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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학교 역대 교장[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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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종합대학 연희대학교로 발족, 국내 최초로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출처 필요]
연희대학교 역대 교장[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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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교가 합쳐지면서 연세대학교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연세대학교 역대 총장[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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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영어강의로 진행되는 언더우드 국제대학(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국제대학의 학생 수를 늘려 가고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영어 강의 비율이나 외국인 교수/학생 비율을 높이려 하고 있다.
언더우드국제대학은 지난 2006년 설립 이후 국·내외 학생을 유치하고 있다. 특히 엄격한 학사 관리와 차별화된 교육으로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지에서 아시아의 대표적인 영어 전용 단과대학으로 소개되기도 했었다.[7] 2009학년도 1학기를 마치고 방학중에 언더우드국제대학의 송도캠퍼스 이전계획이 발표되었다.
연세대학교의 건물들은 대부분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때문에 석조양식 등 당시의 건축학적 경향을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언더우드는 1915년 종로에 있던 기독교청년회관(YMCA) 구내에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하였으며, 이 학교는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되었다. 언더우드의 큰아버지인 존 티 언더우드(J. T. Underwood)는 10만 달러를, 로스앤젤레스의 스팀슨(Charles S. M. Stimson)은 대학 설립용 자금으로 25,000달러를 이 학교에 기부하였다. 언더우드는 미국에 돌아가서 항구적인 교사 건립용 기부금 모금을 했는데, 스팀슨에게서 위 기부금을 얻은 후 세상을 떠났으며, 후임 교장인 에비슨(Oliver R. Avison)이 이 기부금으로 교사를 건립하였다.
연희전문학교는 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의 숲이 울창한 토지 190,320평을 매입하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연희궁(延禧宮) 터였으며, 학교명 ‘연희’는 여기서 연유하였다.
캠퍼스 마스터플랜과 교사동 설계는 재미 건축가인 머피(Henry Killian Murphy)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머피는 1877년 미국 코네티컷 주 뉴 헤븐에서 태어나 1899년 예일 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그후 뉴욕에서 건축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하다가 1906년에 독립하였다. 1908년 다나(Richard Henry Dana) 2세와 함께 ‘머피ㆍ다나건축사무소’를 개업하였고, 1920년부터는 ‘머피ㆍ마가길ㆍ함린사무소’를 경영하였으며 1924년부터는 단독 건축사무소를 운영하였다. 그는 1913년 12월 36세에 동양에 정착해 일본·중국·필리핀·한국에서 건축활동을 했으며, 주로 미션계 대학건축을 설계했다.
그가 연희전문학교 캠퍼스와 교사동을 설계한 시점은 ‘머피ㆍ다나건축사무소’를 운영할 때로 추정된다. 현재의 백양로 등 연세대 캠퍼스의 골격은 초기 마스터플랜에 의해 조성되었다. 최초의 건물은 치원관(致遠館)이었다. 이 건물은 목조 2층으로 1918년 준공되어 1950년까지 있었다.
최초의 석조 교사동은 본관으로 스팀슨관으로 명명되었다. 이 명칭은 기부금을 낸 스팀슨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건물의 공사 감독자는 이 학교의 화학과 교수인 밀러(E. H. Miller)였다. 이 건물은 1919년 4월 착공하여 1920년 8월 준공되었으며, 지상 2층, 반지하층으로 건축면적 435.5㎡(131.74평)의 규모였다.
단순한 장방형 평면에 중복도식(中複道式)이며, 중앙에 주 출입구를 두고 그 맞은편에 계단실을 두었다. 외벽은 넓은 창과 장식이 없는 석조 외벽으로 단순한 외관으로 처리되었다. 주 외장 재료는 거친 마감 운모편암석이며, 창문 테두리는 다듬은 화강암을 썼다. 베이 윈도우(bay window, 1칸 크기의 돌출된 창)가 중앙탑 2층과 좌우 측면 1ㆍ2층에 설치되었다. 주 출입구 1층에는 튜더 아치(tudor arch)를 사용하였다. 지붕은 박공지붕에 슬레이트 마감하였으며, 목조 트러스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때 대학캠퍼스 건물은 대부분 석조, 고딕풍의 건축이었다. 이러한 건물들의 최초 건물이 바로 이 스팀슨관이다. 즉, 이 건물은 연희전문학교 캠퍼스 내의 최초 석조건물이면서, 이후에 건설되는 다른 대학캠퍼스 건물의 첫 참고 사례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아펜젤러관은 언더우드(Underwood)와 함께 내한한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 G. Appenzeller)를 기념하기 위하여 명명되었다. 아펜젤러는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로서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는 등 교육과 선교사업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건물공사비는 미국 메사추세츠 주 피츠필드 시에 있는 제일감리교회(First Methodist Church)의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고 하는데, 미국 감리교계에서 지원된 것이다.
아펜젤러관은 이학관(理學館)으로 연희전문캠퍼스에서 두번째로 건립된 석조 건물로, 1921년 10월 착공되어 1924년 가을에 준공되었다. 현재는 대학본부 사무동으로 사용되고 있다. 설계자는 머피(H. K. Murphy)이며, 공사 감독관은 화학과 교수인 밀러(E. H. Miller)였다.
이 건물은 지상 2층, 지하 1층, 건축면적 425㎡(128.56평)의 규모로, 맞은편에 있는 스팀슨관과 유사한 규모와 형태이다. 내부 공간은 엄격히 좌우 대칭이며 중복도형(中複道形)이다. 정면 중앙의 출입구는 튜더 아치(Tudor arch)이다. 창 테두리들은 다듬은 화강석으로 마감하였다. 지붕은 박공지붕이며, 슬레이트 마감이다. 다만 정면 중앙 출입구는 1층 높이에 페디먼트(pediment)를 설치하였고, 정면 양측에 베이 윈도우(bay window) 형태의 매스를 붙였다.
언더우드관의 명칭은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 G.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를 기념하기 위하여 명명되었다. 그는 1885년 내한하여 1915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하는 등 헌신적으로 선교와 교육사업을 하다가 신병으로 미국으로 귀국하여 1916년에 별세하였다. 이 건물은 학관(學館)으로 일명 문학관이라 한다. 연희캠퍼스에서 스팀슨관·아펜젤러관에 이어 3번째 석조건물이다. 연희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인 에비슨(O. R. Avison)은 언더우드의 아들인 원한경(元漢慶)으로 하여금 초석을 놓게 했다.
설계자는 머피(H. K. Murphy)이며, 공사 감독관은 화학과 교수인 밀러(E. H. Miller)였다. 이 건물은 스팀슨관이 준공되고 나서 1921년 10월 착공하여, 1925년 6월 준공하였는데, 지상 3층(중앙탑 5층), 건축면적 693.4㎡(209.63평) 규모였다.
이 건물은 초기 마스터플랜 상의 중심축인 백양로의 종점에 위치하여 그 좌우에 스팀슨관과 아펜젤러관이 같이 있어, 캠퍼스 내에서 시각적 정점(terminal vista)을 형성한다. 그 전면에는 미국(米國)의 ‘米’(미)자 형으로 구획된 잔디가 깔려 있다.
전체적인 건축 특징은 스팀슨관과 유사하다. 좌우대칭의 단순한 장방형 평면으로, 백양로 축상에 5층 높이의 중앙탑을 일치시키고 전면 좌우 측에 베이 윈도우(bay window)를 설치하여 기념성을 높였다. 외벽은 넓은 창과 장식이 없는 석조 외벽으로 단순한 외관으로 처리되었다. 주 외장 재료는 주변 산에서 채취한 흑록색(黑綠色) 운모편암석으로 거친 마감상태로 사용되었다. 창문 테두리는 다듬은 화강암을 썼다. 주 출입구 1층에는 튜더 아치(tudor arch)를 사용하였다. 지붕은 박공지붕에 슬레이트 마감하였으며, 목조트러스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1950년 한국 전쟁때 소실되어 내부와 지붕부가 크게 파괴되었으며, 전후 복구되었다. 이 건물은 20세기 초기의 대표적인 대학 캠퍼스인 연희전문학교 캠퍼스의 중심건물이면서 그 보존 상태가 우수하여 역사적 가치가 크다.
본 문서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지식공유 프로젝트를 통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저작물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년 봄마다 '대동제'라고 하는 축전이 열린다. 진달래 노래제, 민중장터, 아카라카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는데 그 중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리는 '아카라카를 온누리에'는 유명 가수들의 초청과 응원단이 이끄는 응원으로 구성된다.
연고전(延高戰)또는 고연전(高延戰)은 광의로는 스포츠, 과학기술, 온라인게임경기 등 모든 분야에서 고려대학교와 승부를 겨루는 행사 일체를 의미하며, 협의로는 매년 가을 고려대학교와 우호를 다지기 위해 개최하는 5개 스포츠 종목의 정기친선경기대회(정기 연고전)를 의미한다. 대학리그 등 정기 연고전 이외의 체육경기에서 고려대학교와 우연히 승부를 겨루게 되는 경우를 특별히 "비정기 연고전"이라고 칭한다.
연고전의 기원은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가 처음으로 맞붙었던 1925년 전조선(全朝鮮) 정구대회 전문부 제1회전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 때에는 응원의 열기가 높지 않았으므로, 양교의 실질적인 첫 전면시합은 1927년 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된 제8회 전조선 축구대회 준결승으로 본다. 이때부터 양교는 1942년까지 조선 축구 정상을 놓고 뜨거운 경쟁을 벌여 14승 14패의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이때에는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앞글자를 따서 "연보전"으로 통칭되었으나, 1946년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개칭한 이후에는 "연고전" 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처럼 양교가 매년 직접 주최하는 정기친선경기대회(정기전)의 시초는, 1945년 "제1회 보연 OB 축구대회"로 볼 수 있다. 이듬해인 1946년부터는 축구와 농구의 재학생 간 정기전이 매년 열리게 되었고, 1956년에는 야구, 럭비, 빙구의 세 종목이 추가되었다. 1965년부터는 이틀 동안 다섯 경기가 일제히 치러지는 지금과 같은 경기방식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정기전은 연고 양교가 매년 번갈아 주관하는데, 정기전의 정식 명칭은 매년 주최대학 이름을 뒤에 붙이는 방식으로 번갈아 정한다. 즉, 해당 연도에 고려대학교가 주최 및 주관을 하게 되면, "연세대학교 대 고려대학교 정기친선경기대회(정기 연고전)"가 되고, 연세대학교가 주최 및 주관을 하게 되면 "고려대학교 대 연세대학교 정기친선경기대회(정기 고연전)"가 된다. 그러나 정식 명칭은 실질적으로 방송 중계나 신문 보도 등의 공식 석상에만 사용될 뿐이며, 고려대학교에서는 고연전, 연세대학교에서는 연고전이라고 통칭한다.
현재 연세대학교의 단과대학은 모두 19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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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게이오기주쿠 대학 등 세계 59개국의 578개교와 학술 교류 협정을 맺었다.
더 많은 동문은 분류:연세대학교 동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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