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산장학재단, 전북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만들 터
환히 웃는 성하익 초대 곤지중 교장.
성 교장은 “교육자는 학생들의 인성과 학습력을 기르고. 다양한 적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지도하는 능력 등 전문성 신장을 위해 연구하고 고민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꿈의 동산에 1000만원의 사비를 들여 학생들이 영원히 꿈을 잃지 않도록 세워진 교육탑
성 교장은 꿈의 동산에 1000만원의 사비를 들여 학생들이 영원히 꿈을 잃지 않도록 교육탑을 세웠다.
“아무리 학생들의 학력이 부진하고, 가정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학생과 함께 청소하고,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있어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완산칠봉을 정원 삼아 곤지산 끝자락에 자리잡은 곤지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한 성하익(62)교장.
성 교장은 2005년 3월 부임하자마자 학교주변 동민들의 시선이 매우 따갑다는 것을 실감했다.
인근 완산초등학교 학생수가 학년당 2학급에 그치고 있는 마당에 중학교를 세워 뭐하냐며 곤지중이 범죄의 온상이 되거나 쓸모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는 등 설립 당시부터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성 교장은 부임하자마자 학교는 그 지역사회의 문화 체육센터 역할을 해주어야한다는 신념으로 각종 체육시설을 비롯해 운동장, 강당, 주차장을 개방하는 등 동민들과 함께하는 교육행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운동장도 새벽 1시까지 전등을 켜주며 체력을 단련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는 등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했다.
‘어둠에서 밝음으로’라고나 할까. 인근 주민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교 앞 마을길을 청소하고, 폭우에 쓰레기가 넘치고 나무가 쓰러지자 달려들어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동사무소의 지원이 적극적이었다. 대보름 잔치라든가 노래자랑 등 동사무소에서 원할 때면 학교 개방을 해주었다.
동완산동지역은 불우한 이웃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꿈이 없는 학생들도 많은 편이다.
주변에는 결손가정, 생활보호대상자 등 열악한 환경에 있는 학생들이 22%에 달해 전주시내에서 가장 뒤떨어진 교육환경 지역 가운데 하나다.
전교생 400여명 가운데 90명의 학생이 전주시와 시교육청으로 부터 급식을 지원받고 있다.
“운명 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은 귀머거리였지만 후세에 ‘악성’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밀턴은 장님이었는데도 불후의 명작 ‘실락원’이라는 걸작을 남겼습니다. 신설된 학교이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은 마음을 바꾸어 생각하면 고통만큼 보람이 더욱 클 수도 있습니다”
성교장은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줄 방법을 찾다 ‘꿈의 동산’을 세우기로 맘먹었다.
그는 학교 현관에 학생들의 사진 옆에 꿈을 적고 좌우명을 기록하도록 하는 꿈의 현황판을 만들고 곧바로 전주시에 교육환경개선 사업비 지원을 요청, 발로 뛰는 학교경영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주시로부터 2000만원의 예산을 지원받았고, 이 예산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테레사 수녀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 3명의 조각상을 건립했다.
임병오 학교운영위원장(전주시의원)의 협조로 지자체와 동민, 학교가 삼위일체가 되어 일궈낸 가시적인 성과였다.
성 교장은 교육의 내실을 위해 양극화 교육도 도입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수월성교육으로, 생활이 어려운 학생은 용기를 잃지 않도록 사기를 북돋아 줬다.
그는 주변 청결을 중시한다. 그래서 언제보아도 학교 전체가 깨끗하다.
주변 정리정돈을 잘하는 것이 학습의 시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가 공자님께 공부의 시작은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공자님께서는 ‘공부의 시작은 비로 쓸고 걸레로 닦고 하는 것으로 청결함이 공부의 시작이다’는 이 말씀을 성교장은 항상 예로 든다.
성 교장이 직접 작사한 곤지중 교가
신설학교다 보니 모든 것이 갖춰지지 않아 불편한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육계 마당발로 통하는 그는 또다시 시청으로부터 1000만원을 지원받아 도서실의 부족한 책을 확보했고, 시교육청 지원으로 상담실을 비롯해 과학실, 협의회실, 특수학급교실, 학생부실, 체육교사 연구실, 심지어 계단 학생 안전시설까지 완료하고, 이번 휴가 때 시청으로부터 800만원을 지원받아 강당 바닥 리스 칠까지 보강 작업을 마쳤다.
성 교장이 교육계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67년 모교인 고창 해리초등학교에 발령받으면서 부터다.
이어 완주 고산초, 진안 안천중 등을 거쳐 전주 여상고에서 1994년 제1기 공채인 전문직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뒤 학생교육원과 전북교육연수원, 한별고 교감을 거쳐 함라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전문직 합격 후 학생교육원 교육연구사로 근무했던 1년을 잊지 못한다.
그는 젊은 시절, 유난히 산을 좋아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할 수 있고 자연이 너무 좋아서였다.
교사생활을 떠나 학생과 함께 숙식을 같이하며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반성하는 수련기관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산을 좋아했던 그로서는 그곳이 낙원(樂園)이었다.
고창 선운 야영장에는 선운산이 있었고, 운봉 학생교육원 주위에는 아름답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봉우리의 산들이 널려있었다.
성교장은 전북교육평가의 권위자다
성 교장은 전북교육의 평가분야 권위자다.
중등전문직 공채 출제위원장 3회를 비롯해 전북중등공립하교 임용고사 출제위원장 3회,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총괄책임관 등 많은 출제에 참여해 노하우가 풍부하다.
성교장은 문제 출제시 민원이 발생하면 모든 것을 책임 져야 하기 때문에 손해보는 장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전북 평가 체제를 확립시켰다’는 점에서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성 교장은 30대 후반의 나이에 주례를 서기도 했다.
당시 문제아였던 제자(당시 안천고 출신)가 성공해 고향으로 내려와 “선생님이 주례를 서주지 않으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서줬다.
맞기도 많이 맞았던 제자들이 ‘사랑의 매’로 알고 이해해 준 것을 회상하며 성교장은 고맙게 여기고 있다.
갈등을 풀어주는 해결사 역할도 그의 몫이다.
한별고 교감시절, 지금은 형제처럼 지내고 있지만 ‘학교가 무너져야 나라가 산다’. ‘생각을 바꿔야 학교가 산다‘ 등 30여권의 저술을 한 장세진 교사를 처음 만났다.
외롭게 편집실에 앉아 있는 장 교사와 대화를 많이 했고, 결국 마음적으로 소통이 되어 지금은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고 있다.
성교장은 학교 경영에 있어 교사들과 마음의 문을 열고 열린 사고로 대화하면 어떤 갈등도 해소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성 교장은 8월 하순 정든 교정을 떠난다.
1967년 교직에 첫발을 내디딘 뒤 40년 6개월간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오직 한길만을 걸어왔다.
맞벌이 부부교사였던 둘은 ‘못나고, 어렵고,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게 더욱 교육열을 발휘하자’ 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는 퇴임을 기념해 곤지중 꿈의 동산에 1000만원의 사비를 들여 학생들이 영원히 꿈을 잃지 않도록 교육탑을 세웠다.
앞면에는 ‘정직, 성실, 창의적 인재가 되어 세계를 무대로 큰 꿈을 이루자.’를 새겨 넣고 뒷면에는 성교장이 작사한 교가를 새겨 넣었다.
이복산 장학재단 설립자인 이형곤(좌)씨와 성 교장(우,이사장)을 중심으로 올해 장학금을 수여받은 학생들
그는 퇴직과 동시에 이복산(李福山)장학재단을 설립해 전북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만들 계획이다.
현재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이형곤(49세)씨로부터 3억원을 지원받아 전주시 교육청에 재단 설립 인가를 받고 있는 중이다.
선물, 옵션 투자회사를 경영하는 성교장의 큰아들(성필규)도 수익의 일부를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이복산장학재단 사무실도 전주시 덕진동 덕진공원 정문 앞에 만들었다.
성적 10%이내 학생 가운데 생활보호대상자 증명서, 재산세 등을 근거로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할 계획이다.
1회성이 아닌 대학교 진학까지 라이프스타일을 봐가며 지속적으로 지원할 작정이다.
올해 2000만원으로 이미 지급한 창립회원 20명 가운데는 환경이 좋은 학생도 있어 고민도 했지만 회원 자격으로 그대로 함께 갈 생각이다.
그는 “교육자는 사랑과 열정으로 제자들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자세가 갖추어져야 하고, 거기에 인성함양과 학습지도 능력, 다양한 적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지도하는 능력 등 전문성 신장을 위해 연구하고 고민하는 등 교사 스스로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면서 “학부모와 학생의 모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솔선수범하고 항상 미소로서 대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명예 퇴직한 김영숙(61)여사와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엄범희 기자