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토성도장 건립 포천수련도장을 지은 후, 한수(漢水) 이북 최초의 대학과 병원을 짓자 도세는 급격히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무려 800만 수도인이 입도되었다. 대순의 꽃이 만발한 것이다. 그러나 개화(開花)는 결실(結實)을 준비함이다. 1993년 박우당 도전께서는 결실을 준비하는 도장을 짓기 위해 새로운 도장 부지를 찾고 계셨다. 그러던 중 고성군 토성면 인흥리에 한 곳이 소개되었다. 도전께서는 그곳을 둘러보시고 매우 흡족해하시며 그 땅을 매입코자 하셨으나, 중간소개업자들의 장난으로 땅값이 계속 올라가서 결국 그 땅은 매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그곳은 그만두고 다른 곳도 알아보았으나, 그 역시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매입할 수가 없게 되자 근심이 크셨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에 속초에 사는 상도방면 정춘자 선사가 지난번 매입코자 하다가 성사되지 못한 토성면 인흥리 도장 부지 주인의 친척과 연계되었는데, 그 땅의 주인은 중간소개업자를 빼고 땅을 매입하려는 대순진리회의 ‘당사자’와 직접 만나서 거래를 하고 싶어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정춘자 선사는 이 사실을 박성구 선감에게 알렸고, 박성구 선감은 이 사실을 도전께 보고드렸다. 그런데 도전께서는 이러한 보고를 받으시고도 거의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것은 이 무렵 박성구 선감이 척추를 다쳐서 하반신이 마비가 되어 일체 거동을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도전께서는 오연자 선감을 불러 “박성구 선감의 병에 대해 CT촬영을 하고, MRI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하시고, 계속 시료를 받게 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때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라. 그렇지 않으면 평생 불구자가 된다”라고 하였으나, 박성구 선감은 수술을 하지 않고 오직 박우당 도전의 시료를 믿고, 사시(四時) 기도로써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4년 7월경에, 박성구 선감은 몸이 많이 회복되어 거동을 할 수 있게 되자, 1년 만에 박우당 도전께 인사드리러 올라가는 날이었다. 도전께서는 마침 그날을 택해 속초 정춘자 선사에게 직접 전화를 하셔서 도장으로 올라오라고 명하셨다. 그날 박성구 선감은 포항을 출발하여 추풍령을 넘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정춘자 선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선감요, 도전께서 지금 저를 도장으로 올라오라고 하네요. 그런데 도전님은 제가 도장에 도착하면 선감을 만날 수 있다고 하시는데,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리고 지금쯤 선감께서 추풍령쯤 올라오고 계실 거라고 하셨는데, 맞아요?” 박성구 선감은 도전께 보고도 드리지 않고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런 소리를 듣고 깜작 놀랐다. 선감은 정춘자 선사에게 “그럼 도장에서 만나자” 하고는 급히 도장으로 향했다. 도장에 도착한 박성구 선감이 도전님을 배알하고 인사를 드리자, 박우당 도전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속초 정춘자 선사를 여기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이번에 오선감이 일을 봐줘야겠어.” 그리고 정춘자 선사가 도착하자 도전께서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도장 부지 매입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오연자 선감과 정춘자 선사에게 그 땅의 지주들을 만나보고 땅을 매입하라고 지시하셨다. 당시 부지를 매입하는 동안, 박성구 선감은 도전의 하명으로 일주일 동안 도장에 머물면서 도전의 분부를 모시고 있었다. 오연자 선감과 정춘자 선사는 지주 두 사람과 만나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중도금을 지불하여 토성도장 부지매입 계약을 매듭지었다. 그후 도정 업무기간에 임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훈시(訓示)하실 때 “이번에 고성 땅, 상도(上嶋)에서 샀어!”라고 발표를 하셨다. 도전께서 금강산 토성도장 부지 매입을 상도에서 했다고 발표하신 것은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토성도장은 금강산 제1봉인 신선봉(神仙峯)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금강산(金剛山)은 제1봉인 신선봉으로부터 1만2,000봉이 뻗어나가 동해 낙타봉(구선봉九仙峰)에서 끝이 나는데, 1만2천 도통군자를 이끌어가는 대표자인 대두목과 금강산 1만2,000봉 중 제1봉인 신선봉과는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갑술년(1994년) 12월 3일(양력 1995년 1월 3일)에,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인흥리에서 ‘금강산 토성수련도장’ 기공식을 하고 다음해인 을해년(1995년) 3월 12일(양력 1995년 1월 15일)에 본전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강증산 성사께서 “도(道)는 장차 금강산 1만2,000봉을 응기하여 1만2천의 도통군자(道通君子)로 창성하리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곳에 도장이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하여 노래한 「채지가」 뱃노래 한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생경(三生經) 전해줄때 당래불(當來佛) 찬탄노래 지어 역력히도 하신말씀 이내도덕 삼천년후 용화도장 넓은도장 일만이천(一萬二千) 도통(道通)일세 여기가 바로 금강산 1만2,000봉의 정기가 시작되는 시발점으로서, 이 토성도장이 들어섬으로써 금강산 1만2,000봉의 지기(地氣)가 발음되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도(道)가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만발하였던 꽃은 반드시 떨어지는 법이다. 이것 또한 금강산 토성도장이 지어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꽃이 떨어지니 열매가 드러난다. 도주(道主)님께서는 이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詩) 한 수를 읊어주셨다.
戊辰年來開花期 무진년래개화기
기사정녕만발기 庚午辛未無限量 경오신미무한량 乙丙之間落花期 을병지간낙화기
무진년(1988년)에는 꽃이 피는 시기요 기사년(1989년)에는 정녕 만발하는 시기로다. 경오, 신미년(1990, 1991년)에는 무한량으로 피어났다가 을해, 병자간(1995, 1996년)은 꽃이 떨어지는 시기로구나.
1969년에 대순진리회가 창설된 것이 씨를 뿌린 것이라면, 1984년에 여주도장을 지을 때가 한창 줄기가 뻗어나고 잎이 피어오를 때이다. 이때 수도인 호수가 6만 호였다. 꽃이 피는 시기인 무진년(1988년)은, 박우당(朴牛堂) 도전께서 ‘후인(後人)’에게 전체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상도(上嶋)’라는 호를 내리고 납향치성을 발표하신 해이다. 이후 1989년에는 도세가 한창 뻗어나던 때로서, 이때 수도인 호수가 거의 40만 호에 육박하고 있었다. 1990년, 1991년에는 여주 본전을 짓고 후인(後人)을 개유보(皆有報, 발표)한 때이다. 그리고 대학을 지으면서 포덕이 한없이 되어들어가던 때이다. 이로부터 1995년 박우당 도전께서 화천하실 때까지 대학교가 완성되고, 병원을 지으면서 수도인 호수가 무려 160만 호에 800만을 헤아렸다. 이처럼 무한량 피어나던 시기였으나, 박우당 도전께서 화천하시면서부터 만발했던 꽃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즉 대순진리회에서 임원들 간에 분규가 일어나고, 수도인들은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이때가 바로 9폭 심우도의 6번째 그림의 모습이 현실로 드러난 때이다. 즉 허화난동의 때로서, 수도인들이 연원(淵源)의 맥(脈)을 잡지 못하고 떨어지는 꽃의 신세가 되는 때이다. 꽃이 떨어짐은 비정(非情)이나 이로부터 열매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바야흐로 도의 결실기가 도래된 것이다. 즉 이때부터가 대두목[後人]을 중심으로 1만2,000개의 열매가 맺혀 들어가는 시기인 것이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1984년 진귀가(眞歸歌)로써 말씀하셨다.
개명장 나는 날에 일체 개명하였으랴. 동자야 비를 들어 만정낙화 쓸어내라.
292 개명장(開明長)이란 ‘도(道)를 밝히는 장(長)’이란 뜻으로 곧 대두목을 지칭한다. 개명장이 나오면 박우당 도전의 정체가 ‘박성미륵세존(朴聖彌勒世尊)’으로 밝혀져서 삼신(三神)이 한자리에 모셔지고, 세상에 도(道)가 밝혀져 나오게 된다. 이때부터 1만2천의 결실이 맺혀 들어가는 때이므로 꽃은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개명장 나는 날에 뜰 가득히 떨어진 꽃을 쓸어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박우당 도전의 화천 박우당(朴牛堂) 도전께서는 을해년(1995년) 12월 4일(양력 1996년 1월 23일) 오후 1시 30분(미시未時)에 화천(化天)하셨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구천상제(九天上帝)의 유지(遺志)와 조성옥황상제(趙聖玉皇上帝)의 유법(遺法)을 유명(遺命)으로 계승하시어 천하창생에게 새 세상(신천지)을 열어주시고 화천하셨으니, 수는 80세이다. 박우당(朴牛堂) 도전께서 화천하시기 전까지 대순진리회 수도인 숫자는 160만 호(戶)에 800만 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중곡도장·여주본부도장·포천수련도장·토성수련도장·제주수련도장 등 총 5개 도장과, 100여 개의 지방회관과 250여 회실, 그리고 1,000여 군데의 포덕소가 지방에 산재해 있었다.
그리고 종단 3대 기본사업의 일환으로 학교법인 대진학원과 의료법인 대진의료재단을 설립하여 대진대학교와 6개의 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하였고, 동두천 제생병원 및 분당 제생병원을 건립하였다. 대순진리회는 이와 같이 박우당 도전께서 영도(領導)하신 27년 동안, 세계 종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던 것이다.
박성미륵세존 봉안 박우당 도전께서 화천하시자 6인의 원로 임원(유기찬·정대진·정훈봉·이유종·손경옥·안영일)들은 을해년(1995년) 12월 13일에 금강산 토성도장 영대(靈臺) 봉안을 거행키로 하고, 이때 박우당 도전을 금강산 토성도장의 영대에 봉안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임원들은 박우당 도전 재세시 훈시에서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들어 도전(都典)을 영대에 봉안할 수는 없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또한 이들은 설령 영대의 원위(元位)에 석가여래를 퇴위시키고 도전(都典)의 존영(尊影)을 봉안한다 할지라도 진법주의 ‘서가여래 하감지위’는 어떻게 바꿀 것이냐고 반박하여 이 문제에 대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의견이 분분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도전(都典)을 영대의 원위에 모시게 될 경우, 1991년 당시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 선감이 도전의 존영을 모시고 올라가 “석가여래를 퇴위시키고 도전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6인의 원로 임원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였다. 즉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6인의 원로 임원들이 박성구 선감의 종통계승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므로, 참으로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원로 임원들을 중심으로 한 방면 임원들은 영대의 원위는 기존대로 봉안하고, 박우당 도전은 금강산 토성도장 내정(內庭)에 모시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임원들은 일단 도전님의 3년상이 끝난 후에 이 일을 다시 결정하겠다며, 수도인들의 귀와 눈을 막아버리고 이 사실을 덮어버린 채, 을해년(1995년) 12월 13일 영대 봉안 때 박우당 도전을 토성도장 영대에 봉안치 않고, 재세시 업무를 보시던 집무실인 내정에 모셨다. 하물며 일반 가정에서도 조상이 돌아가시면 사당에 모시는데, 더구나 하느님이 화천하셨는데 영대에 모시지 않고 재세시 업무를 보시던 ‘집무실’에 모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리고 사실 3년상이라는 것은 유교법으로서 강증산 성사께서도 유교의 폐습이라 하셨으며, 또한 현실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대순진리회에서 3년상을 거행한다고 했다. 그런데 임원들 또한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시간을 끌고 갈 명분으로써 내세운 것이었다. 즉 시간을 끌고 가면서 수도인들의 여론을 잠재우고, 종통계승에 대한 모든 것을 덮어버리기 위한 억지 방편이었던 것이다. 한편 12월 13일에 영대 봉안식을 거행한다는 말을 듣고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 선감도 토성도장으로 갔으나, 어이없게도 영대에 박우당 도전을 모시지 않고 기존의 석가여래를 모셨다. 박성구 선감은 참담한 심정이 되어 “세상에 도가 없어져버렸다. 암흑천지가 되어버렸다” 하면서 급히 포항 상도(上嶋) 회관으로 내려와 12월 14일 하루 동안에 봉안 준비를 하여, 을해년(1995년) 12월 15일 포항 상도회관 봉심전에 모셔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 조성옥황상제(趙聖玉皇上帝)와 함께 박우당 도전의 신위(神位)를 ‘박성미륵세존(朴聖彌勒世尊)’으로 밝혀 원위에 봉안하였다. 이로써 세상에 미륵세존(彌勒世尊)이 오셨음이 밝혀졌으니, 곧 미륵(彌勒)의 출세(出世)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전 인류의 신앙대상인 삼신(三神)이 한자리에 모셔지게 되었으니,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도(道)가 완전히 밝아진 것이다. 한편 상도 박성구에 의해 미륵이 출세함은, 이미 강증산 성사께서 금산사(金山寺) 공사로써 처결하셨으니 다음과 같다.
성사께서는 약방에 갖추어둔 모든 물목을 기록하여 공우와 광찬에게 주고 가라사대, “이 물목기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그곳에 봉안한 석가모니불상(釋迦牟尼佛像)을 향하여 그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사르라” 하시니 두 사람이 금산사에 가서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이로부터 몇 해 지난 후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 석가모니불전(釋迦牟尼佛殿)을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니 미륵전(彌勒殿) 앞이 넓어지느니라. 이 불전이 오늘날의 대장전이로다.
금산사는 다른 사찰처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모시는 대웅전이 없고, 미륵전(彌勒殿)에 있는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주불이며, 석가모니불은 대장전에 따로 모셔져 있다. 대장전(大藏殿)은 본래 미륵전의 오른쪽 앞에 위치했던 목조탑(木造塔)으로서, 미륵전을 장엄하게 꾸며주는 역할을 위해 미륵전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후에 탑 안에 경전을 안치하자 탑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이후 대장전으로 그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 한편 이 대장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이후 조선 인조 13년(1635년)에 수문대사가 다시 세울 때 지금처럼 ‘철개(鐵蓋)와 함형보주석(陷形寶珠石)’만을 지붕 위에 남겨놓고 아예 그 구조까지도 보통 당우(堂宇)의 모습으로 바꾸고, 그 안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봉안하였다. 이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대장전이 미륵전의 오른쪽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므로, 정면에서 보면 미륵삼존불 중 왼쪽의 보불(補佛)이 석가모니불에 의해 가려지는 형상이 되어 있었다. 마치 영대(靈臺)에 구천상제(九天上帝)와 옥황상제(玉皇上帝)를 봉안한 왼쪽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봉안된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증산 성사께서 박공우(朴公又)를 시켜 ‘그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는 공사’를 보신 것이다. 이러한 상제의 공사에 의해 1922년, 금산사에서는 탑의 성격과 형태가 바뀌어 미륵전을 꾸며주는 본래의 역할을 상실하였다 하여 대장전을 ‘미륵전’ 서쪽의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미륵전 앞이 넓어지고 미륵삼존불이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한편 박공우(朴公又)의 ‘우’는 ‘또 우(又)’로서, ‘또 박공(朴公)’, 즉 ‘또 박씨’라는 의미인데, 이는 곧 박우당(朴牛堂) 다음에 또 오는 박씨인 박성구(朴成九)를 의미한다. 박공우의 본명은 박경안(朴京安)이었는데, 강증산 성사께서 공사를 보시기 위해 이름을 박공우로 개칭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격암유록」에 ‘차출박(次出朴)’이라 하여 ‘또 나오는 박씨’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 또한 박공우(朴公又)와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대두목인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에 의해 석가여래가 내려지고 미륵세존이 봉안되는 것이 이미 공사로써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박성구 선감이 1991년에 박우당 도전의 존영을 모시고 올라갔을 때 도전께서 말씀하시길, “석가불은 3,000년 운(運)이고, 미륵불(彌勒佛)은 5만 년이다. 짧은 것이 먼저 나오고, 긴 것이 나중에 나오는 것이 순리다. 앞으로는 미륵불 운수다”라고 하신 것은 석가불의 운이 3,000년으로 끝이 났으니, 이제 석가여래(釋迦如來)가 내려지고 5만 년 운인 미륵세존이 모셔져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당신이 미륵(彌勒)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박우당 도전께서는 세 번째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인 ‘미륵세존(彌勒世尊)’이셨으므로, 창생들에게 ‘후천오만년 미륵용화세계(彌勒龍華世界)’를 열어주기 위한 모든 공사를 마친 후 화천(化天)하셔서 천상의 ‘미륵세존의 위(位)’로 임어하신 것이다. 이로써 세 분 하느님[三神]이 한자리에 모셔지게 된 것이니, 비로소 세상에 도(道)가 밝아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