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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흑치상지><연남생><연남산><고현> | 조회 : 390 |
글쓴이 : 고구려인 / 2005-01-31 오전 09:49:04 | 홈페이지 : http:// |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 판독자: 송기호 大周故左武威衛大將軍檢校左羽林軍贈左玉鈐衛大將軍燕國公黑齒府君墓誌文幷序」 太淸上冠合其道者坤元至無高居參其用者師律不有命世之材傑其奚以應斯數哉然則求玉榮者必」 遊乎密山之上蘊金聲者不恨乎魯門之下矣府君諱常之字恒元百濟人也其先出自扶餘氏封於黑齒」 子孫因以爲氏焉其家世相承爲達率達率之職猶今兵部尙書於本國二品官也曾祖諱文大祖諱德顯」 考諱沙次?官至達率府君少而雄爽機神敏絶所輕者嗜欲所重者名訓府深沈淸不見其涯域情軌」 闊達遠不形其里數加之以謹慤重之以溫良由是親族敬之師長憚之年甫小學卽讀春秋左氏傳及班」 馬兩史歎曰丘明恥之丘亦恥之誠吾師也過此何足多哉未弱官以地籍授達率唐顯慶中遣邢國公蘇」 定方平其國?其主扶餘隆俱入朝隸爲萬年縣人也麟德初以人望授折衝都尉鎭熊津城大爲士衆所」 悅咸亨三年以功加忠武將軍行帶方州長史尋遷使持節沙泮州諸軍事沙泮州刺史授上柱國以至公」 爲己任以忘私爲大端天子嘉之轉左領軍將軍兼熊津都督府司馬加封浮陽郡開國公食邑二」 千戶于時德音在物朝望日高屬蒲海生?蘭河有事以府君充?河道經略副使實有寄焉府君稟質英」 毅資性明達力能翹關不以力自處智能禦寇不以智自聞每用晦而明以蒙養缶故其時行山立具瞻在」 焉至於仁不長姦威不害物賞罰有必勸沮無違又五校之大經三軍之元吉故士不敢犯其令下不得容」 其非高宗每稱其善故以士君子處之也及居潟大著勳庸于時中書令李敬玄爲河源道經略」 大使諸軍取其節度亦水軍大使尙書劉審禮旣以敗沒諸將莫不憂懼府君獨立高崗之功以濟其難轉」 左武衛將軍代敬玄爲大使從風聽也府君傍無聲色居絶翫好枕藉經書有祭遵之樽俎懷蘊明略同杜」 預之旌旗胡塵肅淸而邊馬肥漢月昭亮而天狐滅出師有頌入凱成歌遷左鷹揚衛大將軍燕然道副大」 摠管垂拱之季天命將革骨卒祿狂賊也旣不覩其微徐敬業逆惡也又不量其力南靜淮海北掃」 ?頭?有力焉故威聲大振制曰局度溫雅機神爽晤夙踐仁義之途聿蹈廉貞之域言以昭行學」 以潤躬屢摠戎麾每申誠效可封兼國公食邑三千戶仍改授右武威衛大將軍神武道經略大使餘如故」 於是董玆哮勇剪彼凶狂胡馬無南牧之期漢使靜北遊之望靈夏衝要妖?是贍君之威聲無以爲代又」 轉爲懷遠軍經略大使以?游?也屬禍流群惡疊起孤標疑似一彰玉石斯混旣從下獄爰隔上穹義等」 絶?哀同仰藥春秋六十長子俊幼丁家難志雪遺憤誓命虜庭投軀漢節頻展誠效屢振功名聖曆元年」 寃滯斯鑒爰下制曰故左武威衛大將軍檢校左羽林衛上柱國燕國公黑齒常之早襲衣」 冠備經?榮?摠師律戴宣績效往?飛言爰從訊獄幽憤殞命疑罪不分比加檢察曾無反狀言念非專」 良深嗟憫宜從雪免庶慰塋魂增以寵章式光泉壤可贈左玉鈐衛大將軍勳封如故其男游擊將軍行蘭」 州廣武鎭將上柱國俊自?家各屢效赤誠不避危亡捐軀徇國宜有?錄以申優?可右豹韜衛翊府左」 郞將勳如故?以聖曆二年壹月卄二日勅曰燕國公男俊所請改葬父者贈物一百段其葬事?」 幕手力一事以上官供仍令京官六品一人檢校卽用其年二月十七日奉遷于邙山南官道北禮也惟府」 君孤峯偉絶材幹之表也懸鏡虛融理會之臺也言直而意??無枝葉之多蔽謀動而事成有本末之盡美」 夙夜非懈心存於事上歲寒不移志在於爲下非君子之所關懷必不入於思慮非先王之所貽訓必不出」 於企想自推?軍門建節邊塞善毁者不能加惡工譽者不能增美智者見之謂之智仁者見之謂之仁至」 於推財忘己重義先物雖刎首不顧其利傾身不改其道由是懦夫爲之勇貪夫爲之廉猶權衡之不言而」 斤兩定其謬??之絶足而駑?知其遠至於吏能貞幹走筆而雙璧自非鑒賞人倫守?而千金成價固」 非當世之可效盖拔萃之標准也榮辱必也死生命也苟同於歸何必終於婦人之手矣余嘗在軍得參義」 所感其道頌其功乃爲銘曰」 談五岳者不知天台之翠屛也觀四瀆者不晤雲洲之丹榮也恭聞日?爲漢之?亦有里奚爲秦之梯苟」 云明哲興衆殊絶所在成寶何往非?惟公之自東兮如春之揚風兮文物資之人色聲明佇之以成功」 兮悠悠旌?肅肅軒盖擊鴻鍾鼓鳴?云誰之榮伊我德聲四郊無戎馬之患千里?公侯之城勳積旣展」 矣忠義旣顯矣物有忌乎貞??行有高而則傷中峯落其?幽壤淪其光天下爲之痛海內哀其良」 天鑒斯孔?及存亡余實感慕爲之頌章寄言不朽風聽無疆」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1992)]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 해석자: 송기호 대주(大周)의 고인(故人)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군(檢校左羽林軍) 증좌옥검위대장군(贈左玉鈐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 흑치부군(黑齒府君) 묘지문(墓誌文) 및 서문(序文) 하늘을 위로 이고 있으면서 천도(天道)에 순응하는 것은 땅이고,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은 자라도 쓰여질 수 있는 것은 군율(軍律)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운수에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름다운 옥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밀산(密山) 위에서 노닐어야 하고, 지혜와 덕을 쌓은 사람이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면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부군(府君)은 이름이 상지(常之)이고 자(字)는 항원(恒元)으로 백제인(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부여씨(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흑치(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씨(氏)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을 역임하였으니,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으며,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다. 증조부는 이름이 문대(文大)이고, 할아버지는 덕현(德顯)이며, 아버지는 사차(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고상하였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으니, 가벼이 여기는 것은 기호와 욕망이었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가르침이었다. 가슴 속에는 깊은 마음을 가졌으니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맑았고, 정감의 폭은 너무나 넓었으니 그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였다. 여기에 신중함과 성실함을 더하였고, 온화함과 선량함을 포개었다. 이런 까닭으로 친족들이 그를 존경하였으며, 스승과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나이 어려『소학(小學)』에서 공부할 적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및 반고(班固)의『한서(漢書)』와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를 읽었다. 이에 탄식하여 “좌구명(左丘明)이 이를 부끄럽다고 하였고, 공자도 역시 부끄럽다 하였으니, 진실로 나의 스승들이다. 이보다 더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찌 많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20세가 안되어 가문(家門)의 신분에 따라 달솔(達率)을 받았다. 당(唐) 현경(顯慶 : 656~660) 중에 당나라에서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그 나라를 평정하자, 그 임금(실제는 태자)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천자를 알현하였으니, 당에서는 이들을 만년현인(萬年縣人)에 소속시켰다. 인덕(麟德 : 664~665) 초년에 인망(人望)을 얻어 절충도위(折衝都尉)를 제수받고 웅진성(熊津城)에 진수(鎭守)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함형(咸亨) 3년(672)에는 공적에 따라 충무장군(忠武將軍), 행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를 더하였다. 얼마 안 있어 사지절(使持節), 사반주제군사(沙泮州諸軍事), 사반주자사(沙泮州刺史)로 관직을 옮기고 상주국(上柱國)을 제수받았다. 이에 지극히 공평한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리는 것을 커다란 강령으로 삼았다.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겸 웅진도독부사마(熊津都督府司馬)로 직책을 옮기게 하였고, 부양군(浮陽郡) 개국공(開國公)과 식읍(食邑) 2천 호(戶)를 더하여 봉하였다. 이 때에 좋은 평판으로 물망(物望)에 오르내렸고, 조정의 인망이 날로 높아졌다. 마침 포해(蒲海)에서 재앙이 일어나고 난하(蘭河)에서 사변이 벌어져 부군으로 하여금 조하도경략부사(?河道經略副使)로 삼았으니, 실로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다. 부군은 품성이 빼어나고 굳셌으며, 자질이 뛰어나 사리에 통달하였다. 힘으로는 능히 무거운 문 빗장을 들어올릴 수 있었으나 힘센 것을 자랑하지 않았고, 지혜로는 능히 외적을 방비할 수 있었으나 지혜있는 것을 떠벌리지 않았다. 매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드러나게 하였고, 어리석은 듯이 함으로써 인격을 도야하였다. 그러므로 그 때에 행실이 산처럼 똑바로 서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어질되 간사함을 기르지 않았고, 위엄을 갖추되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니, 상주고 벌주는 것은 반드시 원칙에 따랐고, 선을 권하고 악을 말리는 데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또한 5륜(倫)의 커다란 본보기를 이루었고, 3군(軍)의 크나큰 복이 되었으니, 이에 병사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고, 아랫 사람들은 그 잘못을 용납받을 수 없었다. 고종(高宗)이 매번 그의 선함을 칭찬하여 그를 지조와 학식있는 사군자(士君子)로서 대우하였다. 산서(潟 : 청해(靑海) 지방)에 있을 때에는 크게 공훈을 세웠다. 이 때에 중서령(中書令) 이경현(李敬玄)이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가 되자 군사들이 그의 지휘권을 빼앗았고, 역시 수군대사(水軍大使), 상서(尙書) 유심례(劉審禮)가 이미 패하여 죽자 장수들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 중에 부군이 홀로 높은 산마루와 같은 공훈을 세우면서 그 곤경을 극복함에 따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직책을 옮기고 이경현을 대신하여 대사(大使)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에 대한 풍문에 따른 것이다. 부군은 곁에 음악과 여색(女色)을 두지 않았고, 평상시에 노리개를 가지고 즐기지 않았다. 경서(經書)를 베개삼았으니 제준(祭遵)과 같이 예의를 중시하였고, 뛰어난 지략을 품었으니 두예(杜預)가 깃발을 많이 세워 적을 혼란에 빠뜨린 것과 같은 꾀를 지녔다. 오랑캐의 티끌이 깨끗하게 치워지니 변방의 말이 살찌고, 중원의 달이 훤하게 비치게 되니 하늘의 여우 기운이 사라졌다. 전쟁터에 출정하면 칭송이 뒤따랐고, 전쟁터에서 개선하면 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리하여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 연연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摠管)으로 벼슬을 옮겼다. 수공(垂拱 : 685~688) 말년에 천명(天命)이 장차 바뀌려 하였는데, 돌궐의 골졸록(骨卒祿)은 미친 도적으로 이미 자신의 미미함을 살피지 못하였고, 서경업(徐敬業)은 반역자로서 또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남쪽으로 회음(淮陰)과 해릉(海陵)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오랑캐 군사를 섬멸하는 데에 모두 큰 힘이 되었으니, 그의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천자가 제(制)를 내려 이르기를 “재간과 도량이 온화하고 우아하며, 기질과 정기가 고상하고 밝았으며, 일찍부터 어질고 의로운 길을 밟았고, 마침내 깨끗하고 곧은 곳을 밟았구나. 말한 것은 분명히 행하고 배운 것으로 자신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여러 차례 군사를 통솔하여 매번 충성스러움을 드러냈도다. 그러므로 겸국공(兼國公 : 燕國公)과 식읍(食邑) 3천 호를 봉할 만하다. 그리고 다시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를 내리고 나머지는 그 전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이곳의 포효하는 용감한 병사들을 통솔하여 저곳의 흉악하고 미친 무리들을 전멸시킴으로써, 오랑캐의 말이 남쪽에서 목축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중국의 사신들이 북쪽으로 가는 원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영주(靈州)와 하주(夏州)는 요충지로서 요사스런 오랑캐들이 가득하였으나, 부군의 위세와 명성은 이를 대신할 자가 없었다. 다시 회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로 자리를 옮겨 떠도는 요기를 막기도 하였다. 마침 재앙이 악한 무리로부터 흘러나와 고고한 품격을 가진 부군에게 거듭 미치니, 의심이 마치 명백한 사실인 양 되어버려 옥과 돌이 섞여 구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옥에 갇혀 이윽고 하늘을 등지게 되니,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러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 나이 60세였다. 맏아들 준(俊)은 어려서 집안이 재난을 당하자 아버지의 분함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세웠다. 오랑캐의 조정에서 목숨바칠 것을 맹세하다가 천자가 보낸 사신에게 몸을 맡기니, 여러 차례 충성스러움을 드러냈고 누차 공명을 떨쳤다. 성력(聖曆) 원년(698)에 원한이 쌓여 풀지 못함을 천자가 바르게 살피시고 제(制)를 내려 이르기를, “고인이 된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위(檢校左羽林衛) 상주국(上柱國) 연국공(燕國公)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일찍이 가문의 지위에 따라 벼슬을 이어받아 군진(軍陳)에서의 영예를 두루 거쳤으며, 누차 군율(軍律)을 담당하여 공훈을 받들어 떨쳤도다. 지난 번에 사실 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의심받았던 죄는 판별되지 못하였었다. 근래에 이를 검토하여 살펴보니 일찍이 모반하였던 증거가 없고, 오로지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실로 한탄스럽기 그지 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니, 총애하는 표시로 관작을 더하여 삼가 죽은 이를 영광스럽게 만드노라. 따라서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으로 추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노라. 그 아들 유격장군(游擊將軍) 행난주광무진장(行蘭州廣武鎭將) 상주국(上柱國) 준(俊)은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명성을 날렸고(?), 누차 진실된 정성을 드러냈으며, 아주 위급한 상황에도 이를 피하지 않았고,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도다. 마땅히 이를 포상하여 기록해둠으로써 크게 칭송함을 보이고자 하노니, 우표도위익부좌랑장(右豹韜衛翊府左郞將)에 봉할 만하다.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아아, 성력(聖曆) 2년(699) 1월 22일에 천자가 칙을 내려 이르기를, “연국공(燕國公)의 아들 준(俊)이 아버지를 이장(移葬)하겠다고 요청하였으니, 물건 100가지를 내리고, 그 장례 일에 필요한 휘장, 일꾼 등 일체를 관청에서 공급하라. 그리고 6품에 해당하는 경관(京官) 1명으로 하여금 가서 살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즉 그 해 2월 17일에 망산(邙山)의 남쪽, 관도(官道)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에 받들어 이장하였으니, 이것은 예에 맞는 것이다. 생각컨대, 부군은 외따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뛰어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재간있는 사람들 사이에 표상이 되었고, 거울을 걸어 놓은 것처럼 허상과 융화되었으니 선인의 도리와 합치되는 사람들 사이에 우러름의 대상이 되었다. 말은 곧고 뜻은 넓었으니 지엽적인 일들이 근본적인 것을 가리는 일이 없었고, 계획을 세우면 일이 이루어졌으니 처음의 일들이 마지막과 일치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은 항상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 두었으며, 곤경에 처하여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고 뜻은 항상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데에 두었다. 군자가 관여할 바가 아니면 그 생각은 아예 고려도 하지 않았고, 선왕이 물려준 바가 아니면 그 교훈은 아예 마음 속에 두지 않았다. 군문(軍門)에서 스스로 수레를 밀어 변방에서 절개를 이루었다. 그러니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나쁜 말을 하지 못하였고, 아무리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좋은 말을 찾지 못하였다. 지혜있는 사람이 그를 보면 지혜롭다 하였고, 어진 사람이 그를 보면 어질다 하였다. 재물을 멀리하고 자신을 잊어버렸으며, 의를 중시하고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목이 달아날지라도 이해를 따지지 않았고, 몸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올바른 길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겁많은 사람도 그로 인해 용감하게 되었고, 탐욕스런 사람도 그로 인해 청렴하게 되었다. 이것은 굳이 저울을 논하지 않아도 잘못된 무게를 바로잡는 것과 같았고, 준족을 가진 빠른 말로 인하여 느린 말이 원대함을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관리로서 마음이 곧고 재간이 있었으니, 글을 쓰매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스스로 자책하였고, 인륜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능력을 갖추었으니, 잠자코 있더라도 천금이 그 값어치를 발휘하였다. 진실로 지금의 시대에만 본받을 바가 아니었고, 대체로 뭇사람으로부터 우뚝 솟은 인물의 표준이 되었다. 영예와 굴욕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삶과 죽음은 타고난 것인데, 어차피 귀착하는 바가 동일하다면 어찌 부인의 손 안에서 목숨을 마치겠는가? 내가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참의소(參義所)에 있었는데, 그의 도리에 감복하였고 그의 공훈을 칭송하였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5악(嶽)을 말하는 사람은 천태산(天台山)이 병풍처럼 첩첩이 서 있는 모습을 알지 못하고, 4독(瀆)을 바라보는 사람은 운주(雲洲)에 핀 붉은 꽃을 깨닫지 못하네. 삼가 듣건대 김일제(金日?)는 한나라의 칼집이 되었고, 백리해(百里奚)는 진나라의 사다리가 되었도다. 참으로 사리에 밝다 말할 수 있으니 뭇사람을 즐겁게 할 정도로 뛰어났고, 가는 곳마다 보배가 되었으니 어디에 간들 명석하다 아니할 것인가. 공이 동쪽으로부터 왔도다, 마치 봄바람 불어 오듯이. 예악(禮樂) 제도가 그로 인해 본색을 드러냈고, 소리와 광채가 그를 기다려 뜻을 이루었도다. 끝이 없구나 군사들의 깃발이여, 가지런하구나 수레들의 덮개여. 커다란 종을 치니 북이 울고 퉁소가 화답하는구나. 이는 누구의 영화인가 나를 두고 덕이 있다 하는 소리도다. 사방에 걸쳐 오랑캐의 근심을 없앴고, 천 리에 걸쳐 공(公)과 후(侯)들의 성을 지켰도다. 공훈을 이미 펼치니 충성과 의로움이 벌써 드러났도다. 그러나 만물에는 곧고 굳건한 것을 꺼리는 일도 있고, 행실이 높으면 도리어 해를 당하는 일도 있구나.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그 높이를 잃게 되었고, 어두운 무덤 속에는 빛이 사라지게 되었구나. 천하가 그를 위해 애통해 하였고, 4해(海)가 그의 현량(賢良)함을 애처롭게 여겼도다. 천자가 이를 깊이 헤아리니, 살아있을 때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포상이 미쳤도다. 내가 실로 감모하여 그를 기리는 글을 짓노라. 그에게 바쳐진 말들이 영원할 것이며, 그의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로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1992)] 흑치상지묘지(黑齒常之墓誌)는 1929년 10월에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망산(邙山)에서 그의 아들 흑치준묘지와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 묘지는 남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묘지는 41행으로 행마다 41자씩 모두 1604자이다. 탁본의 크기는 길이 72cm, 너비 71cm이다. 지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 모두 알 수 없다. 다만 지문을 지은 사람은 흑치상지와 군대에 같이 있으면서 그를 흠모하였던 인물이었음을 묘지의 내용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묘지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630년(무왕 31)에 태어나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관직생활을 하였고, 660년부터 663년까지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당에 항복하여 한동안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후에 서역에서 토번과 돌궐세력을 물리치는 데에 공을 세웠다고 한다. 흑치상지는 689년 10월에 모함을 받아 처형당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60세였다. 흑치상치에 관한 기록으로 『신당서(新唐書)』흑치상지열전이 가장 자세한데, 묘지는 여기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다수 보이고 있어 사서의 기록을 보충해준다. 또한 묘지에서 흑치씨가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히고 있고, 아울러 흑치씨 가문이 대대로 달솔(達率)에 임용되었다고 하여 백제 신분제도의 일면을 엿보게 해준다. 이밖에도 백제 옛땅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정책, 당나라에서의 백제유민들의 활약상을 전해주고 있다. 흑치준묘지명(黑齒俊墓誌銘) 판독자: 송기호 大唐故右金吾衛守翊府中郞將上柱國黑齒府君墓誌銘幷序」 公諱俊卽唐左領軍衛大將軍燕國公之子焉分邦海濱見美玄虛」 之賦稱酋澤國取重太沖之詞熾種落於遐荒積衣冠於中國立功」 立事懸名於晝月之旗爲孝爲忠紀德於繫年之史曾祖加亥任本」 鄕刺史祖沙子任本鄕戶部尙書?玉挺荊山珠光蔚浦耀錦衣於」 日域風化大行撫仙署於天涯□臺時敍父常之爲皇朝左武衛大」 將軍上柱國燕國公贈左領軍衛大將軍材冠孤旺行光金氏功盖」 天地仲孺之任將軍賞茂山河邵奭之封燕國死而可作褒贈載榮」 公稟訓將門夙懷武略陶謙兒戱卽列旌旗李廣所居必圖軍陣由」 是負燕鳥?之遠略挺猿臂之奇工弱冠以別奏從梁王?潟行以」 軍功授游擊將軍任右豹韜衛翊府左郞將俄遷右金吾衛翊府中」 郞將上柱國高踐連雲之閣俯從秋省之遊珥晉代之華貂盛漢年」 之車服方冀七葉貽慶以享西漢之榮豈?二?□□俄從北升之」 名以神龍二年五月卄三日?疾終洛陽縣從善之□春秋?一烏」 呼城府颯焉邦國殄?惟公志氣雄烈宇量高深雖太上立功?勞」 苦戰而數奇難偶竟不封侯奄及殲良朝野痛惜卽以神龍二年歲」 次景午八月壬寅朔十三日葬於北邙山原禮也途移楚挽路引周簫」 ??將開黃?遽掩封崇旣畢翠栢方深紀餘恨於□玉庶碑字之」 生金銘曰」 於維后唐求賢以理頹當見用?侯入仕西戎孤□東夷之子求」 如不及片善斯紀其一紀善奚謂加之冠纓忠以立勣孝以楊名允矣」 皇考卑勵淸貞孝哉今嗣無墜厥聲其二厥聲伊何將門武德受命」 分?立功異域克定禍亂掃除?慝哥鍾賞賢車服表德其三車服伊」 何金吾最盛美矣夫子膺玆寵命高閣連雲華貂疊映享此積善冀」 傳餘慶其四餘慶不延俄終小年梁木斯壞彼蒼者天挽悲蒿里簫口易」 松阡一埋白日永廛黃泉其五」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1992)] 흑치준묘지명(黑齒俊墓誌銘) 해석자: 송기호 대당(大唐)의 고인(故人) 우금오위(右金吾衛) 수익부중랑장(守翊府中郞將) 상주국(上柱國) 흑치부군(黑齒府君) 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공(公)의 이름은 준(俊)이니, 즉 당나라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의 아들이다. 바닷가의 땅을 나누어 나라를 이루매 목화(木華)가 지은 「해부(海賦)」에서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늪지가 많은 나라에서 우두머리를 칭하매 좌사(左思)가 지은 「삼도부(三都賦)」에서 그 소중함을 얻을 수 있도다. 먼 오랑캐의 땅에서 부락을 크게 일으켰고, 중국에 들어와서 누차 벼슬을 하였구나.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루니 해와 달을 그린 깃발에 그의 명성이 걸렸고,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우니 연대순으로 적은 역사책에 그의 덕이 기록되었도다. 증조부는 이름이 가해(加亥)로서 본국에서 자사(刺史)를 역임하였고, 할아버지는 사자(沙子)로서 본국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이들은 모두 형산(荊山)에서 옥(玉)이 빼어난 것 같았고, 위포(蔚浦)에서 진주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해뜨는 동방에서 비단옷에 빛을 발하니 풍속의 교화가 크게 이루어졌고, 머나먼 하늘 끝에서 선서(仙署)를 어루만지니 □대(□臺)가 때맞추어 질서가 잡혔다. 아버지는 상지(常之)로서, 당나라의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 연국공(燕國公)이 되었고,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에 추증되었다. 그의 재주는 뛰어난 재주꾼들 중에서도 으뜸이었고, 그의 행동은 훌륭한 씨족들 중에서도 빛이 났다. 공훈은 천지를 덮었으니 관부(灌夫)와 같이 장군을 맡았었고, 포상은 산하(山河)에 무성하였으니 소공(召公)과 같이 연국(燕國)에 봉해졌었다. 죽어서도 능히 그러하였으니 그를 기려 추증함에 영예가 가득하였다. 공은 장군의 가문에서 가르침을 받아 일찍부터 무략(武略)을 품었다. 도겸(陶謙)처럼 어려서 놀 때에는 깃발을 펼치면서 놀았고, 이광(李廣)처럼 평상시에 거처할 때에도 반드시 군진(軍陣)을 그리면서 즐겼다. 이런 까닭으로 먼 이역(異域)에서 공을 세우려는 원대한 계획을 품었으며, 군대의 진퇴(進退), 공수(攻守)를 자유자재로 하는 기묘한 기술이 뛰어났다. 스무살의 나이에 별주(別奏, 관직 또는 특별히 주청하여?)로서 양왕(梁王)을 따라 서도(潟)로 종군하였다. 이에 군공(軍功)을 세워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제수되었고, 우표도위익부좌랑장(右豹韜衛翊府左郞將)에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우금오위익부중랑장(右金吾衛翊府中郞將) 상주국(上柱國)으로 옮겼다. 높이 구름에 잇닿아 있는 누각을 밟았고, 고개 숙여 가을의 수렵 놀이를 따랐으며, 진(晉)나라 때의 아름다운 담비 꼬리를 꽂았고, 한(漢)나라 때의 수레와 의복을 엄숙히 갖추었다. 바야흐로 7대에 걸쳐 경사스러움을 전하여 서한(西漢)의 김일제(金日?)와 같은 영광을 향유하고자 하였으나, 어찌 병마(病魔)를 (피할 수 있겠는가?) 얼마 뒤 북망산에 오르는 대열을 따르게 되었으니, 신룡(神龍) 2년(706) 5월 23일에 병환으로 낙양현(洛陽縣) 종선방(從善坊)에 있는 (집에서) 사망하였다. 이 때의 나이는 31세였다. 아아 슬프도다, 온 장안에 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온 나라가 병들어 초췌하듯 하였도다. 생각컨대, 공은 의지와 기개가 굳세고 맹렬하였으며, 재능과 도량이 높고 깊었다. 비록 더할 나위없는 최상의 공을 세웠고, 힘들여 싸우면서 전장에서 고생하였지만, 불운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마침내 제후에 봉해지지도 못하였다. 갑자기 현량한 사람이 돌아가게 되니 조정에 있는 사람이나 재야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슬퍼하고 아깝게 여겼다. 그런즉 신룡(神龍) 2년 병오년(丙午年) 8월, 초하루 임인일(壬寅(壬申)日), 13일에 북망산(北邙山) 언덕에 장례를 치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다. 초(楚)나라의 슬픈 상여꾼 노래 소리 길따라 이어지고 주(周)나라의 퉁소 소리 길게 빼는 가운데, 무덤 속 광중을 문득 열어 관을 넣고 급히 닫기에 이르렀구나. 땅을 높여 봉토 쌓기를 이미 끝내고, 무덤가에 심은 비취색 잣나무가 바야흐로 푸르른데, 이제 □옥(□玉)에 여한(餘恨)을 기록하고자 하니, 비석의 글자가 마치 황금에 새긴 것과 같기를 바라노라. 명문을 다음과 같이 짓는다. 아아, 요(堯) 임금은 현명한 사람을 구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니, 퇴당(頹當)이 쓰여지게 되었고 김일제(金日?)가 벼슬을 얻었구나. 서융(西戎)의 외로운 … 이고 동이(東夷)의 자손으로서, 구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하는 듯이 끝없이 하였으니, 여기에 그의 조그마한 착한 일들을 기록해두노라. 이것이 첫째이다. 착한 일을 기록함은 무엇을 이름인가? 갓을 쓰고 갓끈을 매게 되니, 충성스러움으로 업적을 이루었고, 효성스러움으로 이름을 떨쳤도다. 미쁘구나 아버지여, 맑고 곧은 심성을 가지기에 겸손히 힘썼도다. 효성스럽구나 아들이여, 아버지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구나. 이것이 둘째이다. 그 명성이란 무엇인가? 장군 가문에서 무장의 덕을 이어받았고, 성 밖에서 장군으로서의 명을 받들어, 이역(異域)에서 공을 세웠도다. 재앙과 난리를 능히 평정하였고, 난리를 피운 적들을 깨끗이 쓸어버렸으니, 편종(編鍾) 소리는 그의 현명함을 기리는 것이고, 그에게 내려준 수레와 의복은 그의 덕을 드러내는 것이로다. 이것이 셋째이다. 수레와 의복이란 무엇인가? 금오위(金吾衛)에서 가장 많이 받았으니, 아름답도다 대부(大夫)여, 천자의 총애를 이처럼 받았구나. 높은 누각은 구름에 잇대었고, 관에 꽂은 화려한 담비 꼬리는 거듭 빛났으니, 착한 일을 많이 하여 그 즐거움을 여기에서 누릴 뿐 아니라, 그 응보로 경사가 부디 자손에게 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노라. 이것이 넷째이다. 경사스러움이 이어지지 못해 갑자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여기 대들보가 무너졌는 데에도 저기 푸르른 것은 하늘이로다. 쑥이 더부룩한 무덤에는 상여꾼의 노래 소리 구슬프고, 소나무 심은 무덤 길에는 퉁소 소리 울리는데, 밝은 날에 한 번 묻히니, 무덤 속에서 영원히 머물 것이로다. 이것이 다섯째이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1992)] 흑치준묘지(黑齒俊墓誌)는 1929년 10월에 중국 하남성 낙양의 망산(邙山)에서 그의 아버지 흑치상지묘지와 함께 발견되었다. 탁본의 크기는 길이 53cm, 너비 52cm이다. 지석에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사각형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는데, 1행 26자씩 26행으로서 글자는 모두 642자이다. 지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 모두 알 수 없다. 묘지에 따르면, 흑치준은 그의 아버지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활동하던 때인 676년에 태어났고, 695년경에 군공(軍功)을 세워 관직을 수여받은 이래 당의 관리로 활동하다가 706년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흑치준묘지에 전하는 그의 가계와 흑치상지묘지에 전하는 가계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예를 들어 흑치상지의 할아버지를 아들 묘지에서는 '가해(加亥)'라고 표기하였고, 아버지 묘지에서는 '덕현(德顯)'이라고 표기하였다. 또 흑치상지 아버지의 경우 아들 묘지에서는 '사자(沙子)'라고, 아버지 묘지에서는 '사차(沙次)'라고 표기하였다. 한편 흑치상지묘지에서 그의 집안이 대대로 달솔을 역임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의 호부상서(戶部尙書)와 같다고 표기하였으나 흑치준묘지에서는 대대로 자사(刺史)와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고 표기하여 차이를 보였다. 이밖에도 백제의 관직, 관등, 그리고 양자의 관계 등에 대하여 기존의 기록과 다른 점이 보이고 있다.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 판독자: 박한제 葛城末治 허흥식 大唐故特進行右衛大將軍兼檢校右羽林軍仗內供奉上柱國卞國公贈幷州大都督泉君墓誌銘幷序」 中書侍?兼檢校相王府司馬王德眞撰 朝議大夫行司??中上騎都尉渤海縣開國男歐陽通書」 若夫虹光?石卽任土而輝山?照涵波亦因川而媚水?乎排朱閤登紫蓋騰輝自遠踰十乘於華軒表?ㆁ桭棟?五城」 於奧壤況復珠?角?垂景宿之精芒碧海之?感名山之氣色擧踵柔順之境濫觴君子之源抱俎豆而窺律呂懷錦繡」 而登廊廟移根蟠壑申大廈之隆材轉職加庭奉元戎之切寄與夫隋珠薦?楚璧緘繩豈同年而語矣於卞國公斯見之」 焉公姓泉諱男生字元德遼東郡平壤城人也原夫遠系本出於泉旣託神以?祉遂因生以命族其猶鳳?丹穴發奇文」 於九苞鶴起靑田稟靈姿於千載是以空桑誕懿虛竹隨波竝降乾精式?人傑遂使洪源控引態掩金樞曾堂延?勢臨」 瓊檻曾祖子遊祖太祚竝任莫離支父蓋金任太大對盧乃祖乃父良冶良弓竝執兵鈐咸專國柄桂婁盛業赫然凌替之」 資蓬山高視確乎伊?之任公貽厥傳慶弁?乃王公之孫宴翼聯華沛鄒爲荀令之子在?無弄處?不?乘衛?之車」 塗光玉粹綴陶謙之帛里暎珠韜襟抱散朗?置宏博廣峻不疵於物議通分無滯於時機書劍雙傳提蔗?截蒲俱妙琴」 碁兩翫雁行?鶴?同傾體仁成勇靜迅雷於誕據抱信由衷亂驚波於禹鑿天經不?敎乃由生王道無私忠爲令德澄」 陂万頃游者不測其淺深?垣九?談者未窺其庭宇年始九歲卽授先人父任爲?正吐入榛之辯天工其代方昇結艾」 之榮年十五授中裏小兄十八授中裏大兄年?三改任中裏位頭大兄?四兼授將軍餘官如故?八任莫離支兼授三」 軍大將軍?二加太莫離支摠錄軍國阿衡元首紹先疇之業士識歸心執危邦之權人無?議于時 蘿圖御??矢?」 期公照花照?內有難除之草爲?爲楨外有將顚之樹遂使桃海之濱?八條於禮讓蕭墻之內落四羽於干戈公情思」 內款事乖中執方欲出撫邊?外巡荒甸按?夷之舊壤請羲仲之新官二弟?建一朝兇悖能忍無親稱兵內拒金環幼」 子忽就鯨?玉膳長筵俄辭顧復公以共氣星分旣飮淚而飛檄同盟雨集遂銜膽而提戈將屠平壤用擒元惡始達烏」 骨之郊且破瑟堅之壘明其爲賊鼓行而進仍遣大兄弗德等奉表入朝陳其事迹屬有離叛德遂稽留公乃反?遼東移軍」 海北馳心 丹鳳之闕飭躬玄?之城更遣大兄?有重申誠?曠林積怨先尋閼伯之戈洪池近遊豈貪虞叔之劍」 皇帝照彼靑丘亮其丹懇覽建?之罪發雷霆之威丸山未銘得來表其先覺梁水無孼仲謀憂其必亡乾封元年公又遣」 子獻誠入朝 帝有嘉焉遙拜公特進太大兄如故平壤道行軍大摠管兼使持節按撫大使領本蕃兵共大摠管契」 苾何力等相知經略公率國內等六城十餘万戶書籍轅門又有木底等三城希風共款??危矣日窮月蹙二年奉」 勅追公入朝總章元年授使特節遼東大都督上柱國玄?郡開國公食邑二千戶餘官如故小貊未夷方傾巢?之幕」 大君有命還歸蓋馬之營其年秋奉 勅共司空英國公李勣相知經略風驅電激直臨平壤之城前哥後舞遙振崇」 墉之堞公以罰罪吊人憫其塗地潛機密?濟此膏原遂與僧信嗽內外相應趙城拔幟豈勞韓信之師?扇抽關自結」 袁譚之將其王高藏及男建等咸從?虜巢山潛海共入?封五部三韓竝爲臣妾遂能立義斷恩同鄭伯之得儁反禍成」 福類箕子之疇庸其年?英國公李勣等凱入京都策??至獻捷之日男建將誅公內切天倫請重?而蔡蔡叔上感」 皇?就輕典而流共工友悌之極朝野斯尙其年蒙授右衛大將軍進封卞國公食邑三千戶特進?官如故兼檢校右羽」 林軍仍令仗內供奉降禮承優登壇引拜桓珪輯中黃之瑞羽林光太紫之星陪奉輦輅便繁左右恩寵之隆無所?讓腎」 腸之寄莫可爲?儀鳳二年奉 勅存撫遼東改置州縣求??隱襁負如歸劃野疎疆奠川知正以儀鳳四年正月」 ?九日?疾薨於安東府之官舍春秋有六 震?傷?台衡怨笛四郡由之而罷市九種因之以輟耕」 詔曰懋功流賞寵命洽於生前縟禮贈終哀榮賁於身後式甄忠義豈隔存亡特進行右衛大將軍上柱國卞國公泉男生」 五部酋豪三韓英傑機神穎悟識具沈遠秘?發於鈐謀宏林申於武藝僻居荒服思?款誠去危就安允?變通之道以」 順圖逆克淸遼浿之濱美勣遐著崇章?委入典北軍承宴私於紫禁出臨東?光鎭撫於靑丘佇化折風?先危露興言」 永逝震悼良深宜增連率之班載穆追崇之典可贈使持節大都督幷汾箕嵐四州諸軍事幷州刺史餘官竝如故所司備」 禮?命贈絹布七百段米粟七百石凶事葬事所須竝宜官給務從優厚賜東園秘器差京官四品一人攝鴻?少卿監護」 儀仗鼓吹送至墓所往還五品一人持節?璽書吊祭三日不視事靈柩到日仍令五品已上赴宅寵贈之厚存歿增華哀」 送之盛古今斯絶考功累行諡曰襄公以調露元年十二月?六日壬申?於洛陽邙山之原禮也哀子衛尉寺卿獻誠夙」 奉庭訓早紆朝?拜前拜後周魯之寵旣隆知死知生吊贈之 恩?縟茹?吹棘踐霜移露痛迭微之顯傾哀負?之潛」 度?魏墳之舊漆落漢臺之後素刊翠琬而傳芳就黃?而永固其詞曰」 三岳神府十洲仙庭谷王?傑山祇孕靈?謨國緯??人經錦衣繡服議罪詳刑(其一)伊人閒出承家壘祉矯矯鳳???」 驥子?智川積懷仁岳峙州牧?刀橋翁授履(其二)消灌務擾鄒盧寄沈文樞執柄武轄操鈐荊樹?起蘆川?沈旣傷反袂」 且恨移衾(其三)肅影麟洲輸誠 鳳闕朝命光寵 天威吊伐殄寇瞻星行」 師計月夷舞歸獻凱哥還謁(其四)彎弧對泣叫?祈帝遽徙秋?復開春??玉高?銜珠近衛寶劍舒蓮香車?桂(其五)輕軒出撫重錦晨遊抑揚?穴」 堤封亶洲贍威仰惠望景思柔始?來軸俄慌去?(其六)劍革勤王聞?悼 ?九原容衛三河兵士南望少室北臨太史海」 就泉通山隨墓起(其七)霜露年積春秋日居墳圓月滿野曠風疎幽壤勒頌貞珉?書千齡暐曄一代丘墟(其八)」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 해석자: 박한제 대당(大唐)의 고(故) 특진(特進),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 겸(兼) 검교우우림군(檢校右羽林軍) 장내공봉(仗內供奉),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 증병주대도독(贈幷州大都督)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중서시랑(中書侍郞), 겸(兼) 검교상왕부(檢校相王府) 사마(司馬) 왕덕진(王德眞)이 찬(撰)하고, 조의대부(朝議大夫), 행사훈랑중(行司勳郞中), 상기도위(上騎都尉), 발해현개국남(渤海縣開國男) 구양통(歐陽通)이 서(書)하다. 대저 돌에 담긴 무지개 빛(보석)이면 흙에 따라 산을 빛나게 하고, 물결에 잠긴 진주조개 빛깔 또한 냇물에 의하여 물을 곱게 하나니, 붉은 궁궐문 밀어 열고 보라색 수레덮개로 올라왔네. 오랜 등휘(騰輝 : 가문의 빛나는 전통?) 화헌(華軒 : 貴人의 수레)보다 열 수레 뛰어넘고, 덧보태어진 표가(表價 : 泉男生 當代의 역할 중요성?) 좋은 땅(혹은 변두리 땅?) 다섯 성(城)을 나누었도다. 게다가 동방성차(東方星次)의 각(角)과 저(?) 두 별이 좋은 별자리 그 자리에 떨어지고, 뒤덮은 파란 바다 명산(名山)의 기색(氣色)에 감응(感應)하구나. 유순(柔順)한 경지(境地)로 발돋움하여 군자(君子)의 근원(根源) 그 실마리를 마련하였으니, 제기(祭器 : 禮儀)를 안고 율려(律呂)를 엿보고 금수(錦繡 : 아름다운 뜻?)를 품어 낭묘(廊廟 : 正殿, 政事를 하는 곳)에 올랐네. 뿌리를 옮겨 구렁에 자리 잡으니 대하(大廈)의 훌륭한 재목되고, 직(職)을 바꾸어 궁중(宮中)으로 들어오니 큰 장군(將軍)의 절기(切寄 : 빼어난 資質?)를 받들도다. 아아, 좋은 보배와 (그것을 싼) 천촉(薦??), 좋은 구슬과 (그것을 묶은) 관(棺) 끈을 어떻게 똑같이 이야기할까? 변국공(卞國公)에게서 이것이 드러나는구나! 공(公)의 성(姓)은 천(泉)이며 휘(諱)는 남생(男生)이고 자(字)는 원덕(元德)으로서, 요동군(遼東郡) 평양성(平壤城) 사람이다.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원래 천(泉)에서 생겨나왔으니, 이미 신(神)에 의탁하여 퇴지(?祉?)하였으므로 마침내 생겨난 데에 따라 그 족(族)을 불렀다. 마치 봉(鳳)이 단혈(丹穴)에서 나서 아홉 가지 색깔의 깃털에 기묘한 무늬를 드러내고, 학(鶴)이 청전(靑田)에서 나와 천년(千年)동안 신령스러운 모습을 지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공상(空桑?)이 의(懿)를 낳고 허죽(虛竹)이 파(波)를 따르듯이 (?光의 고사가 있을 것 같으나 未詳) 아울러 하늘의 정기(精氣)를 받아 인걸(人傑)을 드러내어 뽑아 결국 홍원(洪源)으로 하여금 끌어당겨 그 모습이 금구(金樞 : 군주의 大權?)를 가리고(혹은 적시고?), 일찍이 집을 넓혀 그 세(勢)가 경함(瓊檻 : 군주의 영화를 의미?, 典故 未詳)에 이르렀던 것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자유(子遊)이며 조부(祖父)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부(父)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었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軍權)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자(資 : 바탕?)이었고, 봉래산(蓬萊山)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光)의 임무를 가졌다. 공(公)은 선조(先祖)로부터의 물려받음으로 경사(慶事)를 이어 그 변책(弁? : 신분?)이 왕공(王公 : ?)의 후손과 같았고, 조상(祖上)의 덕택으로 영화(榮華)를 계속 누려 그 패추(沛鄒 : 벼슬?)가 순령(荀令?)의 아들과 같았다. 더벅머리 어릴 때 장난이 없었고, 북상투한 젊었을 때는 무리짓지 않았다. 좋은 수레를 타고 가면 거리에서 옥수(玉粹)를 빛내었으며, 도겸(陶謙)의 비단을 이어서 마을에서 주도(珠韜)를 밝혔다(?). 마음 속의 생각은 산랑(散朗)하고 뚜렷한 긍지가 굉장히 컸으므로, 넓고 뛰어남이 물의(物議)를 빚어내지 않았으며 통분(通分?)이 때와 기회에 막히지 않았다. 서(書)와 검(劍)을 쌍전(雙傳)하여 제자(提蔗?)와 절포(截蒲?)가 모두 묘(妙)하였고(정확한 의미 미상), 금(琴)과 기(碁)를 양완(兩翫)하여 안행(雁行)과 학렬(鶴??)이 함께 기울었다(?). 인(仁)에 바탕하여 용(勇)을 이룸으로써 갑작스러운(?) 빠른 번개를 잠재웠으며, 신(信)을 안고 진심으로 함으로써 우착(禹鑿 : 黃河?)에서의 놀란 파도를 다스렸다. 천경(天經)이 다하지 않으니 가르침이 이에 생겼고, 왕도(王道)가 무사(無私)하니 충(忠)이 훌륭한 덕(德)으로 되었던 것이다. 만경(萬頃)의 맑은 호수에서 노니는 이는 그 깊이를 잴 수가 없고, 구인(九?)의 바깥담에서 말하는 이가 그 집(의 규모)를 헤아릴 수 없다. 나이 9살이 되자 선인(先人)의 지위를 주었다. 아버지가 낭(郞)으로 임용하여 바로 입진지변(入榛之辯)을 토(吐)하였고(?), 하늘의 교묘함을 대신하여 바야흐로 결애지영(結艾之榮)을 올렸다(?). 15세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주었고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을 주었으며,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고쳐 임용하였고 24세에 나머지 관직(官職)은 그대로 하면서 장군(將軍)을 겸하게 하였다. 28세에 막리지(莫離支)로 임용하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여 주더니, 32세 때 태막리지(太莫離支)로 더하여 군국(軍國)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首 : 阿衡은 재상, 元首는 軍師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선조(先祖)의 유업(遺業)을 이으니 선비들의 마음(?)이 열복(悅服)하였으며, 위태로운 나라의 권력을 잡아 사람들의 논란이 없었다. 이때 당(唐) 천자(天子)의 치세는 문치(文治)를 위주로 하여(?) 호시(?矢 : ?는 화살, 전쟁의 의미?)는 건기(?期 : ?은 縮과 통하니, 짧았다는 의미?)하였다. (그런데 당시) 공(公)은 형제간의 정(情)을 살펴보아 안으로 없애기 어려운 잡풀이 있었고, 나라의 근본을 세우려 함에 밖으로 엎어지려는 나무가 있었으니, 마침내 도해지빈(桃海之濱?)으로 하여금 예양(禮讓)에서 8조(八條)의 가르침이 어그러지게 하였고, 소장(蕭墻 : 담장 혹은 君臣間의 가까운 장소?) 안에서는 간과(干戈)에 사우(四羽)가 떨어지게 하였다(?). (따라서) 공(公)은 내심 내관(內款)을 생각하였으나 일이 중앙에서 집권적으로 되지 않아(?), 바야흐로 나가 변경(邊境)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달래려고 하여 밖으로 황전(荒甸 : 邊方?)을 순정(巡征)하였으니, (고)조선((古)朝鮮)의 옛 땅을 다스려 동방(東方)을 통치하는 새로운 관직(官職)을 (唐에) 요청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外征의 틈을 타서) 두 아우 천남산(泉男産)과 천남건(泉男建)은 하루아침에 흉패(兇悖)하여져서 능히 무친(無親)의 차마 못할 짓을 하여 병사를 내어 안에서 저항하였다. 금환(金環 : 금팔찌, 어린?) 유자(幼子)는 갑자기 살륙당하였고, 옥선(玉膳 : 좋은 요리?)과 장연(長筵 : 좋은 자리?)는 머쟎아 고복(顧復 : 부모가 자식을 보살핌?)을 사(辭)하였다(이상의 구체적 의미는 未詳). 공(公)은 형제간의 관계가 소원함으로써 눈물을 머금고 격문(檄文)을 사방으로 보내니 동맹(同盟) 세력이 많이 모여 마침내 단단한 각오로 창을 들었다. 장차 평양을 함락시켜 악(惡)의 근원을 사로잡으려고, 먼저 오골(烏骨)의 교외에 이르러 곧 슬견(瑟堅)의 누(壘)를 깨뜨리려 하여, 그 도둑질을 밝히며 북을 울리면서 나아갔다. 이에 대형(大兄) 불덕(弗德) 등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고 입조(入朝)하여 그 일들을 알리려 하였는데 마침 이반(離反)이 있어 불덕(弗德)은 (그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공(公)은 이로 인하여 요동(遼東)으로 깃발을 돌려 군사를 해북(海北?)으로 옮기고, 그 마음을 천자의 궁궐로 달려 현토성(玄?城)에서 수신(修身)하면서, 다시 대형(大兄) 염유(?有)를 보내 정성(精誠)스러운 효명(效命)을 거듭 알렸다. 광림(曠林)에 쌓인 형제간의 원망(怨望)에서 먼저 알백(閼伯)의 창을 찾으니, 홍지(洪池)가 가까이에서 노닐며 어찌 우숙(虞叔)의 칼을 탐내겠는가? 황제께서 청구(靑丘)를 밝혀 보시어, 그 (泉男生의) 진실한 간절함을 헤아리시며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의 죄를 살피시고, 번개와 천둥 같은 위엄을 내셨다. 환산(丸山)에 아직 새기지 않았으나 득래(得來)는 먼저 깨달음을 드러내시고, 양수(梁水)에 재앙이 없지만 중모(仲謀)는 그것이 반드시 망하리라고 걱정하였음과 같은 것이다(唐의 올바르고도 빠른 조처를 말하는 듯하나, 典故 未詳). 건봉(乾封) 원년(元年 ; 666) 공(公)은 또 아들 헌성(獻誠)을 입조(入朝)시켰다. 황제가 가상(嘉賞)히 여겨 멀리서 공(公)에게 특진(特進), 예전과 같은 태대형(太大兄), 평양도행군대총관겸사지절안무대사(平壤道行軍大摠管兼使持節按撫大使)를 배수(拜授)하여, 본래 번병(蕃兵)을 거느리고 대총관(大摠管) 계필하력(契苾何力) 등과 함께 경략(經略)을 책임지게 하였다. 공(公)은 국내(國內) 등 6성(城)의 10여 만호(萬戶)의 서적(書籍)과 원문(轅門 : 陣, 軍師의 의미?)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목저(木底) 등 3성(城)이 교화(敎化)를 바라 정성(精誠)을 함께 하니, (唐에 저항하던) 조무래기들은 위태로와지고 날로 달로 궁박해졌다. 건봉(乾封) 2년(667) 칙(勅)을 받들어(?) 공(公)에게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 668) 사지절요동대총관(使持節遼東大都督), 상주국(上柱國), 현토군개국공(玄?郡開國公)으로 식읍 2,000호(戶)를 주고 나머지 관직은 예전대로 하였다. 소맥(小貊)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지만 바야흐로 소연(巢燕)의 막(幕 : 고유명사 혹은 제비둥지 같이 작은 적의 군영?)이 뒤집어지려 할 때, (唐의) 천자(?)의 명이 있어 개마(蓋馬)의 영(營 : 고유명사 혹은 큰 아군의 군영?)으로 되돌아왔다. 그해 가을 칙을 받들어 사공(司空),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과 함께 서로 경략(經略)을 책임지고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같이 내쳐서 막바로 평양성(平壤城)에 다다르니, 앞에서 노래부르고 뒤에서 춤추며 멀리 높은 성벽의 성가퀴를 깨뜨렸다(?). 공은 죄인을 벌하여 백성들을 위로한다고 해서 (오히려) 피로 땅을 물들일 일을 안타깝게 여겨 몰래 은밀히 계략을 꾸며 그 기름진 땅을 구제하려 하였으니, 마침내 승려(僧侶) 신성(信誠) 등과 안팎으로 상응하였다. 조성(趙城)을 함락시켜 깃발을 빼앗았는데 어찌 한신(韓信)의 군대를 수고롭게 할 것인가? 업의 성문을 밀어제낀 것은 원담(袁譚)의 장수(將帥)들이 스스로 초래하였던 일인 것이다(?). (평양성이 저절로 함락되자) 그 왕 보장(寶藏)과 (천)남건((泉)男建) 등이 다 포로가 되었으며, (高句麗의) 높은 산과 깊은 바다가 함께 (唐의) 경계로 들어왔고, 5부(五部)와 삼한(三韓)이 모두 신첩(臣妾)이 되었다. 결국 능히 의(義)를 세우고 은혜를 끊음은 정백(鄭伯)이 준걸(儁傑)을 얻었던 것과 같았으며(?), 화(禍)를 도리어 복(福)으로 만든 것이 기자(箕子)가 공(功)을 이루었던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 해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 등과 함께 서울로 개선하여 들어오니, 공훈을 기록하고 마땅한 의식을 행하였다. 승리를 아뢰는 날 남건(男建)을 바로 주살(誅殺)하려 했으나, 공은 안으로 (형제의) 천륜(天倫(을 절실히 느끼고 겹으로 된 궁궐문에 와서 채숙(蔡叔)의 예를 살필 것을 청하여(이 단락은 未詳), 상(上 : 하늘?)이 감동하고 황제께서 살피시어 관대한 처벌로 하여 (男建을) 공공(共工)(의 예)처럼 유배하였다. (이와 같은) 형제간 우애의 지극함으로 조야(朝野)에서 이것을 높이 여겼다. 그해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을 제수(除授)하고, 변국공(卞國公)으로 진봉(進封)하여 식읍(食邑) 3,000호(戶)를 주었으며, 특진(特進)과 훈관(勳官)은 예전처럼 하되 검교우우림군(檢校右羽林軍)으로써 장내공봉(仗內供奉)하도록 하였다. (천자가) 예를 낮추어 우대하였고(?) 고관(高官)으로 임용하였으니, (公은) 귀인(貴人)으로서 ‘중황지서(中黃之瑞)’(관료들?)를 모아 화합하게 하였고 근위(近衛)로서 천자의 자리를 빛나게 하였다. (公이) 천자의 곁에서 받들었고 주위에서 바빴으니, (천자의) 은총의 높음은 뒤질 바가 없었으며 진심으로 의지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의봉(儀鳳) 2년(677) 칙을 받들어 요동을 안무(按撫)하여 주현(州縣)을 개치(改置)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救恤)하여 그 아픔을 덜어주었는데, 강부(襁負)하여 돌아와 의지하는 이들이 들을 메웠고(?) 강역(疆域)을 소통하여 경계를 정함에 올바름을 알게 되었다(?). 의봉(儀鳳) 4년(679) 정월 29일 (公이) 병을 얻어 안동부(安東府)의 관사(官舍)에서 돌아가시니, 춘추(春秋) 46세였다. 진의(震? : 天子?)는 북소리를 마음 아파하고 삼공(三公)과 재상(宰相)이 피리 소리를 원통해 하였으며, 4군(四郡 :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未詳, 옛 고구려와 관련?)은 이로 인하여 파시하고 아홉 종족(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시 未詳)들이 이로 인하여 농사일을 그만두었다. 조(詔)에서 말하기를 “많은 공(功)에 넘치는 상(賞)으로 생전(生前)에 총명(寵命)이 두루 있었으니, 갖은 예(禮)로 추증(追贈)함으로써 슬픔과 영화가 죽은 뒤에도 커게 하라. 충의(忠義)를 드러내어 밝힘에 어찌 삶과 죽음에 차이가 있겠는가? 특진행우위대장군(特進行右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 천남생(泉男生)은 5부(五部)의 우두머리이자 삼한(三韓)의 영걸로 신묘한 기지(機智)가 영오(穎悟)하고 갖추어진 식견(識見)이 심원(深遠)하였으며, 신비한 헤아림이 계책에서 드러났고, 큰 재능이 무예(武藝)에서 펼쳤더니, 변방(邊方)에 후미지게 살면서도 진실된 정성을 바쳤도다. 위태한 상황(혹은 나라?)을 떠나 편안한 지경(혹은 나라, 곧 唐?)으로 나아가서 진실로 변통(變通)의 도(道)에 합당(合當)하였고, (唐에) 순(順)함으로써 (泉男建 등과 같이 唐에) 역(逆)함을 도모하여 능히 요패(遼浿)의 끝까지 맑게 하였다. 훌륭한 공적이 멀리서도 두드러져 높은 관직(官職?)이 맡겨졌다. 들어오면 북군(北軍 : 近衛軍?)을 책임져서 궁중에서 사거(私居)하였으며, 나가면 동쪽 끝에까지 이르러 빛남이 청구(靑丘)를 진무(鎭撫)하였다. (그런데) 교화(敎化)를 오래 기다리다가 일찍 죽음에 갑작스럽기가 아침이슬보다 앞서니, 그 죽음을 말함에 천자의 슬픔이 진실로 깊어서, 마땅히 (그에게) 연솔(連率)의 반차(班次)를 더하여 추숭(追崇)의 모범을 삼가 기록하노라(?). 가히(그러므로?) 사지절대도독(使持節大都督), 변(幷)·분(汾)·기(箕)·남(嵐)의 4주제군사(四州諸軍事), 병주자사(幷州刺史)를 추증하며,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이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을 맡은 관청에서는 예(禮)를 갖추었고, 책명(冊命)으로 견포(絹布) 700단(段)과 미속(米粟) 700석(石)을 주었으며, 상장(喪葬)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관급(官給)하?느만?, 관청에서는 은전을 베풂이 두터워 동원(東園)의 비기(秘器)를 (빌려?) 주었다. 경관(京官) 4품에 해당하는 관리 1인을 차출(差出)하여 홍려소경(鴻?少卿)의 관직을 대신하여 감호(監護)하게 하였고, 금군(禁軍)과 군악대(軍樂隊)를 묘소(墓所)에까지 보내어 돌아오게 하였으며, 5품의 관리 1인으로써 천자의 부절(符節)과 새서(璽書)를 가지고 가서 제사(祭祀?)에 조문(弔問)하도록 하였는데, (조정은) 3일 동안 일을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구(靈柩)가 이르는 날 이로 인하여 5품 이상의 관직을 가진 이들에게 그 집(묘소?)으로 가도록 하였다. 총증(寵贈)의 두터움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화(榮華)를 더하였고 애송(哀送)의 성대함은 고금(古今)에 다시 없었는데, 효공(考功)을 여러 차례 행하여 시호(諡號)하기를 양공(襄公)이라고 하였다. 조로(調露) 원년(元年 ; 679) 12월 26일 임신(壬申)에 낙양(洛陽) 망산(邙山) 땅에 하관(下棺)하니, 예(禮)에 합당하도다. 슬퍼하는 아들 위위시경(衛尉寺卿) 헌성(獻誠)은 일찍이 가정교육을 받들어 이른 나이에 관료의 인끈을 늘어뜨렸다. 관직을 받기 전이나 뒤나 주로(周魯)의 은총(?)은 이미 높았고, 지생지사(知生知死?)하여 조증(弔贈)의 은혜가 두루 많았다. 나물을 데치며 가시나무 장작을 (불을 높이려) 불고 서리를 밟아 이슬을 옮기니(일의 진행을 의미?), 갈마드는 아픔은 없어지며 더욱 기울고 짐진 슬픔은 옮겨가며 안으로 깊어진다(이 문장은 구체적 의미 未詳). 위분(魏墳)의 낡은 칠(漆)이 벗겨지니 한대(漢臺)의 밑바탕이 드러나고, 취완(翠琬)을 깎아 전하는 향기는 저승에 이르러 영원하리라(이 문장은 구체적 의미 未詳). 그 사(詞)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삼악(三岳)의 신부(神府)와 십주(十洲)의 선정(仙庭)에서 곡왕(谷王)이 걸물(傑物)을 낳고 산신령이 신령(神靈)스러운 것을 배었네. 나라의 근간(根幹)을 크게 도모(圖謀)하고 인간의 법도를 환히 밝혀, 비단 의복 차려 입고 죄형(罪刑)을 상세히 의논하였도다. 첫번째. 그 사람이 몰래 나와 집안을 잇고 복(福)을 쌓더니, 훌륭하다 봉황(鳳凰)의 아들 천리마(千里馬)의 자식. 지혜를 감추어 가짐이 천책(川積)같고 어짊을 품음은 악치(岳峙)같으니, 주목(州牧)은 칼을 받치고 교옹(橋翁)은 신을 주었네. 두번째. 소란(騷亂)을 없애는 일에 소관(消灌)하여 추로(鄒盧?)에 의지함이 깊었고, 추요(樞要)의 문관(文官)으로 권세 잡고 무직(武職)을 관할하여 요령(要領)을 쥐었도다. 형수(荊樹)에 물수리 날아오르고 노천(蘆川)에 기러기 잠기니, 슬픔을 당하여 눈물 닦으며 (형제간에) 서로 헤어짐을 한탄하였노라. 세번째. 인주(麟洲)에 숙연(肅然)한 그늘 드리우자 천자의 궁궐로 정성(精誠) 바치었고, 조명(朝命)은 은혜롭게 빛나 천위(天威)로써 정벌하였도다. 도적들을 괴멸시키며 별을 바라보니 군사를 움직인지 몇 달, 크게 춤추며 돌아와 바친 것은 개선의 노래와 보고였네. 네번째. 만호(彎弧)는 마주하여 울고 궁궐에 호소하며 황제께 기원하니, 가을날 잡풀이 갑자기 봄 산앵도나무로 다시 꽃피도다. 옥소리 울리며 높은 자리에 오르고 구슬을 머금어 천자를 근위(近衛)하여서, 보검(寶檢)을 연꽃 위에 놓고 향거(香車)를 계수나무에 매어두었다. 다섯번째. 경거(輕車)로 출무(出撫)하여 비단옷 겹쳐 입고 새벽에 나서서, 수혈(?穴)을 억양(抑揚)하고 단주(亶洲)를 다스렸다. 위엄(威嚴)을 보고 은혜(恩惠)를 바라 햇빛 바라보며 유순(柔順)해졌더니, 처음 단정히 온 수레 얼마 안있어 갑자기 떠나버렸네. 여섯번째. 검혁(劍革)으로 근왕(勤王)하였으니 북소리 들으며 슬픈 천자, 구원(九原)의 용위(容衛)는 삼하(三河)의 병사(兵士)로다. 남으로 소실(少室)을 바라보고 북으로 태사(太史)에 이르니, 바다는 샘(泉이란 姓과 유관?)으로 통하고 산(山)은 (그의) 묘소(墓所)로부터 일어나는구나. 일곱번째. 서리와 이슬은 해마다 쌓이고 세월은 날로 가는데, 둥근 무덤과 만월(滿月)에 텅 빈 들과 소소(疎疎)한 바람 있으리니. 지하(地下)에 송가(頌歌)를 새기고자 좋은 돌에 글을 묻나니, 영원히 빛나라 일대(一代)의 구허(丘墟). 여덟번째.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이 묘지의 원명은 「대당고특진천군묘지(大唐故特進泉君墓誌)」이며 전서(篆書)로 3행으로 쓰여져 있다. 묘주인 천남생(泉男生)은 고구려 연(천)개소문(淵(泉)蓋蘇文)의 장남이다. 연개소문에게는 남생(男生)·남건(男建)·남산(男産) 등 세 아들이 있었다. 그는 장자로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17년(634, 당 태종 정관(貞觀) 8년)에 나서 당 고종 의봉(儀鳳) 4년(679)에 46세의 나이로 죽었다. 『신당서(新唐書)』권110에 본전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권27 천지천황(天智天皇) 3년 10월조에 보면, 개문이 죽을 때, 그 아들들에게 “너희 형제들은 어수(魚水)와 같이 화목하여 벼슬 자리를 다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개문이 죽기 전에 이미 그의 아들 사이에는 어떤 불화의 조짐이나 가능성이 있었는지 모른다.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24년(665) 소문이 죽고 장자인 남생이 그 뒤를 이어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국정을 총리하였다. 『구당서(舊唐書)』고구려전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사후 장자 남생이 정사를 두 아우에게 맡기고 지방의 제성진(諸城鎭)을 순찰하던 중 어떤 자가 남건·남산에게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의 지위를 뺏을까 염려하여 그대들을 제거하려 하니 먼저 도모하라”고 하였다. 또 어떤 자는 남생에게 “두 아우는 형이 돌아와 정권을 뺏을까 하여 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려 한다” 하였다. 이리 하여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져 남생은 두 아우에게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을 근거로 하여 그 아들 헌성(獻誠)을 당에 보내어 원조를 청하였다. 당은 고구려의 내홍(內訌)을 호기로 삼아 남생 부자에게 관작을 주는 동시에 계필하력(契苾何力) 등 군사를 보내어 남생을 구원하게 하고 이에 이세적을 주장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 묘지는 당 고종 의봉 4년(679)에 만들어졌으며, 왕덕진(王德眞)이 찬(撰)하고, 구양통(歐陽通)이 썼다. 1921년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북교(北郊)에서 출토된 이것은 종(縱) 2척(尺) 8촌(寸) 6분(分), 횡(橫) 2척(尺) 9촌(寸)의 크기로서, 해서체(楷書體)의 47행(行), 행당 47자이다. 현재 중국 하남성(河南省) 개봉도서관(開封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묘지와 문헌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천남생의 연보는 아래와 같다. 唐 太宗 貞觀 8年(634, 高句麗 榮留王 17); 泉蓋蘇文의 長子로 출생. 貞觀 16年(642, 9세); 先人 貞觀 22年(648, 15세); 中裏小兄 高宗 永徽 2年(651, 18세); 中裏大兄 顯慶 2年(657, 24세); 兼授將軍 龍朔 元年(661, 28세); 莫離支 兼授三軍大將軍 麟德 2년(665, 32세); 太莫離支 乾鳳 元年(666, 33세); 子 獻誠 唐에 入朝, 당으로부터 ‘平壤道行軍大總管兼使持節安撫大使’로 임명되어 고구려 침략에 참여. 總章 元年(668, 35세); 使持節遼東大都督 上柱國 玄?郡開國公. 李勣과 함께 귀환하자 右衛大將軍 卞國公 食邑三千戶, 兼檢校右羽林軍 仍領仗內供奉하게 됨. 儀鳳 4年(679, 46세); 死亡. [박한제]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판독자: 박한제 大周故金紫光祿大夫行營繕大匠上護軍遼陽郡開國公泉君墓誌銘幷序」 君諱男?遼東朝鮮人也昔者東明感氣踰?川而開國朱蒙孕日臨浿水」 而開都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雖星辰海嶽莫繫於要荒而俎豆詩」 書有通於聲敎承家命氏君其後也乃高乃曾繼中裏之顯位惟祖惟?傳」 對盧之大名君斧囊象賢金冊餘慶生而敏惠勿則過人年始志學本國王」 敎小兄位年十八敎大兄位十三等之班次再擧而昇二千里之城池未冠」 能理至於烏拙使者?屬仙人雖則分掌機權固以高惟旌騎年?一加中」 裏大活?三遷位頭大兄累遷中軍主活?爲太大莫離支官以地遷寵非」 王署折風羽榮絶句驢之鄕骨籍施金寵殊玄?之域屬 唐封遠?」 漢城不守貊弓入獻?矢來王君以摠章元年襲我冠帶乃授司宰少卿仍」 加金紫光祿大夫員外置同正員昔王滿懷燕載得外臣之要遂成通漢但」 聞?帛之榮君獨?玉於藁街腰金於棘署晨?北闕閒簪筆於?龍夕宿」 南隣雜笙歌於近股象胥之籍時莫先之聖曆二年授上護軍萬歲天授三」 年封遼陽郡開國公又遷營繕監大匠員外置同正員坐闢朱門遂封靑土」 列旌?於棨戟期帶?於山河奄宅?夷遂荒徐服嗚呼蠶支啓祚蕃屛未」 勤?壑?鱗遷舟遽遠年六十三大足元年三月?七日?疾薨于私第以」 其年四月?三日葬於洛陽縣平陰鄕某所邙山有阡長沒鍾儀之恨遼水」 無極詐聞莊?之吟故國途遙?車何日鶴飛自遠令威之城郭永乖馬」 空存?公之居室長掩雖黃腸題湊與天壤而無窮而玄石紀?變陵谷而」 猶識其詞曰」 於廓靈海百川注焉東明之裔寔爲朝鮮威胡制貊通徐拒燕憑險負固厥」 古莫遷爰逮有 唐化涵東戶賓延渤綏懷水滸藍夷會同桂婁董溥」 惟彼?長襲我龜組遂榮藁街爰兮棘列甲第朝啓承明旦謁?懋象胥寵」 均龍卨遽開靑社山河內絶遼陽何許故國傷心鍾儀永恨莊?悲吟旌?」 啓戟?玉腰金鼓鍾憂眩逾憶長林留奏獨思濟洹爲咎聲明長畢佳城永」 久託體邙山遊魂遼勒銘幽石?傳不朽」 通直?寒城縣開國子泉光富年十八 長安二年四月?三日葬於洛陽縣界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해석자: 박한제 대주(大周)의 고(故)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행영선대장(行營繕大匠) 상호군(上護軍)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군(君)의 휘(諱)는 남산(男産)이니 요동(遼東) 조선인이다.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비록 성진(星辰)과 바다와 산악이 변방지역[要荒]에 걸려 있지 않았어도 예절[?豆]과 시서(詩書)는 성교(聲敎)에 통하여, 가(家)를 잇고 씨(氏)를 받았으니 군(君)은 그 후예이다. 고조(高祖)와 증조(曾祖)는 중리(中裏)의 뛰어난 지위를 이었고 조부와 부친은 대로(對盧)의 큰 이름을 전했으며 군(君)은 태어나기 전부터 현명함을 본받았고[斧囊象賢] 임금에게 책명을 받아 조상의 은덕으로 복이 넘쳤다.[金?餘慶] 태어나면서부터 영민(英敏)하고 은혜로왔고 달이 지나자 남보다 뛰어났으며[勿則過人] 돌이 되자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고구려의 왕이 소형(小兄)의 지위를 내려주었고 나이 18세에 대형(大兄)의 지위를 내려주었으며 13등의 반차(班次)를 재차 추거되어 승진해 2천리의 성지(城池)(를 받아) 성년이 되지 않아 능히 다스렸고, 오졸(烏拙), 사자(使者)와 예속(?屬), 선인(仙人)에 이르러 비록 국가기구의 권한을 분장(分掌)했으나 진실로 고유(高惟)로써 앞장을 서게 하였다.[旌騎] 나이 21세에 중리대활(中裏大活)을 가(加)하였고 23세에 위두대형(位頭大兄)으로 옮겼고 누차 옮겨 중군주활(中軍主活)이 되었으며, 30세에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가 되었다. 지역에 따라 관위(官位)를 옮기고 왕에게 총애를 받지 못하게 되어[寵非王署] 세찬 바람은 깃을 날려(?)[折風?羽] 영예가 고구려 지역에서 끊어졌고 귀한 지체가 없어져(?)[骨籍施金] 총애가 현도의 지역에서 끊어졌다. 당에 속해 원방(遠方)에 봉해져 한성(漢城)을 지키지 않음에 미쳐 맥궁(貊弓)이 입헌(入獻)되고 호시(?矢)가 왕에게 바쳐졌다. 군은 총장(摠章) 원년에 우리의 관대(冠帶:官品)에 따라 사재소경(司宰少卿)을 제수받았고 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원외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을 가하였다. 옛날 왕 만(滿)이 연을 그리워하다가 비로소 외신(外臣)의 요(要)를 얻어 마침내 한(漢)과 통함을 이루었으나 겸백(?帛)의 영예만이 들렸을 뿐이다. 군(君)은 이민족이 사는 구역(藁街)에서 옥(玉)을 울리고 극서(棘暑)에서 금(金)을 차고, 아침에 북궐(北闕)에 나아가 한가히(때때로?) 황제[龍]의 일을 보고[簪筆] 저녁에는 남린(南隣)에 머물면서 황제 곁에서[近[股]] 착잡하게 생황(笙簧)을 타면서 노래했으니 통역의[象胥] 적관(籍貫)으로 당시 이보다 앞선 이가 없었다. 성력(聖曆) 2년(699)에 상호군(上護軍)을 받았고, 만세(萬歲) 천수(天授) 3년(?)에는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에 봉해졌으며, 또 영선감대장(營繕監大匠) 원위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으로 옮겨 앉아서 주문(朱門)을 열고(호화로운 집에 살고) 마침내 청토(靑土)에 봉해졌으니, 비단으로 싼 나무창으로[棨戟] 깃발을 달아 벌려 놓고 공신의 집안이 망하지 않을 것을 기약하면서[山河] 우이(?夷)에 거처하여 마침내 제복(除服)을 황(荒)하였다.(?) 아아, 잠지(蠶支)가 공적에 보답할 길을 열었는데(?) 번병(蕃屛)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체학(?壑)이 비늘을 벗었는데 배를 옮겨타고 갑자기 멀리 가는구나(죽게되었다는 의미인 듯). 나이 63세, 대족(大足) 원년 3월 27일 사택(私宅)에서 병을 만나 죽으니 그 해 4월 23일에 낙양현 평음향(平陰鄕) 모처에 묻었다. 망산(邙山)의 무덤길에 종의(鍾儀)의 한을 길이 묻었으나 요수(遼水)는 무극하여 어찌 장작(莊?)의 신음을 듣겠으며 고국으로의 길은 멀기만 하니 상여가[?車] 어느 날이나 (돌아갈꼬)? 학(鶴)이 멀리서부터 날아오니 위엄있던 성곽이 영원히 무너지고 마렵(馬?)이 공존(空存)하니 등공(?公)의 거실은 오랫동안 가렸도다. 비록 황장(黃腸)과 제주(題湊)(를 쓰고) 황제가 사여한 흙으로[天壤] 무궁함을 빌고 현석(玄石)에 훈적(勳績)을 기록하여 능곡(陵谷)이 변하더라도 오히려 알 수 있으니 그 사(詞) 다음과 같다. 넓고 신령스러운 바다여, 백천(百川)이 모이는 곳. 동명(東明)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 호(胡)를 위혁하고 맥(貊)을 제압하였으며 서주(徐州)와 통하고 연(燕)을 막았도다. 험준함과 굳음에 의지하여 예부터 옮기지 않았는데 이에 당(에 귀속하게 됨)에 미쳐 동호(東戶)로 화했도다. 용발(溶渤)을 복종하여 인도하고 수호(水滸)를 편안히 따르게 하니 남이(藍夷)가 만나 하나가 되고 계루(桂樓)가 바로잡혀 두루 미치는구나(?). 그만이 굳건하고도 오랫동안 우리 관직을[龜組] 받고 마침내 고가(藁街)에서 영예를 누리게 되었고 아에 대신(大臣)의 반열(?)에 올랐도다. 훌륭한 저택에서 살면서 아침을 맞고 황제의 주위에서 아침마다 배알하니 훈공이 상서(象胥)로서 성대하구나. 총애가 황제에 두루하여 이에 청사(靑社)에 봉지를 받았으나 산하(山河)가 안으로 끊어져 요양(遼陽)이 어찌 허락할꼬? 고국을 그리며 마음을 상하니 종의(鍾儀)의 영원한 한(恨)과 장작(莊?)의 슬픈 신음. 비단으로 싼 나무 창으로 깃발을 달아 벌려 놓고 옥을 차고 금을 허리에 차도 종고(鐘鼓)의 깊은 근심, 추억이 깊은 숲을 넘어가고(?) 머물러 고독함을 노래해도 제수(濟水)와 원수(洹水)가 원망스럽구나. 성명(聲明)이 영원히 끝나도 가성(佳城)은 영구하여 몸을 망산에 맡기니 떠도는 혼은 멀기만 하도다.(?) 유석(幽石)에 명(銘)을 새기니 애통한 전기(傳記가 불후(不朽)하도다. 통직랑 한성형 개국자, 천광부 나이 18세. 장안 2년(702) 4월 23일 낙양현의 경계에 묻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천남산(泉男産)은 고구려 영류왕 22년(639)에 출생했다.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들이다. 형은 남생(男生)·남건(男建)이다. 보장왕 24년(665)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자, 남건과 함께 막리지가 된 장형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남생을 공격하였으나 남생의 구원요청을 받은 당(唐)의 계필하력(契苾何力)의 원군에게 저지당하였다. 그 뒤 667년 당의 침략을 받고 이듬해 나당연합군에 패하여 형 남건과 함께 당에 압송되었다. 입당 이후 형 남건은 검주(黔州)로 유배되었으나 남산은 먼저 항복한 이유로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 후 사실은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그의 이력은 이 묘지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당에서 여러 가지 관직을 역임하다가 최후로 상장군(上將軍)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 등에 봉해졌다가 당 장안(長安) 원년(701) 낙양에서 병사하였다. 이듬해 장안 2년(702) 4월 23일에 매장되었다. 그의 묘지는 1922년 낙양에서 출토되어 북경대학 원고고학실에 소장되었다. 탁편(拓片)은 장관(長寬) 모두 75cm이며, 개(蓋)는 장관(長寬) 모두 76cm, 그리고 측관(側寬) 4cm이다. 묘지는 정서체(正書體-楷書)로, 개(蓋)는 전서체(篆書體)로 쓰여져 있다. 그의 이력은 대략 다음과 같다. 高句麗 榮留王 22年(639); 출생. 寶藏王 15年(656, 18세); 中裏大兄 18年(659, 21세); 中裏大活 20年(661, 23세); 位頭大兄 27年(668, 30세); 太大莫離支 唐 高宗 總章 元年(668); 司宰少卿. 그 후 金紫光祿大夫 員外置同正員 聖歷 2年(699); 上護軍 萬歲天授 2年(?); 封遼陽郡開國公, 又遷營繕監大匠, 員外置同正員 大足 元年(701); 死亡(63세) [박한제] 고현묘지명(高玄墓誌銘) 판독자: 송기호 大周故冠軍大將軍行左豹韜衛翊府中郞將高府君墓誌銘幷序」 君諱玄字貴主遼東三韓人也昔唐家馭曆幷呑天下四方合應啓?來」 降而東夷不賓據靑海而成國公志懷雅略有先見之明棄彼遺?[從]男」 生而仰化慕斯 聖敎自東徙而來王因而家貫西京編名赤縣曾祖寶」 任本州都督祖方任平壤城刺史父廉唐朝贈泉州司馬竝三韓貴族積」 代簪纓九種名賢蟬聯冠冕公侯必復代有人焉負?鼎之雄材鬱拔山」 之壯氣有 ?□其驍勇討以遼東公誠舊人實爲?億大破平壤最以」 先鋒因之立功授宜城府左果毅都尉摠管以公智勇別奏將行關塞悚」 其餘塵石梁飮其遺箭頻蒙擢用授以官班又奉弘道元年遺 制外官」 各加一階蒙授雲麾將軍本官如故一從征討十載方還忠赤無虧?勞」 有裕至垂拱二年二月奉 ?差行爲神武軍統領三年四月大破賊徒」 ?北振其英聲燕南仰其餘烈俄而蒙授右玉鈐衛中郞將又以永昌元」 年奉 ?差令諸州簡高麗兵士其年七月又奉 ?簡洛州兵士便充」 新平道左三軍摠管征行天授元年□月九日 恩制改授左豹韜衛行」 中郞將門題鶴禁先從去病之班衛□豹韜終得廉頗之選惟公久懷壯」 節早負雄圖刻石燕然竇憲慙其遠略[鑄]銅交?馬援?以宏材旣千載」 難追百年易盡俄悲石折奄見山頹以天授元年十月卄六日?疾終於」 神都合宮之私第春秋四十有九嗟乎風燭不停?人長逝嗚呼哀哉?」 以大周天授二年 辛卯十月 朔十八日 遷?於北邙之原」 禮也泉臺杳杳終無再見之期蒿里[綿][綿]永絶□言之會歎桑田之有革」 懼陵谷之將移勒石紀功遂爲銘曰昔爲燕寶今誠漢珍大唐驍將」 隆周壯臣早從簪?傳之搢紳時稱有裕代不乏人其一肅肅勇夫昻昻詞」 □弱齡岐?北齒忠正知機其神背僞歸 聖縱橫倜?何慙去病其二出」 □絶域斬將强胡不惜身命戰必忘軀豈唯弓馬全高智謀取彼驍健拔」 朽?枯其三旋凱非遙歸鞍尙邇爪牙□佳歡娛未已俄纏固疾魂飛蒿里」 素車就駕朱旗忽起其四蒿塗寞寞泉路[悠][悠]樹悲風起山寒日收親戚慟」 哭行旅傷憂墓門一掩期以千秋其五」 □□二月」 [출전 : 「고구려 유민 고현 묘지명」『박물관연보』10(1999)] 고현묘지명(高玄墓誌銘) 해석자: 송기호 대주(大周)의 고인(故人)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행좌표도위(行左豹韜衛) 익부(翊府) 중랑장(中郞將) 고부군(高府君) 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이다. 옛날 당나라 왕실이 일어나 천하를 병탄하자 사방이 호응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투항해왔지만, 동이(東夷)는 복종하지 않고 청해(靑海)를 점거하여 나라를 유지하였다. 공(公)은 올바른 법도에 뜻을 두었고 다가올 일을 미리 아는 지혜가 있어서, 저 백성들을 버리고 천남생(泉男生)을 따라와 교화를 받들었고, 황제의 가르침을 사모하여 동쪽으로부터 귀순해오니, 서경(西京)을 본향으로 삼고 적현(赤縣)에 이름을 올렸다. 증조(曾祖)는 고보(高寶)로서 본주(本州) 도독(都督)을 지냈고, 할아버지는 고방(高方)으로 평양성(平壤城) 자사(刺史)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고렴(高廉)으로 당나라에서 천주(泉州) 사마(司馬)로 추증되었다. 모두 삼한(三韓)의 귀족으로 누대에 걸쳐 현달하였고, 동이(東夷)의 이름난 현인(賢人)으로 계속해서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이렇게 공(公)과 후(侯)가 필시 반복되는 것은 대대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리라. 공(公)은 솥을 들어 멜 정도로 굳센 재질을 지녔고, 산을 뽑아낼 만큼 장한 기운을 품었으니, 그의 용맹을 높이 사 요동(遼東)을 토벌하도록 칙명을 내렸다. 공(公)은 과연 고구려의 옛 신하로서 형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평양(平壤)을 크게 격파하는 데에 최선봉(最先鋒)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공을 세워 의성부(宜城府) 좌과의도위(左果毅都尉) 총관(摠管)에 제수되었다. 아울러 공(公)의 지혜와 용기를 사서 행군(行軍)을 주관하도록 따로 주천(奏薦)되었다. 이리하여 변방에서 그의 자취를 두려워 하였고, 그가 쏜 화살이 돌다리에 깊숙이 박혀 있으니, 여러 번 발탁되어 관직과 관품을 제수받았다. 또 홍도(弘道) 원년(683)의 유제(遺制)를 받들어 외관(外官)의 등급을 하나씩 높여주게 되자, 관직은 그대로인 채 관등만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올랐다. 한 번 정벌을 따라 나서면 10년이 되어서야 돌아와도, 충성스런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힘써 수고함에 오히려 남음이 있었다. 수공(垂拱) 2년(686) 2월에 칙명을 받들어 신무군(神武軍) 통령(統領)으로 파견되었고, 3년(687) 4월에 적(돌궐)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여 계주(?州) 북쪽에 그의 명성을 날렸고 연산(燕山) 남쪽에서 그의 업적을 우러러 보았으니, 곧이어 우옥검위(右玉鈐衛) 중랑장(中郞將)으로 제수되었다. 또 영창(永昌) 원년(689)에 칙명을 받들어 여러 주(州)에서 고구려(高句麗) 병사(兵士)를 선발하였고, 그 해 7월에는 다시 칙명을 받들어 낙주(洛州)의 병사(兵士)를 선발하였으며, 곧 신평도(新平道) 좌삼군(左三軍)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정벌에 나섰다. 천수(天授) 원년(元年)(690) □월 9일에 제서(制書)의 은택(恩澤)을 받아 좌표도(左豹韜) 행중랑장(行中郞將)으로 다시 제수되었다. 그의 집안은 왕실 가문이었으니 먼저 곽거병(?去病)의 반열을 따른 것이요, 벼슬은 표도위(豹韜衛)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염파(廉頗)가 조(趙)나라에서 등용된 것과 같음이로다. 생각컨대, 공은 오랫동안 장한 절개를 품었고 일찍이 웅대한 계책을 짊어졌구나. 두헌(竇憲)이 연연산(燕然山)에 공적을 새겼어도 그의 원대한 방략에 수치를 느꼈고, 마원(馬援)이 교지(交?)의 동고(銅鼓)를 녹였어도 그의 크나큰 재주에 부끄러워 하였다. 이미 천년이 되어도 뒤따르기 어려운 공적을 세웠으니 백년이 지난들 쉽게 사라지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돌이 부러지는 슬픔을 맛보게 되었고, 홀연히 태산(泰山)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도다. 천수(天授) 원년(元年)(690) 10월 26일에 병을 얻어 신도(神都) 합궁현(合宮縣)에 있는 자택에서 운명하니 이 때 나이 49세였다. 아, 덧없는 인생은 머물지 않아 현명한 사람이 멀리 떠나버리니, 슬프고 슬프구나. 대주(大周) 천수(天授) 2년(691) 신묘년(辛卯年) 10월 18일에 북망산(北邙山) 언덕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 무덤 속이 어둡고 깊으니 마침내 다시 볼 기약이 없고, 상여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니 다시(?) 말할 기회가 영원히 사라졌구나.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것을 탄식하고,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뀔 것을 두려워 하여, 돌에 공적을 새겨 명(銘)으로 삼고자 한다. 옛날에 연(燕)의 보배가 되었다가 이제 진실로 한(漢)의 보물이 되었구나. 대당(大唐)의 날랜 장수였고 무주(武周)의 장한 신하였도다.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도다. 넉넉함이 있다고 칭송되니 대대로 인재가 끊이지 않았도다. 이것이 첫째이다. 엄정하고 공경스럽도다 용맹스런 장부여, 높고 뛰어나도다 훌륭한 문장(?)이여. 어릴 때부터 특출나게 뛰어나더니 북방에서 충성스러움과 올바름으로 드날렸도다. 귀신과 같이 사물의 기미를 미리 알아차려 거짓을 버리고 천자(天子)께 귀순하였도다. 종횡으로 기개를 떨치니 어찌 곽거병(?去病)을 부끄러워 하겠는가. 이것이 둘째이다. 멀리 떨어진 변방에 출정하여 강한 오랑캐 장수들을 목베었도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전장에 나가서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구나. 어찌 활과 말뿐이겠는가 높은 지략(智略)의 덕택이라. 그에게서 용맹과 강건함을 취하는 것은 썩거나 마른 나무를 꺾어내는 것만큼 쉬운 일이로다. 이것이 셋째이다. 개선한 지 오래지 않았고, 전장에서 돌아온 말이 아직 가까이에 있구나. 옆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아직(?) 아름답고, 즐거움도 미처 그치지 않았도다. 갑자기 고질병에 걸려 혼백이 무덤 위에 날게 되었구나. 흰 수레 나아가고 붉은 깃발 홀연히 세웠도다. 이것이 넷째이다. 무덤 길 쓸쓸하고 저승 길 아득하구나. 나무는 비통해하고 바람이 이는데 산은 차갑고 날이 저무는도다. 친척들이 구슬피 우니 나그네도 슬퍼하는구나. 한 번 무덤 문이 닫히니 천년으로 기약하도다. 이것이 다섯째이다. 신묘(辛卯)(?) 2월. [출전 : 「고구려 유민 고현 묘지명」『박물관연보』10, 서울대(1999)] 중국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墓誌銘; 묘지명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묘지(墓誌)는 사망한 사람의 행장을 새기거나 써서 무덤 속에 넣은 것을 가리키고, 묘비(墓碑)는 지상에 세워 놓은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문장은 대체로 정해진 격식이 있어서 앞부분에 산문체로 된 서문(序文)이 놓이고 운문체로 된 명문(銘文)이 그 뒤를 따른다. 이렇게 서문과 명문으로 이루어진 묘지 또는 묘비의 문장을 묘지명(墓誌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뒤의 명문만을 특정하여 묘지명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고현 묘지의 첫머리에 나오는 ‘묘지명 및 서문’이라 하였을 때에는 후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필자가 이 글에서 사용하고 있는 묘지명이란 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근래에는 이러한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으로는 6개가 있는데, 고자(高慈)·고진(高震)과 함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후손들인 천남생(泉男生)·천남산(泉男産)·천헌성(泉獻誠)·천비(泉毖)의 것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전부는 아닐 것이고, 앞으로도 새로운 묘지명이 알려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묘지명이 1980년대 이래로 중국과 대만에서 책으로 엮어 출간되어 왔는데, 이 가운데 당나라 때의 묘지명이 포함된 것만 해도 여러 종류가 된다.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것만 해도 다음과 같다. 『石刻史料新編』, 新文豊出版社, 臺北, 1982(1987, 法仁文化社 영인). 毛漢光 撰, 『唐代墓誌彙編附考』1-계속,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 專刊 81, 臺北, 1984-계속. 李希泌, 『曲石精廬藏唐墓誌』, 齊魯書社, 1986. 北京圖書館金石組 編, 『北京圖書館藏中國歷代石刻拓本匯編』, 中州古籍出版社, 1989. 河南省文物硏究所·河南省洛陽地區文物處 編, 『千唐誌齋藏誌』上·下, 文物出版社, 北京, 1989. 洛陽市文物工作隊, 『洛陽出土歷代墓誌輯繩』, 中國社會科學院出版社, 1991. 周紹良 主編, 『唐代墓誌彙編』上·下, 上海古籍出版社, 1992. 中國文物硏究所·河南文物硏究所 編, 『新中國出土墓誌』, 河南(壹) 上·下, 文物出版社, 1994. 이러한 책들 덕택으로 흑치상지(黑齒常之)와 그의 아들 흑치준(黑齒俊)의 묘지명이 국내에 알려져 백제사 해명에 많은 도움을 준 바 있다.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고현(高玄; 642-690)의 묘지명도 이번에 새롭게 국내에 소개되는 것이므로, 이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은 모두 7 개로 늘어났다. |
첫댓글 이런 보다 전문적인 내용은 우리 까페의 귀한 자산 입니다.
조국이 망해서 비운의 주인공을 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