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은 가볼 때마다 새로운 매력이 발견되는 곳이다. 그 옛날 백제의 유학생들이 중국 유학 떠나던 길을 따라갈 수도 있고, 6천 686개나 되는 수종을 보유한 천리포수목원과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크다는 가로림만갯벌을 만날 수도 있다. 어마어마한 자연의 힘이 숨어 있는 태안에 가면 지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태안은 크게(泰) 편안(安)하다는 뜻이다. 내포지역, 즉 천혜의 해수욕장과 자연자원, 문화자원을 두루 갖추고 있는 충남서북부 지역 가운데 서산 태안은 자연 재해가 없기로 특히 유명하다. 큰 비가 와도 이내 바다로 물이 빠지고, 기온도 남해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온화하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안면(安眠)도, 안흥(安興)항, 안석(安石)사처럼 안(安)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이렇게 재해를 모르고 살아온 터라 지난해 기름유출사고 당시 지역 주민들이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어민들에게는 논과 밭이라고 할 수 있는 갯벌이 검붉은 석유로 물들었을 때는 마치 자식이 큰 사고를 당한 것처럼 갯벌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피해가 컸던 소원면과 이원면 주민들은 갯벌에 나가지 못한다. 그 많던 조개와 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돌아오려면 또 몇 번의 밀물과 썰물이 오가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1년이란 세월이 지나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많이 치유되었고, 이제 태안의 따뜻한 겨울바다는 도시 사람들의 왕래를 수줍게 기다리고 있다. 태안은 관광을 하기에도 좋고, 편안하게 쉬기에도 좋다. 국립공원이라는 수식어는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누가 서해 물이 탁하다고 했던가? 태안은, 해안가 어느 곳을 가도 하늘색만큼이나 파란 바다가 펼쳐져 있고, 아름드리 해송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또, 오후 서너 시경 세찬 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밀물의 위력은 자연이 잠자지 않고 깨어 있음을 눈으로 확인케 해준다. 눈에 보이는 어떤 산이라도 좋다. 태안에서는 어떤 산을 넘어가도 곧바로 바다와 맞닥뜨릴 수 있다.
만리포, 파도리, 모항
1990년 후반 이후로는 안면도가 태안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지만, 본래 유명했던 관광지는 만리포를 중심으로 한 소원면 일대다.
한국전쟁 직후 해수욕장으로 개발된 만리포는 대한민국 제1세대 해수욕장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수려한 경관을 가지고 있다. 서해안의 다른 해수욕장은 크고 작은 섬이 전망을 해치기 일쑤지만, 만리포는 3km나 되는 광활한 해안이 막힘 없이 시원하게 뚫려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덕분에 아주 곱게 빻아진 백사장 모래는 만리포의 얼굴과 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축대와 숱한 건물들이 백사장 위에 지어지면서 1955년 개발 당시에 비해 백사장 크기가 1/3로 줄어든 점. 그래도 만리포는 만리포다.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일몰이 한 폭의 동양화다.
어느 곳이든 해수욕장 옆에는 포구가 있게 마련. 만리포 옆에는 모항이 있다. 오후 4시쯤 이곳에 가면 어민들이 바다에서 낚시로 잡은 자연산 횟감을 굉장히 싼값에 살 수 있다. 서울에서는 20만 원을 줘도 살까 말까 한 5kg짜리 홍돔을 5만 원이면 살 수 있다. 7~8명이 밤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포구 주변에는 회를 떠주는 식당이 쭉 늘어서 있다.
동해안처럼 강렬한 바다를 보고 싶다면 파도리로 향하라. 모래 대신 해옥이라고 하는 작은 자갈들이 펼쳐져 있는 특별한 해수욕장이 만리포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이곳은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절벽과 강한 파도가 공존하는 곳이다. 바닷가에 모래 대신 자갈이 있는 것도 강한 파도 때문이다. 파도리해수욕장 바로 앞, 싱싱한 회와 해물탕을 끓여주는 이름 없는 식당도 정겹다.
연포, 채석포, 안흥항
방향을 근흥면으로 틀어서 연포와 채석포, 안흥항, 신진도, 안흥성을 둘러볼 차례. 연포는 남해안의 분위기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아담한 해수욕장이다. 특별히 사나운 날씨가 아니면 파도가 없다. 시끄럽지 않은 바다를 느끼기에 최상의 조건이다. 백사장 바깥 솔밭에 만들어진 산책로의 야경도 일품이다.
안흥항과 연결된 신진도는 새롭게 꾸며졌다고 해서 ‘신항’이라고도 한다. 철철이 나는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어시장이 상설 운영되고 있다. 가을과 겨울에는 살이 꽉 찬 꽃게가 넘쳐난다. 특히 올해는 꽃게 수확량이 많아서 예년보다 30% 정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서해안은 꽂게다. 지금이야 꽂게 수요가 많아서 배를 타고 먼 바다까지 나가야 원하는 양만큼 잡아올 수 있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밀물에 쓸려온 꽃게들이 백사장에 굴러다녔다. 어시장에 삼삼오오 모인 노인들은 그 시절을 추억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조선 효종 때 지어진 안흥성은 바다와 산성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풍경이 압권이다. 가파른 산과 바다가 만나는 안흥지역은 군사시설을 만들기에 좋은 지형 조건을 가지고 있다. 효종은 안흥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양곡을 저장하면 안으로 호남과 영남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성 안에 있었다는 3백여 채의 기와집은 19세기 말의 동학혁명 때 거의 불에 탔지만, 성의 윤곽은 뚜렷이 남아 있다.
안흥항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배가 많이 들어오는 채석포도 싱싱한 생선을 저렴하게 구입하기에 좋은 포구다. 특히 꽃게와 대하가 많이 들어오기로 유명하다.
신두리, 학암포, 만대포구
태안 읍내에서 방향을 원북으로 틀면 신두리해수욕장과 학암포해수욕장을 만날 수 있다. 1990년 중반, 군사지역에서 일반 해수욕장으로 허가가 난 신두리해수욕장은 원시 자연이 그런대로 잘 보존돼 있는 곳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해안사구가 있는 곳으로 멸종 위기에 있는 다양한 동식물과 천연 늪지대가 있어서 보존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해수욕장이다.
학암포는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과 조개 잡는 재미가 쏠쏠한 해수욕장이다. 넓은 백사장과 기암괴석이 돌출되어 있는 해안가 풍경을 감상하다가 썰물이 되면 바다 앞에 있는 섬까지 걸어들어가 조개와 게 등을 잡을 수 있다.
원북면과 이원면은 ‘박속낙지’ 전문점이 많다. 박속낙지는 ‘박’으로 시원하게 만들어낸 육수에 낙지를 산 채로 넣어서 익혀 먹는 요리다. 어느 음식점을 가도 시원한 박속낙지를 맛볼 수 있지만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곳은 원북면 소재지 안에 위치한 원풍식당이다. 30년 전통의 이곳 주인 목예균 씨가 바로 박속낙지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안면도 영목항이 태안의 최남단 포구라면 최북단 포구는 이원면 만대포구다. 이곳은 다양한 해산물도 좋지만, 이원반도라고도 하는 촛대처럼 길고 좁게 뻗은 땅이 거의 모두 바다와 접해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 환상이다. 그리고 자그마한 포구, 만대. ‘가다가다 만디…’라는 충청도 사투리가 포구 이름이 되었다. 태안 읍내에서 40km나 걸리는 곳이니 그런 이름이 붙을 만도 하다.
태안읍내로 나오면 토속음식을 맛볼 수 있다. 특히 토담집에 가면 간장게장과 우럭젓국, 어리굴젓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육순철 사장의 인심도 좋아서 일부러 찾아왔다고 하면 넉넉한 양을 서비스 받을 수 있다. 태안은 넉넉하고 풍요로운 고장이다. 특히 바다와 갯벌, 산과 들의 음식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고장이기도 하다. 국도를 따라 이곳저곳 둘러보고, 맛난 토속음식을 먹고, 마음씨 좋은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도시에서 배운 각박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태안의 5가지 경치
1 연포 해안산책로 | 낮에는 책 한 권 들고 독서하기에 좋고, 밤에는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산책하기에 좋다.
2 안흥성 축대 길 | 바닷가에 고성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색적이다. 높이 올라가면 섬이 많은 서해 바다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3 만리포 바다 난간 | 최근에 생긴 명소. 물이 들어오면 마치 배에 올라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물이 나가면 갈매기떼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4 신두리 갯벌 | 그 방대한 크기도 크기지만, 갈대와 어우러진 풍경이 명품이다. 영화 ‘볼륨을 높여라’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5 파도리 해옥 해변 | 둥글둥글한 자갈들이 수없이 많이 깔려 있어서 마치 지중해 어느 해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이름만큼이나 세찬 파도가 수시로 몰아친다.
태안의 5가지 맛
1 우럭젓국 | 태안은 우럭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도시 사람들은 우럭 하면 회나 매운탕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태안 사람들은 우럭젓국을 더 좋아한다. 쌀뜨물에 무와 각종 채소, 그리고 볕에 잘 말린 우럭을 넣고 끓이면 아주 개운한 국이 완성된다. 해장국으로 그만.
2 박속낙지 | 박속과 ‘뻘 속에서 건져낸 인삼’이라는 낙지, 미나리 등 야채를 한데 넣고 끓이면 시원한 탕이 완성된다. 낙지는 익자마자 바로 먹는 게 맛있다. 국물은 나중에 수제비나 칼국수를 넣어서 진국으로 먹을 수 있다.
3 어리굴젓 |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픈 태안과 서산의 토종음식.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랐다는 일품요리다.
4 간장게장 | 지금은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반찬이 됐지만, 원래 간장게장은 꽃게가 많이 나는 태안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봄 꽃게로 게장을 담아서 얼려두면 사시사철 그 맛을 즐길 수 있다.
5 조개구이 | 갯벌이 많은 태안반도는 각종 조개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음식점에서 먹어도 저렴하지만, 태안이나 서산어시장 등에서 직접 사서 요리해 먹으면 훨씬 저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