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명 |
학과 또는 학교수 |
재적학생수 |
교원수 |
직원수 |
1. 진흥유치원
2. 효열국민학교
3. 선인중학교
4. 인화여자중학교
5. 선화여자중학교
6. 선인고등학교
7. 인화여자고등학교
8.선화여자상업고등학교
9. 운봉공업고등학교
10.운산기계공업고등학교
11. 항도실업고등학교
12. 인천체육고등학교
13. 인천전문대학
14. 인천대학교
15. 인천대 대학원
16. 인천대 교육대학원
17. 법인 |
4학급
30학급
45학급
45학급
45학급
36학급
30학급
54학급 (상과, 회계, 무역, 정보처리) 45학급 (전기, 전자, 건축, 토목) 45학급(기계과)
30학급 (전자, 통신, 상업과) 22학급
34개 학부, 25개 학과
6개 대학, 31개 학과
석사 13개, 박사 3개 학과
석사 16개 전공과정
|
126
1,329
2,365
2,366
2,324
1,744
1,483
1,725
2,266
2,247
1,480
653
7,827
8,316
86
154
|
4
32
74
74
74
70
59
104
94
97
64
45
144(31)
176(48)
|
1
4
6
6
6
7
6
6
7
6
7
5
82
101
23
|
계 |
|
36,441 |
1,111(79) |
273 |
2) 선인학원의 설립과정과 운영
도화동에 성광중학교와 성광고등학교가 개교하면서 성광학원이 탄생하였으나, 6.25이후 심각한 운영난을 겪으면서 1958년 7월 백인엽씨가 이 학원을 인수하여 선인학원을 설립하였다. 선인학원으로 재단 명칭이 바뀌고, 이때부터 재단산하 학교의 명칭이 백인엽씨의 형제 및 가족의 이름으로 붙여진다.그의 형 선엽씨와 자신의 이름인 인엽의 이름을 따서 ‘선인학원’으로 한 것은 물론, 형의 호인 ‘운산’, 자신의 호인 ‘운봉’, 어머니의 이름인 ‘효열’, 아들의 이름인‘진흥’등이 각 학교의 교명이 된다.
선인학원은 확장과정에서 군사정권의 보호아래 인근 주민들의 재산권을 불법적으로 침해하는가 하면 치외법권적인 횡포를 자행함으로서 지역사회 주민들의 원성이 매우 높았다. 공사 진행과정에서 갖가지 명분으로 학생들이 동원되었으며, 교사와 직원 중 벽돌지게를 져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고 매를 얻어 맞은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학교 부지의 확장을 위해 도화동 언덕위에 있던 중국인들의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려 한.중 양국간의 심각한 외교문제를 일으킨 일은 유명하다. 또한 인근 주택이나 대지를 매입하는 하는 과정에서도 믿기 어려운 일들이 하도 일어나 당시 신문에 보도 된 것만 보아도 주택가의 길에 철근 등의 건축자재를 쌓아 놓아 통행을 할 수 없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 간이 변소를 만들고 공사를 핑계로 수도를 끊어 주민들을 괴롭히면서 주변 부지를 헐값에 매입하였다. 그래도 팔지 않는 집이 있으면 불도저로 흙을 높이 쌓아 집을 보이지 않게 고립시키기도 하는 등 극도로 악랄하여 당시 지역 주민들은 그를 ‘인천의 무법자’라 하였다. 또한 교사들에게 ‘내 학교는 내가 지킨다’는 미명 아래 교대로 예비군복을 입혀 교문앞에 보초를 서게 하거나 순시를 돌게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인학원의 양적 팽창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은 어마어마한 규모로 이루어진 조직적인 부정입학과 편입학, 그리고 졸업장 판매 행위였다. 선인학원 각급학교의 경우에 정원이나 입학 절차 등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전혀 학교를 다녀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일정 수준의 기부금만 내면 어엿한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선인학원은 성장을 거듭하여 16개 교육기관<자료1.>을 거느리는 거대 학원으로 탄생하게 된다.
백인엽씨가 선인학원을 개인의 소유물로 인식하여 파행적이고 독단적인 학원 운영으로 교직원들은 물론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샀으나, 모든 재단 운영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고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재단 내에서는 존재하였으며, 모든 구성원들이 그의 뜻에 따라 움직였고 그에 반하는 교직원들은 선인학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사는 어느 사이 다른 학교로 옮겨가고 교사가 수시로 바뀌는 상황 속에서 학생들의 피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매년 한 학교당 수십 명에 달하는 교직원들이 며칠이나 몇 달 근무 후에 선인학원에서 다른 학교로 이동하거나 교단을 떠날 정도로 선인학원의 근무조건은 열악하였으며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선인학원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떠날 수 있는 기회만 있으면 미련없이 떠나 선인학원내 교원현황은 경력있는 교사보다는 대부분 젊은 교사들로 구성되고, 호봉이 낮아 교직원들의 인건비를 절감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선인학원은 ‘교원 양성소’라고 하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또한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5~13층에 이르는 웅장한 건물이지만 내부 시설은 형편없고 시멘트로 마감한 교실과 복도바닥에서는 항상 시멘트 먼지가 일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은 몇 학교가 겨우 하나를 나누어 쓰는 형편으로 교육과정상의 체육 수업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힘들었던 것은 높은 건물에 실내 화장실이 없어 쉬는 시간마다 학생들이 건물 외부에 설치되어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하여 경주하듯 뛰어다녀야만 했고 수도시설도 되어 있지 않아 먹을 물과 청소할 물을 구하려면 역시 아래층 몇 개 안되는 수도꼭지에 줄을 서야 했다.
3) 선인학원의 국가 헌납과 복귀 시도
이렇듯 전근대적으로 온갖 부정과 부패로 운영되었던 선인학원에 대하여 어느 기관이든지 감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결국 5공화국이 출범한 81년에야 선인학원에 대한 감사기 이루어져 그 결과 79년 1월부터 81년 3월까지의 사이에만도 부정입학 및 편입학한 학생 총수는 9,900명, 거두어 들인 기부금 총액은 당시 금액으로 61억원에 이르렀다니, 그 동안 계속되어온 부정 입학 등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감사를 하게 된 것은 80년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민주화의 열기를 짓 밝고 권력을 장악한 5공화국은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을 갖고 5.16군사정권이 한 것처럼 사회 정화작업의 일환이라며, 교육비리 척결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81년 1월에 문교부는 그 동안 사회적인 지탄 대상이었던 몇몇 사학 법인에 대한 감사에 착수하여 그 동안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던 숱한 부정과 비리의 실상이 벗겨진 것이다. 이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백인엽씨는 3월에 업무상횡령으로 밝혀진 재산11억원을 양도, 헌납하기로 서약하는 문서를 제출하고, 또한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헌납서를 제출한다. 또한 설립자가 이러한 갖가지 부정과 비리로 대검 수사부에 구속 기소되어 5년 징역이 선고된 후에 , 국가에 헌납된 선인학원에 관선이사가 파견되어 왜곡되어 있던 학내 문제점이 점차 개선되게 된다. 선인학원의 모든 재산과 운영이 국가에 헌납되고 그 학원의 운영은 관선 이사진이 맡았으니, 다음 단계의 당연한 순서는 선인학원의 모든 재산을 국고로 귀속시키고 산하의 각급 학교 중 인천대와 전문대는 국립대학으로, 초,중,고교는 공립학교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배경이나 실제의 내용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당시 문교부 장관은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국.공립화는 국가 재정 규모로 보아 두개의 국립대학을 신설 운영하기가 매우 어렵고, 특히 경기도의 재정 형편으로는 무려 14개교에 이르는 공립학교를 인수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백인엽씨는 81년 7월에 관선이사회의 이사로 선임되면서 또 다시 선인학원은 갈등과 혼란의 시기로 들어간다. 83년에 관선이사 체제에서 정이사체제로 전환되면서 국공립화의 길은 끝나고, 건전 사학으로 육성하겠다는 당시 신군부의 방침은 선인학원의 비리 척결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음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앞으로 끝없는 파란을 예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국가와 국민에게 속죄하는 뜻으로....국가에 헌납’한 선인학원의 처리가 국가와 국민을 함께 우롱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관선이사진이 물러나자 선인학원에 대한 문교부의 공식적인 처리 방침은 국.공립화 추진이 아닌 건전한 사학으로의 육성으로 바뀐다. 이와 함께 선인학원 각급 학교의 분위기는 급속으로 관선이사 이전의 체제로 환원되어진다. 인천대와 전문대에서는 백인엽씨의 측근 교수나 직원들이 대학 운영 전반에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백인엽씨의 재단 복귀는 시간 문제였다. 여러 가지 과정을 겨쳐서 86년 2월에 이사회에서 백인엽씨의 친형 백선엽씨가 이사로 영입되고 백씨 측근 인사 5인이 이사로 취임함으로서 선인학원은 실질적으로 백인엽씨에게 되돌려 진 것이다. 설립자의 추종세력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황 아래에서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고, 설립자 측근을 중심으로 하는 이사체제로 개편되어 실권이 설립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86년 새학기부터는 백인엽씨가 ‘건설본부 자문위원’이라는 직책을 걸고 실질적인 선인학원의 주인 행세를 시작한 것이다. 재단 사무국에 관련된 사항은 물론이거니와 각급학교 고유 업무에 속하는 사항에 관하여도 일일이 ‘보고’ 또는 ‘협의’하고, 그의 결재를 얻어야 하는 희한한 체제로 바뀐다.
4)학생들 부패와 비리, 전횡에 분노하다.
학생들이 선인학원의 전횡과 무단적 체제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은 오랜 군사정권의 체제하에서 억눌려 온 국민들이 자유와 민주를 외치며 싸웠던80년에서 시작된다. 운봉공고를 중심으로 사관생도의 복장을 딴 교복의 폐지, 두발 자유화 등 학교생활 전반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운봉공고,운산기공, 항도실고 학생들 1500영이 시위를 시작해 나중에는 1만여명이 참여하는 시위로 발전했으며, 전문대와 인천대에서 500여명이 모여 학원 자율화와 학생자치권 강화 등을 주장하며 철야 농성을 하였다. 그후 다시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의 서막은 1986년 10월에 시작된다. 50여명으로 시작된 시위가 7-800명으로 늘어나면서 이사장실과 학장실을 점거하는 농성체제를 갖춘다.
10월에 전문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불붙기 시작한 학원 정상화 투쟁은 날이 갈수록 학생수가 늘어난 가운데 조직적 체계적으로 전개된다.
재단 정상화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인천대와 전문대가 연합한 학생들은 성토대회, 결의대회등을 갖고 이사장실과 학장실 점거 농성을 계속한다.
재단측의 어용조직인 ‘호교회’활동과 지원, 86년 10월 21의 시위학생들에 대한 폭력사태는 급속히 사태를 악화시켜 인천대 전체 학생수가 5000여명이었는데, 그 중 3500여명이 시위에 참여하게 하는 급격한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백인엽 타도’‘학원 정상화’를 외치며, 학교 주요한 건물 모두가 학생들에게 점거되었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악화되자 백인엽은 학원운영에 간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의며, 이에 교수들이 나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 전체교수의 이름으로 교수 결의문을 발표하여 백인엽의 완전한 퇴진, 재단 이사진의 전면 개편 등을 요구한다. 이러한 가운데 문교부는 학내 사태와 관련하여 최초로 휴교령을 내린다. 휴교령이후 학교는 곧바로 사태가 수습되지 않고 계속 교수 징계와 학생 구속 등 후유증을 겪게 된다. 그리고 문교분 인천대, 전문대, 선인학원 전체에 대한 종합감사를 실시한다. 그 결과 학생들의 투쟁을 유발하게 했던 파행과 비리의 실상이 낱낱이 밝혀진다. 87년 1월에 이사회를 새로 구성하고 이사회가 설립자 백인엽으로 부터의 간섭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학교 발전 계획을 세워 추진하려 할때 문교부는 종합대학교로 승격시켜준다. 그러나 이런 이사회에 대한 조직적인방해가 지속되어 이사회가 다시 무력화되고, 88년 5월에는 새로 이사회를 구성하고 이 이사회는 서울에 ‘학교법인 선인학원 서울연락사무소 설치의결안’을 내어 서울에 사무실을 내고 백인엽씨가 실질적으로 재단 이사장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여 다시금 선인학원은 혼란과 파행이 시작된다.
5)인천대 교수협의회의 창립과 선인학원 교사협의회 설립 및 범선인학원 정상화 추진위회가 결성되다.
1988년 6월 항쟁과 더불어 사회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있을때 인천대내에서도 ‘교수협의회’결성 움직임이 나타난다. 1988년 9월에 김주익교수를 회장으로하는 ‘인천대 교수 협의회’가 출발함으로서 인천대의 발전에 또 다른 주체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재단은 이렇게 출발한 교수협의회를 나중에는 재단에 대항하는 가장 큰 걸림돌로 생각하여 교수들의 교협 탈퇴 공작과 징계 위협으로 한때는 40여명의 교수만이 남아 약속 어음 액면가 5천만원 짜리를 발행하며 결사 항전의 결의를 다지기도 하면서 정상화 투쟁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한편 87년 이후 소수의 젊은 교사들을 주축으로 일상적인 교내문제의 처리과정에서 관행화 되어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개선하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이미 고정화되어 있는 각종의 파행적인 학사운영 전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교육의 정상적인 운영을 주장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사들의 이런 활동을 보다 효율화하고, 침해받고 있는 교사들의 권익을 보호받기 위해서는 교사협의회와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갔다. 즉 산하 학교의 교육 정상화와 교권 수호를 위하여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정과 비리, 반교육적 관행을 거부하며, 불합리한 인사제도를 개선하고 교육환경 및 근무조건 개선을 추진함으로서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자는 노력의 일환으로 교사협의회의 결성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다.
재단과 각급 학교 관리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989년 3월 18일 200여명의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선인학원 교사협의회가 정식으로 결성되어, 거의 과반수에 가까운 많은 교사들이 가입하였다. 이는 선인학원내의 교사들이 그만큼 설립자의 전횡, 부정과 비리, 사학비리의 온상으로 교육현장의 모순과 각급 학교 관리자들의 횡포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학원 민주화를 바라는 열망이 교사들의 마음속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인권이 철저히 유린당하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개개인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까지 재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교사들의 권익 보호와 교육현장의 개선을 위하여 교사들이 단결하고 한 목소리를 내게 됨으로써 교사들의 힘을 재단에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1991년 초 선인학원 교사들은 설립자의 재단 재복귀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각급 학교 교사들의 공동대처 방안을 논의하게 된다.
실질적으로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설립자가 다시 복귀하게 되면 선인학원의 교육환경은 더욱 황폐해 지리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설립자의 재복귀를 우려하는 분위기가 교사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설립자의 재복귀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힘을 합쳐야만 난국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교사 협의체 구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각 학교 교사들이 협의하면서 대응해 나갈 것을 결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인천대학교와의 연대를 모색하게 되면서, 대학과 초중고 교사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재단 정상화의 당위성을 확인하고, 공동의 투쟁기구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여 ‘범 선인학원 정상화 추진위원회’(범선추)가 결성된다.
6)“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 시민 모임”이 결성되다
1992년 초 교수, 교사들에 대한 징계가 재단에 의하여 진행되면서 징계위원회에 불참하고 침묵 시위를 벌이는 등 강력한 저항을 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선인학원 시공립화의 결정적 계기를 조성해준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의 모임’이 결성된다. 교수, 교사들이 징계위원회에서 파면 처분을 받게 되면서 대량 해직사태에 직면하게 되자 인천 시민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목요회 중심으로한 인천지역의 종교계,법조계,의료계 등의 양심적 인사와 민주화를 위한 사회단체 중심으로 선인학원의 상황을 면밀히 점검하고 분석하고 있었다. 당시 시민사회단체들은 계양산 살리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는데 선인학원 문제가 곧 심각한 양상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특히 전교조 인천지부는 선인학원 사태의 진행 과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선인학원은 인천지역 사립 중․고등학교 재학생의 47.3%나 차지하는 엄청난 규모의 학원이므로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범선추에서는 선인학원 정상화 없이 인천교육의 발전은 불가능하며, 선인학원의 정상화 운동에 온 인천시민이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면서, 인천 지역사회의 관심과 개입을 직접적으로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92년 1월 중순 시민의 모임 준비위원들은 시민의 모임 발족을 위한 몇 가지 사항에 관해 의견을 조정하여, ‘선인학원 정상화의 방향은 인천시민 모두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국공립화 또는 시공립화로 설정하기로 합의’하고, 1992년 1월 20일 인천 중앙감리교회에서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의 모임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선인학원 정상화 없이는 인천교육의 질적 향상을 기대할 수 없고, 11년째 파행적 상태로 운영되어 인천교육의 암적인 요소인 선인학원을 정상화하기 위하여 인천시민 전체가 직접 발 벗고 나서서 관계당국에게 선인학원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시민운동을 전개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인천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호소하였다.
시민의 모임 발족을 계기로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은 인천 지역사회 전체의 문제로 부각되고, 시민운동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그리고 이 투쟁의 참여 범위도 시민의 모임을 중심으로 하여 선인학원 교직원은 물론 인천대, 전문대 학생들까지로 확대되었다. 시민의 모임이 결성 된 후 92년 2월 13일 도화동성당에서 ‘시민공청회’를 갖게된다. 인천지역의 각계인사 및 선인학원내 교수,교사,직원,학생 등 700여명이 참석한 이 공청회는 그후 ‘선인학원’의 정상화 투쟁의 새로운 장을 열게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에서 선인학원을 ①건전한 사학 경경자에게 인수하는 방안②인천시가 인수하여 시립화하는 방안③중,고등학교는 공립화하고, 대학교육기관은 국립화하는 등의 방안이 제시 된 것이다.
그 후에 시민모임은 10만인 서명운동과 시민결의대회,장석우 교수 해임에 따른 투쟁지원, 걷기대회, 공청회 등을 주도하며 인천시민의 여론과 전국적인 지지여론을 획득해 나가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나아가 선인학원의 백인엽씨에 의한 재장악 시도를 좌절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92년 4월 24일에 ‘선인학원 기금78억원이 백인엽에 건네 진 경위 및 선인학원 국가 헌납 과정에 관한 진상 보고서’의 발표와 선인학원의 부정 비리는 명백히 밝혀져야한다‘는 제하의 성명서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어느 교수의 참회 진술서의 발견이다. 교육부 종합감사가 마무리 되고, 관선 이사진의 쟁취를 위한 교내외의 투쟁이 절정을 이루고 있던 5월 8일, 정상화 투쟁관계자 뿐만아니라 양식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놀라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자료였다.1992년 4월 인천대생들의 백인엽 집 방문투쟁, 교육부 방문 투쟁등이 계속된다. 그런대 이러한 학생들의 투쟁에 재단은 5월1일자로 정성준 등 인천대 학생간부 5명과 전문대 2명을 전격 제적 조치한다. 이러한 조치는 학생들의 투쟁을 더욱 강화시켜 ’관선이사파견‘’선인학원 국.공립화‘를 요구하는 투쟁은 계속된다. 5월 25일부터는 인천대교수협의회와 범선추가 재단 이사장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철야 농성에 들어간다.
선인학원이 시립화되다
선인학원에 대한 교육부의 종합감사가 마무리 된지 50여일만인 1992년 6월 10일에 교육부는 선인학원의 임원(이사) 7명의 취임 승인을 취소하고 관선이사(임시이사) 9명의 파견을 발표한다.
인천대 교수협의회,시민의 모임, 교사 협의회 및 인천대 총학생회, 등은 즉시 관선이사의 파견을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93년 6월 인천대학교에 장학식총장이 취임하고, 학생들과 교사들의 투쟁은 계속된다.93년 2월에는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문민정부의 출범은 선인학원의 운명을 바꾸어 시립화로 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다. 문민정부의 출범은 두 가지 점에서 선인학원의 시립화, 공립화에 직접적이면서도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 하나는 문민정부의 출범에 따른 인사쇄신으로 정부 관계 부처 구석구석에 뿌리박고 있던 백인엽씨의 비호세력들이 대부분 물러나게 하고 강력한 개혁 정치의 추진으로 선인학원과 같은 비리재단이 더 이상 보호 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민정부의 초대 인천시장에 정부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최기선씨가 시장에 임명된 것이다. 최시장은 93년 4월 말경과 5월 11일에 인천대를 정식 방문한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통해 선인학원의 시립화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라고 선언한다.
이후 인천시에 선인학원 시립화 추진 기획단이 만들어지고, 14개 교육기관에 1,100명의 교직원과 3만2천여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소속된 재단의 시립화가 시작된다.
더욱 시립화를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백인엽씨의 78억 유출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기 수사가 진행되고, 백인엽씨에 대한 조사기 진행되기 시작 할 무렵 백인엽씨의 최기선 시장 앞으로 기증서가 보내져 온 것이다.
인천시는 ‘이미 1981. 3. 20 선인학원 설립자 백인엽이 이미 밝힌바 있는 학원 재단의 국가 헌납의사를 재확인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접수하고 시립화 내지 공립화가 원만히 추진되어 지역 정서가 안정되고 인천교육이 정상적으로 발전되어 사회 전체에 정의가 실천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면서 이를 접수한다. 그후 교육부의 설립자 변경에 의한 선인학원 시립화가 1994년 1월 15일 정식 승인됨에 따라 완전히 시립화 되기에 이른 것이다.
시공립화의 성공과 의미
최소한의 공교육적 기능을 갖추지 못한 사립학교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적 문제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전후한 때와 일치한다. 1950년대 이후부터 선인학원뿐 아니라 60년대, 70년대 지속적으로 대도시 중심으로 설립된 사립학교들 중 상당수가 교육을 영리목적화 하여 비리 부패의 온상이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학경영자들은 ‘영리’를 극대화하기 위해 교육기관을 철저히 사유화하여 족벌경영체제로 만들고 교사와 학생을 철저히 억압하면서, 교사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였다.
미래의 주인공인 2세 교육에 사명감을 갖고 헌신해야할 교수와 교사들을 한낱 족벌경영의 심부름꾼 정도로 취급하는 사학경영자들의 인식 태도는 당연히 교사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전교조로 대표되는 90년대 교육운동의 지향점 역시 이러한 ‘황폐화된 교육현실의 개선’에 있었다.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 열기의 분출과 민권의식의 성장 속에서 교사들 역시 ‘전교협’과 ‘전교조’로 이어지는 조직적인 교사교육운동의 계기를 맞게 되었는데, 그 주된 이슈는 ‘교육의 민주화’였고, 그 운동의 주된 인적 구성 역시 사립학교 정상화(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참여했던 교사들로 이루어졌다. 특히 인천은 어느 지역보다도 선인학원을 비롯한 ‘영리 사학’의 폐해가 컸던 지역으로 80년대 후반의 경인교사협의회와 전교조인천지부 결성에 참여했던 교사들 중 상당수가 사립학교 교사들이었다. 말하자면 ‘교육모리배’들에 의해 장악된 사학현실을 통해 우리 교육의 파탄을 심각히 체험한 교사들에 의해 80년대 후반부터의 조직적인 교육운동이 가능했고, 인천의 선인학원은 규모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사학정상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했다.
80년대 초부터 간헐적으로 전개되어 오던 선인학원 정상화운동이 92~93년 본격적으로 공립화를 목표로 전열을 가다듬어 더욱 강력히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80년대 후반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된 사학민주화운동의 커다란 흐름 속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학원내 초중고와 대학이 시공립화됨으로써 일단락된 선인학원 정상화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교수와 교사의 역량과 시민, 학생들의 역량이 총화된 결과였다. 즉, 선인학원이 백인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일부 정상화될 수 있었던 것은 선인학원정상화투쟁의 전후에 발생한 인천 사립학교민주화 투쟁을 통해 단련되고 결집된 교사와 시민, 학부모들의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인천지역에서는 당시 대경여상 정상화투쟁, 그 이전의 성헌고, 세일고 민주화투쟁, 명신여고․외국어고 사학민주화투쟁을 비롯하여 경인여상 기타 사립학교의 크고 작은 사학정상화투쟁이 꼬리를 물고 90년대 초로 이어졌고, 이러한 투쟁을 통해 많은 교사와 학생, 시민들이 비로소 조직화되기 시작했으며, 비록 당시 정세나 투쟁주체의 역량으로 볼 때 사학정상화투쟁이 개별학교 단위에서는 상당부분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좀더 본격적인 교사교육운동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숱한 교사들과 학생들이 타락한 사학재단과 교육모리배, 이와 결탁한 부패한 공권력에 맞서 신성한 교단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교육운동의 경험을 축적하게 되었고, 조직적으로 단련되기도 했으며, 또한 많은 주변의 교사들과 학생, 학부모들이 새롭게 교육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선인학원 정상화투쟁은 그때까지 인천의 이러한 사학정상화투쟁의 성과를 계승하고 총화한 구심점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의미에서도 90년대 초 사학정상화운동의 대미를 장식한 큰 성과였다.
1) 선인학원정상화 투쟁은 사립학교 정상화 투쟁의 바람직한 전형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 선인학원정상화 투쟁이 부분적으로나마 성과를 거두고 일단락 될 수 있었던 것은 학원 내 교육주체(교사, 대학생, 교수)와 시민사회가 일체가 되어 선인학원 문제를 크게 여론화하는 한편 내부 결속을 강화하면서 투쟁전열을 공고히 하고 학원정상화의 적절한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하였다.
백인엽씨와 선인학원에 대한 인천시민의 인식은 비난을 넘어서서 저주에 가까울 정도였고 그러면서 한편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는데,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여겨지던 선인학원이 공립화되어 백인엽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전 시민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백인엽씨는 단순한 악덕 사학경영자를 넘어서서 수십 년간 인천시민 위에 무소불위로 군림하던 제왕과 같은 존재였기에 그의 몰락은 그만큼 인천의 학부모 시민들에게는 교육외적인 ‘쾌감’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러한 선인학원이 백인엽씨의 손아귀에서 최종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줄기차게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을 이끌었던 교사와, 교수, 인천대 및 전문대 학생들 및 그를 뒤에서 지원한 교원단체, 시민단체의 힘에 의해 가능했다.
따라서 선인학원의 시공립화는 비록 학원의 완전한 정상화는 아니었지만 학원내 교육주체와 인천시민의 단결된 힘에 의해 가능했다는 점에서 사학정상화투쟁의 모범적 사례로 꼽을 만하고, 그만큼 지역민들의 관심이 높았던 만큼 선인학원이 백인엽씨의 간섭을 물리치고 민주적 방향으로 정상화됨으로써 지역민주화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선인학원 정상화의 결과 인천 교육이 정상화 되었다
선인학원이 시공립화됨으로써 인천 중등교육의 신뢰가 높아질 수 있었던 것은 백인엽씨에 의해 운영되던 선인학원 내 10개 중고등학교와 전문대학 및 대학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워낙 비판적이었고, 설립자와 그에 의해 운영되는 학원 자체가 지탄의 대상이었던데 따른 반작용의 측면이 있다. 선인학원이 시공립화됨으로써 과거의 파탄지경은 어느 정도 면할 수 있으리라는 시민들의 기대감은 당연한 것이었고, 선인학원의 10개교에 이르는 중고등학교가 공립화 됨으로써 선인학원의 이미지가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최소한의 공교육적 기능을 유지하는 교육기관으로 바뀔 수 있으리란 기대감 만으로도 선인학원의 시공립화는 인천 교육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을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공립화 이후 10개 중고등학교의 시설 개보수에 상당한 재정이 소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낙후되고 열악했던 시설, 여건으로 인해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었음에도 인천의 공립학교 중 여전히 가장 낙후되고 열악한 시설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 과거 선인학원에 속했던 중고교 및 대학의 현실이다. 이것만 보아도 과거 백인엽씨에 의해 운영되던 당시의 선인학원이 어떤 지경이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인천 시민의 울분과 고통, 회생을 딛고 성장했던,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 개인에게 종속되어 전횡과 부정과 비리가 만발하여 사악하기까지 했던 선인학원이 인천시민 모두의 것으로 된 것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이는 첫째 부정과 부패로 얼룩졌던 재단의 비리가 끊기고, 투명하고 깨끗하고 공정하게 운영될 수 있는 공립으로의 전환은 부정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인 것이다.
둘째 설립자의 왕국, 개인에 완전 종속되어 획일화되고, 비인간화되고, 폭력화되기 까지 하여 온갖 전횡만이 일삼아지던 체제에의 교육이 이제 인간화되고,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열린 교육을 해 나갈 수 있는 체제로의 변환이었다.
셋째 설립자 한 사람의 왕국이기에 여기 그 누구도 감히 참여 할 수없었던 체제에서 이제 인천 시민 모두가 참여해서 인천 시민이 함께 할 수 있는 체제로의 변화이다.
시립화 이후에 나타난 몇 가지 생각
-대학의 자주성과 자율성에 대하여
대학의 생명은 학문 자유와 대학의 자율성과 자주성에 있다. 선인학원 산하에서는 대학의 자율성과 자주성은 여지없이 짓밟혀 왔고 이에 대학의 발전은 정체되거나 때론 후퇴되기도 하였다. 시립화 된 이후 이제까지 인천시 정부가 설립자로서 대학총장의 임면권과 직원 임면권, 교수 임면권(부교수이상), 재정 편성권,학과 개폐권 등 많은 권한이 인천시정부에 있다. 이의 집행과정에서 때론 대학의 자존심과 자주성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이에 따라 대학의 시립화 과정에서 특수법인화 문제를 검토했지만 현행법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지금까지 인천시 직할기관으로 되어 있어 많은 부분에 있어 인천시정부의 지시와 행정 명령을 받고 있다. 최근엔 국립대학론도 나오고 하는데 많은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인천 시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정상화 투쟁과 시립화 과정에서 인천 시민 모임으로 대표되는 인천의 오피니언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참여 하여 선인학원의 시립화, 공립화에 정말 많은 공헌을 한 것은 모두 인정할 것이다. 시립화 이후에는 인천대학교 운영위원으로 일부 시민 대표들이 참여하고 하면서 94년도에는 인천대학교의 발전 방향에 대한 토론회에서 인천대학교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시민의 대학으로 발전해야한다고 주장하자 인천대학교 교수중에서는 이를 인천대에 대한 간섭과 인천 시민에 의한 또다른 지배가 아닌가 하여 반감을 갖는 교수님도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후 인천시민의 모임 관계자나 참여했던 여러 시민들은 자기의 관심과 원래의 시민운동으로 돌아가서 지금은 오히려 인천대의 이전 문제나 기타 인천대학이 지역사회에서 관심 가져주었으면 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큰 관심을 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지방에서 보면 지방의 국립대학 교수나 연구자들이 지역사회와 관련하여 환경 문제,교육문제, 교통문제 등 수 많은 각종의 문제들이 터져 나오는데 대하여 시민 사회와 긴밀하게 신속하게 대응하고 대안을 찾는 것을 볼 수 있다. 인천광역시는 우리나라의 세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환경,교통,물류,해양,교육 문제등 수없이 터져나오는 문제들에 대하여 시민사회가 모두 전문적이고 신속하게 해결하고 이를 위한 대안을 만들어 내는데 역부족이다. 이러한 때에 전문적 인력과 시설,이론 등을 갖추고 있는 인천대학교가 인천시민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이를 위한 참여와 노력이 인천대학교의 발전과 인천지역사회의 발전이 함께 할 수 있지 않을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인천역사에 한 장을 장식한 선인학원의 시립화를 기념하고 이 시립화 정신을 계승하고 생각하기 위하여 인천대학교 내에 시립화 기념관과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제안 드린다. 선인학원 당시의 자료와 정상화 투쟁 과정의 자료들을 모아 가칭 ‘인천대 발전사 기념관’이랄까.
선인학원의 시립화를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힘은 한 세대에 이르는 긴 시간을 걸쳐 일어난 것이다. 보다 좋은 환경과 바른 교육을 받고자 했던 3만여 학생들의 눈물겨운 투쟁의 결과이고, 최소한의 교육적 양심과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려했던 교수와 교사들의 투쟁이었음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