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이라는 곳이 있다. 가 본 사람들도 많고, 가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지명쯤은 거의 다 안다. 워낙 방송과 신문 등에 이름이 많이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은 마치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지역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정동진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어느 드라마 제작팀이 그곳에서 촬영을 하
고 나서부터이다. 그후 정동진은 외지 사람들이 다투어 찾아가는 관광지가 되어 버렸다. 새
해 첫날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많은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곳에는 숙박시설과
식당, 카페들이 무척 많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그곳을 찾는 사람들 중 정동진이 어떻게 훼손되어 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이들은 드물다. 그곳의 옛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
다. 다만 유명한 곳이고, 남들이 많이 간다니까 어떤 환상 같은 것을 갖고 그곳을 찾는 사람
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대 정동진에 가면』은 그 지역의 옛 모습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그곳이 관광이라는
목적으로 개발되어 가는 문제점을 일깨워 주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는 ‘정동진’이 아니라
‘정동’이라고 불렸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와 현재의 정동진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그려지고
있다.
이순원은 이같은 안타까운 문제를 단순한 사실 자체로 담아내지 않고, 옛 추억의 여인을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자연스러우면서도 절실하게 그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 소설은
그냥 줄거리만을 좇아서 본다면 잃어 버린 옛사랑을 찾아 떠나는 추억 여행기처럼 읽힐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는 주인공 박석하가 옛 연인을 만나기 위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들을
찾아보게 하며, 이제는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달라져 버린 정동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
다.
박석하는 기억 속에 부끄러움과 수줍음으로 자리잡고 있는 첫사랑의 여자를 가까스로 찾
아낸다. 그렇지만 옛 회억만으로는 지나쳐 버린 사랑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다. 다만 아름다
웠던 어린 시절의 추억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여행을 끝내고 만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헤
매 다닌 장소가 정동진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무리 없이
전체 줄거리와 어우러진다. 결국 잃어 버린 옛사랑과 사라져 버린 정동진의 옛 모습이 같은
줄기의 다른 가지처럼 애잔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한 편의 연가(戀歌)이자 애가(哀歌)의 형태를 띠면서 이 소설이 그려내는 정동진의 모습
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돈이 된다고 하면 무조건 관광지로 만들고 보자는 우리의
의식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어울리지도 않는 구조물들을
세우고 더 많은 ‘이득’을 얻으려는 움직임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자
연과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가꾸어 가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
고 있다.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이 작품은 다양한 소재를 각각 다른 문체로 그려내며 독특한 자
기세계를 일구어 온 이순원이 새로운 지평을 연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동안 그는 사
회문제, 개인의 일상사, 가족사의 풍경, 절박하고 애절한 사랑 등 여러 분야의 이야기를 그
내용에 알맞는 형태로 빼어나게 형상화해 왔다. 그런데 이 소설은 아름다웠던 농촌에 상업
주의가 들어가 황폐화되는 과정을 뛰어나게 묘사하면서 또 하나의 영역을 개척해 나간 것이
다. 게다가 그 동안 많은 작품을 쓰면서 연마되고 무르익은 이순원의 작품세계가 『그대 정
동진에 가면』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주옥 같은 작품을 남기고 정결한 작가정신을 지키며 ‘멀리서 존경받는 스승’으로 일컬
어지는 소설가 황순원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함부로 가르치는 것이 허락된다
면 머리로 쓰는 소설, 가슴으로 쓰는 소설, 손으로 쓰는 소설을 구분할 수 있다.” 사실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탁월한 원로작가의 통찰력에 공감하게 된다. 그
런데 이순원의 경우를 여기에 대입시켜 본다면, 그는 머리와 가슴과 손을 다 동원해서 작품
을 쓰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명료한 주제의식, 뜨거운 애정, 놀라운 솜씨가 함
께 용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만큼 감동의 울림이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런 작
가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간 반갑고 행복한 일이 아니다.
1996년에 동인문학상, 1997년에 현대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이순원은 이 소설로 제5회 한
무숙문학상을 수상했다.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대 정동진에 가면』이 문단
과 독자층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미 까다롭게 작품을 선택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충
분히 읽히고 난 후에 상이 수여되었던 것이다. 그런 장식과는 상관없이, 좋은 작품이면서도
문학상의 수상작이 되지 못한 이순원의 다른 창작품들과 함께, 이 소설은 한국문학을 살찌
우고 우리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작품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