서라도 지적할 것은 지적해 두는 것이 나의 신앙양심임을 확신한다.
예를들면 요세 흔히 볼수있는 강단에서의 대표기도에 있어 낭독식으로 행해지는 것 등은 내 신앙양심으로는 아직도 용납되지 않는다. 교회를 담임한 교회가 없으니 자연 한국교회 전체에 대해 관심이 가게되고 지난 한 세기 동안 피와 땀으로 이룩한 한국교회가 이 시점에서 만약 정체 한다거나 후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간절한 염원이 앞선다. 우리 사회의 현황은 결코 방심할 수 없는 많은 징조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죄가 있는 곳에 심판이 따른다는 진리를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하다. 나라의 성쇠에 대한 책임을 교히는 면할 위치에 있지 않다. 이제는 온 교회가 각성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요. 교회의 원로들도 나름대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지혜는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비록 목회일선에서는 물러났다 하더라도 교휘의 정체성과 방향에 대한 올바른 견해는 오히려 은퇴한 원로들에게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교류를 통해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약이 있어지기를 기도 드린다. 오늘까지 함께 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며 여력을 다할 계획이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