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과 흔히 혼용하여 쓰고 있거나, 함께 쓰고 있는 것으로 인연(因緣)이란 말이 있는데, 사실 연기는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줄인 말이다. 인과 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연기법인 것이다.
여기에서 ‘인’은 결과를 발생케 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의미하고, ‘연’은 간접적이며 보조적인 원인을 뜻한다. 그래서 인은 직접적이고 연은 간접적이라는 뜻으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식물에서 본다면 식물의 직접원인인 ‘인’은 씨앗이 될 것이고, 간접적인 원인인 ‘연’은 거름과 흙과 태양과 공기와 물과 농부의 노력 등 식물을 싹틔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간접적인 일체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떤 한 존재가 생겨나는데는 그것이 아무리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한 가지 원인만을 가지고 생겨날 수는 없으며, 인과 함께 수많은 보조적이고 간접적인 연들이 무수하게 도움을 주어야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과 연이 화합한다고 해서 인연화합이라고 한다.
식물 하나를 싹틔우고 꽃피우는데 만도 이 우주의 지수화풍의 모든 요소와 태양과 바람과 구름과 모든 멀고 가까운 온갖 조건과 원인들이 수도 없이 많은 보조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이라는 것은 다만 몇몇가지 간접 원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성시키는데 도움을 준 일체 모든 것들의 크고 작은 모든 원인을 의미하며, 나아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식물 한 그루를 싹틔우는 보조적인 연으로써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 모든 생겨난 것은 인연화합의 이치를 따른다. 앞의 연기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들은 저홀로 독자적으로 생겼거나,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원인에 의해 한 가지 결과가 도출한다는 직선적이고 단일적인 인과가 아니라 인연법에서 보듯이 인과 연의 무수한 원인과 조건들이 조화를 이루어 화합하였을 때 결국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인연법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인과 연이라는 것이 확정적으로 어떤 것이 ‘인’이고, 어떤 것이 ‘연’이라고 딱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또한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에 따라, 시간과 공간적인 차이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과 연이 바뀔 수도 있다.
인연법에서 중요한 것은 결정론적으로 ‘인’이 무엇이고, ‘연’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생겨나는 것들은 그 생성과 소멸에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들이 무한하게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연계되면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인연화합의 가장 대표적인 경전의 비유는 우유와 치즈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우유를 발효하여 치즈를 만든다고 했을 때 우유가 직접적인 원인인 인이 되고, 발효과정이나 발효에 들어가는 간접적인 모든 조건들이 연이 되는 것이다. 우유만 있어도 발효라는 연이 있지 않으면 치즈를 만들 수 없고, 발효라는 연의 조건이 있더라도 우유라는 인이 없으면 치즈라는 과를 가져올 수 없으므로 인과 연은 어느 하나가 빠지더라도 과를 생성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로 물의 순환을 들 수 있는데, 물이라는 것이 인연 따라 여름철 장마를 만나면 비로도 내렸다가, 겨울에 추운 조건이 형성되면 눈으로도 내리고, 또 때로는 우박으로도 내린다. 특정하게 물이 어떤 실체가 있었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물 또한 실체 없이 다만 인연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대지 위를 내린 비는 산과 숲을 만나 인연 따라 나무의 수액도 되었다가,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피나 땀이 되기도 하고, 지하수도 되었다가, 호수나 계곡물로도 되고, 나아가 강이나 바다로도 흘러든다. 또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면 수증기로도 증발하고 다시금 하늘에 구름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름이 다시 인연을 만나면 비나 우박이나 눈 등으로 다시 쏟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인연 따라 물은 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이름도 비, 눈, 우박, 서리, 이슬, 구름, 수증기, 수액, 피, 땀, 강, 바다, 계곡물 등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바뀐다. 이처럼 물이라는 근본 원인(因)이 어떤 조건, 어떤 연(緣)을 만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돌고 돌며 순환한다.
물론 그 물이라는 분자 또한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로 나뉘면서 변화해 가고, 수소나 산소 또한 그것을 쪼개면 원자핵과 전자로 나뉘는 등 어떤 실체적인 것 없이 끊임없이 인연따라 변화해 갈 뿐인 것이다. 이처럼 그 모든 것은 인연화합의 이치를 따르며 변화해 간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바뀌어 갈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고, 공이며, 무상이고, 그 모든 것을 연기 혹은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공이며, 무아이고, 무상이며, 연기이다.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도 마찬가지고, 존재의 생주이멸(生住異滅)도 마찬가지이며,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다만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해 생성되고 머물며 변해가고 소멸되는 단계를 밟고 있는 것이다.
작게는 나라는 존재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인과 그 두 분의 사랑, 결혼 등이라는 연에 의해 생겨나고, 또 다시 수많은 사람들과 우주적인 도움을 받아 인연 따라 성장하고 늙어 가다가 죽는 것이며, 모든 존재의 생주이멸도 그러하고, 우주의 성주괴공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별의 탄생이라는 것도 독자적으로 어느 순간 탄생된 것이 아니라, 별과 별 사이의 성간물질이라고 하는 ‘인’이, 빛과 탄소와 그로인한 수축 등의 다양한 ‘연’을 만나면서 빛을 발하고 핵융합 반응을 하면서 인연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별들은 만들어졌다가 머무는 단계를 거친 뒤에는 어김없이 핵융합 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쓰게 되어 소멸될 수밖에 없다.
태양만 보더라도 과학에서는 현재 50억 년 정도 핵융합 반응을 통해 성주(成住)의 과정을 거쳤고, 앞으로 50억 년 쯤 후가 되면 수소 핵융합 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소모하게 되어 태양의 일생도 괴공(壞空)의 단계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처럼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생성된 것들은 크든 작든 모두가 인연화합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다. 누군가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우연처럼 생겨난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인과 연의 화합에 따라 만들어지고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본래 텅 비어 있는 공이었지만, 인과 연을 만나면 생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의심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어떻게 인과 연을 만난다고 해서 결과를 발생케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이지만, 무이지만, 인연을 만나면 결과를 이룬다는 이 사실에 대해 단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비유로 불의 비유가 있다.
여기에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불[果]을 얻을 수 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무라는 인(因)에 힘을 가하여 비벼 주는 연(緣)으로 인해 결과인 불[과(果)]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이 만들어 진 것은 나무 때문만도 아니고, 공기 때문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 때문만도 아니다. 다만 나무와 공기와 손, 그리고 습도며 주변여건 일체가 인연 화합하여 모일 때에만 불이란 결과를 생(生)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젖은 나무를 아무리 비벼도 불을 얻을 수 없으며, 공기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나무를 비벼도 불을 얻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된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여 인연소멸(消滅)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의 비유는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 이와 같이 인연 따라 만들어지고 인연 따라 소멸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의 탄생에 대해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를 가지고 논쟁하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인연론, 연기론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소멸된다는 이치이다. 불이라는 것은 본래 어디에도 없었다. 손에도, 공기 중에도, 나무 안에도 불은 없었지만, 그 모든 인과 연의 조건이 화합하는 순간 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불이 창조되었다거나 진화되었다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났을 뿐이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다만 인연이 모이면 생성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인연법,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생성과 소멸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유(有)는 원래 스스로 무(無)인데, 인연의 이룬 바이다’라고 했다. 본래부터 존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모든 것이 텅 빈 무이며, 공이었고, 무아였지만, 다만 인연이 화합하는 순간 인연따라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體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고 하여 일체의 모든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것들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하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본래의 모습은 텅 비어 있는 공이지만, 다만 인연의 화합으로 인해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이러한 인연법은 존재와 사물의 생멸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삶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아무리 태어나면서부터 부자로 태어나는 ‘인’을 부여 받았더라도 모두가 다 성공하고 그 부유함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고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인’을 부여받았더라도 스스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며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의 연을 쌓는다면 오히려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더욱 좋은 연들을 많이 만날 수도 있지만, 좋지 않은 연들을 만남으로써 실패를 맛보게 될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똑같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혹은 더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남보다 더 못살고, 더 잘 살지 못했을 때 세상을 원망하고 부처를 원망하며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인연법이라는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 탓이다.
인연법에서는 똑같이 시험 성적을 90점 맞았다고 그 90점을 맞은 사람들이 똑같이 잘 살며, 똑같은 부유함을 유지하며, 똑같이 대학에 합격하고, 똑같이 사회에서 상류층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시험 성적을 90점을 맞았다는 그 근본 원인인 ‘인’에 내 적성과 취향과 꿈,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조언 등 무수히 많은 ‘연’이 함께 화합함으로써 어떤 사람은 A라는 대학 a과에 진학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B라는 대학 b라는 과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며, 또 다른 많은 연들로 인해 두 사람의 인생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부를 잘 한 사람은 무조건 회사도 좋은 곳에 들어가고 잘 진급하며, 못 한 사람은 나쁜 회사에 들어가 진급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잘 한 사람은 공부만 한 대신 인간관계를 잘 못 지었지만, 공부를 못한 어떤 사람이 대신에 인간관계를 잘 지었다면 오히려 공부를 못 했던 사람이 또 다른 ‘연’으로 인해 진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연을 잘 지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든 내 삶에 있어 수많은 원인과 조건으로써 나의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맑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 사람들이 하나같이 인이 되고 연이 되어 내 삶의 아름다운 인연으로 성숙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A라는 근본 원인이 그대로 a라는 결과만을 똑같이 가져다 주는 곳이 아니다. 그 근본 원인에 또 다른 무수한 어떤 연이 화합되느냐에 따라 수많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오고, 똑같은 과목으로 공부를 했지만 저마다의 적성과 취향과 직업과 능력과 가치관이 다른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열심히만 살면 똑같이 성공해야 한다거나, 똑같이 노력했는데 왜 저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는가 생각한다거나, 저 사람은 이기적으로 사는데도 성공하고, 나는 이타적으로 살아도 실패를 맛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들이 단순하게 원인과 결과에 대한 단일적이고 일차원적인 결과만을 놓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인’과 ‘연’이라는 수많은 복잡다단한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연까지 전체적이게 연기적이게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A는 a가 되는데, 나에게는 왜 A가 c가 되느냐고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그 A라는 근본원인에 타인과 내가 어떤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연들에 대한 차이가 있었는가를 잘 살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A라는 원인을 지었어도 선업이 많고, 복이 많으며, 인간관계에서 선한 인연을 많이 심어 놓은 사람의 결과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