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은 왜 아들을 북한 땅에 묻었을까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북한 땅에 묻힌이유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과 소련 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사실(史實)둘째 날 아침 우리는 단둥(丹東)을 떠나 허커우(河口)에서 압록강의 두 번째 단교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을 보고 수풍댐까지 갔다. 이 지역은 옌볜에 비해 기후조건이 좋아 사과와 복숭아 등의 과일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단둥을 떠나 수풍댐 가는 길옆에는 과수원들이 펼쳐져 있었고, 재배한 과일들을 내다 파는 좌판들이 도로변 여러 군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 쪽 기후조건이 이렇다면, 강 건너 반대편인 북한의 평안북도 의주와 창성, 그리고 자강도 쪽도 살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기후조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전쟁 때 끊어진 압록강 위의 두 번째 단교가 허커우(河口)라는 곳에 있다. 허커우 단교도 단둥의 단교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졌다. 1950년 10월 이후 중국인민지원군 부대들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단둥, 허커우, 지안(集安)이었다고 한다. 허커우 다리가 끊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허커우 단교 위에는 한국전쟁 참전 지원군 지휘관들의 흉상이 도열해 있었다. 허커우 단교를 둘러보고 나서 우리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오안잉의 동상은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있는 펑더화이(彭德懷) 동상만큼 잘 조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오안잉 동상도 북중관계와 관련해 의미 있는 동상임에 틀림없었다. 이 동상은 2010년 참전 60주년을 기념해 세워졌다고 한다. 중국의 향후 동북아 전략과 관련해 중국이 북한을 어떻게 활용하려는 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정치적 상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상의 하단 뒷면에는 마오안잉(1922~1950)의 스토리가 적혀있었다.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공산당 중앙과 마오쩌둥 주석이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차원에서 북한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이 맨 먼저 중국인민지원군에 등록을 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인민지원군 제1호가 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는 설명도 함께 있었다. 마오안잉은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 지원군 사령부에서 러시아 통역을 맡으면서 사령관(펑더화이)의 비서로 일하다가, 참전한 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전사했다. 마오안잉은 아버지인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북한 땅에 묻혔다.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묘에 마오안잉은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차원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마오안잉은 전사했다. 일행 중 한 분이, 마오쩌둥은 며느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마오안잉을 북한 땅에 묻으라고 명령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마오쩌둥이 왜 그랬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결국 마오쩌둥의 심모원려(深謀遠慮)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즉 마오쩌둥이 깊이 궁리를 하고 멀리까지 내다 보았다는 것이다. 중국 최고지도자의 장남이 위기에 처한 북한을 도우러 왔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북한 땅에 묻혀있다. 북한은 중국에 크게 빚을 진 거다. 중국 사람들은 그 일로 북한에 생색을 낼 수도 있고, 목숨 받쳐 희생적으로 북한을 도왔으니, 북중관계는 특별하다고. 중국의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하다.미국 대통령 아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한국 땅에 묻혀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이 미국을 대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우방끼리도 도리는 있는 법이다. 중국이 조중우의를 강조하는 배경에 이런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마오안잉 동상을 직접 보고 더욱 실감하였다.
한국전쟁은 북한이 소련의 후원을 보장받고 시작한 전쟁이라는 것은 소련의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서 이미 오래 전에 확인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2010년 중국 당국이 세운 마오안잉의 동상에서 소련 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한국전쟁 초기 소련의 공군력 지원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소련사이의 막후 외교협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개시 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돌파하여(이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날 바로 중국은 내부적으로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한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미군이 동북3성까지 위협할 것을 우려하였다.그리하여 10월 1일, 밤을 새워가며 격론 끝에 10월 2일 '중국인민지원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은 참전 결정 사실을 스탈린에게 통보했다. 그리고 10월 8일 마오쩌둥은 '중국인민지원군 편성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스탈린에게 공군 지원을 간청하기 위해 그루지아의 휴양지 아브하지아로 떠났다.그런데 10월 19일까지 중국은 행동을 개시하지 못했다. 참전에 필요한 인원 차출이나 병참 준비관계로 행동개시가 늦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군력을 견제해줄 만한 화력이 중국에는 없는 반면, 소련이 지원 약속을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센터가 공개한 저우언라이문고(周恩來文稿)에 따르면, 저우언라이가 10월 14일에도 스탈린에게 소련 폭격기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때까지 소련은 중국의 속을 태우면서 답을 안 주었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스탈린으로부터 공군 지원 승낙이 떨어지자 10월 19일 비로소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펑더화이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 한국전쟁 참전 소련 공군 묘역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중국 당국이 마오안잉 동상에다 마오안잉이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폭사했다고 새겨 놓았으니 이것보다 더 확실한 소련 공군의 한국전쟁 직접 참전 증거가 어디 있을까?경위야 어찌 되었건, 단둥의 펑더화이 동상과 허커우의 마오안잉 동상이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1~2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중국이 G3, G2 국가로 급부상하는 가운데 북중간 경제협력이 재개되는 때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항미원조-조중혈맹을 강조하면서 중국이 북중관계를 주도적으로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